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에틱

artist 노상호

2023. 5. 9.

본 글은 2023년 3월 27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노상호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노상호(Noh, Sangho)

LEE : 이문정, Noh : 노상호

LEE :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을 시작했고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면 좋겠다. 원래 미술에 소질이 있었나 보다.

Noh : 늦게 시작한 것은 맞다. 2년 조금 안 되게 준비했다. 고3 때 준비해서 한 번에 합격했으면 멋진 이야기였겠지만 재수했으니 대단한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석고 데생과 수채화로 석고 그리기를 같이 시작했는데, 개인적으로 입시 미술이 그렇게 오래 배울 건 아니라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오래 그림을 그린 학생들을 따라가느라 마음고생을 좀 했다. 여하튼 입시 준비를 길게 하지 않아 어머니가 효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집안 분위기가 입시를 위해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입시 스트레스를 주시는 것도 아니어서 가능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취미로 서울대학교 디자인과를 다니던 누나 친구에게 취미로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미술을 배운 적이 없었고, 어머니도 취미로 하는 거라면 배워보라고 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당시 진로를 고민하던 때이기도 해서 미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 누나 친구가 미술에 소질 있다고 말해줘서 용기를 낸 거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의미를 담은 말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잘한 것 같다. 선택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느낌이 강하게 왔었나 보다. 늦게 시작해도 따라잡을 수 있고 큰 문제가 아닌 영역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워낙 무언가를 만드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고, 지금 미술을 선택하지 않으면 창작하거나 만드는 일을 취미로밖에 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LEE : 그렇다면 미술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Noh : 특별한 것은 없다. 학교 수업 시간 정도?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에서 문화예술을 접하던 세대인데 호기심에 유명한 작가들이 미술 작품을 보거나 가끔 부모님을 따라 전시를 보는 정도였다.

LEE : 많은 인터뷰에서 대학교 4학년 때 선배들한테 전화 걸어서 졸업 후의 일에 대해 질문을 했다고 밝혔다. 무작위로 선배들에게 전화하면 다 받아주었나?

Noh : 학과 사무실에서 일할 땐데, 전공 업무와 관련한 리서치를 위해 졸업생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 김에 질문을 했다. 또 학교를 같이 다녔던 선배들은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LEE :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 대학교 4학년 때 드로잉을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에 무엇이든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현재의 작가 노상호를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Noh :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니 좋은 거지, 관점에 따라 한심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자격증을 따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게 맞다. 불안하면 결과가 확실히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잡고 달려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을 꾸준히 반복한다는 것이 무모할 수도 있다.

LEE : 요즘에는 불안감이 사라졌나?

Noh : 조금 다른 종류일 거다. 후배들 앞에서 강연할 때 20대 때의 내가 생각난다. 그 나이에만 하는 고민이 있다 보니 강연이 끝난 뒤에도 대부분 같은 질문만 한다. 작가가 직업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지 작업 자체에 대한, 작업의 내용적인 고민은 거의 없다. 지금의 나는 작가가 직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고, 직업을 잃거나 전시 전에 작업을 내보여야 하는 불안감 같은 게 있다. 이건 학생 때는 획득할 수 없는 불안감이다.

LEE : 그건 어떤 직업을 가져도 다 하게 되는 고민이다.

Noh : 그게 내가 직업을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작가라는 직업이 안정적이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내가 철저히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속한다는 생각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의 직장인 중에도 투 잡, 쓰리 잡을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모두 비슷한 불안감을 느끼며,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PIC이라는 사업체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LEE : 여러 개를 동시에 해서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성과가 좋을 수도 있다. 노상호는 후자인 것 같은데, 잘 조절해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Noh : 사실 스트레스가 크다. 특히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다른 선택을 하면 어땠을까?’란 되새김도 많이 한다. 성공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지금은 바로 알 수는 없다. 또 내 인생의 기점에서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할 만한 것도 있다. 나는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경제적인 소득뿐 아니라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에 대해 분기별로 결산하는데, 이때 고민을 많이 한다. 어떻게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작가는 영원히 나의 뒤에 작업을 계속 쌓는 직업이어서 쉽게 놓을 수 없는 것 같다. 예전부터 작가들끼리 ‘끝까지 버티면 너만 남는다’는 농담을 많이 하곤 하는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작가도 많다. 이제 30대 후반인데, 더 이상 직업을 바꿀 수 없는 나이가 오고 있다. 그래도 한 3년 전까진 ‘작가를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단계에 왔다. 내가 개인 작업실을 얻은 게 2년 전이다. 나는 독립된 작업실 얻는 것은 미뤄왔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직업인데 작업실을 얻으면 공간 계약 기간 동안 어떻게든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캔버스 위에 수채, 259x194cm, 2014, 도판 제공=노상호

LEE : 2011년부터 디지털 환경 속의 저화질 이미지를 기준 없이 수집해 먹지를 대고 베껴 그리는 작업을 해왔다. 작업 중에 작은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또 다른 이미지를 몽타주해 이미지를 제작한 뒤 스캔해 온라인(SNS)에 다시 업로드한다. 그런데 이미지를 기준 없이 수집한다고 했다. 앞선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작가 본인의 무의식적 취향이나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몸짓이나 인물이 있는 이미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 또한 말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겠으나, 기준이 없다는 것,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게다가 하루에 30~40개 정도의 이미지를 수집했다고 말했는데, 이 숫자 자체가 매우 선별적이다. 정말 무작위라면 더 많은 양의 이미지가 수집되는 것이 맞지 않나?

Noh : ‘기준 없이’라는 표현이 엄청 많이 반복 생산이 되어 그 의미가 모호해졌다. 처음 그 단어를 썼을 때는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기준이 매일 바뀐다는 뜻이기도 했고, 특정한 검색어를 넣어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피드로 이야기하면 내가 10년 동안 이 작업을 해왔는데, 10년 전에 내가 보던 피드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피드는 당연히 다르다. 내가 팔로잉하는 목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팔로잉 목록이 나의 기준인데, 나의 기준은 매일 업데이트되고 서서히 바뀐다. 그래서 어제랑 오늘은 비슷하지만 10년 전과 오늘은 다르다. 기준은 매일 바뀌는데 마치 유행과 같은 거다. 지금은 괴상해 보이지만 과거에는 예뻐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기준을 명시해서 말해줄 수 없고, 기준이 계속 바뀐다는 것 자체가 내 작업의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기준이 없을 수는 없다. 내 피드에 뜨는 알고리즘인데, 그 알고리즘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이전에 선택했던 것들을 기준으로 한다. 다만 뭔가 기준이 쌓이는데 그 전체의 흐름을 명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한편 수집하는 이미지의 수는 매일 다르다. 100장이 모일 수도 있고 수십 장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수집한 이미지를 모두 인쇄했지만 지금은 포토샵으로 합친다.

LEE : 아예 안 하는 날은 없나?

Noh : 늘 스마트폰을 쓰니 이미지 수집은 무조건 하게 된다. 휴대폰을 하루에 1~2시간은 사용하는 것 같은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할 수밖에 없다. 또 드로잉의 경우 빨리 그리면 30분~1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하루 중 그렇게 큰 시간은 아니라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약간의 강박이 생긴 거 같기도 하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 이것이 쌓여서 뭔가가 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청나게 큰 사명감이나 목적의식을 갖진 않았다.

LEE : 그럼 앞으로 평생 이미지를 수집하고 하루 한 점씩 그릴 것인가?

Noh :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인데,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릴 것 같다. 아침에 무조건 드로잉 한 장 그리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하면 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드로잉이 하나 더 있다. 어제도 프로젝트 두 개를 마친 날이어서 좀 쉬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밤 12시에 잠은 안 오고 다른 무언가를 하기엔 애매한 거다. 다음날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해야 해서 늦게까지 놀 수도 없었다. 뭘 할지 고민하다 그냥 드로잉을 했다. 일과 일상의 구분이 안 되는 이 상황이 약간 이상했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한때는 그 둘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젠 안 된다. 직업의 단계를 넘어서 삶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매일 할 것 같다. 벗어날 수 없는 거다. 나는 이미지를 모으는 사람인데, 인생은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래도 다행인 게 나는 디지털 이미지만 다룬다. 그리고 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안 찍는다. 오히려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그리려 하면 기억을 상기하며 검색해 유사한 이미지를 찾는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3-elsewhere> 90x72cm, 캔버스 위에 유화, 2020, 도판 제공=노상호

LEE : 수집한 이미지에 추가하거나 몽타주하는 이미지 선택은 어떻게 하는가? 이 역시 즉흥적이라는 것 외에 해줄 말이 없는가?

Noh : 수집한 이미지 중에 하나를 골라서 먹지를 대고 그리다가 그날 수집 다른 이미지들을 섞는 거다.

LEE : 수집한 이미지에 없는 것을 그리지는 않는가?

Noh : 하트나 뿔처럼 간단하고 작은 요소들을 더하거나, 두 개의 개체를 한 몸으로 만들기 위해 생략할 때 빼고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내가 수집한 이미지에 기반한다.

LEE : 지난 인터뷰에서 개념을 완벽히 잡고 작업하는 작가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건 개념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차원인 것 같다. 개념을 잡았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본인의 작업을 가볍고 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란 질문이 들어서이다. 관련해 본인은 ‘가벼운 이미지를 수집해서 다시 가벼운 이미지를 생산하고, 본인이 그린 이미지 역시 가볍게 소비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온라인에 떠도는 이미지를 가볍다고 단정 짓기 어려워 보이고, 작품을 가볍게 소비하라는 것 역시 ‘100% 솔직한 것일까?’ 질문을 하게 된다. 또한 전시장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미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념에 맞게 인터뷰를 하는 것 역시 작가의 선택이다.

Noh : 인터뷰마다 전달되는 뉘앙스가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데 그게 애매해서 꼭 집어내기가 어렵다. 일단 나는 ‘가볍다’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가볍게 소비하고 인식하는 것은 무겁게 인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건 그냥 성격을 표현하는 거다. 무게가 가볍거나 무거운 것과 같다. 마치 가볍다는 것에 가치 판단이 들어가 깊이가 없다는 것처럼 흘러가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며 작업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때론 ‘얇은’이란 단어로 바꿔 쓴 적도 있는데 이 역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나는 가볍게 돌아다니는 이미지의 흐름을 내 작업으로 끌고 들어와 보여준다. 이는 매체나 이미지의 흐름을 은유하는 것이다. 가치 판단으로서 부정적으로 통용되는 가벼움과 내 작업은 전혀 붙어 있지 않다.

LEE : ‘투명하다’는 표현도 했다.

Noh : 투명한 것은 없는 것은 아니라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수도, 전기, 인터넷 모두 투명하다. 당연하게 있는 것 혹은 망(網)이 된다는 것, 네트워크처럼 전부 깔려 있는 상태란 변형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작업이 그렇게 되길 원한다. 이는 내가 이미지 선택의 기준이 없다고 설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 한 평론가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AI가 되려고 하는 사람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미지를 받아 그것을 다시 내보내려는 것이니 할 수 없다. 실제로 망이 될 수 없는데 망이 되려고 하는 태도나 가벼운 태도가 은유하는 것도 유사하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1> 설치, 2016, 사진=김익현. 도판 제공=노상호
<THE GREAT CHAPBOOK 4-HOLY> 2023, acrylic on canvas, 234x91cm, 도판 제공=노상호

LEE : 같은 맥락의 질문인데, 자신을 인터넷 가상환경과 현실의 쏟아지는 이미지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얇은 사람’이라고 칭해왔다. 의미는 이해하지만, 이것부터가 어느 정도의 콘셉트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노상호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작가가 방향을 잡았고 그에 맞게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명쾌하게 보이는 건 솔직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숨기는 것이 없다고 하여 방향을 잡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Noh : 그건 같은 거다. 다르지 않다. 나는 원래 틀을 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틀을 짜놓은 상태이고, 그 틀 안에서 답한다. 그런데 내 인터뷰나 글을 보면 답변이 바뀐다. 그건 내가 솔직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야 바뀔 수 있다. 작업에 관한 틀을 두 번 정도 바꿨고, 답변도 바뀌었다. 전시 [젊은 모색](2014) 이전에는 굉장히 서사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사람처럼 인터뷰하고 글을 썼다. 그러다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The Great Chatbook)](2016)부터 그동안의 것을 전부 배반하는 말을 했다. 그래서 당시에 내 작업을 좋아하던 많은 분이 떠났다. 나를 서사적으로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는 작가라고 생각했던 분들이었다. 내가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고 전부 가져다 쓰는 거고 이미지가 소비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니 실망한 거다. 내가 솔직하게 말을 하다 보니 만나게 된 오해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시를 통해 선언했다. 그렇다고 나의 행동이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계속 이런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다. <THE GREAT CHAPBOOK 4-HOLY>(2023~)도 <더 그레이트 챕북>(2016~)이 더 진행된 것이라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더 그레이트 챕북>의 태도가 현재의 내 태도에 완벽히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나는 계속 변화하고, 기준이 더 입체적으로 되었거나 혹은 더 좁아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작업을 전개할수록 과거에 내가 했던 말 중에 틀려 보이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작업의 틀을 늘 정하는 사람이고 그 틀에 맞춰 행동하고 발언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생각이 바뀌면 틀도 바뀐다. 만약 내가 정말 용의주도하게 모든 것을 확정해 그대로 말한다면 이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가만히 보면 그 변화가 과거의 내 작업이나 발언과 부딪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긴 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내가 나의 작업을 텍스트로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가? 작업에 대한 나의 설명이 솔직한 것인가, 솔직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말이나 텍스트가 아니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행동인데 그걸 명명백백하게 정리하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모호한 일이다. 또한 변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극히 일부분의 텍스트만을 근거로 나를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식이면 공격받지 않을 게 없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2> 설치 전경, 2018, 사진=김경태, 도판 제공=노상호

LEE : 아날로그적인데 복제의 느낌도 있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작업을 위해 먹지를 사용한 것은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드로잉을 편하게 하려고 고민하다 먹지가 눈에 보였다고 했는데, 왜 하필 먹지가 그곳에 있었나? 정말 단순한 질문인데 베끼는 방법으로 트레이싱페이퍼는 사용한 적은 없나?

Noh : 판화는 전사 과정이 필수라 항상 먹지나 트레이싱페이퍼를 쓴다. 작업실에 널려 있다. 그래서 눈에 뜨였고 썼다. 다만 트레이싱페이퍼는 보관도 어렵고, 물감을 발랐을 때 느낌도 먹지와는 다르다.

LEE : 혹시 글을 쓰기 시작한 데에도 헨리 다거(Henry Darger)의 영향이 있는가? 다거와 관련해 작업 방법이 주로 언급되는데 이미지의 분위기도 공통점이 있다. 얼핏 보면 밝지만, 자세히 보면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다.

Noh : 무엇보다 헨리 다거의 이미지 자체를 좋아했다. 이미지적으로 보면 강력하고 매력적인 작가이다. 나는 워낙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이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은 완전히 다르다. 그의 작업이나 소설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문제가 될만한 요소도 담겨있는데 당연히 그런 부분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왜 아웃사이드 아트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곤 하는데, 그런 성향이 좀 있나 보다. 최근에는 인디 게임을 혼자 개발해서 이상하면서 독특한 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업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들은 10년 동안 혼자 개발하고 완성하면 끝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진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LEE :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지를 어떻게 대하는지 드러내기 위해 드로잉을 선택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온라인상의 이미지는 회화와는 또 다른 의미로 평평함과 환영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생각과도 연결되는가? 디지털 이미지를 굳이 손으로 그리는지에 관한 질문에 “이미지를 받아들이라는 나라는 (인간) 필터가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라고 답변했는데, 이는 드로잉을 선택한 것에 관한 궁금증을 충분히 해소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Noh : 드로잉을 선택했던 원초적인 이유는 가장 쉽고 빠르기 때문이었다. A4 용지에 그린 뒤 스캔해서 다시 온라인에 업로드하는 것은 작업실이 없어도 되고, 가장 빠르게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 생각해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매체인 것 같다. 스캔도 쉽게, 빨리 되고 업로드할 때 규격화된 크기나 용량을 지키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드로잉도 넓게 보면 회화인데, 질문에서 말한 것처럼 평평하면서도 환영적인 성격이 온라인상의 이미지와 유사성이 있다. 먹지를 사용하는 이유도 연결된다. 먹지로 옮겨 그리면 인쇄물 같다. 환영적인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평평해지는 선이나 회화와 인쇄물 중간에 있는 이상한 물질성의 느낌을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1> 설치, 2016, 사진=김익현, 도판 제공=노상호

LEE : 약간 누르스름하고 거친 종이를 선호하는 것처럼 먹지를 누르면 선 주변에 먹지의 흔적이 살짝 남는 것도 좋아하는가?

Noh : 그게 어쩔 수 없이 남은 아날로그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인쇄했을 때와 다른 것이기도 하고. 판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들으면 공감할 텐데 완성된 작품보다 먹지로 옮겼을 때의 분위기가 더 좋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 먹지로 처음 옮겼을 때의 분위기가 나오지 않는지 고민한 적도 있다.

LEE : 지금 생각해 보니까 드로잉을 한 뒤 스캔해서 이미지를 업로드하는 것 역시 판화 제작 기법과 닮았다.

Noh : 나는 판화라고 생각한다.

LEE : 본인의 드로잉을 다시 스캔(촬영)해서 온라인에 올린다. 극단적 질문일 수 있는데 스캔하면 원본은 끝이라고 했는데, 원본을 소각하지 않고 보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의 손작업에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전통이나 고정관념이 작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말과 달리 여전히 원본은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Noh : 의미가 진짜 없다기보다는 동등하다는 의미다. 물리적 드로잉도 원본, 온라인에 업로드한 이미지도 원본인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종이 드로잉은 창고에 보관하고, 작품을 보고 싶으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서 보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온라인의 이미지로 내 작품을 기억한다. 스캔하면 데이터가 날아가니 실제 드로잉과 달라지기도 하고, 아주 간혹 보정을 하기도 한다. 또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될 때 자동으로 이미지 크기가 조정되기 때문에 원본과 동일할 수 없다. 처음에는 보통의 인쇄물 기준인 300dpi로 스캔했는데, 지금은 600dpi로 스캔한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은 100dpi 이하로 화질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중에 전시를 위해 창고에 있는 종이 드로잉을 꺼내 보면 이상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종이 드로잉 중에 절대 판매하지 않고 특별히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 없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나는 디지털 원본을 갖고 있으니 종이 드로잉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LEE : 종이 드로잉의 정리는 어떻게 하는가?

Noh : 처음에는 알파벳별로 했는데, 지금은 연도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LEE : 협업을 꽤 많이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적인 부분이나 홍보 외에 작가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 같다.

Noh : 보통은 내 작품 이미지를 기업에서 가져다 쓰는 것에 가깝다. 작업적인 이유를 찾으라고 하면 앞서 이야기했던 망이 되려는 것에 가까운 태도 때문이다. 작품의 이미지가 여러 곳에 있는 것이 내 이미지가 계속 복제되고 변형될 수 있음을 은유하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나 홍보에도 도움이 된다.

노상호 도판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 설치, 2014, 도판 제공=노상호

LEE : ‘메르헨 마차’를 끌고 나가 작가가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Noh : 한 마디로 이미지만 수집하는 게 아니고 이야기도 수집한다는 개념이었다. 수집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도 쓰는 거다. 처음에는 내가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관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관객들이 생각보다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고, 나중에는 내가 상담가가 된 것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3~4년 정도 진행하다 중단했다.

LEE : 2013년에는 작가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2014년에는 변사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Noh : 변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젊은 모색 2014]에서 등장했다. <태어나면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2014)와 관련된 이야기가 옮겨져서 파편화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변사에게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하지 말고 오직 기억에 근거해 전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후 변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결말을 아예 바꿔놨다. 내가 원하는 바였다. 내가 한 이야기를 변사가 바꾸고, 그 이야기를 들은 관객이 또 바꾸길 원했다. 그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SNS도 마찬가지이다. SNS는 자기중심적인 공간이다. 인스타그램만 봐도 다 자기 이야기만 엄청나게 풀어 놓는다.

LEE : 『Daily Fiction(데일리 픽션)』(2015)의 글도 SNS에서 수집한 이야기가 결합된 것인가?

Noh : 아니다. 내가 지은 이야기이다. 만약 이야기를 수집해 출간했다면 저작권이 문제가 될 거다. 물론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 콘셉트로 쓴 글들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LEE : 『Daily Fiction(데일리 픽션)』에 대해 ‘말랑말랑한 글을 썼다’고 표현했는데, SNS를 비롯한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글에 대한 반발심이었나? 아니면 인터넷 이용자로서 본인도 클리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인가?

Noh : 양가적인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도 쓰려면 쓸 수 있겠는데’란 마음도 있었다. 나 역시 클리셰를 완전히 싫어하지만은 않는다. 사실 『Daily Fiction(데일리 픽션)』이 나의 창작물인 것은 맞지만, 작가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내보낸 결과물은 아니다. 당시에는 작가와 분리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이 나에게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쪽에 더 맞는 글이었다. 나는 마치 역할극처럼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역할을 엄격히 분리했었다. 2015년의 나에게 딱 어울리는 책이다.

LEE : SNS를 관찰하다 보니 정작 본인이 글을 올릴 때 조심스러워지거나 하진 않나?

Noh : 그에 관한 생각도 변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모두가 다른 이의 SNS를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저 평평하고 빨리 지나가는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SNS의 쌓인 글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 심지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플랫폼 성격에 맞게, 플랫폼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계속 사용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파악할 수 있다. 자기 검열을 하게 되면 거리감이 생기고,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LEE :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는 암전된 전시 공간에서 관객들이 랜턴으로 비추는 부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것은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인데, 동시에 인간 인식과 이해, 세상을 대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인터넷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 것 같지만 더 좁은 세상만을 만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작품 제목도 그와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회화를 전시하는 전시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암흑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저항적으로 다가온다.

Noh : 당시에 미술관 측에서 관객들을 위해 약하게 전등을 설치했고 전시 공간이 길진 않았지만, 폐소공포증이 있는 분들이 못 들어간 사례가 있었다. 작업을 시작할 때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사람들은 자기가 기억하거나 듣고 싶은 부분만 인식하고, 오해하고, 그래서 모두 다 망하는 이야기이다. 부연하면 가짜 뉴스가 많이 나오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인데 뉴스 프로그램에서 ‘팩트 체크’ 같은 것을 시작했다. 당시에 ‘저렇게 아무도 못 믿을 이야기를 어떻게 퍼뜨리지?’ 같은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가짜 뉴스와 사실 왜곡이 더 심화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와 반대편에 있거나 다른 입장의 이야기는 아예 보지도, 듣지도 않고 거짓으로 치부한다. 세상의 부분만 보고 전체를 절대 보지 않는 세상, 온전히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여하튼 그런 이야기에서 도출된 무언가를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이 부분만 보는 상황을 만드는 게 맞을 것 같았는데 이미지의 부분만 보게 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또 내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불을 끄는 것 자체에 대한 희열도 있었다. 당시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지만, 원래는 전시장 전체가 다 그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림이 세계처럼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2> 설치 전경, 2018, 사진=김경태, 도판 제공=노상호

LEE : 전시 [더 그레이트 챕북 II](2018)의 ‘인증샷 방’-작품이 층층이 걸린 상황-은 모더니즘 이전의 전통적인 전시 공간을 떠오르게 한다. 혹시 그와 같은 이미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가?

Noh : 생각했다. 그런 전시 방식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사 책에서도 봤을 때 왜 설치를 이렇게 했는지 궁금하고 신기했다.

LEE : [더 그레이트 챕북 II]는 행거에 작품을 걸고 관객들이 직접 만질 수 있게 했다. 개인적으로 관객들이 잘 정돈해두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훼손되거나 분실된 경우는 없었나?

Noh : 전시 자체가 매장의 콘셉트였기 때문에 굳이 관객이 원상 복구할 필요가 없었다. 전시장의 스텝이 매장의 옷 정리하듯이 정리했고, 작품은 비닐 안에 들어가 있어서 훼손되지 않았다.

노상호 도판 <GOODS 2015> 현장, 2015, 사진=김익현, 도판 제공=노상호

LEE : <굿즈 2015>(2015)에서 관객들에게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의 부분을 잘라주고 이후에 빈 공간을 채워나간 뒤 관객이 스크롤을 내려 감상하게 한 방식은 모두 온라인의 이미지나 이야기 소비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노상호의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하이퍼텍스트적 속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이다.

Noh : <굿즈 2015>의 내용 자체가 하이퍼텍스트의 은유였다. 당시 오프라인과 같은 값을 가진 전시로서 동명의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둘 다 봐야 작품을 온전히 감상했다고 할 수 있었다. 디자인 스튜디오 ‘물질과 비물질’과 협업했고, 400개 정도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디자이너에게 전달했는데 디자이너가 랜덤으로 이미지의 외곽선을 따거나 이미지를 파편화시킨 뒤 300개 정도 되는 웹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들에 대한 지도를 다 그려놓은 것도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웹사이트였다. 지금은 없어져서 아쉽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에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다.

LEE : <다운로드 카드>(2017)로 받은 이미지는 상업적인 용도만 아니라면 어떻게 사용해도 괜찮은가?

Noh : 그렇다. 판매할 때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노상호 도판 <취미관 현장> 2017, 도판 제공=노상호

LEE : 이번에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전시에서는 AI를 이용했다. 그런데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왔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으나, AI를 이용했으니 결과물은 더 전통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Noh : AI를 활용해서라기보다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AI 자체가 전시의 중심은 아니었고, 그것은 구성 요소 중 하나였다. 이전 전시에서는 그림의 옆면에서부터 시작했다. 즉 그림의 앞면, 그림 속의 이미지보다 그림이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그림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자체가 전시의 주제였으니 설치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다 내부의 이미지로 더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THE GREAT CHAPBOOK 4-HOLY>에서는 왜 눈사람이 그려졌는지, 저것이 왜 화폭 위에 구성 요소로 들어왔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림을 정면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 된 거다. 이전의 나의 태도는 ‘내 그림은 인스타그램으로 보시오’였다. 엄밀히 말해 그림을 보라는 전시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림이 생성되는 과정은 디지털적이지만 이미지 내부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전시 방식이 바뀌었다. 회화나 조각을 매체로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언어로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매일 드로잉을 한다. 그런데 내가 그린 드로잉 전부가 전시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드로잉 중에 내가 선택한 것들에서 시작되는데 이번엔 그 기준이 내가 홀리(holy)하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기준이 없다가 생긴 거다. 그러니 내가 왜 홀리하다고 느꼈는지 말해야 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간극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가 느껴지면 내가 아날로그적인 이 땅에 있다는 것을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성스러움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게 이 전시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담은 그림을 보여줘야 하니 이제는 방법론만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예전에 비해 클래식한 전시가 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림을 대하는 첫 스텝이 달랐고, 다른 사람들이 기본 스텝이라고 하는 데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번 전시가 아주 중요했던 걸음이었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 BOOK 4-HOLY> 2023, Acrylic on canvas, 300x300cm, 도판 제공=일민미술관

LEE : 내게 <THE GREAT CHAPBOOK 4-HOLY>는 그런 정보 없이도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무언가 애교스럽고 귀여운데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게 좋았다.

Noh : 정확하게 느낀 것 같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상한 균열들에서 귀엽지만 공포스럽기도 한 무언가를 성스럽다고 느낀 것 같다. <THE GREAT CHAPBOOK 4-HOLY>에는 인형이 많이 나오는데, 인형 탈을 쓰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존재가 되지만 누군가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유괴의 이미지를 오버랩한다. 그런데 보통의 인형은 2D(만화/디지털)이 먼저이다. 원본 이미지를 물질로 꺼내온 것이 인형이다. 우리는 특정한 캐릭터의 인형이 원본 캐릭터와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안 똑같다. 2D를 3D로 만들기 때문에 똑같을 수 없고 오히려 이상한 감각이 전달된다. 사람들이 이미지와 그것을 물질화한 것을 똑같다고 느끼는 것이 성스러움의 개념과 맞는다고 생각했다. 성스러움을 생각하면 종교가 떠오르는데 저쪽 세상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성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귀여우면서 음습한 분위기는 나의 취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매일매일을 단위로 하는 내 드로잉만 보면 항상 음습하다. 그런데 그 드로잉이 모여서 회화 작품이 되면 과잉이 되기 때문에 어두워지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이미지를 기억하기 때문에 노상호는 색을 많이 쓴다는 등식이 완성되고, 보통 색이 많다는 것은 어두움과 연결되지 않는다.
나는 드로잉을 매일 하고 그것을 인스타그램에 송출하기 때문에 음습한 기조는 지속된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으로 내 매일매일의 드로잉을 보던 사람이 전시장에 오면 어색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시장에서만 내 작품을 봤던 사람은 갑자기 바뀌었다고 느낄 수 있다.

노상호 도판 <THE GREAT CHAPBOOK 4-HOLY> 2023, Acrylic on canvas, 300x300cm, 도판 제공=일민미술관

LEE : 이전에 [네트쇼]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꼭 그림을 새로 그려야만 신작은 아니고 생각을 바꿔도 신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외관이 전혀 바뀌지 않아도, 100% 동일해도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건가?

Noh :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작업을 회화라고 한정 짓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까지 포함한 한 묶음이 내 작업이라 [ROMANTIC IRONY](2023)에 전시된 모든 작품 제목이 <THE GREAT CHAPBOOK 4-HOLY> 것처럼 한 전시에 소개되는 내 모든 작품의 제목은 같다. 공간에 작품들이 어떻게 놓여 있고 관객들이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그 자체가 전시이고 작업이다. 드로잉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그동안 A4 용지에 그린 드로잉을 액자에 넣어서 걸기도 하고, 옷걸이에 걸기도 했다. 그중에 장마에 대한 작업만 모아 전시하면 그 묶음은 장마에 대한 작업을 한 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THE GREAT CHAPBOOK>의 맥락에 들어와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에 업로드된 이미지 하나하나가 아니라 어떻게 피드를 형성해서 보여주는지 자체가 작업이다. 포트폴리오에 개별 작품 이미지를 최소화하고 설치 전경을 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LEE : 이번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AI를 이용했다. 관련한 질문이다. 요즘 ChatGPT가 화제다. 예술가 로봇인 Ai-Da는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해롤드 코헨(Harold Cohen)은 이미 1974년에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 아론(Aaron)을 만들었다. AI 시대에 작가라는 존재는 어떻게 변화할 것 같은가?

Noh : 시각을 다루는 직업 중에 사라지는 것이 생기긴 하겠지만 작가는 조금 더 오래 버틸 것 같다. 물론 소수만 남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판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사람보다 더 잘하는 기계가 있는데 왜 판화를 계속해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오늘날 많은 영역에서 수공예가 필요 없는데도 사람들은 수공예를 사고 싶어 한다. 우키요에만 봐도 기계로 제작해도 되는데 여전히 장인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한다. 만약 기계가 작가를 대신한다는 것 때문에 작가들이 사라지거나 위기감을 느낀다면 그건 이미 사진의 발명에서 끝났어야 한다. 앞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 거다. 인간은 인간을 신뢰하니까. 처음에는 교육기관에서는 작가 지망생들이 AI를 어떻게 하면 잘 운용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겠지만, 나중에는 그조차 사라질 거다. 교육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해질 테고, 쉽게 쓸 수 있게 바뀔 테니까 말이다. 또 사람들은 AI가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처음 ChatGPT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Corporation)의 입장은 검색 엔진을 대체하겠다는 거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음성이나 뉘앙스만 전달해도 검색 가능하게 하겠다는 게 우선적 목표였다. 따라서 근미래에는 생활이 달라지는 측면에 가깝지, 직업이 없어지는 것은 조금 먼 이야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