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4.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 이정윤』 (2020)의 「대화」 (pp.31-68.)를 바탕으로 합니다.
「대화」 는 이문정과 이정윤의 대화를 녹취, 타이핑하여 편집, 정리했으며 정리된 내용에 대한 작가의 확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작가 이정윤(Lee, Jungyoon)

LEE : 이문정, LJY : 이정윤

LEE : 이정윤 작가와 처음 만난 것은 2011년 초이다. 같은 해 열렸던 개인전 ‘A TRUNK’의 전시 서문을 쓰게 되면서 작업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당시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라는 소재가 상당히 강하게 다가왔다. 2009년 전시 [Sad Elephants]에서도 코끼리와 하이힐이 등장한다. 그런데 작업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코끼리보다 하이힐이 먼저 등장했다. 언제부터 하이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LJY : 대학교 졸업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중 발처럼 생긴 새장이 있었다. 아마 그때 이미 인체의 발 부분, 특히 이동 수단으로서의 발, 그리고 갇혀 있는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는 손가락이 바닥을 딛고 있는 형상을 만들었다. 매우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손가락이었다. 의식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구두와 닮기도 했다. 미국에서 작업하면서 내가 만들었던 구두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내가 왜 무거운 재료로 바닥에 손가락이 닿은 채 부들거리고 있는 손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자유롭지 못한가?’였다. 구두처럼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집중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 2003년 경이었다. 당시 뉴욕의 거리에서 정말 많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던 경험도 작업에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는 너무 높은 하이힐을 신어 걷기 힘든데도 매우 씩씩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서 착안해 제작한 것이 애니메이션 <Hi! heels>(2003)이다. 당시 지도 교수님과 ‘힐’이 ‘heel’과 ‘hill’로 동시에 들릴 수 있어 하이힐뿐 아니라 오르기 힘든 언덕, 고집스러운 남성, 치유 등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재미있는 단어라 생각했다.

<Exquisite Pain> 시퀸즈, 압정, 10x25x7cm(each), 2005 ⓒ이정윤

LEE: 하이힐이다 보니, 그리고 많은 경우 분홍색 하이힐이다 보니 편견일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여성성과 연결되는 것 같다. 이 경우 페미니즘적인 메시지와 연결되는 작업처럼 보일 수 있다.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방향은 다양하다. 그런데 시각적인 결과물을 놓고 이야기할 때는 정형화가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도, 작품을 분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주제다.

LJY : 나는 코끼리가 여성으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제로 관객들도 여성으로만 읽지는 않는다. 그냥 ‘코끼리가 하이힐을 신었구나’라고 인지하지 굳이 여성 코끼리가 하이힐을 신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육중한 몸을 가진 코끼리가 하이힐을 신고 힘들어하는 상황이 전하는 시각적인 통증을 전달받는 관객들도 꽤 많다.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가 자기 같다고 느끼는 남성 관객을 만난 적도 있었다. 하이힐은 사회적인 틀, 벗고 싶지만 벗지 못하는 프레임에 대한 것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과거 내 작업이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읽히는 게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수용하는 편이다.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하다. 또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현재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살고 있기에 실제로 삶 속에서 그와 관련된 고민도 많이 하고 있다. 어떨 때는 여성에게 부과된 틀을 깨뜨리려 하지만 또 어떨 때는 전통적이라 할만한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나 자신도 저항과 수용의 두 모습을 갖고 있다.
나의 가정환경만 생각해도, 아버지는 아직도 여성으로서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하신다. 또 여성에게 맞는 직업, 남성에게 맞는 직업을 구분하신다. 지금도 여성인 나와 남성인 동생에게 적용되는 집안의 규율이 다르다. 이런 것들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새장 위에 넥타이를 달아놓은 <Mr. Pink cage>(2015)라는 작품이 있는데 일정 부분에서 가부장적인 전통이 지속되는 현실에 여전히 갇혀 있는 내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이다. 나의 삶을 보면 예술가로서의 이정윤과 딸이자 어머니로서의 이정윤의 역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대단하게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욕구가 페미니즘적으로 읽힐만한 요소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LEE : 아버지(남성)로 보이는 코끼리도 제작했다.

LJY : 규모가 있는 작품으로는 두 점 있는데 눈물 흘리는 코끼리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노랑 코끼리다. 작은 인형으로 제작된 것까지 포함해 총 네 점이다. 최근에 제작한 작품은 없다.

LEE : 이정윤의 작품은 메시지가 꽤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관객들과 공감대 형성이 잘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품의 의미가 입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가 너무 뚜렷해서 그 이상을 상상하거나 연상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작품의 메시지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을 필요는 없다.

LJY :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쉽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질문인가? 누군가는 동물과 하이힐 같은 사실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작품에 담긴 개념이나 담론이 일차원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여러 겹의 의미가 담긴 것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거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다.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게 더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또한 나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작가는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일상에서 직접 경험하며 갖게 되는 관심사들, 내가 체험한 부분들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일차원적이지 않다. 아주 작은 사건들 안에서도 복잡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

LEE : 개인의 삶에 근거한 작업이라고 했는데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LJY : 나는 작업을 오래오래 길게 할 거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장거리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8년 ‘하이힐’ 시리즈를 시작한 이후 ‘코끼리’ 시리즈, ‘Round Trip’, ‘넥타이 프로젝트’, ‘Portable Museum’, 선인장 시리즈 등으로 작업이 확장되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모두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작업들의 흐름을 보면 이정윤의 성장기이다. 내 삶의 변화들이 깊게, 그리고 솔직하게 반영되어 있다. 개별 작품 하나하나도 말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들이 모여 내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Drop the yellow trunk> Drawing on paper, Mixed media, 70x100cm(each), 2014 ⓒ이정윤

LEE : 작업 전체가 작가 개인의 성장기라면, 물론 작품을 통해 관객이 유추할 수도 있겠으나 작업의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작가의 삶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정윤의 개인사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보통 자신의 삶이 작품에 반영된 작가들은 그와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뷰 등을 통해 공개한다.

LJY : 생각보다 말할 기회도 없었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나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평범하게 성장했다고 생각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나는 행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찌 보면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동양 철학자이자 역술인이다. 그러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남과 여는 엄격히 분리된다는 전통적인 규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자아이인 나는 어렸을 때 집에서조차 반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며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얼마 전 5학년 때 일기장을 보니 ‘나는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작가가 어려서부터 나의 꿈이었던 거다. 물론 예술가는 아버지가 용납하실 수 없는 직업이었다. 나는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지만 집의 규율을 그저 따르기만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5학년 때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주관 전국소년과학경진대회 과학상상그림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뒤 서울로 보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고 2년 뒤 옷 장사를 하시는, 늘 바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이모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이모, 사촌 언니들과 함께 살게 된 거다. 이모의 가정은 우리 집과 완전히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언니들과 함께 공부하고 놀면서 또래 집단과 어울리며 자랐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갔다. 대학에 가서도 수업보다는 연극 무대를 따라다니고 소품디자인이나 분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4년을 보냈다. 3학년 2학기 때 서양화 전공에서 조소 전공으로 전과했는데, 무대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평면 작업에 흥미가 없어져서였다.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가보니 대부분의 수업이 토론식이었다. 교수님들은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발전시켜주려 했다. 그런데 당시 교수님과 동료들과의 대화 도중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내가 선택하는 오브제나 재료들이 여성적이라 할만한 것들이었다. 또 내가 당시 관심을 보였던 하이힐이나 전족이 상징하는 페미니즘적인 이슈들은 그들에게 이미 꽤 지난 과거의 것이었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적인 화두로 그와 같은 소재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LEE : 이정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소재는 코끼리이다. 나에게는 하이힐보다 더 강하게 각인된 이정윤의 아이콘이다. 코끼리는 공기조형물로도 제작되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코끼리도 등장한다. 모터가 있어 움직이기도 하고, 야외에 설치되어 미술관에 오지 않은 관객들과도 만난다. 코끼리 공기조형물의 시작과 제작 과정을 듣고 싶다.

LJY : 날아가는 코끼리는 애니메이션 <Hi! heels>의 끝부분에 처음 등장하는데 하이힐이 코끼리의 귀 같은 걸 달고 날아간다. 여기에서부터 코끼리 형상이 연상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코끼리가 직접 등장한 것은 2009년이다.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어린이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동화책에는 코끼리가 참 많이 등장한다. 아마도 모성애가 강하고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인간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느껴져서일 거다. 어떤 책인지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잠자는 아기 코끼리를 어미 코끼리가 쉬지 않고 서서 지켜주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늘 나만을 위해 살았었다. 그러던 내가 첫째를 낳아 기르고, 둘째를 임신하고, 나의 삶이 참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하던 때였다. 그런 나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의 활동을 잠시 접고 정주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심리적 동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코끼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말 많이 그렸다. 그런데 이미지를 그리다가 크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현재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지만 나 대신 코끼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동하는 코끼리를 어떻게 표현할지 계속 고민하던 중에 주유소에서 춤추는 풍선 인형을 발견했다. 순간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코끼리 풍선을 만들어줄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드로잉 속 코끼리를 유토로 만들어서 들고 다니며 문의했는데 계속 거절당했다. 일반적인 풍선 인형은 정해진 디자인을 찍어내면 되는데 나의 풍선 인형은 여러 단계의 공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에어바이블(Airbible)의 박원석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공학도 출신이었는데 3D 스캐너를 이용하면 도면을 만들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유명해지면 더 많이 달라며 제작 비용도 내 형편에 맞게 배려해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실제 제작 비용의 1/3 정도의 금액으로 첫 코끼리 풍선 인형을 만들 수 있었다.
풍선 인형의 재료는 낙하산을 만드는 천처럼 방수, 방염 처리가 된 PVC 섬유로 현수막보다는 질기다. 그 천에 내가 그린 드로잉의 색을 인쇄하고 도면을 입혀 봉제 인형을 만들듯이 제작한다. 조형물이 완성되면 내부(주로 엉덩이나 코 등)에 모터를 심는다. 모터를 통해 바람이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모터로 작품마다 움직임을 조절한다. 예를 들어 바닥에 누워있는 코끼리는 다가가면 숨 쉬는 것처럼 보이게 설치한다.

LEE : 이후에도 코끼리 공기조형물을 꾸준히 제작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재료로 만들 생각은 없는가? 아무리 튼튼한 천이라 해도 보존력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LJY : 나는 속이 텅 빈 풍선인 게 좋다. 또 바람을 빼면 작아지니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닐 수도 있다. 이런 점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잘 맞는다. 예전에 고무풍선도 알아봤었는데 보존력이 약하고 형태적으로도 세부 디테일이 잘 안 나왔다. 합성 섬유이기 때문에 영구성에서는 당연히 떨어질 수 있다. 더군다나 바닥에 놓기도 하고 야외에도 설치하기 때문에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최대 2년 정도 유지된다고 보면 된다. 낡아서 더 사용하기 힘들면 동일한 형태로 재제작한다. 연도는 첫 작품 제작의 연도를 쓰고, 버전(version)으로 구분한다.

LEE : 보는 사람이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

LJY : 찢어져서 바람이 다 새버릴 것 같은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나 자신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무엇 하나 견고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왔다. 가치, 진리도 고정되거나 정주하는 게 아니라 허물어지기 쉬운 것 같다. 그것이 위태롭다고 느낄 수도 있고 유동적이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LEE : 야외 설치를 하다 보니 작품의 파손도 생각해야 할 문제다.

LJY : 예전에 바닷가에 설치했을 때 태풍에 작품이 통째로 날아간 적이 있다. 모터만 남고 코끼리 인형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보험계약을 안 해서 권리를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부터 보험은 반드시 든다.

LEE : 전시를 마치고 나면 세척이나 작품 보관은 어떻게 하는가?

LJY : 중성세제를 사용해 세척한다. 완벽히 깨끗해지지는 않고 흔적이 남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그와 같은 흔적 모두가 작업의 과정이다. 관객들이 참여해 그 흔적이 남은 작품은 모두 작가 소장으로 보관하고 있다. 작품이 판매될 경우 새로 제작한다. 보관은 차곡차곡 접어서 전용 가방(보따리)에 넣어둔다.

<Mr. Kim’s Private Vehicle: U.F.O.> PVC, Inflatable, LED, 160x160x100cm, 2017 ⓒ이정윤

LEE : 언젠가부터 참여와 소통이 강조되는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고 있다. 벗이미술관에서 열렸던 [DREAMING VERSI-이정윤_유은석 2인전](2017)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Mr. Kim’s Private Vehicle: U.F.O.>(2017)가 인상적이었다. 전시장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도 관객 참여형 작업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LJY : 아트 브뤼 아티스트(Art Brut Artist) 양성프로그램으로 당시 용인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 6~7명을 2주에 한 번씩 만나 미술 수업을 진행했다. 총 10회 수업이었다. 그 결과물을 병원에서 운영하는 벗이미술관에 전시했다.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환자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을 찾는 프로젝트였다. 치료는 아니지만, 치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내가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환자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주는 사람이니 나를 좋아했을 것이다.
<Mr. Kim’s Private Vehicle: U.F.O.>는 나와 수업을 할 때 항상 유에프오(UFO)를 타고 온다고 말했던 환자가 그려준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환자는 매일 내 수업 시간에 유에프오를 타고 온다고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려보라 했더니 매번 같은 모양의 유에프오를 그렸다. 유에프오를 운전해주는 기사의 모습도 그렸다. 또 다른 환자는 까만 새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매번 지각한다고 하며 문제의 까만 새를 계속 그렸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검정색의 새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귀여운 새였다. 환자마다 표현하는 방식이나 언어가 모두 달랐다. 한 환자는 파랑을 분홍이라 부르며 파란색으로 분홍이란 글씨를 썼다. 그래서 바나나 블루라는 노란 파란색을 만들기도 했다. 색의 이름은 교육의 결과이자 약속이다. 이 사회는 규칙으로 가득하다. 어찌 보면 내가 만났던 환자들은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예술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병원에 입원했고 세상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나는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와 연결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이 그들이 그린 그림 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전시를 통해, 미술을 통해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LEE : 환자들이 결과물을 보았는가?

LJY : 봤다. 그때 함께 하지는 않았고, 이후에 그들의 반응을 전해 듣었는데 정말 좋아했다고 하더라. 나는 그들이 그림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여행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흔치 않은 무대였다.

<Recollection> 현수막 천 위에 환우들의 그림 이미지 실사 출력, 6x6m 공간 내 설치, 2017 ⓒ이정윤

LEE : 최근 어린이 관련 전시에 많이 참여했다. 혹시 그것이 한계로 다가오지는 않는가?

LJY : 어린이만큼 아무런 편견 없이 미술을 받아들이는 계층도 없다. 어린이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내가 자극받는 부분도 많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편하게 미술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이것도 내 삶의 반영이다. 전시 의뢰가 들어왔을 때 어린이미술관인지 아닌지는 선택하는 데에 있어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시 장소, 환경이 중요하다. 나의 작업에 대한 맥락을 무시한 채 그저 코끼리를 만들어달라는 식의 제안은 거절한다. 내가 그저 동물을 만들려고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LEE : 시각적인 결과물이 상당히 유희적이고 놀이로서의 미술을 체험하게 하는 것 같다. <Portable Museum>(2014)이 대표적이다. 누군가는 의미를 찾고 누군가는 놀이터에 온 것처럼 즐기다 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 감상하는가는 관객의 자유이다. 그러나 모든 작품에는 작가가 관객들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담긴다.

LJY : 관객들이 어떻게 느끼는지까지 조절하고 싶지는 않다.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내 작업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낯선 장소로 즐거운 여행을 온 것처럼 일상이 조금 달라 보이는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 내 작업을 통해 관객들 본인이 가진 삶의 단어들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LEE : 넥타이를 이용한 <Silkroad>(2015)는 대중들의 넥타이 기부로 이어졌다. 몇 명 정도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LJY : 최초 참여자는 약 50여 명이었고, 이후에는 불특정 다수와 진행해서 정확한 수를 말하기는 힘들다. 맨 처음에는 SNS를 통해 안내하고 기부받았다. 프로젝트를 기억하고 꾸준히 넥타이를 보내주는 분들도 있다. 총 16m의 길이가 된 지금은 총 몇 장의 넥타이인지 개수를 세기 힘들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약 600여 개 이상의 넥타이들이 연결된 작품이다.

LEE : 넥타이도 하이힐의 연장선인가? 공적 관계, 업무, 규칙 등이 생각나는 아이템이다.

LJY : 하이힐과 비슷한 점이라면 패션 오브제이고 편한 장소에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언가 긴장해야 하거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에서의 필수품이다. 사무실에서의 필수품이기도 했는데 최근은 출근할 때의 복식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역시 하나의 규칙이자 틀이다.

LEE : 넥타이를 굳이 손바느질로 연결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여성 작가의 바느질 작업을 보면 여성의 영역을 다루려 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그 위를 걷게 만든 이유도 궁금하다. 규범을 상징하는 넥타이 길을 밟으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될 것 같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여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같다.

LJY : 나의 어머니와 둘이 꼬박 두 달 동안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정말 힘들었다. 이상하게 직접 하고 싶었다. 또한 넥타이를 하나씩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넥타이 100장을 바느질로 엮더라도 누가 바느질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색을 조합하고, 시각적인 효과도 생각하고, 직관 같은 것들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선택하고 조율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치유나 여성성을 생각하고 바느질이나 섬유(넥타이)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매듭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보낸 넥타이를 엮어 길을 만들었다. 각자의 삶이 담긴, 삶의 많은 순간을 같이 한 넥타이다. 따라서 <Silkroad>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공간이 공존한다. 무수한 시공간이 쌓인 길 위를 걷는 누군가의 삶 역시 넥타이 위에 계속 축적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매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끝없이 이어진 넥타이 길을 맨발로 걸을 때는 낯선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의 목에 메어 있던 넥타이 위를 밟으며 다른 사람의 삶 위를 걸어가고 있는 느낌, 다른 사람의 시공간에 침투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Silkroad>에는 분명 치유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Silkroad> 기부받은 넥타이, 160x1600cm, 2015 ⓒ이정윤

LEE : 신발을 벗고 걷는다고 해도 관객들이 그 위를 걸으면 작품이 훼손될 수 있겠다.

LJY : 물론 더러워지고 밟은 흔적이 남기는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LEE : 혹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흔적이 남은 그대로 벽에 걸 생각은 없나?

LJY : 그것도 전시와 보관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아마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현재로는 관객들이 걷게 하고 싶다. 그 위에서 무용가가 춤을 추고 연극배우가 걸은 적도 있다. 최종의 전시 방식이 벽이 될지, 바닥이 될지는 생각해봐야겠다.

LEE : 혹시 앞으로도 <Silkroad>를 이어나갈 생각인가? 넥타이를 더 이어붙일 계획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이다.

LJY : 그렇다. 앞으로 더 길게 만들 의사가 있다. 나의 작업 대부분은 진행형이다.

LEE : 지금까지 사용한 것 외에 다른 매체로 작업할 계획은 없는가?

LJY : 유리로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 유리로 형상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LEE : 유독 관리하기 힘든 매체를 선택하는 것 같다. 특히 유리는 깨질 것 같아 불안한 재료이다. 무게감이 상당한데 파손의 위험이 높아 설치할 때에도, 또 설치 이후에도 관리가 힘든 재료이다.

LJY : 어떻게 보면 내가 부서지기 쉽고 섬세한(fragile) 부분에 집착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글래스 블로잉(glass blowing)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배울수록 유리라는 재료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유리는 열을 받으면 액체가 된다. 또 식어서 완전히 고체가 된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는 움직임이 계속된다. 유리에는 운동하는 성질이 있다. 한편 단단함에도 깨지기 쉽다는 유리의 성격은 내가 벌룬(balloon) 코끼리를 만들었을 때의 느낌과도 닿아 있다. 벌룬은 바람이 가득 차면 커지지만 바람이 빠지면 굉장히 빨리 수축한다. 형태가 유동적이다.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은 유리가 깨질 것과 같은 불안함과 연결되기도 한다. 둘 다 ‘아차’ 하는 순간에 바람이 빠져 주저앉거나 깨질 수 있는 상태여서 현대인을 대입할 수 있는 재료이기도 하다. 나는 작품을 반드시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래서 재료를 선택할 때 보존의 용이성이나 영구성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Code green: 사라지는 노래, 살아지는 노래> Glass, Plants, Fusing, 30×30cm, 2020 ⓒ이정윤

LEE : 작업을 하는 과정이든, 일상의 삶에서든 감정적이고 섬세한 편인가? 드로잉 작업에서 서정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또한 첫인상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업인 것 같은데 볼수록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업이다. 앞서 작품에 자신의 삶이 반영된다고 했다.

LJY : 그렇다. 사람들이 나를 처음 보고 받게 되는 인상과 달리 감정적이고 눈물도 많다. 나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처럼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드로잉을 하다가 울 때도 있다. 사실 드로잉을 할 때는 정말 솔직한 상태다. 그래서 드로잉에는 나의 감정과 내면에 담긴 무언가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담긴다. 나에게 있어 작업, 특히 드로잉은 작가이자 개인으로서 삶의 균형이 안 맞아 힘들거나 어긋나려 할 때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들의 균형을 잡으려면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거나, 작업에 관한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게 삶을 견디는 원동력이자 에너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것이 나에게만 빠져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에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주변, 내가 머물고 거쳐 간 지점들, 내가 속한 사회에 주목하게 되고,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내가 50대, 60대가 되었을 땐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고 그땐 변화된 또 다른 상황이 작품에 반영될 것이다. 특정한 이슈나 키워드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작품에서 드러나고,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된 것이므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LEE : 마치 작가의 무의식이나 상상이 증식된 것처럼 이미지가 증식된 드로잉(회화)들이 있다. 혹시 처음 생각한 이미지에서 시작해 자동기술법처럼 비계획적인 형태가 발전하는 방식으로 드로잉을 진행하는가?

LJY : 드로잉을 할 때 고정된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리지 않는다. 2009년부터 옻칠 장지를 사용하는데, 종이마다 그 얼룩이 모두 다르다. 종이를 벽에 걸어놓고 얼룩에서 떠오르는 형상들을 그리면서 드로잉을 시작한다. 마치 자유연상 하듯이 생각을 펼쳐낸다. 드로잉들이 쌓이면 그중 하나가 입체 작업으로 발전한다. 물론 드로잉을 그대로 재현하진 않는다. 입체 작업의 원천(바탕)을 제공하는 정도라 생각하면 되겠다.

LEE : 장지(한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LJY : 장지를 처음 봤을 때 거친 살갗 같은 느낌이었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보니 표면이 코끼리 피부 같았다. 인간의 피부 같기도 했다. 100% 장지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지를 선택했을 때 만족도가 높다. 물감은 아크릴 물감이나 과슈(Gouache)를 많이 쓰는데, 동양화 물감, 석채(石彩)도 쓴다.

LEE : 액자를 하지 않으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도 같은데 대부분의 드로잉은 액자를 해서 전시한다.

LJY : 아무래도 액자가 있어야 작품 보관, 이동 등에 용이하다. 그러나 단지 효율성 때문에 액자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액자 처리가 되어야 더 돋보이는 작품이 있다. 반드시 액자에 넣어야 한다, 아니다를 정하지 않았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결정한다. 핀으로 고정해 전시하기도 한다.

<Traveling Cacti> Drawing on Paper, Mixed media, 46x68cm, 2018 ⓒ이정윤

LEE : 코끼리 작업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하면서 동화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면 이정윤의 작업은 동화 혹은 그림책 같기도 하다.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 (1972), 『아낌없이 주는 나무 The Giving Tree』 (1964), 『얼굴 빨개지는 아이 Marcellin Caillou』 (1969) 같은 책들이 떠오른다. 어린이도 읽을 수 있지만, 어른들에게도 울림을 주는 동화, 나이대에 따라 다른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혹시 작업에 영향을 끼친 책이 있는가?

LJY : 내 작업이 동화책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그린 것은 아니다. 내가 만약 동화책을 만든다면 글씨 없는 동화책을 낼 것 같다. 언젠가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평상시에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문학, 철학, 과학 서적까지 다양하게 보고 있다. 특히 문학 작품을 많이 읽고 있다. 그전에는 미술사, 미술 이론 책들을 읽으며 ‘내가 어디쯤 서 있을까? 이론적으로 내 작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했었다.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읽고 있는 책은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1943)이다.

LEE : 대화를 나눌수록 작업에 이정윤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삶의 기록이 작품으로 연결된다. 아예 일기처럼 내러티브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작업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LJY : 2012년의 개인전 [아임 플라잉 나우 33 I’m Flying Now 33]에서 일기장을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 준비 초반에는 전시할 만큼의 일기를 찾는 게 무리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찾다 보니 일기가 너무 많았고 전시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러나 일기 혹은 작가 노트를 그대로 공개하면 필요 이상으로 친절해지는 것 같다. 작가의 성장기를 글로 다 보여주면 관객들이 그것만 읽고 끝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조심스럽고, 당분간은 공개할 계획이 없다. 나의 일상과 삶 등이 담긴 글들을 지속적으로 공개하면 오히려 감상의 범위가 제한되고 상호작용이 줄어들 것 같다. 일방적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끝낼 위험이 있다.

LEE : <Round Trip>(2012~present), <Traveling Cacti>(2018) 등에서 등장하는 여행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관객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삶의 여정, 인생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현실을 잠시 벗어나는 상상으로의 여행도 가능하다. 노마디즘(nomadism)을 떠오르게도 한다.

LJY :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노마디즘, 유동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평상시에 하는 생각들이 노마디즘으로 이어진다. 그밖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떠남의 은유일 수도 있다.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고, 심지어 새로운 것이 없을지라도 찾으려 하는 현대인의 삶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무언가 계속 부족하다고 느끼고 무언가를 갈구하고 찾는 나의 심리 상태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LEE : <Round Trip>은 작가가 만든 코끼리 봉제 인형을 만들어 신청자들에게 분양한 뒤 전시에 맞춰 잠시 되돌려받아 전시하는 프로젝트이다. 인형 대신 인형이 찍힌 사진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전시가 끝나면 인형은 다시 신청자에게 보내진다. 작업을 마주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현실적인 어려움이었다. 그 많은 인형을 주고받는다는 것도 어렵지만, 분양받은 사람들이 작가에게 보내주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LJY : 관리가 쉽지는 않다. 실제로 해보니 나 혼자 관리가 가능한 최대치는 한 250개인 것 같다. 그 이상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한 번 더 전시하고 싶다. 코끼리 인형을 분양한 뒤 시간이 흐를수록 되돌려받기가 힘들어진다. 한편으로는 돌려받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Round Trip>의 과정 그 자체, 나의 분신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여행이라는 작품의 의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인형을 통해 참여자와 내가 만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다.

LEE : 현재 총 몇 개의 코끼리 인형이 분양되었는가? 그리고 입양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LJY : 총 350개의 인형을 제작했고 현재까지 거의 다 분양되었다. 2012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SNS를 통해 30개를 분양했다. 같은 해 10월 첫 번째 분양했던 인형들을 되돌려받아 전시했고, 전시 기간 동안 두 번째 분양을 했다. 총 200개였다. 2013년 [re: union]전을 하면서 오프라인에서 두 번째 분양을 진행했고, 이때 50개 이상 분양했다. 이후 2014년, 2017년 진행했던 전시에서도 분양했다.

LEE : 전 세계로 코끼리 인형을 보내려면 운송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LJY : 2011년도에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코끼리 벌룬이 여행을 떠나는 기획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도 함께 여행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대한 코끼리만 어디론가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분신과 같은 인형을 만들어 세계 곳곳에 여행을 보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 거다. 처음에는 전부 자비로 보냈다. 공모에 지원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시작해야 했다. 하얀 몸을 가진, 표정이 없는 백지와도 같아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지만 나의 사인과도 같은 하이힐을 벗지 못하는 코끼리 봉제 인형을 만들었다. 봉제사와 협업으로 봉제 인형 패턴을 디자인하고 실용신안 디자인 특허를 냈다. 10개까지는 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초기 샘플인 손으로 만든 인형을 다시 뜯어 패턴을 수정하여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후로는 봉제 인형 공장에서 생산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가능했나 싶다. 비용적인 측면뿐 아니라 인형을 제작하고, 포장하고, 보내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을 말하는 거다. 반드시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모든 현실적인 힘듦을 덮어버렸다.

LEE : 코끼리가 작가만의 작품이 아니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다시 모아서 전시하는가? 본인의 사인과도 같은 하이힐도 신기고, 사실 누가 봐도 이정윤의 코끼리이다. 어느 정도는 내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흔적을 모으고 있다.

LJY : <Round Trip>을 처음 시작했을 땐 나의 작업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와 잘 지내고 있는 인형을 굳이 돌려달라고 해서 전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잘 지내고 있는 인형들이다. 나를 대신해 누군가의 일상에 들어간 코끼리의 몸에 그림이 그려지고 글씨가 적히는 작품들에 나만의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바뀐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되돌려받는 것에 대한 집착이 점점 사라졌다.

<Round Trip> installed in 4mx3m, Returned elephants, Parcel box, Documentation, 2012 ⓒ이정윤

LEE : 처음 입양 받을 때의 약속과는 달리 연락도 없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LJY : 실제로 완벽히 지켜지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 이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는 삶의 태도일 수 있겠다. 내가 안 보내면 다른 사람이 보내겠지라는 책임 전가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가 선택지를 여유롭게 줬다. 실물 혹은 사진과 같은 기록을 보내 달라고 했다. 인형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여러 선택지를 줬으니 큰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근데 앞서 말했듯 지금은 ‘되돌려받는 것 자체가 작품의 큰 맥락에서 필수적인 중요한 절차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LEE : 관객 참여형 작업의 경우 어떤 점에서는 결과물에 대한 작가의 영향력이 약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품의 시각적인 완성도를 기대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미술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부분도 염두에 둬야 한다.

LJY : 미술인 혹은 예술인이 아닌 대중들과 함께 하는 작업의 경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작가인 내가 관여하는 부분이 크다. 또한 아무리 결말을 열어 둔다 하더라도 작가의 취향이나 계획이 담길 수밖에 없다. 나는 관객 참여형 작업이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작업과 관련된 시각적인 자료들을 모두 기록하고 수집한다.

LEE :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돌진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질인가? 그 정도는 실천해야 작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LJY : 모든 프로젝트는 당시 그것을 안 하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어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간에서부터 체력과 비용 등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멈추지 않고 있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말이다. 작가마다 그 방법은 모두 다를 것이다.

LEE : 이정윤의 작업은 미술관 밖의 미술이지만 미술의 형태를 공고히 지킨다. 장르 해체도 미술 안에서만 이뤄진다. 기본적으로는 누가 봐도 미술이라는 범주를 정확히 지키는 것 같다. 다른 영역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때에도 본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예 미술 밖으로 나가볼 생각은 안 했나?

LJY : 나 자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다. 원 없이 자유로운 것 같고 경계를 해체할 것 같지만 규율이나 프레임을 강하게 확립하고 있는 것 같다. 프레임의 구석을 조금 허무는 정도이지 완전히 깨뜨리지 않는다. 일상의 삶도 그렇다. 아버지의 규율을 완전히 거부하고 사회의 규범을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등을 매우 열심히 지키며 살고 있다. 내가 속한 단체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미술도 내가 생각해 놓은 미술로서의 모습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일부러 혹은 억지로 지키려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작업이 그런 것이다. 이 정도까지의 선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내면 깊은 곳에 갖고 있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경계에서 주춤거리는 상태이다. 현실에 온전히 발을 딛지도 않고, 환상의 나라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

LEE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여행용 가방 The Box in a Valise>(1935-1941)에서 착안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미술관인 <Portable Museum>을 제작했다. 작품의 제목 등에서 말장난이나 동음이의어 등을 사용하는 것도 뒤샹의 영향인가?

LJY : 일정 부분에서 그런 것 같다. 트렁크(trunk)에는 나무, 몸통, 여행 가방, 코끼리 코 등의 뜻이 담긴다. 똑같은 단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도 재미있다.

LEE : 코끼리 벌룬을 비롯한 대형 설치물을 오래 보다 보면 시각적인 예리함이 부족해 보인다. 규격화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재단이 조금 뭉툭하게 된 것도 같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라 시각적인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드로잉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 것일까?

LJY : 나는 컴퓨터로 그리지 않고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유토로 만들고, 그것을 스캔해 벌룬을 만든다. 때로는 드로잉에서 바로 3D 모델링 작업을 통해 입체가 되기도 한다. 아마 그런 작업 과정의 결과물이서 그와 같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Sleepless Cacti> drawing on paper, mixed media, 36x24cm, 2017 ⓒ이정윤

LEE : 최근 작품에 선인장이 추가되었다. 사막에 묵묵히 서 있고, 가시가 있어 위협적인 것 같지만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식물이라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알록달록한 모양이 마치 뱀 같기도 하다.

LJY : 공기조형물로 만든 선인장은 가시가 없는, 방어기제를 갖지 못한 선인장이다. 그런 선인장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반응을 크게 안 할 뿐이지 나는 상처도 많이 받고 예민한 부분도 많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감성적인 부분의 비중이 큰 사람이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뱀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위장술이다. 괜찮아 보이려고 위장한 상태의 선인장이다. 가시 대신 알록달록한 색으로 나를 가린 것이다. 물론 작업할 때는 의식하지 못했고 다 완성한 후에 생각한 거다. 유독 ‘선인장’ 시리즈에서 다양한 색이 등장했다. 사실 굉장히 힘든 시기의 작업이다. 남들에게는 경쾌, 유쾌한 이미지로 읽히겠지만 그림을 그릴 때 나의 심리적 상태는 우울함이었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선인장들은 모두 땅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정주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내 생각과 내면은 늘 이동했으면 좋겠다. 드로잉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선인장이 증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조그만 여행 가방에서 시작했는데 아마 나중에는 여행 가방보다 훨씬 커진 선인장이 만들어질 것 같다.

LEE : 어찌 보면, 진짜 미술을 통한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이정윤의 작업에 눈길을 못 줄 수 있다. 관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Round Trip>도 그렇다.

LJY : 개인적 생각이지만, 나는 소외 지역, 혜택을 못 받는 계층과 같이 범주를 정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사람들이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지역을 실제로 가보면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이 일반적이라고 믿는, 혹은 행복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에서 볼 때 그들이 불쌍해 보인다고 그들이 불행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더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으로 느끼는 부분일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들을 소외된 사람이라 규정하고 그들을 위해 치유의 미술을 하는 식의 작업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여력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치유의 감정을 느꼈을 수는 있지만 사실 <Round Trip>의 경우 타인보다는 나에게 초점을 맞춰 시작한 작품이었다. 나를 대신할 인형이 이 세상 곳곳에 머무른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인형에 남겨지는 기록들이 하나의 드로잉처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의 의도가 그랬다. 코끼리 인형은 내 존재를 증명하는 분신과 같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받고 변화하는 삶을 살아왔다. 타인의 치유를 위한 작업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실제로 이 작업을 진행하고 심리적인 욕구가 상당히 많이 해소되었다. 아마도 내가 치유되는 과정 위에서 내 주변을 치유하고 더 넓게 적극적으로 예술을 공유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LEE : 협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아트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LJY : 상업적인 협업은 2017년 닥터자르트(Dr.Jart+)와의 작업이 유일하다. 무엇보다 작품이 설치되는 ‘플래그십 스토어 필터스페이스 인 서울’, 그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국내에서 가장 깨끗한 물과 공기를 전시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는 새로운 물을 찾아 떠나는 존재로 코끼리를 제작했다.

LEE : 작품에서 여행이란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작가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LJY : 매일 보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여행이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도 여행이지만 문을 열고 나가 나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도 여행이다. 사람들이 그런 여행 속에 들어서게 하는 매개자가 작가 이정윤의 역할이다.

LEE : 드로잉 속 모자 이미지가 눈에 띤다. 새롭게 등장한 이정윤의 아이콘인가?

LJY : 누군가 머리에 쓴 모자를 들어보면 모자를 쓴 사람의 생각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때론 모자 속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특히 드로잉 할 때 많이 하는 생각이다. 『어린 왕자』 의 영향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요즘은 유리로 모자를 만들고 있다.

LEE :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함께 꾸준히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어떻게 함께 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과 과정이 궁금하다.

LJY : 2013년 부산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내가 지역예술가로서 지원받기 바로 직전에 지원을 받았던 분야가 공연예술이었다. 부산문화재단이 가교가 되어 자연스럽게 공연예술 종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관계를 유지하던 중 예술가들이 함께 협업하면 어떨지 제안을 했는데 다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다. 인연을 지속하다 보니 현대무용가, 음악가 등으로 참여자가 늘어났고 프로젝트 때마다 자유롭게 일정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진행한다. 현재 기본 구성원은 한국무용가 박연정(이팝무용단 대표), 서덕구(서덕구힙합댄스스쿨 대표), 안정아(가객, 2015 국가 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김상은(재즈 바이올리니스트) 등이다. 지속성을 갖고 있으며 잠정적으로 우리는 한 팀이라 생각하지만 모든 프로젝트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할 때 자유롭게 참여한다. 모두가 중심이 되는 공연이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의견을 내고 참여한다.

LEE : 공동 작업을 할 때 역할이나 권리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를 통솔하고 책임지는 리더가 있는가? 공연의 경우 전체 무대를 총괄하는 연출가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LJY : 정승재 감독이 무대감독이자 비주얼 디렉터도 함께한다. 나는 팀의 시각 예술가이자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들 한다. 설치물을 제공하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 때론 전체적인 윤곽을 구성하기도 하고 영감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규정하고 분담하는 것은 없다. 자연스럽게 진행한다. 한두 명의 주축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명이 공연 제안을 하면 원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진행한다. 또 다른 사람이 기획한 공연에 우리가 참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매번 중심이 바뀌고 그에 맞게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모두가 다 주체가 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리더를 정하고 역할 분담을 할 필요가 없다. 작업의 개념이 끌리면 참여하고 아니면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형편이 안 되면 빠질 수도 있고, 필요할 때는 새로운 참여자를 섭외할 수도 있다. 열린 관계다. 소속되고 구속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진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활동을 함께한 지 5년이 넘었는데 독특한 경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신이 더 부각되어야 한다는 욕망, 권한, 돈에 대해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일 거다. 자신의 분야는 잘 알지만 그 외의 영역은 잘 알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입장을 잘 들어주는 것도 큰 힘이다.

다원예술공연 <방 안의 코끼리> 시각예술 참여, 공연 전경, 부산 문화회관 대극장, 2020 ⓒ이정윤

LEE : 협업에서 퍼포먼스를 해본 적은 없는가?

LJY : 제안은 많이 받는데 아직까지는 없다. 가능성은 열어 두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아직은 할 마음이 없다. 또 여태까지의 협업 프로젝트에서 내가 필요한 장면은 없었다. 나는 무대에 설치되는 나의 작품으로 충분히 표현한 것 같아 굳이 무대 위에 오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LEE : 단독으로 퍼포먼스를 진행할 계획이 없는가? 잘 어울릴 것 같다.

LJY : 현재로서는 없지만 열망은 갖고 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으니 언젠가는 하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열정을 응축해서 쏟아내는 배우들을 보며 멋지다는 생각을 해왔다. 대학 때 뮤지컬이나 연극의 소품을 제작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데에는 무대 위의 배우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도 영향을 주었다. 무대 뒤에서 무대를 많이 봤다. 현재 하는 협업에도 도움이 되는 경험이다.

LEE : 현재는 스튜디오 붐빌(Studio Boomvill)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전에 복합문화공간이라 소개했었다. 작가의 스튜디오이면서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에서 시작하게 되었는가?

LJY :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열린 공간이라 보면 된다. 스튜디오 붐빌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작업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말하는 작업이란 특정한 물리적 형태의 결과물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예술가들과 협업하다 보니 살롱처럼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모여서 이야기하고 아이디어가 증식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술인이 아닌 사람이 들어와도 그동안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만의 예술적인 영감과 자질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건드려줄 수 있는 곳이길 바란다. 크진 않더라도 어떤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는 열린 공간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중심을 잡아주는 나만의 터전이 필요했다.

LEE :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다. 치안에 관한 걱정은 없는가?

LJY : 혼자 운영했다면 열린 공간은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작업실에서 항상 이재경 작가가 작업하고 있다. 앞서서도 이야기했는데 유리에 대해 배우고 싶었고 유리라는 매체로 작업을 확장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배울 장소와 시설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이재경 작가와 작업실을 합치게 되었다. 안정적으로 미술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도 이재경 작가와 공통점이 있었다. 이 공간에서 작업하고, 작가들과 함께 생각을 확장해나가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예술 기획 사업이라든지 스튜디오 붐빌 자체의 교육이나 행사 등을 진행한다. 상업적인 이윤을 목적으로 만든 공간은 아니지만 작가 역시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LEE : 스튜디오 붐빌을 운영한 이후 이정윤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작품의 수가 줄었다. 작업의 지향이 조금 바뀐 것 같다.

LJY : 스튜디오 붐빌이 안정되어 가는 시기였다.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투자한 시간이다. 변화한 만큼 새로운 방식을 설계해야 했다. 앞으로 물리적 결과물로서의 작품들은 계속 생산될 거다. 그리고 스튜디오 붐빌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작가 이정윤의 전시회는 줄었지만 내가 기획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한 횟수는 늘었다. 그동안 나는 작업량이 많은 편에 속하는 작가였다. 끝없이 작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조금 있었다. 스튜디오 붐빌을 준비하면서 조금은 내려두게 되었다. 제도권에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지금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 활동을 하든 10년, 20년 뒤에 결과물을 모아두면 이정윤의 작업이라 할만한 연결고리가 발견될 것이다.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가도, 설령 코끼리나 하이힐이라는 나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아이콘이 없어져도 이정윤의 색은 어딘가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다.

LEE :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LJY : 불안한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다음 작업의 방향이나 주변의 평가와 반응에 대한 압박이 없어졌다. 솔직히 말해 이전에는 인정과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내려놓으니 나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여태까지의 나의 모습에서 변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놓지 못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붙잡지 않아도 바뀌는 것은 없다. 오히려 욕심을 버리면 더 자유로워진다. 나의 변한 상황과 유리 작업을 연결할 수도 있겠다. 유리는 뜨거워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사실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사람이다. 이전에는 생각의 가지가 많아져 분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을 단순하게 해주는 것이 유리 작업이다. 요즘 하는 생각은 예술가로서 사는 게 작가 본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동시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LEE : 개인적으로 이정윤은 어떤 식으로든 예술 현장에서 활동할 작가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작업이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작업을 그만둬야 할 이유가 더 많다고 이야기했었다.

LJY : 한순간, 아주 잠깐일 수 있지만 작품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의 성취감과 기쁨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달리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힘듦을 견딘다는 표현은 안 쓰고 싶다. 사실 내가 가는 길에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있고, 꺼내 펼쳐 보이려 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한 점이 참 많다. 나를 생각하면 선인장처럼 증식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를 둘러싼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결과도 궁금하다. 그래서 협업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변화의 폭이 크든 작든 그 모두가 반영되어 결국 나라는 존재, 내 작업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