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4. 06. 19.

아포리아를 쏟아내는 이상한 시공간¹⁾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영원이지?”라고 물으니, “어떤 때는 1초만으로도 영원일 수 있어.”하고 하얀 토끼가 대답한다. 잠깐이지만 모든 것이 영원히 얼어붙는 것 같은 꿈이 있다.²⁾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시간은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규칙이자 질서이다. 언젠가부터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여겨져 왔다. 60초가 1분이 되고, 60분이 1시간이 되며, 24시간이 하루가 된다. 365일이 모여 1년이 되고, 기록된 인간의 시간은 기원후 2000년을 넘어섰다. 거창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당장 나의 하루만 보아도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춰 모든 일이 진행된다. 일상의 장소 곳곳에는 시계가 놓이고 사람들은 수시로 시계를 확인한다. 수치화된 시간을 제외해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 아니 무생물까지 시간에 종속된다. 인간은 자신이 시간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선택한 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마음대로 앞이나 뒤로 당기거나 미룰 수 없고 정지시킬 수도 없다. 무엇보다 생명의 유한성은 시간과 밀접하다. 갓난아이는 점점 자라 성인이 되고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인간의 일상과 실존 모두에서 시간은 인간을 지배해왔고, 그런 만큼 고민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과학도, 철학도, 그리고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과 시간을 말할 때 세계시(와 표준시)를 빼놓을 수 없다. “공유하게 된 시간을 계산하거나 측정할 수 있게” 만든 “허구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선”인 그리니치 자오선(Greenwich meridian)을 토대로 하루의 길이가 결정되었고, 현실적인 인간 세계의 질서가 효과적으로 구축되었다. 보편성과 통일성을 기반으로 인간 사회를 체계화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세계시의 가장 큰 유용함이다. 그리니치 자오선을 기준으로 중심과 상대적인 위치도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시간의 체계화는 세계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통일에 기여했다.³⁾ 이후 시간이 한 방향으로, 어디서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는 믿음이 공고해졌고, 시계는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알려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간은 시간을 수량화하고 시계는 시간을 측정한다. 그러나 지금이 몇 시인지를 지칭할 뿐 시계는 시간이 무엇인지 본질적인 답을 하지 못한다.⁴⁾

곽혜은, 김망고, 레트릭스, 서유리, 신제현, 윤모영, 이비주, 이정민, 정만근, 최소리, 홍성용, <눈먼 시계공> 청년예술청, 2023, 도판 제공=신제현

프로젝트 <눈먼 시계공>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시간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잘 안다고 착각한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체계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자연을 비롯한 이 세상이 완벽한 시계공이 만든 것처럼 정교하게 설계되고 맞춰졌다고들 생각하지만, 실재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 세계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눈먼 시계공이 만든 것처럼 부정확하고 불완전하다.”⁵⁾
게다가 권력의 불평등은 시간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시간조차도 제국주의적인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이유로 곽혜은, 김망고, 레트릭스, 서유리, 신제현, 박정은, 이비주, 이정민, 정만근, 홍성용 등이 함께하는 <눈먼 시계공>은 인간이 절대적 규범이자 진리라고 믿는 시간의 역사와 의미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관점을 위한 틈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개인의 시간이 모두 다르게 흐른다면 이것을 하나의 시간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가 프로젝트의 기본 전제이자 질문이다.

“네가 나만큼 시간을 잘 안다면,” 모자쟁이가 말했다. “낭비한다느니 하는 말은 못 할걸. 시간도 인격이 있거든.” (중략)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면 시간은 얼마든지 너 좋을 대로 시계를 가게 해줄 거야.”⁶⁾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상대적이다. 매우 주관적이며 사회문화적이고 관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에 관한 규정과 사람들의 인식이 역사 속에서 계속 바뀌어왔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공간의 모든 지점에 다른 시간이 적용되기에 정말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자신만의 리듬과 속도를 가진다. 다양한 리듬 속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연결된다. 세계 속 모든 현상에도 특별한 고유 시간(proper time)과 고유 리듬이 있다.⁷⁾
이에 <눈먼 시계공>은 “관성적으로 받아들였던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시간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섯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 청각)을 활용한다. 사실 인간이 실제로 시간을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간접적으로, 은유적으로 경험한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형체를 비롯해 물리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 시간은 감각 기관을 통해 보거나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시계 초침과 분침의 이동,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변화 등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또한 감각으로 얻는 정보는 잠정적이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확인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⁸⁾
그러나 (특히 그것을 인지하는 상황이라면)이러한 한계는 역설적으로 시간을 규정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고, 시간의 다양성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곽혜은, 김망고, 레트릭스, 서유리, 신제현, 윤모영, 이비주, 이정민, 정만근, 최소리, 홍성용, <눈먼 시계공> 청년예술청, 2023, 도판 제공=신제현

참여자들은 6개월 동안 진행된 조사, 연구의 결과물을 보여줄 방법으로 “실험적인 연극”을 닮은 종합적인 퍼포먼스를 선택했다. 특정한 순간(상황)들의 연속이며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되는 과정을 선사하는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시간성을 갖는다. 또한 같은 시공간,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퍼포머와 관객이 실시간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시간성을 논의하기에 효과적이다. 계획된 대로 연습해 오차 없이 실행하지 않고, 현장의 즉흥성을 살리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눈먼 시계공>은 시간에 대한 과학적 관점의 변화를 전해주며 자기의 생각도 공유하는 천체물리학자 정만근의 렉처(Lecture) 퍼포먼스 <내가 가벼워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2023)로 시작한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갖추고 전문가가 강의하는 형식을 갖추지만, 지식의 전달보다는 무대에 선 배우가 독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트릭스(ReTrix)와 함께 제작한, 관객과 주변 환경(무게와 온도, 대기 상태, 소리와 진동 등)에 영향받는 시간을 증명하는 기계적 설치물 역시 작품이자 무대장치가 되어 연극성을 강조한다. 이후 진행된 참여자들의 퍼포먼스는 서로 병렬 혹은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시간에 대한 논의들 사이의 관계를 시각화한 것처럼 보인다. 신제현은 악기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물들에 행위를 더해 소리를 만들고, 작곡가 박정은은 “태평무의 빨라지는 몸짓과 발놀림에서 영감”을 받아 “수평적 시간과 수직적 시간의 맞물림과 충돌”을 음표로 표현했다. 그렇게 사물, 피아노와 타악기, 전자 악기의 소리는 <눈먼 시계공>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음(소리)이 울리는 바로 그 순간에만 발현되었다 사라지는 일시성, 그와 반대되게 여운을 남기며 뒤따라 나오는 음과 연결되는 지속성은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실제로 연주되기 전인 악보 상태일 때부터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을 소유하는 음악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간을 함축한다.
한편 신제현이 제작한 원형 구조물, 원형 구조물을 굴리는 사람들, 원형 구조물의 이동에 맞춰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무용수들, 무용수들을 촬영한 영상이 결합된 장면은 작가의 의도가 어느 쪽이든 간에 시선을 빼앗는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그런데 스크린의 영상만 보면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중력에 따라 변화하는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무용수(서유리, 이정민)들은 자신이 거스르지 못하는 외부의 힘 때문에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주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과 운동성의 인식”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핍진성을 효율적으로 높이기 위해 잘 만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간극을 보여주고,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일부일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시간에 관한 질문을 통해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당연시되는 논리와 규범, 권력에 질문을 던지는 <눈먼 시계공>의 주제 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영상만을 볼 것인지, 구조물과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볼 것인지는 선택의 영역이다.

곽혜은, 김망고, 레트릭스, 서유리, 신제현, 윤모영, 이비주, 이정민, 정만근, 최소리, 홍성용, <눈먼 시계공> 청년예술청, 2023, 도판 제공=신제현

기승전결이 없는 퍼포먼스는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며 저마다의 방향으로 전진한다. 관객들은 얼음이 물이 되는 과정을 손으로 만지고, 이비주가 구운 소고기를 씹으며 김망고가 담근 술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액체를 삼킨다. 이어지는 “물리적 시간성이 사라진 VR 공간”의 드로잉을 배경으로 돼지머리에 글을 새겨넣는 홍성용의 퍼포먼스는 시간에 따른 상태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기묘한 충돌을 일으킨다. 전술했듯 시간을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없으나 서서히 때로는 급격히 변해가는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확인시킨다. 그중에서 삶의 시작과 끝인 태어남과 죽음은 현실 속에서 순차적으로 인식되는 일이고 이 때문에 인간은 시작과 끝이 전제된 직선적 시간관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홍성용이 새긴 돼지머리 위의 문신은 이러한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눈먼 시계공>은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상태가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힌트도 숨겨 놓는다. 몸 안에 들어간 고기는 소멸한 것이 아니다. “꿀물은 술”이 되었을 뿐이다. 얼음은 물이 되어 흐를 수도 있고 증발할 수도 있으며 다시 얼음이 될지도 모른다.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실 사라짐을 가장 명확히 체험시키는 것은 냄새이다. 어쩌면 후각은 가장 연약한 감각일지 모른다. 냄새는 그 자체로 휘발성이 있고 후각은 쉽게 무뎌지고 기억하기도 어렵기에 소멸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후각과 관련해 곽혜은은 “시각과 청각에 특화된 삶을 사는” 인간은 “냄새 자체를 기억하기 어렵지만, 기억 속 냄새를 맡게 된다면” 과거를 지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추억의 시간을 담아내는 향들은 기억의 생성을 통해 순차적인 시간을 벗어나 현재 속에 현재가 된 과거를 뿌린다.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은 기억을 통해 세 겹짜리 특별한 끈으로 우리의 과거와(바로 직전의 과거부터 아주 먼 예전까지) 단단히 엮인다. 우리의 현재에는 과거의 흔적들이 떼 지어있다.”⁹⁾ 기억은 사라지는(사라진다고 믿어지는) 시간이 호흡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눈먼 시계공>의 참여 작가들 모두 다른 시간을 감각하고 전한다.
관점에 따라 예술은 시간을 붙잡아 영원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가까워 보인다. 예술가는 “인위적 수단으로 운동-삶-을 사로잡아 고정”하려 한다.¹⁰⁾ 예술가가 그것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으면 물리적으로든 의미적으로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에 머무를 확률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눈먼 시계공>은 –최소한 지금은-영원성을 향해 가지 않는 듯하다. 그보다는 조금은 산만하고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이는 이상하고 낯선 시간의 나라를 보여주려 한다. 처음부터 특정한 메시지나 정답을 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보다는 불신하고 끝없이 질문하기를 전파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아마도 소동 같은 이 실험(극)은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눈먼 시계공>에 참여한 작가들은 시간이라는 가장 굳건한 질서를 향한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며, 당연시되는 것들을 따르길 주저하고, 의심하는 예술의 역할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