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9.24.

본 글은 2019년 9월 7일(토)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정형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이정형 (Lee, Chunhyung)

겹쳐지는 지점(Study of Crossing Area, 2013-present)
부산물(Left over, 2013-present)
미술관의 벽(Wall Of Museum, 2014-present)

LEE : 이문정, LCH : 이정형

LEE : 이정형의 작업은 분명 노동과 예술이라는 이슈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내가 이정형의 작업을 보고 받은 인상은 노동보다는 삶의 기록과 기억의 수집이었다. 애뜻함 정도는 아니라 해도 일상을 소중하게 다루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것도 같다. 개인마다 작품을 감상하는 초점이 다를 것이다.

LCH : 보통 노동을 다룬다고 하면 사람들이 갖게 되는 생각과 달리 내 작업에는 탐미적이고 유희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노동은 내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내가 작업 초반부터 관심을 가졌던 주제다. 또 내 작업을 읽어낼 수 있는 효율적인 키워드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의 노동이라고 하면 조금 귀여운 부분도 있다. 젊은 예술가의 노동과 나이가 있는 예술가의 노동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인상은 다르지 않을까. 작가가 아닌 사람의 생존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예술가의 생존이 작업의 주제가 되면 그 현실적 무게가 무거워진다. 미술계에서 초년생인 젊은 작가들이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미술계에서 파생되는 일을 하고 그것을 작업으로 이어가는 상황이 흥미로웠을 것이다. 당시 예술가의 최저임금, 아티스트 피(artist fee) 등이 이슈이기도 했다.
내 작업이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것에 장단점이 있다. 내 작업 전부를 노동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그것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의 무게로 전달되기 원하는지, 어떻게 조절해나가야 하는지 등을 늘 생각한다.



<한 조각의 형태와 비슷한 벽 A wall that resembles the shape of a sculpture> wall from exhibition site, variable dimension, 2018 ⓒ이정형

LEE : 얼마 전 진행된 인사미술공간에서의 개인전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의 2층에서 특히 서정적인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가?

LCH : 단어 그대로 사라지는 것들이 아까울 때가 있다. 전시 시스템 안에서 모든 전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야 한다. 박물관에 영구 설치되는 상설전이 아닌 이상 전시에 있어 영구적인 상황이란 없다. 일시적이고 한정적이다. 아쉽지만 그런 특성이 흥미롭기도 했다. 개인적 의견으로 한국 사람들은 유독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인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시각적 흥미. 뭔가 빨리빨리 바뀌는 것이 아쉬울 때가 많다. 시간의 쌓임은 중요하다. 나는 중고물품들을 구입할 때 흠집이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마저도 고유한 정체성이 되는 거니 상관없다. 작품도, 도시도 마찬가지다. 시간성이 가지고 있는 축적된 아우라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LEE :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하나? 혹시 본인이 쓰던 물건도 보관하고 하는가?

LCH : 나의 아내는 나를 가끔 호더(hoarder)라 부른다. 무언가 많이 모은다. 내 기준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으는데, 특별히 내가 사용한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진 않는다. 가격도 상관없고, 용도도 크게 상관없고, 혼자 따져보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중고물품을 구입할 때 ‘내가 만들면 얼마에 만들 수 있을까?’처럼 만드는 시간과 노동, 비용을 많이 생각한다. 내가 지금 만들어도 그 가치가 나올 수 없는 것, 오래된 물건 중에 지금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것에 특히 흥미를 갖는다. 물론 내가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통용되는 가치라기보다는 안 예뻐서 예쁘고, 쓰레기인데 아름답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아름답거나 아름다울 수 없는 상황인데 아름다운 것 등이다. 말장난 같지만 내 고유의 미감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미감과 내 취향에 맞는 미감을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LEE : <겹쳐지는 지점>에 대해 ‘효율성이 중요한 노동의 현장에서 비효율적인 상황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그러한 순간들 속 아이러니컬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긴다’고 설명했다. 예술이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는가?

LCH : 특정한 대상을 확정적으로 효율적, 비효율적이라 논하기는 어렵다. 세부적인 상황들을 보면서 효율성과 비효율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동형 가벽은 전시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매번 새로운 벽을 세우고 허무는 것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공간의 미적인 부분이나 실험적인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We> c-print, 40x40cm, 2015 ⓒ이정형

LEE : <우리>(2015)에서는 예술이 아닌 노동 현장의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매우 작게 프린트한 뒤 고전적인 액자(프레임) 안에 넣었다. 액자는 예로부터 예술의 영역과 일상의 영역을 분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과거에는 노동이었으나 이제 예술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LCH : 당시 개인전 홍보 이미지로도 사용했었는데 사람들이 전시장에서 실제 작품을 보고 사진이 생각보다 작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사진이 작은 이유는 아이폰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인화할 때 크기의 한계가 명확하다. 당시에는 사진을 확대하길 원하지 않았다. 지금 봐도 좋은 사진이라 생각한다. 요즘 생각으로는 오히려 픽셀(pixel)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확대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우리>는 기록과 기록이 아닌 것 사이, 경계 정도의 작업이었기에 액자에 넣었다. 또 다른 이유는 사진을 낱장으로만 전시하면 사람들이 너무 무가치하게 바라볼 것 같아서였다.

LEE : 이후 <현장 보고서>(2016)에서는 보고서 혹은 일기장 같은 종이 위에 사진을 붙였다. 전시 ‘화이트 노이즈’에서는 작은 사진을 있는 그대로 벽에 붙였다. 액자를 벗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LCH : 그냥 시간이 흘러 생각이 바뀐 거다. <우리>는 사진을 전시하기 위한 형식을 생각한 것이었고, <현장 보고서>는 말 그대로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일기의 기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LEE : <현장 보고서>의 경우 글씨체도 남다르다.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을 염두에 두고 작성했나?

LCH : 어느 정도는. 연필을 바꾸거나, 내가 뻔히 아는 상황인데도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언젠가, 누군가가 볼 것임을 염두에 둔 방식이 있었다.



<현장 보고서 Field Report> c-print, variable dimension, 2016 ⓒ이정형

LEE :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세를 취하게 한다거나,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는가?

LCH : 바빠서 연출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연출하면 부자연스러워 오히려 원하지 않는 느낌이 담길 것 같다. 흔들리거나 초점이 흐려져도 자연스러운 기록이 좋다.

LEE : 촬영했어야 했는데 놓쳤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었나?

LCH : 정말 많다.

LEE : 카메라를 현장에 설치해 동영상으로 기록하면 놓치는 부분이 줄어들 것 같다.

LCH : 괜찮을 것 같다. 공간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남는 것은 기록물뿐이다. ‘화이트 노이즈’ 전시 후 인사미술공간에서 전시장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주었다. 사진이 아닌 동영상으로 보니 새로웠다.

LEE : 현장에서 정말 많은 사진을 찍는다. 사진들을 보면서 자체 평가를 한 적이 있는가?

LCH : 기록의 단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사진 정리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어느 시기 이후부터는 사진을 찍는 시간보다 이미 찍은 사진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어떤 것을 남기고 버릴지 결정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졌다.
나는 왜 정형화된 사진만 찍을까와 같은 고민이 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사진은 관찰자 시점에서 촬영되고 있다. 모든 상황을 다 보여주는 사진만 찍는 거다. 현장의 전체 뷰(view)를 보여줄 의무가 없음에도 내가 현장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극히 일부만으로도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텐데 형식적으로 고착화된 것은 아닌지 고민 중이다. 아이폰이 가진 화각과 클로즈업 능력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사진이라는 점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일관성이 있어서 좋은 것인지, 조건에 만족하는 것인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더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수해서 찍히거나 우연히 찍힌 사진들이 훨씬 좋을 때도 많다.

LEE : 작가여서 전시 디자인이나 설치를 함에 있어 효율성이 높아지고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또한 누군가는 이정형의 활동을 보고 나도 작가로서의 활동과 전시 디자인, 전시조성업을 병행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LCH : 작가이기 때문에 기관에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마감이라던가 디테일한 부분들을 알아서 해결할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효율적으로 전시설치업과 작가 활동을 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잃는 것도 많고, 주의해야 할 점도 많다. 보통의 작가라면 자신의 전시를 위해 계획을 짜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평상시에도 나의 작업을 위한 것이 아닌 전시와 관련된 생각을 쉴새 없이 해야 한다. 머리를 쉴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나의 작업, 나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나는 작가, 전시디자이너, 전시조성업자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직업이 그렇듯 전시조성업도 매우 전문적인 영역의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과도기적인 아르바이트 정도로 접근한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할 수 없다. 처음에는 작가로서 작업을 하는 것과 전시업을 병행하는 것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었고 그것이 작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전시 디자인, 전시조성업을 병행하는 것의 균형을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의 생각이나 상황을 작업의 단서로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그 균형이 잘 맞지 않을 경우, 회의감이나 혼란을 느낄 때도 있다.



<보이는 것의 무게 weight of seeing> waste from exhibition site, variable dimension, 2018 ⓒ이정형

LEE : <Light Construction>(2017), <보이는 것의 무게>(2018)는 작가로서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가시화한 것인가? 아니면 전시, 나아가 예술이 갖는 권위를 비트는 것인가? 제목이 중의적이다.

LCH : 두 가지 모두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의 시점이 좀 다르긴 하다. <Light Construction>은 전시에 대한 가설을 이야기한 것이다. 임시적인 상태가 가설이다. 전시라는 개념이나 상황 자체가 가설적인 상황이라 생각했다. 일시적이고 유한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보이는 것의 무게>는 전시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비중을 무게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다. 빛, 사물, 텍스트도 무게로 변환될 수 있다. 전시장 안의 요소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상태, 균형에 대한 문제를 다룬 거다. 첫 개인전 제목인 ‘파인 워크(Fine Works)’나 최근의 ‘화이트 노이즈’에서도 드러나듯 작품의 제목이나 전시의 제목에 중의적 표현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LEE : 전시 부산물들이 버려지게 되는 것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정형은 그것들을 예술로 선보인다.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기본 조건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LCH : 누군가의 가치부여인 것 같다. 나의 작업은 버려지는 것들에 가치(의미) 부여를 하고 명명하는 거다.

LEE : 연결되는 질문이다. 작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LCH : 내 기준에서 작가는 그냥 본인의 큰 이야기부터 작은 이야기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본인의 관심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보여줄 수 있다면 작가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좌대위에 좌대위에 좌대 Pedstal on pedstal> pedstal from exhibition site, variable dimension, 2018 ⓒ이정형

LEE : <쌓인 좌대>(2018), <좌대 위에 좌대 위에 좌대>(2018)에서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현장 콜렉션>(2016)의 신발에서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집한 오브제들에 제목을 붙이고 그것들을 설치할 때 미술사적인 부분들을 염두에 두는가?

LCH : 한동안 조각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브랑쿠시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차용도 많이 하는 편이고, 미술사적인 부분들도 생각한다. 실제로 <현장 보고서>를 보면 미술사적인 부분과 직결되는 내용이 많이 적혀 있다. 그런데 반 고흐는 아니었다.

LEE : 일반적으로 벽화는 큰 규모, 현장성, 그리고 이동의 불가능성 등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동형의 <벽화>(2014~2017)는 언제든 이동하고 소유할 수 있다. 사진을 보고 그렸나? 아니면 기억에 근거해서 그렸나?

LCH : <겹쳐지는 지점> 사진을 보고 그렸다. 사진의 모든 부분을 다 그리진 않고 특정 요소들을 선택하거나 편집한다. 현재까지 약 30점 정도 작업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우주먼지 Stardust> single channel video, 3mins 15sec, 2015 ⓒ이정형

LEE : <우주먼지 Stardust>(2015)는 어떤 작품인가? 매우 감성적이다.

LCH : 설치 작업 중에 프로젝터를 켜면 가장 먼저 파란 이미지가 뜨는데, 거기에 비친 먼지를 촬영한 것이다. 전시에 쓰일 프로젝터를 세팅하고 있었는데 당시 옆에서 목공사를 하고 있어 먼지가 정말 많았다. 먼지가 프로젝터의 파란 불빛에 비쳐 먼지의 움직임이 보이는데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서정적이면서도 거친 것에 관심이 많다. 때로는 직접적이기도 하고 은유적이기도 한 표현을 좋아한다.

LEE : <화이트 큐브>(2015)는 관객들이 만나는 전시장, 미술관의 이면을 드러낸 것이다. 전시 뒷면의 모습이다. 연극 무대의 뒷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나? 이 사람은 무엇을 상징하나?

LCH : 당시에 ‘기관 없는 신체’에 관심이 많았다. 또 현장 설치 중에 일하는 사람들의 몸 일부가 잘려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개인적 유머 코드이기도 했다.

LEE : 모든 작품(시리즈)들은 현재 진형형인가?

LCH : 지속하는 부분과 변화하는 부분이 함께 하는 것 같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이어진다. 전시 ‘화이트 노이즈’에서 선보였던 <천장이 천장을 볼 때 When the ceiling sees the ceiling>(2019)의 경우, 전시를 마치고 보니 아마도 예술 공간에서의 작업이 변형, 발전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조명 3개가 벽을 비추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공간 장악력과 규모가 커졌고 시스템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작업의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나의 성장에 따라 아이디어가 주변 상황, 환경의 영향 속에서 지속되거나 변화하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