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09.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하태범』 (2019)의 「평론」 (pp. 7-32.)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화이트 - 거울 미로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1. 프레임(frame)
“나의 작업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사건의 증거와 같은 보도사진을 재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직 뉴스 기사를 통해 그 사건을 들여다보는 제삼자이다. (...) 나는 뉴스 기사를 보는 잠시 동안만 그 사건을 이미지로 경험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일상으로 돌아간다.”¹⁾

하태범은 <화이트 White> 시리즈에서 보도사진을 통해 만나는 세상을 미니어처(miniature)로 만든 뒤 그것을 촬영해 사진으로 보여준다. 세상에서 일어나 는 사건 사고, 재난, 폭력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스미디어(mass media)와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작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흰색이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 버린 낯선 세상은 눈이 온 새벽 풍경 같다. 눈이 주는 낭만적 분위기에 빠져들 찰나, 냉기가 엄습한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눈의 여왕이 지배하는 왕국에 들어선 것 같다. 현실에 근거하지만 현실의 맥락에서 살짝 발을 뗀 세계다.
이 새하얗고 새하얀 세상은 뉴스와 보도사진이 가진 양가성을 교묘하게 담아낸다. 매스미디어는 분명 세상을 더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 잊혀졌던 사건들의 기억을 되살린다. 거짓을 밝혀내고 진실을 찾는다. 그러나 때때로 매스미디어는 세상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 감출 수도 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진실이 숨겨지고 거짓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보도사진은 카메라에 맺힌 특정한 순간의 이미지다. 선택되고 편집된 이미지다. 과장하거나 생략하기도 하고, 필요 이상으로 고조된 희망과 절망을 전달하기도 한다.
매스미디어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 「눈의 여왕 The snow queen」 (1845)에 등장하는 거울처럼 돌변할 수 있다. 동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사악한 요정이 만든 거울은 모든 것을 추하고 나빠 보이게 한다. 거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흉측하게 변한다. 악마의 손에서 벗어나 수억 조각으로 깨진 거울의 파편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속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악한 것만 보거나 세상을 왜곡시켜 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²⁾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지금의 우리가 겹쳐진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일까? 동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우리의 세상도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매스미디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여전히 뉴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외부적인 어떤 것의 침범이나 영향이 최소화된 순백의 정보처럼 여겨진다. 보도사진 역시 그렇다. 그것은 현장 그 자체를 포착한 것이다. 일종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도사진을 사실 그대로의 이미지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뉴스가 그렇듯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논리, 이데올로기, 시대정신,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이나 취향 등에 영향받을 수 있다. 투명해 보이지만 투명하지 않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했듯 보도사진은 뉴스를 읽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보도사진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며 현실 일부를 송신하는 이미지의 기록일 뿐이다.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기도 하다.³⁾ 애초에 사진이 그렇다. 사진은 특정한 사람에 의해 포착, 촬영, 편집, 각색된 한순간의 이미지이다. 일반적으로 사진에 찍혔다는 것은 그 순간 현존했다는 의미이지만, 사진 촬영에는 화면을 구성하는 과정이 포함된다.⁴⁾ 사진은 자연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인위적인 의미를 소유한다. 그것은 의미가 함축된 상징이다. 사진은 가치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사회적 움직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사진을 찍는 행위뿐 아니라 보는 행위에도 사회문화적 착색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⁵⁾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입장에서 구축된 논리적 체계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보도사진을 촬영하는 사진작가에 의해 한 번 걸러지거나 변형된 사진을 우리가 볼 때 한 번 더 왜곡이 일어나는 거다.”⁶⁾ 따라서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록의 경험은 불가능하다.
모든 색이 지워졌다. 아니다. ‘화이트’가 모든 색을 덮어버렸다. 어느 쪽이든 하태범이 보여주는 흰색 세상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현실로부터 멀어진 보도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

<Syria-1> pigment print & facemount, 120x180cm, 2016 ⓒ하태범

한편 손으로 만든 미니어처(miniature)를 보여주지 않고 그것을 촬영한 사진만을 보여주는 형식은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것에 익숙해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투영한다. 작가는 미니어처를 만들 때 자신이 선택한 보도사진의 시야(view)와 일치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형태를 왜곡하며 미니어처를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사진들도 하태범의 작업처럼 계산되고 조율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미니어처와 같은 세상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텔레비전,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의 시대다. 인간 시야의 한계는 사라졌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우리는 더 좁은 세상에 갇히게 되었다. 물질적 실체가 눈앞에 있음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사각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봐야 하는 <화이트-윈도우 White-Window>(2013)는 그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재난, 전쟁, 참사, 화재. 컴퓨터를 켜고 이 단어들을 검색해 본다. 사건 사고 뉴스들이 사진과 함께 등장한다. 자극적인 글귀도 눈에 들어온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의 뉴스들도 함께 찾아진다. 대부분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이러한 뉴스와 보도사진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우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덤덤하다. 실제 현장을 경험하지 못한 심리적 거리감 때문인가? 현장보다 더 강한 현장감에 익숙해져 웬만한 충격에는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인가? 더 이상 쏟아낼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보도사진은 인공적으로 현장을 만든 것이 아님에도 일상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고통과 연결된 것일 때 사람들은 큰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착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한 자극이 반복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무색무취가 될 것이다. 사진이 소비자인 대중들의 행동을 조작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⁷⁾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선택한 흰색은 보도사진을 무의미한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만의 어떤 색도 없이 뉴스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 세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각적 구현 가능성을 작업을 위한 사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작가의 행위 역시 차갑게 느껴진다. 사진과 영상의 시대, 이미지가 뉴스 생산에 있어 중요한 조건이 된 이 시대의 모습 그대로다. 상상 이상으로 매스미디어에 큰 영향을 받는 오늘날의 모든 순간은 이미지로 촬영되어야만 실존하는 현실이 된다. 매스미디어에 많이 노출될수록 그것은 더 생생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결말이 있다. 생생한 현실의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무뎌진다. 무언가를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된다.⁸⁾ 순간 앤디 워홀(Andy Warhol)의 <1947 흰색 1947 White>(1963)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워홀은 죽음과 재난(Death and Disaster) 시리즈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를 나열해 끔찍한 죽음과 재난의 현장을 기계적으로 반복된 이미지로 제공했다. 죽음까지도 일상이 되거나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다.⁹⁾
무뎌진 시선은 이제 더 충격적인 새로운 뉴스로 향한다. 끔찍할수록, 처참할수록 더 주목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에 생산될 뉴스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 <나이트 크롤러 Nightcrawler>(2014)에서 그려내는 상황을 허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 사건의 진실은 사라지고 강렬한 이미지만 남는다. 현실은 이미지로 전환되고 이미지는 그렇게 실재가 되었다. 이제 이미지의 생산자들은 스펙터클(spectacle)을 선사한다. 감정은 극도로 과잉되거나 생략되고 구체적인 삶들은 실존하는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다. 실재하는 삶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이미지로만 부유하는 세상이 전부가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를 인식한다고 하여 스펙터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¹⁰⁾
잠시 미니어처를 만드는 행위 자체로 돌아가 보자. 전술했듯 하태범이 일련의 작업에서 손으로 만드는 과정이나 미니어처를 공개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보여주었던 것은 실재가 사라진 현실을 보여주기에 효과적이다. 그러나 결과물에 함께 놓이지 않는다고 해서 작업 과정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어처 자체가 전시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만드는 행위는 촉각적이다. 이미지가 아닌 실존하는 물질 자체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실존 자체가 되는 시대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원래 실재하는 대상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촉각이었다. 스펙터클의 시대는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통로라 여겨지는 시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 리 가장 추상적이며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¹¹⁾

2.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현실의 이미지화는 뉴스에 등장하는 분쟁 지역이나 참상의 피해자들 역시 오직 이미지로 존재하게 만든다. 극대화된 처참함은 실존하는 인간을 증발시킨다. 그로부터 정형화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반복적으로 복제된 것 같은 이미지는 사건의 현장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존재하는 불행의 획일화를 강화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보도사진을 스쳐 지나간다. 현실이 현실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이런 스테레오타입은 구호단체 광고에서도 찾아진다. 비영리기관인 구호단체의 광고는 모금과 후원을 독려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움이 필요 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구호단체들도 증가하면서 모금 활동에도 경쟁적인 자본주의 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했다.¹²⁾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감정적 동요를 끌어내기 위한 이미지들이 소비되고 있다. 조금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광고에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왜 구호단체의 광고들은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태범은 <화이트-시선 White-Line of sight>(2014~2015)에서 이처럼 정형화된 사람들의 이미지, 즉 동정심을 유발하는 광고 이미지인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특히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슬픈 눈의 아이는 우리와 눈을 맞춘다. 앙상한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피에타 Pietà>(1498-1499)를 연상시킨다.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불쌍한 아이는 동정심을 극대화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대중이 예상하는 보편적 의미를 전달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소비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젖어든다. 기부하며 자신의 선행에 만족한다. 진짜 이야기는 더 이상 전달되지 못한다. 기부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그들의 선행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모든 과정에 인간의 위선적 태도가 깔려 있다고 말한다. 불쌍하게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일정 금액을 기부하며 안도의 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작가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과연 구호단체 광고에 등장하는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가 그렇게 전 세계에 송신되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광고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구호단체의 광고가 정말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매스미디어가 자본의 영향을 받듯, 경제적 논리에 물든 것은 아닌가?’ 작가의 이런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이 사회를 바꿀지도 모른다.
<신 Scene>(2017)에는 뉴스와 광고가 생산하는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보는 매스미디어 속 이미지들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특정한 프레임에 맞춰 제작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무대의 뒷면은 엉성하다. 특별한 무언가가 숨겨진 것도 아니다. 연극은 제한된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한정된 현실 공간에서 이뤄지지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전 세계를 누빈다. 연극 참여자들과 관객들의 동의하에 무대 공간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뛰어넘는다. 우리가 보는 보도사진도 마치 연극처럼 짜인 구성에 종속된 것은 아닌가? 시나리오에 맞춰 무대에 선 배우처럼 사람들을 작동시키는 것은 아닌가? 작가는 의심한다. 작은 무대 위의 이미지는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무대의 연극을 보며 세계 전부를 봤다고 착각하고 있다.
누군가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전적으로 신뢰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각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때로는 맹목적인 불신에 빠질지도 모른다. 신뢰와 불신 사이,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Illusion-1> acrylic on photo, 19.0x27.6cm, 2017 ⓒ하태범 이제 작가는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한다. <환영 Illusion>(2017)에서 참사 현장의 배경을 지워 사람들만 남은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사라진 현실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하얀 물감으로 지워진 세상이다.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하늘도 땅도 구별되지 않은 평평한 하얀 공간에 놓인 사람들. 새하얀 눈밭에 서 있는 것 같다. 범주와 정형에서 분리된 사람들. 평범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웃고 있다. 어머니와 아이는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는 편안해 보인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일상이 있다. 그들은 하염없이 불행하고 슬프기만 한 이방인이 아니다. 매스미디어가 우리에게 환영을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미지를 보며 일어나는 우리의 감정도 환영일지 모른다.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매스미디어 속 정형화된 이미지가 과연 진정한 울림을 가져올 수 있을까? 물론 반대의 질문도 가능하다. 정형화되었다고 하여 무의미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어느 쪽으로도 쉽게 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눈이 쌓인 새하얀 풍경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다시 새하얀 세상으로 돌아왔다. 뉴스의 처음을 생각해본다. 뉴스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구호단체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까? 눈의 근원은 물이다. 물은 어디로든 흐를 수 있다. 잠시 얼어 정지했을 뿐이기에 그 잠재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이 녹으면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작가가 던지는 양가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찾아질지도 모르겠다. 눈이 녹아 따뜻한 세상이 될지, 더 냉혹한 세상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눈은 언젠가 녹아 흐를 것이다.

3. 폭력성
“인간에게는 잔인함의 본성, 폭력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폭력성이 잔잔하게 드러나는 것이 나의 작품이라 생각한다.”¹³⁾

오늘날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불행과 고통을 자주 목격한다. 그 대표적인 통로는 매스미디어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뉴스에는 정보 전달을 이유로 항상 끔찍한 사건 사고가 등장한다. 오늘날 이미지 없는 뉴스 기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쟁과 테러, 살인, 화재, 교통사고, 자연재해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함께 한다. 그런 뉴스를 볼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애도의 마음을 갖기도 한다. 누군가는 호기심을 갖고 신기해하며 구경하기도 한다.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사각 프레임은 끔찍한 사건 사고와 재난의 참상을 볼거리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프레임은 나와 끔찍한 사건의 안정적 거리를 보장하며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도록 돕는다. 때로는 볼거리를 위해 처참한 사진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기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개인의 존엄이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뉴스의 클릭 수를 올리는 데에는 자극적인 글귀나 이미지가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비난하면서도 궁금해하고 기사를 클릭한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잔혹한 사진이 업로드된 기사를 사람들이 클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인자를 비난하면서 잔혹한 살인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 고발에 동참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White-Bombing> Video & Installation, mixed media, 00:03:00, 2012 ⓒ하태범

<화이트-더 베일 White-The Veil>(2011)에서 하태범이 만든 종이로 만든 무기들과 <화이트-폭격 White-Bombing>(2011~2012)에 등장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폭탄은 장난감 같다. 실제 사건이 가진 무게감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진다. 마치 게임을 하듯, 영화를 보듯 참상을 마주하는 현실의 상징물이다. 우리는 때때로 뉴스보다 영화나 게임을 더 실재처럼 인식한다. 우리는 영화에서 뉴스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하며 현장감 있는 사고들을 수없이 마주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악당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고한 희생자들이 더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영화를 본다. 게임이란 틀 안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어진다. 현실이 아니기에 괜찮다, 현실과 가상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며 넘기기에는 그 정도가 예사롭지 않다. 이제 우리는 영화를 보듯 뉴스를 본다. 인간의 폭력성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이기에 후천적으로 잔인해지는 것인가?
<화이트> 시리즈의 첫인상은 폭력적 욕구를 극단적으로 억제하는 것 같다. 폭력적 순간을 엿보려는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은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새하얀 세상은 ‘폭력과 처참함이 사라졌을 때 당신은 보도사진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하태범은 가볍게 소비되는 이 시대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하얀 도화지를 제공한다. 잔혹한 이미지들이 과잉된 시대에 잠시 휴식을 주는 것 같은 낯설게 하기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부터 재고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탁월한 주의 환기의 방법이다. 흰색의 풍경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속 보도사진을 보듯이 이미지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개인적, 사회적 금기나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참사에 특히 주목한다. 그것은 볼거리와 안도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죽음(의 위협)과 관련된 뉴스는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자연히 더 많이 게재되고 조회된다. 경제적 이윤과도 연결된다. 윤리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일어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막기는 어렵다.¹⁴⁾ 그렇다고 사건 사고 뉴스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도덕적인 반응만 보여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사진들은 사회적 정의와 윤리를 실현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 어느 한쪽의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또 있다.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폭력성과 필연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폭력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세상의 갈등과 부조리를 폭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알리기 위한 사진과 말초적 감각을 자극해 이윤을 얻기 위한 사진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당신은 소비되기 위한 폭력과 금기를 깨고 저항하기 위한 폭력을 완벽히 분별할 수 있는가?
분명 사람들은 끔찍하고 처참한 재앙의 이미지에 끌린다. 폭력과 불행, 잔인함과 악함에 대한 끌림은 선함과 사랑에 대한 끌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¹⁵⁾ 그 증거는 매우 오래전부터 찾아진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추의 역사 Storia della bruttezza』(2007)만 보아도 많은 예술적 결과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화와 역사화에는 잔혹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수많은 죽음의 순간이 아름답게 묘사된다. 때로는 끔찍한 사건을 다룬 예술 작품이 지나치게 시각적으로 정제되어 현실의 참혹함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침몰 위험에 놓인 배와 폭풍우의 장면이 그려졌다. 전쟁과 재해 속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모습이 재현되었다. 정신분석학은 폭력과 혐오, 악과 증오, 파괴 등에 주목한다. 예술은 추와 혐오를 미로 승화시킨다. 미는 애초에 추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¹⁶⁾ 그렇다면 예술에서의 폭력은 어느 선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그에 관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정할 수는 있을까? 동시대 미술의 많은 작품들이 그와 관련된 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미술의 역사에서 유의미한 작품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제 <화이트> 시리즈는 폭력의 이미지를 미적으로 관조하는 사람들의 차가움을 보여주는 통로가 된다. 얼마나 차갑길래, 얼마나 폭력성에 익숙해졌길래 그와 같은 순간을 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인가? 긴장감이 고조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양가성이 숨어있다. 폭력적 이미지가 하태범에 의해 작품이 되는 순간 원래 사건이 가진 본질이 한 번 더 희석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다루는 것일지라도 예술이 되면 현실로부터 멀어짐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참사 현장의 기록도 아니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아니며, 그저 시각적으로 감상할 만한 미적 대상이 된다. 어찌 보면 끔찍한 기록이 미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 가장 폭력적인 무언가를 함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부분까지 계산함으로써 양가성과 자기모순을 스스로 인정한다.
하태범은 보도사진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현하고 촬영하는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미적) 취향을 배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한계를 갖는다. 아무리 배제한다고 해도 작가의 취향이 1%도 담기지 않는 상황은 불가능하다. 재현 가능성이라는 기준에만 근거해서 사진을 선택한다 해도 작가가 특정한 보도사진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무언가 끌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작가의 취향이 담길 수밖에 없다. 세상은 그렇게 하얄 수 없다. 흰색 아래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 이러한 모순은 객관성과 사실성, 중립성에 대한 믿음의 완벽한 실현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성찰로 이어진다.
사각의 프레임 역시 예술의 영역을 강조한다. 작가는 현실 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무한한 상상과 확장이 일어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어서 사각의 프레임을 고수한다. 공감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프레임은 우리를 현실에서 표현의 세계로 옮겨가게 한다. 그것은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다.¹⁷⁾ 사각의 프레임은 회화라는 장르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되어 온 하나의 틀이다. 회화는 실재하는 공간에 놓이는 조각과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그것이 환영의 세계임을 알지만 사각의 프레임을 또 하나의 독립된 세계처럼 인정한다. 마치 연극 무대를 독립된 세계로 인정하는 것과 유사한 원리다. 그런데 이 사각의 프레임은 컴퓨터나 텔레비전의 프레임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세상이다. 그렇게 하태범은 프레임 안의 세상을 한 번 더 프레임 안에 넣어 자신의 세상을 창조한다.
끔찍한 현장의 사진들 중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을 손으로 만들고, 촬영하고, 작품으로 선보이는 작업 과정이 반복된다. 스스로 밝히듯 그 과정에서 작가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때로는 잔혹한 장면에 매혹된다. 이 양가적 모습은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를 포함한 우리가 폭력에 완전히 함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두가 폭력적 사진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폭력적 이미지는 계속 생산된다. 변형되고 각색되어 재생산된다. 한쪽에서는 폭력을 더 끔찍하게 재생산하고 소비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적 이미지를 통해 현실 속 폭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중적 모순의 나선은 끝없이 우리를 둘러싼다.
궁극적으로 하태범의 작업은 보도사진 속 폭력과 비폭력을 성급히 이분화하는 시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하태범이 만든 하얗게 변한 세상은 한정 지음을 벗어난다. 색이 없는 세상이 생성하는 의미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펼쳐진다. 수많은 색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순백이다. 흰색은 시작이다.

4. 새하얀 역사화
19세기까지 재현은 미술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중요하게 여겨졌던 장르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개인 혹은 공동체의 역사를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특히 인간의 존엄함과 위대함을 증명하는 영웅이나 위인의 모습, 사실과 사건 등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자연히 전쟁, 순교, 죽음 등의 주제가 많이 다뤄졌다. 역사화에서 기록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예술 작품으로서 작가의 편집과 각색, 예술적 창조 과정도 중요하다. 실증적 기록과 예술적 표현이 결합된 장르인 것이다.¹⁸⁾
보도사진을 그대로 재현하는 하태범의 작업은 역사화와 같다. 그런데 하태범의 역사화는 찬란한 업적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와 어두운 면을 다루는 역사화이다.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된 세계, 문명의 발달도 막아낼 수 없는 지진과 쓰나미(tsunami).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현재성을 갖는다. 역사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다. 동시에 역사는 그것을 읽는 시대의 모습도 담아낸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현재형이다. 하태범의 하얀 역사화 역시 그렇다. 작가와 우리가 사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의 역사화에는 무엇보다 하나의 권력이 된, 동시에 권력에 지배받는 매스미디어와 우리의 관계가 녹아 있다. 텔레비전과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첨예한 사회정치적 갈등과 그 잔해, 불완전한 인간 사회의 흔적들이 담긴다.
역사화의 역할은 오늘날 매스미디어로 이관된 듯하다. 문자의 발명으로 기록의 시대가 열렸다. 인쇄술은 기록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전시켰다. 사진은 이미지의 기록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넘쳐난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직접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생산된 이미지가 세계를 이해하는 주요한 방식이 되었다. 보도사진 한 장이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그 자체로 역사이자 스스로 역사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사진과 동영상은 곧바로 역사적 기록이 된다. 뉴스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동체의 기억이 될 것이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숨긴 연극이 역사의 중대한 기록이 될 수도 있다. 뉴스가 역사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 더 예민하게 대해야만 한다. 그것이 과장과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지 분석하고 문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저널리스트와 신문사, 방송국의 관점과 해석, 가치판단은 무엇인지 판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뉴스를 올바르게 읽고 있는지 숙고해야 한다.

<Facade 1> stainless steel, paint. 150x300cm, 2019 ⓒ하태범

최근작으로 올수록 하태범은 보도사진을 원본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사진 속 이미지의 일부를 제거한다. 일부만을 선택해 부조로 제작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의 주된 원인은 역사 혹은 매스미디어의 기록이 얼마든지 선별되고 삭제될 수 있음을 보다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과거에도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더 쉽게 조작될 확률이 높아졌다. 우리가 허구라 믿었던 것들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뉴스가 그렇듯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객관적 역사란 가능한 것이었을까? 작가가 아무리 사실적으로 만들어도 미니어처는 가짜다. 그것은 보도사진보다 한 번 더 정제되고 포장된 것이다. 실체가 아닌 환영을 사실적으로 한 번 더 재현하는 작업은 신기루 위에 신기루를 쌓는 일과 같다.
오늘날 가짜 뉴스(fake news)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가짜 뉴스는 정치적이거나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되는 거짓 정보나 사실 검증이 되지 않은 채 허위 포장된 정보 등을 뜻한다. 정보통신기술, 소셜미디어(SNS)의 발전과 대중화로 누구나 뉴스 생산자와 유통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이는 상호소통이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적극적인 뉴스 생산자이자 송신자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부정적 결과도 만들어졌다. 합리적 참여와 토론이 아닌 의도적으로 조작을 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특정한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맞춤형 뉴스를 확산하여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시키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도 증가했다. 뉴스의 객관성이나 정확성과 상관없이 자신의 취향이나 신념에 맞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확증편향도 가짜 뉴스를 성행하게 했다.¹⁹⁾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를 거짓으로 치부하기도 쉬워졌다. 가짜 뉴스들은 사건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뉴스가 된다.
하태범이 진행하는 선별 작업은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뉴스(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겪어도 서로 다르게 파악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하나의 사건에 전혀 다른 증언과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개인의 경험과 세계관, 이익 관계 등 다양한 요인들의 영향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개인이 흡수하기엔 너무 많은 뉴스가 쏟아지는 시대를 반영하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싶은 뉴스, 내가 믿고 싶은 뉴스만 보고, 듣고, 믿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역사가 된다.
스펙터클은 자신의 과거를 고치고 수정한다. 자신에게 불편한 것들을 함구한다.²⁰⁾ 스펙터클에 저항할 여지가 없는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하는 능력은 저하된다. 대화와 토론 같은 소통을 통한 논리적 사고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스펙터클의 권위를 닮기 위해 비논리적이 된다. 압도적인 이미지만 쏟아질 뿐이다. 누구도 그것을 분석할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²¹⁾ 결국 스스로 찾아야 한 다. 노력의 과정이나 결과가 오류와 모순에 빠질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 중 하나가 하태범의 작업이다. 물론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이 대안이나 해결책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와 질문하기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하태범의 작품을 보면서 물음표를 동반한 문장이 계속 생각나는 이유다.
하태범은 오히려 어떤 힌트도 없는 새하얀 미로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고민하기 위한 미로.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미로를 통과하는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유의미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