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21. 11. 29.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최우람은 움직이는 기계생명체를 보여주는 키네틱 조각(kinetic sculpture)을 통해 기계 문명과 인간 사회를 고찰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인간 사회의 구조와 작동 원리,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유 체계와 욕망, 행위를 탐구해왔고 그것을 작업에 담아왔다.
“과학기술을 획득한 집단이나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빛과 그림자를 결정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중략) 폐해의 해결은 결국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연히 서로의 욕망은 많은 부분 충돌되니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이런 현실이 내가 공존과 균형의 세계를 꿈꾸게 되는 이유이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2)
최우람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생명체들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가상의 서사를 부여한다. <울티마 머드폭스 Ultima Mudfox>(2002)는 스스로 생명의 데이터를 저장, 학습하여 자기 복제, 진화가 가능한 무기생명체이다. <제트 하이에이터스 Jet Hiatus>(2004)는 미세 로봇이 가스 터빈 엔진(gas turbine engine)에 기생해 변이된 것이고, <어바너스 Urbanus>(2006)는 도시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살아간다.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 Opertus Lunula Umbra (Hidden Shadow of Moon)>(2008)는 침몰한 배와 배의 구조 및 기계들로 형성되었고, <우나 루미노 Una Lumino>(2008)는 군집 생활을 하며 상호 소통으로 삶을 영위한다.3) 이처럼 인간이 만들고 발전시킨 기계가 스스로 종을 유지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자연과 기계 문명, 인간과 인간의 창조물 사이의 주종관계, 나아가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적인 위계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는 상상의 미래를 그려낸다.
<Opertus Lunula Umbra (Hidden Shadow of Moon)> Scientific name: Anmopial Pennatus lunula Uram, aluminum, stainless steel, plastic, electronic device (BLDC motor motion computing system), closed 420(h)x420(w)x130(d)cm, open 500(h)x490(w)x360(d)cm. 2008, Installation view: Art station Foundation, Poznan. 2008 ⓒ최우람
인간 중심적 사고관에 근거해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자연의 지배, 인간의 자율적 창조력의 발현이 진보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진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일정 부분 실현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도, 기계 문명도 인간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자연뿐 아니라 과학기술까지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생태계의 균형은 깨졌고, 전쟁, 홀로코스트,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 지배, 부의 불균형과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공존의 관계가 깨진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결을 위한 노력, 그에 반대되는 움직임이 함께 진행 중인 이 시대에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 기계생명체를 보여주는 최우람의 키네틱 조각은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존에 주목한다. 인간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의 지배자가 아니며 기계는 단순히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적 가치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적 사유를 벗어나 인간이라는 범주 밖으로 밀려났던 인간이 아닌 것, 인간과 비슷한 것이 인간 내부에서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4) 이제는 인간이 통제한다고 믿었던 대상뿐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말했듯 과학과 기계기술의 시대에는 인간의 관심이 우주의 물리 세계로 이동했고 인류의 생활을 향상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자연을 착취하고 타자화하는 것을 합리화했고, 인간과 지구 공동체와의 유대는 사라졌다. 따라서 앞으로의 인류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문명의 형태인 생태대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5)
그러나 최우람의 키네틱 조각은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기에 양가성을 갖는다. 매우 정교한 구조와 움직임을 가진 각각의 기계생명체들은 그것을 창작한 작가의 존재감을 강하게 전달하고,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증명한다. 실제로 작가가 명명한 각 기계생명체의 학명에는 ‘Anmoropral Delphinus delphis Uram’, ‘Anmorosta Cetorhinus maximus Uram’처럼 작가의 이름인 ‘Uram’이 들어가고, 이와 같은 기계생명체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연구소인 ‘기계생명체 연합 연구소(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U.R.A.M.)’의 약자도 그의 이름이다. 결국 최우람의 작업은 지배자이자 공유자로서 경계선에 위치한 인간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Custos Cavum> metallic material, resin, motor, gear, custom CPU board, LED,
220(h)x360(w)x260(d)cm, 2011 ⓒ최우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세계와 기계생명체의 세계를 연결하는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지키는 수호자인6) <쿠스토스 카붐 Custos Cavum>(2011)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쿠스토스 카붐>은 죽어갔고 마지막 구멍도 닫혀 두 개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마지막 남은 <쿠스토스 카붐>의 뼈에서 새로운 <쿠스토스 카붐>으로 자라나는 홀씨인 <유니쿠스 Unicus>(2011)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고 여지를 줌으로써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열어둔다.7) 물론 모든 선택의 권한과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는 존재로서의 위치를 확립해야 한다. 나아가 개념적 경계 안이 아닌 경계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8)
한편 움직이는 키네틱 조각은 시간성을 보유하고,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인간 모두가 그것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시간은 보편성을 갖지만, 그 체험을 타인이 대신해줄 수 없고 그 의미도 개인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개별성과 독자성을 갖는다. 유한한 삶을 가진 인간에게 시간은 성찰의 대상이기도 하다.9)
시간성에 대한 최우람의 탐구는 자신의 꼬리를 삼키며 끝없이 돌고 있는 <우로보로스 Ouroboros>(2012)에 잘 드러난다. 예로부터 머리와 꼬리, 즉 시작과 끝이 이어진 우로보로스의 형상은 윤회, 영원, 불사,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시작과 끝이 결국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에 허무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10) 이처럼 최우람의 작업은 시작과 끝에서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담아 순환의 의미를 전한다. <쿠스토스 카붐>의 뼈에서 자라는 새로운 <쿠스토스 카붐>의 시작인 <유니쿠스>뿐 아니라 폐차된 자동차의 전조등과 후미등을 모아 만든 <URC-1>(2014), <URC-2>(2016)는 소멸에서 생성으로 의미를 전환시킨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분리된 시간처럼 여겨지지만, 엄밀히 말해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에 속한다. 과거란 지나가는 현재의 순간이고 미래는 도래하는 현재의 순간이다. <우로보로스>처럼 시간은 이어져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구성된 과거이자 미래이다.11) 그런데 최우람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죽음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생이나 부활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희망이 아닌 실존철학적인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바너스 피메일 Urbanus Female>(2006), <우나 루미노 Una Lumino> 시리즈처럼 꽃의 형상을 한 기계생명체이다. 과거로부터 꽃의 시듦은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했다. 모든 꽃은 생명을 얻고 죽기를 반복하는 자연의 섭리를 시각화한다. 꽃은 생과 사의 중간 경계를 명확히 드러내며 자신은 곧 시들지만 씨앗을 퍼트려 생명을 만들어낸다. 빛의 켜짐과 꺼짐 속에서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순환의 고리에 속한 꽃들은 생명 못지않게 죽음을 보여주기에 아름답다.12) “생에는 죽음이 항상 전제되어 있다.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잠깐 피었다가 곧 질 것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순환에 대한 경외가 반응하는 것이다”.13)
<Una Lumino> Scientific name: Anmopispl Avearium cirripedia Uram, metallic material, motor, LED, CPU board, polycarbonate,
520(h)x430(w)x430(d)cm. 2008 ⓒ최우람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과 사후세계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과학에 기대한다.14) 그러나 과학과 의학의 발달도 생명을 연장할 뿐 죽음의 운명과 그것에 대한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죽음 자체와 사후세계에 대한 판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죽음을 마주하는 철학적 사유이다. 죽음은 인간의 본래적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이자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이 없다면 생명의 의미도 사라지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일깨움으로써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고 죽음과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15)
결국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자기 이해, 자기실현을 위한 방향설정으로 이어지는 실천철학적인 것이다.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벌어질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가오는 실증적인 사건이다. 나아가 자기 행위의 근원과 인간 삶의 완성에 관한 사색과 같다.16)
“인간을 생각하다 보면 종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종교라는 게 기독교와 불교 등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돈, 금융, 바이러스, 특정한 기업에 관한 생각과 감각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내는 특성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물질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데 실존한다고 믿는 마음과 태도는 거의 비슷한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제일 큰 특성인 것 같다.”17)
육체를 가진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시간은 그 어떤 절대자보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간을 지배한다. 이에 최우람은 신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시간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해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긴 시간 동안 모든 생명체의 생성과 소멸을 비롯한 변화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시간 신을 만들었다. 작가는 모든 변화,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시간이라 생각했고, 시간의 변화와 흐름의 위대함과 막강한 힘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결과물인 <칼파 Kalpa>(2010) 시리즈는 주신(主神)인 <SG>(2010)를 비롯해 <FN>(2010), <CN>(2010), <Nebula-a>(2010), <Nebula-b>(2010), <SG-M1> (2010), <SG-M2>(2010), <SG-M3>(2010)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주는 그 자체로 끝없는 시간을 품고 있으므로 신들의 형상은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이 보여주는 은하계와 성운, 초신성(supernova)처럼 우주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했다. 그리고 우주의 이미지, 100억 년 전 우주의 모습까지 보게 해주는 허블우주망원경을 선지자로 설정했다.18)
<SG> metalic material, resin, motor, gear, custom CPU board, LED, 162(h)x181(w)x160(d)cm, 2010 ⓒ최우람
이와 같은 종교에 관한 탐구는 네트워크의 신을 제작한 <허수아비 Scarecrow>(2012)로 이어진다. 날개 달린 인간 형상의 거대한 전선 뭉치가 놓인 전시 공간은 종교적 공간에 들어섰을 때의 체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허수아비>를 교회의 십자가상, 대웅전의 불상 정도의 크기로 제작했고, 마치 작품 뒤에서 빛을 비추는 것 같은 효과를 주어 일정 부분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 신에게 소망했던 것을 네트워크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때로는 네트워크를 통해 소원이 실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신적 존재가 천사인지, 악마인지는 불분명하다. 네트워크의 힘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20)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오직 신이 아닌 기술과 관계하는 기술종교(techno-religion)가 연구실에서 출현해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며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 주장한다. 기술종교는 죽음 이후가 아닌 지상에서 기술의 도움으로 행복과 평화, 번영과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이런 기술종교는 기술 인본주의(techno-humanism)와 데이터교(data religion)로 나뉘는데 기술 인본주의는 유전공학과 나노기술,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작업 등을 이끌며 인간을 창조의 정점으로 보는 인본주의의 가치를 재현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또한 기술 인본주의는 기술을 사용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우월한 인간 모델인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설계한다. 정보의 흐름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데이터교는 데이터 만능주의이자 데이터 종교를 뜻한다. 데이터교에서 인간은 새롭고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인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만물인터넷은 지구에서 은하 전체를 아우르고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되어 신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며 인간은 그 안으로 흡수된다. 결국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밀어낸 뒤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을 세울 것이고, 만물인터넷에 연결되어 흐르지 않으면 죽은 것이 된다.21)
<Scarecrow> electric wire, metallic material, motor, hydraulic cylinder, custom CPU board, metal halide lamp,
370(h)x500(w)x240(d)cm, 2012 ⓒ최우람
그런데 네트워크의 신인 <허수아비>는 인간을 닮은 형상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인간과 같은 기계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를 허수아비와 같은 가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래에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 인간이 발명 혹은 출현하면 그 위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 그때는 작가의 표현대로 인간이 신처럼 인간과 같은 기계를 만들어내어 인간이 신이 되는 동시에 기계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21) 한편 <허수아비>는 인간의 몸과 정신을 보완, 대체하기 위한 인공물인 기계와 결합한 인간, 육체에서 분리되어 가상의 세계에 머물며 정신과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을 상상하게도 한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과 연결되고, 인간의 정신은 항상 신을 불러낸다. 존재론적으로 명확한 인간이 되려면 인간은 동물성과 신성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했다. 그런데 진화생물학은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경계선을 접합하고, 컴퓨터 과학의 발전은 인간과 신의 종교적 경계선을 사라지게 했다. 기계인 로봇은 인간의 신체적 기능을, 인공지능은 정신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 기계는 동물인 동시에 신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22)
전술했듯 최우람은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실존한다고 믿는 마음과 태도가 종교를 만들어내는 그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종교를 인간이 공유하는 사상과 행위의 체계로서 개인에게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모든 것이라 정의한다. 즉 종교란 반드시 신이나 우상만을 상대하는 종교로 공인받는 체계가 아니라 개인에게 지향의 구조와 믿음의 대상을 제공하는, 어떤 집단이 공유하는 사고 및 행동 체계를 포괄한다. 종교는 특히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소유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세상과 자신의 존재 의미, 삶의 방향 등을 지시하는 지향의 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고와 행동, 감정을 비롯한 인간 존재 전체를 강력히 사로잡을 수 있는 지향의 틀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를 체계의 중심에 가지며 이런 존재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인간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하나로 통합하고 그것에 절대적인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불안하게 고립된 인간 존재를 초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적 헌신의 대상은 신뿐만 아니라 우상, 자연물, 조상, 국가, 계급, 정당, 돈, 성공 등도 가능하다. 또 각각의 종교는 지배욕이나 연대감을 고무시킬 수도 있고 사랑의 마음이나 파괴성향을 조장할 수도 있다. 정신력을 개발하고 독립과 성장을 도울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23)
<Pavilion> detail, resin, wood, crystal, 24K gold leaf, plastic bag, metallic material, fan, motor, custom CPU board, LED,
244(h)x132(w)x112(d)cm, 2012 ⓒ최우람
이와 같은 관점에서 <파빌리온 Pavilion>(2012)과 <핑크 히스테리아 Pink Hysteria>(2018) 역시 종교적 현상을 담아낸다고 말할 수 있다. 금빛의 파빌리온 천장에는 미러볼이 찬란한 빛을 반사하며 위용을 뽐낸다. 그러나 파빌리온 안에 담긴 것은 검정 비닐봉지뿐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신성화하고 경배했던 것들의 본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24) 한편 <핑크 히스테리아>는 작가가 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행사의 군중 행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최우람은 북한처럼 강압적인 상황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집단적 사고, 이데올로기, 가치관 등에 휩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리 상자 안에 갇힌 채 군무를 추듯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분홍색 꽃들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회 속 인간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25) 그렇다고 최우람이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믿음의 대상, 종교적 행위 등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개인 선택의 영역이다. 또한 인간은 삶의 지향체계, 믿음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다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해온 믿음, 신념에 대한 객관적 거리 두기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최우람의 기계생명체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위계 관계를 해체하고 지배와 정복으로 이뤄진 인간 문명 대신 새로운 공존을 숙고하게 한다. 그러나 기계생명체들은 기계의 창조자인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한편 최우람의 기계생명체가 보여주는 움직임과 정지의 반복, 빛과 어둠의 공존, 꽃의 형상은 생성이 소멸로, 소멸이 생성으로 이어지는 시간관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직시하게 하는 동시에 죽음이 삶과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중요한 부분임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최우람은 종교와 신적 존재,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탐구한다. 이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종교, 나아가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신념 등에 대한 논의의 장을 펼칠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최우람의 키네틱 조각은 인간의 사유 체계와 행위에 관한 탐구를 토대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끌어낸다.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었다.
본 글은 ‘이문정, 「최우람의 키네틱 조각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양가성과 종교성」, 『기초조형학연구』, 22권 5호(통권107호), 2021, pp. 307-3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리포에틱 [IN-DEPTH], artist 최우람, <a href="http://www.leepoetique.com/default/InDepth/InDepth9.php" target="_blank">http://www.leepoetique.com/default/InDepth/InDepth9.php</a>, 2021년 11월 27일 최종 검색.
최우람 공식 홈페이지-Gallery, <a href="http://www.uram.net/kor_new/intro_kr.html" target="_blank">http://www.uram.net/kor_new/intro_kr.html</a>, 2021년 11월 27일 최종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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