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2.26.

이정형 <부산물 Left over> 2013~현재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정형의 <부산물 Left over>(2013~현재) 시리즈는 전시 설치와 해체 과정에서 남게 된, 곧 버려질 운명의 사물들을 가져다 재구성한 작업이다. 오브제들은 작가인 동시에 전시디자이너, 전시조성업자로 활동하는 작가가 자신의 노동 현장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이정형은 삶의 현장에서 둔감해질 수 있는 작가로서의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계획적이면서 즉흥적인 작업이다.
타인의 전시를 위한 노동과 자신의 예술적 창조를 위한 노동이 겹쳐지는 <부산물> 시리즈는 예술의 정의와 기준, 그 범위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예술 작품이라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그러나 일상의 물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한 오브제들은 약간의 의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아낸다. 엄밀히 말해 작품이 아니었던 순간에도 이 오브제들의 대부분은 일상생활 속의 물건이 아니었다. 예술의 공간에 머무르는 예술이 아닌 오브제라는 이 미묘한 위치는 <부산물> 시리즈를 일상의 예술화라 단정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의 세계와 일상의 삶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되는가?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조건을 무엇인가? 전시된 오브제들은 매우 주관적인 작가 개인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작가라 인정받은 사람이 선택하고 의미 부여를 하며, 그 사람의 생각과 손길이 더해졌기에 예술이 된 오브제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예술가의 권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익숙하지만 답변하기 녹록하지 않은 질문이다.
<부산물> 시리즈뿐 아니라 이정형의 전(全) 작업을 보다 보면 예술가, 나아가 현대인의 팍팍한 삶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일까? 전시 준비 현장에서 노동하는 사람에게 전시장은 예술의 공간이라기보다 노동의 현장일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노동의 현장은 예술적 공간으로 전환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노동의 현장이 된다. 마법 같은 변신이 반복된다. 어느 쪽이든 작가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 혹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의 무게를 실감한다.
한편 이정형의 부산물들은 -때로 해체된 장소 특정적 작품의 일부가 등장할 때도 있지만-좌대나 조명, 차단봉처럼 전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존재감이 미미했던 사물들이었다는 점에서 타자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에서는 작품이 주인공이라 여겨진다. 그 밖의 요소들은 모두 작품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을 돋보이게 해주던 이정형의 부산물 역시 작품으로서 전시될 때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사물들과 함께 한다. 위치가 전환되었다.

<Light Construction>,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 2018 ⓒ이정형

<부산물> 시리즈는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우선
<Painter>(2016), <Light construction>(2017), <Weight of seeing>(2018)처럼 다양한 오브제들을 결합한 설치 작품이 있다. 전시 준비가 한창인 현장을 그대로 옮겨 보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부산물을 이처럼 작품으로 선보이기 위해서는 꽤 많은 정제의 과정이 필요하다. 의도된 느슨함으로 긴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심혈을 기울인다.

<Different Kinds of White (cube)>, wood, paint, 30.4x24.4x24.4cm, 2018 ⓒ이정형



<좌대 위에 좌대 위에 좌대> pedstal from exhibition site, variable dimension, 2018 ⓒ이정형

두 번째는 <Handmade wall>(2018), <Different kinds of white(wall)>(2018), <Different kinds of white(cube)>(2018)처럼 모더니즘 미술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가진 작품들이다. 이 경우 제목에서부터 독립된 자율성을 유지하는 모더니즘 미술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쌓인 좌대>(2018), <좌대 위에 좌대 위에 좌대>(2018)는 작품과 좌대, 전시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좌대를 이용한 이정형의 작품은 좌대가 그 자체로 작품이 되거나 반복, 중첩되어 작품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작업을 떠오르게도 한다. 설치 미술이 익숙해진 동시대 미술에서는 작품이 좌대가 아닌 바닥(현실 공간)에 놓이는 경우가 많지만 전통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좌대(받침대)는 그 위에 놓인 오브제를 단번에 예술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전시라는 시스템’을 이야기하길 원하는 작가에게 공간과 작품의 관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좌대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부산물> 시리즈의 세 번째 부분은 작가가 수집한 오브제들을 하나하나 진열해 놓은 <Collection from construction site>(2016)이다. 이 작업은 수집의 행위가 작업의 기반임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높지 않은 좌대 위에 꼼꼼하게 올려진 오브제들을 마주하면 작가가 이 수집품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뤘는지가 느껴진다. 무언가 수집하고 보관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가치의 유무와 상관없이-소중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객 역시 이정형의 소장품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해체된 전시장 벽의 파편에 작가가 <겹쳐지는 지점 Study of Crossing Area> 시리즈의 사진을 참고하여 그린 <Wall painting>(2014~)을 들 수 있다. <Wall painting>에 재현된 노동의 현장은 이제 다중의 의미를 생성하는 상징이 된다. 상징은 개인적인 경험뿐 아니라 사회적 규칙과 약속, 역사 등에 영향받는다. 벽은 산산 조각나고 회화의 바탕이 되었다. 완성된 그림은 벽에 걸리지 않고 선반이나 바닥 등에 놓인다. 바닥에 놓인 벽화다. 재현 미술인 이 벽화는 모더니즘 미술의 형식론을 깨뜨리고 삶의 세계로 이어진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작품이라는 회화의 전통적 문법을 벗어난다.

<Collection from construction Site>, objects from construction site, variable dimension, 2016, installation view at The SIte before Your Eyes, Solo exhibiiton ⓒ이정형



<Wall painting>, acrylic on broken wall, variable dimension, 2016 ⓒ이정형

관객은 이정형이 붙잡아놓은 시간과 공간의 기억이 혼재된 연극 무대와 같은 전시장에 입장한다. ‘전시에 관한 가설을 이야기하는’ 오브제들을 마주하고 교감을 나누며 공간 전체를 온몸으로 감각한다. 이정형의 부산물이 함께 하자 공간까지도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주인공과 조연, 배우와 소품의 구별이 모호한 무대이다. 애초에 모든 전시는 매우 복합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그것은 작품들의 집합소인 동시에 스스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자 환경이다. 그것은 물리적 영역을 뛰어넘는다. 시간을 넘나든다. 생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의미를 생성한다. 개념과 이상이 현실화된다.
이즈음 우리가 다시 떠올려야 할 사항은 전시장에 놓인 이 오브제들이 이정형에게 선택되기 이전부터 예술적 공간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모든 활동의 결과는 특별한 시공간적 구조를 생산한다거나 작품이 여러 전시장을 순회하며 시간을 쌓아간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 그리고 기억의 축적을 제공한다. 겹겹이 어긋나게 교차된 기억이다.
기억은 흘러간 시간 뒤에 남는 것이다. 기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흔적과 같다. 그리고 <부산물> 시리즈는 시간의 흔적 남기기를 돕는다. 그런데 과거는 낱장의 스냅사진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단절된 점의 반복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져 있다. 지속인 것이다. 현재에 맞추어 연장된 과거의 시간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기억 속에 머무른다. 인간의 생각도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속된다. 인간 사유의 많은 부분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나임을 인식하는 것도 과거로부터 이어진 기억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명쾌하게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언어가 그것을 구별하듯이 한 번도 명확히 분리된 적이 없었다. 현재만을 경험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현재는 과거가 된다. 미래는 찰나의 순간 현재가 되고, 현재는 찰나의 순간 과거가 된다. 축적된 과거, 곧 과거가 될 현재, 이내 과거가 될 미래. 인간이 굳이 구별하려 하는 이 세 층위의 시간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결국 과거 아닐까. 오늘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오늘의 의미는 과거에서부터 파생되거나 과거와 단절되면서 생성된다. 과거는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생각하는 매 순간의 우리와 함께 한다. 인간의 삶은 미래를 향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의식에 남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는 그렇게 계속 쌓인다. 과거의 시간은 계속 길어진다. 그래서인지 현재의 우리는 늘 미련이 남는다.
이정형은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는다. 아쉬움 때문이다.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흔적들의 수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수집품이 무엇이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존되기에 그 연한을 늘릴 수 있다. 사실 전시장의 사물들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과거를 향한다. 결국 <부산물> 시리즈의 밑바닥에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세계 속 존재에 관한 근원적 탐구가 자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잠시지만 흘러감과 정지됨이 공존한다. 물론 종국에는 흘러감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허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비결정성을 보증한다. 모든 확정은 유보된다. 이는 모든 가능성이 열림을 의미한다. 이야기가 반드시 종결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아쉬움을 남기는 미완의 흔적이 더 찬연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