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0. / 12. 28. 내용 추가 및 수정 / 2021. 4. 28. 수정
본 글은 2020년 11월 17일(화), 12월 22일(화)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진주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LJJ : 이진주
LEE : 이진주의 작업에서 기억과 망각, 보기는 중요한 키워드로 다루어진다. 조금 추상적인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작가가 생각하는 기억과 보기란 무엇인지 듣고 싶다.
LJJ : 기억이란 것에 집중해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나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기억이 무언가 원형처럼 남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즈음에 납치될 뻔했다가 도망친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서운 상황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지만 그 사건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최초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그 사건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경, 내가 대학원에 다니며 홍대 앞에서 자취하던 시절, 그 지역에서 흉흉한 사건이 많았는데 그때 최초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이후 남편인 이정배 작가와 결혼 직전 행주산성 인근에서 마당이 있는 집 한 채를 빌려 작업을 하면서 함께 지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너무 자주 떠올랐다. 다섯 살 때가 전원적인 장소에 살았던 유일한 시기였는데 다시 그와 유사한 곳에 머무르자 당시의 기억이 계속 소환되었던 것이다. 마치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7)에 나오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기억을 소환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다.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왜 내가 원하지 않는 기억이 계속 나타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알아보고, 파헤쳐 보고,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왜 나는 이 기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가? 왜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 읽고,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융(Carl Gustav Jung)도 찾아보고, 기억과 관련된 해마를 연구한 책도 찾아봤다. 그러다가 내 삶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해하고 싶지만 불가해한 이 지점에서부터 예술가의 시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렇게 많은 전시가 열리는 이 세계에서, 더 좁게는 한국의 서울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내가 굳이 전시를 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정성 있게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림을 통해 바라고 싶고, 알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다시금 작업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존재하며 나를 사로잡고 있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에 갤러리 정미소에서 열릴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개인전에서 기존의 정교한 스타일의 인물 그림에서 벗어나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보호받고 심리적 위장을 한다는 느낌으로 드로잉적인 작업을 선보였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근원부터 생각하며 접근한 것 같다. 참고로 대학원 때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에곤 쉴레(Egon Schiele), 천경자의 인물 작업을 좋아했고 페르소나, 헛헛하고 불안한 심리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
<풀밭 위의 식사> Korean color on Fabric, 44x88cm, 2008 ⓒ이진주
두 번째 개인전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2008)에서는 말을 하진 못하지만 내면에서 생성되는 이야기, 대화들을 그렸다. 이때 전시된 작품에는 행주산성의 공간들이 담겼다. 그중 <풀밭 위의 식사>(2008)는 첫 쉐이프트 캔버스 작품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떠오른 기억을 어떻게 이미지로 인지하는지, 기억이 어떤 감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보이는지 등을 드로잉(이미지)으로 구체적으로 포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상에서 보는 대상들이나 골목과 산책길의 풍경에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끼어드는 장면들이 혼재되어 기록되었다.
사실 정말 오래된 기억은 너무 분절되고 파편화되어 있어 온전히 믿기 어렵다. 앞뒤 맥락도 기억나지 않고, 기억의 조각만이 생생하게, 실감 나게 떠오른다. 나는 그것이 꿈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꿈도 잠에서 깸과 동시에 기억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기억나기도 한다. 꿈을 인지하는 방식도 여러 개다. 꿈 역시 맥락이 없고, 분절되어 있다. 앞뒤의 전개가 논리적이지 않지만 당연하게 여겨지고 진짜 같이 리얼한 것이 기억과 유사하다. 그래서 내 작업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생하지만 맥락이 끊기거나 갇혀 있는 것 같다. 또 일상의 평범한 풍경인데 생경하고 엉뚱한 사건의 흔적이나 오브제들이 같이 놓여있다. 그런데 기억에 주목하다 보니 기억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허술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많은 것들이 망각되고, 남겨진 기억조차도 부분적으로 지워지고 왜곡된 불안정한 상태이다.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최초의 기억과 감정을 복기하는 게 아니다. 복기한 기억을 복기하고, 복기한 기억을 복기한 것을 또 복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된다. 과연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나의 삶도 변하고, 일상도 변하기 때문에 나의 일상, 현재의 모습, 변화들이 그림 속에 함께 나오고, 변화 속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세계들이 담긴다. 사실 물리적으로는 사진처럼 현상적이고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많은 것들이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진짜 풍경은 무엇일까?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어마어마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그중 점 하나와 같은 지점이 의식이라 말한다. 나의 작업은 이렇게 우리가 바라보고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Korean Paint on Linen, 215.5x213cm, 2019 ⓒ이진주
LEE : 작업 과정에 관한 설명 중 ‘상상 속의 오브제를 촬영하고 재구성한다’는 내용에 눈길이 갔다.
LJJ : 내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일종의 은유와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연필을 자주 그리는데, 연필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연필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이나 기억들, 공감각적인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다. 즉 연필이 대리대표가 되는 방식이다. 상상 속의 오브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심리적인 주관의 세계를 그리긴 하지만 동시에 모순되게도 나는 나의 현실, 이 세계의 현실을 담고 싶다. 나는 나의 작업이 초현실적으로 분류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꿈과 같은 환상적인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내 작업이 내가 만나고 있는 사실적인 현실에서부터 비롯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 주관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함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말이 안 되지만 태연하게 실재하는 상황은 우리 현실에서 쉽게 발견된다. 등산로에 버려진 신발, 버스 정류장 옆에 쌓인 장의자, 종교적 의식의 장면, 세계 곳곳에서 송출된 이상한 사건들처럼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장면들 혹은 평범한데도 자세히 보면 신기한 장면들은 생각보다 많다. 나의 작업도 완전히 비현실적인 방식으로만 전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비례나 시점도 일관되게 표현한 기묘한 풍경 속에서 나는 나에게 무언가를 촉발시키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대상들을 굉장히 정교하게, 진지하고 사실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려 한다. 삶의 곳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장면을 나의 작품 세계의 질서 안에서 그려내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에 쥐고 있는 양파를 그려야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만을 그려도 어느 정도 사실적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떠올렸던 원형과 뉘앙스를 보여줄 수 있는 양파를 찾는다. 양파의 싹이 두세 개는 있었으면 좋겠고, 갈색 부분은 없고, 이런 식으로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대상을 실제 현실에서 구한 뒤 원하는 지점이 될 때까지 만든 다음 그린다. 촬영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해서 촬영한다. <각오>(2017)에 등장하는 나뭇가지 설치물의 경우에도 아슬아슬한 느낌을 떠올리면서 심혈을 기울여 풀밭에서 나뭇가지를 찾아다가 설치하고 종이나 손은 따로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재조합해 그렸다. 머릿속 이미지를 그리는 것과 실제로 보면서 그리는 것은 다르다.
<각오> Korean Paint on Linen, 90x72cm 2017 ⓒ이진주
LEE : 이진주의 작업에는 다양한, 그러나 연결점이 있는 이미지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감상자가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받거나 생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마주할수록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아닌 파편화되어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들만 떠오른다. 아예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불친절하고 모호한 작업인 것 같다. 작업할 때 어떤 식으로 내러티브를 생성하는가?
LJJ : 내러티브가 느껴진다 해도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고, 파편화되어 맥락이 안 보일 때가 많을 것이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그처럼 이야기의 간극이 커서 상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간극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잇기 위한 이야기를 관람자가 찾아낼 수도 있다. 간극이 크면 클수록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직설적이면 그렇게밖에 읽지 못한다. 나는 간극을 통해 보는 사람의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려는 것 같다. 물론 내 작품들은 나의 삶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하나 나름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투명하게 모두 밝히면 고정적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미지(이야기) 사이에 조금 더 나의 의도를 많이 설명하고 드러낼 수 있는 무언가를 넣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내 그림에는 기억이나 상상뿐 아니라 현실 속의 사실적인 것들이 존재한다. 나의 작품에 내가 의도적으로 선별한 이미지가 담기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도 자기만의 무언가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내가 일상 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듯이 내 작품을 보는 사람이 자신만의 무언가를 촉발시켜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길 바란다.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던 2008년부터 약 14년간 이와 같은 맥락의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트라우마에서부터 비롯된 기억을 이미지로 만나는 매커니즘이나 기억을 촉발하는 매개체 등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예술가의 직관으로 만나고, 해석되고, 통찰되는 세계들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주목하고 논리를 끼워 맞춘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맥락인지 깨달았고, 그처럼 논리를 세우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거나 드러내지 못한 채로 감각하고 표현한 것들에 대해 조심스러워지면서 오히려 기억을 이야기하기보다 망각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논리보다 분절을 바라보고, 극도로 리얼한 디테일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려낼 수 없고 발화할 수 없는 대상과 이야기들을 여백의 구조로 비워냈다. ‘이런 이유로 이렇게 그렸다’가 아니라 ‘이런 이유로 이렇게 그린 것 같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게 내가 바라보는 세계에 맞는 시선 혹은 생각인 것 같다. ‘이처럼 모호하고 모순된 채로 내가 존재하고 보고 있구나, 이 세계도 그렇게 모호하게 감지되고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구나’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무리하게 논리를 끼워 맞추지 않는다. 그저 더 솔직하게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All Names> Korean Paint on Linen, 94x122cm, 2018 ⓒ이진주
LEE :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그 의미를 어느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관객들이 작가의 논리나 생각을 전혀 몰라도 상관없는가? 나는 내 기억을 담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작가가 작품에 담아낸 모든 의미를 관객이 모두 알기도 어렵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LJJ : 나는 예술의 영역에서 관객의 오독은 이해의 일부로 기능한다고 생각한다. 오독이 더 다양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즐길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창작자의 의도를 작품을 통해 관객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지만 창작자로서 나는 작품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고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고 싶어 전시라는 형식으로 발표한다. 나는 나의 작업이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쓸모가 있을지는 작가가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또한 보다 명료하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종교적인 도상, 공사 중의 천막, 돼지처럼 구체적인 단서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내가 본 것>(2017)에 등장하는 밀가루 반죽의 경우 시리아의 지도 형태였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생각들이 들어간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다. 물론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정답을 전한다기보다 그것을 통해 관객이 자신만의 세계로 뻗어 나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시작점을 주는 정도인 것 같다. ‘여기에서부터 한번 생각해볼까? 이런 장면에 대해 당신은 어떤 기억과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끌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무언가를 작품을 통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내가 매우 세밀하게 그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손의 솜털 하나하나, 핏줄 하나하나까지 그려서 손짓이나 뉘앙스를 보여준다. 시간을 들여 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 이미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관객의 머릿속에 무언가 또 다른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다. 내가 회화적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지 고민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전시 [사각 死角, The Unperceived](2020)과 동명인 작품 <사각>(2020)이 보여주듯,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1447)나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19세기 초) 같은 두루마리 그림들이 시점을 이동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관객들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그림 앞에 머물고, 그림 속의 여러 대상을 향해 시선이 움직이며, 그것을 읽어내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사각> Korean color and acrylic on Linen, 122x488cm, 122x244cm, 122x220cm, 2020 ⓒ이진주
LEE : 일상의 기억과 이미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기에 특정한 기억, 특정한 이미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LJJ : 어떻게 선택하는지의 기준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직관으로 만나는 것 같다. 누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특별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수없이 많은 연필을 깎아왔다. 특히 그 진하기와 단단함을 좋아해 B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뾰족하고 예리하게 드로잉하기에도 적합하다. B연필을 깎는 것은 항상 반복되는 일인데도 어느 순간 연필심을 다듬고, 연필심이 예각으로 뾰족해지는 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뾰족해진 연필을 종이에 대어 그림을 그릴 때 심이 마모되면서 그 흔적이 그림이 되는 것 역시 낯설고 이상하면서도 예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예민하게 감각하려 한다.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훅 들어오는 특별한 느낌들을 민감하게 보고 기록해놓는다. 그래서 드로잉을 비롯한 기록들이 굉장히 많이 쌓여있다. 다만 이렇게 직관적으로 포착된 것들이 즉흥적으로 작품에 쓰이거나 등장하길 원하진 않는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을 망각하는 것처럼 내가 기록하는 모든 것이 다 작업으로 나오진 않는다. 마치 숙성시키듯 혹은 걸러내듯 시간이 흘러 다시 봤을 때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작업의 중심 이미지와 사건으로 쓴다. 한편 작업 중에 일상의 순간들이 끼어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조금 직관적으로 가미되는 편이다.
<가늠> Korean color on Fabric, 119.5x239.5cm, 2014 ⓒ이진주
LEE : 의복이 인물의 성격을 특징짓는 매우 강한 이미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낸 여성들이 입고 있는 팬티스타킹도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의복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무언가를 입었지만 입지 않은 것과도 같은 모호한 상황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LJJ : 작업 초기부터 팬티스타킹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나의 그림 속 인물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공간을 관통하는 주체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기억이나 상상은 여러 개의 시간을 동시적으로 인지하게 한다. 기억은 과거이고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은 현재이지만 상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제를 계속 만나게 된다. 그런 주체로서 어떤 이야기와 사건을 끌고 나가는 인물을 그리는데 특정한 헤어스타일이나 옷 때문에 한정된 연출이 강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꽃무늬 원피스만 계속 그리거나 검은색 티셔츠만 입히다가 점차 옷도 그리지 않고 머리카락도 그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팬티스타킹이 갖는, 경계에 있는 독특한 뉘앙스가 나의 인물과 절묘하게 잘 맞는다고 생각해 그리기 시작했다. 팬티스타킹은 반투명하고 부드러운데 단단하며 죄어오는 느낌이 들고, 비치는데 따뜻하고, 작은 상처에도 올이 나가버리는 허물 같은 독특한 것이다. 의미뿐만 아니라 광목에 팬티스타킹을 그렸을 때의 시각적인 느낌도 좋았다. 그라데이션 효과나 광목과 어우러지는 스타킹의 질감을 그려낼 때의 매력도 굉장히 크다.
LEE : 프레임 속 화면 구성이 느슨한 것 같으면서 매우 촘촘하다. 개인적으로 매우 계획적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들의 배치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LJJ : 그려진 각각의 사물과 사건들은 직관에서 비롯되지만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은 굉장히 계획적인 편이다. 작품마다 이미지 배치는 매번 다른데 당연히 시각적인 것과 내러티브적인 것을 함께 고려한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이미지들이 어떤 식으로 큰 흐름을 맞춰나가는지, 어떤 배경 속에 놓이는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야 할지 그런 것들을 계속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구성한다. 한편 내 작품은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지만, 여백이라는 개념이 항상 같이 있기 때문에 생략이 가능하다. 내가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지점까지만 그릴 수 있다. 배경의 일부만을 그린다든가, 인체에서도 손만 그리고 팔이나 옷을 그리지 않는다든가, 헤어스타일을 생략하는 식이다.
큰 작품의 경우에는 구도에 대해 훨씬 더 치밀하게 계획한다. 이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저지대>(2017)는 2011년경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다. 2017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을 열면서 6m에 가까운 작품을 전시할 기회가 생겨 가능했다. <사각>의 경우 전시장인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오랫동안 머물며 계속 생각했다. 이전의 드로잉, 현실에서의 생각, 개별적인 사건들뿐 아니라 전시하게 될 공간에서 고심한 작품의 크기와 구조, 화면의 구도와 함께 떠올린 이미지들이 담겼다.
<저지대> Korean Paint on Linen, 222x550cm, 2017 ⓒ이진주
LEE : <사각>은 회화인 동시에 설치이다.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겠으나 회화의 전시 형식에 관한 고민의 결과인 것 같다. 회화 작품을 선보이는 일반적인 전시에서 여백으로 남게 되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회화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로서 작품의 설치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가?
LJJ : 회화도 공간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전시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어떤 것을 그려야 되는가?’와 같은 그림 속 이미지와 주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개인전의 경우에는 전시 공간이 최소 1~2년 전에 정해지기 때문에 여유롭게 특정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주어진 공간에 작품을 잘 제시할 수 있을지 공간적인 요소를 굉장히 많이 고려하며 작업을 진행한다. 작품 안의 구성, 작품의 물리적인 크기, 조명과 벽의 색, 동선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각>의 경우 작품이 전시되는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에 여백이 많고 파스텔톤인 나의 작품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벽에 걸지 않고 공간 가운데에 제시해 사람들이 그 공간을 돌아다니며 보게 했다. 뭔가 온전하게 볼 수 없어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한눈에 볼 수 없는 구조가 한 덩어리 안에 들어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회화 속 장면에서는 인간의 일생, 생(生)의 시간, 삶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이야기했다. 나는 이전부터 삼면화나 입체적인 캔버스가 병렬로 걸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화면의 구조적인 실험을 해왔다. 이는 정지된 이미지인 회화가 어떻게 시간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면면에서 시제를 뛰어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어떤 풍경을 동시적(同時的)으로 제시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기도 하다.
한편 쉐이프트 캔버스의 경우 벽면을 여백처럼 사용한 적도 있다.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에 전시된 <가짜 우물>(2017)이나 <저지대>의 경우 벽이 마치 발화되지 않은 이야기의 공간처럼 정말 많은 가능성과 함의를 품고 있는 여백이 되었다. 공간을 작품 속의 여백처럼 느끼면서 작업했던 경우이다.
<가짜 우물> Korean Paint on Linen, 260x528cm, 2017 ⓒ이진주
LEE : 잠시 재료와 그리는 방식에 대해 질문하겠다. 천에 동양화 물감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림의 바탕으로 천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LJJ : 정확히 표현하면 광목이다. 광목천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나는 고운 광목에 아교반수를 한 뒤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을 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미술 매체를 충분히 접한 뒤 나의 기질에 가장 잘 맞는 동양화를 선택했다. 전통 회화에서 주로 다루는 물성의 힘과 미학적 방법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동양 전통 채색화에서는 많은 경우 장지를 쓴다. 참고로 대학원 시절과 두 번째 개인전까지의 작품 대부분은 한지나 장지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장지도 좋지만 사전 작업에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장지에 채색화를 그리려면 노루지라는 얇은 종이에 스케치를 완성하고 먹선을 그린 뒤 다시 뒷면에 목탄으로 윤곽선을 긋고 복사하듯 베끼기 때문에 밑그림을 두 번은 그려야 한다. 배접하고, 아교반수하고, 밑그림을 두 번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전 준비를 하다 힘이 빠져서 실제 작업을 못 할 때가 많았다. 공정 작업에서 지쳐 버리는 거다.
무엇보다 장지에서는 스케치를 수정할 수가 없다. 장지에 그리려면 모든 것을 처음에 다 결정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런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나는 화폭 속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전체적으로 그리며 완성하지 않고 각각의 부분을 하나씩 완성한다. 그림을 시작할 때 전체적인 구성과 그릴 이미지의 크기 등을 계획하지만 그리는 중에도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다 특정한 대상을 그리는 그 순간에 최종적인 확정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모든 스케치가 완벽히 완성되어 있으면 답답하고 많은 것들이 제한된다는 느낌이 들어 이런 나에게 맞는 재료와 바탕을 실험, 연구했고 동양화의 물성과 기법을 잘 표현할 수 있으면서 두 번 스케치 하지 않아도 되고, 채색에 들어간 중에도 밑그림을 함께 그리거나 수정할 수 있는 광목을 그림의 바탕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LEE : 2017년부터 검정 배경에 얼굴과 손 등이 클로즈업되어 그려진 <블랙페인팅>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검정 배경에 몸의 일부만 보이는데, 절단되었다기보다는 암흑, 거대한 무의식이나 기억 혹은 망각의 세계 속에 머무르는 존재의 일부가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이 시리즈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연>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9x37cm, 2016 ⓒ이진주
LJJ : <블랙페인팅> 시리즈는 2017년의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배경을 어둡게 칠하고 얼굴이나 손 같은 몸의 일부만을 드러낸 그림의 시작은 <연>(2016)인 것 같다. 이어서 <유예>(2016), <보는 것>(2016) 등을 그렸다. <블랙페인팅>은 그냥 얼굴 혹은 손을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연>은 내 아들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독감으로 앓아누운 아들을 돌보며 바라본 얼굴의 인상, 당시 떠오른 여러 생각과 감정들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특별한 콘셉트나 기획 없이 미친 듯이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2016년도의 작업은 지금의 <블랙페인팅>과 재료, 구성이나 표현법이 조금 다른데, <연>의 경우 솜털 하나하나가 모여 휘몰아치듯 배경을 채워 넣었다. <유예>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때의 감정들을 모아 하얀 국화(의 실루엣)를 감싸고 있는 손을 그린 것이다.
<블랙페인팅>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손, 벽>(2017)에서부터 시각적으로 더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이진주의 작품이 보여주던 방식, 즉 큰 풍경 안에 많은 이야기가 오밀조밀하게 조금은 생경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많은 조건, 상황과 사건들이 어둠 속에 감춰진 채 아직 발현되지 않은 구조이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것은 몸의 부분, 일부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온통 까만 배경이어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없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보면 된다.
LEE : <블랙페인팅>의 많은 경우 손이 등장하는데 손 위에는 불꽃이나 타고 남은 성냥, 반죽, 구겨진 종이 조각 등이 올려져 있다. 각각이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LJJ : 나의 다른 작업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대리대표로서의 상징이다. 손 위에 놓인 하얀 반죽도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파생되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여러 상황을 은유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LEE : <손, 벽>의 경우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인물이 보이는데, 한쪽 눈만 감고 있다.
LJJ : ‘우리가 진짜 바라보는 풍경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생각이 담긴 작품이다. 내가 끈질기게 관심을 갖고 있는 본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손 사이로 눈이 보이는데 하나는 감고 있고 하나는 뜨고 있다. 이런 상황은 보기를 방해하는 가림막이나 장애물, 온전하게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행위의 은유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섭거나 보기 힘든 것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보호막일 수 있다. 혹은 정말 물리적으로 눈이 부신 상황일 수도 있고 부끄러운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상을 감추거나 볼 수 없는 이면으로 넘겨버리는 상황, 보기 힘들지만 안 볼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엿보는 것 같은 어떤 상황들을 생각하며 나온 이미지라 말할 수도 있다. 정말 다양한 행위와 연결된 것 같은 상황이다.
LEE : 배경이 온통 검기 때문에 여백과는 반대된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바라보니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 느껴졌다. 동양화를 바탕으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먹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안료를 사용하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다른 색이 아닌 검정을 선택한 이유도 듣고 싶다.
LJJ : <블랙페인팅>은 손이나 얼굴을 먼저 그리고 여백을 검게 칠해나가는 순서로 작업이 이뤄지는데 배경에 아무 칠도 안 된 상황, 일반적인 검정 물감이 칠해진 상황, 그리고 특수 제작한 ‘JB블랙’이 마지막으로 올라간 상황의 느낌이 정말 다르다. <연>이나 <보는 것>에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검정 물감(분채)을 주로 사용했고 먹을 함께 쓰기도 했다. 그러다 배경이 조금 더 진한 검정이라면 깊은 어둠 속에 은폐된 사건이나 그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파편화된 대상들을 보다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료를 구하러 다녔고 채도와 순도가 높은 수성 안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안료를 가지고 내가 직접 아교나 아크릴 베이스의 물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정말 많은 실험의 과정을 거쳤고 현재는 적절한 비율을 찾은 상태이다. 기성 물감에서 볼 수 없는 채도 높은 검정과 벨벳같이 매트한 질감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아 이정배 작가의 이름을 붙여 ‘JB블랙’이라 부르고 있다.
생명을 키우는 것이나 죽음에 대한 실존적인 생각을 예민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이 대부분 색채가 없거나 검정이 함께 어우러진 것들이었다. <가짜 우물>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현재는 <블랙페인팅> 시리즈에서 순도 높은 검정 바탕 위에 파편화된 신체를 흑백으로 그리기도 하고, 사실적인 피부의 색채로 표현하기도 한다.
<손, 벽> Powdered Pigment, Handmade JB Black,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54x41cm, 2017 ⓒ이진주
LEE : 전체적으로 개인의 삶과 내면에 집중한 것 같지만 사회 속 사람들의 현실을 담아낸 작업이기도 하다. 본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담아내고 싶은 사회적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LJJ :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정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진주만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내면과 세상이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상황, 경험, 감정들도 생각보다 굉장히 많다. 이항 대립적으로 개인과 사회적인 무언가를 서로 구분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으로서 이 세계의 시스템에,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를 느끼고 있고 나도 그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 안에는 내가 몸담고 영향받는 사회의 부분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작품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나의 일기 같은 독백에 그치는 이야기라기보다 굉장히 내면적이고 주관적이긴 한데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그 무언가이다. 나의 작품 속에서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자아를 상징하는 여성에서 아이나 부모, 동물, 여러 군상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더 많이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들고 있다. 거창하게 거시적인 사회 담론을 담는 통로가 아니라 섬세하게 직관적으로 내면을 건드리는 통로로도 이 세계의 많은 스펙트럼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먼지 속에서도 우주를 만날 수 있듯 내밀한 개인이라는 내가 능숙하게 잘 드러낼 수 있는 통로를 통해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 환경, 여성, 종교 등의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LEE : 이진주의 작업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 보았음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까지도 담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다 보니 매우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삶,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요소들의 조합이 담긴다. 결국 각자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각자만의 삶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전달받는다. 궁극적으로 작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
LJJ : 내 작업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자신 혹은 이 세계와 인간을 들여다보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내가 드러내는 약간은 쓸쓸한 분위기, 뭔가 서로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불협화음이 있는 분위기들은 내가 보는 이 세계이다. 간혹 반짝거리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때로는 혐오스럽고,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우리는 던져져 있고, 그 속에서 내가 마주하고,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들이 작업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굉장히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도 있고, 유폐시키고 드러내기 싫은 매우 끔찍하거나 불편한 순간도 있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해도 우리는 이 모두를 다 간직하고 있다. 이 불가해한 세상에서 눈과 귀를 닫고 외면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한 번 더 보고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아름다움과 혐오가 공존하는 이 세계를 작품으로 소통하고, 우리에게 이미 존재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제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