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4.

본 글은 2020년 9월 29일(화), 11월 13일(금)에 진행된 이문정과 서인혜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서인혜 (Seo, Inhye)

LEE : 이문정, Seo : 서인혜

LEE : 작가 본인보다 윗세대 여성인 어머니, 할머니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을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Seo : 지극히 평범한 나의 일상에서부터 출발했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국수집을 운영하게 되셨고 그 과정에서 내가 평상시에 생각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여성상이 어찌 보면 사회가 만들어온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여성의 모습과 노동이 밀접하게 느껴져 여성의 노동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매일 엄청 공을 들여 김치를 담그셨는데 김치를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는 과정, 김칫국물과 그 색감으로 여성의 노동을 담아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가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서울이 아닌 지방을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는데 처음 머무른 곳은 경북 영천(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이었고 그다음은 대구 가창(가창창작스튜디오), 그리고 지금은 대전(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이다. 나는 30여 년 동안 서울을 떠나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인데 내가 머물게 된 지역의 환경은 서울과 큰 차이가 있었다. 도시는 세련되고 매끈한 동시에 무채색의 군중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지방에서 내가 주로 만나게 되는 분들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정말 밝고, 화려하고, 요란했다. 할머니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할머니들께 옷의 구입경로나 그처럼 화려한 옷을 입으시는 이유 등을 여쭤보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 할머니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버무려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전시 전경, 비단에 분채 채색, 40x40cm(19 pieces), 아크릴 거울, 가변설치, 520cmx110cm, 2018 ⓒ서인혜

LEE : 김치로 작업을 하기 이전에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Seo: 전통 동양화의 방식으로 음식을 그렸다. 그러다가 김치 작업으로 옮겨갔다.

LEE : <버무려진>(2018) 같은 경우, 그 안에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결과물은 상당히 추상적이다. 작가의 내러티브를 모르는 누군가는 추상화로 감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Seo : 그 당시에는 붓을 대고 무언가 형태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붉은 염료들, 예를 들어 히비스커스나 오미자 차 등을 흩뿌리고 적시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추상화를 생각했다기보다 그리기를 벗어나 자연스레 스며들고 버무려진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LEE : 자연 염료를 쓰다 보면 보관, 변색의 위험이 있을 것 같다.

Seo : 아직은 괜찮다. 변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는 있다. 그러나 그 변색조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맥락과 맞닿아 있어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LEE : 혹시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은 할머니들을 외지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은 아닌가? 작가가 주목한 일바지(몸빼)도 대량생산된, 획일화된 옷이다.

Seo : 일정 부분에서 그랬다. 유통 과정을 알아보니 대량생산된 몸빼가 동대문시장에서 시골의 옷가게로 오는 거였다. 나는 하나의 독립적인 기호, 개성의 상징물로 받아들였는데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사회가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받아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옷이 그렇듯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역할과 노동을 요구하고 여성은 당연한 것처럼 그것들을 수행한다.

LEE : 왜 일바지를 즐겨 입으시는지, 화려한 문양의 옷을 선택하시는지 할머니들의 답변이 궁금하다.

Seo : 나이 들면서 더 밝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게 되셨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실제로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대부분 그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으셨다. 나이가 들고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주름이 생기니 옷이라도 밝고 화려하게 입어 생기있어 보이고 싶다고 하셨다. 사회가 만들어내고 획일화되는 것도 있겠지만 개인의 취향과 선택도 담겨 있었다. 이중적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한 분씩 찾아뵙고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LEE : 할머니들의 개인사를 추적하다 보면 자연스레 할머니들이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까지 다루게 된다. 미시사에서 거시사를 향하는 것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하고 싶은가?

Seo : 이와 같은 작업을 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 개인에서부터 출발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개인의 역사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조금 더 깊고 넓게 확장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가 거대한 역사 속에 있음을 점점 더 느끼고 있다.

<굳은살과 물렁막> 비단에 분채 채색, 90x130cm(10 pieces), HD Video(00:07:16), 가변 설치 구조물, 190x360cm, 2019 ⓒ서인혜

LEE : 올해 초에 진행된 [2020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프리뷰전]에서는 천에다 일바지의 문양을 그렸는데 동일 장소에서 열렸던 개인전 [나무 껍질을 입는 몸](2020)에서는 장지 위에 그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Seo : 천 위에 그린 것은 2019년의 작업이다. 비단에 그리고 보니 할머니들의 삶의 시간을 닮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들의 피부(표면)는 시간이 더 많이 쌓이고 묵직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을 비단에 표현하니 여리여리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종이, 장지를 선택했다. 장지가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진다는 점도 피부와 연결되었다. 할머니의 피부, 나무의 껍질, 종이, 이 세 가지 재료를 바탕으로 껍질로 육화된 몸을 표현하고 싶었다.

LEE : [나무 껍질을 입는 몸]에는 할머니들과 함께 한 영상이 함께 전시되었다. 그분들께 받아온 물건도 있었다. 작가와 대화를 나눈 할머니들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이 갖고 계신 물건이 참 많을텐데 그중 몇 가지만 골라 전시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Seo : 대전은 처음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할머니들을 만나 뵈어야 하나 처음에는 막막했다. 그러다 대전에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나무를 시작점으로 삼아 괴곡동과 대사동 근방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을 찾아갔다. 전시된 물건들은 전시를 위해 잠시 빌려주신 것이다. 자수와 뜨개질, 옷 짓기와 같은 할머니들의 노동의 과정을 함축하는 사물들이다. 일바지도 일제 강점기에 여성들에게 작업복으로 보급한 바지이다. 여러 면에서 천(의복)은 여성과 노동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것 같다.

LEE : 할머니의 입장에서 작가는 낯선 사람이다. 쉽게 대화를 시작하셨을 것 같지 않다.

Seo : 잘 받아주시는 분도 계셨지만 인터뷰를 해주시는 분을 만나기까지가 쉽지 않았다. 거절하시는 분은 계속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쌓았다. 할머니들과의 만남에 대해 정해진 매뉴얼은 없었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할머니들이 공통되게 하신 말씀은 ‘이제 오래살았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었다. 일상사, 건강과 노동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무 껍질을 입는 몸] 전시 전경,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20 ⓒ서인혜

LEE : 작가의 작업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너무 비계획적이고 즉흥적이어도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할머니들을 너무 계획적으로 만나고 관찰하는 것도 문제시될 수 있는 부분이다.

Seo : 작업을 위해 할머니들을 대상화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작업 중에 내가 할머니들을 타자화하는 것은 아닌지 끝없이 반문했다. 그래서 이야기만 나누지 않고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도 먹고, 일도 조금씩 도와드리면서 더욱 관계를 쌓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작품에 담긴 것은 극히 일부이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소통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에게는 결과보다 할머니들을 만났던 시간이 중요하다. 그것이 작품에 담기길 원해서 나의 모습도 함께 촬영했다. 할머니들 중에는 잘 듣지 못하시거나 말씀을 잘 못하시는 경우도 있어서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대화 대신 노래를 불러주신 분도 계셨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에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LEE : 여성을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소통의 작업일 수도 있지만 스테레오타입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Seo : 현재 서울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 활동으로 이어가는 <노인의 삶에 예술로 공감하는 이야기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내가 활동하는 지역은 문래동이다. 문래동은 철공처럼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일들이 진행되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며 공장 기계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들을 제작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내가 익숙하게 생각했던 여성 작업복이 아닌 다른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여성을 보면서 생각의 전환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LEE : 어머니 세대에서 시작해 할머니 세대로 이어지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과거를 재고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작가 본인의 삶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주제일 수도 있다. 그동안 작가 또래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Seo : 김치 작업을 할 때부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런 주제를 다루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나는 고향의 느낌이나 모성애적 공간의 느낌에 끌리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인간이 시작되는 근원적인 태고의 모성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지속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LEE : 자연을 중심에 놓고 생각했을 때 어머니와 모성, 나아가 생성과 소멸까지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Seo : [나무 껍질을 입는 몸]에 담긴 것처럼 나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나무를 기준점으로 삼은 것도 나무는 한자리에서 인간보다 더 오랜 시간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그 나무가 지켜봐 온 할머니(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나무는 700년이 되었고, 사람들이 죽고 죽어도 남는 것은 나무’라는 할머니의 말씀도 인상적이었다. 자연의 시간성과 함께 하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 자연과 인간은 노동의 행위로 구별될 수 있고, 노동 중에 입는 옷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또 다른 경계, 껍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자연과 다르면서도 같은 시간의 흐름 안에 놓이는 인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올해 들어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LEE : 여성에 관한 작업만 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Seo : 많이 받는다.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 한쪽으로만 쏠린 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들이다. 부성을 알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아버지를 다루면 함께 하지 못하고 순수한 관찰자에 머물 것 같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역할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웅상에서 나온 가죽> 수집한 나무 껍질, 장지, 접착제,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20 ⓒ서인혜

LEE : 그동안 보여줬던 본인의 작업은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작업의 진행 과정이나 형식에 변화가 생길 것 같다.

Seo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 그대로 물리적 거리를 지켜야 하는 시대여서 내 작업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만남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비대면 시대이기에 직접 만나 언어적인 대화 외에 그 사람이 전하는 분위기, 행동,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에너지 같은 것들의 가치가 더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에 이러한 과정을 행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나에게 만남 없는 작업은 무의미하다. 물론 어떤 대면 소통의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 시간이 온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 같다. 글을 통한 소통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LEE : 비대면 시대가 될수록 만남을 갖는 작업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게 느껴질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안전과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이다.

Seo : 아직까지 할머니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면대면 만남뿐이다. SNS로 할머니들을 만나 함께 하는 작업을 진행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내가 만났던 할머니들은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시는, 온라인 상의 소통이 원천 차단된 분들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온라인이 더 강조되는 시대에 오프라인 세계에는 존재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어떤 것도 공유할 수 없는 존재들을 생각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LEE : 작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시각적인 것에 더 자극을 받고 예민한가?

Seo :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해 결과물을 얻었을 때의 만족감이 있다. 또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것을 즐겨서 미술이 가장 익숙했던 것 같다. 물론 시각에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 영상 작업에 음악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노래를 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시간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거쳐 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고, 그와 같은 시간을 이미 거쳐 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궁극적으로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 같다. 이 모두가 나에게는 살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면서 떠올리는 아이디어나 이미지, 상상 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을 때의 재미와 기쁨 때문에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나 싶다.

LEE : 신진 작가인 만큼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Seo : 스스로에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냐고 끝없이 질문하는 중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 층위가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 다양한, 그리고 조금은 유머러스하지만 예리한 날이 살아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