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8. 14. / 2020. 08. 24. 수정

권오상의 조각과 다성성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나는 정말 인류가 어떻게 조각을 하면서 살아왔는가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조각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¹⁾

권오상은 사진조각을 통해 조각의 근원과 정체성을 숙고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사진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는 조각의 형식에 대한 실험이자 조각의 중요한 논제인 공간성과 시간성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물질과 이미지, 실재와 가상,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련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반영이기에 앞서 인간의 시각적 경험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권오상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차용을 들 수 있다. 사진 이미지의 차용은 잡지 속 사진을 오려 사용한 <더 플랫 The Flat>(2003~2007, 2010~2014)에서 찾아볼 수 있고 <붐박스 Boombox>(2011), <세인트 버나드 Saint Bernard>(2011), <셰르파 Sherpa>(2011)에서부터 <데오도란트 타입 Deodorant Type>(1998~present)에도 작가가 직접 촬영한 것이 아닌 수집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방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발표된 <데오도란트 타입 매스패턴스>
Deodorant Type Masspatterns>(2013~present), <릴리프 Relief>(2013~present), <모빌 Mobile>(2013~present), <뉴 스트럭쳐 New Structure>(2014~present) 등에는 차용된 이미지들의 결합이 일관되게 발견된다. 이미지 선택의 기준은 작품마다 유동적이다. 즉흥적, 무작위적일 때도 있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이 고르기도 한다. 자신의 취향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미지 선정에 거리 두기를 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권오상의 사진조각은 유기적인 연결점을 찾기 힘든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이뤄지며, 작품 속 이미지들은 이전에 자신이 위치했던 맥락과는 단절된 채 새로운 의미구조에 합류한다. 개별 이미지가 소유했던 서사들은 흩어지고 새로운 서사가 발생한다. 불협화음의 화음은 흐릿한 난해함을 가져온다. 기분 좋은 긴장감 속 호기심이 발동한다.

<Sherpa> C-print, mixed media, 215x90x88cm, 2011 ⓒ권오상
<Socle en Zigzag> mixed media, 38x33x71(h)cm, 2013-2018 ⓒ권오상

그 작업 방식과 결과를 놓고 볼 때, 차용한 이미지를 결합하는 권오상의 사진조각은 이미지의 브리콜라주(bricolage)를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브리콜라주는 주변, 서로 다른 구조, 개별적인 맥락에 각기 존재하던 요소들,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조합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실천행위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야생의 사고 La Pansee Sauvage』 (1962)에서 브리콜라주를 손재주, 손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 전(prior)과학이라 이름 짓는 것을 타당하게 하는 활동, 지각과 개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브리콜라주의 결과물이 그렇듯 사진조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 사이에는 위계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조적인 관계만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부분은 한정됨 없이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의미 작용의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²⁾ 물론 누군가는 권오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사이에 가치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물뿐 아니라 고가의 상품, 나아가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까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즈음 우리는 권오상이 수집하는 대상이 실재하는 물건이 아닌 물건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실체를 소유할 수는 없어도 이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소유할 수 있는 시대이다. 실제 물건의 가치나 희소성에 상관없이 그것의 이미지는 일상의 재료처럼 사용 가능하다. 평생 만나지 못할 대상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대와 장소의 한계도 허물어진다. 인터넷, 그리고 복제의 시대라 가능한 일이다. 직접 경험하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이미지 과잉의 시대. 현실적 존재가 되는 이미지.³⁾ 그렇게 사진조각은 스펙터클의 축적물로서의 역할까지 충실히 수행한다. 한편 인터넷을 근간으로 한 이미지들이 선택되었을 때 이미 예상된 결과였듯 이미지의 브리콜라주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교차와 결합, 혼종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문화도 더 우위에 서거나 권위를 갖지 않는다.

<Red Shirt and Whistle, Calder’s Circus> print on 54 wood panel, varnish, chain, dimensions variable, 2018, Installation view of Endless Column at Arario Gallery Seoul Ryse Hotel ⓒ권오상

브리콜라주를 실행하는 자인 브리콜뢰르(bricoleur)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와 도구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듯, 권오상은 비계획적으로 발견한 이미지들을 조립한다. 그 과정에는 어떤 고정 관념도 관여하지 않는다. 작가가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굴곡 없이 평평하다. 전시 [무한주 Endless Column](2018)에 소개된 <붉은 셔츠와 휘슬, 칼더의 서커스 Red Shirt and Whistle, Calder’s Circus>(2018)를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칼더의 서커스’와 관련된 단어를 검색하다 보니 슐레머(Oskar Schlemmer)의 삼부작 발레(Triadic Ballet)와 피카소(Pablo Picasso)의 도자기 이미지까지 등장했다.⁴⁾ 그렇게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즉흥적인 구조물.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미지를 결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데오도란트 타입 매스패턴스>의 경우 작은 흙덩어리들을 붙여 큰 소조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이미지 덩어리를 무작위적으로 붙여나가는데, 이는 조각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계획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⁵⁾
이후 사진 이미지는 고전적인 조각의 구조와 만난다. 패션 잡지 속 모델의 자세를 참조해 인물상들을 제작하던 작가는 고전 조각과 회화가 그 시작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계보를 추적하게 되었다.⁶⁾ 그 결과물로는 <데오도란트 타입> 중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아이네아스, 안키세스, 아스카니오스 Aeneas, Anchises, and Ascanius>(1618~1619)의 구성을 차용한 <루비 나이키 베이프 Ruby Nike Bape>(2012)를 비롯해 2012년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들, 마이욜(Aristide Maillol)의
<강 La Rivière>(1938-1943)의 자세를 취한 <강 River>(2015), 로댕(Auguste Rodin)의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1880~1888)에서 영감을 받은 <트리 Tree>(2013) 등이 대표적이다. 이전 시대 조각의 구조를 차용하는 작업은 지속되어 <뉴 스트럭쳐>는 칼더(Alexander Calder)의 ‘스태빌(Stabile)’을 따르고, <모빌>은
‘모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사라진 채 공간에 떠 있는 조각이 되었다. 익숙한 새로움이다. 이미지뿐 아니라 작품의 틀(구조)까지 자신의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부분들로 채워진다.
로댕의 조각 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마코타주(marcottage)와 같은 방식이 권오상의 <데오도란트 타입>과 <뉴 스트럭쳐> 등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코타주는 이전에 제작했던 작품 자체 혹은 그 일부를 다른 작품과 결합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댕의 <지옥의 문> 가장 윗부분에 놓인
<세 그림자 Les trois ombres>는 <그림자 Ombre>가 세 번 반복된 것이고, <그림자>는 <아담 Adam>에서 온 것이다. 로댕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을 제작한 뒤 마코타주 기법을 이용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했다.⁷⁾ 중층적인 맥락의 이탈과 재조합을 통해 권오상은 과거의 의미를 비워가고 차곡차곡 의미 발생의 새로운 지점을 추가한다. 자신의 작업이 조각이라 선언하는 작가. 재조합되는 조각. 또다시 분리되고 조립되는 요소들. 그렇게 미술사의 지점들이 권오상의 맥락으로 이동한다.

<Untitled> C-print, mixed media, 265x142x141cm, 2012 ⓒ권오상

결국 특정한 이미지에 더 높은 가치가 부과되고 아니고의 문제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 개개인의 판단이다. 이미지들의 중요도를 가리고 가치 부여를 하는 것은 감상의 영역에 머무른다. 개인에 따라 모든 가치 평가는 달라진다. 시선을 끄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미지들은 관객에 따라 매번 새로운 맥락에서 상호작용을 시작한다. 비유기적 구조는 끝없이 확장되고 의미는 다양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기만의 유기적 구성을 만들어낸다. 권오상의 작품에서 감상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소설처럼 내러티브를 이끌어내도록 작업하지 않는다. 작업할 때 다양한 상상을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데 매우 즉각적으로 형태와 포즈, 배치 등이 이뤄진다.”⁸⁾

수많은 이미지의 결합으로 이뤄진 권오상의 작품은 매우 다양한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이미지는 파편화된 만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이질적 요소들은 시각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 모두에서 풍성함을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물리적 결과물에 작가의 내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찾아내려 노력한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전달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는 왜 하필 그 이미지를 선택했을까? 그러나 권오상은 자신의 작품에 특정한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작가가 작업의 문맥을 온전히 언어화하고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감상의 길잡이 역할을 하려는 마음도 없다. 권오상은 특정한 가치 판단을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작업의 형식적인 부분에 대해 매우 정확히 설명하며 자신의 작품을 조각으로, 자신을 조각가로 명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아무 의미도 없으며, 어떤 의미도 발생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이 내용 없이 형식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에 가깝다. 해석의 여지는 무한대로 열린다.
물론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무언가가 작품에 담겼을 것이다. 모더니즘(modernism), 르네상스(Renaissance)와 바로크(Baroque) 시기의 작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을 때도 있고, 미술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백지 위에서는 불가능한 우연과 즉흥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미술사적 지식과 미술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해체적 작업은 과거의 축적에 기반한다. 또한 작품에 작가의 생각이 하나도 담기지 않을 수는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와 작품은 연결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지배하는 강력한 담론이 존재하길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작품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좋아한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작품을 경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다. 작품을 보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다.”⁹⁾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고 작용이 중지된 상태 혹은 오직 감각적인 부분에 집중해서 작품을 감상함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술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과거로부터의 지식과 규범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작품이 생성하는 의미가 작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권오상의 태도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흐름만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은 독립체가 아니다. 문자나 음성 언어가 아닌 이미지 역시 의미 전달과 소통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상호텍스트성과 관련된 이론은 미술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New Structure 4 Prism & Macallan> Inkjet print, aluminum, 275(h)x197x316cm, 2014 ⓒ권오상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작가는 작품의 근원이자 의미의 원천, 작품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라 여겨졌다. 작품의 내적, 외적 내러티브를 다룰 때도 작가가 중심에 놓였다. 작가는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신과도 같은 창조자였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믿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기에 관객은 의미의 해답을 작가에게서 찾으려 하고, 작가는 작품 감상의 중심에 놓인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은 작품의 시작이자 끝과 같은 작가의 신화를 흔든다. 간단히 말해 상호텍스트성이란 하나의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 사이의 상호관련성, 사용자들이 텍스트에 반응하는 방식, 텍스트가 문화의 담론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텍스트(작품)는 언제나 선행하는 요소들의 인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완전히 순수한 의미의 기원을 가질 수 없다. 인용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해 완성된 텍스트는 수용과 변형의 결과이다. 씨실 하나가 더해져 세계를 가로지르고 날실 하나가 더해져 시간을 잇는다. 텍스트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작가 역시 독립된 의미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작가는 의미 생성의 구조를 만드는 존재에 가깝다. 생각의 전환은 작품과 작품, 작가와 작품, 작가와 관객 사이의 영향 관계를 재편한다.¹⁰⁾
예술적 결과물은 무수한 인용과 참조의 조합이다. 여러 인용으로 이뤄진 권오상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작품을 감상한다. 관객이 선행적으로 소유한 정보와 지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주목하는 이미지는 달라진다. 관점에 따라 동일한 이미지의 의미도 매번 바뀐다. 의미는 고정될 수 없으며 끝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놓인다. 설령 작가가 어떤 의미를 담았다고 해도 조각 안을 흐르는 의미(의 가능성)는 감상자에 따라 선택적으로 찾아진다. 게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의 머릿속을 완전히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없다. 작가가 언어화시켜 의미를 설명해준다 한들 전달의 한계를 피하기는 힘들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백 퍼센트 공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따라서 자의적이든, 아니든 관객은 닫힌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받는 수신자가 아니다. 그동안 자신이 직조한 그물망을 토대로 작품(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주체이다. 사진조각에서 일어나는 의미 생성도 그 그물망의 직조에 기여하고 이후의 시각적 경험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결국 관객이 만나는 작품뿐 아니라 관객이 내리는 해석 역시 상호텍스트적이다. 끝없는 관계 속에서 수많은 요소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권오상의 작업은 (예술)작품을 둘러싼 다의적이고 복수적인 상호텍스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에 작가의 이야기를 고정하고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시각화한 것 같기도 하다. 조각가와 사진조각, 그리고 관객은 모두 상호텍스트성의 영향 아래에 놓인다. 독백과 대화의 섞임이 일어난다.

Installation view of Structure at PERIGEE Gallery, Seoul, 2014 ⓒ권오상

“미술은 글로 적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문맥을 모두 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¹¹⁾

권오상의 사진조각은 작품의 언어화를 피하면서도 최대한의 의미 생성을 꾀하는 작품이다. 작가가 내러티브를 끌어내길 원하지 않았다 해도 많은 경우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의 이미지들로 구성된 조각이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연상 작용과 기억의 환기, 추측과 상상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말하기의 한계를 인식했지만 이야기 만들기를 멈추고 싶지는 않은 작가의 결과물. 모든 것은 언어화할수록 한정된다. 그것을 특정한 단어로 명명하고 설명하는 순간 의미는 닫힌다.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설명이라면 더욱 그렇다. 말을 할수록 붙잡을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난다. 오브제에 칠해진 보라색을 보는 것과 ‘보라색’이라는 단어를 읽는 것은 다르다. 말을 안 할수록 여지가 늘어나고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 덕분에 권오상의 작품은 내러티브와 의미를 관객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작가가 무언가를 들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지만 작가가 공개한 이야기의 페이지는 어김없이 비어있다. 모든 방향이 종착지가 되는 열린 작품. 표지판 없는 길을 찾아가는 답답함과 막막함에 의미 생성의 길을 중도에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다시 찾아오는 흐릿한 난해함. 조심스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본다.

“조각 감상은 작품이 놓인 공간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¹²⁾

권오상의 작업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다. 의미의 근원인 작가상을 벗어나는 작가. 조각가이길 원하는 작가의 유연하지만 견고한 작업. 현란하게까지 느껴지는 각양각색의 이미지들을 앞에 두고 덩어리와 공간의 체험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얄궂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권오상이 자신의 작품 감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제 공간에서 실재하는 조각 작품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머무르기만 해도 좋다. 작품을 보고 상호텍스트적인 의미 생성을 하기 전에 온몸의 감각을 극대화하여 조각의 볼륨을 느끼고 작품이 실재하는 공간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공기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조각¹³⁾을 마주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 <가구 furniture>(2018~2019)이다.

Chinese ink on wood, varnish, 40.5×39.5×175(h)cm, 2018 ⓒ권오상
acrylic on plywood, varnish, resin, 51(h)x35x20cm, 2019 ⓒ권오상

<가구>는 <릴리프>와 <뉴 스트럭쳐> 등을 제작하고 남은 부분을 재료로 만들어졌다.¹⁴⁾ 실재하는 물질적 재료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사다리나 작업대와 같은 오브제와 사진 이미지를 결합한 <작업대 & 호이어 Worktable & Heuer>(2013), <두상 & 토르소 Head &>
Torso>(2014), <사다리 & 고기잡이살쾡이 Ladder & Fishing Cat>(2013) 등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민기와의 협업을 통해 권오상은 자신 앞에 놓인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맥락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의미 생성의 장을 펼친다. 이번엔 이미지가 아닌 물질이다. 재료와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며 무언가를 만드는 작가는 주변의 어떤 재료든 사용하기에 적절한 방법을 찾아낸다. 작품을 제작한 뒤 남은 잔여물을 모아 이어 붙인 구조물이 가져오는 가치의 역전은 재구성과 창조의 사이 어딘가에 놓인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가구> 역시 변화와 지속을 응축한다. 그의 작업에 처음 등장한 가구라는 형식, 예술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오브제,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변화라 하겠다. 그러나 <가구>는 공간 속에 놓인 조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지속이다. 많은 사물 중에 왜 가구였을까? 이유는 공간에 있다. 가구는 조각이 그렇듯 실제 공간에 놓이는 것이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공간을 점유하는 오브제라는 점에서 조각과 유사하다. 이번에도 조각이다. 추상적인 형상만을 제공하는 조각인 <가구>는 조각 그 자체와 공간을 경험하는 데에 더 몰두할 수 있게 한다. 관객의 시선은 매혹적인 가구의 실루엣을 따라간다. 합판 표면의 붓질과 레진(resin)에 남은 손의 흔적은 마티에르(matière)를 전달한다. 만지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촉감. 가구 조각의 뚫린 부분 너머로 공간이 보인다. 또 하나의 실루엣이 뒤따른다. 감각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이다. 공간에 집중해본다. 그것으로도 만족할만하다. 그런데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특정한 공간 속에서 특별한 조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관계적이다. 그물망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다시 생각이 시작된다. 끝난 줄 알았던 감상은 새로운 국면을 향한다. 이번에는 이것이 조각인지, 가구인지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타임 루프(time loop)에 빠진 듯 그렇게 의미 생성이 다시 시작된다.
권오상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어진 시대적 조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작가의 시선은 늘 현실을 향한다. 그의 조각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익숙한 현실의 부분이다. 그는 상상의 나라를 창조하지 않는다. 작가는 분명 실재하는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재구성한다. 그럼에도 완성된 이미지는 현실에서 한 발을 살짝 떼고 있는 듯하다. 상상의 나라보다 더 환상적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권오상은 미술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미술은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반영이자 현실의 반영이다. 그것의 해석과 가치 판단 모두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미술이 온전히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도 없다. 그것은 때때로 현실을 벗어난다. 현실에 기반하지만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익숙하지 않음을 전달한다. 낯섦은 새로움과 연결된다. 만질 듯 만져지지 않는 예술. 사람들은 그런 미술은 기대한다. 그리고 권오상은 이 모두를 만족시킨다.
권오상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생각의 타래가 더욱 복잡해진다. 풀어내려고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 엉킨 타래를 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냥 그 채로 작품을 즐길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