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2.07. / 2020. 07.09. 수정
본 글은 『리포에틱 평론과 대화-유나얼』 (2018)의 「대화」 (pp. 35-72.)를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대화」 는 이문정과 유나얼의 대화를 타이핑, 녹취하여 편집, 정리했으며 정리된 내용에 대한 작가의 확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LEE : 이문정, YNaul : 유나얼
LEE :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필자가 작가 유나얼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이 2012년 즈음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드로잉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림을 그린 사람이 가수라고 하여 호기심에 검색을 했던 기억이 난다. 찾아보니 많이 유명한 가수였다. 작가로서의 활동도 열심히 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평소 알고 지내던 작가의 도움으로 연락이 닿았고 작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유나얼은 필자의 주목 작가가 되었다.
이번에 ‘대화’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개인전을 10회 열었음에도 작가 유나얼에 관한 자료가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미술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한 시기는 언제인가? 콜라주 작업에 아주 어렸을 때의 그림이 활용된 것을 보니 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YNaul : 화가를 꿈꾼 건 초등학교 때부터다. 그보다 어렸을 때도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유치원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장래 희망에 화가를 적기 시작했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나의 모습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유치원, 혹은 조금 더 이전 즈음인 것 같다. 4~5세 때의 그림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렸던 기억은 없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신 이모가 화실을 운영하셔서 놀러 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Infancy Series-Collage For Infancy7> Digital Collage, 81x120cm, 2015 ⓒ유나얼
LEE : 어린 시절의 드로잉을 이용한 작품들이 관객의 기억을 되살리고 향수를 자아낸다. 콜라주에 사용된 드로잉은 전부 다 본인의 작품인가? <Collage for Infancy 10>(2017)의 윗부분에 놓인 공룡과 동물들 그림은 그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YNaul : 노란색 종이에 그려진, <Collage for Infancy 10>의 윗부분은 교회 꼬마 아이의 그림이다. 같은 작품의 아랫부분 드로잉은 내가 그린 것이다. 이 작품 하나를 제외하고 <Infancy Series>에 삽입된 어린아이의 드로잉은 모두 나의 것이다.
LEE : 혹시 작품에 삽입된 드로잉들이 각각 몇 살 때의 그림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그리고 어머니가 본인의 어린 시절 작품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신 남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미술적 재능을 발견하셨던 것은 아닐까?
YNaul : 어머니가 물건들을 잘 모아두시는 편이다. 또한 워낙 그림을 좋아하셔서 나의 그림도 안 버리신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던 이모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4~5살 때이기 때문에 그때의 그림을 보고 재능을 발견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LEE : 흑인 음악이 본인의 청소년기에 큰 영향을 주었고 흑인 음악에 대한 관심이 흑인이라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해왔다. 음악은 본인의 삶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학에서 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나? 이런 질문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입시 제도상 전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YNaul :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셨다. 나의 아버지가 들으셨던 음악은 거의 재즈(jazz&classic)였다. 내가 10대였던 시절에는 흑인 음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보이즈 투 맨(Boyz Ⅱ Men)이 인기였다. 보통 10대 때에는 유행하는 음악이나 대중문화에 민감하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때부터 컨템포러리 알앤비(Contemporary R&B), 1990년대 중창단, 하모니와 보컬 스킬에 흠뻑 빠졌다.
음대를 안 가고 미대를 가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과 관련된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서였다. 아주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조금 배운 것 외에는 정식으로 악기를 배운 적도 없다. 노래가 좋아서 고등학교 때 노래방에 가긴 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문학의 밤’ 같은 행사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노래를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가수나 작곡가로 활동할 줄을 전혀 몰랐다. 대학생 시절에야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그림에 흑인이 처음 등장한 건 고등학교 3학년 경이다. 중학교 때에는 흑인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때는 드래곤 볼(Dragon Ball) 같은 만화를 많이 그렸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좋아하는 흑인 뮤지션 들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작업이 남아 있다.
LEE : 콜라주는 작가 유나얼을 대표하는 작업 방법 중 하나이다. 사람들에게 콜라주얼(Collagearl)이라는 고유 명사도 꽤 익숙해졌다. 콜라주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콜라주 작업을 흑인 음악의 믹싱이나 샘플링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YNaul : 고등학교 때 다녔던 화실에서 콜라주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박이창식 선생님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입시 미술을 가르치면서도 이건 진짜 미술이 아니니 진짜 미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양한 표현 방법들을 알려주셨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콜라주라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콜라주와 아상블라주 작업을 지속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재료를 풍족하게 살 수 없어서였다. 원하는 재료를 모두 살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다른 작업이 나왔을 수도 있다. 학교 주변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작업을 했다. 그런데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콜라주 작업을 지속한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버려진 것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의 쾌감이 참 좋았다. 고등학교 때에도 새하얀 스케치북이 아닌 골판지나 박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일상에서도 과거의 물건이나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 같다. 옛날 물건을 좋아한다. 옷도 구제 옷을 즐겨 입는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흑인 음악의 작업 방법과 콜라주가 연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1990년대 흑인 음악의 샘플링을 미술에서 시도하기 위해 콜라주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인위적인 것을 안 좋아한다. 작업을 지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술을 하는 방식과 음악을 하는 방식이 닮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LEE : 이전의 대화에서 콜라주 작업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로 ‘결과물을 빨리 볼 수 있기 때문’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그렇게 빨리 완성될 것 같지 않다.
YNaul : 결과를 하루, 이틀 안에 볼 수 있는 정도면 빠른 것 아닐까? 내 기준에서 유화는 완벽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작품이 완성됐다고 하기 어렵다. 마르길 기다렸다가 그리는 것도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작업에 몰두할 때는 끝까지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 중간에 멈추면 느낌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드로잉을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유화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크릴은 빨리 말라서 좋은 데 유화와는 성격이 달라 자연스럽게 사용하려면 조금 더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유화를 선호하지 않다 보니 드로잉과 콜라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LEE : <Body & Soul>(2016)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작업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보아왔던 유나얼의 드로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드로잉보다 견고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나? 중앙에 그려진 여성 주변의 이미지 조각들에서는 콜라주가 연상되기도 한다.
YNaul : 드로잉처럼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붓을 들고 그렸다. 그래서 일단 편안하게 그려봤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계획하거나 예상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고 내가 과연 붓으로 어느 정도까지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업했다.
LEE : 사용하는 콜라주의 방법이 두 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콜라주를 한 후 그것을 스캔해 확대하는 방법과 컴퓨터 안에서 콜라주 하는 것이다. 각각의 작업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또한 콜라주 작업은 언제,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YNaul : 손으로 만든 콜라주와 그것을 확대하는 작업, 그리고 스캔한 이미지를 컴퓨터 안에서 콜라주 하는 작업이 있는데 거의 동시에 진행한 것 같다.
평소에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할 때도 있고 일부러 찾아다닐 때도 있다. 마음에 드는 재료를 발견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녀도 하나도 발견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도적으로 재료를 찾으러 다닐 때에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콜라주 작업을 할 때에는 수집한 물건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은 후 어떤 것을 선택할지,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붙였다 떼는 일을 반복한다. 컴퓨터로 콜라주를 할 때에는 한 아이템마다 1200 픽셀 이상의 고화질 스캔을 한 뒤 포토샵에서 조합한다. 보통 완성될 작품의 크기가 대략 2m 안팎이라 생각하고 작업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리 작은 이미지여도 1200 픽셀 정도는 받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프린트했을 때 이미지가 깨질 위험이 있다. 나에게는 선명한 이미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깨지거나 흐릿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큰 사이즈 작업이 많기 때문에 보통 프린트는 전문 출력소에 가서 진행한다.
본격적인 콜라주 작업을 처음 시작한 때는 2009년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는 콜라주한 것을 스캔한 뒤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다. 그런데 색 표현의 한계가 느껴졌다. 그래서 디지털 프린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프린트의 경우 원하는 만큼 에디션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처음 프린트 작업을 시작했을 때의 에디션 넘버는 153이었다. 153은 성경에서 의미 있는 숫자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는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 하셨고 베드로가 말씀을 따르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혔다. 그리고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는 것이 있다. 우주에 4개밖에 없는 숫자다. 이건 믿음의 영역이라기보다 수학의 영역이다. 세 자리 숫자의 각 자리 수에 세제곱을 해서 더하면 원래의 세 자리 숫자가 나오는 거다. 153이 그렇다. 1, 5, 3을 세제곱해서 더하면 그 자신인 153이 된다. 그런데 4개의 트리플 큐브 넘버 는 모두 성경과 연결된다. 나는 트리플 큐브 넘버가 삼위일체의 숫자라 생각한다. 각각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인 것이다. 나는 음악의 화성도 영적인 영역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른 음이 하나가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에디션 넘버를 153으로 했다.
LEE : 에디션 넘버 153은 너무 많은 것 같다.
YNaul :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숫자다. 그래서 37로 바꿨다. 성경에서 3과 7은 완전수다. 그래서 둘을 합쳐서 에디션 넘버를 37로 정했다. 물론 이것도 너무 많다. 그래서 2016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원네스(ONENESS)’ 전에 참여하면서부터 Large 5개, Medium 2개, Small 3개로 정했다.
LEE : 오브제나 이미지가 ‘이국적’이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국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닌 낯선 나라의 분위기를 뜻한다. 미술에서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문화를 대할 때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YNaul : 어렸을 때 의정부에 살았는데 그때 내 눈에는 미국 문화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과자에 영어가 인쇄되어 있으니 낯설고 신기했다. 미군들이 지나가면서 씨레이션(C-ration)을 줬던 기억이 있다.
LEE : 혹시 사대주의 아닌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지만 막연하게 서구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거나 누군가가 질문을 던진 경우는 없는가?
YNaul : 어렸을 때에는 막연히 미국의 이미지를 동경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사대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작업과 관련해서 사대주의적이란 비판을 받아본 적도 없다.
<1980> Drawing & Collage on LP Cover, 63x35cm, 2017 ⓒ유나얼
LEE : <LP Cover Series>는 낡은 LP 커버의 내부에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정한 LP 커버를 찾아서 작업을 한 것인가? 본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앨범을 선택했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YNaul : 의미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LP의 커버인지가 중요하지는 않고 LP 커버라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커버를 뜯고 그 내부에 그림을 그리거나 콜라주를 하기 때문에 내가 수집하는 LP로는 작업할 수 없다. 주로 알맹이가 없는 버려진 LP 커버에 작업을 한다. 뜯었을 때 내지의 상태가 마음에 드는 색과 형태를 띤 것을 선택한다. 오래된 정도에 따라 종이의 색이 달라진다. 색점 같은 게 있는 것도 있다.
LEE : 콜라주 작업에 오래된 사진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어디에서 사진을 구하는가? 소유한 사진은 대략 몇 장 정도인가?
YNaul : 내가 직접 구매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구해다 주기도 한다. 주로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편집숍 같은 곳에서 구입한다. 외국 벼룩시장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 수집은 평상시에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다. 한 100장 정도 갖고 있다.
LEE : 이전에 필자에게 본인의 작업이 즉흥적인 동시에 계획적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을 부탁한다.
YNaul : 즉흥적이란 것은 내 취향에 맞는 재료를 고르고 아이템들이 놓일 위치를 선택할 때 즉흥성이 담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의 작업에 즉흥성만 담기 는 것은 아니고 즉흥적이라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작업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의 취향을 따르는 선택은 계획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한 콜라주를 위한 아이템을 고를 때, 자리를 지정할 때 어떻게 하면 화면 구성이 조화로울지, 서로서로 잘 어울릴지 여러 번 이미지 조합을 해가며 선택한다. 이건 즉흥적으로만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계획성이 함께 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콜라주 작업을 보고 ‘이거 나도 하겠다. 그냥 막 붙이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역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때론 ‘그림을 못 그려서 콜라주 작업을 한다’라 는 이야기도 듣는다. 하나의 이미지를 선택하고 위치를 정하는 작업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을 위해서는 꼼꼼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림을 못 그려서, 혹은 쉽게 작업하려고 콜라주 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듣기 싫다.
LEE : 2015년 개인전과 관련된 기사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인터뷰 내용이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에 관심이 많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보면 그 결과물이 사람 사는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하는 사회,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말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YNaul :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던 것, 서로 상관관계가 없던 것들을 만나게 하고 새롭게 조합시켜 한 자리에서 조형적인 균형을 만들어냈을 때 정말 기쁘고 좋다. 그냥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 사람 관계에서도 ‘저런 인간과는 어울리기 싫어, 저 사람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야.’ 이랬다가도 어떤 사건을 통해 더 친해지기도 하고 예상 외로 좋은 관계를 맺을 때가 있다. 이와 비슷하다. 교회라는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의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오기도 한다. 편견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경험해서 더 그런 것 같다. 또한 나는 음악적으로 거의 20여 년간 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느낀다. 그러나 힘든 만큼 의미 있는 일이다.
<Selection 1>, <Selection 3> Mixed Media, Dimension variable, 2020 ⓒ유나얼
LEE : 수집한 것들을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은 이미지나 오브제가 이전에 존재했던 맥락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역사적인 내러티브를 드러낼 수도 있다. 때론 그것이 놓여있던 맥락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도 한다. 일상의 물건 혹은 버려진 물건으로 작업하는 것은 이분법적 위계와 경계를 해체하는 동시대적 미술의 특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예술로 변화시키는 데에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가? 또한 길 위의 물건들을 아프리카를 떠나 부유하는 삶을 살았던 흑인의 역사를 은유하는 상징물로 해석해도 될지 궁금하다.
YNaul : 기독교적인 의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버려진 물건들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버려진 물건을 데려와 의미 있는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기쁨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나의 작업은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던 것들의 조합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진지하게 바라본다. 보기 좋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소중한 자녀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작업을 시작할 때 흑인의 역사를 은유하기 위해 길 위의 물건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들이 맞물리게 되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흑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첨언하면, 사춘기 때 흑인 음악을 듣기 시작했던 터라 저항 문화에도 관심을 가졌었고 힙합이나 거리 예술에 빠졌었다. 당시 힙합이 담아내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게 나에게도 있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힙합보다는 흑인 음악의 하모니에 더욱 매료되었다.
LEE : 본인의 작업에서 저항과 전복보다는 안정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YNaul : 어렸을 때 이야기다. 좋아하는 힙합 가수를 그리고, 그에 관한 글을 쓴 적도 있다. 물론 나의 드로잉과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가 연결되기는 하지만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 내가 그래피티 아트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것은 어린아이의 것과도 같은 자유로운 선이었다. 경직되어 있지 않은 선 말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그림을 논하면서 그래피티 아트의 시초라고들 말한다. 내가 그의 작업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것 역시 정제되지 않은 선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그래피티 작업들은 굉장히 정제되어 있고 때로는 디자인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현재의 그래피티 아트를 떠올리면 나의 작업과 연관성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바스키아의 경우,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에서도 내게 영향을 주었다. 내가 점점 성장하고 신앙이 무엇인지, 저항 문화를 신앙적인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작업도 자연스럽게 변해간 것 같다.
LEE : 2015년 필자는 평론에서 유나얼의 작업이 ‘기억과 흘러가는 시간, 삶의 흔적에 대한 성찰’이라고 적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기억을 다루는 작업 방식이 과거의 흔적들을 수집하는 본인의 취향과 긴밀해 보인다. 기억에 집중하는 것과 오래된 물건들을 이용하는 작업 방식은 깊은 연관 이 있을 것이다. 작업을 위한 수집과는 별개로 음반, 버려진 물건, 피규어(Figure) 등을 수집한다고 들었다. 수집하는 물건들은 어디에 보관하는가? 정리정돈을 매우 잘하기 때문에 보기 좋게 전시해놓았을 것 같기도 하다.
YNaul : 나의 음악과 미술 작업 모두에서 기억은 늘 함께 한다. 특별히 수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음반이다. 원래 물건 모으는 걸 좋아한다. 특히 예전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이다. 창고에 보관하는데 평상시에는 잊고 있다 생각날 때 가끔 들어가서 본다. 내가 쓰던 물건이나 나의 옛날 사진들도 있다. 무조건 안 버리는 건 아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유독 버리기 싫은 물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삐삐 같은 것. 피규어도 좋아했는데 최근 들어 할리우드 생산물들이나 마블(Marvel) 시리즈에 관심이 없어졌다. 특히 배트맨(Batman)을 좋아했었다. 스누피(Snoopy)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월드 비전(World Vision International)에서 스누피 탄생 65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기빙 마이하트 투 스누피(Giving My Heart to Snoopy)’(2015)에서 하트를 안고 있는 스누피에 작업하는 콜라보레이션도 했었다. 나는 하트 안에 성경 말씀을 드로잉 했다.
LEE : 소비가 주가 되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상의 이미지와 화려한 스펙터클에 함몰되기 쉽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고 대중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한다. 그저 소비하고 소비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진실이고 거짓인지조차도 구별하기 어려운 시대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한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는 사람조차도 이런 스펙터클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혹시 오래된 오브제들을 보관하는 것이 이런 동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성에서 오는 것인가?
YNaul :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핸드폰과 같은 기기의 업데이트다. 제일 처음의 상태, 기본의 상태가 가장 안정적이지 않나?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뒤처지지 않고 발전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끝없이 사도 신제품은 계속 나온다. 이런 나의 태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일반적인 소비 취향은 아닐 거다. 나는 불편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데에 불편함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너무 쉽게 살 수 있으니 감사함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아날로그적인 걸 좋아한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LEE :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만약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만큼 기억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또한 기억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을 겪어도 기억은 항상 나의 방식대로 남게 되고, 편집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혹시 자기애가 강한 편인가? 특히 애착이 가거나 집중하게 되는 기억이 있는가? 아니면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담아내고자 하는 기억의 순간이 있는가?
YNaul : 자기애가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다. 자책을 많이 하는 편이다. 특별히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자존감이 있을 때도 있고 곤두박질칠 때도 있고,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을까?
작업할 때 의도적으로 특정한 순간의 기억을 꺼내려 하지는 않는다. 작업을 할 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내가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다. 콜라주 작업은 기억과 관련된다. 시간이 담겨 있는 물건,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물건을 고르니까. 그 물건들에는 각자의 기억이 있다.
LEE : 오래된 물건에는 본인이 모르는 누군가의 시간이 담겨 있을 것 같다. 결국 유나얼의 기억과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전에 물건을 소유했던 누군가의 기억이 결합된 작품이다.
YNaul : 그렇다. 작업을 하면서 ‘누가 이 물건을 갖고 있었을까? 왜 버렸을까? 왜 팔았을까?’ 궁금할 때도 있다.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이 사진 속의 사람은 누구고 어떤 상황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같은 질문을 하고 상상을 하면서 작업한다. 자연스러운 궁금증이다.
<Self Portrait> Photo, Mixed Media, Collage, 21x21.5cm, 2016 ⓒ유나얼
LEE : 기억에 대한 작업을 하다 보면 매우 자전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본인의 작업에 자전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가는가?
YNaul : 유나얼의 작업이니 당연히 나의 취향이나 나의 기억이 담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야구를 좋아했고 야구선수가 꿈이라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기 때문에 <Self Portrait>(2016)에 흑인 꼬마 아이가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사진 이미지를 넣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나의 개인사가 많이 담기지는 않는다.
LEE : 기억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YNaul : 기억을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한참을 생각한 뒤) 기억은 시간이다. 그게 제일 적합한 설명인 것 같다. 멈춰 있지 않고 계속 흘러가니까.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기억이 시간이라는 말에 여러 의미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시간이 다르다. 천국에 가도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LEE :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Window> 시리즈는 회화 같기도 하고 부조 같기도 하다. 작품에 사용된 나무 프레임은 본인이 제작한 것인가? 최근에는 이런 식의 작업을 하지 않는데 앞으로 더 작업할 계획은 없나?
YNaul : 단어 그대로 창문, 페인트칠하고 유리를 끼우기 전의 창문이다. 교회 집사님이 가져다 주셨다. 박스를 붙여 나만의 캔버스를 만들었다. 당시 입체적인 오브제와 드로잉의 결합이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콜라주에 집중하다 보니 더 진행하지 못했다. 벌써 10년 정도 된 작업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진행할 수도 있다.
LEE : 석사 논문 『저항 문화로서의 복합조형의 표현 연구: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2006)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석사 논문에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본인은 흑인을 그리지만 흑인 문화 나 흑인의 저항 문화에 대한 내용을 주되게 다루지는 않는다. 본인의 작업에 흑인과 그들의 음악(문화)을 좋아해서 그리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이것도 하나의 프레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미술에서 흑인이 등장할 경우 탈식민주의, 다원주의 같은 인종과 민족의 문제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YNaul : 할렘 르네상스는 석사 논문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론적 바탕으로 쓴 거다. 흑인을 그리는 작가로서 흑인 문화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흑인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흑인 문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보단 많이 알 거다.
LEE : 아까 영향을 받았다고 했던 말했던 바스키아는 여러 면에서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무엇보다 흑인을 미술의 주인공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저항적이고 파격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분명 그 결이 다르지만 유나얼도 흑인이라는 존재 자체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한국을 주 활동 무대로 하는 작가가 한결같이 흑인을 소재로 선택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그런데 유나얼의 작업 속 흑인들을 비교해보면 나름의 전형적인 형식이 있는 것 같다. 혹시 그들을 본인의 판타지에 근거해 그리는 것은 아닌가? 그들을 그저 낭만적인 자기만의 환상 속에 위치시키는 것 말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현실 속 흑인은 아닌 것 같다. 앞선 질문에서 말했듯 작품에 흑인의 이미지가 등장할 경우 그 맥락을 무시하고 감상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다.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만 이 정도로 일관되게 흑인을 그린다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기에 답변을 듣고 싶다.
흑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작업하는 것인가? 또한 흑인들의 사회 역사적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 있는가? 서구인이 과거 비서구권 국가를 이해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YNaul : 흑인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그들의 신체적 특징, 행동, 리듬감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다. 특별히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가장 보편적 의미의 흑인, 흑인 문화를 좋아하게 된 거다. 그냥 순수한 즐거움이다. 누군가는 ‘이 사람은 누군데 왜 이렇게 흑인만 그리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자신은 흑인을 보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뉴욕 유학 시절 흑인들이 강도와 같은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셨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그림 속 흑인은 판타지일 수 있다. 흑인이 하는 음악에 빠져 있는 사람이 그려내는 흑인의 이미지이니 환상 속의 사람들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메이카에 가서 보니 과거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과연 자메이카에서 살았더라도 이처럼 흑인을 그렸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후 내가 그저 좋아서 그들을 그리는 순수한 행위가 현실의 많은 문제들을 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흑인을 그리는 게 좋다. 그리고 나는 흑인의 신체적 특징이 부럽다. 노래를 할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물론 힘들게 사는 흑인들,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다. 그런데 그건 흑인이어서 불쌍한 게 아니라 힘든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이 불쌍한 것이다.
LEE : ‘ebony’라는 단어에 흑인(흑인 문화)라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이 있는가?
YNaul : 다른 의미는 없다.
LEE : <Plant The Sweet Things>(2005)의 경우, 처음 봤을 때 벽화라는 점에 서 <존경의 벽 Wall of Respect>(1967~1971)을 떠올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것 역시 나의 프레임 씌우기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차이는 크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미국 문화와 흑인 문화에 주목하고 동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독특하다. 그런데 관점을 조금 달리 하면 본인이 접한 첫 흑인 문화도 결국 미국 문화 속의 흑인 문화다. 혹시 본인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의 이미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시대가 변했어도 여전히 인종차별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고 흑인의 문화는 여전히 일정 부분에서 비주류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나?
YNaul : 흑인 문화를 비주류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는 내가 접한 문화보다 조금 더 앞선 때인 것 같다. 내가 영향받은 건 분명 주류의 음악과 문화이니 말이다. 1990년대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던 대중음악은 흑인 음악이다. 내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흑인 음악이 미국의 주류 대중음악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대중음악가가 하고 있는 음악 자체가 미국의 음악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대주의는 아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을 것이다. 강대국이 어떤 문화를 만들고 전파하면 주변의 국가들은 영향을 받게 된다. 모든 매스미디어를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모든 문화가 다 그렇다. 가장 객관적인 사건과 정보를 알려준다고 여겨지는 뉴스에도 보다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시선이 들어간다. 전혀 영향을 안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런 사회 문제들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다.
LEE : 2005년 자메이카에 갔다. 그 뒤에 아프리카에 간 적은 없는가? 자메이카는 왜 갔는가?
YNaul : 아프리카는 한 번도 못 갔다. 아프리카를 가고 싶었는데 여러 여건이 안 되어 포기했다. 내가 레게(reggae)를 좋아해서 자메이카에 다녀온 것이다.
LEE : <Drawing> 시리즈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드로잉들을 보면 간결한 선으로 형태를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해부학 공부를 따로 했다거나 데생 연습을 따로 했나? <Soul Child>(2004)와 같은 작품을 보면 관찰력과 손의 감각 모두가 탁월해 보인다. 최근에는 드로잉 작업이 다소 뜸했던 것 같은데 본인 작업에서 드로잉이 갖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YNaul : 특별히 연습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미술 학원에 다니면서 그렸던 것 정도다. 특별히 인체를 연구하거나 해부학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대상을 보면서 그냥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미술 학원을 다닐 때 선을 이용해서 한 번에 이미지를 잘 완성한다고 동양화 선생님이 나의 그림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드로잉은 앞으로도 많이 할 생각이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드로잉 작업을 중점적으로 하게 될 것 같다.
LEE : 작품에 등장하는 뮤지션이 아닌 흑인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자메이카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미지인가? 작업을 위한 흑인의 이미지를 어디에서 얻는가?
YNaul : 작품 속 흑인들 모두가 내가 만난 사람은 아니다. 보통은 사진을 보고 그린다. 평상시에 흑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책이나 잡지 같은 것들을 많이 산다. 책을 보다가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린다.
LEE : 그래서인지 그림 속 흑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위치한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 속 흑인들이 진공 상태에 머무르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인물 그 자체에만 집중해서 그런 것인가? 흑인을 단독으로 그린 드로잉의 경우 말 그대로 흑인을 그렸다는 것 외에 다른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혹시 흑인들과 민족이나 이념을 뛰어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조우를 원해서 그런 것인가?
YNaul : 시공간을 초월한 진공 같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굳이 정보를 주고 싶지 않다.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모습 자체가 좋아서 그린 거니 그 외의 무언가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냥 이미지가 좋아서 선택한 거다. 단순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잘 안 그린다. 주로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을 그린다. 그건 앞서 말했듯 나의 취향 문제인 것 같다.
<Soul Food> Silk Screen, 60x95cm, 2010 ⓒ유나얼
LEE : 필자가 보는 유나얼의 작업은 다원주의적이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한 화면에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다양한 문화적 맥락들을 무시하고 그저 보기 좋은 이미지만을 재단하여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Soul Food>(2010)에 등장하는 엔트 제미마(Aunt Jemima)는 정형화된 흑인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모든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작업할 수 있다. 작품에 반드시 의미가 담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가 좋아서 모아놓았다는 작가의 답변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또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
YNaul : 날카로운 질문이다.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외의 이유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 다른 이유나 의미를 만들어서 답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그렇다면 내가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가?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할 것 같다.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상인 작가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놓은 작업이 뭐가 문제인가?’ 같은 반대의 질문도 가능하다. 작업은 작가의 주관적인 태도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모든 미술에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는 주장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LEE : 흑인의 이미지나 다문화적인 이미지를 보고 무조건 탈식민주의나 다원주의적 의미를 찾는 행위 역시 또 하나의 차별이나 편견이 될 수도 있겠다. 또한 그저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해서 작업을 했다고 해도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지점(작품)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이 자연스레 만들어질 수 있다. 유나얼이라는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YNaul : 음악이 그렇다. 흑인들이 백인의 전통 민요를 따라 부르다가 거기에 흑인 노동요가 섞이고 자연스럽게 가스펠이 탄생하고, 이런 과정에서 대중음악이 만들어졌다. 지배 문화와 피지배 문화 사이에서 의도하지 않은 무언가가 탄생한 것이다.
LEE :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를 식민지 지배하면서 내세웠던 대표적인 근거가 기독교의 전파였다. 본인의 작업에서 흑인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교리가 다뤄진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기독교가 악용된 것이다. 이런 내러티브를 떠올릴 경우 역사를 성찰하는 작업이 된다.
YNaul : 그와 관련된 지식이 풍부하지는 않다. 성경의 내용을 백인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흑인을 지배하는 데에 악용한 역사는 분명 비극적이다. ‘백인들에게 그렇게 핍박을 받았는데 흑인들은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와 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LEE : 주제를 조금 바꿔보자. 예술 장르의 해체와 융합이 익숙해진 시대라 해도 미술가이자 음악가로 동시에 활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재능이 남달라 보이는데 혹시 미술이나 음악 외의 본인을 표현하는 또 다른 활동이 있는가? 춤도 추는가? 필자를 처음 만났을 때 ‘미술은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음악 작업을 하다 느끼게 되는 표현의 한계를 미술로 극복하거나 해소한다는 의미인가?
YNaul : 춤은 안 춘다. 잘 추지 못한다. 음악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미술로 표현한다는 것은 맞는 얘기다. 평상시에 그 사실을 의식하거나 계산하면서 작업하지는 않지만 시각 예술만이 풀어낼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반대로 음악만이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또한 내가 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음악 활동은 대부분 여러 사람들과의 협업이기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감이 더 크다. 실험적인 음악이 아닌 대중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것이 맞다. 내가 들으며 성장했던 음악도 모두 대중음악이다. 물론 음악적인 실험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중음악과 실험적인 음악 사이의 간극이 큰 편이라 음악으로 완벽히 자유로운 표현을 하긴 힘들다.
LEE : 설치 작품에 음악이 포함되기도 한다. 전시 때마다 선곡이 달라지는가?
YNaul : 음악이 나오는 설치 작품은 <Music Box>(2004~present) 하나다. 매 전시 때마다 다른 음악이 나온다. 주로 1960~1990년대까지의 흑인 음악들이다.
LEE : 잠시 아트테이너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와 관련된 주제를 다룰 때 빠지지 않는 작가다. 작가인 동시에 가수니 단어의 의미에는 부합한다.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유나얼은 기계적으로 아트테이너라 분류할 수 없는 작가다. 또한 나에게는 작가 유나얼이 더 익숙하다. 아트테이너로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자신들의 유명세 덕을 본다는 비판, 예술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연예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진지하게 보지 않는 것이며, 그들이 미술계의 관습을 따르지 않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누구든 미술을 포함한 예술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을 전공해야만 작가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작업에 대한 평가도 논리적 근거만 분명하다면 자유롭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단,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인정받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양적, 질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일관성 있는 활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주변 사람들 중에는 유나얼을 가수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유치할 수도 있지만, 나는 글을 쓸 때 유나얼이라고 적어 가수 나얼과 작가 유나얼을 구별해왔다. 본인이 유명 연예인이어서 작가로서의 활동이 폄하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가?
YNaul : 나의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속상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연예인이란 이유로 나의 작업을 진지하게 보지 않는 게 제일 속상하다. 가수가 전시도 한다는 정도로 보고 지나가는 거다. 아예 작품을 보지도 않고 가수가 노래만 부르지 왜 전시를 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편견 없이 봐주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인 것 같다. 그래도 최근 몇 년간 내 작업을 눈여겨 봐주시고 진심을 알아주신 분들이 계셔서 힘들 낼 수 있었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그냥 꾸준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내가 더 좋은 결과물을 꾸준히 내놓지 않으면 그런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모든 작가가 다 꾸준히 노력하듯이 나도 작가로서 묵묵히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작업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미술과 음악 모두에서 훌륭히 활동한다는 점에서 백현진 작가를 좋아한다.
LEE : 본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본인의 음악을 다 들어야 하는가?
YNaul : 반드시 들을 필요는 없지만 연결되는 지점이 있긴 하다. 신앙적인 내용이 들어간 노래들은 연관이 있다. ‘Storm of Zion, 바람기억(나얼 솔로 1집),’ ‘Reason 4 Breathing(나얼 리메이크)’, ‘Rapture(브라운 아이드 소울 4집)’ 등이다. 나의 음악은 아니지만 흑인 음악이 연결될 때도 있다.
LEE : 작업에 사용된 재료나 작업의 방식이 포스트모던적이다.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꽤 들었을 것이다. 작업이 설치나 비디오 영상으로 확장되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럽다. 기독교적인 믿음과 관련된 고민이라 추측 가능하다. 일정 부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에 대해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각을 갖는다.
YNaul : 모든 작가가 다 그렇겠지만 작업을 할수록 점점 고민이 많아진다. 나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나의 작업이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인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다. 콜라주 작품 하나를 할 때에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이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을지 생각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면 나는 이것을 그만둬야 하는지와 같은 고민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이 성경과 반대될 수 있지만 나 자신도 이 시대를 살고 있고,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어디까지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늘 고민한다. 쉽지 않다.
<Unpredictable Words 3> Drawing & Mixed Media, 60x95cm, 2010 ⓒ유나얼
LEE : 최근으로 올수록 성경의 내용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가장 최근의 개인전 ‘유나얼.ZIP-for thy pleasure’(2017)에서 선보였던 작품 대부분은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기독교적인 주제가 작품에 담기게 되었나?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면에 내세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요즘 작가로서 보기 드문 행보다. 이것이 필자가 작가 유나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개인적으로 작품에 종교적인 무언가를 담아내는 작가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본인의 작업은 종교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동시대 작가들과 그 방향이 많이 다르다. 본인의 신앙이 예술적 성취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표현의 제한을 가져올 수도 있다.
YNaul :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텍스트가 작품에 등장하면서부터일 것이다. 텍스트가 작품에 등장한 것은 영어의 이미지 그 자체가 시각적으로 재미있어서였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곡의 가사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을 보고 그것이 성경 구절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관객, 그냥 이미지로 읽는 관객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LEE : 본인이 읽는 성경은 무엇인가?
YNaul : 킹 제임스 성경이다.
LEE :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에는 영어보다 한글이 낫다. 아직까지는 국내 활동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한글을 가지고 작업할 생각은 없는가?
YNaul : 시도해본 적은 있다. 주관적 취향이지만 시각적인 부분에서 영어의 이미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LEE : <말씀 콜라주> 시리즈의 경우 하단에 성경 말씀이 적혀 있고 상단에는 그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시각적으로 유사하다고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이런 작업들은 포토몽타주(photo montage)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개별 이미지들의 논리적 인과관계를 알고 있으니 괜찮지만, 그것을 모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보여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 하단에 적힌 성경의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특히 성경을 이용한 작품의 경우 의미를 찾아내려고 더 고민하게 된다. 예를 들어 <Unpredictable Words 3>(2010)의 섬광 같은 이미지는 빛,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 같다. <888 Note>(2010)의 경우 다른 작업에 비해 구체적 이미지가 거의 없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Drawing & Collage on LP Cover>(2017) 하단에 적힌 숫자 중에 1이 2개인데 이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YNaul : 성경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도 있다. 그저 조형적으로 어울릴 것 같아 결합시킨 것도 있다. 질문한 <Unpredictable Words 3>은 그저 기하학적인 이미지 그 자체가 좋아서 붙인 것이고, <Drawing & Collage on LP Cover>의 숫자 1도 작업하다가 우연히 두 개가 들어간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된 상황이 가져오는 시각적인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미지와 텍스트가 연결되는 작품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Coramdeo>(2015)에서 카메라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의미다. <Shekem>(2011)은 어깨의 기원이 되는 단어여서 어깨 이미지를 넣었다. <888 Note>는 신을 상징하는 숫자인 8을 넣은 것이다.
LEE : <말씀 드로잉>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엉켜있는 선 이미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또한 작품 속 인물들 중 입이나 눈이 가려진 경우가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어 <Adam’s Image>(2017)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YNaul : <말씀 드로잉>의 선 뭉치, 눈이나 입을 가린 것 모두 시각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눈이 보일 때와 가려졌을 때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Adam’s Image>의 경우에는 콜라주된 사진이 전체적으로 연한 분홍빛이어서 중앙에 놓인 소년의 눈에 핑크색 가림막이 있으면 더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죄가 생겨나면서 인간이 아담의 형상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5장 3절의 내용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아담의 자식들은 인간인 아담의 형상이라는 비극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사진 속 소년이 안고 있는 아기도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담(인간)의 형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 야 한다.
LEE : 성경의 내용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자꾸 모든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감상하게 된다. 반대로 성경의 내용을 모르면 작품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성경을 바탕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들의 의미는 명확히 정해져 있다. ‘신부는 예수님을 믿는 이를, 신랑은 예수님, 결혼은 교회를 상징한다, 갓난아기는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 보니 기독교인이라면 알 수 있는 도상과 작가가 의미를 부여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도상이 공존한다. 만약 관객들이 작품을 봤을 때 전혀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는가? 성경의 내용을 다룰 경우 관객에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정확히 의미를 전달해야 할 의무도 있어 보인다.
YNaul : 관객들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미가 있을 경우 말씀을 함께 적어둔다.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핸드아웃으로 만들어 놓았던 적도 있었다.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 정해놓고 작업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조화로운 조형 작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로 다가가는 것이 1순위다. 작품을 다 완성한 후 내가 왜 이 이미지들을 선택했을까 생각할 때도 많다. <Image Bomb>(2017)처럼 전시장에 놓일 때까지 의미가 부여 안 되었던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우측에 조 루이스(Joe Lewis) 우표가 있다. 유명 헤비급 복서인데, 갈색 폭격기(brown bomber)가 이 사람 별명이었다. 그래서 전시 직전에 제목을 이미지 폭격으로 정하게 되었다. 제목을 고민하다 보면 신기하게 이야기가 들어맞을 때가 많긴 하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지 않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LEE : 아무에게도 의미를 안 알려주고 혼자만 알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
YNaul : 일부러 말하지 않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있긴 하다.
LEE : 본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관객이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할까?
YNaul : 나는 오히려 노력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작품을 봤을 때 느끼게 되는 인상, 이미지를 경험하는 게 첫째다. 그 후에 작가의 의도를 찾아도 괜찮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전달하는 1차적인 정보들을 의식하지 않고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콜라주 속 깃털을 보고 깃털은 새에게 달린 것이다. 새는 무슨 의미인가?’ 이런 식의 정보 나열을 없애면 편하게 볼 수 있을 거다. 전체를 하나로 놓고 봐주면 좋겠다. 부분들이 이뤄내는 한목소리, 화음을 느껴주길 바란다.
LEE : 오늘날의 미술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특정한 메시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열린 의미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미술 작품이 무조건 관객과 소통하거나 함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동시대의 미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미술은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기에 누가, 언제, 어디에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종교적 교리를 담아낸 작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본인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이나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혹시 본인이 원하는 메시지를 다 전달할 수 없는 한계나 오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Wavering Faith #1> Drawing & Mixed Media, 60X95cm, 2011 ⓒ유나얼
YNaul : 복음을 다룬 작업의 경우, 아직까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독된 경우는 없었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르게 해석되면 속상할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이미지로서의 접근이니 내가 의도한 대로 다 전해질 수도 없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악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혀 다른 해석이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업을 통해 조금 더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 때는 힘들다. 내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괴로워하는 순간은 내가 원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이다.
나의 작품들은 모두 다양한 세부 이미지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해석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더 좋은 의미였다. 그럴 때는 감사하다. 작가마다 작업을 하는 이유가 모두 다를 것이고 관객들도 미술을 보러 오는 이유가 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작업을 하면서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보고 ‘참 보기 좋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그저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LEE : 앞서 말했듯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면에 내세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요즘 작가로서 보기 드문 행보다. 이것은 종교를 다루는 작업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갖는다.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담아내는 작업이니 말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특정 종교의 도상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사회, 정치, 문화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것들이다. 종교 그 자체를 다룰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부활,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의문과 고뇌,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숨겨진 이중성 등을 다루어 신성모독 논란까지 일었던 작품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작업들을 본 적이 있는가? 봤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YNaul : 그와 같은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작가가 어떤 과정 속에서 작업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거고, 누구나 창작의 자유는 있는 것이니 만약 그들의 작업을 본다고 해도 내가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결과물이 누가 보기에도 선하면 좋겠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니까 말이다. 누가 봐도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는 일이다.
LEE : 종교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신의 형상이 담긴 작품(조형물)이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이 특정한 이미지로 한정된다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에도 종교 미술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을 받아들인 미술가들의 작업은 이전의 종교 미술과 차이를 보인다. 대중성을 갖는 판화를 통해 성경의 내용과 종교 개혁의 의미를 널리 퍼뜨렸다는 점도 변화 중 하나로 거론된다. 혹시 본인이 여러 개의 원본을 갖는 프린트 작업을 하는 것도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오래전부터 사회(대중)를 향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미술가들에게 판화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 왔다. 동일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아내는 여러 점의 원본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YNaul :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언어도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씀 자체로도 충분하다. 복음도 들음에서 온다. 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예수님을 그리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이미지에 묶여버리면 안 된다. 그건 매우 위험하다. 백인 중심주의적인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예수님의 형상인 것도 문제라 생각한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는 모든 미술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신의 형상이 담긴 그림이 우리 집에 걸려 있어야 마귀가 안 들어오고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믿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원본이 하나인 회화보다 더 많은 장소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프린트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다.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 장소에 작품이 걸리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한다.
LEE : 성경의 내용이 예술적으로 표현될 경우에는 정말 많은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완성된 작품이 다양하게 읽히기 전에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예술가의 해석이나 관점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이다.
YNaul : 성경 해석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 무엇보다 비성경적 요소가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비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들을 의미한다. 작업하면서 주의는 하지만 그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다. 평상시에 수시로 메모를 한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다가도 내가 작업으로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적어두고 그것을 토대로 작업을 진행한다.
LEE : 작업이 점점 개인의 내면에 집중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를 다루니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겠다.
YNaul :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요즘 들어 내가 나의 인생을 똑바로 잘 살고 있는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잘하고 있는지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한다. 작업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신앙적인 이야기들을 담게 된다. 점점 내가 좋고, 재미있고, 보기 좋은 작업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다루는 작업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LEE : 수면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작업을 하는 시간은 규칙적으로 정해 두는지 궁금하다.
YNaul : 7~8시간 정도 잔다. 작업 시간은 정해놓지 않는다. 몰아서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업을 할 때에는 즐거움 반, 두려움 반인 것 같다.
LEE : 필자와 대화 중에 ‘특별히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말해서 조금 놀랐다. 무슨 의미인가?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YNaul : 신앙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미련이 없다는 의미다. 내 삶과 연관된 것 같다. 어릴 때 데뷔했고 음악인으로서, 이런 직업을 가진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은 거의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성공의 기쁨 못지않게 삶의 허무함이나 인간의 한계 같은 것들을 빨리 느끼게 된 것 같다. 전시나 공연을 한 번 하고 나면 굉장히 허탈하다. ‘즐거움에 탐닉하거나, 여유 시간에 나를 위한 무언가에 몰두하거나, 이런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 말씀으로 향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LEE :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평론과 대화’ 프로젝트를 지켜봐 주고 기도해준 유나얼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이 글을 읽을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YNaul :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