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16.

이경미 <New vertical painting> 2016~2019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압도적인 이미지가 휘몰아치듯 쏟아져 들어온다. 빛을 마주 본 듯 눈앞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혼란스럽다. 강렬함이라는 인상만 채워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눈에 맺힌 이미지들을 나열해본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묵시록 Apocalypse>(1498)이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다.

[THEN & NOW ; New Vertical Painting- Durer’s Apocalypse] 개인전 설치 전경, 갤러리 세줄, 서울, 2019 ⓒ이경미

이경미는 <New vertical painting>(2016~2019)에서 요한계시록(the Book of Revelations)을 주제로 한 뒤러의 판화 작품인 <묵시록>을 차용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안과 공포, 의심, 급격한 변화와 전환의 징후들이 담긴 이 작품에서 뒤러는 상징과 비유를 통해 믿음과 종말의 의미를 전달했고, 기독교 미학의 이념과 르네상스 미학을 종합했다.¹⁾ 그리고 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경미에 의해 각색, 재현된 작업에는 작가가 <묵시록>에서 전달받은 강렬한 에너지를 시작으로 그 종착지를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더해졌다. 어떤 작품이든 시대적 의미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은 시대와 호흡한다. 여기에는 작품은 그것이 제작될 당시의 시대가 담기며, 하나의 작품은 시대에 따라 해석과 가치 부여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 포함된다. 뒤러의 작품을 마주한 이경미는 지금을 사는 작가의 눈으로 뒤러를 이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작품을 완성했다.

<Four angels holding back the winds, and the marking of the elect> Oil on canvas & Constructed birch panel, 121x156x8cm, 2016~2019 ⓒ이경미

<New vertical painting>에는 이경미의 <Street>, <Windows>, <Box & Planet> 시리즈 등이 그랬듯 많은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전의 작업이 명확한 소실점을 향하는 통일된 시선의 흐름을 느끼게 했던 것과 달리 <New vertical painting>은 공간을 파악하기 어려운 화폭에 이미지들이 부유하듯 가득 그려졌다. 이는 이미지들의 층(layer)을 보다 뚜렷하게 인지하게 해주는 동시에 유목민적인 시간을 보냈던 작가의 삶을 반영한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 혼돈의 세상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술가들은 대상의 겉모습을 닮게 그리는 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인물화에는 모델의 정체성과 내면이 담겼고, 종교화와 역사화는 통일된 서사를 만들어냈다. 정물화 속의 사물들은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경미의 작업 역시 그렇다. 고양이와 천, 건물, 바다, 풍경 등은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상징이었다. 미술 작업이니 시각적인 부분도 중요하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해독해내는 일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New vertical painting>도 일정 부분에서 그렇다. 그런데 비논리적이지만 선형적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던 전작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사도 요한의 순교(The martyrdom of St. John)’에서부터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천사(The angel with the key of the bottomless pit)’에 이르는 <묵시록> 15점을 비롯해 고양이 나나(Nana), 상업 만화의 캐릭터와 글귀, 자동차와 꽃, 동물 등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찾아본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관계를 만들려 노력해 본다. 하지만 쉽지 않다. 무수한 차이의 지점을 발견할 뿐이다. 아마 작가가 미국과 독일에서 마주했던 이미지이며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장치라는 점 외에 그것들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려워서일 것이다. 아니면 각각의 이미지가 사회 속에서 소유한 고유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울림 못지않게 충돌이 일어나는 만남이다. 결국 코어(core)에 다가가려 할수록 미끄러진다.
이경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 아니 계획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고 권위가 실리는 것에 저항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통일성을 위해 다양성이 묻히거나 생략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작가다. ‘교조주의적인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경미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다른 해석을 전개할 수 있다.

<The opening of the seventh seal and the eagle crying 'WOE’>, Oil on canvas & Constructed birch panel, 121x156x8cm, 2016~2019 ⓒ이경미

전환점이 되는 작업.
<New vertical painting>은 여러 갈래로 꼬인 양가성의 무한 생성을 토대로 예술, 나아가 사회를 지배하고 구성원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강력한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틈새를 만들어낸다. 뒤러라는 천재적인 르네상스 미술가의 작품을 선택했다는 점, 판화를 그보다 주류로 여겨졌던 회화로 다시 그렸다는 점은 전통적인 서구 미술에서 이어졌던 규범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경미의 화폭에는 <묵시록>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경쾌하고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의 조각들은 정착하길 거부한 채 권위에 빈 공간을 만들고 엄숙함을 흐트러뜨린다.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장치²⁾는 해체되었다. 사라진 듯 사라지지 않은 프레임(frame) 역시 이런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서로 다른 세계 사이의 날 선 경계를 무뎌지게 한다.
명확한 한 곳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그림은 단일하고 명쾌한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백과사전형 작가라 칭하는 이경미 자신이 접한 정보, 지식의 홍수와 그로 인한 사유의 소용돌이가 시각화된 것이다. 그동안 이경미의 작업에서 개인사와 그것에 기반한 이야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이경미에게 작업은 현실을 응시함으로써 삶을 반추하고, 해소하여 작가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다. 첫인상을 놓고 보면 <New vertical painting>에는 이전의 작품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작가는 이전보다 자신의 삶에 일정 부분 거리 두기를 하며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한발 물러서자 더 많은,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The angel with the key of the bottomless pit> Oil on canvas & Constructed birch panel, 121x156x8cm, 2016~2019 ⓒ이경미

결과적으로 <New vertical painting>은 “백과사전의 위상이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체되고 누구나 정보를 구축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시대”³⁾,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고 보니 <New vertical painting>은 시각적으로도 수많은 하이퍼텍스트가 존재하는 온라인의 세계를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형태의 텍스트는 단일한 의미 생산보다 상호작용과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선형적 순차는 해체되었다. 이 시대의 회화. 그렇게 시작과 끝이 없이 중간만 존재하는 복선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다수의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특정한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으며 모두가 상호작용하는 작품, 고정된 시작점과 종착지가 없어 의미가 어떤 방향으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텍스트와 같은 그림, 의미의 생성이 한정되지 않는 비확정적인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⁴⁾ 종착지는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길 반복한다. 사유의 프레임은 끝없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