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손동현

2020. 09. 17. / 2020. 09. 22. 내용 추가

본 글은 2020년 9월 2일(수)에 진행된 이문정과 손동현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손동현(Son, Donghyun)

LEE : 이문정, Son : 손동현

LEE : 자화상을 발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손동현의 전체 작업에서 초상화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업의 주된 방향을 알고는 있지만,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가치 구현을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본인의 초상화를 그렸을 법도 하다.

Son : 학부 때,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직후, 두 번 정도 그렸다. 나 자신을 담아내겠다는 생각보다는 기법을 연습하는 차원이었다. 그 후로는 그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획은 없다. 특별히 자화상을 그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는 나의 작업에 나 자신이 많이 드러나고 녹아있는 편이라 생각한다. 그 이상 전면에 나서거나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부담스럽다.

LEE : 신진작가일 때부터 작업이 많이 알려졌다. 미술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도 손동현의 작업을 많이 알고 있다. 유명 작가이다.

Son : 나의 이름과 나의 작품 몇 점이 많이 알려졌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긴 하다. 감사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나의 작업을 덜 자세히 보게 되거나, 다른 무엇이 있을지 덜 궁금해하는 것도 같다.

LEE : 질문을 많이 받았겠지만 왜 하필 대중문화인가?

Son :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학교에서 배운 재료나 기법으로 그것을 표현해보려 했던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 과거보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커지기도 했고, 동양화에 대한 엄격한 태도가 조금씩 자유로워졌던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성장 과정이나 대학생 시절에 접할 수 있었던 이미지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등이 굉장히 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동양화의 방식에만 근거한 작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약간의 반발심도 있었다.

LEE : 그와 같은 관심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문화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으며 다른 방향의 작업도 있지만, 대중문화는 작업 초기부터 손동현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된 흐름 중 하나이다.

Son : 내가 조금 더 친(親)대중문화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는 대중문화라는 영역이 매우 넓고, 그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었다.

손동현 도판 <왕의 초상(40 one more chance)> 지본수묵채색, 194x130cm, 2008 ⓒ손동현

LEE : 소재에 대한 자료 수집과 이해뿐 아니라 이론(화론과 미술사)적으로도 탄탄한 근거를 갖고 작업한다. 점점 더 이론적인 부분을 촘촘하게 제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도된 것인가? 본인의 작업이 대중문화의 차용이나 전통 동양화의 표면적인 부분만을 인용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더욱 체계적인 틀을 구축한 것은 아닌가?

Son : 특정한 화론이나 형식 등을 의식적으로 생각했던 작업이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왕의 초상>(2008) 연작은 ‘전통 초상화가 지향했던 가치를 정말로 추구하는 것 같은 작업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호흡이 긴, 서사가 담긴 작업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동안 나의 초상화 작업에서 다뤘던 전신사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작업을 하겠다는 포인트가 있었다. <육협 六俠>(2015)에서는 ‘화론(畫論)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했다. 먹과 같은 재료에 집중하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먹을 다뤘을지 등을 찾다 보니 화론을 재고하게 되었다. 이런 작업이 방어적으로, 이론적인 무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LEE : 작업을 진행하면서 전통 화론만 참고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 밖의 이야기들은 작업 설명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때 이론을 인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작가 본인에게서 나온 작업이다. 그래도 동양화론은 작가가 직접 언급했다.

Son : 미술과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꾸준히 보고 있다. 학교 다닐 때 타과 수업도 많이 들었다. 또한 대학에서 동양화 관련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이나 이론에 대해 찾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내 작업에만 묻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작업을 지속하려면 당연히 무언가를 공부하고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하나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작업에 의문이 생기거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이 생길 때마다 찾아보는 편이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동양화론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업과 관련해 반복적으로 들어오는 질문들이 있고, 그에 대답하다 보니 특정한 부분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 것 같다.

손동현 도판 [바디 앤 소울 Body & Soul] 개인전 설치 전경, 갤러리2, 2018 ⓒ손동현

LEE : 손동현의 작품은 소재와 형식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현대적이고 대중문화적인 요소를 가져오니 역으로 손동현의 작업이 동양화라는 점이 강조된다. 전통 동양화와의 차이가 드러날수록 동양화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역설적이다. 시대의 변화를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같다. 현재를 생각하면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작업이다. 혹시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를 다루려는 의도도 있는가?

Son : <Body & Soul>(2018)은 성우 배한성 선생님이 더빙하신 인물을 토대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분명 향수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회화사 혹은 그 발전 과정 등은 대학에 들어와 진지하게 공부했던 영역이지 내가 과거에 직접 겪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향수가 생길 수 없다. 오히려 고고학자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발굴하듯 접근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근대 시대의 동양화만 해도 내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시절의 일이다. 미지의 영역을 알아가는 느낌이 더 크다.

LEE : 영화와 애니메이션(만화) 속 캐릭터, 대중스타 등의 초상 작업을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해체된 시대, 소비문화의 스펙터클에 함몰되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시대의 인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현대인은 진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고들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Son :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다. <왕의 초상> 연작 같은 경우는 그에 관한 작업이었던 것 같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라는 한 인물의 초상화 연작을 하게 되었던 이유도 그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이 계속 변화했다는 부분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노래, 행동, 의상, 헤어 스타일, 무엇이 되었든 간에 계속 변해온 인물을 한 점의 초상화만으로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잭슨뿐 아니라 누가 되었든 ‘하나의 정지된 화면에 담아낼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가상의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불분명해진다는 차원까지 다가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이미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LEE : 관련해 <Mask>(2011) 연작도 의미심장하다. 마스크는 누군가의 본래 모습을 가리는 거다. 다른 차원에서 작업의 연결선들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Son : <Mask> 작업은 ‘내가 대중문화에서 볼 수 있는 존재들의 초상을 계속 그려왔는데 얼굴 하나만 그린다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어떤 배우가 캐스팅되는가도 중요하지만, 배우가 바뀌어도 항상 유지되는 것은 코스튬이다. 코스튬으로 대표되는 존재의 정체성은 지속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스크일 수 있다.

손동현 도판 <Mask: Catwoman(Catwoman)> 지본수묵채색, 53x45.5cm, 2011 ⓒ손동현

LEE : <Mask>를 <왕의 초상> 연작보다 한 점 많은 41점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

Son : 작업의 틀 같은 것을 설정해놓으면 다음에는 그것보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크게, 많게 하려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나 스스로 이전에 했던 무언가로부터 변화를 주거나 그것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LEE : <마스크> 연작의 낙관을 보고 처음에는 웃음이 났고, 다음엔 블랙 유머와 풍자가 떠올랐다.

Son : 낙관은 시기 혹은 연작 별로 다르다. 2011년까지는 서체/폰트에서 영문자 ‘D’에 해당하는 모양을 새겼다. 이후에는 내가 직접 ‘d’를 변형해 만들거나 그라피티(graffiti) 스타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변형시켜 제작하고 있다. <마스크> 연작에 찍힌 호박 모양은 ‘핼러윈(Halloween)’ 폰트의 ‘d’이다.

LEE : 대중문화를 거시적으로 다루기보다 작가가 특정한 부분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 경험이나 취향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이럴 경우, 매우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담은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자전적인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요소들도 나오기 때문에 작가의 성장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Son : 한 자리에 모아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2017년에 제작한 도록 『손동현 2005-2016』 을 위해 이미지를 정리하면서 나 자신이 많이 보인다고 느꼈다. 누군가가 꼭 찍어서 작가가 많이 보인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볼 때에는 내가 많이 담기는 것 같다.

LEE :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을 그린 것은 아니지 않나?

Son : 아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에 대한 스터디가 완벽히 된 상태에서 작업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선택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조사를 시작한다. 물론 선택 이전에 일정 부분 알고는 있었던 것들이고 그것을 선택하게 된 배경 등에서 나의 취향 같은 것이 일부 보일 수는 있다.

손동현 도판 <Ernst Stavro Blofeld> 지본수묵채색, 162x130cm, 2011 ⓒ손동현

LEE : 영화 속 악당은 당대의 사회가 두려움 혹은 위협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말 많은 영화 속 악당이 존재한다. 그런데 <악당>(2011) 연작에서 하필 <007> 시리즈의 악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더욱 강력하고 긴장감을 유발하는 악당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Son : 오늘날의 입장에서 과거의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악당에 대한 클리셰(cliché)인 특정한 부위에 상처가 있다거나, 마지막 순간에 말을 길게 해서 주인공에게 시간을 벌어준다든가 하는 것 등은 <007> 시리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007> 시리즈는 아직도 제작되고 있지만 2002년까지의 악당만 그린 이유도 전형적인 악당의 역할이 등장하는 것은 거기까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악당은 첩보 영화가 낭만적이었던 시절의 느낌을 전해주는 것 같다. 과거의 <007>을 올드하게 보이게 만드는 경쟁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최근작들을 보면 악당의 캐릭터가 많이 바뀌었다. 또한 나는 아주 위협적인 악당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악당이 가지고 있는 모습의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악당> 연작 직전의 초상화 작업이 <왕의 초상> 연작이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굉장히 다양한 모습이다. 반대로 <악당> 연작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결국은 이들이 하나의 역할을 공유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악당의 인종, 성별, 배경 등이 모두 다르지만 마치
한 사람처럼 같은 역할로 등장한다. 근본적인 정체성은 비슷하고 겉모습만 바뀌어 나오는 것과 같다.

LEE : 대부분의 작업에서 배경을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Son : 처음에는 초상화의 양식에 준해서 배경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후에 고민을 많이 했다. <왕의 초상> 연작이나 <악당> 연작의 경우에는 의자처럼 인물 외의 사물을 그린 경우도 있고, <Body & Soul>의 경우에는 초상화라기보다 인물화라 생각하며 배경에 색을 조금 넣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배경이나 소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고, 집중도가 흩어질 것 같다.

LEE : 2014년 이후부터 작가가 ‘새로운 인물 자체’를 만들고 있다. 기존의 캐릭터들을 종합하는 것인지, 아예 새로운 존재를 만들려는 것인지 궁금하다.

Son : 전자에 가깝다. 애초에 이 세상에 전혀 없던 것,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했던 작업이 아니다. 만화나 영화 등에서 어떤 특수한 능력이나 인격을 가진 캐릭터를 만드는 일종의 문법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만들었다. 물론 그 공식들을 수학 문제 풀 듯이 적용한 것은 아니다. 2014년부터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참조하는 방식에서 멀어졌다. 요새는 특정한 소재에 집중한다기보다 매체와 화법처럼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편이다.

손동현 도판 <Inky Ink> 지본수묵, 194×130cm(212×130cm), 2016-2017 ⓒ손동현
<Gracious Four> 지본수묵, 194×130cm(212×130cm), 2017 ⓒ손동현

LEE : 병풍이나 부채, 화첩 등도 전시하기 때문에 전시장의 공간을 조금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지만, 회화 작업이다 보니 많은 경우 작품이 벽에 걸리고 전시장의 가운데 공간이 비어있다. 그런데 개인전 [Jasmine Dragon Phoenix Pearl](2017)에서는 이차원인 벽을 입체적으로 활용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을 설치할 때 전시장 중앙의 공간을 어느 정도 생각하는가?

Son : 당연히 작품이 놓이지 않는 중앙 공간도 고려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실제로 ‘전시장의 특정한 구조로 인해 중앙이 비어 보이거나 답답해 보이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특별히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Jasmine Dragon Phoenix Pearl]의 경우 공간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그림 속 존재(인물)들의 성격이나 능력에 맞춰서 걸었다. 특히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왼쪽의 잘 보이지 않는 벽에 건 <Gray Mist>(2016~2017)는 구름과 안개를 그리는 기법들을 모아 안개나 구름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뚫고 나오는 인물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인물은 자객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자세히 볼 수 없거나 의외의 장소에서 혹은 관객의 등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위치에 걸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Inky Ink>(2016-2017), <Gracious Four>(2017)의 경우에는 두 작품 속 인물이 모두 상승하는 존재, 날아가는 존재였다. <Inky Ink>는 화폭을 거꾸로 놓고 먹이 죽죽 떨어지게 그린 뒤 다시 뒤집어 그린 것이다. <Gracious Four>는 사군자였는데, 다리 없이 잎사귀 같은 것들을 이용해 날아가는 인물이었다. 관객이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아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인물들의 능력을 따르다 보니 자연스레 공간을 일반적이지 않게 사용하게 되었다.

LEE : 실제로 일본 만화를 바탕으로 한 작업이 있는 것과 별개로, 일부 작품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분위기가 난다는 의견이 있다. 영향이 담겨 있는가?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의견인가?

Son :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를 딱 지목해서 작업한 것은 <Battlescape>(2013) 연작이 거의 유일하고, <Body & Soul> 중에서 배한성 선생님이 더빙하신 일본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국내 방영명 <날으는 전함 브이호>)>(1974)의 주인공을 그린 것이 있다. 남들보다 일본 문화를 특별히 많이 보는 편도 아니다. 다만 <소나무>, <육협> 등에서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싸우는 장르인 이능력배틀물 등을 참고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일정 작품에서 그와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LEE : 개인적으로 <Scarlet Crimson>(2019-2020)이 그랬다.

Son : 전혀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한자가 나오고 초서체(草書體)와 그라피티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서 그와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 한정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 미술과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있고 그것들이 모두 내 작업의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LEE : <육협>은 무협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늘날의 누군가에게는 영화 속 고전 무술이 판타지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이다. 실제인 것 같으면서도 실제가 아닌 것 같은 무언가이다. 오늘의 누군가에게는 전통 동양화도 다가가기에는 먼 존재 혹은 이상(理想)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Son : 그렇게 생각한 부분이 조금 있긴 하다. 화론을 공부하거나 옛 화가들에 관한 책을 읽으면 ‘정말로?’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극한의 수련과 최고의 인품, 기술, 깊이를 추구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일이 실재했다기보다 동양화가 추구했던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이 볼 때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이 무협지와 겹쳐 보이는 지점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거짓이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LEE : 무협도 동양화도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Son :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손동현 도판 <Scales> 종이에 먹, 잉크, 아크릴릭 잉크, 194×130cm(212×130cm), 2019~2020 ⓒ손동현

LEE : <Scales>(2019-2020)는 초서체를 따라 81개의 형상으로 글자 ‘龍(용)’을 완성한 작품이다. 81개의 형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Son : <Scales>는 전시 [Ink on paper Ⅱ](2020)에서 발표했던, 서로 연결된 세 점의 용 그림 중 하나이다. 용을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매의 발톱, 호랑이의 발처럼 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있다. 그리고 그 비늘의 수가 81개라고 한다. <D.R.A.G.O.N.>(2019-2020)은 눈에는 ‘토끼 토(兔)’, 주먹에는 ‘호랑이 호(虎)’처럼 하나하나 글자를 써서 용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Scales>의 경우에는 내가 관심 있게 봤던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림이나 출판 만화에 나오는 효과 등에서 고른 아주 작은 단위 81개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LEE : <Logotype>(2006)에서 시작된, 문자를 그림처럼 제시한 작업은 전시 [Ink on Paper Ⅱ]에 소개된 작품으로까지 이어졌다. 초기의 작업은 민화의 문자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최근작은 서화동원(書畵同源), 나아가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까지 생각하게 한다. 어찌 보면 문자도와 서체적 회화의 바탕은 반대된다고 할 수도 있다. 작업이 이와 같은 전개를 보이게 된 이유를 듣고 싶다.

Son : <Logotype>의 경우 문자도가 대중 친화적인 그림이라는 점에 주목해 로고와 연결했었다. '문자도가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이 강조했던 가치들을 담았던 것이 우리 시대의 무엇과 연결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것은 지금 내가 문자나 글쓰기를 그림 그리기와 연결해 작업하는 부분과 확실히 차이가 있다. 내 작업의 큰 변화 중 하나이다. 지금은 먹이라는 재료 혹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 등에 집중하면서 ‘글씨 쓰기로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그라피티 등의 다른 쓰기/그리기 방식도 탐구하고 있다. 평필, 혹은 아크릴 붓이나 유화 붓에 잉크를 묻혀서 그리는 방법도 <Logotype>과는 확실히 다르다. 의식적으로 다른 작업을 해야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문자와 그림이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근본적인 그리기의 방법은 무엇일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LEE : 서화동원이란 말은 문인화를 떠올리게 한다. 문인화의 바탕에는 유교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는가?

Son : 과거로부터 문인화가 추구했던 가치를 생각하긴 하지만 그 바탕 형성에 영향을 줬을 유교적인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은 없다.

LEE : <씨름도>와 같은 작품이 또 있는가? 이 작품을 하게 된 의도가 궁금하다.

Son : <씨름도>는 내 작업이 아니다. 데뷔 초에 누군가의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서 잘못 알려진 후로 내 작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LEE : 정말 단순한 질문이다. 인물, 산수, 영모까지 그렸다. 정물화(기명절지도)를 그려볼 계획은 없는가?

Son : 정물화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에게 큰 흥미를 주지 못했던 것 같다.

LEE : 작업을 할 때 잘못 그려서 다시 그런 적이 있는가? 손동현의 작업은 매우 정직하게 보여진다. 조명이나 주변 환경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다. 흠집이나 종이의 일어남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재료와 표현 방법이다.

Son : 그리다가 세 번까지 다시 그린 작품도 있다. 채색화를 많이 그리다가 점점 수묵을 다루는 작업으로 넘어가다 보니 그 빈도가 줄지 않는 것 같다. 채색화의 경우도 아교층이 깨져서 생긴 얼룩 때문에 다시 그린 적이 있지만 그래도 채색화는 작업할 때 생각하는 시간을 여유 있게 가질 수 있다.

LEE : 본인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가? 묘사력이나 데생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Body & Soul>을 보면 정말 잘 그렸다.

Son : 그런 편은 아니었다. 학부 시절에는 오히려 크로키(croquis)를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Body & Soul>은 반복해서 색을 올리는 채색화가 아닌 담채화여서 그리는 과정에 즉흥적인 판단과 표현이 많이 포함되었고 그래서 신나게 작업을 진행했다.

손동현 도판 <Faces(Tony)> 화첩(22폭), 지본수묵, each 31.9x22.7cm, 2018, [바디 앤 소울 Body & Soul] 개인전 설치 전경, 갤러리2, 2018 ⓒ손동현

LEE : <Faces(Tony)>(2018)에서 배우 양조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 작품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양조위가 모델인데 닮았다는 느낌도 없었고, 그의 특성이 담기지 않아 보여서였다. 가상의 존재를 그려도 그 존재의 성격이 전달된다고 느껴진 다른 작업과 거리가 있었다.

Son : 이 작품에서 양조위는 얼굴(이목구비와 각도)을 제공했을 뿐 그를 얼마나 닮게 그리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Faces(Tony)>는 그동안 그림체가 흥미롭거나 특이해 보여 조금씩 모아둔 만화를 바탕으로, 각 만화의 만화가들이 그리는 주인공의 화풍을 모아 양조위를 그린 것이다. <육법>처럼 화법이나 질료(적 특성)를 인물화로 해석하다 보니 구체적인 얼굴 형상이 필요했고, 유덕화의 얼굴을 선택해 사용하게 되었다. 소나무를 인물로 해석했을 때부터이다. 이후 몇몇 배우들의 얼굴이 작품에 등장했는데 유덕화의 얼굴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유덕화를 고른 이유는 그가 다작을 하면서도 훌륭한 연기력을 유지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그러다 보니 영웅, 탈속한 군자, 권위의 임금, 무엇이든 유덕화의 얼굴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유덕화의 반대편에 항상 양조위가 있었다. 영화 <무간도 無間道>(2002)의 영향이다. 그래서 얼굴을 다루는 작업에서 양조위를 얼굴의 원형으로 다루게 되었다.

LEE : 개인적으로 양조위는 영화 <씨클로 Cyclo>(1995)에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만화에서 주인공이나 악당을 그리는 특정한 화법이 있는가?

Son : 화첩이 두 개였는데 양조위는 각 만화의 주인공들을 그리는 화법으로만 그렸다. 엄밀히 말해 화법이라기보다는 그 만화가가 제일 멋있게 잘 그릴 수 있는 조건들에 맞게, 자기 손에 맞게 그린 것이다. <Faces(Villains)>(2018)에서 사용된 악당을 그리는 화법도 그런 법칙이 있다기보다 전형적으로 악당은 동공을 작게 그려 비열하게 보이게 한다거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LEE : 이와 같은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Son : 전시 [Body & Soul](2018)에서 소개된 <Body & Soul>은 인물들이 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어떻게 보여졌는가를 그린 것이고, <Faces(Tony)>는 <Body & Soul>이 걸린 옆 방에 전시되었다. <Faces(Villains)>는 주인공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하고 마주한 벽의 선반에 펼쳐놓았는데 한 페이지에 한 만화가의 화법만 담긴 것도 아니고 다양한 악당을 그리는 방식들을 섞었다. 한 사람의 얼굴도 아니고, 한 페이지에 한 사람을 그리는 화법만 들어가지도 않았다. 대응하는 것 같은 두 작품은 동아시아, 특히 일본 만화에서 주인공과 악당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생각해가며 그렸다. <Faces(Tony)>는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아시아인의 얼굴, <Faces(Villains)>는 악당이라 생각하는 얼굴이 어떤 식으로 다양하게 그려지고 보여질 수 있을지 펼쳐 본 작업이다.

LEE : 손동현의 작업을 보면서 내러티브가 끝없이 쏟아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려진 대상 자체가 갖는 서사, 작가가 더하는 의미가 결합되어 많은 이야기를 발생시킨다. 언어화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모든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자료를 찾아보고 준비를 할수록 더 재미있게 감상할 여지가 많아질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Son : 작품 안에 무언가 많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한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할 이야기는 너무 많지만 더 말을 안 하게 되는 것 같다. 작품을 어느 정도로 공부하면서 감상해야 하는 걸까? 나의 경우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면 계속 조사하고 기다려서 전시를 보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는 없다. 정말 많은 작가와 작품이 있으니 작가가 관객에게 그와 같은 감상을 기대할 일은 아니다.

손동현 도판 [Ink on Paper Ⅱ] 개인전 설치 전경, 갤러리2, 2020 ⓒ손동현

LEE : 유독 젊은 작가라는 수식어가 오래 따라다닌다. 밝고 유쾌한, 재기발랄한 작업이라는 설명도 마찬가지다. 그 의미와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손동현이 다뤄온 대중문화의 이미지라는 소재의 영향도 큰 것 같다.

Son :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이제 마냥 젊은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작가라고 불리면 약간 부담스럽기도 하고 반갑지만은 않다. 손동현이라는 작가의 첫인상이 강하게 각인된 것 같기도 하다.

LEE : 작업을 소개할 때 전통 동양화의 재해석, 대중문화와의 결합 등의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손동현의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에만 집중하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차단될 수도 있다.

Son :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단번에 붙잡을 수 있는 부분이라 그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작업의 시작점에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와 동양화의 접점을 만들 수 있을까’란 고민이 있었던 것도 맞고, 내 작업이 그와 관련된 부분에서 널리 알려진 것도 사실이지만 시리즈별로 내가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부분이 다르다. 같은 시기에 그린 작업들도 구체적으로는 각각 다른 고민과 시도를 담고 있다. 특히 2014년 이후부터는 새로운 방향의 작업들과 이전 작업에서 변화/변주하는 방향의 작업을 같이 진행하고 있다. 하나의 방향을 설정해놓고 A라는 작업을 만든 뒤, A-1, A-2, A-3, 이런 식으로 제작한다면 나 스스로 재미있게 작업할 수 없다. 나의 작업과 관련해서, 내 머릿속에는 나만 아는 여러 방향이 있다. 동양화 전통의 재구성, 동양화와 대중문화와의 접점이라는 방향 외에, 특정한 이미지나 대상에 관한 레퍼런스의 세트를 기반으로 하는 방향이나 인물화와 산수화 등의 형식에 집중해 화면을 만들어 가는 방향도 있다. 이런 방향들이 내 안에서 경쟁을 하는 것 같다. 이전부터 지속해온 작업은 관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 생각이 나거나 작업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새롭게 시작한 작업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2017년의 개인전 [Jasmine Dragon Phoenix Pearl]에서 새로운 방향이 강하게 드러났다면, 2018년의 개인전 [Body & Soul]은 이전에 했던 작업의 방향이 새로운 맥락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물론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방향들을 잘 조율해나가는 게 나의 일인 것 같다.
반대로, 나는 내 작업에 여러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작업을 하면서 내가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부분들이 합쳐졌을 때, 누군가에게 그것이 내가 생각한 대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약간 오만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닌 것 같다. 이후의 작업을 통해 다양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LEE : 감상자가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작가 노트나 인터뷰를 통해서 조금 더 힌트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Son :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전시를 하게 되었고, 신진작가임에도 다양한 매체에 소개가 많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 작업이 많이 쌓이지 않은 상태여서 그랬는지 내가 했던 말들이 나의 작업을 오히려 단순하게 규정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겠다는 허망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점점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아끼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작가가 작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작업을 보고 어떻게 감상하든 그것은 자유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감상해주길 바라지도 않고 바란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다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누군가가 이전의 작업도 새롭게 봐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