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09.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이완』 (2018, 개정판)의 「평론」 (pp. 7-34.)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사색가, 활동가, 그리고 작가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1. 탈경계적 사유
작가 이완의 작업을 대표하는 단어는 ‘시스템(system)’¹⁾과 ‘불가항력’이다. 구체성을 위해 몇 개의 단어가 추가되어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사회)과 구성원(개인), 체계와 규범, 자본주의(신자유주의)와 노동,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등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완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하는 키워드는 탈경계적 사유다. 이완의 모든 작업은 결코 한정된 영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대할 때에는 경계를 넘나들며 끝없이 부유(浮遊)하는 사유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미술은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람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 하나의 단어조차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전달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오늘날,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작품에 대한 어떤 분석이든 가능하다. 비단 미술뿐만 아니다. 현재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여러 겹을 지닌 의미를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시대다. 그리고 이완은 이런 시대에 매우 잘 어울리는 작가다. 그는 작업을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조차도 -적절한 순간에-스스로 변조하고 재조합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이런 이유로 이완의 작품에는 마침표가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완은 <우리가 되는 방법 How to Become Us>(2011)에서 그가 수집한 물건 60개를 -개별적 특성이나 용도를 무시한 채-오직 물건들의 평균 무게인 5.06킬로그램(kg)에 맞춰 재조립했다. 획일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메이드 인 캄보디아, 쌀 Made in Cambodia, Rice>(2014)의 스크립트에서도 언급되었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같기도 하다. 개인들은 우리 안에 포함되기 위해 일반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부분을 제거하고, 부족하다 여겨지는 부분을 덧붙여야 한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평균에 도달하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때로는 타자가 되어 우리 밖으로 추방된다. 다원성이 강조되는 오늘날, 우리에 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이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Us and Them>(2014)에서 사람들이 생각했던 1센티미터(cm)가 모두 달랐듯 애초부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적 논리가 익숙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은 힘을 발휘한다. 60개의 물건이 가진 다양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단 하나의 기준인 무게에만 근거해 재조립해 놓은 풍경은 이런 현실을 직관적으로 인식시킨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되는 방법>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정반대되는 해석도 비등한 아우라(aura)를 발산한다. 이 경우, 물건들이 잘려지기 이전 모습이 대량 생산된 물건들처럼 규격에 맞춰진 정체성을 상징한다. 또한 작가가 평균 무게를 기준으로 재조립해 효용성을 제거한 행위는 정해진 사회의 매뉴얼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의 표시이다. 물건들의 모범 답안(사용 가치)을 모두 해체시켜 놓은 상황은 매우 비상식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규칙을 벗어나는 행위를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괴이하게 느끼는지 보여준다. 이완은 작업 초기부터 절대 권력을 지닌 시스템, 시스템의 작동에 기여하는 매뉴얼에 비판적이었고 일상용품들의 사용 매뉴얼을 벗어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책 운동 기구 Book Sporting Goods>(2006) 시리즈에서는 책을 그것의 원래 용도와는 정반대로 여겨지는 체력단련용으로 사용했다. <삶은 그저 따라 울려 퍼지는 핏빛 물결 Life Is Widely Spreading Blood-Red Ripples>(2009) 시리즈에서는 소고기로 물건진열대와 깃대, 막대기, 십자가상 등을, 닭고기로는 야구공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든 정답으로 여겨지던 단 하나의 선택지를 벗어남으로써 당연시되던 규칙과 사회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기계적으로 5.06kg이라는 무게를 맞춘 상황은 무조건적인 평등 추구가 또 다른 획일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로 풀이된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기회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불평등하거나 불법적인 방식으로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들을 무시한 채 결과의 평등만을 강조한다면 그 의도와 무관하게 이완의 작품처럼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실제로는 불가능한 모두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가 강제로 평등을 재단한 상황’은 또 다른 폭력과 불평 등을 야기한다. 또한 결과의 평등은 경쟁의 소멸로 이어져 좁게는 개인, 넓게는 집단의 경쟁력 저하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쉽게 속단할 수 없다. 능력주의에 따른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기회의 평등을 전복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²⁾ “인간은 교육을 받고 똑똑해질수록 자본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능을 지녔다.”³⁾ 오늘날 자본은 최고의 무기다. 우리는 자본을 욕망하고, 자본은 우리를 지배한다. 이후 자본의 흐름과 그것을 둘러싼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탐색은 <뱅크 오브 이완 Bank of LEE WAN>(2013~present)에서 ‘완(WAN)’이라는 화폐를 발행하고 금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How to Become Us> Dimension Variable(5.06kg), Collected 60 Objects were Cut and Combined into the Average Weight of 5.06kg, 2011 ⓒ이완

<우리가 되는 방법>을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 연결시켜 본다면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 속에서 비인간화, 탈인격화로 만신창이가 된 -노동자와 소비자를 모두 포함한-인간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물질문명의 시대에 인간의 존재 의미는 ‘얼마나 벌 수 있는가와 얼마나 쓸 수 있는가’로 평가된다. 특히 소비는 중요한 덕목이다. 당연히 소비에 참여하지 못하는 개인은 우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소외된다. 노동의 궁극적 목표도 결국 소비와 소유를 위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비사회는 자본을 위해 수요공급의 법칙을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관리한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는 자연스러운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상품의 사용가치는 더 이상 상품의 생산과 소비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현대 소비사회의 역동성(dynamism)은 자본의 운동이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소비 욕망을 동력으로 한다.⁴⁾ 사용 가치와 무관한 소비가 이뤄진다. 인간의 욕망까지도 경제적 효율성에 종속되고 왜곡되는 오늘날 소비재들은 <우리가 되는 방법>의 잘려진 조각들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 존재한다. 과연 우리는 실재하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일까? 미디어가 만들어낸 조각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온몸이 버터로 만들어졌음에도 ‘버터 가진 사람 없나요?(Does anyone have more butter)?’라고 질문을 던지는 조각상은 욕망에 함몰된 현대인의 자조 섞인 초상이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온전한 소유는 불가능하다. 욕망은 한순간도 충족되지 못한다. 비단 소비의 차원만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이나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오직 단편적인 조각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온전히 인식하고 이해하며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지식과 문화의 단편적인 조각, 하위 체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⁵⁾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잘려진 채 쌓여진 물건더미들은 목적성과 방향성을 잃은 파편화된 세계의 모습이자 본질이다.
작품을 보며 떠오른 생각들을 말한 뒤 의견을 물으면 이완은 덤덤히 그 모든 이야기가 가능하다 답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포함하여 어떤 하나의 의견이나 해석에도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자신의 목표와 의도가 매도되지 않는다면 당혹스러울 정도의 오독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유연해 보일 정도로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개성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사유를 촉발시킬 원인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작품이 생산해내는 메시지는 상황, 시간,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사실 작가가 의도한 대로만 읽히는 작품은 없다.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확고한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로 이뤄져 있고 해석의 다양성을 생성할 수 있는 여백을 포함한다.⁶⁾ 과연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 For a Better Tomorrow>(2015), <미스터 K와 한국사 수집 Mr. K and the Collection of Korean History>(2017)은 애국심과 민족성을 고취시키는 계몽적 메시지를 담은 것인가? 과거를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것일까? 2015년도의 회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오브제인 <더 밝은 내일을 위하여 For a Better Tomorrow>(2016)의 얼굴 없는 가족은 자신의 정체성과 생각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시스템의 교의(敎義)를 따라가는 우리를 상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얼굴을 비워놓음으로써 언제든지 유동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인가? 관객이 어떤 관점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유동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세상은 다양성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피상적인 한 부분만 보거나, 하나의 의미에만 함몰되는 것은 제대로 된 인식과 사유가 아니다. 다양한 의미들을 최대한 많이 유추하고 생각해야 세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A Diligent Attitude Towards a Meaningless Thing> Dimension Variable, Oil on Canvas, 2017 ⓒ이완

한편 이완의 작업은 형식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탈경계적이다. 회화, 조각, 오브제, 설치, 사진과 영상 등, 미술에서 만날 수 있는 전 영역을 아우른다. 화이트 큐브(white cube)적 전시의 전형처럼 보편적 성인의 눈높이에 맞추고, 작품간 간격을 유지하는 방식에서부터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설치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감상법도 관객이 조용히 관조하는 것에서부터 <라이딩 아트 Riding Art>(2005) 시리즈의 <미끄럼틀 Slide>(2005)이나 <펫-토이 PET-Toy>(2005)처럼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행위를 해야 하거나 <고유시-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한다고 해도 Proper Time>(2017)처럼 제작 과정에서부터 제3자의 참여가 중요한 경우도 있다. 장르를 넘나드는 만큼 매체 역시 무궁무진하다. 전통적인 미술 재료에서부터 식재료와 일상 용품, 불상과 같은 종교적 물품에서 작가 자신의 머리카락, 죽은 참새에 이르기까지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다.
특별한 조형적 특성을 말하기가 어려운 무형식의 형식을 갖게 된 것은 작품에 자신의 미적 취향을 담아내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와 긴밀하다. 이완은 미술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 삶의 본질,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그 구조, 그 구조를 지배하는 힘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반드시 시각적 결과물이 나올 필요가 없다’고도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전환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현재의 미술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점유하는 개념 미술, 과정 미술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라면 미술이 아닌 어떤 행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미술로서의 의무를 방기(放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그의 작품에는 철저하게 계획된 이미지들이 정확히 계산된 자리에 놓인다. 약간은 느슨해 보이는 부분조차도 계획된 것이다. 미술이라 불리는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그 정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이완의 작품은 생산품과 예술 작품 사이 어딘가에 놓인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오브제들을 프로덕트(product)라 부른다. 작품을 상품, 내지는 제품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완의 프로덕트들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예술 작품으로 판매된다. 분명 그의 생산품은 예술로 판단된다.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자본이다. 가격표가 붙여진 불상과 인형, 골동품 등이 함께 등장하는 <프로덕트 Product>(2015)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듯 종교와 역사까지도 경제적 논리에 지배받는 시대다. 자본주의가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을 관통하는 오늘날 프로덕트로 명명되는 오브제들은 이 시대를 아 우르는 사유를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행위는 노동인가? 창조인가? 작가 스스로 노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메이드 인 Made in>(2013~present) 시리즈에 이르면 그 답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한 끼의 식사를 혼자 만들어 보자’는 작업 목표는 예술의 목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시대의 매뉴얼에 수동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소비재를 현지에서 직접 만드는 프로젝트인 만큼 노동과 생산의 과정 그 전체가 작품이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따르면, 노동(labour)은 모든 사람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으로 육체적 삶의 필연성을 만족시킨다. 작업(work)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가치를 갖는 기구, 기계, 예술 작품 같은 인공물을 만드는 활동이다. 특히 예술은 지속성을 지닌 가치 있는 사물을 만들어낸다. 근대 사회는 노동을 공적 활동으로 만들었고, 세계 곳곳에 편재된 노동은 거의 대부분의 작업을 흡수했다. 예술 작품은 노동과 구별되는,
근대성(modernity) 안에 존재하는 마지막으로 남은 상품(commodity)이 아닌 생산물(product)이다. 예술은 삶의 다른 방식을 상상하게 한다. 한편 행위(action)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작용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⁷⁾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고 그 차이를 표현한다. 바로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다.⁸⁾ 모두의 생각이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관계 맺고, 설득하고 합의하는 정치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정치 제도도 필요하다.⁹⁾ 이완의 작품들은 노동이 예술까지 완전히 잠식해버린 근대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반대로 노동이 작업-예술-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메이드 인> 시리즈는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작가가 노동하기 위해 방문하는 대부분의 지역은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였으며 그로 인해 급속한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작가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역사의 흔적과 영향, 자본과 권력 등에 대한 공적 발화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유럽의 민족주의 전쟁이 전 세계 패권전쟁으로 옮겨 붙은 세계 1, 2차 대전이 종식된 이후 전 세계는 다시 이데올로기 전쟁이 펼쳐졌다.¹⁰⁾ 인도네시아의 불균형한 경제 상태에 대해 한 학자는 ‘성장과 형평성의 불화’라고 표현했다. 나는 테이블의 상판을 아주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¹¹⁾ 지금 한국의 도시에서 100년 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¹²⁾와 같은 스크립트는 감상자에게 사유의 단초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행위는 의도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을 생산한다. 이야기는 작업의 일종이다. 이야기는 행위에 영속성(durability)과 기억(remembrance)을 부여하기 위해 행위를 작업한다.¹³⁾ 이야기를 생산하는 사유와 행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유만이 진정한 행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
<메이드 인> 시리즈는 분명 노동과 작업, 행위, 그리고 사유 사이에 공고히 존재했던 분리와 위계 관계에 도전한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될 회화 작품을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자신의 노동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모르며 관심도 없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맡긴 <무의미한 것에 대한 성실한 태도 A Diligent Attitude Towards a Meaningless Thing>(2012, 2017)는 어디에 속하는가? 노동자들이 100호 캔버스를 1호짜리 붓으로 -매우 비효율적으로-채우면, 작가는 볼펜 낙서의 선을 참조해 큰 붓으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과연 이 작업은 생존을 위한 노동인가? 예술가의 작업인가? 예술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구조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행위인가?
이완의 작업은 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경계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시스템과 매뉴얼은 흐트러질 뿐이다. 경계를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이 가능해서도 안 된다.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는 공허한 발화(發話)만을 생산할 뿐이다. 자유를 찾아 시스템 밖으로 완전히 나가버린다면 어떤 저항도 불가능해진다. 이완이 경계 위에서 부유하는 이유다.

2. 저항과 적응 사이에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에 따르면, 모든 진정한 예술은 부정적이다. 여기에서 부정적이란 단어는 기성 현실과 언어, 질서, 관행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예술은 모욕받은 인간성을 보호하고 기성세대의 현실에 관한 대안을 간직한다는 면에서 부정적이다. 또한 기성의 현실과 그것을 따라 인간성을 훼손한 사람들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¹⁴⁾
이완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핵심 문제를 시스템에서 찾는다. 모든 것은 시스템 안에서 일어난다. 세상 속 존재는 어느 한순간도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에게나 유의미한 보편성을 띤 시스템, 이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 속에서의 시스템, 그 둘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사회다. 아주 오랜 옛날 언젠가부터 인간 삶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방식들이 발전, 응용, 계승되면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문명이 시작되고 국가가 만들어졌다. 시민혁명으로 봉건 군주제는 근대 시민국가로 바뀌었다. 이런 시스템의 변화에는 이데올로기와 종교, 철학 등이 영향을 끼쳤다.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시스템을 대표하는 국가는 질서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을 제도화하여 규칙성과 동일성을 유지한다. 질서는 의무나 권리, 도덕이나 가치, 규범이라는 형식으로 국가를 이루는 개인들에게 부과된다. 새로운 창조나 변화가 수용될 수 있지만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 적절한 위치를 점유할 때에 가능하다.¹⁵⁾ 그런데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의 역사가 전개될수록 특정한 권력 집단에 유리한 결정들이 시스템의 구축과 작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충분한 합의에 의해 시스템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일생 동안 자신이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선택지는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지고 조율된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개인은 시스템의 운영 체계에 맞춰 일생을 살아간다.
사회는 언어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다. 이 세계에는 서로 합의했다고 믿는, 혹은 그렇게 믿길 강요받는 규범과 질서, 윤리가 지배한다. 사회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정확히 언제부터라 그 원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진화 혹은 변화를 거듭해오며 존속되어왔다. 선학(先學)들은 이 구조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을 내놓았다. 그중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상징계(the Symbolic)는 통사론을 따르는 언어에 의해 규정된 보편적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부르는 가장 유명한 단어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부터 사회화되고 사회의 법과 질서를 내재화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조건이다. 주체는 부모의 언어적 우주(부모가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 미리 확립된 장소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주체는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를 배운다.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그 들의 가치관과 규범, 질서, 심지어 편견까지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주체의 욕망까지도 그들이 배우는 언어의 거푸집에서 주조된다.¹⁶⁾
이처럼 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스템의 정해진 자리에 위치한다. 법과 질서, 관습과 윤리 등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자신이 욕망한다고 믿는 무언가를 소유하게 된다. 인간은 상징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불가항력이다. 나 자신 혹은 누군가가 간절히 욕망하는 무언가도 사회가 욕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교육된 것이다. 약간의 변종이 일어난다 해도 상징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를 배우는 모든 인간은 언어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언어는 욕망이 존재하게 해주지만 그 안에 매듭들을 묶어 놓는다. 언어의 세계는 우리가 하나의 동일한 것을 원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원한다고 믿은 것을 얻었을 때 결코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든다.¹⁷⁾
언어를 배우고 사회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놀이에서 사회를 배운다. 이완은 아이들의 놀이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 할 수 있는 역할들을 체험하기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대부분의 놀이는 이 두 개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작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쟁놀이뿐 아니라 손수건 돌리기나 의자놀이 등도 결국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소꿉놀이나 병원놀이, 은행놀이 등은 분명 역할 학습의 기능을 한다. 아이들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가상 세계에서 습득한 역할 정체성을 놀이에서 실행하고 체화한다. 놀이는 그저 놀이가 아니다. 시스템에 더 잘 적응 혹은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이자 세뇌이다. 놀이를 통해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상을 주입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완은 <라이딩 아트> 시리즈에서 당연시되는 매뉴얼을 벗어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장난감들을 만들었다. 시리즈 중, 안장 대신 다양한 의자가 얹혀진 <세발자전거 Tricycle>(2005), 앞뒤가 아니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흔들의자 Rocker>(2005), 과거 학교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던 책상 의자가 부착된 <시소 See-Saw>(2005)와 <원더 휠 Wonder Wheel>(2005) 등을 보면 작가의 의도는 보다 명확해진다. 의자는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상징한다. 시스템 안의 나와 우리의 관계를 다루는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에서도 의자가 같은 의미의 메타포로 사용되었다. 장소별로 놓이는 의자의 종류도 바뀐다. <라이딩 아트> 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학교 의자는 학생, 즉 교육을 받는 것이 주된 역할인 계 층의 상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 시절 사회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매뉴얼을 습득하는 것이다.
한편 <책 운동 기구> 시리즈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분법적 분류 체계를 어그러뜨린다.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의 시대인데도 인간 사회는 여전히 편 가르기에 익숙하다. 양극단으로 나뉘어 상대편을 공격하거나 추방한다. 가치 판단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둘로 쪼개어 보는 매뉴얼을 배우고 내재화했기 때문이다. 이완은 이 작품에서 책의 매뉴얼을 벗어나는 동시에 ‘책을 읽는 것이 정신(내면)에 도움이 된다면 육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육체(의 단련)와 정신(의 단련)은 우리의 생각대로 상극에 위치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더 나아가 <책 운동 기구> 시리즈는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고 관리하는 것 역시 사회적 매뉴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은유한다. 언어로 가득한 책은 상징계적 질서의 등가물이다. 이상적인 육체에 대한 갈망과 가치 평가는 사회적 기준을 따른 것이다. 몸은 그저 몸의 영역에 머무르지 못한다. 획일화된 미를 벗어나야 한다는 비판적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외모에 열광하는 시대다. 그리고 미의 기준은 자본주의와 결탁해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현대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육체를 만들기 위해 소비한다. 자신의 몸까지 매뉴얼을 따라 바꿔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Life is Widely Spreading Blood-red Ripples Series, Kiss Lonely Goodbye> 7x7x7cm, Remanufactured with Grated Chicken, 2009 ⓒ이완

2009년 이후 이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매뉴얼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의자는 자전거 안장의 역할을 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거나, 책은 무거우니 근육 단련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매뉴얼을 어겨도 논리적으로는 용인되는 범위 내에서 변형시켰던 방식을 벗어난 것이다. <삶은 그저 따라 울려 퍼지는 핏빛 물결> 시리즈에서는 야구공이나 거울, 막대기나 선반의 재료가 결코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닭고기와 소고기가 사용되었다. <쓸쓸한 기준 Forlorn Standard>(2010) 시리즈에서는 망치를 비롯한 다양한 물건들을 연마해 광을 내는 행위를 반복했다. 각각의 재료나 물건이 사회 속에서 정해진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매뉴얼과 시스템을 다시 생각하는 데에 제 몫을 해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거울이 되는 데에 성공한 물건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우리의 매뉴얼이 허망한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거울이 되지 못한 물건은 저항하기 위한 시도가 허망하게 실패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누군가는 ‘이런 방식의 저항이 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라 질문 할 수 있다. 저항이라 하기에 너무 고요하다는 것이다. 현실과는 괴리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때때로 시스템을 역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적인 저항이 무가치하며 무의미하다 단언할 수도 없다. 이완의 목표는 사유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 사회를 부정하고, 미래 사회를 예견하고, 파괴와 소외를 비판하고, 창조적이고 소외시키지 않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제안해야 한다. 예술은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은 가치들을 보존하고, 기억하고, 실현시키는 가능의 사회를 환기시키는 것이다.¹⁸⁾ 또한 이완은 자신이 의문시하고 저항하는 시스템과 매뉴얼의 완전한 붕괴를 원한 적이 없다. 사회의 근간을 흔들만한 격렬한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원한다.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사는 세계가 흘러가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매뉴얼도 필요하다. 이완은 시스템이 필요 이상으로 강한 권력을 갖고 고착되는 것에 저항한다. 화석화된 매뉴얼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전술했듯, 그의 작업은 아직까지는 교묘하게 예술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잊을만하면 자신의 작업이 사회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예술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는 질서 속에서 반항아로서 존재해야 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¹⁹⁾
저항하든, 적응하든, 아니면 순종하든 이 세계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시스템의 구성원으로서 살다 죽는다. <고유시-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한다고 해도>에서처럼 개개인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해도, 개개인의 시간이 모두 자신만의 가치를 가진 시간이라 해도,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가장 강력한 규칙이다. 죽음은 생명이 있는 존재가 어떤 경우에도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다. 마가린으로 해골을 만들어 바니타스(vanitas)를 떠오르게 하는 <다음 생에 꽃이 되어 그대 곁에
I Will Become a Flower and Be with You in the Next Life>(2010)는 생의 수단이 되는 음식과 죽음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삶과 함께 죽음의 운명을 부여받은 인간의 근원적 모순을 상기시킨다. 버터의 대체재로 만들어진, 보다 경제적이지만 인위적인 식품인 마가린은 산업 사회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은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죽음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때로는 문명의 발전이 죽음을 앞당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시스템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은총 Dei Gratia>(2008)이 보여주듯 생성과 소멸은 시스템 안에서 반복된다. 시간이 흘러 참새의 시체는 썩어 사라지지만 돌아가는 원판은 멈추지 않는다. 소비재들은 교체되지만 시스템은 영원히 작동한다.
한편 <다음 생에 꽃이 되어 그대 곁에>는 그 제목 때문인지 윤회나 환생을 떠오르게 한다. 현실에 대한 애잔한 아쉬움을 달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생에도 꽃으로 태어나겠다는 문구는 다시 태어나도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한 번 더 드러낸다. 꽃은 그 어떤 것보다 빨리 소멸한다. 바니타스 정물화에 그려진 해골 옆에는 꽃이 놓인다. 그렇다고 하여 그저 슬픔 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사망 선고를 받아 시스템에서 추방된 물건들이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If Given a Chance, I Do Refuse It>(2012)에서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듯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표현처럼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출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태어남을 알려준다.²⁰⁾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라는, 일상에서도 자주 들어왔던 명제임에도 이런 이야기는 일정 부분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명제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순 속에서 예술가는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버려진 소비재는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에서 자신을 버린 시스템 안으로 재편입되지만 효용성과 무관하게 의미를 창출하는 예술 작품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예술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매뉴얼에 근거한 또 다른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예술로서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 시스템 안으로 다시 흡수된다. 그렇게 순환은 계속된다.
모든 존재는 시작과 끝에 구속되어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 특히 인간이라면 더욱 실감할 것이다. 모든 개별적 존재-인간-는 구속되기에 서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자신의 삶 전체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볼 수 없기에 -마치 이완 이 버려진 물건들의 서사와 의미를 되찾아준 것처럼-나의 소멸 이후에도 살아남아 전체의 서사를 바라볼 수 있는 공동체에 의해 이야기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의미는 궁극적으로 끝까지 살아남은 공동체에 유효한 것이다.²¹⁾ 시스템이 인간을 구속하고 제한하지만, 인간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도 시스템이다. 저항하면서도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응하면서도 저항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와 이야기꾼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하는 인간의 말과 행동, 업적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운명에 도전하는 것이다. 근원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다. 행위 속에서 사람들은 영광과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된다.²²⁾

3. 타자의 세계와 마주한 타자
외부와 내부라는 관념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일 때에도 항상 정치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적인 의미를 갖고 작동한다. 외부의 관념이 문제가 되는 양상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영역에서일 것이다.²³⁾
이완이 <메이드 인> 시리즈를 위해 방문한 국가와 생산한 물건은 대만(Taiwan)- 설탕&설탕 그릇&설탕 수저(2013), 태국(Thailand)-실크(silk)(2013), 캄보디아 (Cambodia)-쌀(2014), 중국-나무젓가락(2014), 미얀마(Myanmar)-금(2014), 한국-짚신, 가발(2015), 인도네시아(Indonesia)-테이블&테이블보(2016), 베트남 (Vietnam)-고무&커피(coffee)(2016), 라오스(Laos)-접시(2017), 말레이시아 (Malaysia)-팜유(palm oil)(2017) 등이다. 작업의 결과물은 작가가 현지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을 촬영하고 편집한 비디오 영상과 생산품이다. 모든 비디오 영상에는 해당 국가의 -특히-제국주의, 근대화, 산업화와 연관된 정치적, 경제적 역사와 현재를 기술하는 스크립트가 첨부되어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자급자족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생산 방법도 모른다. 그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고, 소유한 뒤 정해진 매뉴얼대로 소비(사용)하면 된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성향들, 나와 같은 환경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공통점, 그리고 내가 가진 생각들까지”²⁴⁾ 모두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먹고 쓰는 모든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오는지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자신의 성향에 맞게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선택지는 많지 않다. 모든 것은 시스템 안의 복잡한 인과 관계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 돈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따르게 되는 소비의 매뉴얼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동의하는 행위가 반복되다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무력한 타자가 되어버린다. 무사유적 동의는 노동자, 생산품, 소비자 사이의 단절을 불러오고 소비자는 스펙터클에 종속된다.

<Made in Series> 2013-present, <Made in Vietnam, Coffee & Rubber>, 13m 19s, 1ch Video and Product, 2016 ⓒ이완

“종교, 돈, 게임, 정치, 문화가 모두 진실보다는 가상의 것들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제 모든 사람은 그저 시스템이 제안하는 것들 중에 선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런 본인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 생각한다.”²⁵⁾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오인하게 만드는 기술인 스펙터클의 최종 목표는 오직 소비이다. 스펙터클은 대중에게 무기력한 수용을 요구한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감각적이고 파편적인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이미지화된 가상이 현실이라 믿으며 실재하는 삶으로부터 분리된다. 관계와 소통도 차단된다. 결과적으로 스펙터클에 예속된 인간은 소외되고 타자화된다. 생산자들을 기만적으로 대상화하는 스펙터클은 자신만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이다. 스펙터클은 권력이 삶의 조건을 전체주의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권력의 자화상과 같다.²⁶⁾ 그것의 본질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주권, 즉 절대적인 권력을 획득한 상품 경제의 지배, 이 지배와 짝을 이룬 정권에 귀속된 새로운 기술들의 총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술 혁신은 점점 더 자신의 스펙터클적 권위를 강화시켜왔다.²⁷⁾
이완은 더 이상 생산과 소비의 스펙터클에 함몰되어 진짜 세계로부터 소외되길 원하지 않는다. 불가항력이라 해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과 같은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가장 비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 즉 자신이 소비하는 것들을 직접 생산하는 길을 선택했다. 밥을 먹기 위해 쌀 농사를 짓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생산하고, 설탕이 필요하니 사탕수수밭에 가는 식이다. 음식을 집기 위한 나무젓가락과 담기 위한 접시, 식사를 위한 테이블과 테이블보도 만들었다. 시리즈가 지속될수록 상품의 범위는 확대되어 금광에 가서 금을 채집하고 누에고치에서 실크를 생산해 셔츠도 제작했다. 이처럼 자신이 소비하는 물건의 실체를 경험하는 것은 스펙터클의 대척점에서 행위를 주도하는 것이며 소외되고 분리되기 이전의 삶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양가적이며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에도 <메이드 인> 시리즈는 이완의 다른 작업들에 비해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비판적 내러티브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 지역의 역사를 바탕으로 경제 시장과 그것을 움직이는 권력 구조의 과거와 현재, 제국주의-식민주의-의 흔적,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설명적 문체의 스크립트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그가 방문한 아시아의 국가들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나 침략을 받았다. 19세기 말 서구에서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했다. 과학 기술의 발달도 여기에 기여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보다 많은 자원과 노동력, 시장이 필요해졌고, 그 요구에 부흥해 제국주의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게 되었다. 식민지는 주로 자연 자원 같은 1차 상품과 노동력을 식민지 모국에 제공했다. 식민지 모국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판매하거나 산업적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중 일본은 서구식 근대 국가를 형성하겠다는 목표하에 입헌군주제를 수립했고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서구 열강을 견제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아시아를 식민 대상으로 삼았다.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의 공영(共榮)을 실현하겠다는 자기합리화 아래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 사람을 심는다는 뜻의 식민은 강제적으로 정복한 지역에 자신들의 시스템이 가동할 수 있도록 본국인을 정착시키는 형태를 말한다. 식민지 지배를 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스스로를 본국이라 명하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사회, 정치, 문화적 존중은 없었다.²⁹⁾ 식민지 지배의 주체는 식민 지배를 받는 타자를 자신들의 사유 범주 안에 결코 포함시키지 않는다.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열강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보편주의적 획일화, 단일화에 근거한 인종화, 식민지화는 모두 타자 배제의 논리 하에서 진행된 것이었다.³⁰⁾

<Made in Series> 2013-present, <Made in Myanmar, Gold> 16m 25s, 1ch Video and Product, 2014 ⓒ이완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도 끝났을까? 식민지 지배를 받던 국가들은 주권 국가로서 독립했지만 자립적인 정치, 경제적 상황을 만들 어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국제 정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반대로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 대부분은 여전히 힘의 논리에서 타자로 밀려나 있다.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정치, 경제, 문화적 식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화는 타자화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든 문제는 경제적 이윤 안으로 흡수된다. 인간의 욕망을 구속하는 스펙터클도 여기에 기여한다. 스펙터클은 과거에 관한 중요한 정보(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희석시키고 망각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지워나간다. 역사와 역사적 정신은 사라지고 있다.³¹⁾ 글로벌리즘을 내세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과거의 식민주의, 제국주의보다 더 교묘하고 강력하게 지구촌을 재식민화하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신자유주의적 탈영토화를 통해 신식민주의로 부활한 것이라 할 수 있다.³²⁾ 이완의 생산품 대부분은 국제 무역 시장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수출품이자 식민지 지배하에서 진행되었던 산업화의 증거이다. 따라서 시리즈에 속한 작품의 수가 늘어날수록 작가를 포함한 개인, 개인이 속한 집단, 집단이 속한 세계를 둘러싼 구조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상품 하나에도 힘의 역학 관계가 담긴다. 부엌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보관된 음식들의 제조 및 판매국들을 살펴보면 개개인은 이미 국제 무역의 한복판에 놓여있다. 작가는 <메이드 인> 시리즈 이전의 작업들에서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었다. 닭고기로 만든 것이 왜 야구공이었을까?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강한 영향하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야구가 인기 있는 운동이다. 그래서 야구공이었다. <사전 덤벨>에서는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이 한 쌍을 이루었다. 왜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누구나 갖고있는 사전이 영한사전일까? <원더 휠>이 연상시키는 대관람차는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에서 페리스 관람차(Ferris Wheel)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개되었다. 당시 근대성의 상징과 같은 만국박람회는 열강들의 문명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참여국들 사이의 서열화와 같은 제국주의적 의도를 실현하는 장이기도 했다.
왜 과거 아시아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 식민지 지배하에서 진행된 근대화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오늘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더 복잡해진 지배와 피지배의 고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명확한 답이 불가능한 질문들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역사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실의 기록이라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들의 중첩이다. 하나의 사건도 누구의 시선으로 쓰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사실이 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 받는다. 역사까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소비되는 오늘날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올바른 역사 읽기란 무엇인가?
과거에서부터 예술은 역사를 재현해왔다.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기록화 혹은 역사화는 매우 중요한 장르였다. 그리고 예외가 있긴 하지만, 미술에서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역사 기록과 해석은 권력을 가진 주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술은 다르다. 많은 작가들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역사까지 담아낸다. 지워진 역사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메이드 인> 시리즈는 전자와 후자 모두를 포함한다. 모든 예술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란 지배 계층의 역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계급의 역사를 의미한다.³³⁾ 물론 이완이 <메이드 인> 시리즈에서 일시적으로 노동의 행위를 하는 것으로 신식민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관광객과 같은 이방인의 체험기는 오히려 오독과 오해의 가능성을 높일 수도 있다. 평생을 살아온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잠시 머무른 국가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작가의 노동 역시 스펙터클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흉내 내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편집된 영상들은 해당 국가에 대한 획일화된 이미지를 강화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작가가 방문한 국가 중 일부가 우리나라보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근대사에서 공통분모가 많음에도 우리의 눈에 그들은 우리에게 포함될 수 없는 타자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작가(그리고 우리) 역시 타자다.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완은 의도적으로 타자가 된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주류가 아닌 길을 가는 자발적 소수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전통과 규범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짝 벗어나 다른 방향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³⁴⁾ 작가는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당연시되는 매뉴얼에 순응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순간 스스로 비범한 타자가 되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와 섞이지 않는 이질적 존재가 된 것이다. 시스템 속 타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장 주체적인 행동을 했는데 타자가 되었다는 모순, 타자가 됨으로써 주체가 되었다는 모순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과연 이완은 주체인가, 타자인가? 예술을 통한 작가의 저항은 실패한 것인가? 성공한 것인가? ‘모두에게 말이 되면서 모두에게 말이 안 되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모순의 길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은 작가 역시 자신만의 공고한 예술적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의 예술적 시스템에는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완의 세계는 열려 있다. 의미 생성을 위한 사유의 현재 진행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