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4.

본 글은 2022년 8월 17일(수)에 진행된 이문정과 돈선필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돈선필(Don, Sunpil)

LEE : 이문정, DSP : 돈선필

LEE : 작가 공식 홈페이지에 본인이 쓴 글이 업로드되어 있다. 글을 쓰는 게 익숙해 보인다. 글이 건조하고 논리적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서신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평상시에 계속 글쓰기를 하고 있는가?

DSP : 글을 자주 쓰진 않는다. 다만 평소에 내가 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결고리, 인과관계가 생기는데, 그런 걸 만들어가는 게 재미있다.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논문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을 웹에 올렸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작은 책『피규어 TEXT』(2016, 유어마인드)도 나왔다. 이후 피규어에 대해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조금 긴 글로 작성해서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지원하고 선정이 되어 연이어 출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가 붙어 글을 더 쓰게 되었다. 글쓰기가 본업이 아니니 어려움도 있다. 『피규어 TEXT: 원더 페스티벌 리포트』(2019, 킷타이텐)는 내가 쓴 것 중 가장 긴 글인데 유지원 큐레이터가 편집해줬다. 편집 과정에서 대화하며 서로 생각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나는 드로잉을 잘 안 한다. 가끔 작업에 관한 정보를 타인과 공유할 때가 아니라면, 글부터 쓴다. 글쓰기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아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면 글부터 쓰게 되는 것 같다. 다만 언어나 글에서 시작해도 최종적으로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 형태가 있는 입체물로 귀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작업한다.

돈선필, 『피규어 TEXT: 원더페스티벌 리포트』, 2019, 사진: 박성수, 도판 제공=돈선필

LEE : 작업에 관한 글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인가?

DSP : 학부 때 글을 써서 액자로 만들어 졸업 전시에 출품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부끄러워져 지금은 버렸다. 잡지 『아트 인 컬처(Art in Culture)』2018년 10월호에 박이소 전시 [기록과 기억](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7.26.~12.16.)을 보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카이브에서 매우 훌륭했던 전시였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땐 기록이 너무 다 남아 작가가 필요 이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 것 역시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LEE : 글을 한 자리에서 최대한 많이 쓰는가? 꾸준히 매일 쓰는가?

DSP : 한자리에서 몰아서 쓰진 않는다. 평상시에 생각해놓은 것들을 글로 옮기는 느낌이다. 생각이 파편적인 경향이 있어서 규칙적으로 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나 자신이 그렇게 부지런하게, 일과를 정해서 작업하는 사람은 아니다.

LEE : 내게 보내줬던 「특촬_재현을 위해 가공한 사물」은 어떤 글인가?

DSP : ‘특촬’이라는 영상물과 관련된 초고이다. 출간을 계획 중인데 단행본으로 만들기에는 아직 분량이 많이 부족하다. 관련해 올해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가 개봉했는데 그것을 본 뒤 글을 더 쓰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에반게리온(Evangelion)>의 안노 히데아키(Anno Hideaki)가 각본을 쓰고 기획한 특촬 영화인 <신 울트라맨(Shin ultraman)>(2022)이다.

LEE : 글에 예시로 등장한 작품들 일부는 알고 있었지만, ‘특촬’이란 단어는 처음 들었다.

DSP : 알면 오타쿠라 불릴 확률이 높다. 대부분 파워레인저(Power Rangers)는 알아도 특촬은 잘 모른다.

LEE : 피규어를 보거나 구입할 수 있는 경로도 다양해졌고 과거에 비해 대중화도 되었다. 진입 장벽이 많이 낮아진 것 아닌가? 아직도 마니아들이 즐기는 특수한 영역처럼 여겨진다고 생각하는가?

DSP : 그렇다. 일단 국내에서 생산되는 게 별로 없다. 피규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다. 최근엔 미국이 주도하는 게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다 안다. 자본의 흐름이 한 번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미술도 매니악(maniac)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에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인구가 늘었고 젊은 사람들이 디즈니랜드에 가듯이 미술관을 찾는 것 같다. 이렇게 대중화가 진행되는 것일 텐데 그럼에도 여전히 작가나 기획자가 원하는 것과 대중의 기대치는 일정 부분에서 거리가 있다. 모든 장르의 창작자들은 보편적인 것보다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미시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예전에 드라마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에서 봤던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 이 시트콤의 등장인물은 이론물리학자들인데 웨이트리스인 캐릭터가 학회에 가서 사람이 적게 왔다고 위로하니 이 정도면 우드스톡 페스티벌처럼 많이 온 거라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장면이 있었다. 당시 ‘이게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잠시 했었다.

LEE : 오늘날에는 오타쿠의 의미가 확장되어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면서 몰두하는 사람들을 뜻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본인을 오타쿠라고 생각하나?

DSP : 대부분 오타쿠는 자신을 오타쿠라고 표현하진 않는다.(웃음) 나를 생각해보면, 비슷하지만 아닌 것 같다. 정보를 많이 아는 거랑 오타쿠는 다르다. 오타쿠의 기본 소양이 과몰입인데 나는 과몰입을 못한다. 나는 몰입을 못해서 작가로 작업하는 것 같다. 만약 몰입을 더 잘하는 편이고, 일본에서 태어났으면 작가가 아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오타쿠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의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결핍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미술을 하게 된 것 같다.

LEE :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렸을 때 만화를 많이 그렸나? 내가 미술을 한다고 인식하면서 처음 그리기 시작했던 때는 언제이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언제인가? “취미와 미술을 오가면서 피규어를 수집하고 있다”¹⁾고 했는데, 혹시 어느 쪽에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고등학교 때부터 피규어를 수집했고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작업에 피규어가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²⁾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갖던 이미지와 시각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피규어로 이동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DSP : 그림은 거의 영유아 때부터 그린 것 같다.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입시 미술학원에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친형이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나는 형을 따라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다. 중학교 때 게임콘솔(game console)인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을 많이 했다. 게임에 등장하는 일러스트를 비롯해 게임 광고와 관련 삽화를 보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미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가를 하고 있다. 미대에 들어와 내가 그림을 보는 것은 좋아해도 그리는 것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만화는 정말 많이 그렸었는데, 내 나이대는 놀 수 있는 콘텐츠가 많지 않아 만화책을 보거나 TV를 보는 것뿐이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창작하는 게 주된 놀이였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Believing is Seeing)』(1995)에 나오는 현대미술의 기준을 생각하며 작업한 것은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일 거다. 그때부터 ‘작가를 해볼까’란 생각을 했다. 대학 오기 전에는 입시 준비로 정신없었다. 나는 대학에 와서야 교양 수업에서 달리(Salvador Dali)를 처음 알았다.

LEE : 다른 인터뷰에서도 등장했던, 10대 시절 봤던 게임잡지는 무엇이었는가? 특히 피규어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했던 잡지의 정확한 정보가 궁금하다.

DSP : 제일 처음 봤던 잡지는 『게임챔프』,『PC챔프』인데 오래전에 폐간했다. 이외에 다양한 종류의 잡지를 구매해서 보았다. 당시에는 일본 게임의 한글화 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 잡지가 번역서 역할도 했다. 또 게임 외에 다른 업계의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 서브컬처(subculture)에 관한 논평,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이벤트 등이 실려 오늘날 포털 사이트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게임 잡지에서 피규어를 처음 봤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캐릭터 모형을 피규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게임잡지 특집 기사를 통해서였다. 『게이머즈(GAMER’Z)』(2000년 혹은 2001년 1월호)에는 자주 가던 홍대 앞 피규어숍 사장님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옛날에는 서울 곳곳에 피규어숍 몇 곳이 흩어져 있어 여행하듯 약도를 들고 찾아가 구경하고 구매도 했다.

LEE : 어느 캐릭터에 제일 관심이 있었나?

DSP : 당시에는 캐릭터를 보고 피규어를 사는 게 아니라 피규어 자체를 보고 샀다. 캐릭터를 좋아해 피규어를 사는 게 아니라 피규어를 사고 보니 원작이 어떤 것인지 역추적을 하게 되는 식의 소비였다. 그만큼 출시되는 피규어 종류가 많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토드 맥팔레인(Todd Mcfarlane)의 만화 <스폰(Spawn)>을 기반으로 한 피규어들이 국내로 수입되었다. 2~3만원 사이였는데 가격 대비 완성도가 훌륭해서 국내에서 크게 유행했고 피규어에 관심이 있는 대부분이 구매했다. 또 실제 사람의 1/6 스케일의 밀리터리, 영화배우 피규어도 있었다. ‘아이피규어’라는 커뮤니티에 피규어와 관련된 게시물이 수시로 업데이트되어 집중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비롯해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골라보는 시대이기에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마치 광장처럼 다 같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했다. 피규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취향과 무관하게 새로운 피규어가 나오면 같이 공유했다. 어느 정도 자신에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게 된 게 10년도 안 된 것 같다. 2010년 즈음에 와서 국내외 피규어 업계가 탄력을 받고 생산 기술과 단가가 맞춰지면서 시장이 크게 확장되었다.

LEE : 일본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대하는 게 완전 다르다.

DSP : 일본은 우리가 K-POP을 소비하는 것처럼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생활 속에서 소비한다.

LEE : 판화를 전공했다. 돈선필에 관한 기사 중 가장 앞선 것이 제1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2009) 대상 수상에 관한 것이었다. <상처와 공격 Wound & Aggression>(2008)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DSP : 당시 판화과는 1~2학년 때 모든 판화 기술을 다 배운 뒤 3~4학년 때엔 자기 작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졸업 후에 판화 작업을 할 생각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판화 전공생들의 꿈과 같은 대회에 참가했다. 나중에 듣기로 당시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의 큐레이터인 카터 포스터(Carter Foster)가 내 작업을 매우 좋게 봤다고 한다. 당시 작업은 소통의 부재, 언어를 통한 불완전한 소통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20대였던 나는 이걸 상당히 중요한 발견이라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말을 안 할 뿐 모두가 소통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어려운지 체험하고 느끼며 산다. 자신이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고 착각했던 부끄러운 흔적이 남아있다. 제목이나 이미지 모두 직접적이어서, 입에서 못이 튀어나오는 이미지를 그렸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화면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 등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졌던 작품이다. 아마 작업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말이나 글이란 점, 작품에 대한 말을 길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초기 작업과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 같다.

LEE : 2011년도의 학부 졸업 전시를 보면, 석사 논문에도 언급되었던 ‘캐라’, ‘노멘’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등장한다. 관련이 있는가? <포트레이트 피스트(no. 1~24)>(2020)도 이 개념과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자기 소개>(2020)에서 얼굴과 거울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엄밀히 말해 얼굴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자기 모습이다. 눈이 얼굴에 달렸기 때문에 내 눈은 타인밖에 보지 못한다. 거울과 같은 반영체를 통해 이미지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있다는 점은 실상과 허상의 이중성을 보여준다.’³⁾ 관련해 <포트레이트 피스트>만으로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페르소나(persona)도 떠오른다. 돈선필의 작품을 볼수록, 피규어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고 다른 방향으로의 분석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사 중에 덕후 작가라고 소개한 것도 있었다. 한편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얼굴 없어도 구분할 수 없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처음 알았다. 당연히 얼굴을 보고 캐릭터를 구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DSP :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얼굴 없어도 캐릭터를 구분할 수 있다. 캐릭터의 눈, 코, 입을 지우고 헤어스타일이나 코스튬만 보고 누구인지 맞춰 보는 오타쿠 레벨을 확인하는 놀이도 있다.

[끽태점 喫態店 KITSUTAITEN] 전경,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19, 도판 제공=돈선필

LEE : 돈선필을 ‘피규어 아티스트’로 지칭한 기사들을 봤다.

DSP : 아무래도 아라리오뮤지엄 언더그라운드에서 [끽태점(喫態店, Kitsutaiten)](2019)을 할 때 그런 기사가 많았다. 내가 피규어를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피규어를 좋아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걸 설명하는 게 제일 복잡하고 번거롭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실제로 피규어를 만드는 피규어 아티스트들이 나의 작업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피규어를 사서 그걸 기반으로 작업을 한다. [끽태점] 때 직접 만들었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물론 여기엔 만든다는 것의 개념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받을 경우 역질문을 하거나 만든 것도 있고 산 것도 있다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뒤샹의 <샘 Fountain>(1917)이 나온 지 100여 년이 지났다. 미술계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법에 대해 사회적 합의는 아직 안 이뤄진 것 같다. 예술가에게 여전히 수공예적인 부분이나 특별한 기질의 발휘를 기대하는 것 같다.

LEE : [끽태점]에 사지가 분해된 피규어들이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가?

DSP : 피규어가 그냥 한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립의 결과물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LEE : <자기 소개>(2020)에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Alita: Battle Angel)>(2018)의 주인공 얼굴을 넣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는 왜 등장하는가?

DSP : <알리타: 배틀 엔젤>에서 주인공의 눈이 비현실적으로 크다. 원작 만화인 <총몽(銃夢)> 속 캐릭터의 눈을 반영하기 위한 감독의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그게 재미있었고 내 이야기와도 맞는 것 같아서 넣었다. 만화를 실사화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다. 사람들은 마블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 패권이 너무 한 방향으로만 리얼리티를 다루는 점이 문제라 생각한다. 리얼리티를 시각 이미지로 다루는 방법에서 할리우드와 같은 고도의 자본은 언제나 현실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반복 속에서 종종 CGI 기술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를 보는데 영화 <캣츠(Cats)>(2019)의 ‘고양이 인간’이나 <수퍼 소닉(Super Sonic)>의 ‘어글리 소닉(Ugly Sonic)’ 등이 대표적인 예시 같다. 사실적인 얼굴이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전시 [Portrait Fist](2020)에 전시된 머리는 그 자체가 두상 작품이라기보다 하나의 좌대 같은 거였다. 자세히 보면 얼굴에 얼굴이 올라가 있다. 좌대의 역할을 한 얼굴을 만들 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인터넷 밈 ‘나는 친구 같은 거 없어’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얼굴을 저렇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보통 얼굴의 좌대는 몸이다. 그런데 내 작품에서 좌대는 얼굴이다.

<자기소개 self-introduction> 4k video, 25min 19sec, 2020, 도판 제공=돈선필

LEE : 작품이 영사되는 모니터 받침과 맞은편의 소파를 그와 같은 재질로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DSP : 당시 OTC(one two chachacha)의 권의현 대표에게 디자인을 부탁했는데, 영상 작품 감상을 위한 쾌적한 장소를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보통 ‘편안한 공간’이라면 집의 거실 같은 일상의 생활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10분이 넘는 영상 작품을 선보이면서 그것을 볼만한 편한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미술계의 악습이라 생각한다. <자기 소개>의 길이가 25분 정도여서 관객들이 짧은 드라마 에피소드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감상하길 바랐다. 이 전시 외에도 영상 작품이 있는 경우 대부분 소파를 제공했다.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었을 때 침대 같은 의자를 제공하는 영상 작업을 봤다. 거기 누우니까 50분짜리 영상을 다 보게 되더라. 영상은 감상 환경도 중요하다.

LEE : 본인의 논문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생활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을 익숙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끔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물체가 있다. 그것들은 피규어다 대부분의 사물이나 도구들은 각각의 존재 목적이 있는데 피규어는 거기에 있다는 이유 외에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무용의 사물이다.”⁴⁾ 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 공식 웹 사이트에도 언급된 것처럼 피규어의 이와 같은 성격은 미술 작품과도 닮았다. 다만 미술과 피규어가 주는 “낯설고 생경한 감각”⁵⁾에 차이는 없을까? 또한 피규어와 미술 외에 이와 같은 역할/맥락에 놓이는 사물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DSP : 올해 정말 많이 받은 질문이 조각과 피규어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피규어는 조각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작가란 개인이 에너지를 써서 창작한 창작물이 조각이고 여러 사람이 합의해서 만들어진 공산품이 피규어다. 입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폭력적이다. 조형 언어도 언어라고 했을 때 미술 작품은 작가가 내는 아주 특이한 말과 같다. 소수 민족의 아름다운 말소리 같은 느낌이다. 그와 달리 피규어는 공공 영역에서 여러 사람의 합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의 구매를 원하는 수요가 있고, 금형 깎는 사람이 있고, 원형사가 형태를 정하고, 역설계의 변수를 감안하는 복잡한 생산 공정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바라는 대로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또한 대량 생산된다는 점에서도 일반적인 조각과 궤를 달리한다. 모든 피규어는 최소 5천~1만 개, 보통 5만~10만 개씩 생산된다. 대량 생산물이다. 조각은 에디션이 많아야 10점 내외일 거다.
무엇보다 피규어는 조각과 같은 자기 완결성이 없다. 피규어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피규어는 캐릭터를 지칭하는 방향 지시판, 안내문 같다. 표지판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많이 달라 보인다. 마지막으로 조각은 조금 더 고고한 차원의 자극을 요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조금 더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피규어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원해서 저 피규어가 존재하게 되었구나. 왜 저런 것을 만들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한다.

LEE : 원형 캐릭터가 없는 고유한 창작물과 같은 피규어는 없나?

DSP : 오리지널 피규어라고 해서 나오긴 하는데 그렇게 인기가 많진 않다. 원형사들도 예술가나 조각가로서 야망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창작 캐릭터를 만들어 선보이고 상품화할 때가 있다.

LEE : 오타쿠가 그렇듯 서브컬처도 그 의미가 바뀐 것 같다. 특히 과거 서브컬쳐로 여겨지던 것들이 주류가 되는 경우가 있다.

DSP : 서브컬처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바뀌긴 했다. 요즘은 일본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문화를 지칭해서 서브컬처라고 한다. 얼마 전 봤던 한 유튜브 채널에선 미소녀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모바일 가챠(Gacha) 게임을 ‘서브컬처 게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이젠 서브컬처 게임이 대중화되었다고 말하는 유튜브 영상도 있는데, 관련 게임들의 매출을 보면 대중화된 것이 맞는 듯하다. <원신>이란 게임은 2022년 8월 한 달 매출이 4778억원이었다. 중국에서 만든 미소녀 게임인데 1년이면 조 단위가 된다. 그만큼 대중화된 거다. 하지만 그것을 주류 문화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BTS가 아무리 인기 있어도 세계 무대에서 보면 케이팝(K-POP)이다. 세계적인 문화 관점에서 보면 클래식 음악이 주류이고, 케이팝은 서브컬쳐이다. 사실 즐기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면 역으로 클래식 음악이 서브컬처가 맞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달리 보면, 이젠 서브컬처가 상하의 분리,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한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신생 공간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는데 대안 공간과는 다른 곳이다. 수년간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 같지만 최근에는 매니악한 힙스터 플레이스, 핫 플레이스가 새로 생기면 신생 공간이라고 부른다. 언어는 쓰임에 의해 의미가 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지지만 마블 영화도 결국은 서브컬처라 생각한다.

LEE : 과거 온라인에서 보컬로이드(vocaloid) 콘서트를 보고 재미있다고 느꼈고 실제 공연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 역시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극장에서 화면 속 캐릭터와 대화하며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DSP : 디즈니 영화에도 아이들이 노래 같이 부르면서 영화를 보는 싱어롱(singalong) 상영관이 있다. 약간 다른 맥락에서 가상의 캐릭터와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는다는 점에서 ‘버츄얼 유튜버’라는 것도 생각난다. 보컬로이드는 훌륭한 문화다. 특히 하츠네 미쿠(Hatsune Miku)는 일본 내에서도 이례적인 캐릭터라 연구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보컬로이드는 목소리 변형 프로그램인데 그냥 프로그램만 선보이면 밋밋하니 홍보용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일본은 캐릭터가 관념화되기 힘든 구조인데 하츠네 미쿠는 거의 유일하게 관념으로 작동하는 캐릭터여서 자신의 형태나 색채에 종속되지 않는다. 오리지널 원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에서 파생된 것도 아니다. 보컬로이드의 로고에 가까운 캐릭터다. 모든 보컬로이드가 인기 있는 것은 아니고 미쿠가 남다르다. 피규어 중에 가장 종류가 많은 게 미쿠다. 피규어 종류만 몇천 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제품 행사에도 매번 15~20개 정도씩 나온다. 예전에 도쿄 올림픽 2년 전에 일본 하네다 공항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입국장 벽면에 ‘어서 오십시오. 일본입니다.’란 글귀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우키요에(Ukiyo-e)였고 다른 하나가 미쿠였다. 이 정도로 미쿠는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어 있다.

LEE : 피규어는 대부분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미지)에 근거하고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관념의 사물화를 넘어 관념의 현실화가 실현될 것 같다. 그러면 완벽한 코스프레도 가능해지고, 역으로 <더 콩그레스(The Congress)>(2013)처럼 실존하는 인간의 이미지화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피규어는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라 생각한다. VR, AR의 영역이 확장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DSP : 난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생각보다 변수가 엄청 많은 생명체인 것도 있고, 앞서 말했던 버츄얼 유튜버가 약간 <더 콩그레스>의 상황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것이 인기가 있는 것은 CG 캐릭터 안에서 말하는 존재가 사람이란 믿음 때문에 재미있어서 보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CG 캐릭터의 설정은 17세 해적 소녀인데 말하는 내용을 들으면 30대 이상은 되어 보이는 간극, 낙차가 주는 즐거움이 크다. 버츄얼 인플루언서가 수익을 내는 것도 완벽함이 아니라 완벽함을 추구할 때 나오는 결핍이나 실수 때문이다. 만약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1999)처럼 뇌에 코드를 꼽아 신경이 다른 걸 보게 하는 정도로 바뀌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메타버스(Metaverse)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기술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기술 발전 속도를 압도한다. 지금 엄청나게 사실적이라고 감탄하는 CG도 1년 지나면 가짜라는 걸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다.

LEE : 피규어는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대상이라 생각된다. 허상이어서 실제로 소유할 수 없기에 그것을 물질화해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모에’도 인간의 욕망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슈이다. 관련해 ‘하위문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상이나 배경을 주요 소재로 해 캐릭터 혹은 구조에 대한 애정을 건조하게 다루면서도 애정을 갖고 보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설명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돈선필과 관련된 기사나 소개글에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DSP :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써준 작가 소개글인 것 같다. 나는 피규어를 다루는 것도 좋아하지만 ‘너무 좋아요’가 아니라 덤덤한 어조로 작업한다. 약간 츤데레 같은 톤이라 보면 된다. 그런 뜻으로 써준 것 같다. 좋아하기 때문에 주목하고, 그에 대해 파들어가면서 작업을 진행하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담담해지는 자연스러운 절차를 겪고 있다.

LEE : 피규어는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대상이라 생각된다. 허상이어서 실제로 소유할 수 없기에 그것을 물질화해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모에’도 인간의 욕망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슈이다.

DSP :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엄밀히 말해 그 자체가 중요한 핵심이라기보다 그것을 통해 다른 것을 보는 게 중요하다. 오리지널 피규어가 인기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리지널 피규어는 그것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끌어오는 데에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아끼는 사물도 매일 보면 감각적으로 질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피규어를 통해 환기하다 보면 상상의 이야기로도 갈 수 있다. 모에는 그런 과정을 구체적인 기호로 형상화한 작업의 집합체들이다.

LEE : 수집한 것이 작품의 모두는 아닌데 수집품이 작품이 될 때가 있다. 작품화가 되면 원래 피규어의 의미가 작품의 의미가 더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원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이기도 한데 수집가이다. 훼손되는 것이 싫어 사용하지 못한 경우는 없었나?

DSP :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은 없다. 아마 내가 작업하는 것을 보면 수집가들이 비명을 지를 거다. 그래서 내가 수집가인지 미술가인지 스스로 성찰하게 된다. 옛날에는 아꼈던 것도 있었는데 물욕이 사라진 것 같다. 요즘은 ‘피규어 수집이 아니라 재료를 모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LEE : 피규어가 그대로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작가적 행위가 추가되는 경우도 있다. 전체 작업을 볼 때 어느 정도 비율인가?

DSP : 반반이다. 다만 피규어 자체가 아니라 그와 같은 형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 형태가 필요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가끔 피규어 자체가 작업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정판 피규어를 사러 도쿄를 하루 만에 왕복했던 과정을 담은 <Adventure(5)Time>(2020)이 있다.

LEE : <Adventure(5)Time>에서 구입한 것으로 나오는 피규어는 실제 판매하는 것인가?

DSP : 그렇다. 소프트 비닐 피규어라고 옛날에 많이 나오던 타입이고 지금도 신제품이 계속 나온다. 초기 버전은 옛날 장난감처럼 조악한 느낌도 드는데 아이들이 갖고 놀기 좋다. 영상에 나온 것은 한정판으로 100개 미만으로 소량 생산해서 판매했다.

LEE : <개발 중인 액션 치킨가면 피규어>(2019)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피규어를 이용했던 그간의 작품과 분위기가 다르다.

DSP : 단원미술관에서 전시한 건데, 단원미술관이 안산에 있고 안산에는 ‘액션 치킨가면’이라는 치킨집이 있고, 그곳의 사장님은 액션 치킨가면 코스튬을 입고 배달을 했었다. 지역 특색에 맞춰 장난 같은 콘셉트로 해보면 좋겠다 싶어 학예사님과 함께 치킨집 사장님을 만나 작업과 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후 과거에 유행했던 고무 재질 미니 피규어 풍으로 3.5m 대형 피규어를 만들었다.

[캣츠 온 마스 Cats on Mars] 전경, 리틀 아트선재센터(Little ASJC), 2021, 도판 제공=돈선필

LEE : 지금 작업실에 놓인 피규어들의 통일성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가 볼 때는 있을 것도 같다.

DSP : 그냥 피규어를 보고 사는 시간과 경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온라인 구매를 잘 안 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팬데믹 전에는 원더 페스티벌(Wonder Festival)을 1년에 두 번씩 꼭 갔는데 그처럼 몸을 옮기는 시간이 좋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피규어를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환기하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캐릭터에 집중하거나 미소녀에 집중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수집하진 않는다. 생각을 더 끌어낼 수 있는 것들 위주로 모은다. 그래서 통일성이 없다. 특히 [끽태점] 이후 더 그런 것 같다.
[조각충동](2022)의 경우에도 신작인 <자본주의의 고양이> 시리즈(2022) 세 점이 전시되었다. 근육질 고양이 세 마리를 제작했는데, 형식은 매우 단순했다. 내용은 인터넷 환경을 검색하다가 고양이에 대한 트래픽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강력함을 시각화하기 위해 근육질 피규어를 사서 머리 부분을 고양이 머리로 교체했다. 내 작업은 결과물은 간략하고 단순한데 사고의 과정을 글로 쓰면 매우 길고 방대하다. 형태로만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면 이야깃거리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해서 작업하는 편이다. 압착된 것이 많은 작업이다. 나는 성분을 알 수 없는 불량식품 같은 작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고양이> 그리퍼, 레진, 아크릴, 710x470x400mm(HxWxD), 2022, 도판 제공=돈선필

LEE : “일본의 캐라 는 도상에 가깝게 등장인물을 설계하여 캐릭터와 독자와 거리를 좁힌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캐릭터와 매우 근접해 있다는 얘기다. 북미 코믹스의 독자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공연극을 무대 바깥에 앉아 구경하는 관객의 위치에 있다면 일본 망가(Manga)와 애니메이션의 독자는 그 작품의 서사 안쪽에서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중략)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은 그런 캐릭터의 허술한 빈자리에 관객을 채우고 현실 이상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공간으로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⁶⁾
그 차이는 인식 가능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볼 때 위에 언급된 것처럼 서사의 안과 밖에 존재할 정도로 다른 경험을 한다는 내용에 완벽히 공감되지 않는다.

DSP : 무대 장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미국의 마블이나 DC 코믹스/영화는 독자/관객이 제3자로 사건을 관찰한다.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는 게 아니라 전지적 관점의 관찰자이다. 슈퍼맨은 미국 남성이어서 미국 남성이 아닌 사람은 이입이 어렵다. 서양은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캐릭터를 추가한다. 그런데 일본 만화는 추상화, 기호화된 인물 표현을 통해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지칭할 수 있게 캐릭터를 설계한다. 인물의 얼굴 자체가 도상화되어서 특화된 고유한 얼굴이 없다. 얼굴이 비어있으니 관망이 아닌 몰입이 가능하다. 일본 만화를 보면 주인공은 완전 비현실적인 만화 캐릭터처럼 그리고 주변인들은 사실적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요츠바랑!>이란 만화가 있는데 주인공이 초등학생이다. 작가인 아즈마 키요히코(Azuma Kiyohico)는 완벽주의자여서 배경도 치밀하고 연재본과 단행본의 화풍이 완전히 바뀔 정도다. 그런데 주인공인 요츠바는 사실적인 사람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다른 등장인물과 디자인 자체가 다르다. 왜 그런 구조를 갖는가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는데 내가 봤을 때는 독자가 기호화된 7~8세 어린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이끄는 효과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비교를 한 것이고 최근으로 오면 코믹스와 망가가 조금씩 섞이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LEE : 몰입시키기 위해 일부러 덜어낸다는 이야기인가?

DSP : 몰입을 위해 구체성이 사라진 인물을 넣는 것이 일본 방식이다. 미쿠가 그것이 극대화된 것 같다. 미쿠는 내용이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게다가 미쿠는 녹색 머리칼을 가졌는데 하늘색, 분홍색, 회색도 있다. 단발머리의 미쿠도 있다. 변종이 많다. 이에 반해 검은 머리의 세일러문은 없다. 그건 캐릭터의 정체성을 벗어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미쿠는 그저 자기의 정체성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확장한다. 스파이더맨(Spider-Man)은 여러 멀티버스(multiverse)에서 여러 스파이더맨을 만들어서 정체성을 다양화한다. 사실 코믹스의 캐릭터들이 개념에 더 가까워서 다른 식으로 각색하기 쉽다. 배트맨(Batman)은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배트맨이나 조커(Joker)의 성격이 바뀐다. 일본의 캐릭터는 얼굴이 비어있고 추상화되지만 캐릭터가 정형화/사물화되어 있어서 잘 안 변한다. 일본 만화는 등장인물이 성인이 되어도 어릴 때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가진 경우가 많다. 얼굴이 추상화되어 있어 사람들이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여기에는 저작권 문제도 얽혀 있다. 미국은 출판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고 일본은 작가가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캐릭터에 대해 자유롭게 창작한 것이 발매되면 정사가 되지만 일본은 영원히 2차 창작물일 뿐이다.

LEE : “소비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참여형” 피규어가 있다고 하는데 이때 어떤 식으로 참여를 하는 것인가? 또한 이때도 원본에 대한 응용이 거의 불가능한가?

DSP : 피규어 자체가 소비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제작공정이 복잡하고, 기간이 오래 걸리고, 제작 비용이 많이 드니 선주문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샘플을 만들어 발표한 다음 얼마 후에 나올 테니 구입할 사람은 예약하라는 식이다. 만약 신제품을 발표했는데 선주문이 없으면 그냥 엎어진다. 따라서 소비자가 참여를 해야 해당 피규어가 존재하게 된다. 반대로 조각은 그런 게 없다. 관객이 보고 싶다고 작가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나는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약 구매 보다는 매장에서 실물을 봤을 때 구매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소비자다. 구매 과정에도 옛날 감성이 남아있는 것 같다.

[끽태점 喫態店 KITSUTAITEN] 부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19, 도판 제공=돈선필

LEE : 작업도 그렇고 피규어를 대하는 태도가 아날로그적이다.

DSP : 그걸 지향하고 있긴 하다. 디지털 작업을 시도해볼까 했는데 디지털은 실수가 불가능해서 더 진행하지 않았다. 디지털 작업도 실수한 것처럼 제작이 가능한 요즘이지만 작가의 계획/의도를 벗어난 즉흥적 형태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의도를 벗어난 형태까지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두 배로 번거로운 것 같다.

LEE :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오는 거 좋아하나?

DSP : 그것보다 대충 만든 형태를 선호한다.

LEE : 대충 만드는 건가? 아니면 대충 만들어 보이게 척하는 건가? 절대 대충 만들 리가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질문이다.

DSP : 반반 섞여 있다. 작가가 작업의 완결 지점을 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가가 대충 만들었는지, 열심히 만들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열심히’와 ‘대충’의 경계 지점이 헛갈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만 알고 있는 약간의 강박증 같은 것을 조절하기 위해 항상 마음속으로 대충한다는 결심을 품고 있다. 꾸준하게 작업할 수 있는 나름의 지혜라 생각한다.

LEE : [포트레이트 피스트](2020)에 관한 기사를 보면, ‘피규어처럼 보이는 두상을 레진으로 제작했으며, 두상 뒷면에 ‘fragile’을 적어 공산품의 성격을 드러냈다’7)고 하는데, 개인적 의견으로 공산품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조각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피규어를 바탕으로 한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일상을 낯설게 하는 사물인 피규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일반적인 피규어에 반하는 낯선 피규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 [끽태점]의 피규어 얼굴이 변형된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전시에서도 [포트레이트 피스트]와 유사한 두상이 등장한다. 역설이나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다. 돈선필의 작업을 조각이라고 단정 짓고 싶진 않지만, 또한 작가가 정의 내리는 피규어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돈선필의 작업은 피규어를 이용한 예술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피규어가 아니다.

[포트레이트 피스트] 부분, 아트선재센터, 2020, 도판 제공=돈선필

DSP : 나는 무언가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는 도구로 피규어를 쓰고 있다. 언어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단순한데, 앞서 언급했듯 소수 민족의 방언 같은 것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 조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입체로 된 조형 언어가 나에게 필요한 거고, 그것을 통해 하고 싶은 말, 할만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한다. 이 모두를 텍스트로 풀고 싶지는 않고, 두루뭉술한 형태가 있는 무언가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 정도이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것들을 피규어라고 부르고 있다. 제작에 있어 최대한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것, 재료에서부터 100% 모두를 내가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은 제작 방식이 조금 변하고 있긴 하지만 식재료를 사다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밀키트를 사다가 만드는 것이 요리인가, 조리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LEE : 누군가 돈선필의 작업에서 조각적 요소를 찾아낸다는 식의, 다른 식의 분석을 하게 된다면? 본인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 나오면 어떻게 하는가?

DSP : 해석 역시 누군가의 자유로운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조각이라 해도 외형이 조각처럼 보여서 크게 반박하기 쉽지 않다.

LEE : ‘무언가를 정확히 표현하려고 한다거나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지금도 계속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작업을 왜 하는가?

DSP : (작품을 가리키며)저것을 통해 뭘 표현하고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 ‘당신에게 작업이란?’과 같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항상 ‘이것은 집안일입니다’이다. 빨래나 설거지와 비슷하다. 물론 거기에도 목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작업을 왜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너는 어떻게 사니?’와 같다.
내 작업은 생활감과 세속적인 부분이 많이 연결되어 있다. 직설적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생계와 관련된 직업적인 부분도 있다. 뭘 만들고, 전시하고, 갤러리와도 일하고. 그런데 소비자가 명확하면 그에 맞춰 무엇을 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되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그림은 안 그릴 사람이니 입체를 만드는 거고. 정형 행동이나 게임 같은 느낌인데, 게임은 인간의 정형화된 행동을 시스템적으로 유도한다. 어떤 행복을 반복하고 그 반복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라고 하는 게 게임이다. 나는 내가 만든 게임에 빠져 반복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표현하려는 의지는 딱히 없다. 무언가를 만들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도 없다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에 나를 반영하기에 나의 에고(ego)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원형사들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작업 진행 과정에서 조각가보다 제약 조건이 훨씬 많을 텐데, 그러면서도 그 안에 자기 스타일이나 정체성 같은 무언가를 은근슬쩍 남겨놓는 게 재미있다. 산업제품이기 때문에 조각가처럼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진 못한다. 아마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작업을 통해 하는 표현의 정확성이 두루뭉술해지는 것을 지향하게 되는 것 같다.

<뱅크씬#001 Bank Scene#001> 레진, 아크릴, 275x310x240mm(HxWxD), 2022, 도판 제공=돈선필

LEE : ‘피규어는 시대의 화석이자 현대의 조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련해 미술의 위계, 주류와 비주류/ 하위문화, 가상과 실재, 관념과 물질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다. 또한 전술했던 비실용적인, 일상을 낯설게 하는 사물이라는 점 외에 조각(미술)도 관념의 사물화(물질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피규어 외에 거의 대다수의 사물이 시대의 화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피규어를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DSP : 모든 공산품은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규어에는 쓰임이 없다. 나는 ‘그리스 시대엔 PVC가 없으니 대리석으로 등신대 피규어를 만들었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피규어와 조각을 연결해 생각해봤는데 2015년 즈음을 지나며 피규어는 조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용품도 아니고 조각으로서도 결격 사유가 굉장히 많은데 정말 많이 생산된다. 몇 세기 뒤의 인류가 피규어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썩지도 않아 후세에 엄청난 양이 출토될 거다. ‘기후변화를 생각하면 생산량이 줄거나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쩌면 한 시대의 어리석음의 지표로 썩지 않고 지구상에 영원히 남아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LEE : [민메이어택: 리-리-캐스트](2016) 티저 속 이미지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DSP : 그때 신신(신해옥, 신동혁)을 처음 만났다. 전시를 관통하는 개념인 ‘열화(劣化) 복제’라는 개념을 담되 전시 포스터나 이미지를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다. 그 당시 ‘극강의 컨셉충’이라 전시에 대한 일반적인 방식을 피하고 싶었다. 전시가 진행된 시청각은 한옥 같지만 한옥이 아닌 공간이었다. 한옥은 법적으로 대문이 나무로 되어야 하는데 여긴 철문이었다. 이런 개보수의 흔적이 한국 근대화와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려서 봤던 만화가 한국에서 제작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일본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나를 키워준 토양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신에게 전달했다. 그랬더니 신신이 이미지 대신 영상을 만들어왔다. 영상 속 이미지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부분 부분들이 짜깁기 된 것이고 사운드 역시 음악가 박다함이 믹싱한 애니메이션의 효과음이었다. 한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식민지 시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갑자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문화들이 섞이며 급속도로 현대화된 상황, 다른 나라에서는 200년이 걸릴 것을 40년 만에 이뤄낸 한국 사회에 관해 나눴던 이야기들을 반영한 영상이다.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 MINMAY ATTACK: RE-RE-CAST] 티저, 2016, 도판 제공=돈선필

LEE : [끽태점]에서 본인이 수집한 피규어와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가 만든 피규어가 함께 전시되었다. 다만-작가 역시 그 차이를 언급했듯이-원형사와 미술가는 분명 다르다. 어떻게 담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DSP : 2010년도에 들어와 한국에서 시각디자인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전에는 디자인 업무란 것이 하청을 받아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겼다면 10년 사이에 전문적 직업군이 해야 하는 일로 존중받게 된 것이다. 당시 젊은 디자이너들이 힘을 합쳐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피규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는 모든 공산품에는 원형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역할이 전면에 대두되진 않지만 재평가될 시기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진행 중인 영상 작업의 재료로 스타워즈(Star Wars)의 스톰트루퍼(Stormtrooper) 헬멧을 사용하는 이유도 산업 디자이너의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최초 사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산업현장에서 원형사가 우대를 받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내 작업실 공간도 원형사의 작업실과 유사하다. 작업하며 원형사 흉내를 낸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그들만큼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선망하고 좋아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