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4.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 이정윤』 (2020)의 「평론」 (pp. 8-30.)을 바탕으로 합니다.

과정 중의 이상주의자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1. 매개자로서의 예술가
<Silkroad>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공간이 공존한다. 무수한 시공간이 쌓인 길 위를 걷는 누군가의 삶 역시 넥타이 위에 계속 축적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매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¹⁾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한 점이 참 많다. 나를 생각하면 선인장처럼 증식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를 둘러싼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결과도 궁금하다. 그래서 협업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²⁾

이정윤은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코끼리 공기조형물 <엄마의 외출>(2011)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매개자로서의 활동은 이동형 무대와도 같은 공기조형물인 <Portable Museum>(2014), 기증받은 넥타이로 만들어진 길 위를 관객이 걸어 다닐 수 있게 설치된 <Silkroad>(2015)로 이어졌다. 이 두 작품은 각종 공연의 무대이자 배경이 되어 또 다른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코끼리 (봉제)인형을 분양받은 사람들의 참여로 제작되는 <Round Trip>(2012~present)과 작가가 벽 위에 그린 드로잉을 관객들이 채워나가는 <상상정원>(2019)에서는 서로 ‘함께 함’의 비중이 더 커졌다.
<Round Trip>의 참여자들은 분양계약서를 작성하고 작품인 코끼리 인형을 자신의 삶으로 들여오게 되는데, 원하는 대로 코끼리 인형을 꾸밀 수 있다. 이후 작가가 전시를 위해 요청하면 참여자들은 코끼리 인형 혹은 코끼리 인형과 함께 한 일상의 기록(사진 등)을 보내주고, 전시를 마친 뒤 작가는 인형을 참가자에게 돌려보낸다. <Round Trip>에서는 말 그대로 미술 작품이 전시장이 아닌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작가가 아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작품의 제작에 참여한다. 작가에게 속해 있던 코끼리 인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자리에서 부여받은 의미를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실제로 <Round Trip: returned elephants>(2012), <Re: Roundtrip>(2013)이란 제목으로 전시된, 작가에게 잠시 되돌아온 코끼리 인형들을 살펴보면 각양각색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고 있어 참여자들이 매우 정성스럽게 코끼리 인형을 꾸며주고 애정을 쏟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벽에 걸린 사진에는 코끼리 인형과 함께 한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전시된 것은 인형과 사진뿐이지만 시간과 기억이 축적되고 공유되어 서로를 이어준다. 한 공간에 함께 머무르지 않지만 작가와 참여자들, 나아가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자연스레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서로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Round Trip: Ready-to-go> 코끼리 봉제 인형, 25cm(each), 맥화랑 전시전경, 2012 ⓒ이정윤

그 형식이 다를 뿐 <상상정원>을 비롯해 관객이 참여하는 벽화 작업도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누군가는 색칠 공부를 하듯 선으로 그려진 형상의 안쪽을 채워나갈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드로잉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정원을 그려나갈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이든 예술가의 일방적인 통제력은 이전보다 축소되고 참여자들은 작품의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관객이 감상자이자 참여자일 뿐 아니라 협력자, 나아가 창작자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정윤은 관객들이 예술적 행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그에 응답하는 관객은 눈으로만 감상하는 미술을 넘어선다. 관객의 경험이 예술이 된다. 예술은 그렇게 삶으로 들어오고, 우리도 예술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이와 같은 작업은 다수의 참여자가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미술이기에 마치 <Round Trip>의 코끼리 인형이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듯 다양성을 포함하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움이 하나의 작품에 담기고 작가의 흔적 위에 서로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 남겨지는 상황. 하나의 그림이지만 서로 다름으로 가득한 벽화.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소유한, 일상으로부터 독립된 예술만의 세계는 사라진다. 이제 관객은 작품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를 읽고 공감하기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창작자가 되어 의미의 관계망을 생성하는 데에 참여한다. 끝없이 확산되고 생성되는 관계가 중심에 놓인다. 마치 플랫폼(platform)과도 같은 작품이다.
한편 작가가 2014년부터 참여한 퍼포먼스(공연)는 예술가들 사이의 창조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융복합문화예술 컨텐츠 공연인 <똥>(2015, 2019)이 대표적이다. 이후 이정윤은 현대무용가와 한국 무용가,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트리트 댄서(street dancer), 배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렇게 모인 예술가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예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장르 간 협업이 익숙한 시대이지만 예술가들 사이의 ‘함께 함’이 이처럼 지속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이정윤과 함께 하는 예술가들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의 모범 답안과 같은 생각, 순수하게 예술을 중심에 놓고 구속됨 없이 자유롭게 참여한다는 기본 태도를 지키기 때문이다.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융복합문화예술 컨텐츠 공연 <똥> 전경, 영화의 전당, 부산, 2015. 11. 29. ⓒ이정윤

인간 사회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소통의 도구는 언어이다. 언어는 인간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주된 방법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그런 만큼 인간의 정체성 형성이나 사회화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언어만으로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통로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매체와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고, 관객은 작품을 마주하며 그것을 전달받거나 예상치 못했던 대화의 힌트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정윤은 작품에 자신만을 담아내길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만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자신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 더 널리 퍼트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지속되길 바란다. 독주가 아닌 합주와 같은 작품으로 서로의 삶에 영감을 주는 일,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이 어렵지 않고 편안한, 경직되지 않는 미술이 되길 원하는 것도 사람들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놀이하듯 감상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이 많은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이정윤의 작업은 그 자체로 놀이와 닮았고, 관객들은 놀이의 참가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에 임한다. 활기와 웃음이 발산되는 시간.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창조적 놀이이다. 그런데 놀이는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오이겐 핑크(Eugen Fink)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하고, 사랑하고, 불안해하는 동시에 놀이하는 존재이다. 놀이는 인간 실존과 관련될 뿐 아니라 세계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를 이해해야 한다.³⁾

<Portable Museum> 공기조형물, 600x250x250cm, 부산대학교 아트센터 전시전경, 2015 ⓒ이정윤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무나 책임, 현실적인 이득이나 이해관계는 놀이의 참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놀이란 스스로 원할 때 참여하는 것이다. 놀이에 참여하는 그 순간의 즐거움이 제일 큰 목적이자 결과이다. 순수한 만족이 놀이의 동력이다. 놀이에서 괴로움, 불편함, 억압을 예상하거나 상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놀이의 참여자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다. 순간에 몰입하고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처럼 놀이에 몰입하다 보면 자연스레 복잡하게 얽힌 현실의 고됨을 잠시 잊게 된다. 현실 사회가 부과한 의무와 책임도 잠시 내려놓고 실패와 낙오, 패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술도 그렇다. 작품 감상(체험)에 집중하면 일시적으로 현실을 잊게 된다. 작품에 몰입하는 순간 세계 속에는 감상자와 예술뿐이다. 놀이와 예술 모두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난 것 같은 영역을 만들어 자유를 얻게 한다. 현실에 머무르면서 상상과 손을 잡는 것. 그것은 놀이이다. 그리고 예술이다. 놀이와 예술 사이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놀이가 그렇듯 미술 작품도 감상자(참여자)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놀이와 예술 모두 현실과 상상, 물질과 정신(내면)이라는 반대되는 항들을 연결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탐구하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놀이는 그저 가볍기만 한 시간 소모가 아니다. 놀이엔 늘 진지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반대항이라기 보다 현실의 빈틈을 보완해주는 것에 가깝다.⁴⁾ 반대로 예술이 늘 무거운 것만도 아니다. 늘 심각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작가는 세상을 향한 질문과 고민을 쉽게 이해시키고, 함께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힘든 일이라 말한다.
이정윤은 꽤 오랫동안 이 유희적인 예술+놀이의 장을 실현하는 데에 집중해왔다. 작가가 선사하는 흥미진진한 상황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작품에 몰두하는 관객이자 놀이에 흠뻑 빠진 참여자가 된다. 함께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상상의 교차점에서 작품 혹은 다른 관객(참여자)들과 놀이하듯 교류한다. 작가가 기대하고 조절 가능한 영역과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이 서로 마주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감각과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고, 새로운 자신을 구현한다. 이전과는 달라진 관객은 자신과 한 공간에 함께 하는 작품에 다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편 예술을 논하고 실행하는 장소이자 미술 교육이 진행되는 스튜디오 붐빌(Studio Boomvill)에서 작가와 방문자들은 허물없이 함께 창작의 시간을 보낸다. 이는 이정윤이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과정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작가는 작품을 매개로 소통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일상으로 관객들을 초대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예술을 나누기. 예술을 함께 만들기. 삶을 함께 나누기. 무엇보다 중요한 작가의 지향이다. 그렇게 ‘함께 함’은 끝없이 확장된다.

2. 삶의 초상: 모순어법
내가 일상에서 직접 경험하며 갖게 되는 관심사들, 내가 체험한 부분들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일차원적이지 않다. 아주 작은 사건들 안에서도 복잡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⁵⁾
원 없이 자유로운 것 같고 경계를 해체할 것 같지만 규율이나 프레임을 강하게 확립하고 있는 것 같다. (중략) 현실에 온전히 발을 딛지도 않고, 환상의 나라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⁶⁾

이정윤의 작업은 자전적이다. 작가 스스로 작업에 자신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듯, 코끼리와 하이힐이 등장하는 초기작부터 여행 가방과 선인장이 그려진 최근의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모두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에 기반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언제나 작가 개인의 서사가 놓인다. 일례로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를 지켜주는 동화책 속 엄마 코끼리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면서부터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코끼리 공기조형물과 인형도 현실적인 문제로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분신과도 같은 코끼리를 생각하다가 만들게 되었다. 물론 모든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부분이 포함된다. 작가 역시 자신이 살면서 경험하는 세상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의 시선과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다. 특히 이정윤은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는 세상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객관화하려고 하거나, 거리를 유지하려 하지 않기에 자전적인 동시에 1인칭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상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서술하고 삶과 주변의 과거와 곧 과거가 될 현재를 복기하여 스스로를 분석한다. 이처럼 작가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통해 현재의 나를 다시 경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만들어나간다. 새롭게 형성된 내면은 작가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기에 자전적 작업은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On the edge> Drawing on paper, Mixed media, 55x36cm, 2014 ⓒ이정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이정윤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 개인들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온다.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작가, 나아가 인간의 반영이다. 실제로 이정윤의 작업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현대인, 그들의 희로애락과 애환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정윤은 자신도 그들 중 하나임을 알고 있다. 어른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를 돌보고, 아기 코끼리는 벅차 하면서도 다른 코끼리의 뒤를 따른다. 화장실에서 혹은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지쳐 울고 있는 코끼리,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는 코끼리, 이런 상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작품 속 이야기들은 보통 사람들의 고민,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니 자연스럽게 서사적 진정성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정윤이 작품에 오롯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작가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나아가 작가의 상상까지 담겨 있다. 삶의 현장이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과정 중에는 편집과 가공이 일어난다. 사실적 기록만을 추구하는 작업이 아니기에 변주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때때로 이정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꿈 이야기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상상이 더해진 동화 같은 분위기의 상징들은 감정 이입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전적 서사가 상상력과 만나자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전달받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작업한다.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무겁게 전달할 경우 아예 회피해버릴 수 있다. 게다가 실제의 삶과 상상은 그렇게 이분화된 것이 아니다. 기억과 경험은 머릿속에서 늘 재조합된다. 때로는 상상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예술로 이어질 때는 더욱 그렇다.
역으로 우화처럼 동물과 식물이 의인화된 작업은 관객이 인간의 세상을 거리 두기 하면서 사색하게 돕기도 한다. 과도한 몰입을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삶을 차분히 관찰하게 한다. 동물은 인간에 의해 타자화되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 속 인간은 과연 주체인가? 마치 인간이 대상으로 타자화시킨 존재들처럼 타자화된 것은 아닌가? 타자화된 주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지 오래다.
이런 주제는 오늘날의 우리가 너무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담은 것 같다. 통속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새롭지 않다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변함없이, 여전히 그런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1943)의 모자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sleepless cacti>(2017), <여행하는 선인장>(2017, 2018) 등에 등장하는 모자는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 같다. 표피에만 집중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단정 짓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이정윤의 작품은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한편으로 블랙 유머가 채워진 서늘한 동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따뜻하게 마음을 울리는 애틋한 동화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어른들에게 더욱 필요한 그림책 같다. 등장인물은 모순 속의 세상을 살아가는 모순덩어리인 어른이다. 현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적 의식이 담긴 작품. 그런데 그 신랄함이 공격적이진 않은 작품. 한쪽은 날카롭고 다른 한쪽은 조금 뭉툭한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작가가 기본적으로 이 세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날카롭기만 한 비판은 오히려 상처가 되고 희망을 꺾을 수 있다. 작가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원하지 않는다. 결국은 모두 함께 하는 세상이다.
이정윤의 작품 속 상징들은 약하지만 강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하다. 구두를 신은 코끼리는 울고 있다. 코끼리는 “사회적인 틀, 벗고 싶지만 벗지 못하는 프레임”⁷⁾을 의미하는 하이힐을 신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무리와 함께 하는 코끼리는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다. 하늘 위 선글라스를 낀 코끼리는 행글라이더(hang-glider)에 몸을 싣고 날아간다. 무리 속 코끼리가 무조건적인 순응과 함몰을 의미하지 않듯 하늘을 나는 코끼리는 해방과 자유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속이 비어 둥둥 뜰 수밖에 없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현대인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신기루를 쫓는 인간인 것도 같다. 만약 그것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해도 무리에서의 이탈과 해방의 결과는 무엇일까? 어느 쪽이든 인간 존재, 인간 삶의 불안정성과 연결된다. 과연 코끼리의 미소는 만족의 웃음일까? 냉소일까?
이정윤의 선인장은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선인장은 여행 가방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한다. 선인장도 하이힐을 신었다. 선인장은 사막을 떠올리게 하고, 사막 위의 선인장은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고난을 이겨내는 인간을 닮았다. 그런데 이정윤의 선인장은 가시가 없다. 자기 방어와 공격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시가 사라진 선인장은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끝없이 상처받는 연약한 선인장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알록달록한 뱀처럼 위장해 끝까지 살아남는다. 사막을 벗어나 함께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가시를 없앤 선인장은 끝없이 증식하고 성장해 자신의 영역을 늘리는 선인장이기도 하다. 상반되는 이야기는 끝없이 펼쳐진다. 이정윤이 선택한 재료와 형식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의 드로잉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장지는 종이이지만 질기다. PVC(Poly Vinyl Chloride)로 만든 공기조형물은 거대하지만 가볍다. 작가가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유리는 단단하지만 깨지기 쉽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재료들 같지만 연약하면서도 강한 존재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Flying Elephant> PVC, Air motor, 120x100x100cm, 2011 ⓒ이정윤

결과적으로 이정윤의 작업은 모순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모순적인 존재들의 초상이다. 감성적이지만 이성적이다. 사회에 희망을 주고 밝은 면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회를 분석하고 풍자한다. 슬프지만 기쁘다. 공존할 수 없는 성격들의 결합으로 이뤄진 것이 이정윤의 작업이다. 작가는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사회도 견고하지 않다고 말한다. 작가에게는 가치, 나아가 진리까지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흐르는 상황. 위태롭다고 느끼는 사람도, 유동의 가능성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전자에 가깝다.
이런 이정윤의 작업은 모순어법(oxymoron)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는 인간이 통일되고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주체는 완결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고정되지도 못한다. 주체는 완전하지 않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부조리한 존재들이 함께하는 부조리한 세상이다. 희극이자 비극이다. 심각하지만 헛소동 같고 즐겁다가 슬프기도 하고 평화롭지만 힘들기도 한 그런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이정윤이 인위적으로 만든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이분법적인 논리로 정리할 수 없다. 절대적인 규범이 지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슬프고 혼란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존재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믿어지는 유일한 정답을 따르는 사회를 벗어나는 시작점은 이런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순의 상황에서 엄격한 기준의 영향력은 약화된다. 이정윤의 작품에 나타나는, 모순적인 특성들은 하나의 기준과 규칙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와 위계질서를 깨뜨린다. 대립항의 우열을 가리고, 평가하고, 낙오자를 만드는 상황을 벗어나는 작업은 저항적이다. 모순성을 드러내는 상황은 긴장과 갈등을 만들 기도 있지만, 의미 생성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정됨을 거부하는 상황은 유동하는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⁸⁾

3. 이동하는 주체
나의 선인장들은 모두 땅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정주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내 생각과 내면은 늘 이동했으면 좋겠다.⁹⁾

이정윤의 작품 속 이미지를 처음 마주하게 되면 현실에서의 삶을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분주하게 이동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일탈처럼 보인다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윤의 이동하는 상징들이 전하는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업 제일 깊은 곳에는 끝없이 유동하는 삶을 추구하는 노마디즘(nomadism)적 사고가 흐른다.
이정윤은 자신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유목민과 같은 정신적 사유를 지향한다. 이정윤의 작업에는 끝없이 탈주, 접속, 분열, 생성하고 횡단하는 소통의 유목적 주체가 담긴다. 작가는 작품 속 상징을 통해 유동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끝없이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동할 수밖에 없다.
나열해 본다.
이동하고 있는 코끼리, 하늘을 나는 코끼리, 낯선 곳에 보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코끼리(인형), 끝없이 증식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선인장, 그런 선인장과 함께 등장하는 여행 가방, 사람들을 걷게 하는 넥타이로 만든 길, 어디든 갈 수 있는 미술관. 결과적으로 이정윤의 작품은 다른 세계, 다른 삶의 방식과 사유를 찾아 한곳에 머무른 채 이동하는 유목민¹⁰⁾의 삶을 사는 작가의 분신과 같다. 끝없이 새로운 사유와 가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에게 탈영토화는 필연적이다. 창조와 생성되기는 유목의 삶과 긴밀하다.¹¹⁾

<Sleepless cacti> Drawing on Paper, Mixed media, 20x30cm(each), 2017 ⓒ이정윤

정주하지 않음은 끝없이 도전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영역 사이를 횡단하는 작가는 낯선 존재들과 만나 관계를 맺고, 한정된 경계를 깨뜨린다. 그 과정에서 사유는 끝없이 변화하고 확장된다.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는 유목민은 하나로 통일된 원리, 합리적이라 믿어지는 규범의 지배로부터 자유롭다. 보편적인 질서와 원리를 따르는 구조의 허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본질은 불가능하다. 이제 절대적 진리와 가치는 부정된다. 다양함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방식들이 끝없이 교차할 뿐이다.¹²⁾
탈영토화.
물리적으로 이동해야만 유목민인 것은 아니다. 유목민은 움직이지만 머무른다. 흘러가면서 멈춘다. 유목민은 이동하기 위해 멈추고, 떠나는 중에 멈춘다. 그렇게 경계선을 가로지른다. 정착민과 달리 유목민에게는 이동의 과정이 중요하다. 정착하기 위한 이동이 효율적으로 최단 시간, 최단 거리의 경로를 찾는다면 유목의 길은 목적지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더 먼 길을 찾아갈 때도 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이 중요하다. 유목민에게 점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유목은 하나의 목적지에 종속되지 않는다. 더 좋은 곳에 머무르기 위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최종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사이사이 황폐한 곳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생성시키는 것이 유목이다.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고정된 자신, 영역, 가치를 떠나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이정윤(의 작업)이 이동하길 멈추지 않는 이유이다.¹³⁾

내 작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낯선 장소로 즐거운 여행을 온 것처럼 일상이 조금 달라 보이는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 내 작업을 통해 관객들 본인이 가진 삶의 단어들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¹⁴⁾

이정윤이 작업을 통해 실행하는 여행의 시작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재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실되게 스스로를 바라보고 그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정윤은 혼자 떠나지 않는다. 함께 하자고 끝없이 손을 내민다. 예술가들과의 협업, 그리고 관객들과의 공존. 작업이 진행될수록 ‘함께 함’의 비중은 점점 커진다. 작가 개인에게서부터 시작된 여행이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진정성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모두 함께 여행길에 동참하게 된다. 자유롭고 가벼운, 늘 접속되어 있는 존재인 유목민은 타인을 바라보고, 환대해야 한다. 관계적이어야 한다. 함께 나눈다는 단어의 기원이 의미하듯 공유해야 한다. 배척과 소외는 유목민에게 죽음과 같다. 그렇게 이동의 장소는 공유된다.¹⁵⁾

<Traveling Cacti> 공간 내 가변설치, Mixed media, 세종문화회관기획 북서울상상톡톡미술관 전시 전경, 2018 ⓒ이정윤

효율성의 극대화, 체계화라는 명목하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과 규범 안에서 획일화되어 굳어진 관계가 여전히 우선시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유동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 혼자이지만 동시에 함께인 상태. 이정윤이 참여하는 예술적 프로젝트들. 각자의 작업을 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연대하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은 상호존중과 연대를 보여준다. 자발적으로 작품 앞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관객들 사이에는 공감과 이해가 퍼진다. 상호관계적인 작품을 놀이하듯 즐기며 유목의 길을 함께 하고 연대감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효율성을 위해 모이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계산을 통한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는 신뢰와 감정적 공유가 중요하다. 수평적이고 자발적이며 상호적인, 그리고 유동적인 공동체는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다양성이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를 생성한다.15)
정지 상태의 주체를 해체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 중의 주체를 생성하기 위한 노력은 차이를 받아들이고 발생시키는 순간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작업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이정윤의 작업에 완성이란 마침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과정 중에 놓인다. 그렇게 열린 작품이 늘어난다. 이번에도 ‘함께 함’이 원동력이다.
작가 이정윤은 이상주의자이다.
이정윤은 다가가기에 어렵지 않은 작품을 선보이고,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예술의 공간을 준비한다. 이는 완벽히 준비된 무대 위뿐만 아니라 조금은 느긋한 무대 아래에서도 유효하다. 그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함께 말 그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이정윤의 활동에서 한결같이 발견되는 것은 예술이 작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은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이상주의적인 태도이다. 그 이상이 얼마나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이런 작가의 작업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지에 대해 정확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최소한 지금 당장은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에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다. 몰두하는 이 순간이 중요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