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02.

본 글은 2021년 10월 21일(목)에 진행된 이문정과 심래정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심래정 Sim, Raejung

LEE : 이문정, Sim : 심래정

LEE : 심래정의 작업은 유머가 더해진 잔혹 동화 같다. 날 것의 느낌이 나는 표현 방식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죽음과 인간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화풍 때문에 정말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모호함이 생성된다. 작가가 이야기한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낼 수 있는 드로잉’을 위한 표현법은 정말 다양하다. 이와 같은 화풍을 선택, 유지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Sim : 이런 화풍의 드로잉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이다. 당시에는 드로잉을 본 작업을 위한 에스키스 혹은 낙서처럼 끄적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일기처럼 그린 것들을 지인들이 발견하고 드로잉으로도 충분히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줬다. 내가 잘 그려내고 재미있게 할 수 있어서 그와 같은 화풍을 유지하는 것 같다.

LEE : 드로잉에 기반한 애니메이션 이전의 작업이 궁금하다.

Sim : 그 이전은 대학교 졸업 전이어서 딱히 스타일이나 화풍이 있진 않았다. 과제로 주어진 것들을 했다.

LEE : 일부 작업에서 색채가 사용되고 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흑백이다. 유채색이 없다는 의미뿐 아니라 흑과 백의 강한 대비가 두드러진다. 색채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Sim : 우선 검정 잉크가 비교적 구하기 쉽다. 작업의 속도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또 내 기준에서 다양한 색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검정 하나도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LEE : 일부 작업에서 강한 오렌지 색이 등장하는데 남다른 의미가 있는가?

Sim : 좋아하는 색이다. 라이트 오렌지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페인팅이나 드로잉에도 이 색을 쓰고 싶은데 쉽지 않아 내가 만든 오브제에 쓰고 있다. 그 색에 마음을 뺏겨서 몇 년째 쓰고 있는데 최근에는 조금 질렸다. 현재는 좋아하는데 질리고, 질렸는데 좋은, 갈팡질팡한 상황이다.

<밤하늘을 나는 새: 밤의 행진>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3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2’ 30”, 2014, 음악: 이의경 ⓒRaejung SIM

LEE : 심래정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 펜촉을 이용한다.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는데 고수하고 있다. 한편 큰 드로잉의 경우 페인트 마커를 사용한다. 사용하는 도구와 재료를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Sim : 만화가들이 작업할 때 쓰는 펜촉(제브라 스푼 펜촉)과 잉크이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사각사각 종이를 긁는 느낌이 좋아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잉크(델리타 블랙 잉크 1번)가 펜에 넣어 쓸 수 없는, 병에 든 제품으로만 판매되기도 하고. 물론 잉크를 계속 찍어서 쓰다 보니 번거롭긴 하다. 또 반복적으로 쓰다 보면 펜촉 끝에 잉크가 굳어서 뭉치기도 해 관리해줘야 한다. 안 쓰다 보면 녹슬어서 펜촉을 갈아 끼워야 하는데 그때마다 내 기분을 리셋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붓도 가끔 사용하지만 비중이 높진 않다. 큰 작품을 진행할 때는 광고 간판을 만들 때 씌우는 필름인 확산지에 주로 그래피티할 때 사용하는 페인트 마커로 작업하고 있다.

LEE : 펜촉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그 결의 느낌 때문에 불편할 것 같다.

Sim : 많이 불편하다. 너무 불편해서 만년필로 바꿔도 보고 다른 펜도 써봤는데 결국에는 돌아온다. 아직 펜촉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재료는 못 만난 것 같다.

LEE :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길 바란다.

Sim : 나는 드로잉을 습관적으로 하려 한다. ‘작업해야지’라며 날을 잡아 진지하게 드로잉하기보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그리는데, 그렇게 그린 드로잉들을 모아놓고 보다 보면 그중 주목하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그걸 보며 이야기를 상상한다. 마치 단어처럼 흩어져 있는 한 장 한 장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이야기 순서를 맞추듯이 구성해간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드로잉을 추가하기도 한다. 낱장의 이미지가 단어라면, 연결을 위해 중간에 들어가는 드로잉은 접속사의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줄거리를 만든 다음 멈춰있는 이미지에 움직임을 주는 동화 작업을 하게 된다.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리다 보니 힘들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축적된 드로잉들을 플립북처럼 넘겨보면 너무 즐겁고 좋다. 그려내는 과정은 힘들지만 만족도가 높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종이 작업이 끝나고, 1차로 움직임을 보고 나면 컴퓨터로 스캔해 jpg 파일로 세세한 움직임을 잡는다. 이후 이미지 파일을 한 장씩 연결한 뒤 최종 영상파일로 렌더링(rendering)하면 완성된다.

LEE : 원화의 크기는 동일한가?

Sim : A4 크기의 종이를 쓴다. 요즘 수작업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위한 종이는 거의 단종되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애니메이션의 시작이 되는 드로잉은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B동 301호>,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3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서라운드, 반복 재생, 2019, 음악: KIN ⓒRaejung SIM

LEE : 배경까지 매번 손으로 그리는 방식이라 아무리 똑같은 위치에 그리려 노력해도 미묘한 차이가 생겨 완성된 영상이 살짝씩 흔들리는 효과가 난다.

Sim : 성격상 너무 깔끔한 걸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어색하고, 빈틈이 보이고, 그런 것이 내 취향인지 더 마음이 간다. 칼같이 맞추지 않아도 되는 게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라 이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손으로 끝없이 그리는 행위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로울 때가 있다. 그래서 디지털로 애니메이션 작업도 해봤는데 종이랑 질감 자체가 너무 달랐다. 또 몸이 괴로운 만큼 작업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LEE : 작품에 잘린 신체(머리, 손과 발 등)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또한 작품마다 유사한 외모를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인간상의 기원이 있는가?

Sim :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상황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후 신체의 반응과 감각이 궁금해졌다. 비슷한 외모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내가 다양한 표현을 하지 못해서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동일한 인물일 수도 있다. 각각의 애니메이션은 같은 인물이 다른 상황에 놓인 것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LEE : 등장인물(존재)들은 이름을 갖고 있는가?

Sim : 인물의 이름은 분명히 있었고 작업 당시에도 이름을 불렀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LEE : 새 이름을 지어줄 생각은 없는가?

Sim : 새로 이름을 지어도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먹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LEE : 심래정의 애니메이션은 그 의미가 불분명한 결말 혹은 사건을 보여준다. 제목과 이미지들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하지만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사건인지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작가가 “우발적으로 이미지를 쏟아내기보다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야기에 맞춰서 이미지를 그렸다고 밝힌” <B동 301호>(2019)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Sim : 나는 우발적으로 쏟아낸 드로잉 중 몇 개를 선택해 그걸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물론 그건 나만 아는 이야기라 관객들이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B동 301호> 같은 경우는 작업 방식이 달랐다. ‘B동 301호’는 실제로 내가 사는 동과 호수이다. 해당 동의 지하에는 복도 양옆으로 창고 방들이 있는데 세대별로 하나씩 배정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곳에 갔다가 그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게 <B동 301호>이다.

<매뉴얼 드로잉>,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1’ 40”, 2012 ⓒRaejung SIM

LEE : 독립된 드로잉으로만 발표하는 작품에도 전부 이야기가 담기는가? 숨겨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Sim : 드로잉마다 이야기가 있다. 사실 나도 작업하면서 이야기가 꼬일 때가 있다. 그러니 관객들은 더 심할 것 같다(웃음).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버리면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줄 수 없다. 관객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유추해내는 게 더 재미있다. 때론 관객을 놀리고, 무섭게 하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있다.

LEE : 이미지는 그 자체로 언어보다 더 열린 의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심래정의 애니메이션 속 이미지들은 하나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초현실주의 시어처럼 분절되어 느슨하게 결합되어 의미 생성 혹은 상상의 여지를 더 많이 남기는 것 같다.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나 의미가 어느 정도 전달되길 원하는가?

Sim : 과거에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 전달되길 원했었다. <매뉴얼 드로잉>(2014)이라고 내가 어떤 마음에서 작업했는지를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관객들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신체적 지침서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의도를 몰라도 괜찮고, 알면 공감해줘서 고마운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에는 작업하면 할수록 내가 왜, 어떤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더 많이 생긴다. 아마 그 답을 알아내는 순간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의미가 전달되길 원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이다.

LEE : 애니메이션을 위한 드로잉들을 모아 전시한 적이 있는가? 책으로 출간해도 좋을 것 같다.

Sim : 전시회에서 애니메이션 영상 옆에 원본 드로잉을 놓고 보여준 적은 있었는데 드로잉만으로 전시를 연 적은 없다. 책 같은 경우 <지옥에서 보낸 한철>(2011)의 원화를 출력해서 작은 플립북으로 한 권 만든 것은 있다. 그런데 보는 방식이 불편해서 어떻게 디자인을 해야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 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1’50”, 2010 ⓒRaejung SIM

LEE : 심래정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순간적으로 <팡타스마고리 Fantasmagorie>(1908), <어릿광대 코코 Koko the Clown>(1916)나 <베티 붑 Betty Boop>(1930년대)을 떠올렸다. 혹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나?

Sim : 과거의 영상들을 많이 좋아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한 건 아니다. 아마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이 같아 유사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LEE : 심래정의 영상 작업의 분류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조금 다름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이 맞긴 하지만 그 고유한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Sim : 때론 뉴 미디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외에 다른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LEE : 애니메이션의 경우 1초에 일정 수 이상의 이미지가 연결되어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심래정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 움직임이나 형식 등에서 다르지만, 유사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려 움직임을 전한다는 점은 같다. 1분 정도의 영상을 위해 몇 장 정도의 드로잉을 제작하는가?

Sim : 2010년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다. 1분 50초 정도 되는 영상이고 화면 전환도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약 2000장 정도였다. 최근에는 세어본 적이 없어 정확히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보통 초당 24프레임, 30프레임처럼 균일하게 이미지가 들어가는데 나 같은 경우는 초당 1장의 드로잉이 들어갈 수도 있고 여러 장이 들어갈 수도 있다.

LEE : <층간소음 1>(2012), <층간소음 2>(2013)의 결말이 의미심장하다. 층간소음 제공자에게 복수한 것처럼 보이는 아래층 사람도 결국은 복수를 위해 이용한 존재에게 같은 공격을 받는다. 허무한 비극적 결말이다.

Sim : 당시 인간관계에서 결국에는 믿을 사람 없다는 걸 느꼈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속고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결말로 가게 되었다.

<층간소음 2>,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2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1’ 32”, 2013, 편집: 심래정, 조형준, 음악: 이병재 ⓒRaejung SIM

LEE : <B동 301호>와 같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봉합(바느질)은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해체하고 서로 다른 존재(세계)를 결합해 이질성이 공존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식인왕국> 시리즈가 다루는 인육을 먹는 행위를 다른 세계를 자신의 안으로 흡수하기 위한 시도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을까?

Sim : 연쇄 살인마나 살인행위를 한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대니얼 디엘(Daniel Diehl), 마크 도널리(Mark Donnelly)의 『식인 사이코패스가 몰려온다』(황근하 역, 삼인, 2010)’ 같은 식인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을 읽다 보니 식인의 기원과 관련해 장례 의식에서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그를 기억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예를 들어 동서양 식인의 장례문화 내용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자면 탄자니아의 도(doe)족은 1900년대까지도 제례적 신인 행위를 했다고 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LEE : <B동 301호>를 보면 프랑켄슈타인이 생각나기도 한다.

Sim : 프랑켄슈타인을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은 없다. 이번에 찾아보니 절단된 신체를 모아서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고, 그 창조물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비슷한 맥락이다. 단 결말이 다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죽임을 당한다. <B동 301호> 속 신체는 이전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잔해들이다. 공격성을 갖고 있었던 한 인물에 의해 사람들의 신체가 절단된 뒤 버려졌는데 그것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봉합했다. 나는 봉합된 존재가 서로 다른 신체들이 붙어 있지만 서로 다른 의식을 갖는 샴쌍둥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2019년부터 공격적인 성향들이 좀 많이 누그러졌다고 해야 하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LEE : <B동 301호>나 <맨 처음 생긴 것은>(2020)에 인간의 장기나 소화 기관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맨 처음 생긴 것은>의 경우 적혈구와 백혈구도 등장하고 인체 도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잘못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맨 처음 생긴 것은>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설명을 부탁한다.

Sim : <맨 처음 생긴 것은>은 플레이스 막3에서 열렸던 전시 [코로나 시대의 사랑](2020)을 위한 작업이다. 나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이 세상을 부유하다 우연히 인간의 신체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안락함과 포근함을 느껴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게 인간에게 해가 된 것이란 상상을 했다. 바이러스가 의도치 않게 공격성을 갖게 된 상황을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의 몸 안에서 백혈구와 코로나바이러스가 서로 싸우는 상황을 공장이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맨 처음 생긴 것은>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서라운드, 1’30”, 2020, 음악: KIN ⓒRaejung SIM

LEE : 작업을 위해 필요한 절대 시간 때문에 <맨 처음 생긴 것은>처럼 특정한 전시를 위해 제작할 경우 더 힘들 것 같다.

Sim : 아무래도 하나하나 내 손으로 직접 작업하다 보니 마감이 있으면 신체적으로 너무 힘들다.

LEE : 작업의 특성상 어시스턴트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 같다.

Sim : 한 번 스캔한 이미지를 후보정하는 작업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결국은 내가 다 다시 하게 되었다. 시대를 역행하는 건지 일부러 불편한 방식을 찾게 된다. 몸이 너무 편하면 쓸모가 없어지고 역할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고되게 몸을 쓰는 작업을 찾는 것 같다.

개인전 [B동 301호] 2019,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기획전시장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 전시 전경 ⓒRaejung SIM

LEE : 영상과 드로잉뿐 아니라 설치(입체)가 같이할 때 그 매력이 더욱 부각된다. 설치 작업을 함께 선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Sim :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B동 301호](2019)에서 처음 영상과 설치를 함께 전시했다. 작업하다 보면 특정한 집이나 방 같은 공간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공간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내가 그림이 되어 들어갈 수는 없으니 공간을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밖으로 끌고 나와 전시장을 하나의 배경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실현한 것이다. 공간을 구현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재미있어서 계속할 것 같다.

LEE : 애니메이션을 위한 드로잉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것과 같은 초월적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집중을 통한 망아적 경험인가? 아니면 손의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생각하지 않고도 육체적인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 나온 결과인가? 또한 ‘도를 닦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작업이 일종의 명상 혹은 수행과 같은 의미를 갖는가?

Sim : 작업하다 보면 가끔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정말 짧은 찰나 멍해지고, 순간 번쩍하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작업이 힘들고 고되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돌고 돌아서 작업 앞으로 돌아온다. 결과물이 궁금하고 빨리 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마감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결말을 내기 전까지는 그 앞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끝이 나기까지 나를 다스리고 자기 최면을 하기도 하면서 작업하다 보니 도를 닦는 행위, 수양과 같다고 말했다.

개인전 [B동 301호] 2019,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기획전시장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 전시 전경 ⓒRaejung SIM

LEE : 심래정에게 작업이 치유의 의미도 갖는지 궁금하다.

Sim : 매우 그렇다. 나에게 작업은 치유이고 배설의 행위이다. 그림을 그리고 혼자 이미지를 보면서 많이 좋아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작업할 때 주인공에 나 자신을 이입해서 그런 것 같다. 주인공이 애니메이션 안에서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슬프면 나도 슬프다.

LEE : 조금 추상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인간 존재와 육체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

Sim : 육체는 끝없이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 존재는 어렵고 알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LEE :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Sim : 나에게 죽음은 여러 번 경험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 무뎌질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맞지만 극복할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