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5. 07. 31.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상상의 에피소드”¹⁾²⁾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예술은 행동이나 삶을 대체한다. 인생이 감정의 의지적 표현이라면 예술은 감정의 지성적 표현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이나 감히 바랄 수 없는 것, 또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속에서는 소유할 수 있는데 이 꿈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³⁾ 페르난두 페소아, 2022, p. 295.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모든 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적이다. 여기서 사실주의란 단순히 보이는 대로 옮겨놓거나 겉모습을 닮게 그려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태도에 근거한다.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세계와 삶―을 응시하고, 반응하며, 사유한 뒤 작품에 담아낸다. 자기만의 사실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쉐마미술관의 전시 《원형의 폐허들》(2024)은 “꿈을 꾸는 존재, 꿈을 꾸어 세계를 만들어 내는 존재, 알 수 없는 신, 그 자체가 환영인 존재, 물리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인 예술가가 만들어 가는 서사적 세계에 주목했다.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 2》(2024)의 참여 작가인 손희민, 이재석, 이환희, 정성진은 자신이 위치하는 현실의 맥락에서 “상징과 물질”, “형상들의 단서들로 다시 꿈을 꾸길 반복하여” 예술가의 세계를 쌓아 올리고 있다.⁴⁾

왼쪽부터 이재석 <별자리 2>(2023), <수상한 덩어리 1>(2023), <연결을 위한 구성>(2023), 193.9x112.1cm(each), acrylic on canvas, 《원형의 폐허들》, 쉐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4, 도판=쉐마미술관 제공

이재석은 허구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상상의 세계를 만든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극도로 세밀하게 그려진 화폭 위의 존재-“수상한 덩어리”들은 강력한 실재감을 전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마주한 것처럼 기이하고 불가사의하다. 사회의 구조와 계급관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군대에서 인간의 도구화, 인간과 무기의 가치 전도를 느낀 작가는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의 피조물 같은 파편화된 인간, 인간 신체에 비유된 무기(의 부품)들을 그렸다. “살덩어리”인 인간은 이 세상에 “탄생”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사용 설명서”대로 성장하고 사용된다. 삶의 순간들을 돌아볼 여유는 충분하지 않고 누구도 죽음의 “춤”(Dance Machabre)을 피할 수 없다. “기념비”는 부품들로 채워진다. 붉은색은 생명이자 죽음의 상징이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골, 열린 경계를 암시하는 군용 텐트와 선별진료소의 텐트(의 형태)가 전하는 구조와 의미는 다른 듯 닮았다. 텐트는 깃발이 되고 돛이 된다. “경계”는 분리인지 만남인지 명확하지 않고 선명한 듯 모호한 체계가 사회를 지배한다. 이후 자연을 응시할 수 있는 곳에 머물게 된 작가는 자연물을 통해 전체와 부분의 구조를 구축하기에 몰두했다. 부서진 나무의 구석에서 잎사귀가 피어나고, 시간에 순응하는 바위와 “중력”을 거스르는 바위는 모두 굳건하다. 과거 부품이나 사용 설명서에 적힌 부호에서 착안해 하얀 동그라미 안에 그려졌던 기호들은 풍경 속으로 이동했다.⁵⁾ 반딧불처럼 숲을 밝히던 별은 점점 강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파도 위를 비추는 별이 되었다. “별자리”에서 찾아지는 구성은 미려하다. “은하수”는 하늘을 채운다. 빛은 달과 태양으로 이어진다. 분리가 아닌 “연결을 위한 구성”, 부품의 조립이 아닌 관계의 종합을 점진적으로 향하는 세계이다. 싸늘했던 흰빛에 차분한 온기가 더해지는 것만 같다. 작가가 눈앞의 세상을 재현할 때 단순 복제나 모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눈앞의 대상을 응시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붓질이 끝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주관적 해석과 표현이다. 이재석의 화폭에서 현실은 허구의 영역으로, 상상은 물질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실재하는 시공간을 떠나지 않는 “허상”은 획일화된 지각과 이해를 벗어난다. 그러나 불안한 부조화가 아닌 고요한 조화가 일어난다. 나무(자연)의 유기성을 드러내듯 젤 스톤(Gel stone)으로 표현된 작은 입자(세포)들도 가지런하다. 사실과 비사실적인 것이 나란히 늘어선 경이로운 회화에서 단절이나 불협화음은 불가능하다. 중심이 되는 이미지를 중앙에 배치해 압도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전달하거나, 균형과 조화를 실현한 고전 회화의 구도와 원근법을 자기화하고, 패턴을 채워 나가듯 화폭을 치밀하게 칠하는 방식은 평온한 긴장감이 감도는 완벽하게 짜인 세계를 완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필연적으로 이재석의 작업은 이 세상-우주의 시스템과 메커니즘의 탐구로 확장되었다. 표피적 이미지만 옮기는 게 아니라 대상의 속성을 파악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 즉 에너지나 중력일 수도 있고 낮과 밤이나 계절의 변화일 수도 있는 무언가 또는 구조와 관계를 “아름답고 신비롭게” 체계화해 표현하는 것이다. 문명의 요소들뿐 아니라 자연의 개체들은 모두 그것을 탐구하는 인간의 몸과 연결된다. 개기일식의 순간에 태양이 발산하는 빛은 더 매혹적이다.―<Linkage>(2024), <몸(Frame)>(2023)―⁶⁾ 완결되었으나 열린 의미에 흠뻑 적셔져 한 번에 해독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작품이다. 오랜 시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그렇다고 하여 작가가 감상자에게 이 모두를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길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화폭을 채우는 이미지와 색채, 구도가 완성하는 ―미와 추를 아우르는―아름다움의 균형을 경험하는 게 우선이다.⁷⁾ 예술가에게는 세계의 구조만큼 작품의 구조와 형식도 중요하다. “예술이란 절대에 이르고자 애쓰는 자기표현”이기에 이재석은 예술에서 완벽함을 찾으려 애쓴다. 그것은 작품에서 “순간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발견되며, “영원히” 찾아진다.⁸⁾

손희민 작품, 《원형의 폐허들》, 쉐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4, 도판=쉐마미술관 제공

한편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다루다 보면 생성과 소멸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이재석뿐 아니라 손희민, 정성진의 작업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소멸-파괴-해체는 종말이 아니라 생―시작, 전환, 창조, 창작―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손희민의 작업에서 죽음에 대한 자각은 중요한 시작점이다. 작가는 도축된 동물의 사체와 뼈의 형태를 캐스팅해 퇴적물의 형상을 만들어 인간과 비 인간종 사이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를 폭로했다. 또한 동물의 표피가 가진 물성을 변형, 재구성해 구현했던 작업의 기저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그 종과 외관은 다르지만, 실재이든 상상이든 작가에 의해 구현되는 생물체들은 생명과 죽음이 얽혀있는 형상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가늠조차 힘든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하며 지속된 규칙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인간을 구속하는 이 법칙에는 아직 어떤 예외도 없다.⁹⁾

작가가 인간의 눈이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미시 세계와 생물, 고대 생물에 주목하게 되면서 상상의 영역은 확대된다. 그것은 객관적이라 믿어지는 정보에 근거해 체계화된 상상으로 생명의 원형을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생물학자들의 연구에서 추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함에 착안했다. 특히 생물학자들이 관찰 후 표본을 만들거나 화석을 발굴, 복원해 논리적 추론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택과 집중을 목격한 뒤 생물의 실제 형상에서 자신이 주목하는 조형성을 부각해 가상의 표본 조각을 제작했다.―<변이적 조각 G>(2022), <매크로 미생물>(2022), <디킨소니아 R>(2023), <차니아 GB>(2023)― 예술적 재현에서 변형과 왜곡은 자연스러운 일이다.¹⁰⁾ 현재까지의 여정에서 손희민은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상상의 미메시스(mimesis)를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성을 통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작업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과학적 결과에 대한 의도적이고 치밀한 오독이 일어난다. 작가의 예술적 오독은 창작의 영역을 확대한다.

이제 작가는 <미래 화석> 시리즈(2024~)를 통해 예술적 상상의 비중을 한층 더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해 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변화할 것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인공 주름 01>(2024)은 생물의 진화에 등장한 “주름의 형상에 주목”해 최초의 다세포 생물을 21세기의 인공물들로 실체화했고¹¹⁾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중의 미래―과거 시점에서의 미래와 현재 시점에서 앞으로 도래할 미래―를 연결한다. 보이지 않는 사실과 상상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조각으로 제시하는 순간 현실 안으로 환상성이 들어오고, 감상자는 일시적으로 인식의 정지 혹은 망설임을 경험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먼 과거의 세계와 그것의 소멸 그리고 다시 태어남과 생존, 지속에 관한―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답을 쉽사리 찾을 수는 없다. 세계는 수수께끼이다. 또한 “그에 관한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세계는 수수께끼이기에 경이롭다.¹²⁾ 시작과 끝이 닫혀있지 않는 <인공 주름 01>의 형상이 암시하듯 결정된 것은 없다. 비결정성은 흘러간 과거와 도래할 미래, 그 둘 모두를 상상하는 현재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속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정성진 작품(좌측), 《원형의 폐허들》, 쉐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4, 도판=쉐마미술관 제공

정성진의 작업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조각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해체하고, 정제되었으나 통속적이며, 치밀하게 계획적이지만 분방하다. 그는 신화와 역사 속 신이나 영웅처럼 남다른 역량을 보여주는 존재의 원형을 향한 관심을 유지하지만 동시에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같은 대중문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먼 과거에서부터 존재했던 상징들에 현재를 사는 사람들-작가의 해석을 덧붙여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카운터 가제트>(2023)는 이러한 특징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대장장이의 신이자 조각과 공예 등을 관장하는 신인 헤파이스토스(Hephaestus)와 파괴의 신인 시바(Shiva)가 거대한 한 몸을 이룬 상황은 정통 조각과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조각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회색지대를 떠올리는 작가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과거의 일부가 부서지면서 새로운 방식의 조각이 등장할 것이므로 작가에게 시바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변화를 함유한다. 작품 제목의 ‘가제트(Gadget)’ 역시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가 첫 번째로 만든 실험용 폭탄―그 자체로 새로운 시작이자 파괴의 이름―에서 따왔다.¹³⁾
새로움과 변화가 의미하는 익숙함의 무너짐은 설렘뿐 아니라 불안과 비애를 수반한다. <카운터 가제트>에 등장하는 메두사(Medusa)와 뱀 역시 이러한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페르세우스(Perseus)가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파괴도 일어난다. 잘린 메두사의 머리는 승리와 폭력을 모두 품는다. 뱀은 유혹자이자 죄악이기 이전에 신성한 동물이었고,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이었다.¹⁴⁾

한편 시각적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카운터 가제트>의 부분들은―작가는 파츠(parts)라 칭한다.― 작가가 조각의 근원을 놓지 않았음을 명확히 한다. <진리의 문>(2024)에 조각을 위한 공구를 새긴 것 역시 육체적, 정신적 노동과 작품의 등가 교환이 이뤄졌음을 암시하고, 디지털 시대에도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의 조각이 지속될 것임을 드러낸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성진에게 조각의 대전제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¹⁵⁾

의미만 다중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정성진은 형식에서도 열린 결말을 추구한다. <카운터 가제트>와 <힘의 계승>(2023)을 비롯한 <Trans-Figure> 시리즈(2022~현재)는 파츠로 구성되어 있어 언제든 재조합될 수 있다. 하나의 덩어리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며 “갱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조각”이다.¹⁶⁾ 따라서 파츠 하나하나의 의미보다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결합해 어떤 문맥에 위치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가의 창작이 수많은,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인용과 참조, 그것의 변형과 굴절로 구성되는 것임을 시각화한다. 예술가들은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탄생하지 않고 진행 중인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자연히 이미 창조된 무엇을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독창성을 비롯해 예술에 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견해들조차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¹⁷⁾ 예술가들은 절대적 창조자나 조물주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다. 작품은 무수한 직조 과정을 통해 제작된다. 어떠한 경로로 작가에게 도달한 것인지 완벽하게 밝힐 수 없기에 파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파편화된 부분들은 동시적으로 현존하며 작동할 뿐이다. 의미의 생성 역시 그렇다. 정성진이 예술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속 신이 파편화된 조각으로 등장했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절대적 창조성을 가진 예술가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둘러싼 단일하고 확정적인 의미는 사라진다. 작가와 작품은 끝없는 해체와 재조합의 과정에 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미의 획일화를 벗어나 항상 진행 중인 조각(존재)이 작동한다.

좌측부터 이환희 <Rappel>(2023), <Throttle>(2023), 142×240cm(each), Oil, pencil on canvas, 《원형의 폐허들》, 쉐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4, 도판=쉐마미술관 제공

“그는 상위 질서와 하위 질서의 모든 비밀을 알아낸다 할지라도, 꿈을 이루고 있는 뒤죽박죽의 어지러운 재료들을 틀에 넣어 주조하겠다는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보다도 더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다.”¹⁸⁾ “그는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¹⁹⁾

“완전한 태세를 갖춘 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작업하는 이환희는 작품과 그것의 제작 과정, 작가의 창작 행위 등에 부여된 과도한 의미와 미사여구를 벗어나 자신만의 원형을 구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담론으로의 함몰도 경계해야 한다. 작가적 “의사결정의 총합”을 온전히 파악해야 한다는 의무를 감상자에게 선사할 마음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작품과 감상자의 표현적이고 해석적인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품의 책임자”인 작가는 창작의 모든 과정, 부분, 진행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지만(바라봐야 하지만), 감상자는 “절단된 단면”만을 볼 확률이 높다. 가장 한정적이고 명확하다고 믿어지는 언어를 통한 소통조차도 오해와 왜곡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작가는 형식과 의미 모두에서 수평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느슨하면서도 예민한 작품들을 완성했다.²⁰⁾ 따라서 작품은 어떤 경우에도 단절적이고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작품도 확정적으로 해독될 수 없다. 결국 작가의 인식과 실행의 장인 작품의 외면과 내면은 역사와 예술의 영역을 떠다니며 흩어지고 합쳐지길 반복한다. 추상화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환희는 “모더니즘적 변증법의 방법론을 벗어난 채 작업한다.”²¹⁾ 관념화된 회화(미술)의 환상을 실재적인 것으로 교체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미술 창작과 분석, 의미 부여의 방식에 균열을 만들고 자신의 머릿속과 화면에 부유하는 “조형”을 채운다. 창작의 한계에 처하기 전에 자신의 상상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영역에 근접시켜 경직된 안과 밖―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규칙, 작가와 세계―을 절묘하게 넘나들고 함몰과 이탈 모두를 피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작가는 계획대로 속도감 있게 목표를 달성하는 “견고하고 단단해 보이던 완성”에 “갑갑”함을 느끼고 <라펠(Rappel)>(2023), <샤브-샤브-샤브(Shabu-Shabu-Shabu)>(2023), <쓰로틀(Throttle)>(2023), <스나크(Snark)>(2023) 등의 작품에서 “중간 과정을 위해 복무하는 중간 과정”을 거친 완성을 실행한다. 여러 화폭을 오가며 각각이 “서로를 계승하고 구조를 베끼고, 빌리고, 무시”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요원함”과 “우회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에 이른다. ²²⁾ 작품은 심층에 의미를 숨겨놓기만 하는 불변의 닫힌 세계가 아니라 반응하고, 관계 맺고, 창조하고 해체하는, 무거우며 가벼운, 복수적인 열린 세계이다. 결국 운동적이고 분열적인 상태-요소들의 이합집산이 반복되며 이미지와 행위의 계보는 이중, 삼중으로 뒤섞이고 회화(작품)의 독립성은 지워진다. 단면들은 겹치고 쌓이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환희가 그려낸 회화의 자족성은 더욱 견고해진다. 모순 같지만, 명확한 사실이다.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산다,/ (중략)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²³⁾

정성진(좌), 이재석(우) 작품, 《원형의 폐허들》, 쉐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4, 도판=쉐마미술관 제공

이처럼 손희민, 이재석, 이환희, 정성진, 네 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놓인 각자의 현실-일상에서 겪게 되는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구체적인, 혹은 주관적인 지점에서 작업을 시작하지만, 사실성과 환상성,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분이 모호해진 결과물을 내놓는다. 집착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몰두와 집중을 통해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세상의 진실과 원리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의 표피에서부터 깊은 이면까지 압축해 담아내기에 이들의 작업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무엇에 가깝다. 또한 익숙한 현실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마술적인 분위기를 풍김에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 도리어 현실을 확장된 시야로 자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를 닮았다. 마치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1897)가 그렇듯 실재하는 현실적 요소들이 조합되어 있음에도 허구처럼 보이는 환상적 경관을 보여주는 이 작가들의 목표는 단순히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삶과 행위, 사물에 구현된 신비를 발견하려면 세계 속 “미묘한 국면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 이 세계를 이루는 자연과 인간 문명-예술이 품고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찾아내려면 본질을 깨닫고 고착된 관념에 질문해야 하며 현실을 향해 “시적 추측이나 시적인 부정”을 진행해야 한다. ²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