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4. 09. 25.

강상우의 차원 이동 예술¹⁾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강상우의 작업은 현실과 상상, 경험(지각)과 사유, 이미지와 물질, 평면과 입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다른 이의 창작물과 자기의 창작물 사이를 넘나들며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작가는 주시-이동-정지-실현의 흐름을 반복한다. 주시-이동-정지-실현이 늘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유롭다. 그러나 정교하다.

1. 현실에 발을 디딘 상상
강상우의 작품들이 놓인 전시장은 쉽게 갈피를 잡을 수 없으나 시선을 뗄 수 없는, 아니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계속 바라보게 되는 시공간이다. ‘2023 타이틀 매치 《이동기 vs. 강상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듯 눈앞을 가득 채우는 형상들은 약간의 당혹감과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작품이라는 보물 상자에 담아내는 이미지와 이야기, 경험, 감정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끝없는 상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은 논리와 비논리, 확산과 내적 침잠 사이를 오간다. 기발하지만 난해한 서사들은 때때로 작가에게만 설득력 있고 유효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생각하고 만드는 데에 적용되는 정돈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우 주관적이고 특별한 취향이 두서없이, 그러나 꼼꼼하게 반영될 뿐이다. 작업에 묵직한 담론이나 통일된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도 없다. 주제나 형식에서 전개의 방향을 정해놓지도 않았다. <톰과 제리(Tom and Jerry)>(1940~)의 제리를 화면 속 이미지 그대로 가져와 입체적으로 구현한 <제리, 바보(Jerry, the Idiot)>(2004)에서부터 나이가 들어 발치(拔齒)하는 자신의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돌아보며 SF 영화 속 괴물처럼 위협적인 치아를 만든 <D(M)ental>(2017),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그린 회화 작품들의 배경 표현을 연구한 <수태고지의 뒤에>(2022), 해태제과의 ‘홈런볼’을 거대하게 만들어 1990년대의 기억과 작가가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던 시절을 환기하게 하는 <홍익볼>(2023)에 이르기까지 강상우의 예술적 행위는 파편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자유롭다.

<D(M)ental> 컬러 콩테, 석분 점토, 에폭시, 53×60×180cm, 2017, 도판 제공=강상우

개인적이고 조금은 폐쇄적이며, 초현실주의 미술가의 편집증적 사고를 통한 창작을 닮기도 한 작업 방식(과정)은 오직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흐름을 따라 선택하고 상상한 결과이다. 일례로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1964)에서 착안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 시리즈(The Giving Tree Series)>(2008)만 봐도 작가가 얼마나 예측불허이며 집요한지 알 수 있다. 강상우는 삽화 속 나무에 새겨진 머리글자 ‘M. E와 T’, ‘M. E와 Y. L’ 중 주인공도 아니고 인식조차 되기 힘든, 그러나 소년이 사랑에 빠진 것으로 추측되는 ‘Y. L’이 누구인지 상상을 펼쳐나가는 한편 “주체성이 없는 나무”와 “배려하지 않고 탐욕적인 소년”이라는 측면에서 줄거리를 해석해 나갔다. 엄밀히 말해 작가는 “자기 밖의 주위를 종합적으로 둘러보는 것보다 강상우 마음대로 하기에 관심이 있다.” “이론가가 아니라 미술가이기 때문에” 작품의 소재는 작가를 “자극하는 시각적 요소들에 집중되어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시선을 붙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²⁾ 그리고 자신을 매혹하는 현실의 이미지 혹은 현실 속 가상에서 시작된 상상은 작가가 불명료한 마침표를 찍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작품은 고정되길 거부하며 끝없이 관념연합을 생성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가진 창조성은 주체가 이미지를 만들고, 활성화하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에 상상하는 주체가 중요하다.³⁾ 바로 이것이 강상우가 자신을 자극한 이미지에서 작품으로 이어진 상상이 이후에도 종결되길 원하지 않는 이유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점토에 에나멜, 23x23.5x7.5cm 2008, 도판 제공=강상우

때로는 연상의 과정에서 과도한 감정의 전달이나 공포를 느끼기도 하는데, 이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예를 들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2008)는 어린 시절 본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Sleeping Beauty)>(1959)에서 착안했다. 그는 공주가 바늘에 찔려 쓰러지는 장면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작은 통에 넣어둔 개미의 몸이 분절된 것을 보고 경험했던 무서움을 병치해 공주의 모습을 입체화했다. 그리고 시점에 따라 마녀의 가시덤불만 보이게 제작했다. 한편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1983~1984)을 보며 재회의 희망으로 추억의 장소를 찾아간 오혜성이 자신을 위해 마동탁에게 져달라는 최엄지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장면의 시각적 표현에서 이상할 정도의 비극을 느꼈다. 이후 벌어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전승 신화의 기록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실명하는 오혜성의 행동 역시 압도적인 정서적 과잉, 두려움과 연민이 뒤섞인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⁴⁾ <비극을 부르는 비>(2009)는 그와 관련한 작가의 인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매력적인 상상의 잡동사니들로 창작의 타래를 뭉치고 펼치기를 반복하는 작가의 행위는 아이가 흙을 가지고 조물조물 작은 성을 만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일정 부분에서 자기만의 놀이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는 강상우는 예술적 상상에 빠지고 그것을 구현할 때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일상과 상상을 넘나들며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상상의 미술적 실현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작품이라 불리는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놀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 작가는 지향해야 할 목표나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외부에서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실패로 인한 불안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의 자기만족을 추구할 수 있다.⁵⁾ 이 때문에 강상우의 작품들은 때때로 불친절하고, 필요 이상으로 실험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가 어떤 것을 상상하든 언제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결론이 있다. 그가 선택한 이미지가 새로운 의미를 담은 무언가로 재탄생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느슨하지만 둔탁하지 않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가깝다. 또한 작가가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다고 여겨질 만큼 자의적인 해석을 담았음에도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놀이와 현실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지 않다.” 현실적 사물(요소)들이 놀이 세계의 사물로 전환될 뿐이다. 놀이의 세계는 “가상과 현실, 실재와 비실재, 무와 존재” 등과 연결된다.⁶⁾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작가에게 시각적 자극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보고가 그의 일상, 특히 대중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강상우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 뮤직비디오, 광고(와 상품) 속 상황과 이미지에 흥미를 느꼈는데 그것들을 소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로보트 태권 V(Robot Taekwon V)>(1976), <혹성 로보트 썬더 A(Planet Robot Thunder A)>(1981)를 비롯해 아기공룡 둘리나 까치가 주인공인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을 보며 만화가를 꿈꿨던 작가는 원작에 상상의 덧쓰기를 시도한다. 머릿속을 맴돌기만 해도 즐겁고 물리적으로 구현되면 더욱 좋다.

<자기는 손오공 1> 모터, 석분점토에 에나멜, 컬러콩테, 32×33×34cm, 2016, 도판 제공=강상우

그는 성인이 된 뒤 다시 보게 된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에서 톰과 제리가 서로의 언어를 몰라 대화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말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는 톰과 제리 외의 등장인물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했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제리의 외모에서 자신의 취향에 가장 맞는 모습은 무엇인지 찾아내기도 했다. 여러 컷을 그려야 해서 단순화되는 등장인물과 달리 “회화 작품과 같은 오라(aura)를 뿜어내는” 셀 애니메이션의 배경 그림들만 감상할 때도 있었다. 대중음악,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영화는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정말 “멋졌다.” 이 멋지고 매력적인 대중문화의 요소들은 당연히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고, 작가는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앨범 소책자(booklet)에서 작업의 원동력을 얻었다. 강상우가 드로잉이라 칭하는 작은 크기의 회화 시리즈에 토리야마 아키라(Toriyama Akira)가 사용한 색채의 영향이 보이고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1997)과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2005)의 장면이 그려진 것도 대표적인 사례이다.⁷⁾ 이밖에 대중문화와 직간접적으로 이어지는 강상우의 작품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80년대 TV 광고 시리즈>(2019~)나 <80년대 한국 영화 시리즈>(2022), <‘83 연기대상>(2023) 등에는 1980년대의 광고와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담겼고, <아픈 제만 Ill Zeeman>(2009), <자기는 손오공 1>(2016)과 <손오공과 자야 1>(2016)에는 상품 혹은 그와 관련된 만화 캐릭터가 등장한다. <베틀 넷(Battle. net)>(2018)은 2002년 파나소닉(Panasonic) 배 온게임넷 스타리그(OnGameNet StarCraft League) 8강전에서 보여준 프로게이머 임요환의 전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리 외에 아무도 없나요?> 복합재료, 35x30x37cm, 2007, 도판 제공=강상우

대중문화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영향 관계, 차용과 인용의 방식은 강상우의 작품 세계를 팝 아트(Pop art)와 연결하는 근거가 된다. 다만 강상우의 작업을 팝 아트적인 특성과 결부시킬 때는 고급(엘리트)과 저급(대중)으로 분리되던 이분법적인 문화의 위계가 사라지고, 예술과 상업적인 생산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 차용을 통해 일상을 예술로 끌어들여 미술의 독립성과 자율성, 고유성을 해체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다수가 선호하고 즐기는 대중문화 이면에 자리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과학기술의 발전 등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에 대해 적극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접어둔다. 그보다는 시각 예술가로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에 몰두한다. 엄밀히 말해, 강상우에게 위계와 분리에 대한 담론을 펼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작업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대중문화는 작가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에 그것에서 영감을 얻고 창작의 과정에서 다루는 것뿐이다. “긴장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착하게 되는 것들이 진실에 가깝다.”⁸⁾ 그에게 대중문화는 친근한 것이자 몰입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다. 예술 못지않게 압도적이고 강력한 상상의 원천이다. 오히려 작가는 팝적인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정해진 가치를 매기고, 그것을 굳이 낮춰 보려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가진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대중적인 가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어느 록스타의 인터뷰를, ‘바쁘다 바빠’라는 광고 문구로 유명한 제일파프(Jeilpap)의 펭귄 캐릭터와 결합한 <나는 파퍼가 아니야(I’m not a Popper)>(2011)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분리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비트는 것 같다. <그의 살과 뼈>(2023)에서는 자신을 감동하게 한 이현세의 연출력과 표현력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만화가라면 “정통 미술이라든가” 다른 “영역의 대가들”처럼 평가받아야 한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⁹⁾
적극적인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니었지만 일상과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얻는 만큼 강상우의 작업은 자연히 사회문화적인 이슈들을 담게 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과 숙고를 끌어낸다. 물론 작가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생각은 각자의 몫이다. <스타 차일드 1(Star Child 1)>(2015)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1968)에서 유인원이 공중으로 던진 뼈다귀가 우주선으로 바뀌는 장면을 물리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우주선을 장난감 크기로 만들어 실제로 소유하고 싶다는 강상우의 개인적인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상황과 맞물리며 발전해 온 과학기술을 떠올리게 된다. 폭력은 인류 문명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톰과 제리>도 그렇고 작가가 좋아하던 애니메이션들을 보면 폭력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로보트 태권 V> 시리즈는 과학자가 나오고, 로봇이 평화를 위협하는 적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무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유인원의 뼈다귀는 핵 폭격 우주선으로 바뀐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일 수도 있다.”¹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폭력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때로는 생존과 무관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한다. 만약 생존을 위한 폭력이라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다. “또 다른 폭력으로써만 폭력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이때 “대항의 성공, 실패가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승리자는 항상 그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때로는 직접적이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지만 “때로는 간접적이고 부정적인 희한한” 모방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¹¹⁾

<다크순풍 1> 캔버스 위에 컬러 콩테, 45.5×33cm, 2011, 도판 제공=강상우

강상우의 작업은 타자와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들을 고민하게 이끄는 면도 있다. 직관적인 예로 <모나리자(Mona Lisa)>(1503~1506)를 비롯한 고전 명화와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배경만을 그린 <외부초점 페인팅(Outer-focused Painting)>(2019~)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학적 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주인공이 아니어서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착안했다. <다크 순풍 3(Dark Soonpoong 3)>(2011)은 SBS의 <순풍산부인과>(1998~2000)의 연장방송과 종방에 관한 기사를 보고 <순풍산부인과>에 등장했던 집의 모형을 파편화해 밝고 즐겁게만 기억되는 인기 시트콤의 현실적 이면을 시각화한 것이고, <다크 순풍 1(Dark Soonpoong 1)>(2011)은 해당 드라마에서 희화화되었던 등장인물의 슬픔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으로 알아보는 아동 심리>(2012~2013)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미술 치료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심리를 단정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에 의문을 품고 시작했다. <80년대 한국 영화 시리즈>에서는 암석과 숟가락을 추상화한 형태를 각각 남성과 여성 인물에 겹쳐 그림으로써 1980년대 영화에서 묘사되는 고정적인 성 역할을 시각화했다. <80년대 여성 정장 시리즈>(2017), <여자의 변신은 무죄>(2019), <요리의 변신>(2019) 등에서는 1980년대 여성복을 비롯해 여성과 관련된 상품의 광고에 “미래지향적이고 전투적이며 당당한 여성의 모습”과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가사노동에 충실한 여성상이 혼재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담아냈다. 작가는 어깨가 강조되는 디자인, 바지 정장, 중성적인 헤어스타일이 조형적으로 멋져 보여 시각적 현실화를 시작했고, 다양한 형상으로의 응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주체적인 여성이 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많은 부분에서 광고는 현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했다. “그저 상품을 팔기 위한 이미지 혹은 막연히 미래를 예견하는 이미지였던 것도 같다.”¹²⁾

<여자의 변신은 무죄> 종이 위에 아크릴, 300×1064cm, 2019, 도판 제공=강상우

의미 생성의 결과가 어느 쪽이든 강상우는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현실과 가상, 작가의 내면 사이에 일어나는 엮임도 지속될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보편적 기능인 “상상력이란 현실 원칙에 대립되는 비현실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상상력과 이성은 상호 보완적이다. 또한 상상하는 주체는 사고와 분석의 주체와 대립하면서 균형을 맞추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한다.¹³⁾

2. 이미지가 물질적 현실이 될 때
강상우는 자신이 오랜 시간 즐겨 봤던 가상의 존재나 상황(이미지)들이 화면 밖으로 나와 물질화되었을 때 어떻게 보일지 꾸준히 상상하고 구현해 왔다. 이미지를 물리적 현실로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2차원과 3차원 혹은 가상과 실재의 차이를 탐구하고 본다는 것, 나아가 감각한다는 것의 본질을 고민하게 이끈다. 다만 언제나, 강상우의 모든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최우선의 동기는 시각적 흥미와 예술적 실험의 욕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이번에도 무계획적으로 시선이 머무는 대상들을 선택했으며, 장난꾸러기 같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첨가했다.
네덜란드 의류 브랜드 제만(Zeeman)의 상표에 등장하는 소년의 얼굴이 아이답지 않게 인위적이란 생각에 자연스러운 현실화를 시도한 <아픈 제만>에서는 간략한 선으로 그려진 도안을 콧물과 침을 흘리는 세밀한 볼륨을 가진 모습으로 변신시켰다. 한편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광고를 유튜브로 시청하길 즐기는 작가는 ‘롯데 손오공’ 과자 광고에서 하루 250만 개 판매에 놀란 듯 빠르게 눈알을 굴리는 손오공의 모습을 실제로 움직이는 손오공 두상으로 제작했다.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시각적으로 재미있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흑백(모니터)과 색채(현실), 평면과 입체, 이미지와 실체의 관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시대에 대중을 지배하는 광고의 영향력 등을 고민하게 한다. <제리, 바보>는 화면에서 한순간에 보였던 -작가가 판단할 때 가장 보기 좋은-제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그 형상이 틀어져 있어 애니메이션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간극을 확인시킨다. 실제로 가상 세계 속 인물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의상, 동작 등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 많다.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과장된 표정과 행동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고, 주인공이기에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혼자 빛(주목)을 받기도 한다. 현실이었다면 <어둠 속의 제리(Jerry In The Darkness)>(2008)처럼 제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정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불확정적인 가능성을 추구하고, 평면에서 입체, 영상(가상)을 아우르며, 미술 안의 형식과 미술 밖의 표현을 넘나드는 작업 방식은 소리로만 존재했던 라디오 광고를 토대로 실사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프로젝트 아젤리아(Project Azalea)>(2023)에서 절정에 달한다. 작가는 피부 연고인 아젤리아와 제작사의 로고를 입체로 만들어 영상에 등장시키고, 나란히 전시하는 방식으로 실제와 이미지의 선후관계와 원본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다크 순풍 2(Dark Soonpoong 2)>(2011)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강상우는 평면에 그려진 그림이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인, -자신은 오직 영상으로만 본-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입체로 만들어 해체한 뒤에 마치 회화를 걸듯 전시장 벽에 붙였다. 이는 처음부터 평면이었던 셀 애니메이션을 구현한 것과는 또 다른 상황으로 실재하는 물리적 현실을 촬영해 이미지(가상)로 보여주는 실사 영상의 정체성을 시각 예술가로서 숙고한 결과이다. <다크 순풍>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 2차원과 3차원, 가상과 현실, 이미지와 물질 사이에서 시각적으로 경험되는 모든 것의 실체를 추적하며 경계가 모호해진 지각 영역을 분리해 그 차이를 확인시킨다. 또한 모니터 안의 세상은 가상이며 그것을 현실에 이입하게 되면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 나아가 기대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산산조각 난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다크순풍 2> 석분 점토 위에 컬러 콩테, 가변크기, 2011, 도판 제공=강상우

<몽실통통> 시리즈는 이와 같은 맥락에 놓이지만, 만들어진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차이를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몽실통통 1>(2015)은 조립식 로봇이 담겨있던 상자로, <몽실통통 2>(2015)는 완성된 조립식 로봇으로 보이는데 둘은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닮지 않았다. 상자에 그려진 위풍당당한 로봇의 이미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몽실통통 2>는 볼품없는 불량품 혹은 실패작처럼 보인다. 로봇 그림은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바리 마사미(Ohbari Masami) 양식을 차용한 것이고, ‘몽실통통’은 문방구의 이름으로 둘 다 작가가 어린 시절 선망했던 대상이다. 상자에 그려진 완성품은 그 외관, 자세, 동작 모두 현실화하기 어렵거나 이상적으로 과장된 모습이다. 마치 어렸을 때의 작가가 문방구 몽실통통의 주인이 되길 꿈꿨듯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지만 바랄 수밖에 없는 하나의 판타지와 같다.”¹⁴⁾ 그리고 작가는 성인이 될 때까지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틈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년기의 향수(기억)가 더 이상 완벽한 모습으로만 남을 수 없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여 쓸쓸하기도 하다.

<몽실통통 1> 종이 판지, 목재에 오일, 색 목탄, 230×160×40cm, 2015, 도판 제공=강상우

작가 스스로 “아이 때는 동기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순수하니, 어른이 된 시점에서 당시의 생각과 경험을 다시 조망할 필요성이 있었다”¹⁵⁾라고 말하고 있지만 <몽실통통>은 일정 부분에서 스펙터클의 시대 혹은 이미지에 지배받는 현대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현대의 일상은 우리의 시각과 의식, 가치 판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권력으로 작동하는 이미지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과장 같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특히 상품을 포장하는 이미지는 소유의 욕망을 조장하기 위해 내용보다 외관, 사용보다는 교환(소비 욕구의 자극)을 강조하고 그것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겉치장에 치중한다. 스스로를 가장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권력화된 이미지인 스펙터클은 현대인의 정체성과 개성, 의사소통에 관한 주도권을 가지며, 이런 상황에서 현실, 실재의 세계는 가치를 잃게 된다.¹⁶⁾ “매개 없이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지고, 현실 세계는 오직 이미지로 변화된다.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이미지는 현실적 존재가 되며, 최면 상태에 빠진 활동을 야기하는 효과적인 동기가 된다.”¹⁷⁾
물론 강상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전술했듯 그는 어느 쪽이든 생각이 자유롭게 확산하길 원한다. 모든 것에는 음영이 있고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작가를 둘러싼 끝도 없는 이미지에 현혹될 때도 있으나 그것이 훌륭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가 꾸준히 이미지를 현실화하고 예술적 노동을 놓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강상우의 작업은 순간을 포착하는 전형적인 방법에 역행한다. <베틀 넷>을 살펴보면, 작가는 가상 공간에서 이뤄진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실제 공간의 역학을 이용한 임요환의 성취를 기념하고자 그 장면을 스티로폼과 석분점토(stone clay) 등을 이용해 실제 공간에 존재하는 입체로 만들었다. 마치 중요한 순간을 사진(이미지)으로 남기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게임 속 언덕과 건물, 일꾼, 그리고 게임 중에 생긴 뚫린 구멍까지도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동시에 복합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작가의 손길이 닿은 물질이 되었다. 이현세를 향한 오마주를 담아낸 <그의 살과 뼈>에서는 만화에서 보였던 현란한 굵기 변화의 필치와 명암 대비,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해 부조처럼 덩어리를 만들고 망점까지 입체화해 이현세의 만화에서 느낀 압도감을 구체화했다. <새로 나온 액션 페인팅(Brand New Action Painting)>(2023)에서는 스마트 기기(smart device)를 통한 시각 경험을 다룰 뿐 아니라, 스펙터클의 시대 이후 시각으로 대체되었으나 과거에는 “인간의 특권적 감각”이었던 촉각¹⁸⁾을 불러낸다. 다수의 입체 작품에서 발견되는 재료의 질감이나 거친 마감도 이미지 시대에 잔존하는 촉각성을 붙잡는다.
이러한 시도는 작가가 어렸을 때 극장이나 텔레비전에서 굉장한 경외감을 느끼면서 본 로봇이 장난감으로 출시되면 그것을 조립해 실제로 로봇이 활약할 간이 무대까지 준비해 놀았던 것과 닮았다. “그것은 평면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즐기다 촉각을 자극하는 입체를 만들고 움직임(퍼포먼스)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행위였다.”¹⁹⁾ 그리고 작가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이 모두는 스펙터클의 “대척점에 있는 직접 경험하는 것”, “몸소 체험한 것”, 즉 스펙터클로 인한 소외와 분리, 관조 이전의 상태, 구체적이고 일차적인 삶의 세계,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직접 만나고 관계하는 세계를 향한다.²⁰⁾

3. 사방으로 흐르는 중첩의 시간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나에게 소원을 물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5분만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으로 가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중략) 내 작품은 과거에서부터 왔지만, 과거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혼종적이고 낯선 무언가이다.”²¹⁾

강상우는 <더 하디스트 파트(The Hardest Part)>(2023)에서 1990년대 미국의 TV 방송과 2006년 콜드플레이(Coldplay)의 연주 장면을 합성해 동시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여주는 뮤직비디오를 차용한 뒤 평면(회화)과 입체(무대 설치)로 변주했다.²²⁾ 2차원과 3차원, 가상과 현실, 대중문화와 미술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로 합쳐진 과거의 영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강상우의 작업 대부분은 분명 과거를 향한다. 작품을 본 누군가는 향수에 빠지거나 자신이 몰랐던 옛일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작가가 과거에만 집착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상우는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지금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작가 본인도 자신이 현재에 머무르며,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의 산물들을 찾아보고 현재의 상상을 덧붙인다고 명확히 밝힌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을 옮겨 다니는 것 못지않게 그 위에 현재의 시간을 덧입히기를 즐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항상 차용된 이미지(이야기)가 갖는 시간, 작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상상해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두 개 이상의 시간 층(과 사이의 시간)이 함께한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틈은 공백일 수도, 공백이 아닐 수도 있다.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사이의 시간이 축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하디스트 파트(The Hardest Part)>, 캔버스에 아크릴릭, 291×707cm, 2023, 도판 제공=강상우

작업에 소환되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미 있었던 일의 저장인 기억은 과거의 것이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만드는 상상은 미래의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둘은 많은 부분에서 교집합을 갖는다.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지금은 과거에는 미래였던 현재이다. 아무리 정확하다고 믿어지는 기억도 현재에 복원, 재생산, 재구성된 것이며 이 과정에는 상상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작가는 상상을 통해 꾸며지고 변형된 기억(과거)을 다룬다. 반대로 상상은 무(無)에서 시작할 수 없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지식과 경험, 즉 기억을 토대로 발동한다. 그렇기에 상상에는 항상 과거의 무언가가 포함된다.²³⁾
과거의 한순간은 강상우에 의해 박제되었고, 작품이 되었다. 현실의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작품 속의 순간은 정지되고 예술이 되어 영원성을 획득했다. 많은 예술가의 목표 중 하나는 인위적으로 운동, 즉 삶을 붙잡아 고정하는 것이었다.²⁴⁾ 영원이란 끝없이 흐르는 것일 수도, 끝없이 정지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강상우의 작업에는 그저 과거라고 부를 수 없는 여러 겹의 시간이 언제나 공존한다. 시간의 포착, 흐름, 정지, 지속이 결합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각각의 시간은 끝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몬산토 미래의 집> 플라스틱, LED, 황동, 천, 스티로폼, 아크릴, 목재, 석분점토 위에 에나멜, 70×100×50cm(2), 2023, 도판 제공=강상우

작가가 과거의 사람들이 상상했던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포착하면 한층 더 흥미진진하고 미묘해진다. 현재와 만난 복고적 미래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향하며 전진하는 선형의 시간을 흐트러뜨린다. <몬산토 미래의 집>(2023)은 1957년부터 1967년까지 디즈니랜드(Disneyland)에 설치되어 관람할 수 있었던 몬산토(Monsanto Company) <미래의 집(House of the Future)>에서 착안해 주택 모형을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가 되어 버린, 과거의 사람들이 예측한 미래와 그것을 바라보는 현재를 표현하기 위해 당시에 첨단의 소재로 여겨졌던, 그러나 지금은 흔해졌고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게 된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두 개의 주택 중 하나에는 시간이 흘러 도래할 미래의 사람들이 보게 될 현재를 박제하기 위해 작가가 현재의 상징 중 하나라 여기는 아이돌(Idol)이 모여 멋지게 자세를 취하는 상황을 재현하고 그 아래에 ‘Monument of the Idoldoldol’이라고 적었다. 현재에 우상화된 아이돌의 형상이 미래에 위인의 기념조각상처럼 제시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반대편에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동면 캡슐 안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 인물상을 넣고, 캡슐 밖에는 미래에 대한 조지 오웰의 비관적인 예측에 반대하며 만든 백남준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1984)의 제목을 ‘Good Morning, Mr…’라고 적었다. 온전히 다 적지 않은 것은 백남준의 예측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²⁵⁾
과거의 사람이 예측한 미래를 이후의 사람(작가)이 마주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미래를 선보이는 <몬산토 미래의 집>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분리하는 시간 구조인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데 뒤섞여 있다. 오직 강상우의 주관적 선택으로 구성된 시간의 조형물이기에 파편적이지만 평행 우주를 연상시키며, 말 줄임표가 은유하듯 분리됨과 이어짐의 결과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현실 세계의 사정은 약간은 뒤죽박죽이다. “측정은 대략적이며 지식은 불완전하다.” 세계의 부분들은 느슨하게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중 하나가 결정된다고 하여 나머지가 결정될 수는 없다.²⁶⁾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강상우의 작품 속 시간은 비가역적 시간관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추구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진 독립적이고 유일한 시간의 틀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절대적인 규칙이자 질서로 여겨진다. 실제로 물리적 세계에서 경험하는 시간도 그러하다. 인간은 마음대로 과거나 미래로 향할 수 없다. 원하는 순간으로의 이동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일정하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다. 오늘날의 표준화된 시간 체계는 특정한 시기에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 뒤 인간은 점차 인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명확히 나누었고 역사(시간)는 직선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으며 현재는 과거와 엄격히 구별되었다. 서로 다른 층위를 갖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진보 혹은 이상적 목표(종착지)를 향했다.²⁷⁾ 그러나 강상우는 작가로서 시간의 어느 방향으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속 시간은 가역적이고 정지하며 혼재된다. 현재는 이미 그 자체로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로 구성된” 혼종적 순간이다.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흐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미래가 과거가 되는 순간이 현재라 불리는 순간이다. 시간의 방향성은 확정되지 않는다. 과거에서 미래로 향한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시간의 방향이 역전된다고 해서 비논리적이라 단언할 수 없다.²⁸⁾
작가는 시간을 편집해 새로운 이야기(서사)를 만들어낸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논리정연한 시간, 단일하고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은 깨지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 믿어지는 고정관념과 규범은 약화된다. 상대성과 주관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작가에 의해 시간이 혼재될수록 작품이 풀어내는 이야기도 풍부해진다. 시간은 서술적인 상태로 엮임으로써 인간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조건이 될 때 충만한 의미에 닿을 수 있다.²⁹⁾

4. 창작의 상호텍스트성
인간의 두뇌보다 더 자연적이고 위대한 팰림프세스트가 또 무엇이 있으랴? (중략) 당신의 두뇌 위에는 사고와 이미지와 감정이 빛처럼 사뿐히 한 겹 한 겹 내려앉아 영구한 지층을 이루었다. 각각의 층들은 과거에 지나간 모든 일을 파묻은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실제로는 단 한 가지도 사라지지 않았다.³⁰⁾

강상우는 작가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부터 관객이 감상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기충족적인 완전성도 가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차용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에 이전에 있었던 창작물(혹은 또 다른 무엇)과의 연결성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텍스트와 텍스트,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식의 총체”인 상호텍스트성은 강상우의 작품에도 유효하다. 작가도 한 명의 감상자가 되어 앞선 시대의 창작물을 보고 영향을 받는다. 당연히 작품에는 그가 보고 반응한 것들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텍스트(작품)는 모자이크처럼 다른 사람들의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다른 사람들을 거친 뒤에야 작가에게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의미는 계속 굴절되고, 작가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또 한 번 굴절된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단순히 하나의 작품이 이전의 특정한 텍스트와 어떻게 관련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한 문화의 담론 공간에 참여하는 것”이다.³¹⁾ “모든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다른 텍스트를 다시 읽고 강조하고 압축하고 깊이 들어간다. 상호텍스트성은 “순환적인 추억”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신문이든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이미지든 간에 “무한한 텍스트를 벗어난 삶”은 “불가능”하다.³²⁾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연결고리의 밖에 홀로 존재하는 작품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작품은 수많은 문화 예술적 원천을 토대로 하는 다차원적 인용의 결합물이며, 상호텍스트적이라는 사실은 강상우의 모든 작품에서 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 <잔여물(Leftover)>(2023)은 작가가 지난 10여 년 동안 전시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들 역시 다른 맥락에 존재하던 무언가로부터 일어난 연상 작용에 근거하거나 그것을 차용한 것이다. ‘잔여물’이라는 제목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가 아니라-의미 생성에 참여했으며, 언제든 다른 작품들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창작의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원래 존재하던 맥락에서 잠시 이탈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긴밀히 반응한다. 파편적으로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는, 산만하면서도 복잡하게 놓여 있는 형상들은 강상우의 작업 과정에 얼마나 많은 관계가 형성되는지 추측하게 한다. 서로 다른 캐릭터가 결합해 하나의 혼성적 존재가 된 <손오공과 자야 1>처럼 강상우의 모든 작업은 단일하지 않고, 인용된 다양한 요소들의 복잡한 관계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에 흔적 남기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시각적 생산물뿐 아니라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강상우의 작품 앞에 선 감상자는 그동안 자신에게 축적된 많은 경험과 정보들을 토대로 작품을 응시한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작가가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상상이 끝나지 않길 원했던 것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는 작품에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확정적인 의미를 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감상자의 의미 생성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강상우의 작품은 무관해 보이는 텍스트들이 뒤섞이고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동시에 서로를 함의하는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를 떠올리게 한다. 팰림프세스트는 여러 번 반복해 겹쳐 써서 이전에 적혀 있던 원고가 지워진 양피지의 낱장이나 두루마리를 뜻한다. 새로운 글을 쓸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오래된 글의 흔적을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지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앞선 글과 이후의 글을 같이 해독할 수 있다.³³⁾ 이와 관련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자신의 단편 소설에서 팰림프세스트를 언급하며, 후대의 작가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돈키호테(Don Quixote)』(1605)를 똑같이 옮겨 적더라도 두 작품 간의 시간(역사)적 거리로 인해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작보다 과거의 것으로 새것을 창작해내는 예술은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고, 한층 더 복잡하고 매력적이다.³⁴⁾
여러 겹의 지층에 다양한 유물이 공존하는 것처럼, 강상우의 작품에도 다중의 이미지, 경험, 이야기가 담긴다. 그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과거의 생산물을 재조명해 앞선 것을 곱씹고 새롭게 제시하는 예술적 방식을 선택했다. 그저 원전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의미를 확장하고 재해석하는 상상과 유희의 다시 쓰기는 중첩과 교차의 다의적 시공간을 만들어낸다.³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