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09.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유나얼』 (2018)의 「평론」 (pp. 7-27.)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기억하는, 상상하는, 그리고 기도하는.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1. 기억을 담는 법
유나얼의 작업에서 받게 되는 첫인상은 차분함과 정돈됨이다. 회화든, 콜라주든, 설치든 그의 모든 작품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품 속 이미지와 오브제들은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차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그어진 선, 뜯긴 종이, 마스킹 테이프, 흑백사진, 숫자 등등, 그렇게 많은 이미지 조각들이 함께 함에도 완벽한 균형과 평온을 보여준다. 평평하고 잔잔한 세상이다. 그런데 티끌 하나 없이 잘 정돈되어 있음에도 유나얼의 작업은 차갑거나 건조하지 않다. 손을 대어 만지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질 것 같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오랜 시간을 머금은 이미지와 오브제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아름답게 빛바랜 형상들, 손때 뭍은 물건과 가구들,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진 드로잉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낭만적 감성을 자극하고 우리가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추억하도록 이끈다. 미래만을 향해 흘러가던 시간의 방향이 살짝 뒤틀리고 과거의 어느 날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Image Bomb>, Digital Collage, 130x180cm, 2017 ⓒ유나얼

유나얼은 누군가의 시간이 담긴 오브제를 수집한다. 그러나 수집한 물건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행복한 기억, 슬픈 기억, 무엇이든 좋다. 그의 작업은 붙잡을 수 없는 것들, 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진심 어린 그리움과 애정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물건 하나하나는 기억을 보관하는 서랍과 같다. 그의 작품들은 침대 아래 소중히 숨겨놓은 앨범이다. 선택된 오브제와 사진에는 언제나 기억이 쌓여 있다. 작가의 소유가 되기 전까지 그 물건은 누군가와 한때를 함께 했을 것이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머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진정으로 버려진 무의미한 물건일 수도 있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기억은 어떤 존재를 의미 있게 해준다.
기억되는 존재.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 어느 쪽이든 뭉클해진다. 작가는 작업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누가 갖고 있었으며 왜 버렸는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사진 속 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촬영된 것인지 질문하고 상상하면서 작업한다. 유의미했던 물건은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받고 무의미했던 물건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존재의 의미는 한결 두터워진다. 나의 주변을 둘러싼 물건들을 한 번 되돌아보자.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은 무엇인가? 그 물건이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남다른 추억. 물건의 가격. 함께 보낸 시간. 모두 다른 이유. 내가 갖고 있는 물건, 더 나아가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나의 삶을 담아낸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소중한 물건이 없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일지 모른다. 현대 소비 사회를 서술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스펙터클의 시대. 매 순간 새로운 상품과 이미지에 둘러싸인 채 욕망의 과잉에 함몰된 사람들. 새로운 것을 사기 위해 끝없이 버려지는 물건들. 버려지는 기억들. 그렇게 사라지는 나의 삶. 내가 원해서 소비하는지, 강요받아서 소비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반복되는 사고 버리기. 무의미한 삶에서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이 되어버린 사람들. 불안정한 부유. 나 자신을 성찰하고 진정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상품으로 소비되는 사회. 앤티크(antique)와 아날로그라는 이름으로 흘러간 시간까지 판매되는 시대.
유나얼은 이런 시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펙터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자신만의 기억을 보관한다. 뿌예진 사진, 낡은 LP 커버, 변색된 노트. 자신이 왜 이 물건들을 보관해왔는지, 어떤 연유로 발견했는지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흠뻑 빠져든다. 작업실에 머무르는 이 시간만큼은 외부의 무엇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버려진 물건이면 더 좋다. 쓰레기로 취급받던 것들을 아낌을 받는 소중한 존재로 바꿔내는 것이 더 선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오브제든 그 가치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고정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가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보일 때에야 의미는 생성된다. 인간의 물건적 품위보다 물건의 인간적 품위가 중요하다.¹⁾ 기억 역시 그렇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같은 사건도 기억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전혀 다른 가치로 존재한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억에 집중하는 유나얼의 작업은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것과 같다. 눈을 감고 나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자. 행복과 기쁨뿐 아니라 슬픔과 허무, 좌절, 고통의 이미지들이 함께 한다. 어떤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그 모두가 바로 인간의 삶이다. 죽고 못 살 만큼의 그리움과 아픔, 눈물이 날 정도의 행복함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아련해진다. 기억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기억도, 시간도 결국 인간 의식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소중하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에 빛을 발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섬세히 인지하려 노력해야 한다. 느끼고, 깨닫고, 사랑하고 기억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스캔되어 이미지로 존재하는 유나얼의 오브제들은 한 층 더 기억에 가까워진다. 선명함에도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이 기억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공간 위를 떠다니는 이미지들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억 그 자체이다.
사실 기억은 인간 삶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 연결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술은 역사를 기록해왔다. 전통적으로 역사화나 기념비는 보편적이라 믿어지는 기억을 공유하고 되새기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바뀌었지만 오늘날에도 공적 기억에 관한 내러티브를 끌어내는 작품들은 빛을 발한다. 흑인의 이미지와 성경의 텍스트, 실존했던 인물들이 공존하는 유나얼의 작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분석 가능하다. 그러나 작가는 차가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작품 속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화음을 들어 달라 말한다. 작품 속 이미지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일. 그것은 분명 필요하다. 의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교육에 길들여져 있기에 그동안 배워온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의미를 분석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고정된 사고의 틀에 가두는 일일 수도 있다. 문화 콤플렉스다. 모든 예술이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사유의 습관들이 불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때로는 해석 없이도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이라도 다양한 감상이 가능하다.
유나얼의 기억은 보다 사적이고 내밀하며 몽상적이다. 정교하게 한자리에 모인, 때로는 이질적이기까지 한 기억의 단편들은 새로운 하나를 생산한다. 인상과 느낌. 형언할 수 없는 이야기. 작품을 마주하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과 작품 속 기억의 만남. 그렇게 작가 혹은 작가가 아는 누군가, 혹은 작가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상상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끝없이 상상되는 기억. 가능성을 열어둔 기억의 집합소. 내면을 위한 장소.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상상의 씨앗이 된다.
인간은 사회와 문화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서도 안 된다. 각자 체화하고 발현하는 모습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우리의 모든 부분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자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회적 규범의 긍정적 역할도 분명 존재한다. 단, 그 한계를 인식하고 유의미한 방향으로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때로는 합리적이며 중립적이고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의식의 흐름을 벗어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상상력은 객관적이라 여겨지는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자유롭게 느끼고, 교감하고, 표현하는 것이다.²⁾
작품이 완성될수록 기억이 지층처럼 축적되고 시간이 겹쳐진다. 겹쳐지는 시간은 순차적이지 않다. 우리 삶의 시간도 그렇다. 나는 현재를 살지만 과거를 생각한다. 미래를 상상한다. 또한 시간은 객관적으로 일관되게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은 직선을 따라 앞을 향해 가지 않는다. 과거에서 미래로 단일하게 흐르던 선적 시간이 초월된다. 엄밀히 말해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은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에 속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없다. 내가 떠올리는 과거의 모든 것은 현재에 만들어지는 기억이다. 유나얼의 작품이 그렇듯 남겨진 이미지의 재조합일 뿐이다. 즉 현재가 과거를 불러오고 현재가 과거에 개입하는 것이다. 과거를 기준으로 과거를 되새기는 현재는 미래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미래의 한순간, 곧 도래할 현재에 맞게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시간도 그렇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흘러가지만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한순간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애초에 하나였다. 작가의 작품 속 무수한 시간의 조각들이 완벽히 하나의 작품을 이루듯.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지만 미래를 향한 기다림은 미래가 오기 전인 현재의 나의 마음 안에 존재한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지만 과거의 기억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안에 존재한다. 현재는 순간이지만 마음의 직관은 지속된다.³⁾ 과거를 회상하는 지금은 현재인가? 아니면 과거인가?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는 현재를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잠시 동안만이라도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회상하고, 그리워하고, 희망하는 시간을 가져볼 기회. 삶을 총체적으로 관조하는 시간. 현실을 완전히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의 한때. 안락한 낭만적 이상향. 현실의 사람들이 꿈을 꾸는 시공간. 그것이 유나얼의 작업이다.

2. ebony가 전하는 이야기
유나얼은 기억을 상상하듯 흑인을 상상한다. 그의 작품에서 흑인은 주인공이다. 주로 책이나 잡지, 오래된 사진에서 발견하고 다시 그려낸 사람들이다. 물론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웃고 있다. 때로는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거나 허공을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기도 하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한결같은 평온함.
작가에게 작품 속 흑인은 순수한 관찰의 대상이다. 그러나 결코 타자화된 대상은 아니다. 순수한 애정이 가득한 시선이 느껴진다. 소울(soul, 흑인 문화)에 흠뻑 빠져 그들에게 감정 이입을 한 작가의 시선이다.

<Collage For Ebony 1> Digital Collge & Drawing, 140x180cm 2011 ⓒ유나얼

미술에 흑인의 이미지가 등장할 경우 자연스럽게 탈식민주의, 인종과 민족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유나얼의 작업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지점이 발견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거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작가의 의도, 작가가 담아내는 이야기에서 탈식민적 이슈를 떠올리게 된다. 또한 작가가 지속적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사용할 경우 그것이 자신이 활동하는 시대에 어떻게 읽히는지에 대해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만 작품을 읽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 스스로 말했듯 유나얼의 작품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등장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가 생성될 수 있다. 논리적인 비약만 없다면 누구든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일치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존재)의 의미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가 말하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완벽한 진실이라면, 모든 기표가 모든 기의와 일치한다면, 의미화 연쇄(signifying chain)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⁴⁾
흑인 이미지와 버려진 오브제. 흑인의 역사.
유나얼의 작업에 등장하는 흑인의 이미지와 버려진 오브제의 조합은 흑인의 역사를 은유하는 듯하다. “종교적 자유나 성취를 위해 자발적으로 이주해 온 미국 내의 다른 인종 집단들과 달리,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 당한 노예로서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고, 민주주의와 노예제도가 모순적으로 양립하는 독특한 나라 미국에서의 식민주의를 경험했다. 흑인은 전통과 문화적 근원을 상실 당했고, 가족과 혈연의 공동체적 소속감과 시민의 기본권을 거부당했다.”⁵⁾ 이런 불평등한 상황은 노예 해방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흑인들은 타자로서 존재했다. 다른 서구 국가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일은 비극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제적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은 비극이다. 나의 부모와 조상의 원치 않는 이주로 인해 선택의 여지 없이 타국에서 태어난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원하지 않았던 이주. 인간으로서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던 흑인의 역사, 노예들이 받았던 수많은 상처, 그들에게 자행된 폭력은 버려져 길 위를 부유했던 물건과 오버랩된다.
흑인 이미지와 성경.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를 주된 목적으로 약소국을 정복하고 통치했다. 물적, 인적 자원을 약탈했다. 문명의 전파와 기독교의 포교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내세운 식민지 개척의 명분이었다. 한편 미국 남부에 서는 기독교가 노예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제공되기도 했다. 노예주들은 아프리카에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를 접하지 못한 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을 흑인들이 비록 노예지만 미국에 살게 되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논리를 폈다. 또한 현세보다 내세의 영생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노예제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에게 영적 축복의 매개체라며 노예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했다.⁶⁾ 이런 맥락에서, 유나얼의 작품 속 흑인의 이미지와 교차되는 성경의 구 절들은 기독교가 잘못 해석되고 적용된 역사적 모순에 대한 성찰, 희생된 흑인들에 대한 애도처럼 읽힌다.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어떻게 그렇게 불평등한 상황을 지속시켰을까? 노예제를 악용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성경에 근거한 삶을 산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신을 향해 어떤 기도를 했을까?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역사 속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타자에 관한 담론이 여전히 주요한 논제인 시대이다. 어떻게 하면 함께, 조화롭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까? 민족적 배타성이 완벽히 사라지고 순수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날 수 있는 때가 오긴 할까? 쉽지 않을 것이다. 회의적이라는 의견도 많다. 인종 차별은 공개적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인종 차별은 존재한다. 서구에 의해 만들어진 편견이 비서구권 국가들에게까지 퍼지고 재생산되고 있다. 인종 차별과 관련된 혐오 범죄, 크고 작은 사건들은 끝없이 뉴스를 채운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묻히는 사건들도 많다.
생각해보자. 나는 정말 모든 인종과 민족, 모든 국적의 사람들, 더 나아가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을 존중해왔는가? 다른 문화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들이 다른 게 아니라 열등하다고 치부했던 적은 없는가? 생각의 전개는 결국 자기반성으로 귀결된다.
흑인을 그리는 작가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유나얼은 여러 차례 밝혔다. 흑인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서 흑인과 그들의 문화까지 좋아하게 되었고, 그런 마음이 작품에 담기게 되었다고. 자신이 선택한 흑인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라고. “정말 그 외의 이유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 다른 이유나 의미를 만들어서 답변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답변을 들은 후에도 여전히 궁금해한다. 그리고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꾸준히 흑인을 그리는 것은 특이한 행보라고 말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에게 꾸준한 애정을 보이는 것이 그렇게 특이한 경우인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주목받을 만한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작가의 취향 문제다. 관점에 따라 오히려 작가인 그가 음악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혹은 음악인인 그가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이 더 특이한 일이다. 흑인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여 그 음악의 근원이 되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그려내는 상황이 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작가에게 엔트 제미마(Aunt Jemima)는 그냥 아름다운 이미지다. 그저 좋아서 콜라주 했을 뿐이다. 엔트 제미마를 인종차별적 시각이 담긴 스테레오 타입이라 규정하고 일반화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을 양산하는 것일 수 있다. 흑인 소녀는 아픈 역사나 정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공간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우리를 마주본다.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은 어디에도 없다. 작품 속 흑인의 이미지는 왜곡되지 않았다.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엄연히 다르다. 유나얼은 분명 후자다.

<Kingdom Of God> Digital Collage, 120x175cm, 2013 ⓒ유나얼

반전 아닌 반전 하나.
유나얼은 흑인만 그리지 않는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또 다른 인종의 사람이 든 시각적으로 그가 끌리는 이미지, 그에게 영감을 주는 이미지를 선택한다. 한 화면에 흑인과 백인이 나란히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의 사회와 잘 안 어울리는 표현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나얼의 작품 속 세상은 인종적, 문화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정 지대다.
낯설다.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편견도 없이 세상 속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시대, 다름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세계관과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이 세상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 취향이 있다. 다양함을 한두 개의 목소리로 정리하거나 획일화시킬 수 없다. 우열을 정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다르다. 쉽지 않다. 각각의 개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굳이 침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우리와 닮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반전 아닌 반전 둘.
작가는 “흑인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흑인 문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보단 많이 알 거다.”라고 겸손히 말하지만 흑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순수하게 좋아서 그리는 것이니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그에 대해 생각하길 회피한다거나 그 이상의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차별이 없었다면, 배척하지 않았다면, 차별과 그 결과들을 발견하고 분석하며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상적인 이야기다. 어쩌면 작가는 ‘왜 흑인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이나 ‘흑인을 그리는 그의 작업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작품 설명에 지쳐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그냥 다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인종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인가? 애초에 순수한 문화란 가능한 것인가? 우리의 문화는 수많은 만남과 소통으로 이뤄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나얼의 작업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진정한 사이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처럼 순수하게 바라보고, 만남을 주선하고, 재조합하면 진정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소통하는 사이 공간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음은 필연적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주체와 타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듯이 불평등한 권력 구조 속에서조차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받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미는 지배자에 의해서만 생성되지 않는다. 애초에 순수한 문화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고 소통할 때 긴장과 갈등은 필연적일 수 있다. 편안한 공존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발전적인 긴장과 갈등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새로움과 낯섦은 친구다.
유나얼의 작품들.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이 한 장소에 함께 한다. 다양한 시공간에 머무른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고, 겹쳐지고, 섞이며 수많은 사이 공간을 생성한다. 문화는 정지된 것이 아니다. 진행 중인 과정이다. 작가가 원하지 않기에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누군가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는 것. 가장 진부할 정도로 가장 기본적인 윤리.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 그것이 유나얼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3. 주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 그 둘을 다 지으셨느니라.(잠언20:2) 킹제임스흠정역
유나얼은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유나얼은 성경 말씀을 드로잉한다. <말씀 드로잉>과 <실크 스크린> 시리즈에는 필사의 행위와 그리는 행위가 결합되었다. 문자인 동시에 그림이다. <말씀 & 콜라주>, <콜라주> 시리즈처럼 기독교(성경)와 관련된 이미지(도상)들이 등장하는 작업은 읽는 그림과 같다. 듣고 보는 그림이다.

<The Body of Death> Silk Screen, 67X94cm, 2017 ⓒ유나얼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성경을 다루는 유나얼의 작업에서도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시각적인 조화이다. 그의 모든 작업이 그렇듯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는 작업 역시 전체적 인상과 느낌이 우선이다. 작가는 작품 속 이미지가 상징하는 의미를 미리 정해놓지 않는다. 비성경적인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의 작업을 반드시 종교적으로만 읽을 필요도 없다. 둘 다 가능하기에 일부의 우려가 무색하게 더욱 다양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유나얼의 작업뿐만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품의 형상, 의미, 본질은 작가가 처음 의도하고 말하려 한 것을 넘어선다. 의미는 늘 생성된다.
종교와 미술을 결합시켰을 때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의 미술에서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적 주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성경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작가도 있다. 그중 많은 작가들은 성경에 대한 비판적 해석, 영생(과 인간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신을 향한 인간적 고뇌 등을 처절하게 담아낸다. 신의 육화와 부활(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희생하고 다시 부활하여 신이 되는 그 모든 과정) 등을 여과 없이 재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유한함, 말 그대로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작가들은 공격적으로 보이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희망 이면에는 기약 없는 기다림, 기다림조차 기쁘게 기다려야 한다는 현재의 인내와 고통이 존재한다.⁷⁾ 부활을 위해 거쳐야 하는 죽음의 과정은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 두려움이다. 때로는 기독교가 사회의 경직성과 차별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독교와 인종 차별, 기독교와 가부장제의 연결이 대표적이다. 일부 작가들은 물질문명 속에서 종교까지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 소비되는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 신성모독 논란이 일기도 한다. 비단 미술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철학자들은 신과 기독교를 분석해왔다. 일일이 열거하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다양한 담론들이 만들어졌고 인류의 역사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철학적, 예술적 작업들은 유나얼의 그것과 결이 매우 다르다. 늘 유연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갖는 평상시 모습과 대비될 정도로 그의 믿음은 단호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나얼의 작업은 신을 향한 의심이나 고뇌를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절대적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린다. 기독교의 교리적 해석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작가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전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님을 만나는 선한 통로가 되길 원한다.
이것은 분명 작가에게도,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는 이에게도 쉬운 길이 아니다.
유나얼은 자신의 작업을 매개로 사람들이 성경에 귀를 기울이길 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지는 더 강건해졌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작품에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오직 성경’을 중심에 놓았지만, 동시에 성경의 내용이 묘사된 그림이 성경의 글과 유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상기시킨다고 보았다. 실제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했던 성경에도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의 판화가 실렸다.⁸⁾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나얼의 프린트 작업은 더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전달하기에 매우 적합한 방법이다. 실제로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동참했던 작가들은 성경의 내용과 종교 개혁의 가르침을 판화로 널리 전파했다. 여러 개의 에디션이 존재하는 판화는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 장소에 전시할 수 있기에 그만큼 대중성을 갖게 된다.⁹⁾
성경을 다루는 그의 작업은 고통의 인간사로부터 초연해진 것 같다. 실재하는 인간의 삶에서 멀리 떠난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 성경 내용의 재현이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선택된 이미지들의 결합은 비현실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고뇌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만약 그런 식의 결론을 내리고 유나얼의 작품을 대한다면 지나친 속단이다. 드러나는 것이 모두는 아니다. 자신의 믿음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그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평온한 상태는 노력의 과정 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신념을 갖기까지의 어려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으로서 신을 향한 처절함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종교의 한쪽 면만을 향한다고 말할 수 없다. 반드시 신을 찬양하는 작품만 만들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고뇌와 고통의 순간을 그리라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작가 개인의 믿음과 기독교적 믿음의 전파를 작업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이 작가로서의 성취를 폄하하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의 작업을 복음화의 도구라 한정지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편견을 생산할 뿐이다. 신을 철학적으로, 사회정치적으로까지 숙고하는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평화로운 찬양은 한탄과 슬픔, 고뇌와 성찰의 결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유나얼의 작품에는 왜 그토록 시간이 중첩되어 있었을까.
왜 기억이었을까. 왜 시간이었을까.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유한한 운명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하다. 무시간성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함이다.¹⁰⁾ 그의 작업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 삶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과 신을 향한 기다림이 담겨있었나 보다. 만약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는다면 과거의 시간은 없을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는다면 미래의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 역시 없을 것이다.¹¹⁾ 찰나의 현재. 현재를 끝없이 기다리고, 현재를 끝없이 보내는 인간의 삶. 유한한 허망함을 모르는 듯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기대하고 기억하는 인간. 그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본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의 종착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종착지가 새로운 시작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종착지가 끝일 것이다.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희망하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동시에 그 모두를 초월하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 모두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 그래서 느껴지는 셀 수 없는 감정들. 그 아래 담긴 따뜻한 기운.
바로 이것이 유나얼의 작업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