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5. 01. 23.

끝없이 휘어지는 작가적 시공간-행위¹⁾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어떠한 관찰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 깊게 살피는 자세를 대신 해주지는 못한다.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에 비하면 아무리 잘 선택된 역사나 철학이나 시의 공부도, 훌륭한 교제도, 가장 모범적인 생활 습관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중략) 당신 앞에 놓여진 것들을 보고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발을 내디뎌라.²⁾

언젠가부터 박경종은 자신이 체험한 공간-장소와 시간을 쌓아 올려 그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머무는 곳, 한 번 혹은 여러 번 지나치다 만난 어딘가의 햇빛, 하늘, 구름, 바람과 공기와 나무, 꽃 그리고 풀을 눈에 담았다가 화폭에 옮긴다. 때로는 계획대로, 때로는 우연히 멈춰 선 그곳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층층이 쌓인다. 각각의 층들은 정돈되기도 하고 때때로 조금씩, 가끔은 온통, 뒤섞이기도 한다. 차곡차곡 얹어졌나 싶으면 회오리치듯 솟아오른다. 맑고 흐리고, 따뜻하고 서늘하다. 고요할 때도, 조금 들뜰 때도 있다. 작가가 잠시 멈춰 보고 느낀 그곳들의 형상과 인상, 정취, 그것을 응시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끝없이 맺히는 기억들이 종합되어 있기에 당연한 결과다.
이와 같은 작업의 전 과정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다. 하나는 짧지 않은 시간의 간격을 두고 경험한 여러 곳이 한 화폭에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박경종의 최근작 중 다수가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에 걸쳐 그려졌다. 보통 5~6회 정도 덧그리기가 진행되는데 10회에 이른 경우도 있으며, 그리는 간격이 길 경우 해를 넘기기도 한다. 완성되었다고 확신할 때까지 덧그리기가 가능하다는 게 작가의 입장이다.³⁾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에는 자연히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시간의 흐름이 중첩된다. 이런 작업은 회화의 시간성을 실험했던 페인팅 애니메이션(painting animation)과 연결되면서도 그 결을 살짝 달리한다. 그리는 행위는 바늘과 실이 되어 공간-장소들을 엮어낸다. 작가는 자신의 오감이 인지한 것들을 순차적으로 그려내지만, 그 결과물이 회화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시간 왜곡(time warp)뿐 아니라 공간-장소의 왜곡도 일어난다.⁴⁾ 여기에 더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리기를 잠시 중단했던 동안을 생각하면 작품에 담긴 시공간은 한층 미묘해진다. 시공간의 지속이 아니라 멈춤과 도약이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시간이 중요하지만 작가가 시간 그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회화적 실험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시간(적 경험)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에 가깝다. 즉 시간과 공간적 층위(layer)의 “워프(warp)”는 예술적 탐구를 위한 중요한 매개로 존재하며,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그리고 그의 작업은 유연하게 반응하고 구부러지며 계속 새로운 지점을 향한다.

박경종 개인전 《층위 워프(Layer Warp)》, 2024, 더 소소 설치 전경, 도판 제공=박경종

한편 박경종은 작품 앞에서 언제나 곰곰하다. 한결같이 성실하고 진지하다. 그렇다고 경직되거나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대한 힘을 빼고 화려한 치장도 덜어낸다. 작품을 설명하는 어휘도 마찬가지다. 이런 태도는 박경종이 생각하는 회화적 완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에게 완성은 “더 이상 손댈 데가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이다. 다만, 밀도가 높아야만 손댈 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밀도가 회화적 완결의 기준이 아닌 회화”를 지향한다. 작가에게 작업은 “흘러가는 대로 바람 따라 유유자적 층위를 비틀고 시공을 여행”하는 것과 닮은 무언가이기 때문이다.⁵⁾ 모호한 듯 명확하다. “예술이란 단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다.” 우리는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에서 완벽함을 기대하고 찾는데, 만약 완벽함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것이나 복잡한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단순해서 혹은 복잡해서 완벽해 보일 수 있다.⁶⁾ 따라서 작가는 조금이라도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을 피한다. 이처럼 자신이 마주한 대상―자연이지만 때때로는 일상과 기억―을 마주하며 붓을 든 작가의 행위가 언제나 덤덤하고 묵묵하다는 사실이 바로 두 번째 특이점이다. 작업이 작가적 삶과 행위에 집중하게 될수록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붓질은 더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작업 초기부터 작가는 그림-예술의 의미와 판단 기준, 그것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주체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왔다. 미술에 대한 필요 이상의 엄숙함과 편견을 깨뜨리고 유희로서의 미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더 창작 행위에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개인전 《층위 워프(Layer Warp)》(2024)에 전시된 작업은 그린다는 회화적 과정의 전부, 즉 보고, 느끼고, 판단하여 그것을 밖으로 꺼내 그려내기, 그 결과물인 회화 자체에 대한 탐구에 한층 더 깊이 몰두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금 극적으로 말하면,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은 회화를 중심에 놓은 작가적 행위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작업의 깊은 중심에는 창작하는 작가가 있다.

<두리번> 나무에 아크릴 채색, 목탄, 가변 설치(5x5cm each), 2022~2024, 박경종 개인전 《층위 워프(Layer Warp)》, 2024, 더 소소 설치 전경, 도판 제공=박경종

<두리번> 시리즈(2022~), 개인전과 동명인 <층위 워프(Layer Warp)> 시리즈(2024)에 자연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최대한 순수한 상태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흡수하며 회화적 과정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에게는 컴퓨터 모니터를 벗어나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직접 보고 그리는 시간이 중요했고, 자연은 핸드폰 속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터였다.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다. 무엇보다 온라인 이미지는 그것을 찍고 보정, 편집하고 유포한 사람의 의도가 담긴다. 디지털 이미지의 계산적 태도와 피상적 가치에 지친 작가는 어떤 인위성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연으로 나갔다. “인간의 의도가 전무한 그곳은 판타지 세계에 가까웠다. 그냥 다 나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밖에 있는 대상들을 캔버스 안에 집어넣는 듯한 행위가 중요했다.” 그것들을 그리면 정말 순수하게 물감으로 그린 회화적 회화, 현전하는 회화가 나올 것 같았다. “회화의 층위에 물리적 장소성이 부여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닷가 바위 위에서 했던 프로타주(frottage) 역시 물질적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작업실에서는 써본 적 없는 색채가 등장하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다.⁷⁾ 꾸민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에서는 그런 색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직접 마주하게 만드는 물질적 자연에서 작가가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유일무이한 이미지를 그리려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예술작품의 창작자도 자연이 지닌 완벽함을 갖지는 못한다.” “예술가는 최선을 다해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낸다.”⁸⁾

<두리번(detail)> 나무에 아크릴 채색, 목탄, 가변 설치(5x5cm each), 2022~2024, 도판 제공=박경종

이런 이유로 <두리번> 시리즈는 일정 부분에서 자연주의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연주의는 기존에 널리 인정되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과거에 존재하던 리듬에 대한 보다 깊고 넓은 감흥을 추구하는 것”이자 “특정한 상황에서 한 개인의 개성적인 지각을 통해 기존의 지배적 양식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위적인 자연이 아닌 실재하는 자연이 보여주는 “우연적이고, 직접적이며” 때로는 “비논리적인”, 인간의 논리로 한정할 수 없는 자연에 주목해 감흥 받고 그렸다. 즉 인간이 만든 한계를 벗어났다. 자연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왜 자연을 그렸는지이다. 자연주의는 단순히 자연만을 소재로 하는 게 아니라 예술, 종교적 의례, 추상화, 도시 속 사람들의 삶에도 포함된다.⁹⁾
박경종은 정확한 좌표를 찍을 수 있는 그곳-장소에서 그려낸 바로 그 작품을 완성하여 자신이 지각하는 이 물질적 공간의 중심에 존재하는 자신, 그것을 시각화하는 작가를 드러내고 싶었다. 자연과의 관계성을 통해 창작성을 발휘하려 했다. 장소는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심오하고도 복잡한 측면”이기에 외부와의 유대를 드러내고,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게 한다. 오직 인간에 의해 변화하는 방향 체계를 갖고, 인간-작가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주관적이고 한정적으로 지각되는 공간이다. 결국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곳들은 “고유한 실체”로서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요소들이 모두 합쳐져 있다. 무엇보다 장소는 인간에 의해 규정되며 특별한 의미를 소유한다. 장소는 인간-작가적 행위의 바탕이 되고 행위는 다시 장소에 특수한 성격을 부여한다.¹⁰⁾
또 하나, 박경종의 작품에서는 밤을 잊은 것처럼 보이는, 본연의 물성이 사라진 핸드폰과 컴퓨터의 이미지를 벗어나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인지할 수 있다. 가상적 세계는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한다. 그러나 박경종의 회화는 작가가 그림을 그린 시간과 관객이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의 간극까지 명확히 확인하게 이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나날을 지배한다. 날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재는 현전의 외양을 취하며 사회적 실천 속에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을 주입한다.” 실재를 따라 하고, 감추며 “시간을 채우고 점령한다.” 일상을 만들고, 주입한다. 사진과 영상 등은 촬영된 진짜에 접근하듯 “실재와 현전성에 접근”하지만, 거기에는 두께도, 깊이도 없다. 그리고 작가가 인식했듯 누군가의 의도―때로는 이데올로기―가 자기 모습을 숨긴 채 스며들어 있다.¹¹⁾ 이에 박경종은 시간이 흐르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회화임을 잊을 수 없는 회화를 그린다. 나아가 오직 박경종만의 시선이 담긴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작가의 예술 행위를 부각한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재현이자 평면 위의 환영이지만 캔버스 위에 얹어진 물감-물질성을 소유하는 작품들을 통해 회화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디지털 정보로 존재하는 이미지와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시작점이 이렇기에 그의 회화에서는 명확한 원근법에 근거한 정경도, 그림 같은 풍경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도 찾을 수 없다. 진짜 같은 극사실도, 회화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집중한 추상도 아닌 박경종만의 회화이다.―<Layer Warp 가평 여름에 오른 추석 보름달>(2024), <Layer Warp 물길 따라>(2024), <Layer Warp 바닷바람에서 놀기>(2024), <Layer Warp 서해와 동해>(2024)―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회화의 물리적 구현과 완성을 염두에 두는 박경종의 작업은 예술작품이 영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의미를 고심한 전작들의 맥을 잇는 것이다. 물리적 존재는 영원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작품도 객관적으로는 유한한 실체로 존재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해도 ―최소한 현재로서는―작품은 시간을 완벽히 거스를 수 없으며, 절대적 영원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예술은 영원성을 획득한 것처럼 혹은 그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의 의미도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은 끝없이 생성되고 변화하고 확장된다.

<두리번(스틸컷)>, UHD 비디오, 가변설치, 2022~2024, 도판 제공=박경종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회화의 물질적 의미가 표출되고 강화되는 새로운 감각”을 어떻게 연구하고 그려내는지 빠짐없이 전달하고 싶었고, 영상과 언어 등을 통해 하나의 작품에 여러 시공간이 공존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서사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도 일어났다. 시간성을 부각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정보로서 과정을 제공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감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에 전시 《층위 워프》에서는 약간의 글과 기록 영상을 첨가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일례로 <Layer Warp 광덕 겨울에 장흥 여름과 가을>(2024)에서는 제목뿐 아니라 작품 하단에 적힌 글귀 “늦은 겨울 광덕산 감나무 위에 쌓인 눈이 녹아 그림 위로 떨어진다. 뜨겁게 일렁이는 장흥의 여름은 하얗게 찌고 미술관 옆 은행나무는 금세 땅을 덮는다. 시간이 지나간 그림에 빈자리가 많지만 애써 더 그리지 않으려 애써본다.”가 함께였다. <두리번> 시리즈도 마찬가지여서 작품마다 그 옆에 무엇을 그렸는지 적어놓았고, 관련된 기록인 <두리번(스틸컷)>(2022~2024)은 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Layer Warp> 광덕 겨울에 장흥 여름과 가을,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73x91cm, 2024, 도판 제공=박경종

이러한 방식은 ‘추가 자료를 첨가하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될 수 없는가? 설명적 정보 전달이 회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효과적인가?’ 등의 비판적 질문을 끌어낸다. 물론 관점을 달리하면, 작가가 직접 본 자연에 근거한 회화와 그것을 촬영한 영상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해석 가능하다. 아니면 물질적 회화를 추구하는 작가조차 사진과 영상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를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작가는 “아직 과정 중이이다.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방법이 나올 것이다.”라고 답한다. 다만 특정한 장소나 행위의 기록물을 보여주는 게 목표가 아니며, 정보 전달이 주인공인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되고, 회화적 완성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¹²⁾ 시각적으로나 의미에서나 한쪽에 쏠리지 않는 균형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점차 현장에서 그렸던 그림 위에 작업실에서의 그리기를 더하게 되었다. 즉 개인적이고 내밀하면서도 작가의 재구성과 상상이 더해진, 실재하는 공간-장소지만 그것을 담으면서도 넘어서는, 환영적이지만 추상적인 공간을 완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그린 <층위 워프>에는 밖의 세계와 작가로서 살아가는 일상 세계 그리고 기억-서사가 더해진다. 인간은 그저 감각만으로 공간을 이해하지 않는다. “실체적 공간”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공간에서도 인상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 인간은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공간 속에 우리의 인성을 투영하며, 공간에 감성의 끈으로 묶여 있다.” 인간-작가가 지각하는 공간은 감각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삶이 이뤄지는 곳이며 공간 자체가 소유한 특성과 “인간의 의도와 상상”, 그리고 이 둘에서 “비롯된 내용과 실체”로 채워진 무언가이다.¹³⁾

<노을처럼 그리는 방법> 캔버스에 아크릴, 오일 파스텔, 97x146cm, 2024, 박경종 개인전 《층위 워프(Layer Warp)》, 2024, 더 소소 설치 전경, 도판 제공=박경종

작업의 소재가 자연에서 일상 혹은 작가의 머릿속 세계로 확장되고 있음은 《층위 워프》에서 시도된 <두리번> 시리즈의 설치 방법에서도 확인된다. 박경종은 자신에게 자연을 그린 그림의 대표 상징과 같은 김홍도와 정선의 산수화 부분들을 결합해 전시장 벽에 그렸고, 그 위에 <두리번> 시리즈를 걸었다. 선택의 이유는 분명하다. 전통 산수화는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게 아니라 자연 안에서 거닐었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그리기 때문에 작가가 지향하는 그리기 방식과도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서구식 묘사에 익숙한 작가에게 산수화는 ―그것이 실경을 대상으로 한 것일지라도―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그림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가능성의 여지가 생긴다. 무엇보다 <두리번> 시리즈와 만난 전통 산수화를 옮겨 그린 바탕 그림은 시간의 “워프”를 한 번 더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하루는 자신이 화폭에 그렸던 하늘을 떠올렸다. 또 다른 날에는 작업실에 머물던 하루를 기억해 냈다. 어떤 날은 더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야기는 쌓이고, 분절되고, 이어졌다 끊어지길 반복한다. 그럴수록 결과물은 더 추상에 가까워지는데, 중요한 점은 모두 현실 속에 근거하는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감상자가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느껴도 괜찮다. 다만 “어떤 이야기든 다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작품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¹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닫고 싶진 않지만, 그것을 핑계 삼는 나태를 경계하고 싶었다. 결국 비스듬히 겹쳐 놓인 캔버스들, 물감통과 붓, 어딘가에 세워진 이젤, 그림을 그리는 작가, 손과 귀 같은 감각 기관, 붓질과 색의 조각들, 그리고 작가와 연결된 사람들까지 하나의 화폭에 정돈된 채 뒤엉켜 있다.―<노을처럼 그리는 방법>(2024), <크림 재즈>(2024)― 이제 작품이 제공하는 세계는 경험적 관찰 없이도 설명이 가능한, 논리적인 관계로 구성되고 상상력으로 창작된, 상징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는 사유의 결과인 추상적 시공간에 가까워진다.¹⁵⁾ 그렇게 <층위 워프> 시리즈는 “회화의 층위에 끝없이 새로운 층위를 결합”¹⁶⁾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그려진 여러 층위는 서로를 덮어가고 서로를 비껴가며 이전의 시간-순간들과 부딪혀 회화의 표면에서 만나게 된다. 예술은 단순히 분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본 것을 옮기는 것도 아니다. “자연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이 함께 융합되어 하나가 될 때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행위는 예술적 행위, 즉 예술적 작품이 된다.”¹⁷⁾
박경종의 작업은 일관된다. 이번 작업-전시도 마지막은 예술에 관한 근원적 탐구로 귀결되었다. 특정 장소를 그린 그림이 아닌, 특정 장소에서 그려진 표면-회화는 시간을 탐구하고, 회화의 물리적 완성, 그것의 의미와 존재 가치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작가로서 살아가는 과정을 숙려한다. 예술적 창작을 위해서는 캔버스에 물감이 칠해지는 것처럼 “물질적 재료가” “변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작가가 관찰하고 기억한 것, 느낌과 감정처럼 내면적 재료도 변형되어야 “진정한 표현행위가 이루어진다.” 물리적 재료가 변형되어 예술작품이 되듯이 내적이고 정신적인 재료도 “신중한 재구성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즉 화가가 물감을 칠할 때, 그런 상상을 할 때, 화가의 생각과 느낌 같은 내면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사실 이 두 변형은 동시에 일어나며, 서로 얼마나 잘 통합되는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¹⁸⁾

<빛으로 가는 길>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162x133cm), 나무, 노끈, 단풍잎, 가변 설치, 2024, 박경종 개인전 《층위 워프(Layer Warp)》, 2024, 더 소소 설치 전경, 도판 제공=박경종

이제 작가는 찬찬히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한다. 벽에 걸렸던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불필요한 회화는 <빛으로 가는 길>(2024)에서 배의 돛이 되었다. 만질 수 있는 나뭇가지와 단풍잎, 흰빛의 선으로 그려진 별이나 꽃을 닮은 무언가와 그 뒤편에 그려진 자연으로 추정되는 형상들, 또 그 뒤에 배치된 지도 그림은 환영적 공간감을 제공하면서도 깨트린다. 이제는 회화적 실험에서 방향을 틀어보겠다는 힌트처럼 보인다. 작가가 지나왔고 지나갈 길과 그곳에서 만났고 만날 실재하는 존재들, 그 길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별이라는 직관적이면서도 동화적-낭만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자연을 그린 것 같은 검고 푸른 색으로 채워진 사각의 프레임은 캔버스이거나 컴퓨터와 핸드폰의 화면일지도 모른다. 프레임 밖으로 넘치게 그려진 새하얀 선의 형상은 다음 작업이 화면-회화를 넘어서는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어느 쪽이든 배는 행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물론 통일된 하나의 플롯이 있는 서사는 아니다.”¹⁹⁾ 작가가 얼마나 많은 생각-이야기를 떠올리는지 예상할 수 있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연상 탈출>(2024)의 한구석에 그려진 열쇠가 떠오른다. 또 다른 세상이 어떻게 열릴지, 어떻게 닫힐지 살짝 기대해 봐야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