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15.

본 글은 2020년 7월 2일(목)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경미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이경미(Lee, Kyoungmi)

LEE : 이문정, LKM : 이경미

LEE : 작가 이경미는 고양이를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정한 아이콘 혹은 캐릭터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대부분 캐릭터가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중심에 놓인다. 그런데 이경미의 작품에는 고양이 외의 다른 요소들이 많다. 고양이에 모든 시선이 쏠리지도 않는다. 이경미의 작업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LKM :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우선 나는 고양이를 그리려는 욕구가 강해서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내가 기르던 고양이 나나(Nana)가 많이 아팠고 치료비가 많이 들어 어머니가 고양이를 포기하자고 하셨다. 어머니가 나나를 버리지 못하게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고양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관찰할수록 참 예뻤다. 초반 작업에서 고양이를 크게 그렸던 이유는 당시 학교 과제가 50호, 100호 크기의 작품을 제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극사실주의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과제의 기준을 맞추다 보니 세밀하게 그리게 되었다. 애초에 고양이만을 그리고 싶었던 것도, 고양이를 크게 그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 고양이가 계속 아프니까 마치 주술처럼 여기저기에 그려 넣은 것이다.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에서 고양이만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고 그것은 고양이 하나만으로 대체할 수 없이 복잡다단하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 평생 고양이만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고양이는 내 삶의 부분이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내가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며 에너지를 쏟는 대상과 나의 생각 혹은 마음이 어느 정도 일치해야 동기 부여도 되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다. 또한 내가 그리는 화면이 내가 그리는 세상과 어느 정도 일치해야 흥미도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만 강조되는 상황은 불편하다. 그래서 점점 고양이의 크기가 줄어들고, 다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같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간혹 고양이라는 키워드만으로 기획된 전시 제안이 올 때가 있는데 흔쾌히 응하지 않는 것도 고양이에만 집중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에 집중하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게 된 배경에는 가부장적이고 마초(macho)적인 스타일이었던 나의 아버지도 있다. 그래서 하나만 옳다는 주장이나 무조건적인 강요를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바로크 양식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그림을 보면서 가부장적이고 교조적이라 느낀다. 특정한 부분을 빛과 어둠으로 강조하고 나머지는 생략하거나 어둠 속으로 숨기는 방식, 렘브란트 라이트(Rembrandt light)를 이용해 빛이 어둠으로 꺾이는 경계 부분만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의 그림에는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 밝음도, 어둠도 안 그려도 되는 거다. 특정한 부분에 집중되고 흑백의 명암이 강조되는 양식은 정치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양이를 크게 그리는 것과 인물을 크게 그리는 것은 전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고양이를 확대해서 그리니 교조적이기보다 저항적으로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별것도 아닌 고양이, 의미가 없다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게 그리니 반항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변의 반응을 보고 고양이를 그리면 남다른 의미가 생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이유는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나는 학교 다닐 때 라파엘전파(Pre-Raphaelite)의 가치관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캔버스 위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디테일들을 그리겠다’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바로크 양식이 흑백 논리를 강조하는 교조주의적인 스타일로 느껴졌다면 라파엘전파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겠다는 태도는 민주적인 양식으로 느껴진 거다. 따라서 고양이가 등장하는 나의 작품에서 고양이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성 요소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Snowing in Toledo I> Oil on constructed birch wood, 90x90cm, 2010 ⓒ이경미

LEE : 말 그대로 아주 세밀하게 잘 그린 그림이다. 원래 데생력이나 묘사력이 좋은가? 누군가는 이렇게 그리고 싶어도 못 그릴 수 있다.

LKM : 개인적으로도 감정을 싣는 것보다 묘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에 속했다. 특히 관찰을 바탕으로 한 묘사력이 좋았다. 관찰일기를 잘 써서 상도 많이 받았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하늘이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LEE : 작품에 책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선택된 책들이 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경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함축하는 책일 거다. 모두 본인이 읽은 것인가? 책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어 책이 잘 보이지 않는데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LKM : 어려서부터 책을 아주 좋아했다. 세 살 때부터 여섯 살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지 못했다. 아버지와는 소통이 없었고 나이 터울이 있는 오빠들과 지냈는데 오빠들이 없을 때는 혼자였다. 아버지가 나를 돌보기 힘들어 친척 집에 보내지기도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이 나의 사고 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어머니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데 나는 그런 어머니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글을 빨리 익혀 오빠들이 보던 책들은 다 봤다. 책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 좋았다. 책에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이 있었고 어머니 없이도 이런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그게 습관이 되어 나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고 많이 보는 아이, 책만 보는 아이로 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감정을 절제하고 책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입 밖으로 잘 읊는 학생이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안에서 다음에 읽을 책을 선택한다. 읽고 있는 책 안에 등장하는 다른 책이나 책 안에 등장하는 내용과 관련된 책을 고르는 방식이다. 한글이 아닌 다른 언어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번역서의 경우 원서도 함께 산다.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그림 속 책 중에는 안 읽은 것도 있다. 그러나 나의 관심 분야이고 앞으로 읽을 확률이 높은 책이다. 따라서 내 사고의 확장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외국어 책이 많은 이유는 내가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어 단어 자체가 도드라져 그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LEE :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글자가 이미지가 아니라 정보로서 먼저 들어오는 거다. 관객들도 정보로 읽히는 그 부분에 집중할 것 같다.

LKM : 외국어라서 선택한 것이다. 나는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화폭 속 구성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한글 텍스트가 방해가 되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책도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어 책이 많은데, 이미지로 작품에 녹아들면서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영어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책의 느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추상적인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요소라 생각한다.

LEE : 대부분의 책이 양장본, 하드커버(hardcover)인 이유도 있는가?

LKM : 조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페이퍼백(paperback)을 그려놓으면 그림의 구조가 탄탄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책 자체로도 양장본을 좋아한다. 책도 수집품의 일부라 생각하는 나에겐 하드커버가 더 매력적이다.

LEE : 고서를 수집하기도 하는가?

LKM : 그렇지는 않다. 장르를 정해놓고 수집하진 않는다.

<The Day and Night of Brugge-Apollo and Dionysus>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 220x110cm, 2013 ⓒ이경미

LEE : 작품 안에 이미지가 참 많다. 구성 요소들이 많으면 이야기가 많아질 확률이 높아진다. 하얀 백지보다는 연상이나 상상의 힌트를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경미의 작품 속 이미지는 도상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다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이야기를 관객이 다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작가가 작업할 때에는 특정한 의미를 생각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길 수도 있고 보편적인 담론이 담길 수도 있을 것이다.

LKM : 전반적으로 의미가 담겨 있긴 하다. 예를 들어 풍경, 골목 끝에 있는 원경으로서의 배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 풍경을 바라봤을 때의 느낌과 연결된다. 과거로부터 사람들은 풍경을 많이 그리고 좋아했는데 그것은 풍경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공통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경을 보면서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무언가) 오지 않을까? 멀리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유추하는 행위 말이다. 나의 개인사와 연결된 부분을 말해보면 어려서 어머니가 갑자기 없어졌는데 어디에 갔는지, 언제 올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납득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워하면서도 어머니가 올 것 같으니 그저 먼 산이나 골목 끝을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는 함께 그려진 건축이 상징하는 문명 반대된다. 바다는 언제든지 무엇이든 품을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천의 경우, 어머니가 한복을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해결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미술사를 배우면서 베로니카의 손수건(Veil of Veronica), 바로크(Baroque) 주름 등을 알게 되었다. 물론 파라시오스(Parrhasios)와 제욱시스(Zeuxis)의 일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건축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믿어졌던 도시 문명을 상징하는 것과 달리 천의 주름은 다공성, 빈 공간, 숨 쉴 구멍, 딱딱한 수직과 수평이 아닌 부드러움이다. 그리고 테이블은 작가의 세상을 상징한다. 여러 이미지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이토록 많고 다양한 세계가 만들어내는 느낌과 의미가 결국 작가인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 나의 공상이란 뜻이다.

LEE : 본인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관객이 어느 정도 알아주면 좋겠는가? 전혀 다르게 읽히는 것을 상관없다고 하는 작가도 있지만, 자신의 의도가 어느 정도 정확히 전달되길 원하는 작가도 있다.

LKM : 오늘날 미술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 개인 혹은 사회가 부여한 특정한 지침이 따로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관점에 따라 가치평가도 다를 수 있다. 나는 특정한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퍼즐 맞추듯이 정보를 얻고 이 세계를 이해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주장이나 주의를 만들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강요하거나 특정한 생각이 중요하고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태도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앞서 말했던 라파엘전파의 ‘하얀 도화지 같은 캔버스 위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디테일들을 그리겠다’는 말에 공감한 것도 소외되는 것이 싫고, 나 역시 소외되는 여러 개의 풀잎 중의 한 잎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정도, 수준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지식이 축적된 상태에서의 감상과 그렇지 않은 감상은 분명 다르다. 또한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나의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먼 옛날부터 정말 많은 의미를 담아내는 메타포로 기능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감상자가 그 모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작가인 내가 천에 더 애착을 가진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읽어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의 작품을 보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든, 문외한이라 할 정도의 사람이든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묘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안에 내가 원하는 구성 요소들을 다 넣어 나만의 의미를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모두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느낌이 잘 전달되길 바란다. 사실 이 느낌은 상당히 추상적인 것이다. 테이블 위에 천을 깔고, 책을 놓고, 그것이 도시 풍경으로 이어지는데 도시의 원경에서부터 다시 밀려 나오는 파도가 있고, 그 위에 고양이가 머무르는 풍경, 저부조 위에 이미지가 그려져 있어 때로는 상이 흔들려 보이기도 하는, 어찌 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담아낸 그림을 통해 추상적이면서도 종합적인 느낌을 느끼게 하고 싶다.

LEE : 고양이뿐 아니라 책, 물, 조각상 등에서 바니타스(Vanitas)와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풍선도 작가 개인의 경험과 연결되지만 동시에 허무함을 상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니타스에는 죽음뿐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도 포함한다. 한편 정물화는 그 자체로 인간이 가진 소유의 소유욕을 반영한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수집의 욕망과 연결된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I Got Life>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 104x104x11cm(each), 2018 ⓒ이경미

LKM : 죽음보다 삶을 생각한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2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삶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죽음, 그 며칠의 시간 동안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했다. 이후 미국에서 풍선을 보자 아버지가 풍선 장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삶이란 무엇인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거에 묶여 감정을 소모하는 나 자신을 반추하게 되었다. 풍선은 화려하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만 잠시의 한때를 지나면 용도 폐기된다. 바람이 빠진 풍선의 처연한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바람이 빠져버린 순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현자와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다. 누구나 절정을 지난 뒤에야 깨달음을 얻는 거니까. 피크(peak)의 순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적인 한계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니 바니타스적인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건 이경미만의 바니타스라 말하고 싶다.
수집과 관련해 이야기해보면, 나는 책을 비롯한 물건들에 집착도 크고, 많이 갖고 있는 편이긴 하다. 그런데 많은 물건이 쌓인 것을 좋아하기보다 무언가를 갖는 느낌을 받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유한다는 것도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이란 생각이 든다.

LEE : 이 질문은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개인사를 작품에 녹여내니 자연스럽게 작가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전달하게 된다. 물론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경미는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편이다. 작가가 작품을 설명할 때에도 사적 부분을 이야기한다.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작품에 담으면 치유라는 단어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이경미의 작품을 보며 그 이면의 이야기를 들어도 치유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LKM : 치유보다는 해소라는 표현이 맞을 거다. 최소한 나의 경우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치유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일정 부분에서는 힐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치유를 위해 작업하진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왜 이 세계에 떨어졌는지, 왜 이런 환경에 살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어 응어리들이 있었다. 그만큼 세상을 향한 질문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푸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고 잘하기도 했다. 이론물리학, 조경이나 산림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할 때에는 약학과를 추천받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의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면 특정한 하나만을 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의 것은 시간이 남을 때 취미로밖에 못하게 되는 거다. 그건 나란 존재, 사회의 문제, 역사 등에 대해 심층적인 접근이 어려워짐을 의미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내가 가진 여러 질문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작가는 일종의 덕업일치 같은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나의 질문과 생각을 담아내면서 또 하나의 세상을 구축하는 그 자체로 희열이 있다. 내가 만든 세계는 실제 세계를 직접적으로 변하게 하진 않는다. 나에겐 이게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나의 갈등과 욕구 불만들을 해소해주기도 한다.

[The Cultural Code] 그룹전 설치 전경, Springs center of Art, 베이징, 중국, 2014 ⓒ이경미

LEE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주복을 입은 고양이는 외롭게 우주를 떠도는 존재 혹은 우주에서 지구로 온 존재일 뿐 아니라 우주(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작가가 대입된 존재인 것 같다. 예로부터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학자들에게도, 예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주제이다. 하염없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는, 우주복을 입은 고양이가 가볍고 밝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도 같다.

LKM : 그렇다. 나는 학생 때 내가 그린 고양이가 배제되었을 때 내가 배제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스스로를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길고양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지구과학 시간에 태양계에 대해 배우면서 우주가 얼마나 크고, 지구는 얼마나 작은지,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는 지구에서 얼마나 작고 한국에 사는 한 명의 인간인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은지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이렇게 작은 존재인 나의 고통과 감정은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주가 참 좋았다. 이후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우주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IMF 시절,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면 고양이가 보석 같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 나는 마치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 주는 것 같은 위로를 느끼는 거다. 우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런 것이 좋았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우주복을 입혔다.

LEE : 나나가 귀엽다고 말하다가 생각난 질문이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대중적 접근성이 좋다. 콜라보레이션이나 아트 상품 제작도 했었다.

LKM : 예전부터 아트 상품을 제작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작업을 원하는 계층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아트 상품을 자신을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작가들도 많다. 콜라보레이션이나 아트 상품으로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보다는 작가로서 이경미라는 브랜드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New vertical painting>(2016~2019)을 진행하면서 다시금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나는 고전적인 작가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를 주는 사람인데 특정한 매체에 한정된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 시대적인 변화의 영향도 있다. 물론 그 결과가 성공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백과사전형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백과사전이 내 인식 체계의 토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 같다.

LEE : 고양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더 하겠다. 평상시에 고양이와 관련된 자료나 책들을 찾아보는 편인가?

LKM : 고양이를 어디선가 발견하면 즐겁기는 한데 일부러 찾아보진 않는다. 나는 고양이 애호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어려서 시골에 살았을 때 나는 고양이만 좋아하지 않았다. 다양한 동물과 식물을 좋아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오자 내 주변의 자연은 한강 둔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보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종과 이 세상을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기도 하고, 자꾸 잊게 되는 자연 생태계를 환기하기도 했다. 고양이가 예술가에게 좋은 친구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고양이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잘 가꾸기 때문에 미적인 즐거움도 준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고양이 위주로 보는 사람은 아니다. 우연히 너무 힘든 시기를 고양이 나나와 같이 보냈기 때문에 일반적인 고양이보다는 나나라는 특별한 고양이에게 의미를 두는 것이다. 나나에 대한 애정은 나나와 함께 보냈던 시절을 향한 애정이다.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Oil on canvas & Constructed birch panel, 121x156x8cm, 2016~2019 ⓒ이경미

LEE : 2016년에 열린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Hessisches Landesmuseum Darmstadt)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전에서 <묵시록 Apocalypse>(1498)을 마주하게 된 것이 <New vertical painting>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작가로서 전시나 예술 관련 자료도 많이 볼 텐데 그 많은 작가 중에 뒤러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게 된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뒤러는 작업의 형식이라든가 내용에 있어서 이경미와 연결시킬 만한 지점이 많아 보여서 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묵시록>은 종교화이다. 종교화는 그 어떤 그림보다 도상학적 해석이 중요하다. 전시를 관람하기 이전부터 뒤러에게 관심이 있었나?

LKM : 뒤러의 <묵시록>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결혼한 뒤 나는 8년간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에 머물렀다. 한국의 미술계, 동료들과의 교류도 없이 그림만 그렸다. 그때 혼자 ‘작가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작가는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사람들은 작가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와 같은 생각을 많이 했다. 이후 독일로 이동하게 되었다. 독일은 미국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미국에서는 상품의 유통구조, 소비심리,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했는데 독일에 가니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많았고 그와 같은 삶이 현재까지도 일정 부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독일에서 5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작가의 전시가 열렸는데 너무나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거다. 뒤러의 유명한 작품들은 알고있었지만 <묵시록> 원화 15점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뒤러의 모든 판화 작품이 다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묵시록>의 에너지가 강했다. 그동안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볼 때는 대체로 확인을 하는 차원이었는데, <묵시록>은 달랐다. 내가 생각하던 뒤러가 아니었다. 15점의 구성이 모두 달랐고 독일적인 풍경이나 고딕적인 느낌도 있으면서 이탈리아적인 유려함이 보였다.
<묵시록>은 뒤러의 다른 판화와 비교해도 기획력이 남다른 작품이다. 뒤러는 텍스트와 그림을 분리해 그림이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39x28cm란 작품의 크기도 일반적인 판화보다 크다. 작품을 보며 뒤러가 뛰어난 재능과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 느꼈다. 긴 호흡의 집중력이 보였다. 옛날의 작가도 이렇게 살았는데 현대의 내가 이런저런 논란이나 왈가왈부하는 이야기들을 신경 쓰는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15세기에도 이렇게 에너지가 응축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와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뒤러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잃어버린 담대함도 되찾고 싶었다. 뒤러의 작품, 나아가 에너지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한편 판화는 유화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묵시록>과 같은 판화를 한국에서 볼 가능성이 없기도 하고, 주목하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밀도가 높고 드라마틱한 구성이 뛰어난 이 작품을 조금 크게 그려보고 싶다는 욕구도 컸다.

LEE : 묵시록적 시각에서는 현재를 악한 시대, 미래를 축복받은 시대로 본다. 과거 묵시 사상은 어렵고 암담한, 혼란기에 널리 퍼졌다. 혹시 뒤러의 <묵시록>을 빌어
21세기인 현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닌가?

LKM : 내가 본 자료에 의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뒤러의 <묵시록>은 연극적인 구성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실제 투시를 생각하기보다 도상학적인 접근을 했다는 것이다. 뒤러가 그런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거다.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와 같은 장치들을 사용했을 테니까. 나는 IMF,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막연히 갖고 있던 이상향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마치 달이 추락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당시 내 또래의 사람들 대부분은 충격이 컸을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잊고 적응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의 일에 충격받지 않는다. 면죄부 발행이 최고조에 달한 뒤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인본주의가 부상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당대 최고의 위기로 여겨졌는데 어찌 보면 흐지부지하게 넘어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것 같다. 무언가 어렵다는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패러다임이 바뀔 때에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순간적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New vertical painting> 시리즈를 발표한 뒤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지금의 세상과 연결 지으며 울림이 크다고들 말해주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각적인 장치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거나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맞이할 것이라는 계시를 주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LEE : 대중문화에는 폭력적인 이미지와 내용이 여과 없이 다뤄진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종교 미술을 비롯해 전통적인 미술에서도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미지가 꽤 많이 발견된다.

LKM : 뒤러의 판화는 <묵시록>의 내용을 전하고 있음에도 끔찍하거나 잔혹한 상황을 담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폭력적인 이미지들은 누군가의 의식을 바꾸려는 것 같아 거부감이 있다. 나는 만화와 같은 대중문화가 현실이 아닌 자극적인 것들을 과장해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려 하고, 실제로도 영향을 받아 인간 의식의 틀이 바뀐다는 데에 흥미를 느낀다. 내 작품에 여러 층(layer)이 겹쳐지는 것도 이 모두는 장치의 일종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나는 뒤러의 <묵시록>도 그 시절의 가장 인기 있는 포스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New vertical painting>에 현대의 것들, 독일의 지역 잡지나 미국에서 봤던 상업적인 출판만화, 그리고 고양이 나나의 얼굴을 넣으면서도 장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LEE : 뒤러의 작품을 살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인문주의적 관점의 죽음도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런 부분도 이경미의 작업이 뒤러와 연결되는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결이 달라 보이지만 연결되는 질문을 하겠다. 앞서 본인은 자존감이 높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LKM : 뒤러는 루터(Martin Luther)와 가까웠고, 후원자 중에는 독일 르네상스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문주의자도 있었다. 실제로 뒤러의 후기 작업을 보면 인간을 향한 관심이 드러난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 아니다. 삶이 쉽지 않았던 만큼 종교를 많이 탐구했다. 각종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글귀 중에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법구경 法句經』에 나오는 ‘한 포기의 풀도 저 자신을 위한다’였다. 나는 이 말이 정말 고마웠다. 어떻게 보면 버려진 아이 같은 시절을 보냈던 내가 나를 아끼고 무언가를 잘하려면 자존감이란 것이 필요한데 그 근거를 찾게 된 것이다. 풀 한 포기조차도 자기를 위하는 게 세상의 본능이자 본질이니 나도 나를 위하며 열심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겁을 먹거나 주눅이 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 자신이 풀 한 포기보다 낫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의 기준이 무언가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하다. 나는 온전한 자의식이 확고한 사람이다. 나는 풀 한 포기라도 굉장히 확고한
풀 한 포기이다.

[THEN & NOW ; New Vertical Painting- Durer’s Apocalypse] 개인전 설치 전경, 갤러리 세줄, 서울, 2019 ⓒ이경미

LEE : 뒤러의 다른 작품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할 계획은 없는가?

LKM : <New vertical painting> 시리즈 이후에 뒤러의 다른 작품들을 조사했다. 그중에는 우드 인그레이빙(wood engraving)으로 성경의 내용을 다룬 작업이 몇 점 있어 연결된 작업을 한두 점 정도 더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뒤러의 판화를 활용해서 콜라주한 드로잉 몇 점을 제작했다. 나의 취향에도 맞기 때문에 앞으로 뒤러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그런데 어떤 작가의 어떤 작업을 선택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와닿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뒤러의 작품을 재해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어떤 형태로든 매우 동시대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 정도로 재해석의 가능성을 주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뒤러의 다른 작품들도 <묵시록>만큼의 강한 매력을 주지 못했다.

LEE : <New vertical painting> 시리즈를 과거와 현재, 신대륙과 구대륙을 아우르는 작업이자 작가의 회고록이라고 설명했다. 이경미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독일로 물리적인 이동을 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우주까지 이동하는 작가이다. 책을 보면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러 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정착은 고정된 규범과 사유체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노마드(nomad)적인 삶과 작업은 본인이 말하는 저항적인 태도와 연결되는 것 같다.

LKM :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옛날이라면 나는 시골에 살아야 한다.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고 나의 의식 역시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계속 무언가를 찾아 옮겨 다니는 거다. 나는 변화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는다. 나의 10대 이전, 10대, 20대, 30대 그리고 40대는 다 너무 다르다. 결혼도 한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닌 나처럼 무언가를 계속 찾으며 이동하는 사람과 하게 되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자발적 노마드라고 부르지도 않지만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 이동하는 것은 맞다. 그것은 내가 ‘유토피아’라는 제목으로 작업을 지속했던 것과도 연결된다. 내 작업 중 여러 프레임을 마주 보게 하는 그림에 나의 노마드적인 삶이 드러난다. 화폭의 왼쪽, 중간, 그리고 오른쪽에 각각의 풍경이 있고, 그 가운데에서 고양이 등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듯이 그린 그림은 서로 다른 각각의 세계들이 있고, 그것을 통합하지는 못하지만 조망하고 있는 나를 보여준다.

LEE : 굳이 화면을 나누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여러 개로 분할해서 그린 뒤 이어붙인 작품들이 있다.

LKM : 말 그대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노마드적인 삶과 연결되는 것인데 항공으로 작품을 부칠 때 작품을 담을 수 있는 상자의 최대 크기가 1m이다. 그래서 각각을 90cm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You Don’t Own Me] 개인전 설치 전경, 카이스(CAIS) 갤러리, 서울, 2011 ⓒ이경미

LEE : 이경미의 작업은 프레임, 환영, 재현과 같은 회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고민하게 한다. 프레임은 한계일 수 있지만 프레임 덕분에 무한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프레임은 그림의 경계인 동시에 그림 속 세상과 관계 맺고 영향을 끼친다. 프레임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LKM : 나는 프레임을 정보 취사선택의 틀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첫 개인전 제목이 ‘아홉 개의 문’이었다. 프레임은 일종의 문, 공간의 경계와 같다. 문을 닫으면 밖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문을 닫는 순간 문 저편에 있던 풍경이 실체가 아니라 환상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책 표지를 덮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게 아쉬워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잘 펼쳐놓는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정보가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한 페이지만 보이는 것인데도 아쉬움이 생긴다. 프레임이 닫히는 게 아쉽다. 그런 경험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한계가 많은 존재인지, 이 한계 많은 존재가 살면서 취합하는 정보들이 얼마나 한정적이며, 우리는 이 한정적인 정보를 얼마나 한정적으로 바라보는지 등을 생각한다.
첫 개인전과 동명의 작품인 <아홉 개의 문>(2006)은 실제로 문을 여닫을 수 있게 설계했다. 문을 닫으면 그저 아홉 개의 문이지만 문을 열면 바다가 넘실거리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런데 문의 형상조차도 그림이다. 회화의 형식뿐 아니라 보고, 인지하고, 사유하는 것에 대해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이다.
<나나와 커텐>(2006)이나 전시 [李나나 & 金랑켄](2008)에 전시되었던 초기작들을 보면 화면을 덮은 천이 등장하는데 실제 천이 캔버스를 감싸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실재감과 착시 효과를 주기 위해 프레임에 실제로 천을 씌워서 사진을 찍고, 캔버스의 모퉁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말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멀리에서 보면 천을 그렸다고 인지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오히려 천이 프레임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여 순간적으로 ‘이게 뭐지? 어떻게 이런 느낌이 나지?’라고 생각하게끔 그린 것이다. 이건 어떤 가르침이라기보다 그림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자 미덕인 것 같다.

LEE : 개인적으로 이경미의 작업은 포스트모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인 이미지에 병치된 팝(pop)적인 이미지는 강력한 권력에 틈을 만든다. 서구 세계에 동양의 작가가 목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개인사와 보편사의 결합, 회화와 부조의 공존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요소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LKM : 화면에 구사된 이야기가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지금도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을 갖고 있다. 어릴 때는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백과사전을 좋아했었다. 이 세계의 현명한 사람들이 정보의 견고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것이고, 세상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알고 싶고 지식을 축적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자 백과사전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물리적 백과사전(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중요해진 시대의 반영이었다. 백과사전의 위상이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체되고 누구나 정보를 구축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일정 부분에서 그대로이다. 정보 하나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여러 개의 정보가 제공되면 선택을 미룬다.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나의 작업에는 자조도 담겨 있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여러 층을 쌓아 올리면서 내가 느끼는 판단 보류와 같은 상황들을 구축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