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0 / 2019.01.25 수정
수집과 창조 사이에 선 예술가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유영진은 특별한 시공간의 기억(과 그것의 흔적)을 붙잡는 작가다. 한 장소에서 긴 시간동안 촬영된 이미지들을 한 장의 사진에 모아놓은 <노웨어 Nowhere>(2012-present)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장소를 창조하고 소유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인화된 사진을 아세톤에 담근 뒤 붓으로 표면을 문질러 완성한 <더 웨더링 The Weathering>(2014-present)에는 만질 수 없는 이미지로 부유하는 우리 안의 -점점 아득해지는-기억들이 담겼다. 작가는 사진에서 추출한 가루와 사진을 촬영한 장소에서 수집한 폐기물을 결합해 오브제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라진 기억과 재창조된 기억이라는 상반된 내러티브를 동시에 담아낸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피그먼트 프린트, (each)100x70cm, 2018 ⓒ유영진
얼마 전부터 작가는 마치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택의 부속물들을 촬영하고 수집하게 되었다. 그가 폴리우레탄 폼, 파이프 같은 부속물들을 떼어낸 (다세대)주택들은 대부분 1970-1980년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부속물들은 주택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되고 분화된 결과이다. 작가는 부속물의 모습 그대로 혹은 (기억의)원형을 변조하여 도감을 만들었고 <캄브리아기 대폭발 Cambrian Explosion>(2018-present)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렇게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그렇듯-건축물은 특별한 시공간과 관계 맺는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흔적인 동시에 개인 삶의 흔적이다. 건축의 부속물 역시 그렇다. 따라서 유영진이 주택의 부속물을 채집하는 것은 그저 물리적 조각 하나를 떼어오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을 적극적으로 소유해야 한다. 기억은 이 세상을 새롭게 체험하도록 돕는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오늘날 볼 수 있는 주요 동물 집단들이 한꺼번에 진화되어 자기들만의 독특한 생김새를 갖게 된 동물 진화의 빅뱅과도 같은 기념비적인 사건을 말한다. 이 때 모든 생물 문(phylum)이 저마다의 복잡한 외형을 획득했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1) 유영진은 주택의 부속물들이 만들어져 주택의 형태에 다양성이 생기게 된 상황을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연결시켰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8 ⓒ유영진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위한 작가의 채집 행위는 주관적이고 감성적이다. 표본 수집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채집물들이 변형되거나 재창조될 경우에는 더욱 자유로운 인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르게 된다. 비논리적이고 주관적이어도 괜찮다. 어차피 그의 눈으로 본 세상이다. 작가는 이미 <노웨어>, <더 웨더링>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응시한 세상, 자신이 체험하고 기억한 장소를 담아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작가에 의해 진화된 드로잉 속 생물체들의 학명은 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의 이명법(Binomial nomenclature)의 규칙을 따랐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구성하는 오브제들만 분화된 변종이 아니라, 제작 방법 역시 통일성이 결여되고 경계를 넘나들어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 변종이다. 그 이유는 유영진의 도감이 동일성이나 대표성, 규칙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도감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주변과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고, 그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다름과 다양성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변화나 진화는 이전의 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된 유영진의 부속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특수한 시간, 장소, 규범과 의지 등에 반응, 소통하면서 자신의 특이성(singularity)을 끝없이 생성해나가는 세계(사회) 속 주체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예술가는 그렇게 우연히 마주한 작고 부수적인 사건들에도 반응하고 변화하며 가장 훌륭한 과거의 전망으로부터 일탈한다. 예술은 사회가 주체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을 일정 부분 허용한다. 예외가 규칙을 긍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예외는 이미 정해진 규칙을 바꾸거나 고칠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유영진이 작가의 사회적 역할과 분화하는 건물 부속물의 기능이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질성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동일성으로 흡수되거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과정적으로 활성화하는 방식은 예술가의 방식에 가깝다.2) 수많은 선학들이 기술했듯 완벽한 객관적 기준이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도 대다수라 불리는 사람들 혹은 권력을 작동시키는 누군가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예술가는 그러한 진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존재다. 세상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조가 아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8 ⓒ유영진
한편 작가에 의해 채집된 부속물들은 생(生)이 끝나버린 화석과 같다. 그러나 이내 예술 작품이라는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변화는 새로운 시작이지만 과거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영진의 오브제들은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것으로 읽힌다. 탄생과 죽음은 서로 단절된 대립항이 아니다. 이미 모든 존재의 내부에는 생과 사(死)가 공존한다. 장 클로드 아메장(Jean Claude Ameisen)에 따르면,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생명체의 세포는 죽기 시작한다. 세포자멸인 아포토시스(apoptosis)는 생물체를 더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돌이 깎여 조각 작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창조를 위한 소멸인 것이다.3) 그렇게 또 하나의 경계가 흐려진다.
하나의 상형문자 혹은 시어와 같은 유영진의 오브제들이 모인 전시장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과 같다. 도감이거나 역사서일 수도 있지만 수필집이거나 소설책 혹은 시집일 수도 있다. 철학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선택으로 언젠가 재개발과 함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주택의 부속물들은 작가의 내면까지 담아내는 예술 작품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펼쳐진다. 그것은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기억의 세계, 나아가 상상의 세계를 향해 모든 문을 활짝 열어주는 책이다. 따라서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진정한 기억의 창조다. 역사가 객관성을 최대치로 확보한 기억이라면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주체는 기억을 만들어낸다. 기억에는 주체의 감성과 같은 내면의 작용이 담긴다. 기억은 저장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화석도 아니다. 끝없이 생성되고 분화하는 변종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은 “계속 변화하고 움직이는 이미지다. 액체 같은 무엇이다.” 마치 유영진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이 그렇듯 관계 속에서 창조되고 재생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기억은 사색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부속물을 발견하고, 채집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과정이 그랬듯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은 질서정연하지도, 계획적이지도 않다. 또한 엄연히 다른 것으로 여겨지지만 기억과 상상을 명확히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둘 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기억을 되살리다 보면 상상력이 발동하고, 상상을 추적하다보면 기억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정확하다고 믿어지는 기억이라 하더라도 복원되어 재구성된 것이다. 완벽한 사실이 될 수 없다. 또한 모든 주체는 자신이 경험한 것(기억)을 바탕으로 상상한다. 무(無)에서 시작되는 상상은 없다.4)
<캄브리아기 대폭발>, 판화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each)30x30cm, 2018 ⓒ유영진
<캄브리아기 대폭발> 모음집, 2018 ⓒ유영진
주택의 부속물들은 유영진의 내면(혹은 의식, 아니면 그와 유사한 무엇) 안에서 진화하고 분화된다. 그 과정을 이끄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예술가의 작업이 존재(이미지)의 외관을 재현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상상력은 존재의 깊숙한 내면뿐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도록 이끈다. 그리고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치에 이른 결과물이 바로 드로잉이다. 유영진은 드로잉의 주인공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개체의 생김새와 기능, 진화의 특성을 적었다. 예를 들어 “세울렌시스 팔로르(Seulensis pallor)는 발생하고, 자라면서 보기 흉측해지지만, 사람들은 딱히 도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화된 세울렌시스 팔로르는 건물에 난 갈라진 틈과 구멍들에서 물이 새거나, 바람이 통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자외선을 받으면 흰색에서 노란색을 거쳐 주황색, 갈색까지 색이 변한다.” “세울렌시스 쿠니쿨루스 아르투스(Seulensis cuniculus artus)는 수많은 관으로 이루어진 종이다. 관은 땅속 깊숙이 박혀있으며, 땅속에서 발생하는 가스들을 배출한다. 특히 이 종은 독한 냄새를 내뿜어 벌레들을 깊고, 좁은 관 안으로 유인한다. 그래서 세울렌시스 쿠니쿨루스 아르투스의 근처에서는 벌레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와 같은 방식이다. 실재하는 부속물의 형태와 기능에 근거했지만 비현실성을 띤 존재가 창조되었다. 작가의 기억이 상상과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그렇게 작가에 의해 기억의 이미지들이 창조되었다.
유영진이 부속물을 채취하고, 명명하고, 창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 물질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후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상적 결과물들은 우리와 만나 또 다른 하나의 상상적 결과물을 만들 것이다. 상상은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에 상상한다.
주체(인간)는 존재의 내부를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겉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이는 거의 모든 순간 대부분의 우리는 끝없이 연상하고 상상한다. 시각적 수동성과 외면적 양상의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에 의미를 선사한다. 질료와 결부된 물질적 이미지들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부를 응시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에 따른 즐거움은 내부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싹에서 꽃과 잎, 열매를 보는 것처럼 상상력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5) 예술가는 더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존재이다. 예술은 사실의 확인이나 정보의 축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이 결합된 창조물이다.
유영진의 작업은 마치 현미경으로 세상 곳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는 우리가 발견하기 힘든 내밀한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좋은 현미경을 소유한다는 것은 한 방울의 포도주가 홍해와 같은 바다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나비 날개의 비늘가루가 공작의 깃털이며 곰팡이가 꽃밭임을, 모래 한 줌이 한 더미의 보석임을 깨닫는 것과 같 다.6)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캄브리아기 폭발의 수수께끼를 풀다』, 오숙은(역), 도서출판 뿌리와이파리, 2007, p. 16, p. 31, p. 51.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 윤수종(역), 동문선, 2003, p. 12. ; 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 윤수종(역), 동문선, 2003, p. 16, pp. 35-37.
제이컵 브롬버그(인터뷰어),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화이트 리뷰, 『예술가의 항해술』, 정은주(역), 유어마인드, 2015, p. 83.
김동규, 「상상과 기억의 불협화음-시와 철학의 불화에 대한 하이데거적 해법」, 『철학연구』, 98호, 2012, pp. 188-189.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정영란(역), (주)문학동네, 2002, pp. 17-19, p. 29.
가스통 바슐라르, 정영란(역), 2002, p.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