2025. 02. 10.
본 글은 2024년 10월 29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강수빈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Gang : 강수빈
LEE : 미술과 관련된 첫 번째 기억은 무엇인지, 미술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과정은 어땠는지 듣고 싶다.
Gang : 미술을 그림 그리기로 한정하면 미술학원에 대한 기억부터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학원을 여러 개 다녔다. 보통 영어나 미술, 피아노는 다 시키는 분위기였다. 우리집도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나를 집에 혼자 두기 걱정되셨는지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여러 학원에 다녔다. 그런데 음악에는 흥미가 없었고 미술을 유독 좋아했다. 어쨌든 미술을 참 좋아해서 피아노를 그만두고 미술학원만 다니게 되었다. 이후 초등학교 3~4학년 때 잠시 중단한 뒤에는 계속했다. 예술중학교나 예술고등학교를 가려고 준비했던 것도 아닌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엄마 회사 동료분의 가족이 홍익대학교 앞에서 운영하시던 입시 전문 학원이었다. 실제로 예고를 거치지 않고 미술 대학에 진학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미술이 무엇이고 작가는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을 작가로 활동하는 지금에서야 고민하는 거 같다. ‘만약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와 같은 질문도 너무 늦게 했다.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일찍 고민해 보고, 다른 선택지도 생각해 봤다면 더 풍부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현재의 나는, 작가가 자기 논리를 자유롭게 펼치고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다. 이게 내가 미술을 계속하는 이유이다.
LEE : 대학교와 대학원 때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Gang : 학부는 서울여자대학교 현대미술 전공이고, 대학원은 신조형 전공이다. 원래 서양화 전공이었는데 내가 입학할 즈음 현대미술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전통적인 매체뿐 아니라 다매체를 지향하면서 당시에 커리큘럼도 바뀌었다고 들었다. 신조형 전공은 서양화 전공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매체 실험을 배웠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LEE : 대학원 진학 뒤 정말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 것인가?
Gang : 대학교 4학년 때 취업해야 할지 미술을 계속할지 진로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교수님께서 면담 때 10년 이상 해왔으니 다른 영역보다 미술에 전문성을 갖췄으며, 다른 일을 하려면 그만큼 시간을 또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2년만 더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교수님 어시스턴트를 1년 정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작가로 활동하는 교수님의 모습뿐 아니라 선배들도 보게 되었다. 작업에 대해, 미술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고 작업해야겠다,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4 동시대 미술 현장전 <사라졌다 나타나는> 설치 전경 촬영=이문정
LEE : 강수빈 작가의 작업을 제대로 처음 본 것은 경기도미술관의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전시 《사라졌다 나타나는》에서였다. 전체 기획이나 공간 구성이 인상적이었던 전시였다. 강수빈의 작업은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후반부까지 큰 흐름을 따라 이어졌다. 영상과 설치 작품이었는데 거울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미지의 반영이 일어났고, 나의 모습을 비쳐 봤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구조를 보게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Gang : 나는 석사 때부터 모니터 안의 세게, 디지털이나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대비를 고민해 왔고 석사학위 청구전에 관련된 결과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일상적으로 보는 것들이 다 핸드폰 안에서 이뤄지다 보니까 이런 관심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거였다. 모니터 안과 밖의 관계 속에서 받게 되는 영향은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에 내가 스위스에 다녀왔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피르스트(First)에 올랐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던 스위스의 전형적인 예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예쁘긴 한데 새롭거나 놀랍거나 하지 않았다. 진부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이런 것도 가상의 세계,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의 영향이다. 어쨌든 물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세계와 내가 실제로 머무르는 현실의 차이를 계속 생각하다 보니 거울로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거울을 기능적인 재료로 도입했다. 공간에 기호와 언어를 서로 반대되게 배치하고 그 둘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 거울 설치물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한 면은 이미지를 비추고 다른 면은 언어를 비추는 거울인 거다. 나에겐 그 자체가 화면-스크린처럼 다가왔다. 전시장에서는 관객들이 그것을 계속 바라보고 그 옆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모습도 비추고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 자체로도 화면이 된다. 그래서 2022년부터 적극적으로, 거울을 화면으로 보고 디지털 내의 소통 방식과 대비되는 물질이라 설정했다. 예를 들어 사진이나 언어가 의미를 고정하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의식해 왔고, 거부감이 있었는데, 거울 속 이미지는 어떤 순간도 고정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매 순간만을 보게 하니 모니터 속 이미지와 대비되는 지점이 있었다.
LEE : 언어로 표현할 때는 모니터 안의 형상이나 거울에 비친 형상 모두 똑같이 이미지이지만 그 속성은 확실히 다르다. 거울 속 이미지는 실재하는 물질적인 무언가가 반영된다는 점이 큰 차이인 것 같다. 그런데 모든 거울 설치물을 다 작가가 직접 자르고 만들 수는 없을 텐데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가?
Gang : 작품마다 다른데 내가 직접 자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격을 정해서 의뢰하면 업체에서 잘라준다. 거울에도 종류가 많아서 두께와 무게가 다 다르다. 아크릴 거울은 가볍고 얇아서 휘기도 하고 다루기 쉽지만, 선명도가 좋지 않아 상이 왜곡될 확률이 높다. 유리 거울은 선명하고 정말 작은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보인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유리 거울 위주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상황에 맞게 선택하고 있다. 전시 《사라졌다 나타나는》에서는 전부 아크릴 거울을 사용했다. 아크릴 거울로 바꾸면서 작품 자체가 조금 더 잘 보이게 되었다. 거울에 반영되는 상이 흐려져서 그런 것 같다. 예상 밖의 효과가 나왔다. 거울도 다 같은 거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LEE : 유리는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관리가 힘들다고 여겨지는데 작품 제작, 전시, 보관 중에 힘든 점은 없었는가?
Gang : 때로는 제작하는 중에 파손되기도 한다. 전시 임박해서 설치하다 작품이 파손된 적도 있는데, 당시에 정말 힘들었다. 전시 기간에는 여러 일들이 있었다. 아이가 작품에 뛰어 올라간 적도 있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는데, 작품 파손이 컸다. 이후 관객의 안전과 작품 보호 모두에 신경 쓰게 되었다. 작품이 어떤 상황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잘 고정될 수 있게 제작, 설치하고, 거울을 끼울 틀-프레임을 만들기도 한다. 다만 작가가 일차적으로 여러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게 맞지만, 관객들도 작품을 아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2021년부터 사용했으니 만 3년이 되었는데 올해는 재료가 가진 현실적인 난점 때문에 거울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의미적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거울이라는 물질성에 함몰되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꾸준히 주목하는 ‘화면과도 같은 거울’이라는 의미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당장 내일 그만둘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거울 속에 있는 움직이는 상을 어떻게 잘 보여줄까’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거울을 통해 작업의 개념을 더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마 스스로 마무리지을 수 있는 지점이 오면 그때 다른 재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LEE : 신진 작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세 번의 개인전을 진행했다.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첫 전시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줘도 좋을 것 같다.
Gang : 석사학위 청구전 직후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되었다. 석사 논문은 완성하기도 전이다. 사실 그때 미술 현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레지던시에 입주한 다른 작가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미술의 영역이 훨씬 넓고 실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학생 때, 공부하면서 작업했을 때는 작품을 보는 눈이 편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첫 활동으로 레지던시 입주를 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이후 같이 입시를 준비했던 친구와 2인전을 기획해 첫 전시를 열게 되었다. 특이하게 같은 해에 2인전을 세 차례나 했는데 내가 쓰는 재료의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지원사업인 ‘아트코리아랩 수퍼 테스트베드’에도 선정되어 기술적인 교육도 받고 창작 지원도 받았다. 또 ‘파라다이스 아트랩’의 신진 작가를 위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무것도 모르던 완전 신진을 벗어나, 이제야 내 상황에 대해 객관화하면서 바라보게 되었다. 교류 없이 내 생각에만 몰두해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만의 세상에 함몰되기 쉬운 상태에 놓이는 것 같다. 그 부분을 경계하며 작업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매일의 가장 가운데(작업 일지)> 2023 / <매일의 가장 가운데> 10x12x120cm, 유리거울, 2023, 2024 동시대 미술 현장전 《사라졌다 나타나는》 설치 전경 ⓒ경기도미술관, 도판 제공=강수빈
LEE : <매일의 가장 가운데>(2023), <완벽한 가운데로 향하는 여정>(2023)은 작가가 앞서서 말했던 것처럼 작품이란 작가만의 논리와 개념을 설정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거울의 뒷부분-텡(tain) 벗겨내거나 거울을 자른다. 보면서 “왜 원일까?” 이런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작가는 저 행위를 왜 하는 것일까?”란 질문을 반복했었다.
Gang : 거울에 대한 내 생각의 흐름과 연결된다. 앞서 말했든 처음에는 기능적으로만 썼다가 다음에는 ‘모니터에서 나타나는 오류 화면을 실시간으로 재현해 보면 어떨까’란 생각을 담기도 했다. 그리고 <작동하는 신체>(2023)처럼 작품이 전시장에 설치된 뒤에는 관객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 움직이고,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또 움직이고 하는 상황이 내게 많은 자극이 되었다. 내가 현실의 감각을 조금 북돋우는 장치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중 실재와 가상, 허상에 관한 이론서들을 읽게 되었는데 작업을 통해 내가 수립한 것들과 정말 다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조금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미리 이론들을 살펴봐야 했을까?’란 의심과 ‘나는 나대로 생각을 확립하고 전개하면 된다’는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또 작업에서도 이런저런 씨름을 하다가 감정적으로도 긁히는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나는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틀릴 수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시작한 게 <매일의 가장 가운데>이다. 가운데를 맞춰 거울이라는 반사면을 지운다는 조건을 설정했지만 자를 사용하지 않고 감으로만 맞추는 행위를 한 건 다른 정량적인 도구 없이 순수하게 나로부터 표현된 것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그라미로 지워나간 건 모서리가 있는 다른 도형은 똑 떨어지는, 고정되는 부분이 강한데 동그라미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사각형이나 삼각형은 내가 조금만 어긋나거나 삐뚤어지면 그게 선명히 보인다.
<Untitled(curve)> 야외 설치, 90x180x40cm, 합판에 철판, 발포 잉크, 거울, 2022, 도판 제공=강수빈
LEE : 그럼에도 종이컵을 사용했다. <공주에서의 가운데>(2023)처럼 그냥 그릴 수도 있었다.
Gang : 그럼에도 틀리기 싫고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나중에 영상을 보면서 그 행위들을 돌이켜 보고, 그때의 작업 노트들도 봤는데 원을 그리고 종이컵을 치우는 순간 그것이 내가 최소한으로 기댈 무언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기댈 곳을 치운 뒤 나의 감을 키워가는 과정을 만들게 된 것 같다.
LEE : 졸업 이전의 작품도 웹사이트에 다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그중에서 <home sweet home>(2018)이 눈에 띄었다. 회화인데, 평면인 프레임 안에서나 전시 방식에서 3차원적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혹은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 같았다.
Gang : 학부 졸업 전시 때 작품인데 회화 자체에 대한 실험보다는 정말 내 집을 다룬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각자의 역할과 공간을 꽤 명확히 나누신다. 특히 공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는 부엌, 어머니는 거실이다. 그래서 두 분의, 집에서의 경로를 보고 싶었다.
<pressure-1>, 1채널 비디오, 1분 50초, 2017, 도판 제공=강수빈
LEE : <pressure> 시리즈(2017)의 경우, <pressure-1>은 달걀, <pressure-2>(2017)는 화면 가득한 인체, <pressure-3>(2017)은 쿠션이다. <pressure-2> 때문인지 말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압박을 받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pressure-1>의 달걀은 어떤 점에서 거울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Gang : 휴학했을 때인데, 당시에 미술이 사람들과 더 닿았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사회적인 메시지를 꽤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 내 작품을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행동주의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단체에 들어가 그곳에서 커뮤니티(community)적인 작업이나 도시에서의 활동을 기획하기도 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재미있고 의미 있기도 했다. 약 1년 반 뒤에 학교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러면서 고민이 더 많아졌다.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작업으로 나가야 하는지 방향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답이 쉽게 나오는 고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을 담은 작업이다. 다만 재료나 소재는 다양하게 쓰고 싶었다.
LEE : <불가피하게 미끄러진 기호화>(2021), <그래서 요점이...>(2021) 등의 작품에 단어나 문장이 등장하는데, 이럴 때 그 선택의 기준이 중요하다. 글자는 이미지뿐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로도 작동한다.
Gang : 대학원 재학 중에 매주 수업 시간에 지정된 책에 관한 발제를 해야 했는데, 발제를 하려면 한 문장 한 문장 정말 열심히 보고 이야기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곱씹게 되었다. 대충 보며 매 장이 다 똑같은 이야기 같은데 세부적인 예시나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미묘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모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만 공유된다면 사람들 간에 차이가 생길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중요한 요점이라 평가받는 것들이 오히려 진정성 있는 내용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점이...>는 전체가 하나의 글이라는 게 중요했고, 문단 문단이 명확히 보이는 게 중요했다. 주된 문장은 글자의 두께를 부풀려 알아보기 어려운 모양으로 시트지를 붙였고,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세부적인 문장들은 비물질인 이미지로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언어가 가진 획일화되고 단순한 의미 전달의 기능을 없애고 싶어서 알아보기 힘들게 설치했다.
<그래서 요점이...(The point is that...)>, 텍스트 시트 커팅, 증강현실, 아이패드, 1166x290cm, 2021, 도판 제공=강수빈
LEE : 평상시에 작업을 위해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읽거나 분석하곤 하는가?
Gang : 그렇진 않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텍스트나 이미 알고 있는 텍스트들을 활용한다. 이와 별개로 작업을 위해 텍스트를 충분히 읽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있다. 뉴스나 특정한 상황이나 현상을 보고 메모를 적고, 문뜩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렸을 때 소설에 흥미를 갖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소설을 많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사가 있는 상상의 이야기가 작업할 때 시야를 넓혀 준다는 걸 다른 작가님들과 교류하면서 알게 되었다. 많은 분이 문학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시인이든 소설가든 그 단어를 적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생각하면 맞는 이야기다.
LEE : <OO 추첨기>(2021)는 어떤 작품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작가 웹사이트에 업로드된 작품 중에 조금 튀는 것 같다.
Gang : 대구예술발전소에 있을 때 대구근대역사관과 협업 전시 《모던 타임즈(Modern Times)》(2021)에 참여했다. 박물관의 유물을 토대로 작품을 제작해야 했다. 대구근대역사관에 있던 추첨기는 초등학교 입학 추첨기였는데, 나는 추첨기의 겉모습은 똑같이 만들면서 기능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전이나 초코볼이 나오는 것으로 바꿨다.
<가상의 사과>, 시트인쇄, 가변 설치, 2021, 도판 제공=강수빈
LEE : <가상의 사과>(2021) 같은 경우 실체와 평면, 그리고 형상의 왜곡 그것의 재현 등을 떠올리게 한다. 꽤 직관적으로 다가오는데 이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2021년 설치 장면을 보면 사과가 들어가 있는 골대와 이어져 있다.
Gang : 맞다. 당시가 코로나19 팬데믹 때여서 더 디지털과 가상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아직 현실에 무게를 더 두고 있는데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디지털로 모든 걸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그래서 나는 실제적인 세상에 더 집중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농구 골대는 <골(GOAL)>(2021)이란 작품이다. 사과는 모델링(modelling)한 뒤에 블렌더(Blender)라는 프로그램으로 매핑(mapping)했다. 당시 블렌더를 연습하는 중이었는데 매핑을 위해서는 사과의 모든 면에 맞는 사진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사과가 만들어진다. 지금은 어느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냥 디지털로 쓱싹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진의 이미지가 있어야 했다. 나는 이게 너무 비효율적이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지털상에 존재하는 사과를 프린트해서 꺼내고, 실재하는 사과를 골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있는 현실적인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흐르는 장면들> 가변 설치, 아크릴 거울, 알루미늄 액자, 고무줄, 2024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 도판 제공=강수빈
LEE : 그렇다면 결국 강수빈은 가상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실재하는 세계의 가치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가?
Gang : 그럴 수도 있다. 변주되긴 했지만, 거울도 그런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더 비중을 둔다고 확언하긴 어렵다. 현실에 관심을 두면, 그만큼 그 반대 지점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가상의 세계에 대한 약간의 비판적 불신 같은 게 있긴 하다. 진짜 같고 우리 삶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주장에 반대하기 어렵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나는 어떤 조건과 한계가 존재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계속 겪게 되니, 그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다. 완벽히 들어맞는 예인지 잘 모르겠는데, 보통 한여름에 전기료를 낼 수 있으면 집에서 얼마든지 에어컨을 최대로 시원하게 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일정 시간 이상 과하게 틀면 바람이 미지근해진다. 무한한 게 아니라고 자각되는 순간들, 진짜를 압도한다고 믿었지만, 진짜에 기대야만 만들어지는 세계, 가상 세계의 결과물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손의 노동이 있어야 하는 작품처럼 한계와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 등을 작업으로 보여주고 싶다.
LEE : 작업에 대해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Gang : 작가로서 삶을 놓고 보면 아직 초반이어서 더 자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내 작업이 <매일의 가장 가운데> 같다. 계속 무언가를 ‘짠!’하고 내놓는데 약간 부족한 것 같고 그런데 또 그것에 이어지는 다른 점을 만들고, 그것들이 이어져 작업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계속 실패하거나 조금 부족한 결과물을 내고, 그다음에 또 새로운 것을 만들고 그런 흐름이 모이면 내 작업의 주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이 역시 앞서 말한 조건과 한계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