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 08.

본 글은 2021년 5월 31일(월)에 진행된 이문정과 최태훈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최태훈 Choi, Taehoon

LEE : 이문정, Choi : 최태훈

LLEE : <All in one-Indoor cleaners>(2012)가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에 대한 다른 제안이며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모형)>(1919~1920)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라 말했다. 여기에서 ‘다른 제안’, ‘대답’이 뜻하는 바는 각각 무엇인가?

Choi :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과 나의 <All in one-Indoor cleaners>는 모두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다다익선>도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접근했다. 실제로 청소 기능을 가진 작품이었고, 도구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제구실을 하기 어려워지는 조각이었다.

LEE : 시작에 타틀린이 있다고 했는데 왜 타틀린인가?

Choi : 대학원 시절부터 사물과 조각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능적 형태와 미적 형상의 접점을 찾고 싶었는데 타틀린의 예술적 지향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완전히 상반되는 부분도 있었다. <All in one-Indoor cleaners>의 경우 조형적으로는 구축주의적 방식을 사용하되 타틀린이 꿈꾼 유토피아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갈 것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LEE : 구축주의를 생각하면 미술과 사회정치적인 상황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Choi :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구축주의자들을 급진적인 사고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웠다. 내가 마음속에 품는 예술에 관한 기대와 이상이 그들과 비교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사회와 내 작업 사이의 접점을 늘 생각한다.

<All in one-Indoor cleaners> 각종 실내용 청소 도구, 카트, 용수철, 가변크기, 2012 ⓒ최태훈

LEE : <All in one-Indoor cleaners>에 대해 ‘조형성과 기능성 모두에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Choi : 진짜 실패라기보다는 사회적 담론으로서의 실패를 은유한다. 나의 초기 작업은 자기계발을 키워드로 하고 있는데, 2000년대는 모든 게 성공과 실패로 양분되어 있어 성공하지 못하면 큰일 날 것만 같았다. 자기계발이 말하는 성공은 자기 주도적이고 쓸모 있는 것을 뜻한다. <All in one-Indoor cleaners>는 수집한 모든 도구를 사용해 기능할 수 있도록 조합했기 때문에 작업이 진행될수록 불가피한 선택들이 이어졌고, 점점 기능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차원에서 실패를 향해가는 작업이다.

LEE : <All in one-Indoor cleaners>에 사용된 오브제들은 모두 파란색이다. 청소 용품이어서 파란색이 많았을 수도 있지만, 다른 색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Choi : 청소용품을 철물점과 다이소에서 샀는데 거의 파란색이었다. 한국에서는 파란색을 청소 도구의 대표색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작업에선 상징보다는 조형적인 이유에서 색을 통일했다. 조각 전체가 하나의 기성품처럼 보이길 원했다.

LEE : 혹시 <All in one-Indoor cleaners>를 실제 사용하는 행위(퍼포먼스)까지 작품에 포함되는가?

Choi : 당시에는 그렇게 기획했었는데 공식적으로 퍼포먼스를 진행하거나 기록하진 못했다.

LEE : 보관은 다 되어 있나?

Choi : 갖고 있다. 청소 도구들이 탈부착 되기 때문에 분리해서 보관 중이다.

<Father's multitasking device> 방부목, 시트지, 스트레칭기구, 모니터, 컴퓨터, 스피커, 스마트폰, 가변크기, 2014 ⓒ최태훈

LEE : <Mother’s multitasking device>(2013), <Father’s multitasking device>(2013)에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데 스틸(De Stijl)의 색채와 구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Mother’s multitasking device>는 데 스틸 가구, <Father’s multitasking device>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1943)를 떠올리게 된다.

Choi : 몬드리안 구성이 일상에서 활용되는 방식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맥락과는 상관없이 널리 사용되는 것만 보면 바우하우스의 통합적 이념이 실현된 것 같기도 하다. 내 작업에 등장한 몬드리안 구성은 몬드리안 구성처럼 보이는 것들에 가깝다. 미술과 일상을 동시에 레퍼런스로 하고 있다.

LEE : 많은 사람이 있었을 텐데 부모님을 위한 멀티태스킹 모듈을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님 세대를 향한 관심이었는지, 개인 일상의 반영이었는지 궁금하다.

Choi :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작업할 당시에 형이 결혼했고 나 역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네 명이 살던 집에 두 분만 남게 되었다. 부모님 댁에 주말마다 갔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두 분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자식을 키울 때까지 자신의 취향을 발현할 시간이 없었던 걸 수도 있고, 4인 가족 아파트의 공간 구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님이 독립적인 개인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어서 작업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Mother's multitasking device> 방부목, 합판, 소형냉장고, 컴퓨터, 모니터, 스피커, 회전의자, 바퀴, 화장대, 매트_ 가변크기, 2013 ⓒ최태훈

LEE : <망각 그림>(2015~)을 위해 자기계발서의 표지 중 공포감을 주는 디자인, 치유의 디자인을 선별했다고 하는데 어떤 기준이었는가? 공포 혹은 치유의 디자인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으로 보인다.

Choi : 자기계발서의 커버 디자인은 다양해 보여도 메시지는 한두 가지로 수렴된다. 2000년대는 열심히 살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를 주는 디자인이 다수였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 성공의 얼굴, 게으른 루저(loser) 등이 표지에 자주 등장했다. 2010년을 전후로 힐링 산업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명상과 치유가 강조되었다. 한쪽은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할 거라 했고, 다른 한쪽은 쉬어가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책의 요지는 모두 자신을 바꾸라는 것이다. 나는 자기계발 산업을 통해 사회가 개인을 주조하려는 방식에 주목했다. 스스로가 통제를 내면화해서 시스템이 유지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LEE : 자기계발서의 표지 그림을 선택하여 도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Choi : 2000년대 이후 출간된 자기계발서 중 베스트셀러를 검색해 표지 디자인에 따라 공포와 치유로 100개씩 분류한 뒤 일러스트 툴을 이용해 커버 이미지를 따서 도안을 제작했다. 그다음 분류된 도안 2~3개를 겹쳐 다시 약 50여 개의 도안을 만들었다. 사용한 도안의 원본 표지에 나온 색상을 모니터상에서 구별해 가장 비슷한 색을 골라 색연필로 칠했다.

<자연스런 술자리도 커리어다. 치유능력을 경영하라>, 종이 위에 색연필, 21x29.7cm, 2016 ⓒ최태훈

LEE : 작가의 설명대로 컬러링 북이 효과적인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 있는 깨끗한 바탕을 만들어주는 상품이라면 사람들은 쉬는 시간까지도 자유롭지 못하며, 자기계발과 휴식 모두 누군가에 의해 재단된 채로 따라간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컬러링 북을 자기계발에 지친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그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드는 상품으로 볼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머리를 비우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발명품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계발이나 힐링이나 획일화되고 산업화된 것이며 내가 자발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주입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Choi : 바로 그 자발성이 자기계발의 핵심이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자기계발 회로가 내 안에도 있다. 명확한 답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업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유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작업한다는 게 개인의 자유의지를 증명하는 활동 같다.

LEE : 최태훈의 작업은 일관되게 예술의 범주/범위를 생각하게 만든다. 컬러링 북이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올라와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듣고 싶다. 예술이 사회에서 소비되고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다양하다.

Choi : 처음 봤을 때 놀랐는데,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꽤 반가웠다. 머릿속에 명료하지 않은 언어들이 떠다녔고 감각적으로 내가 해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LEE : 작가는 어디까지를 분류적 의미의 예술이라 생각하는가? 예술의 일상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그리고 예술의 일상화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Choi : 예술의 분류적 의미는 유동적이다. 시대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예술과 포괄적 의미로서의 일상은 서로를 전유하거나 이용한다. 그럼에도 그 둘은 분리된 영역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초점을 조금 옮겨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수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를 가진 작품의 창작은 작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쓰임에 따라 의미의 폭이 크지만, ‘예술(품)’과 ‘예술적’인 것은 상당히 다르다.

<세나 구성-세나(DIY 수납박스)> 175x175x160cm, 2017, 사진: 이강준 ⓒ최태훈

LEE : <끝없는 아침>(2015~2016)을 보며 멀티태스킹 모듈을 떠올렸다. 다만 이번에는 자의적 혹은 타의적 통제(를 권유하는 사회)로 인한 수동성과 무력함이 전달되었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2018) 이전의 작품들을 보면 그 안에 사회적으로 해석될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작가 역시 그와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형적인 실험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진행하게 된 남다른 이유와 전환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Choi :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도 변화의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각성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언제나 형식과 내용의 조응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지만 돌이켜 보면 초기에는 주제에 천착한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우선으로 놓고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았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이후의 작업은 단일 조각으로서의 성격이 강할 뿐 조형 과정에 사회적 함의가 녹아있다.

LEE : 결과물을 놓고 보면 형식의 비중이 커졌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Choi :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정확히는 주제를 형식으로 도출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본다. 시간성과도 관련이 있다.

LEE : 초기에는 주제를 정하고 형식, 표현 방법을 찾아가며 작업을 했다면, 이후에는 그 둘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인가?

Choi : 맞다. 초기 작업은 주제가 정해진 후에 전체적인 형식을 설계했다. 리서치 과정도 꽤 길고 구조 짜는데 시간을 많이 쏟았다. 그런데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는 설계 과정이 통합된 듯이 진행했다. 주제와 형식이 시간 차이 없이 구조화되었다.

LEE :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이전에도 DIY 제품을 이용한 작품이 있는가?

Choi : 없다. 2017년에 처음 사용했다.

LEE : <망각 그림>, 앤디 워홀(Andy Warhol)의 <Do it yourself> 시리즈에서 착안한 <손쉬운 그림>(2016),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해주면 좋겠다.

Choi : 작업을 할 때 전작과의 연결성은 의식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설명이 쉽지 않다.

LEE :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를 시작할 때 이전 작품을 전혀 고려 안 하고 그냥 DIY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인가?

Choi : 지나간 작업은 잘 생각 안 한다. 오히려 다음 작업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작업 사이의 연관성은 주로 포트폴리오 정리할 때 보인다. <손쉬운 그림>은 워홀의 <Do it yourself>를 재해석한 작업이다. 아트 상품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망각 그림>과는 표면적으로 묶여 있고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와는 DIY라는 교집합이 있다. 무엇보다 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포섭되지 않는 개인’인 것 같다.

LEE : 정말 많은 DIY 제품들이 있다. 다른 DIY 제품을 작업에 활용할 계획은 없는가?

Choi : 기록해놓은 아이디어들을 묵혀두고 있다. 브랜드의 맥락을 끌어오는 건 아니기 때문에 꼭 이케아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근데 생각보다 DIY 상품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않아서 고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다. 재료보단 유닛을 다루는 방법을 변주하는 것이 재밌다. 사물이 조각으로 인식되는 조건에 대해 더 집중하는 중이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전시 전경, STUDIO 148, 2018, 사진: 이강준 ⓒ최태훈

LEE : 이케아(IKEA)를 사용하다 보니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는 형태적인 면에서 미니멀리즘과 닮을 수밖에 없다. 모든 작업이 그렇겠지만 미니멀리즘, 나아가 조각을 탐구할 경우 작품의 크기가 특히 중요해진다. 작품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Choi : 출품작들은 모두 세트로 구성된 유닛의 개수와 크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출시된 세트에서 일부를 취사선택하지 않았다. 기성품을 변형하지 않고 외부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면에선 미니멀리즘과 겹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니멀리스트들이 본다면 장식적이고 조형미를 추구하는 구시대 미술이라고 할 것 같다. 조각에서 크기와 공간 배치가 중요한 것 또한 미니멀리즘의 영향이 컸기에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다. 관람객의 신체와 조각이 공간에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최소화했다.

LEE : 평상시에도 일상용품, 상품 등을 남다른 태도로 관찰하고 바라볼 것 같다. 상품을 바라볼 때 신경 쓰는 부분이나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가?

Choi : 특별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별생각 없이 본다. 손으로 만지는 사물은 촉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만질 때 감촉이 좋은 물건을 오래 쓴다. 그리고 신상품이 나오면 디자인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했는지를 추적하는 습관이 있는 정도이다.

LEE :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시리즈의 개별 작품들의 제목은 ‘~구성’이다. 구성은 모더니즘 미술에서 무제나 숫자 못지않게 익숙한 제목 중 하나이다. 또 조형예술로서의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구성’이란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Choi : 나는 익숙한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작업으로 많이 가져온다. 예전 작업 노트에 “어디서 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처음 보는 것들을 만들고 싶다”라고 쓴 적이 있다. 작품명은 말 그대로 유닛들의 ‘재구성’이 가장 중요하기도 했고, ‘구성’이라고 했을 때 익숙하게 떠오르는 모더니즘 작업이나 기본적인 조형 실험들과 관계하고 있다. 첫 번째 개인전이었는데 조금은 선언적인 전시명에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물리그 구성_물리그(DIY 빨래건조대)> 160x160x156cm, 2018, 사진: 이강준 ⓒ최태훈

LEE : 작가가 이미 밝힌 대로 결국 DIY 제품은 소비자가 아닌 그것을 판매한 기업이 지시하는 대로 하게 만든다. 소비자의 선택지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례로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를 보면 색조가 균일하다. 제품의 유닛을 모두 샀고, 그것을 그대로 사용해 완성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담긴 색이 아니다. 그동안 DIY 제품이 정말 다양한 색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현재 수많은 DIY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데 그것이 공식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오히려 개인의 창조성과 가능성을 축소한다고 생각하는가?

Choi : 작품에 사용할 제품을 선택했다는 점에선 내 의도가 담겨 있지만, 처음부터 원하는 색상과 모양을 고를 수는 없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 정작 내게 필요한 건 없다’는 말은 내 작업에도 적용된다. 인기 있는 제품은 빨리 품절되어 구하기가 어렵고 같은 상품도 몇 개월 지나면 규격이나 색이 바뀐다. 그래서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필요한 제품을 제때에 사 놓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생겼다.

LEE : 언제 샀는가에 따라 작품이 달라진다.

Choi : 그렇다. 그래서 제목에 연도를 붙여야 하는지 고민한 적도 있다.

LEE : 이케아는 DIY의 상징과도 같은 상표이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케아가 아니더라도 DIY 제품은 많다. 혹시 이케아를 선택한 이유가 조립했을 때 기하학적인 형상을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아서였는가?

Choi : 이케아에 가장 많은 재료가 있다. 상징성보다는 DIY라는 맥락이 중요한데, 유닛의 형태와 재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리고 다른 DIY 상품을 사용하더라도 작품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LEE : 어찌 보면 DIY 제품은 생산 과정에 필요한 노동력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대량생산품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 성공한 사례가 DIY 제품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자기계발서, 컬러링 북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자소상>(2020)은 내 외부의 존재가 나를 판단하고 추천한 가구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DIY 제품과 연결된다. 전시 [트랙터]에서 마네킹이나 유니클로(Uniqlo)를 선택한 이유도 이와 같은가? 가구보다는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겠지만 결국 기성복이다.

Choi : 긴밀하게 연결된다. 개인을 강조하면서 결국 개인을 소외시키는 면에서 그렇다. 이건 획일화와는 다른데, 브랜드를 갖고 싶게 만들기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로고를 숨기는 대신 되고 싶은 인간 유형을 전시한다.

[남한 앙상블] 전시 전경, 세마창고, 2019, 사진: 이강준 ⓒ최태훈

LEE : [남한 앙상블](2019)에서 제목에 ‘남한’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Choi : [남한 앙상블]은 익숙한 걸 제시하지만, 익숙한 시선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전시를 만들고자 했다. 전시 제목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가 미국식 호텔 방을 그대로 재현한 레플리카 조각 <Bedroom Ensemble>(1963)에서 왔다. [남한 앙상블]도 마찬가지로 레플리카 조각 전시였지만 팝 아트와는 거리가 멀었고 시각적으로는 미니멀리즘 조각에 가깝다. 개별 작품들도 미니멀리즘의 특정 작품들을 떠올리도록 만들었지만 핵심은 다 비켜나 있다. 전시명 역시 ‘남한’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정치적인 뉘앙스와 실제 전시 풍경의 차이를 발생시키고자 했다.

LEE : 가상의 쇼룸 속 가구의 레플리카를 제작할 때 단순화와 변형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재현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Choi : 불완전한 정보에 의한 오차다. [남한 앙상블] 속 작품들은 오프라인 매장 방문 없이, 오직 홈페이지에 공개된 오픈소스와 이미지에 근거해 제작했다. 온라인의 정보로 3차원의 입체를 구현하다 보면 누락되는 값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은 임의적으로 정하거나 단순화했다. 결과적으로 추상적인 형태가 나오게 되었다.

<사본(아이나, 피엔드라르, 샤넬라)> 포맥스, 페인트, 195x195x150cm, 가변 설치, 2019, 사진: 이강준 ⓒ최태훈

LEE : 그 제작 방식, 개별 작품 제목에 들어가는 ‘사본’이란 단어는 가상공간의 이미지 혹은 작가가 만든 미니어처가 원본이며 실제 전시장에 놓인 작품이 두(세) 번째 단계의 복제품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하나밖에 없는 나의 가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완성된 DIY 제품이 사실은 유일한 원본이 아니라 다수의 복제품에 불과하고 우리가 그것을 만들 때 하는 행위도 결국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아가 DIY 제품(을 비롯해 오늘날 판매되는 상품)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상적인 집(삶)의 풍경이 환영임을 확인시키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편으로 전시장의 작품이 가짜 가구인 동시에 예술 작품의 원본성이 깨진 작품이라는 의미를 전하는 것 같기도 하다.

Choi : 원본과 사본에 대해 정확하게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남한 앙상블]은 모든 것이 원본과 사본, 사본의 사본 관계에 놓여있다. 전시장과 작업을 축소해 만든 미니어처가 큰 역할을 했다. 듣고 보니 조각보다 먼저 만든 미니어처가 물질로선 원본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사본의 의미는 조각뿐만 아니라 가상의 쇼룸 이미지와 실제 삶의 관계까지 아우른다.

LEE : 전시 [트랙터 Tractor](2020)에서는 회화적이고 비정형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회화적 표현을 통해 작품이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공간이 주되게 부상한다는 인상이 있었다. <라크 인간>(2021)의 경우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처럼 DIY 제품으로 만든 작품인데도 스프레이 등으로 색을 입히자 이전 작업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운동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색을 덧입히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앞으로 붓질을 활용할 계획은 없는가?

Choi : [트랙터]는 윤민화 기획자와 같이 만든 전시였는데 키워드가 ‘신체’와 ‘개인’으로 압축되었다. 기성품과 신체 사이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상상했고, 마치 인체(마네킹)와 의자 사이에 다른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라피티(graffiti)는 설치된 조각을 포함한 공간에 운동감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시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라피티의 시작에는 태그(tag)라는 개념이 있다. 다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여긴 이들이 공공장소에 자신의 닉네임이나 신호를 불법적으로 남기면서 시작되었다. 그 기원에 ‘개인’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XEVA와 협업하면서 기본적인 것들만 배웠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이후에도 스프레이를 사용하면서 <그림자> 연작이 나오게 됐다. [트랙터]가 DIY해킹 작업에 또 다른 길을 터 주었다. 곧 붓질도 할 것 같다.

[트랙터] 전시 전경, 페리지 갤러리, 2020, 사진: 이지양 ⓒ최태훈

LEE : 인간을 생각하며 마네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Choi : [트랙터]에서 인체는 형상 표현이라기보다 표상으로서 기능했다. 때문에 소조 작업이 불필요했다. 마네킹의 익명성을 끌어오려는 의도도 있었다. 초기 작업에는 기능하는 조각과 신체가 맞붙어있었는데 한동안 잠복해 있다가 [트랙터]에서 다른 양상으로 등장했다.

LEE : 전통적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Choi : 돌조각이 좋다. 학부 때도 돌 깎는 게 재밌었다. 내가 하도 열심히 해 별명이 ‘미칠란젤로’였던 적도 잠깐 있었다. 조각의 재료 중 돌이 가장 촉각적이라고 생각한다. 실리콘 같은 재료보다 더 피부 같다고 느껴진다. 아직은 돌조각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LEE : 최근작인 <그림자> 연작(2021)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Choi : 평면(캔버스)과 입체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작이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때처럼 하나의 DIY 세트 유닛을 평면에 구성한 후 그 규격에 맞게 캔버스를 짠다. 캔버스에 유닛을 올려놓고 스프레잉을 한 다음에 유닛을 떼어낸다. 떨어져 나온 유닛을 이용해 다시 입체를 만들고 이를 다음 평면 작업의 근거로 사용한다. 즉 입체와 평면이 서로 존재의 이유가 되는 그림자의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