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1. 12. 01.

깊고 깊은 화이트, 넓고 넓은 중간 지대¹⁾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나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특정한 하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는다. 내 작품이 의문을 품고, 세상을 고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을 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²⁾
모순되는 것들 사이를 오가면서 근원의 순수함을 갈망하는 태도가 담긴 것이 나의 작업이다.³⁾

안소현에게 흰색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서는 통로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고리이다. 본질, 고정관념과 대립, 이중성과 모순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된 일련의 작업은 자연스레 흰색을 향하게 되었다. 작가에게 흰색은 순수와 순결, 민족성 등으로 고정된 의미와 당위성을 강요받는 색이다. 불안정하면서 약한 색이지만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이상의 색이기도 하다. 색이지만 색이 아니라고 여겨지기도 했던 흰색은 예리한 감각과 사유를 끝없이 자극한다.
<Another White> 시리즈(2020)는 우연적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산책길에서 페인트칠이 한창인 건물을 발견했다. 주변의 나무에는 흰색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나무를 막아선 울타리는 티끌 없이 새하얗게 칠해졌지만, 나뭇잎에는 불규칙한 흰색 흔적만 남았다. 이전부터 흰색이 칠해진 손과 식물을 사진으로 보여주던 안소현에게는 자신이 마주한 이 순간이 필연처럼 다가왔다. 한동안, 무언가에 이끌리듯 작가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현장에서 나뭇가지를 수집한 뒤 그에 어우러지게 자신의 손을 칠했다.

안소현 <Another White S #1-7> digital print, 61x91cm(each), installation view, 2020, 사진 제공=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Another White S #1~7>(2020), <Another White #5~6>(2020) 속 나무는 새하얗게 변신하지도, 본연의 색을 지키지도 못했다. 조심스레 울타리를 넘어선 나뭇가지는 마치 사회 속 규범과 질서에 온전히 포함되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어쩌면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겼다. 하얀 프레임, 그 안에 담긴 경계선 위의 존재. 존재를 둘러싼 울타리는 하나가 아니었나 보다. 생각이, 그리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한 번 더 이미지를 바라본다. 하얀 페인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과 규범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누군가의 목소리인가? 어느 쪽이든 질문은 생성될 것이고 생각은 직조될 것이다. 애초에 작가는 하나의 명확한 이야기를 전하길 원하지 않았다. 가능성과 문제 제기의 여지를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흰색이어서 가능하다. 커다란 침묵으로 우리 마음의 본체에 작용하는 색이 흰색이다. 흰색은 음악에서의 잠시 멈춤, 무음이 그렇듯 내적으로 울린다. 이 중간 휴지(休止)는 영원한 침묵인 검은색의 내적 울림과는 다르다.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인 흰색은 시작하기 전의 무(無)이자 태어나기의 무이다.⁴⁾

안소현 <Another White #1, print on film, light> 180x400cm, 2020, 사진 제공=안소현
안소현 <Another White #2, print on film, light> 180x400cm, 2020, 사진 제공=안소현

이후 안소현은 수집한 나뭇가지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고 대형 설치 작품인 <Another White #1~4>(2020)를 완성했다. 거대한 사진의 중앙에는 수집한 나뭇가지, 손,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손, 그리고 흰색이 빛을 머금은 채 등장했다. 흰색과 검은색, 존재와 여백이 서로에게 얹어진 상황은 마치 대립적이라 여겨지던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고 있는 세상의 함축 같다. 주체와 타자,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현실과 환상, 안과 밖, 중심과 주변, 내면과 외면처럼 서로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은 완벽히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어진 채 공존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를 날카롭게 잘라낼 수는 없다. 양극단이라 믿어지는 지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관계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를 품고 있는 안소현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분법적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경계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고정된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애초에 답을 찾아내려 시작한 작업도 아니었다. 또 다른 흰색들이 끝없이 생성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소현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이에 위치한다. 작가가 ‘조각적 사진’이라 부르는 <Another White #1~4>는 이미지인 동시에 현실 공간에 놓인 입체물이다. 사진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작품, 사진이기도 하고 조각이기도 한 작품이다. 일루전(illusion)과 물질적 실체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 중에 있는 작가는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진과 공간을 체험하는 조각을 연결했다. 이미지로 존재하던 나뭇가지와 손은 공간으로 확장되어 여백을 채운다. 연극적인 설치를 하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사진인 동시에 압도적인 설치물인 작품이 놓인 연극 무대와 같은 전시장. 작품이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리하는 공간이다. 전시장에 펼쳐진 연극적 공간은 탈 장르 시대에 다시금 장르의 고유성, 작품의 지각과 인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한편 개인전 [Beyond White: Illumination](2017)에서부터 사용해온 조명은 검은색의 여백과 조화롭게 대비되는 흰색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극적 몰입이 일어나는 연극적 공간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작품 뒤에 설치된 조명의 빛은 검은 공간에 놓인 흰색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미지를 감싸는 빛은 검은 공간을 더 깊게 지각하게 한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 강하게 인지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여백은 꽉 차 보인다. 그 깊이와 거리를 파악하기 어려운 심연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존재가 관계 맺음을 하고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혼성의 관계망이 보이는 것 같다. 빛의 영역을 명확히 한정할 수는 없다. 어둠의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니 무엇도 첨가되지 않은 색이면서 모든 빛이 더해진 색이 흰색이다. 흰색은 무이면서도 모두인 색이다. 영원한 저항과 탄생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정신적 이미지를 가진⁵⁾ 또 하나의 흰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Another White> 시리즈에서는 관계의 비중이 한층 커졌다. 식물에 흰 칠을 시작한 <White> 시리즈(2011)에서부터 <Blanc. Black. Blank.> 시리즈(2020)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자신이 구상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든 상황을 통제해 왔다. 자신이 계획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대상을 골라 원하는 대로 칠했다. 사전에 준비된 계획,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연히 발견된, 이미 흰 페인트가 묻은, 정말 의도치 않게 흰 칠이 된 나뭇가지에 어울리게 작가 자신의 손을 칠했다. 나뭇가지가 자리한 검은 공간은 하얗게 칠해진 손과 만남으로써 행위의 전개를 함축하게 되었고, 과정 중의 한 지점이 되어 흐르는 시간을 포함하게 되었다. 만남을 통해 내적인 울림을 유발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혼자 만들고 풀어내는 독백이 아닌 대화란 단어를 떠올리며 작업했다. 좋은 만남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였던 나뭇가지와 흰색은 세계 속 존재와 자신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대화를 나누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존중의 거리를 유지하는 공감의 순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안소현 <Another White> installation view, 2020, 사진 제공=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인간은 긴 역사 동안 세상과 끝없이 관계를 맺어왔다. 세상을 정의하고 이해하려 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온 작가는 자기 자신, 넓게는 인간을 상징하는 손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근원을 사유하는 인간의 시간을 드러낸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늘 완벽할 수 없다. 여러 조건과 변수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온전히 정리하기에 너무 넓고,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도 세상을 정의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안소현이 그러한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계를 인정하고 고민해보자고 넌지시 말한다. 조금은 다른 태도로 세계 속 존재와의 만남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작가는 서로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정말 반대되는 것인지 질문하고, 그것들을 다시 새롭게 볼 수 있길 바란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고정된 관념이 만들어 낸 이미지와 의미를 향해 근원적 물음을 던질 수 있길 기대한다. 무조건적인 혼연일체도, 대립과 그로 인한 단절도 사족일 뿐이다. 본질적인 근원에는 그런 식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안소현은 한 화면에 ‘Blanc, Black, Blank’, 그리고 손(인간)을 모아놓았다. 고정된 분류 체계가 하얗게 지워지고 경계가 흐릿해진 중간 지대는 점점 넓어지며 작가의 이상에 한 걸음 다가간다.
안소현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완전히 새로운 하나를 만들거나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상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현실 세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 세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하나이지만 완전히 통합된 하나는 아닌, 이어져 있으나 온전히 이어져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상태를 향하는 작업이기에 작가는 모든 명확함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저 자신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세상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부연할 뿐이다. 일정 부분에서 작가는 뫼비우스(Möbius)의 띠처럼 안이지만 밖이기도 하고, 밖이지만 안이기도 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소현의 작품에서 경계를 유연하게 하고 고정된 시각의 해체를 담아내기 위한 모호함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 모호함에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정해진 정답은 없었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다시 바라보길 반복하면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