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20. / 2020. 07.09. 수정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하태범』 (2019)의 「대화」 (pp. 33-80.)를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대화」 는 이문정과 하태범의 대화를 타이핑, 녹취하여 편집, 정리했으며 정리된 내용에 대한 작가의 확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작가 하태범(Ha, Tae bum)

LEE : 이문정, Ha : 하태범 LEE : 필자가 하태범의 작업에 주목하게 된 것은 2015년을 전후해서이다. 작가 특강을 통해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이후 『평론과 대화』 의 작가로 선정하게 되었다.

우선 초기 작업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다. 독일 유학 시절(초반)에 재활용휴지로 작은 인체상들을 만들었다. 재활용휴지인 만큼 완성된 작품은 무채색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재료라 해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으니 선택했을 것이다. 이후 도시의 풍경을 단순화시켜 표현한 작품은 흰색이었다. 현재 하태범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작업은 <화이트> 시리즈(2008~)이다. 모든 시리즈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태범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흑백 혹은 무채색이 떠오른다. 물론 <화이트> 시리즈는 작가가 만들어낸 개념에 근거해 색채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채색의 사용에 작가의 개인 취향이 일정 부분 반영된 것은 아닐지 궁금하다. 화려한 색채를 선호한다면 지속적으로 모노톤의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Ha : 2002년 독일에 도착한 뒤 어학 준비를 하고 2003년 가을학기에 입학했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1학년 때 전 학생이 기초과정을 담당하는 한 명의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 2학년 때 전공 지도 교수를 정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신청한 교수님이 나의 1학년 때 작업을 바탕으로 평가하고 지도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내가 원하는 분이 나를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면 이후의 학교생활이 무의미해진다. 독일은 어떤 교수에게 사사 받았는지가 중요한데 직접적인 지도도 못 받고 졸업장에도 지도 교수의 이름을 적을 수 없다. 따라서 입학 후 첫 1년의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다. 방황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작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당황한 적도 있었다. 비판의 내용은 정형화된 작업의 형식이나 제작 방법, 오래전 과거가 되어버린 미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등이었다. 낯선 타지에서 외국인으로서 겪게 되는 상황들도 쉽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1년 동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심해지니 작업이 더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휴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우연히 작은 인간 형상을 만들게 되었다. 완성된 인체상을 다른 친구들의 작품 사이사이에 숨겨두거나 눈에 띠지 않는 장소에 놓는 방식으로 전시했다. 2003년 후반의 작업이다. 당시 재활용휴지는 정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고, 비용도 적게 들어 부담이 없었다. 일상에서도 흰색이나 무채색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휴지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업이 의외로 판매가 되어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았다.
평상시에 색채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게 많은 생각을 하는 편은 아니다. 그리고 <화이트> 시리즈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흰색은 철저히 개념에 맞춰 선택한 색이다. 사진 속 사건 사고의 현장은 피가 낭자하고 공포와 슬픔이 가득하다. <화이트> 시리즈는 그 모두를 제거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 사건들을 보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상징하기 위해 모든 색을 제거하고 흰색만을 선택했다. 탈색된 거다.

LEE : 흰색이 담아내는 개념과는 별개로 원본 사진 그대로 만들면 너무 현실적이라 심리적으로 힘들어 색을 빼는 것은 아닌가? 잔인함을 덜 느끼게 말이다.

Ha : 그건 아닌 것 같다.

mixed media, each 35x25x20cm, 2005 ⓒ하태범

LEE : <모든 것은 나이고 나는 모든 것 All das bin ich und ich bin all das>(2004) 이후에 제작한 <모퉁이 Coner>(2005), <길 Street>(2006), <맨홀 Manhole>(2006),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본다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2007~2008)를 보면 일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와 사물들을 다루고 있다. 도시(건물) 곳곳의 모서리를 촬영한 사진 작업도 진행했다. 혹시 독일에서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유학생(이방인)의 소외감 등이 반영된 것인가?

Ha : 그렇다. 한국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살았었다. 작업도 열심히 했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었다. 그런데 독일에 오고 나니 똑같은 하태범인데도 자존감이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외국인으로서 차별적 상황들도 겪게 되었다.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상처가 되기도 했고 자존감이 낮아지기도 했다. 의기소침해졌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대입할 수 있는 것으로 쓰레기통이나 벤치처럼 구석에 놓여 있는 사물들, 모서리나 모퉁이처럼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장소를 찾아다니고 재현했다. 또한 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물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 맥락을 바꾸면 어떻게 와닿을지도 궁금했다. 모두 유학 시절 잠시 진행했던 작업들이다. 질문을 던지는 과정 중의 작업이었다.
동네 곳곳의 모서리를 촬영 후 모형으로 제작했던 <모퉁이>는 이후 도시의 이미지들을 최대한 단순하게 재현하는 <풍경 21 Landscape 21>(2005)로 이어졌다. 도시의 색이나 세부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여 구조적인 부분만 남긴 것이다. 말 그대로 미니멀한 형태만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화이트> 시리즈의 발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LEE : 독일에서의 유학 기간은 몇 년이었나?

Ha : 학교생활만 7년이다. 2009년에 졸업했다. 졸업 이후 한동안 더 독일에 머물렀다.

LEE :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된 남다른 이유가 있었나?

Ha : 대학 때 배웠던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 2학년 첫 조형 실기 때 들었던 ‘나사를 하나 박아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정말 와닿았다. 이후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게 되었다. 물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 하나에도 의미가 있을 정도로 작업에 당의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게 해준 말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물에까지 특별한 의미 부여가 가능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분들이 공부했던 독일로 가게 되었다.

LEE :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본다>에서는 작은 미니어처를 제작한 후 실제 공간에 놓고 그 각도를 조절해서 크기의 차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사진들을 찍었다.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이상한 사진이다. 이때부터 실재하는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가?

Ha : 미니어처 작업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길 위의 사물들을 작게 제작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원래 프라모델(plastic model)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좁았기 때문에 여러 현실적인 면에서도 미니어처 작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미니어처인 상태로 전시하다가 사진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정한 위치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물을 미니어처로 똑같이 만들어 새로운 장소에 놓고 촬영했다. 새로운 장소 선정에 특별한 규칙은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만든 사물들이 미니어처임에도 실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벤치나 쓰레기통은 대량으로 생산된 기성품임에도 각각이 놓이는 장소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유일성을 갖게 된 기성품을 최대한 똑같이 만들어서 그것에게 유일성을 준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크기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 얼핏 보면 미니어처가 실제 공간에 놓인 상황인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냥 일상의 풍경을 촬영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미니어처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만들어도 가짜일 뿐이다. 그래서 일부 사진에서는 일부러 미니어 처라는 것이 잘 드러나도록 촬영하기도 했다.
입체적인 작업을 하다가 사진과 같은 평면 작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사각의 프레임이 가져오는 공간(세계)의 무한한 확장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프레임이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사각 프레임 안의 공간은 상상력이 확장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와 같다.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이 생긴다. 조각은 현실 공간에 존재한다. 그것의 매력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한계로 느껴졌다. 미니어처를 전시하면 실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보여주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이 지점이 매력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사진을 보고 실제 미니어처를 같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같이 전시하지 않느냐는 문의도 꽤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함께 전시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만약 필요하다면 미니어처만을 따로 전시할 거다. 사진 작업을 한 의도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과거 전시의 특성에 맞춰 모형을 함께 보여준 적이 한두 번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왜 모형을 만들고 사진을 찍었는지보다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만들었는가에 더 집중했다. 그러나 나의 작업에서 미니어처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pigment print & facemount, 120x200cm, 2011 ⓒ하태범

LEE : 이제 화이트 시리즈를 이야기해보겠다. 화이트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독일 유학 시절, 리비아 유학생이 미국대폭발테러사건(911테러)을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확신하며 이야기했던 일화를 들었다. 당시 작가 본인은 어떤 경우에도 테러는 일어나서 안 되며 만약 미국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에 저항하려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런데 리비아 유학생이 상대방이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평범한 일상에서 갑자기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고 가족들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냐고 반문해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똑같은 사건도 관점에 따라 정반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개인뿐 아니라 매스미디어 역시 마음만 먹으면 특정한 사건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뉴스 기사에 저널리스트의 관점이 담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뉴스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혹시 색채를 모두 빼버린 것이 어느 한쪽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나아가 작가의 관점도 배제한 채 무미건조할 정도로 편견 없이 보겠다는 의지를 담아낸 것인가? 나아가 특정한 사건들을 최대한 편견 없이 보려고 노력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인가?

Ha : 처음 <화이트>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에는 똑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지점을 건드리고 싶었다.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첨예한 대립적 상황이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수많은 국가 간 분쟁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같은 사건인데 국가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든 객관적인 사건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세계에는 이런 일들이 정말 많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 시리즈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제목을 ‘ambivalence(양가성, 양면가치)’로 붙였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회정치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정도의 수준일 것 같다. 첨예한 사건들을 어설프게 다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건 사고 뉴스를 미디어를 통해 소비하는 대중들의 방관자적인 시각을 다루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삶과 더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정치적인 사건이나 테러뿐 아니라 자연재해처럼 보다 넓은 의미에서 끔찍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담아낸 보도 사진을 다루게 되었다.
나의 작업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사건의 증거와 같은 보도사진을 재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직 뉴스 기사를 통해 그 사건을 들여다보는 제삼자이다. 그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뉴스 기사를 보는 잠시 동안만 그 사건을 이미지로 경험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떤 사건을 접한 그 순간만 잠시 공감한 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곧바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게 대부분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화이트>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고향에 대한 향수이다. 분명 얼마 전까지 내가 머물렀던 지역의 이야기를 오직 인터넷에 업로드된 뉴스 기사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LEE : 처음 <화이트>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에는 구체적인 보도사진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혹은 상상한 사건 사고 현장의 이미지를 재현했다. 어떤 계기로 상상의 이미지에서 실재하는 보도사진으로 옮겨 가게 되었나?

Ha :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기 위한 실험작으로 상상의 이미지를 재현했다. 테스트 작업을 완성한 후 바로 다음에 진행한 것이 <그루지아 A Radar Base Near The Capital In Georgia>(2008)였다. 이 작업을 하면서 개념을 정립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업의 당위성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에서 실제 보도사진 이미지를 재현한 것으로 단계를 밟듯 넘어간 것은 아니다. 실제 보도사진을 재현한 작품 이후에도 머릿속 상상의 이미지를 재현한 작품을 제작했고 현재까지 아홉 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다룬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쉬어가는 시간으로 상상의 작업을 하고 있다. <화이트> 시리즈 초반에는 편의상 실재하는 사건을 다룬 경우에는 ‘actuality(현실, 실제)’, 내 머릿속의 상상을 근간으로 한 경우에는 ‘imagination(상상)’으로 분류했다. 머릿속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 제목은 ‘화이트-번호’로 특정한 지역명이 안 들어간다.

pigment print & facemount, 120x180cm, 2008 ⓒ하태범

LEE : 처음부터 보도사진을 사용할 수 있었다.

Ha : 처음 <화이트> 시리즈를 착상했을 때 개념적으로나 형식적인 면에서 조금 막연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미니어처 작업에서 시작해 사진으로 완성하는 작업 방식을 지속하면서도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를 예리하게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작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고민하고 시도하던 중에 상상 속 재난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파괴된 건축 파편들과 부서진 기둥들이 있는 현장을 미니어처로 완성하면서 개념(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시각적인 부분도 조율을 해나갔다. 예를 들어 똑같은 흰색이라고 해도 플라스틱마다 미묘한 색 차이가 있어 고민하다가 표면에 흰 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조지아(그루지아) 분쟁 기사를 보고 작업을 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작업만 하고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5~6점 정도 있다.

LEE : <화이트> 시리즈의 제작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Ha : 작업을 위해 특정한 사건 사고나 주제를 정해 놓고 기사를 검색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뉴스 기사를 검색하다 관심이 있는 사건의 기사와 보도사진 이미지를 사건별로 폴더에 수집해 둔다. 수집한 보도사진 중 하나를 선택하면 사진의 구도, 건물의 형태 등을 파악한다. 이때 내가 선택한 사진의 현장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최대한 찾아서 활용한다. 사진의 구조를 파악하면 도면 작업에 들어간다. 원래의 보도사진과 똑같은 이미지로 보이도록 원근이나 투시를 조절해야 한다. 사진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다시 사진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건물이나 사물을 실제 비율보다 과장되게 커지거나 작아지게 만들어 소실점이나 원근을 유지한다. 도면에 기초해 커팅(cutting) 기계로 종이를 하나하나 자르고 미니어처를 만든다. 카메라로 보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화각(angle of view)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형태가 완성되면 수시로 뷰파인더(viewfinder)로 확인하면서 내가 선택한 사진과 최대한 동일한 뷰(view)가 나올 수 있도록 수정한다. 전체적인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부서진 건물의 잔해처럼
세부적인 부분들을 제작하며 완성한다. 미니어처가 완성되면 조명을 조정하고 카메라로 촬영한다. 플라스틱의 경우 재질에 따라 미묘한 색 차이가 있기 때문에 흰색 페인트로 도색을 해야 한다. 종이의 경우에는 완성할 때까지 똑같은 종이만 사용하기 때문에 도색할 필요가 없다. 사진은 가까운 지점부터 먼 지점까지 초점(focus)에 차이를 줘서 여러 컷을 찍는다. 촬영된 사진은 컴퓨터에서 수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하나의 앵글(angle)에서 초점이 다르게 촬영된 여러 장의 사진을 겹쳐가면서 합성한다. 그래야 보도사진처럼 맨 앞의 것과 맨 뒤의 것이 모두 선명하게 보인다. 화이트 밸런스(White Balance)나 콘트라스트(contrast)를 조절하기도 한다. 단, 포토샵(Photoshop)으로 리터칭(retouching)을 하거나 미니어처에 없는 이미지 를 추가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작업 과정을 알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결과에만 집중해서 <화이트> 시리즈를 봐줬으면 좋겠다.

LEE : 하태범의 작업을 연구하려면 알아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러 장을 찍은 후에 합성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 같다. 촬영 후의 작업에 걸리는 시간도 상당하겠다.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Ha : 후작업에도 손이 많이 간다. 작품당 일주일 정도 꼬박 매달린다. 다시 말하지만, 미니어처에 없는 형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사진을 바탕으로 입체를 만들고 그것을 촬영하면 원본 사진과 꽤 큰 차이가 생긴다. 조율을 해가면서 완성을 했음에도 내가 생각하는 한계치를 넘어 파기한 작품도 몇 점 있을 정도다. 그중 실제 현장이 아닌 미니어처를 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초점의 문제가 있다. 내 사진의 모든 부분이 실제 현실처럼 초점이 잘 맞춰져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실재라 느낀다. 그런데 미니어처를 찍으면 실제 보도사진(풍경)이 탈색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니어처를 접사 촬영할 때 일어나는 카메라의 한계 때문이다. 망원렌즈 촬영이나 근접 촬영은 화각 때문에 초점에 한계가 생기고 심도(depth of field)가 약해진다.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볼 때에는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다 초점이 맞는다. 그런데 카메라로 촬영하면 초점을 맞춘 부분만 선명하게 보이고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보인다. 특히 미니어처를 촬영하면 그 심도가 극단적으로 약해진다. 이건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대로 실제 풍경도 카메라 초점을 조절하면 미니어처 촬영한 것처럼 왜곡시킬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똑같은 앵글에서 초점이 모두 다르게 10~20컷(cut)을 촬영한 뒤 합친다. 합친다는 것은 사진을 그냥 겹쳐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따내고, 그 과정에서 화각에 따라 생기는 미세한 차이들을 조절하는 거다. 모든 이미지가 흰색이기 때문에 작업하기가 더 어렵다. 이 과정이 있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의 앞이나 뒤 모두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LEE : 예상하기 힘든 과정이 숨겨져 있었다.

Ha : 굳이 알리려 하진 않는다. 내 작업의 이면에 그렇게 많은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다. 관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모르는 게 낫다. 미니어처로 제작하는 과정이 있다는 사실 역시 몰라도 된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 중 하나가 사람들이 ‘어떻게 이걸 손으로 만들었지?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었지?’와 같은 부분에만 집중하는 거다. 물론 그런 호기심이 내 작업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이유인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거기에 함몰되고 싶지는 않다.

LEE : 그렇다면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 작품 보듯이 결과물만 봐도 상관없는가? 어떤 작가들은 완성된 작품에는 드러나지 않는 작업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기도 한다.

Ha : 상관없는 게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로 알게 되면 모를까 그걸 내가 굳이 먼저 밝힐 이유는 없다.

LEE : 후보정을 하면 굳이 미니어처에 흰 칠을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Ha : 만약 한 면에 놓인 사물들에 아주 미묘한 색 변화라도 있으면 왜곡되어 보일 수 있다.

LEE : 사진으로 발표하니 에디션(edition)이 정해져 있을 것 같다.

Ha : 한 제목 당 다섯 점이다. 올해 가을 열릴 개인전 이후로 한동안은 <화이트> 시리즈를 진행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화이트> 시리즈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LEE : 종이로 미니어처를 제작한 <화이트> 시리즈는 총 몇 점인가?

Ha : 현재까지 세 점 발표했고 올해 열릴 개인전에서 신작이 전시될 예정이다.

LEE : 종이는 힘이 없는데 미니어처가 견고하게 서 있다. 모든 작품에서 A4용지를 사용했나?

Ha : 미니어처 내부에 골조의 역할을 하도록 우드락을 덧대기 때문에 가능하다. 처음에는 건축모형을 만드는 플라스틱 자재들을 이용해서 제작했다. 그런데 종이의 질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종이가 손은 더 많이 간다. 재료 자체가 입체인 경우 그 자체로 덩어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는 전개 도가 필요하다. 만드는 대상의 질감 등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종이가 더 힘들다.
현재까지 발표된 세 점은 모두 A4용지를 썼다. 물론 작품에 따라 무게 차이는 있다. 영상 작업인 <화이트-플레잉 워 게임스 White-Playing War Games>(2011~2012)에 등장하는 종이 모형은 모두 80g이다.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은 다른 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A4용지는 <화이트-더 베일> 시리즈에서 총을 만들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기관총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대량 생산된 기성품 종이인 A4용지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격적인 무기를 약한 종이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역설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었다. 자동소총은 테러범들의 상징과도 같은 총기이다. 제작 단가가 매우 싸고, 만들기 쉽고, 단순하고, 잔고장이 없어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총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다. 테러범들은 이런 재래식 무기로 강대국의 최첨단 무기를 상대로 싸운다. 이들은 왜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을 하는가? 그리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왜 다른 이들의 생명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모순을 드러내고자 종이로 총을 만들었다. 종이로 제작한 미니어처들을 장난감 총으로 부수는 과정을 촬영한 <화이트-플레잉 워 게임스>(2012)도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유튜브(YouTube)에서 실제 전쟁을 볼 수 있다. 실제 사건의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누군가는 그런 영상을 게임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관람한다. 난징대학살을 다룬 동화책 『경극이 사라진 날』(2011)을 시각화한 3D 영상 작업 <화이트-폭격>이 그런 현실과 연결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화이트> 시리즈에서도 자연스럽게 A4용지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화 이트-더 베일>에서처럼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Video & Installation, A4 paper, Single channel video, 00:02:14, 2012 ⓒ하태범

LEE : 유튜브에서 전쟁에 게임처럼 임하는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적 있다. 혹시 전쟁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이 공포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전쟁은 정말 무섭고 끔찍한 상황이다. 참전했던 사람들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이를 공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Ha : 물론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남을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을 하는 지금의 내가 가해자의 입장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봤던 동영상은 그런 생존을 위한 공격의 차원이 아니었다. 강제로 명령을 수행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의 포로를 벌판에 풀어놓고 총살하는 영상이었다. 헬기에서 민간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일방적으로 폭격하고 환호하는 영상도 있다. 같이 총을 들고 싸우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무장해제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방적인 가해의 상황이었다.
<화이트-플레잉 워 게임스>에서 들리는 음성은 실제 전쟁 다큐멘터리 혹은 유튜브 영상의 목소리를 사용한 것이다. 음성은 적이 부상 당해 위협이 되지 않음에도 공격하라는 명령과 그 명령을 거부하다 결국은 적을 쏘아 죽이는 내용이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한 상황은 극단적인 경우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도 이런 일방적인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행하는 폭력 중에 당연시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의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근 들어 직장 내 괴롭힘, 학교와 군대 내 폭력에 대한 인식 전환, 미투 운동(Me Too movement) 등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에 문제 제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바꿔나가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LEE : 미니어처 제작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처음 종이로 만들 때와 비교 해서 시간이 단축되었나? 손에 더 익숙해졌을 것 같다.

Ha : 2015년 말에 시작해 2016년에 완성한 <화이트-시리아 White-Syria> 시리즈에서부터 종이로 제작했다. 그전에도 <화이트-플레잉 워 게임스>에서 종이로 제작한 미니어처가 등장했다. 다만 그때는 정교한 세부 표현이 거의 없었고 흐느적거리는 종이의 질감도 그대로 담겼었다. 이 작업 이후 사진 작업을 위한 모형도 종이로 제작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니어처를 종이로 제작하게 되면서 작은 부분까지 더욱 정교하게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제작하는 시간은 별로 줄지 않았다. 종이로 제작한 초기작들의 경우 한 작품 안에 여러 건물이 들어가는 것과 달리 최근작들은 하나의 뷰(view)에 건물이 하나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절대적 비교가 어렵다. 또한 작품마다 만나게 되는 상황들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화이트-시리아> 시리즈의 경우 한 작품 당 2~3달 걸렸다.

LEE : <화이트> 시리즈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Ha : 자연물을 만드는 게 힘들다. 자연물은 모양이 불규칙하고 표현해야 할 세부 요소가 많아 물리적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비정형적인 파편도 힘들다.

LEE : 작업을 위한 보도사진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본인이 다룰 특정한 사건을 미리 결정한 후 그에 해당하는 보도사진을 찾는 게 아니라고 했다.

Ha : 여러 가지가 고려되지만 중요한 것은 시각적 구현 가능성이다. 미니어처로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나는 오직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사건들을 다룬다. 그 밖에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확실한 기준은 없다.

LEE : <화이트> 시리즈에 담긴 사건 사고의 범위가 꽤 넓다. 즉흥적인 선택도 가능해 보인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Ha : 특정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검색하지 않기 때문에 즉흥적인 부분도 크다. 그때그때 기사를 보고 연관된 이슈들을 검색하는 중에 보도사진을 수집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시리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뉴스도 계속 보도되고 있다. 시리아가 참 먼 나라인데 기사를 볼수록 안타까웠다. 그래서 작업으로 이어졌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사건 그 자체를 분석하지 않는다. 내 작업은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평이자 미디어를 소비하는 대중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을 반드시 다뤄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게 없다. 내가 선택한 사건 사고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LEE : 혹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한 보도사진이 있는가?

Ha : 있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망가진 광경을 재현하고 싶었는데, 아직 그 정도 규모의 작업을 실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시작하지 않았다. 관련된 자료는 수집하고 있다. 언젠가는 한번 해보고 싶다.

LEE : 만약 그 작업을 한다면 결과물은 여전히 사진일까?

Ha :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미니어처 실물을 보여주고 싶다. 현재 작업 중인 <화이트> 시리즈는 모형을 만든 뒤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조로 미니어처를 만들어 원본 그 자체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니 음영의 표현 때문에 화이트가 아니라 화이트와 블랙의 상태를 보여주게 되었다. 모든 것이 탈색된 백색을 재현해야 하는데 화이트가 아닌 흑백 사진으로 인식되는 딜레마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한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정체성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싶었다. 때때로 <화이트> 시리즈를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다.

LEE : 그러고 보니 누군가는 미니어처를 만든 뒤 촬영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컴퓨터로 제작한 이미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Ha : 그럴 수 있다. 예전에 사석에서 3D 프로그램을 사용한 것과 특별히 차별화되지도 않는데 굳이 손으로 만드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부정적으로 의견을 표하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물론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손으로 만들다 보면 분명 손맛이 담기게 된다. 처음에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손으로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좋다.

LEE : 3D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손으로 만드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건가? 누군가는 컴퓨터 작업을 선호하고 누군가는 손작업을 선호한다. 각각의 이유가 있을 거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프라모델을 만들었던 경험 등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다. 혹시 컴퓨터로 이미지를 만들 계획은 없는가?

Ha : 그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워낙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3D 작업은 할 줄 모른다. 내가 둘 다 잘할 줄 알면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은 지금의 작업 방식이 만족스럽다.

pigment print & facemount, 143x200cm, 2016 ⓒ하태범

LEE : 종이로 미니어처를 제작하고 촬영한 <화이트-시리아> 시리즈에 비해 이전의 작품들은 인위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어떤 작품은 정말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 같다. 플라스틱과 종이의 차이가 반영된 것일까?

Ha : 물론 재료의 차이도 반영되었을 거다. 그리고 <화이트-시리아> 시리즈 세 점은 영상 작업과 함께 제작했기 때문에 우연적인 요소가 더해져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다. 보도사진과 똑같이 부서진 상황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보도사진을 근거로 부서지기 이전 상태의 형상을 미니어처를 만든 뒤 장난감 총을 쏘아 부수고 그 결과물을 촬영한 것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LEE :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손맛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초기부터 지금까지 소위 말해 회화적인 혹은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주는 작업이 별로 안 보인다. 작업 기획 단계에서 드로잉(drawing)이나 에스키스(esquisse)도 전혀 안 하는가?

Ha : 잘 안 한다. 화이트 작업을 할 때 드로잉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 전체적인 구조를 머릿속으로 계산한 뒤 컴퓨터로 도면과 전개도를 만들면 된다.

LEE : 미니어처의 전체 뷰를 구성할 때에도 드로잉을 전혀 하지 않는가?

Ha : 필요하지 않다. 미니어처를 만들기 위한 자료가 평면 사진이니 이것을 입체로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치수를 계산한다. 임의적으로 내가 도면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강의 크기를 얻을 수 있다. 이후 개별 사물들 중심으로 도면을 제작한다.

LEE : 특정한 사건 사고의 보도사진이기 때문에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이 만드는 사건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한 번쯤을 해봤을 것 같다. 실제로 본인이 선택한 보도사진과 관련된 사건 사고를 어느 정도 조사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미지에만 집중하는가?

Ha : 두 경우 다 있다. 생각보다 <화이트> 시리즈가 그렇게 많지 않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일본 후쿠시마, 예맨 등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들이다. 해당 사건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관련된 책을 읽고 조사도 하지만 당연히 전문가 정도의 수준이 될 수는 없다. 일단 관련된 기사는 최대한 다 찾아본다. 인터넷에서 해당 키워드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으로 엉뚱한 보도사진이 뜰 때도 있기 때문에 걸러내야 한다. 의도적으로 공부하려 하지 않아도 사진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많이 하게 되고 그와 관련된 전문가들의 다양한 글들도 접하게 된다. 기본 이상 정도의 정보는 얻을 수 있다.
<화이트>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에는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Violence』(2007)나 스벤 린드크 비스트(Sven Lindqvist)의 『폭격의 역사 History of Bombing』(2000) 등을 읽기도 했다. 당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내용 중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독일은 악의 축이 되었고 그 밖의 서구 국가들은 정의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독일이 벌인 만행은 정말 끔찍하다. 그러나 평화를 수호한 것으로 여겨지는 국가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저지른 만행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을 얼마나 알지 못하는가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LEE : 아무리 노력해도 제삼자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 담길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작가의 입장과 무관하게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국내의 사건들을 다룬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다른 국가(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대하는 것과 국내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일어났던 많은 사건 사고 중 몇 개의 사건만을 선택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국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건들을 다루기로 결심했었던 것인가?

Ha : 그래서 나는 항상 강조한다. 상황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와 무관심을 말하는 거라고. 그래도 오해한다면 그건 관객의 몫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품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관객의 자유로운 해석을 존중한다.
나는 예술도 일종의 정치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이 정치적 선동이나 선전은 아니다. 또한 단순히 사건 사고의 현장을 재현한 것과도 차별화되어야 한다. 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나의 스타일이 아니다. 예술가는 이 세상을 은유적,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술적으로만 바라봐도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작가)의 역할이다.
<용산참사 1, 2 Tragedy in Yongsan 1, 2>(2010)의 경우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 멀리 독일에서 용산참사를 오직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니 정확한 상황을 알 수도 없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또한 검색을 하다가 언론을 통해 나온 것 외의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계속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참사라고 부를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아니란 이유로 무미건조하게 지나치고 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울 쪽방촌 Dosshause in Seoul>(2011)은 접근을 시도하다 중단한 작업이라 깊게 말하기 어렵다. 제작할 때의 의도는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먼 기사를 다루는 것이었다.
<화이트-댄스 온 더 시티 1, 2 White-Dance on the City 1, 2>(2011~2012)도 같은 맥락에 놓이는 작품이다. 당시 재개발, 쪽방촌, 독거노인과 관련된 기사들을 많이 찾아봤다. 물론 뉴스 기사를 검색하던 중 발견한 키워드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과 연관되어 검색하게 된 것이 창신동이었다. 창신동을 주제로 한 작품이 2점, 쪽방촌이 1점이다.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은 그들의 삶을 나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냉랭하게 볼 뿐이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편 구제역 파동을 주제로 작업하기도 했다. 내가 양평에 살 때였는데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농가들이 많았다. 당시 이뤄진 살처분이 홀로코스트(holocaust)와 같은 수준이라 느꼈었다. 얼핏 보면 신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상실감이 차갑게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그러나 <수원 목재 판매소 화재 A Timber arcade fire in Suwon>(2012) 이후에는 한국 내의 사건을 다룬 보도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업은 하지 않았다. <화이트> 시리즈의 궁극적인 목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고, 망각되는 사건 사고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방관자적 시선을 다루는 것이 작업의 핵심인데 한국에서의 사건들에서는 그런 방관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없었다. 완벽히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현장에 가서 볼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부분 모두에서 거리감을 가질 수 있는 사건을 다룬 보도 사진들로 작업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지진, 이라크 폭탄 테러, 노르웨이 정부청사 폭탄 테러, 일본 쓰나미 등이다.
참고로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가졌던 전시는 보안여관에서의 그룹전이다. 보안여관은 과거 많은 주요 인사들이 묵었던 장소다.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세월의 흔적을 장소가 뿜어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집기류를 사람에 빗대어 작업했다. 공간과 물건은 남아 있는데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아마 물건들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LEE : <화이트-댄스 온 더 시티>는 특히 직설적이다. 총 몇 점 제작되었는가? 이 당시 재개발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고 있었나?

Ha : 총 4점인데 3, 4편은 담고 있는 개념이 다르다. 1편을 만들고 난 뒤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고 규모를 더 키워 2편을 제작했다. 2010년을 전후하여 ‘디자인 서울’이라는 모토 아래 엄청난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폭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용수가 아름다운 춤을 추는 발아래에서 파괴가 일어난다. 공정한 절차를 거치는 재개발은 좋다. 그러나 재개발 과정에서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깊이 들어가 보면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재개발만을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안에 실재하는 폭력을 말하고 싶었다.

LEE : 때때로 매스미디어는 다른 이의 불행을 이용해 경제적 이윤을 취한다. 일정 부분에서 작가 역시 타인의 아픔을 이용해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아닌가?

Ha : 100%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분명 다르다. 나는 다른 이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는 세상이 바뀌길 바라면서 보도사진을 이용하는 거다.

LEE : 지금까지 발표된 <화이트> 시리즈는 모두 뉴스 기사의 보도사진을 사용했는가?

Ha : 그렇다.

LEE : <화이트> 시리즈에서는 사건 사고 현장의 사람들이 지워져 있다. 사진마다 다르겠지만 원본 사진에는 사람들이 있었나?

Ha : 거의 있었다. 한 80% 정도의 사진에는 사람이 있었다. 많을 수는 없다. 사람이 많을수록 건물이 가려져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은 사진을 선택한다.

LEE : 이야기를 듣다 보니 미시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개념적인 폭력에 집중하는 거 같다. 그런데 뉴스를 지나치게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뉴스 기사에조차 나오지 않는 사건들은 방관자적인 시선으로조차 볼 수 없다. 더욱 극단적인 타자화가 일어나는 거다.

Ha : <화이트> 시리즈의 경우 처음에는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대립된 시선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뉴스 기사를 통해 만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논리 등의 영향으로 신문사와 방송국은 점점 더 스펙터클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보도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은 과잉된 이미지에 익숙해져 점점 무뎌지고 쉽게 잊어버린다. 그런 부분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작업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사건의 내용이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의 시각을 꼬집는 것이 핵심이다.

LEE : <화이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매우 정제되고 선택된 이미지들의 구성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매우 감각적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Ha : 다른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미적 취향이 담길 수는 없다. 작품이 점점 미니멀해지고 원본 사진의 일부가 생략되는 것도 나의 취향을 담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진실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조작하는 현재의 저널리즘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보도사진에 의도적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 같은 종류의 사진들을 매우 많이, 계속 보다 보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전문적인 사진기자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법한 앵글의 사진들이 있다. 그 순간이 실제로는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일부러 잘못 찍은 사진처럼 촬영해 전문가도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는 긴급한 상황이었던 것처럼 꾸미는 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어지는 보도사진이 실제로는 가공된 것이라는 사실을 담아내기 위해 실제 사진에서 일부 요소들을 조금씩 사라지게 작업을 진행했다. 이건 미적 취향이라기보다 수학적인 계산에 가까울 거다.

LEE : 그렇다고 해도 작가의 미적 취향이 전혀 안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 원본 사진을 촬영한 보도사진 작가의 취향은 당연히 담길 것이다. 특정한 사진을 선택하게 된 데에 작가의 시각적인 만족도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 한 작가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이미지의 일부를 삭제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취향이 담길 수 있다. 어떻든 작가가 선택하는 거다. 원본 사진에서 약간의 변화를 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Ha : 작가들마다 성향이 다를 텐데 나의 작업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합리적인(개념적인) 이유가 있다. 그냥 좋아서 혹은 의식적으로 내 취향을 담은 부분은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시각적인)감각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전달하는 작업을 하지 못한다.

LEE : 원본 사진을 미니멀하게 변형하는 작업이 수학적 계산과 같다고 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Ha : 처음에는 사진의 작은 부분과 배경까지 최대한 똑같이 모두 재현하려 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한다. 나머지는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보도사진을 촬영하는 사진작가에 의해 한 번 걸러지거나 변형된 사진을 우리가 볼 때 한 번 더 왜곡이 일어나는 거다. 우리는 보도사진을 볼 때 주로 파괴된 부분이나 파편을 먼저 본다. 사진 뒤편의 산이나 하늘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가 아닌 사진을 봐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면 보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부분들을 더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각인된다. 그래서 우리가 보도사진을 접할 때의 태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일부를 생략하게 되었다. 여백의 효과도 생겨 사건의 핵심이 더 잘 드러나고 시각적인 집중성도 생겼다고 생각한다.

LEE : 현장에서 색이나 특정한 이미지가 삭제되어 현장의 참혹함을 미학적인 작품으로만 보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작가는 비판하려 했는데 그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결과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매스미디어보다 더 차갑게 불행한 사건 사고를 소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매스미디어의 문제점이나 우리 스스로의 냉담함, 폭력성 등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본인의 직업이 현실의 문제로부터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지 궁금하다.

Ha : 많은 부분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까지 의도한 거다. 우리는 마블(Marvel) 시리즈,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건물이나 도시가 완전히 붕괴되고 망가지는 것을 재미있게 본다. 그저 별생각 없이 신나게 본다. 그냥 즐기는 거다. 파괴의 현장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한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애초에 재난의 현장에 미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공감하려 그런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겪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즐기게 된다. 나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본질이 삭제되거나, 현장의 이미지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거나, 시각적 스펙터클을 즐기거나, 시각적 유희만을 경험하는 등의 상황에 담긴 잔혹성까지 담아내고 싶었다. 만약 관객이 그 부분까지 느낀다면 나의 작업은 성공한 거다.
나는 폭력적인 상황을 다룬 작품을 아름답다고까지 느끼는 것 역시 폭력성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1979)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발퀴레의 기행 Ride of the Valkyries>(1856)에 맞춰 무차별 폭격하는 장면,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1993)에서 유일하게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흑백의 화면 속을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그 끔찍하고 잔혹한 상황에 서도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모습을 그린 전통 회화에 등장하는 고문 장면들 역시 잔인하지만 아름답다. 이성적으로는 순교나 탄압의 순간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재현한 작품은 아름답다고 느낀다. 때로는 순교자의 괴로움을 얼마나 잘 묘사했는가, 화살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는가 등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는 아름다움에 숨겨진 잔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는 사람도, 감상하는 사람도 모두 잔혹함을 갖고 있다.

LEE : 미적으로 감상할 정도로 정제되어 보이는 것이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는 말인가?

Ha : 그렇다. 인간에게는 잔인함의 본성, 폭력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폭력성이 잔잔하게 드러나는 것이 나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LEE : 매스미디어는 분명 현실의 공포와 처참함에 대한 공감 능력을 무디게 만든다. 또한 그 사건들이 내 앞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무덤덤한 반응도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기도 바쁜 현대인들이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매스미디어가 실제 사건을 보다 과잉되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지 않나? 냉랭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하게 과장시키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Ha : 그러한 현상도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에 노출될수록 무뎌지기 때문에 매스미디어는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수순이다. 필연적이다.

LEE : 작가가 방금 언급했듯이 매스미디어가 나오기 이전, 전통적인 미술도 처참한 순간을 다뤘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적 동화를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을 다뤘다.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낭만주의의 제리코(Thédore Géicault), 들라크루아(Eugèe Delacroix) 등이 대표적이다. 고야(Francisco Joséde Goya y Lucientes)도 빼놓을 수 없다.

Ha : 잊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났다. 어릴 때 아버지 서재에서 들라크루아와 고야,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화집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림자, 빛과 어둠의 대비 등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고야의 화집을 보고 정말 충격받았었다.

LEE : 예전에 작업을 하면서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생기기도 하고 때때로 운다고도 했다.

Ha : 우는 것은 원본 사진을 보고 우는 거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 트라우마나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 때때로 갑자기 울컥하거나 소름이 돋으면서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아이와 관련된 사건의 보도사진을 보면 내 자식이 당한 일처럼 분노가 일고 슬프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폭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게임이나 영화 등을 즐긴다. 나 자신도 모순적이다.

LEE :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는 동시에 억압된 욕망을 분출한다는 것인가?

Ha : 그렇다. 만약 그게 정말 싫고 끔찍하기만 하면 내가 이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폭력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도 같다. 사실 프라모델도 대부분 전쟁의 장면을 구현하는 거다. 그게 장난감처럼 인식되어서 폭력성이 희석되는 것일 뿐 실제는 잔인한 순간을 재현하는 거다.

LEE :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매스미디어가 인간의 폭력성을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인간은 태생적으로 폭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허용,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그것을 분출시키고 충족시켜줌으로써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는 주장도 있다. 오늘날에는 격투기, 영화, 예술 작품 등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Ha :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동차에 엑셀이 있듯 브레이크도 있어야 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는 매스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나 말고 누군가는 긍정적인 부분을 다룰 것이다. 내가 매스미디어를 비판한다고 하여 무조건 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LEE : 매스미디어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매스미디어의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Ha : 매스미디어의 긍정적인 부분은 다룰 생각이 없냐는 질문인가? 매스미디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부정적인 부분을 다루고 싶다. 작가마다 할 수 있는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LEE : 폭력적인 상황을 더 무덤덤하게 만들거나 과장하고 왜곡하는 것은 뉴스보다 영화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가? 똑같이 사람이 죽어도 뉴스를 보면 놀라기도 하고 안타까워도 한다. 물론 완벽한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만 영화를 볼 때는 사람이 죽는데 눈도 꿈쩍 안 한다. 심지어 악역이 죽으면 즐거워하거나 안도한다. 실존했던 연쇄살인마를 다룬 영화들이 소비된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그 파괴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역사 왜곡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혹시 영화를 소재로 작업할 생각은 없나?

mixed media, 18.4x27.7x4.2cm, 2017 ⓒ하태범

Ha : 생각 안 해봤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자면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든 완벽히 상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든 감독에 의해 이미 완벽히 (재)생산된 생산품을 내가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또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이윤 창출을 최우선의 목표로 자본 집약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특정한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유무와 무관하다. 처음부터 상업적으로 소비하려고 만든 영화다. 그것을 굳이 내가 재생산할 필요가 있을까?
뉴스 보도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조작을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보도사진의 이미지를 연극 세트처럼 만들었던 <신>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LEE : <화이트> 시리즈가 처음 시작될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뉴스가 소비되는 성향이 조금 바뀐 것 같다. 최근에는 가짜 뉴스나 왜곡된 뉴스 보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말해주는 뉴스를 골라 보기도 한다. 다양한 언론사의 뉴스를 읽은 뒤 종합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로 사실과 무관하게 자신의 구미에 맞는 뉴스만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는 말이다. 사실을 전달받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뉴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뉴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Ha : 그래서 더 내 작업의 의도와 현실이 잘 들어맞는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앞에서 설명했던 원본 사진의 일부를 제거하거나 원본 사진의 일부만을 부조로 제작한 최근의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뉴스 기사를 보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가공한다는 내 작업의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폐해가 나날이 커지고 사람들이 진실에 다가갈 확률은 더 낮아졌다. 문자가 생기면서 인류는 구전되던 역사를 글로 기록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술이 발명되면서 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순간들을 남기고 경험할 수 있었다. 과학과 통신 기술의 발달은 매스미디어가 실시간으로 사건 현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은 발전의 결과물들은 아주 오래전 구전으로 이야기나 신화를 전달하던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선택한 것 같다. 원하는 대로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 는 것이 그렇다. 실제의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미디어를 통해서 더 치밀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LEE : 2018년에 썼던 칼럼에서 나는 <화이트> 시리즈의 흰색을 쌓인 눈(snow)에 비유했었다. 눈은 분명 차가운데 포근한 느낌도 든다. 눈이 쌓인 잠시 동안은 순백이지만 세상은 곧 지저분해질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가 과장하든, 무미건조하게 만들든 현실 혹은 진실이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눈이 녹으면 얼마나 지저분해질까? 쌓인 눈 아래 숨겨진 진실은 얼마나 처참할까?’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해서 낭만적인 기분과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인위적인 작용이 없어도 언젠가 눈은 녹는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음을 은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작품들을 뚫어져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동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새하얀 세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희망이나 바람이 담긴 것은 아닌가? 잠시나마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Ha :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동화라고 하면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잔혹 동화도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동화가 아이(사람)들을 순종적으로 만들고 규칙을 지키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밤은 위험하니 집에 있어야 한다. 일찍 자야 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서운 동물이나 괴물에게 잡혀갈 것이다’처럼.

LEE : 흰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작업을 할 계획은 없는가? 흰색이 완전히 사라진 작품 말이다. 그러고 보니 2017년도의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작품에서 흰색이 사라졌다.

mixed media, 200x400x250cm, 2017 ⓒ하태범

Ha : <화이트> 시리즈가 아니니 흰색이 있을 이유가 없다. 완전히 다른 작업을 선보였었다. 한 시리즈만 지속할 수는 없지 않나? 다양한 작업을 계속 생각하고 실험하고 있다. 2017년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싱글 채널 영상인 <하루>(2016)는 전시 ‘잠 못 이루는 사람’(2015)에서 발표했던 작업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작품의 소스가 조금 바뀌었다. 난민, 테러, 전쟁 같은 사건과 도시 풍경이 세로로 분할된 채로 줄줄이 이어지는 영상이다. 상황에 따라 전쟁 장면이 보이기도 하고 광화문의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특별한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의 이미지들이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설치 작품인 <양가성 Ambivalence>(2017)도 <하루>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화이트> 시리즈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가끔 화이트를 벗어난 작업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내가 다루는 실제 사건 현장 대부분은 색채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잿빛이거나 갈색 톤이다. 그래서 아예 영화 <라라랜 드 La La Land>(2016)처럼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게 칠해볼까?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거다. 피는 파랑색, 하늘은 노란색, 이런 식으로. 물론 아직까지는 생각뿐이다. 사실 흰색으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만약 채색을 하면 세부적인 표현들을 손으로 만들지 않고 그리면 되기 때문이다. 음영 차이를 이용해 질감 표현을 할 필요도 없다.

LEE : <하루>에서 이미지를 세로로 자른 이유는 무엇인가? 가로로 자른다거나 불규칙적인 이미지의 파편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관되게 세로로 잘랐다.

Ha : 보통 영상을 촬영할 때 카메라는 좌우로 움직이지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 촬영된 영상을 보는 관객의 시야도 좌우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미지를 가로로 자르면 서로 다른 이미지와 이미지가 오버랩(overlap)되는 것이 잘 안 보이고 모든 이미지가 끊기는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내가 원한 효과가 아니었다.

LEE : <환영>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하얗게 지워진 것과 달리 <신> 시리즈에서는 배경을 안 지우고 그대로 두었다. 둘의 차이는?

Ha : 둘은 다른 시리즈이니 다를 수밖에 없다. <신>의 경우 사진 속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연극 무대처럼 꾸몄는데 무대의 앞면과 뒷면이 하나의 세트와 같다. 연극 무대도 사진이나 회화처럼 환영을 이용한다. 가짜지만 사람들이 진짜로 인지하도록 만든 거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시선이 조금만 바뀌면 가짜임을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무대 세트의 앞면과 뒷면을 같이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가짜임을 인지하게 만들었다. 이전의 작업이 사진 이미지를 탈색하고 하얗게 만들어 사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태도에 대해 말했다면 <신>에서는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을 다루는 뉴스 기사가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연극 무대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이면에는 암울하고, 부조리한 허점이 있다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연극 무대의 형식을 가져왔다.

LEE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15)전 때 전시된 <헤드라인 Headline> (2015)에서 사망이 수치화되는 뉴스 기사를 다루었다. 수치화된 사망자는 너무 차갑다. 사람이 사망한 사건은 정말 끔찍한 뉴스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읽는다. 혹시 본인이 원하는 뉴스 기사의 형식이 있는가? 매스미디어가 사건 사고를 어떻게 전달해주길 바라는가?

Ha : <헤드라인>의 경우 그런 기사 자체를 비판하거나 그와 같은 기사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숫자로 사라지는 현실을 말하려 했었다. 물론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어느 지역에서 어떤 사고가 있어 사람이 몇 명 죽었다’와 같은 기계적 표현이 반복되는 뉴스 기사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나는 오늘날의 기사가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너무 자극적으로 공개한다고 생각한다.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생산되는 것이겠지만 매스미디어가 소비자를 현혹하고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 우리가 지나치게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관심만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게 재단하고 가르치려 한다.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하튼 그런 인간의 성향이 뉴스 기사를 소비하는 태도에도 담기는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전에서 <헤드라인>은 나의 작품이 놓인 전시장의 입구로 들어서는 통로에 설치되었다. 통로 양쪽 벽에 부조식으로 헤드라인을 나열했고 통로 맨 끝에는 보도사진에 나온 흑인 아이의 얼굴을 그대로 재현했다. 사람이 죽은 사건들조차도 감흥 없이 수치적 정보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통로를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더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도입부와 같은 작업이었다.

LEE : 작업의 이야기가 시스템의 문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Ha : 그렇다. <헤드라인> 작업은 이전에도 했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구호단체의 로고로 작업했었고 그 이전에는 지정된 기간 동안 발간된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헤드라인을 보면 매우 자극적이다. 대부분 끝말이 없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낚시성 내용들이다. 그런 것들의 바탕에는 (일정 부분)경제적 이윤이 있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LEE : 이야기를 조금 바꿔보겠다. 최근 들어 작가가 <화이트-시선> 시리즈에서 다뤘던 것처럼 구호단체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정형화된 이미지이다. 구호단체 광고뿐 아니라 분쟁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다. 하염없이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후원을 할까?’와 같은 반문도 가능하다. 문제인 것을 알지만 동정심에 호소해야 더 많은 성금이 걷히기 때문에 그러한 광고가 방영되는 거다.

Ha : <화이트-시선>의 인물들은 모두 구호단체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분명 구호단체의 광고는 선의의 목적으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방법적인 측면에서 정형화된 이미지가 남용된다. 나태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불필요하게 불쌍한 모습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광고문이 없다면 과연 이 아이들이 어떻게 보일까? 그들에게도 일상이 있다. 그들이 항상 불행함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구호단체 광고에 등장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그 광고 속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불쌍한 모습이 세계로 송출된다면 어떨까? 인권을 생각해도 이 아이들을 이렇게 다룰 수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가끔 비윤리적이고 불합리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먹고 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과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타인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하여 윤리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현상 유지를 하는 것 역시 안 될 일이다. 모금이 많이 된다는 이유로 그렇게 정형화된 이미지의 소비를 지속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이런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낸 지 4~5년 정도 되었다. 그런데 그사이 변화가 있었다. 구호단체 광고를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동영상들도 만들어졌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추운 지방의 사람들에게 라디에이터(radiator)를 기부하자는 픽션 동영상이 제작되기도 했다. 흑인 꼬마가 빵을 받은 후 화를 내며 버리는 영상도 있다. 비꼬는 거다. 다들 자각을 하고 있다. 나아가 구호단체들의 비리나 방만한 경영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도 늘어났다. 내 작업의 영향이라는 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혹은 늘어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다양성을 무시한 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시키면 안 된다.
나의 작업은 구호단체가 그렇게 전형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인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구호단체까지도 자본주의를 따른 거다. 구호단체들이 지나치게 기업화된 결과다. 구호단체의 운영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규모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졌음을 뜻한다. 구호단체들 사이의 경쟁도 문제다. 남을 돕는 일인데 왜 서로 경쟁하는가? 경쟁을 하다 보니 기부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악순환이 반복된다. 단순히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면 된다, 안 된다의 차원이 아니라 그 아래 깔려 있는 기본적인 태도를 문제시한 작업이었다. 기부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타인을 도와주기 위한 선의의 의도도 있지만 일정 금액을 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나의 돈이 정말 광고 속의 아이들을 위해 사용되는지, 그들이 살아남는지, 굶주림에서 벗어났는지 등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호단체의 광고는 아니지만 불행한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을 보도한 사진을 재생산하여 그들을 온라인상에서 추모하는 사람들 중 진정한 선의를 가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런 행동이 진정한 추모일까? 정치적인 이유, 심지어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LEE : 후원금만 내고 잊어버린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러나 잊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늘 생각해야 하나?

Ha : 계속 경계해야 한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모두가 했으면 좋겠지만 나의 작업을 보고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환기하고 자각하면 좋겠다.

LEE : 피에타는 어머니의 상징과 같다, 성모마리아는 희생과 사랑의, 자애로운 어머니의 전형이기도 하다. <피에타 Pieta>(2014)를 만들면서 그런 전통까지 염두에 둔 것인가? fiber glass, 110x110x160cm, 2014 ⓒ하태범

Ha : 원본 사진 자체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하도록 의식적으로 촬영된 것 같았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작가가 특정한 자세를 요청한 것처럼 보였다. 작품 제목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화이트-시선> 시리즈의 작품 제목을 보면 소년, 소녀 등이다.

LEE : <대화법 프로젝트 Dialogue Method Project>(2013)는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한 무용수들과의 협업이다.

Ha : 작가와 무용수의 협업으로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진행했지만 사실은 협업의 과정 그 자체가 작업이었다. 언어와 행동에서 엄청난 오해와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프로젝트였다. 전시 오프닝도 아무 의미가 없는 트릭이었다. 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문제점들을 전부 기록하고 책자를 만들었으니 기록물이 진정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른 이와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던 작품이다. 예술가임에도 서로 사용하는 언어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같은 한국어로 대화함에도 참여자들은 각자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받는다. 동문서답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사회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LEE :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물어보겠다. 부모님이 작가셔서 미술을 자연스럽게 전공하게 된 건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 처음 하게 되었나? 만약 작가가
안 되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Ha : 작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즈음부터 장래 희망을 화가라고 적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디자인을 전공하려고도 했었다. 미술을 좋아했지만 예술가의 가족이기에 예술가로서의 삶이 가진 현실적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순수미술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부모님께서 모두 화가셔서 예술가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신 거다. 예중, 예고를 나오진 않았다. 미술을 아카데믹하게 교육받는 것에 대해 아버지가 부정적이셨다. 대학 입시를 위해 입시 학원에 갔는데 막상 그림을 그려보니 수채화가 나랑 너무 안 맞았다. 그 이전까지 조소를 전공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입체로 재현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게 되었다.
만약 작가가 안 되었다면 만화가가 되었을 거다. 그림을 좀 잘 그린다는 아이들 대부분은 학창 시절 만화를 많이 그렸다. 나 역시 그랬다. 지금 보면 부끄럽지만 스프링 연습장에 그림을 그려 만화책을 만들기도 했었다.

LEE : 어렸을 때 로댕(Auguste Rodin)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 외에 감흥을 받은 작가가 있는가?

Ha : 조소 전공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로댕의 작업에 반해서였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후 충격을 받았다. 고전적 조각이 조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미술사 수업 들은 뒤에는 뒤샹(Marcel Duchamp)을 좋아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사 책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를 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조금 깊이 알게 되니 흥미로웠다. 당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작업 중 일부도 좋아했다.

LEE : 예전에 정해진 시간에 작업하며, 작업실에 규칙적으로 출퇴근한다고 말했었다.

Ha : 거의 9시에는 출근한다. 잠도 규칙적으로 7~8시간 자고 일상을 규칙적으로 지내려 한다. 나는 전시 오프닝 한 달 전에 모든 작업을 끝낸다. 현장 설치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완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달 전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밤을 새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마감을 늦추거나 하진 않는다. 어릴 때부터 미리 하는 스타일이었다. 스스로를 판단할 때, 나는 순발력, 즉흥적 대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여유 있게 작업을 완성하는 편이다.

LEE : 자신의 작업과 유사한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는지 수시로 검색하는 편인가?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볼 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Ha :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수시로 했었다. 의도하지 않은 표절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 삭스(Tom Sachs), 피터 칼리슨(Peter Callesen), 그레고 슈나이더(Gregor Schneider),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처럼 미니어처 모형 자체나 그것을 사진으로 다시 제작하는 방식의 작가들을 몇몇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손으로 무언가를 정교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 확신을 갖고 <화이트> 시리즈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특히 토마스 데만트와 많이 비교되었었다. 최근에는 작업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LEE : 매스미디어, 폭력 이 두 단어에 대한 작가의 정의는?

Ha : 사전적인 의미가 제일 정확하다. 작업을 하면서 사전적인 의미를 늘 되새긴다. 물론 철학적인 이론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내 작업이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아낸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철학서를 근간으로 내 개념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다. 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 그것을 전달하는 매스미디어, 그에 대한 우리(사람들)의 반응을 다룬다. 폭력에 대한 태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누구나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사전적 의미가 중요하다. 워낙에 애매하고 모호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매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중간에 있는 모든 매개체이다. 폭력은 남을 아프게 하는 것, 누군가 상처를 받는 것이다. 꼭 물리적인 폭력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외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이 정말 많다. 거대하고 글로벌한 폭력뿐 아니라 미미한 폭력도 생각해야 한다. 방관자도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예의 주시한다. 스페이스 15번지에서 선보였던
<화이트-윈도우>는 그런 방관자적 폭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강도가 들어 엉망이 된 원룸처럼 전시장을 꾸미고 관객은 오직 창문으로만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마치 윈도우 갤러리처럼 밖에서 목격만 하는 거다. 그게 바로 신문기사를 소비하는 대중의 태도다.

LEE : 본인의 작업이 사회적인 영향이나 반향을 이끌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영향을 준다면 어느 정도인가? 문제 제기를 하거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까지일 수도 있고, 한발 더 나아가 대안을 알려줄 수도 있다.

Ha : 문제 제기를 하는 정도인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시간과 공을 들여 작업을 하는데 친구와 둘이서 하는 수다나 술자리에서의 넋두리 정도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작업을 하면 어떤 값어치가 있어야 한다. 넋두리를 하려면 굳이 작가가 될 필요가 없다.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쉽게 작업해서는 안 된다.

LEE : 작가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건가?

Ha : 해도 된다. 그러나 남들이 공감하거나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작업이어야 한다. 친구는 들어주겠지만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굳이 작업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LEE : 문제 제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 제기를 하거나 비판을 할 때에는 어느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비판을 위한 비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Ha : 나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반드시 해결책까지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일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예술가의 의무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것은 해당 영역에 있는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한다. 물론 예술가가 해결해야 하는 영역의 문제라면 내가 할 것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예술가 개인이 하나의 명확한 해결책을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또 하나의 아집과 독선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작가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문제를 직시하는 지점까지 관객들을 이끄는 것을 작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생각의 전환이나 문제 제기,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