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2.

본 글은 2023년 3월 28일과 4월 3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김아영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김아영(Kim, Ayoung)

LEE : 이문정, Kim : 김아영

LEE : 김아영 작가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루 몇 시간 자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작업량과 활동량을 보면 거의 안 잘 것 같다.

Kim : 작업에 담긴 시간과 노동을 알아봐 주니 감사하다. 의외로 사람들이 작품을 위한 노동을 잘 모른다. 잠도 잘 자고, 충분히 잔다. 다만 내 모든 삶의 방향이 작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 취미, 가족이나 지인들과 보내는 시간처럼 자기 일상의 시간을 나눈다. 그러나 나는 출퇴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작업 공간과 삶의 공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동 시간, 출근해서 일하기 전까지의 버퍼링 시간을 없애기 위해서다. 내 일을 도와주는 스튜디오 매니저 2~3명도 이곳으로 출근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프로젝트를 동시에 여러 개 진행할 때는 일하느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할 때가 있긴 하다. 세부적인 것까지 직접 일하는 것도 즐기지만, 작업이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로 커지면서 작은 부분 하나를 붙들고 있기보다 숲을 보며 결정하고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내 손으로 직접 하기와 팀을 꾸려 가기 사이에서 저글링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을 세세히 관리 감독하고, 편집, 영상 트레일러, 그래픽 작업 등 많은 것들을 직접 작업하고, 최종 파일도 내 손에서 마무리된다.

LEE : 이제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겠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상업적인 일을 병행하다가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나중에는 순수미술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작가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돌고 돌아 작가가 되었고 더 일찍 예술을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는데,¹⁾ 미술을 전공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 오게 된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면 좋겠다.

Kim : 과거 나는 순수 미술에 대한 구체적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발달한 시각 문화를 경험하고 견인할 수 있는 분야가 시각디자인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었고, 아티스트(artist)의 삶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 때부터 여러 일을 시작했고, 많이 했다. 그러다 디자인이 주로 고용주(기업인)가 원하고 만들어 놓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고 내용, 상품, 메시지를 판촉하기 위한 수단을 만드는 일이 되기가 쉽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했다. 물론 디자이너 중에 자기 작품의 의미를 충분히 관철하면서 의뢰인의 요구를 충족하는 훌륭한 이들도 많지만, 나는 협의를 위한 설득, 협상의 과정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긴 방황의 시간 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동안의 경력을 버리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일을 고민했고, 대학교 때 심취했던 사진 매체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으면서, 혼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할 수 있는 일이어야만 했다. 25살 때 유학을 준비해 26살에 현대 사진을 주요하게 가르치는 런던 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다른 학교들의 미디어 아트 전공 석사 과정에 동시에 합격했지만, 담론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나 부족함을 알고 있었고, 오래 걸리더라도 기초를 단단히 쌓아 올리고 싶어 학부 과정을 선택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현대미술 담론과 철학을 공부했는데 교양이 아니라 전공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이 무척 좋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졸업할 때쯤엔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어 있었다. 몇 년간의 활동 후 첼시 컬리지 오브 아트(Chelsea College of Arts) 순수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LEE : 성격이 다르겠으나 규모가 큰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기 때문에 소통과 협업은 지금도 하지 않는가?

Kim : 과거 나는 협업과 의뢰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편이었다. 명확한 디렉션이 있고 그에 맞는 작업을 의뢰하며 경제적 지급을 전제하는 일이 의뢰라면, 기획 단계부터 서로의 의견을 합한 결과물을 지향하며 뭔가를 만들어야 협업이라고 생각했던 편이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 구분이 다소 모호해졌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Delivery Dancer’s Sphere>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작가 본인이 밝혔듯 김아영의 작업은 다양한 층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동시에 엄청난 스펙터클과 레퍼런스를 갖는다. 매우 감각적이고 빈틈이 전혀 없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Delivery Dancer’s Sphere)>(2022)만 해도 ‘가능세계 이론, 불확정성 원리, 최소 시간의 원리, 최소 작용의 원리,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 등이 관련되어 있다. 각각의 개념은 그 자체로 거대한 체계를 갖는다. 선후관계를 명확히 할 수는 없겠으나,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세운 뒤에 개념들을 찾는 편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또한 관련 이론을 어느 정도까지 습득하는가?

Kim :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는데 이론서뿐 아니라 소설도 참 좋아한다. 또 이야기라는 방식에 관심이 있어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하거나 무언가 생각나면 메모한다. 작업에서 픽션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특히 2017년부터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사변적 픽션 만들기에 주력했다. 이전에도 픽션을 만들었지만, 거시사/미시사를 포괄하는 사료에 많이 집중하다 보니 역사적 사건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는 사실관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사와 준비 시간이 상당히 길어졌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나의 자율성이 스며들 수 있는 영역이 제한적일 수 있었다. 미적 자율성에 대해 고민하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Porosity Valley, Portable Holes)>(2017)을 만들었고, 나의 방법론에 얼마간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상상력을 조금 더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픽션 만들기로 넘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료 조사가 줄어들고 개념에 관한 조사가 늘어났다. 2016년 말부터 과학 소설(science fiction)과 사변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고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을 포함한 토착 미래주의/에스노 퓨처리즘(Ethno-Futurism) 등에 관한 조사가 작업의 중요한 기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흑인 여성 SF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의 작품을 많이 읽었고, 그로부터 개안했다. 이러한 여러 영향으로부터 사변성을 작업 안에 탑재하게 되었다. 관련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2016)도 말하고 싶다. 그밖에 필요할 때마다 과학적인 이론들도 공부한다. 이를테면, 아프로퓨처리즘은 100년 이상의 과거에 태동한 문화운동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일상적이 된 디아스포라와 차별 속에서 누군가는 행동주의자가 되어 흑표당/블랙 팬서(Black Panther)와 같은 사회 운동을 하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아프로퓨처리즘이라는 상상의 세계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지구인이 아닌 우주에 사는 외계인/이방인(alien)으로 상정하여, 불운하게 지구에 불시착해 고통 속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 고향 행성으로 돌아간다는 서사이다. 이는 설화적, 우화적인 세계관으로 발전되었는데 미국이라는 현실을 포함, 지구상에서는 돌파구가 없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슬픈 서사이기도 하다. 흑인들이 창작한 SF는 20세기의 주류 SF와 매우 다르다. 영화 <블랙 팬서(Black Panther)> 시리즈는 아프로퓨처리즘이 주류 문화로 안착한 역사적인 사건 같은 것이다.

LEE : 그러면 과학 소설, 사변 소설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2016년인가?

Kim : 과학 소설(sci-fi)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작업에 집중한 이후로 읽기 힘들었었다. 한창 작업할 땐 관련된 자료 외의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2016년 말, 작업 준비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 작정하고 그 계열의 소설들을 쌓아 두고 읽기 시작했다. 듀나(DJUNA)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LEE : 얕은 지식과 경험밖에 없지만, SF 영화나 소설을 볼수록 종교성 특히 고대의 신비로운 종교적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도 그와 같은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나온다. 이는 장엄함이나 압도를 통해 얻게 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SF적 요소와 종교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Kim : 아마 경험한 SF 작품들이 넓은 시간대를 혼종적으로 잘 중첩한 경우인 것 같다. 나는 무시간성이나 시간이 용해되는 경험, 다중 시간을 엮어내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신화, 설화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러한 근원적인 것들이 갖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마리오 페르니올라(Mario Perniola)가 쓴 글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나는데, 고대 문명의 도상과 미래의 도상이 거의 동시대적인 것으로 느껴져 더 이상 시간적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 상형 문자가 적힌 오벨리스크나, 우주로 이동하는 포털 스타게이트(Stargate)와 같은 미래적 조형이 중첩되어 시대적 구분이 불가능해져 버리는 순간들이 그 예이다. 페르니올라는 그러한 순간을 이집션 모멘트(Egyptian moment)라고 명명했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Porosity Valley, Portable Holes> 2017, 단채널 비디오, 약 21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 ‘연옥’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도 흥미로웠다.

Kim : 사는 일이 고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것 자체가 연옥 같다. 삶은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고통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끝없는 길이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역시 고행 같은 삶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사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LEE : 고행과도 같은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Kim : 알 수 없다. 떠오른 것으로, 좋아하는 SF 소설가 중 하나인 이산화의 단편 중 「증명된 사실」을 보면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빠져나가는데, 영혼은 물리 법칙에 영향받지 않기 때문에 태양계 움직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고, 맹렬한 속도로 공전하고 전진하는 지표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이 우주 속 그 위치에 머무르게 되므로, 공허한 우주 속에 둥둥 뜬 채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LEE : 이전에 사람들이 페트라 제네트릭스(Petra Genetrix)를 여성형으로 불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고대 지모신이나 근원적 여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페트라 제네트릭스나 판게아 요소들(Pangea Elements)처럼 작품과 관련된 용어들, 등장하는 존재들의 이름과 그 의미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나가는지 궁금하다.

Kim : 여성형 종결어미 때문에 ‘페트라’를 쉽게 여성적 개체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고대 여신과 같은 방향을 의도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젠더 없음(genderless)’의 개체로 만들고 싶었다. 2014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진행한 리서치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기독교가 휩쓸기 전에 성행했던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미트라교(Mithraism)교에 관한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미트라교를 포함한 고대 페르시아 종교에 관해 조사했고 이란에서 열흘 정도 현지 조사를 하며 그곳의 역사학자도 만났다. 알면 알수록 미트라(Mithras) 신은 희한한 존재다. 원래 페르시아 고유의 신으로 형체 없는 여명의 빛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로마에 인기리에 전파되면서 특유의 미소년 도상이 만들어졌다. 이와 관련된 여러 버전 중에 바위에서 태어나는 도상이 있는데, 미트라 신을 낳는 어머니 바위 혹은 그렇게 바위가 출산하는 행위 자체를 페트라 제네트릭스라고 불렀다. 이후 어떤 지역의 도상에서는 미트라 신이 여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고대 신 중에는 이처럼 성별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당시에 흥미로워서 기억해두었다가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서 광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뒤 영험함과 무성성을 지닌 주인공의 명칭으로 페트라 제네트릭스가 떠올랐다. 또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Porosity Valley 2: Tricksters’ Plot)>(2019)을 제작하던 시기에 또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몽골에서 조사를 진행했는데, 그곳에는 바위 신앙, 어머니 바위 등 돌과 바위가 살아 있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었다. 거기에서 큰 인상을 받아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 어머니 바위라는 캐릭터를 가져왔다.

LEE :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At the Surisol Underwater Lab)>(2020)에서 소하일라는 “G-1-6-2564”로 불렸다. 그런데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2019)의 마지막에서 페트라 제네트릭스도 “G-1-5-3407”로 불렸다가 “G-1-6-2564”로 불렸다고 말한다. 그 둘은 어떤 관계인가?

Kim : 한국에서 난민들에게 부여되는 인도적 체류자 번호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숫자는 내가 붙였다.

<수리솔: POVCR Surisol: POVCR>, 2021, VR 경험, 약 17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수리솔: POVCR(Surisol: POVCR)>(2021)에서 제3의 화자가 전하는 대사인 “오랜만에 세계를 보았으나 세계는 너 없이도 증식하고 있기에 / 더듬어 전진하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살펴야 하므로 / 마치 그 일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양 / “당신이 등을 돌릴 때마다 사라져버리는 당신 등 뒤의 세상 / 그러지 말아요. 세계를 무화시켜 당신 눈앞에서만 끝없이 증식되는 세계, 당신은 멈출 줄을 몰라. 멈출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게 맞춰져 있어”는 일관되게 현재의 우리(인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또한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보다 긴장감이 높았고, 비관적인 혹은 어두운 분위기로 끝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Kim : 결말은 그냥 자의적으로 해석해 주면 된다. 작품의 내러티브가 공고하긴 하지만 세부적 부분은 자유롭게 판단해주는 게 좋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작가가 그것을 규정하려 할수록 의미가 고정되는 것 같다. 수리솔 연작은 매체가 모두 다르다. 싱글 채널 영상, VR 체험, 라이브 VR챗 렉처 퍼포먼스 등이다. 그동안 감상자 혹은 소비자로서 즐기긴 했지만, 제작자로서 VR과 게임 엔진을 다룬 것은 <수리솔: POVCR>이 처음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VR을 영상의 확장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작업을 진행할수록 VR이 시간을 조율하는 매체가 아니고 공간을 만드는 매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VR의 특징은 원하는 대로 시간상의 편집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영상 고유의 방법론 중에서 몽타주를 특히 좋아하는데, VR에서는 몽타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가 공간을 이동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VR을 진행하며 내가 어떤 의미 있는 매체적 시도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VR 이야기의 안과 밖에 모두 존재하는 스토리텔러를 생각했다. 스토리텔러는 그 작업의 서사 환경 자체를 만들어낸 존재일 수도 있고 서사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혹은 경험의 안과 밖을 오가며 무언가를 조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은 어렵지만 목소리는 계속 들리고, 그러면서 관객이 만나는 세계가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일깨우는 방식의 몽타주를 시도했다고 보면 된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1925)의 인용구를 삽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헤드셋을 쓰고 VR에 입장한 관객의 육체는 물리적 현실에 속해 있고 정신은 VR의 세계에 속한다. 스토리텔러는 이처럼 두 세계가 기이하게 중첩된 양자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수리솔: POVCR>을 시작하면서 1년을 꼬박 VR 매체를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첫 한 달은 이런 엄청난 감각의 세계를 접한 초기 특유의 이상한 흥분 상태에서 지냈다. 몇 달이 지났을 때, 90% 이상의 VR 콘텐츠가 (과)몰입(immersion)이라는 속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감각적, 체험적 감각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감각적 경험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체적 의미를 고민하다가 나온 결과가 여러 세계를 충돌시키는 또 다른 방식의 몽타주였다.

LEE : 작품마다 관련 개념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Kim : 작가로 활동한 초기에는 ‘많은 준비를 통해 만들어낸 작품을 사람들이 다 읽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읽어주는 이가 없으면 작품도 존속할 수 없으니, 스스로라도 그에 대해 글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이었다. 2015년 <제페트(Zepheth)> 연작을 마치고 난 뒤 『제페트, 공중정원, 고래기름, 쉘(Zepheth, Whale Oil, Hanging Gardens, Shell)』(2015)을 출간했고, 거기에 꽤 긴 글 「캐비넷 바다」, 「<제페트, 공중정원, 고래기름, 쉘>을 관통하기」를 실었다. 그러나 작가의 글쓰기가 해석의 여지를 제한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작품의 근간이 되는 스크립트의 노출은 그 횟수나 분량을 조절하고 있다.

LEE : 앞의 질문과 연관된 내용이다. 김아영의 작품은 많은 상상을 하게 하지만, 작가에 의해 완벽히 종결된 세계여서 작가가 구축한 개념과 서사에 대한 의존성이 높다. 공고한 제국 같은 인상이다.

Kim : 비교적 스토리가 탄탄하고 대사가 많으며 특정한 캐릭터들이 나오는 픽션이어서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다. 현대미술에서 픽션과 내러티브가 보편 언어로 개입한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저항감이 있는 것 같다. 대사(규정하는 언어) 없이 이미지로 흘러가는 작업을 바라보며 자기의 일상과 오버랩하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그런 작업도 매력적이지만, 내 경우 픽션 자체가 중요한 언어이자 방법론이며, 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나 완벽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태도로 작업하지는 않는다.

LEE :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인데, <수리솔: POVCR>를 보다가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1997)을 계속 떠올렸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이다. 혹시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염두에 두거나 남다르게 영향을 받았던 이미지가 있다면?

Kim : <수리솔: POVCR>에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영화이다. 작업 하나를 진행할 때는 정말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받는다. 특정한 하나가 핵심 레퍼런스가 되지 못한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Porosity Valley, Portable Holes> 2017, 단채널 비디오, 약 21분, Photography by Keelan O’Hehir. National Herbarium, Royal Botanic Gardens Victoria, Melbourne, Australia, 2017, 도판 제공=김아영.

LEE : <페트라 제네트릭스를 찾아서(In Search of Petra Genetrix)>(2020)에서 인간에 의해 외계 생명으로 규정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세계들에 속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구멍을 내는 행위로서 세계를 창조하는 유령 같은 존재다. 뿌리 없음을 수호하는 천사이자 인간 동굴의 퍼즐을 새로이 짜 맞추는 이성적 신과 같은 존재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대로부터 21세기로 이동한 자웅동체 몬스터 신, 클라우드를 부유하는 유령, 외계인, 추방자, 새로운 히어로”라고 명명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 등장하는 몬스터, 유령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김아영 작품의 주인공들에 이와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혼성적 존재는 그 자체로 괴물이자 이방인으로 분류되어왔다.

Kim : 내가 괴물성(monstrosity)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몬스터(monster)’란 단어를 제일 먼저 애너그램 제조기(Anagram Generator)에 넣었을 거다. 종합적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존재들을 괴물이자 외계인이라고 부른다면 페트라 제네트릭스도 양성구유이자 부적응자, 외계인, 괴물이다. 이탈하고 튕겨 나온 존재, 그러나 무기력하거나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괴물이 주는 위협감처럼 자기 동력이 있는 이방인이다.

LEE : <딜리버리 댄서의 구>,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수중 반응(The Underwater Response)>(2021)에는 복제 혹은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가 직,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Kim : 정말 깊이 관심 갖는 주제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연작을 시작할 때부터 이중성/이원성/상대성(duality)이 생성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우주 속에서 유일한 존재이고자 하는 욕망은 생존의 욕망에 버금가는 것인데, 그것을 위협하는 타자이자 나의 동일자이기도 한 도플갱어에 대한 어떤 욕망과도 비슷한 것이다. 아직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또 다른 나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LEE : 혼종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건가, 미분화된 상태를 지향하는 건가? 그 둘은 분명 다르다.

Kim : 혼종적 상태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즉 자기충족적 상태보다는 계속 결핍을 느끼면서 내가 이해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자 타자인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이다.

LEE : <다공성 계곡> 연작을 반복적으로 보다가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이야기가 더 높고 근원적인 상승을 위한 영웅 신화처럼 보이기도 했고, 신적 존재가 세속에 내려왔다가 다시 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승화되는 과정의 이야기 같았다. 이렇게 보면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Kim :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다. 페트라 제네트릭스를 신적인 존재로도 상상했기 때문에 우화일 수도 신화일 수도 있다. 제작자이지만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서도 못 보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을 선호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Porosity Valley 2: Tricksters’ Plot>, 2019, 2채널 비디오, 23분 4초, 도판 제공=김아영.

LEE :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돌, 지층, 파도에 가면을 씌운 이유는 무엇이며 마지막에 가면을 벗어 구체성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가면을 벗어 실제 인물이 밝혀지는 순간 현실의 구체성을 갖게 된다.

Kim : 관객들이 이 퍼포머들을 난민 당사자로 파악할 수 없게 하고 싶어서 가면을 만들었지만, 이후 얼굴을 드러내는 것으로 바꿨다. 당시에 한국의 난민은 정말 큰 이슈였고, 난민 혐오가 심화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이들의 얼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지연시키는 인지적 소격효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출연자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기도 했다. 예멘인 퍼포머 셋이 출연했는데, 셋 중 둘이 가면을 벗는 데에 승낙해주었다. 당시에 꽤 많은 한국인이 이슬람 남성을 잠재적 IS 무장단체 요원으로 동일시했고, 사찰이 사회적으로 무척 조심스러운 이슈였다. 이 작품의 사운드를 담당해준 씨피카(CIFIKA)라는 일렉트로닉 뮤지션의 대중적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로 난민 혐오 정서가 있었다 (정작 CIFIKA 본인은 흔쾌히 작업에 참여했다). 프로젝트를 통해 한곳에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존재들을 모으고 싶었기 때문에 소위 예멘인 이주자에게 부여된 선입견과 가장 먼 어딘가에 위치한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씨피카에게 요청했다. 역으로 모두 한 장소에 위치해 어울릴 수 있다는 뜻도 있었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Delivery Dancer’s Sphere>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작업을 진행할수록 서사성이 강화되고 있으며 점점 더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연히 연작으로 이어진다. 김아영이 구축하는 가상의 세계가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될 것인지 궁금하다. 인터뷰에서 3~4년 이상의 긴 호흡의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레 얼마나 대형 프로젝트가 나올 것인가를 상상했다.²⁾ 영화적, 아니 더 종합적인 창작을 지향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Kim : 3~4년 이상의 긴 호흡의 프로젝트는 아마 주어진 일정에 맞춰 작업을 끊임없이 토해내야 하는 동시대 창작자들이 공유하는 어려움에서 나온 반작용 때문이었을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연작들을 통해 이미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시각 예술에서 바라보기에는 가장 최근 작업이었던 <딜리버리 댄서의 구>가 영화에 가까운 느낌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영화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겠지만, 내가 영화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에 큰 관심도 없다. 많은 영화제에서 소개되지만, 영화계에서도 내 작품을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다. 그들에게 내 작품은 소위 아티스트 필름 또는 시각 예술(visual art) 영상에 가깝다. 이를테면, 내 작업이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에 갈 일은 없다. 수많은 영화제 중에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몇몇 곳에서 경계에 있는 영상 작품들을 초대한다. 그런 관점에선 내 작업이 흥미로울 수 있는 정도다. 영화계에서 내 작품은 단편 영화로 구분되는데, 단편 영화는 장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진입로로 간주된다. 그러나 내 작업은 단편 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족적인 완결된 작품이고, 나는 장편 영화 제작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 사실 대다수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 대동소이한 가로 비율을 가진 스크린에서의 상영/시청이라는 조건에 대해 질문이 없다는 점도 시각 예술 영상과의 큰 차이다. 물론 영화라는 개념은 확장되고 있고 앞으로 경계의 폭도 더 넓어질 것이다. 시각 예술계 사람들 일부는 내가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고, 영화계에서는 이 작업들을 시각 예술 영상일 뿐 영화가 아니라고 한다. 영화계의 이런 관점은 시각 예술 영상을 은근히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시선으로, 나는 이런 관점에 큰 저항감을 갖고 있다. 나는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딘가에서 무언가 하는 일이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LEE : 최근으로 올수록 서술성보다는 이미지적인 혹은 감각적인 영역이 강화되는 것 같다. 촘촘하게 구축된 이야기가 있어서 영화 같지만,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 같아 영화와 차별화”된다.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 같아 영화와 차별화”된다는 표현은 얼마 전 사석에서 김아영의 작업에 관해 대화를 나눴던 이계영 큐레이터의 표현이다.

Kim : 앞서 말했듯 영화제에 가면 내 작품은 독특하고 신기한 것이 된다. 호불호도 갈린다. 반대로 전시 공간에서 내 작품을 보는 관객 중 일부는 이를 영화적이라고 인식한다. 앞으로 형식과 장르가 불분명한, 틈새에 놓인 영상 작품이 더 많아질 것이란 확신이 있다. 나는 하나의 화면 안에 여러 가지의 이미지 제작 기법으로 만든 요소를 조합, 구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질적인 샷들을 붙이는 방법을 몽타주라고 한다면, 한 화면 안에서 포토몽타주를 하듯이 이미지를 조립하는 것도 몽타주이다.

LEE : 영화계와 연결되면 더 많은 자본력으로 원하는 규모의 작품을 제작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Kim : 영화 쪽 펀딩이 시각 예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다양한 것은 사실이라서 오버랩해 활동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양한 관객을 만나게 된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영화계 제작비는 ‘그토록 큰 투자로 무엇을 만들어내 문화산업에 기여할 것인가?’와 같이 그에 대한 리워드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반면, 시각 예술가에게 공적 지원의 결과는 실패를 허하지만, 펀딩의 규모는 꽤 괴롭다.

LEE : 작업 규모가 거대해지는 것은 필연적인가?

Kim :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준비한 개념과 이야기, 조사 내용이 많아질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진다. 하나의 프로젝트(작품)를 만들 때 세계관을 조성하면 그 세계에서 파생된 다른 작업들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작품에서 세계관을 만들면서 이전보다 규모가 작아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Delivery Dancer’s Sphere>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이미 많은 매체에서 기사화된 것처럼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등장인물은 계급과 젠더 등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탄 인물은 멋진 전사이자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보였다. 고정관념을 뒤집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고, 감각적인 만족도가 높다 보니 따라오는 결과일 수도 있다.

Kim : 여러모로 내 작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심에서 살짝 어긋나 있었던 것 같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주인공이 실제로 전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작품을 위해 리서치를 진행했고, 배달 플랫폼에서 오래 일한 여성 라이더를 찾았다. 그분을 통해 배달 앱이 작동하는 방법도 습득했고,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며칠 동안 같이 배달도 나가봤다. 배달 기사들이 어떤 감각적인 체험을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체험해야 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만 돈을 번다는 사실 때문에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자영업자/프리랜서로서 간섭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피고용인에 해당하는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다는 것이고,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뜻이다. 또 오직 앱으로 지령을 받고 마스터 알고리즘과만 소통하기 때문에 동료나 조직을 만들기 어렵다. 무엇보다 아주 위험한 노동이다. 많은 배달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여러 콜(call)을 받다 보니 보통 네비게이션과 콜 수신 용도의 핸드폰을 동시에 설치해 두 화면을 번갈아 보며 이동한다. 게다가 도로의 사정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배달 기사는 여러 겹으로 중첩된 리얼리티를 만나게 된다. 특히 팬데믹 시기에 사람들의 모빌리티가 제한적이었을 때, 나 역시 외출을 자제하고 모든 것을 배달시켰다. 그런데 비대면 배송이 기본이 되어 배달 기사들은 이전보다 더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배달 기사들은 어떤 삶을 살까?’란 궁금증도 있었고,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때에 가장 역동적으로 돌아다니는 그들의 이동 경로도 궁금했다. 도로를 주름잡는 주체인 동시에 너무나 수동적인 위치에서 노동하고 있는 주체라는 대비도 인상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는 점 때문에 ‘고스트 댄서’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후 ‘댄스 마스터’라는 영험한 알고리즘을 통해 배달 기사들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단계까지 이르러 초고속 배달을 하고, 시공간의 뒤틀림이 일어나 오류가 생겨 자신의 동일자와 같은 존재를 마주하게 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LEE : 에른스트 모(Ernst Mo)와 엔 스톰(En Storm)처럼 등장인물의 이름을 ‘몬스터(monster)’에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괴물은 역사적으로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매혹과 숭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주변화되는 과정은 의미의 상승과 하강 모두에서 가능하다. 신 역시 현실 세계 속 인간들에게는 이방인이다. Kim: 애너그램으로 두 주인공 이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후, 몇몇 떠오르는 단어들을 애너그램 제조기에 입력했다. ‘monster’라는 단어의 도출물의 어감이 가장 좋았다. 어떤 유령 입자처럼 떠돌아다니는 존재일 수도 있는 작품 속 인물들과도 어울렸다. 몬스터는 괴물 같은 존재로 딜리버리 댄서 세계의 부적응자이고, 정합적이지 않은 존재다. 이들은 자꾸 이탈하고 탈구한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조건이 된다. 이렇게 튕겨 나오는 자로서의 몬스터다. 하지만 몬스터는 주체성을 지녔고, 무기력하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괴물은 자기 동력을 끌어낼 힘이 있다. 나의 이전 작업에도 괴물 같은 개체들이 등장했다. 페트라 제네트릭스(Petra Genetrix)가 대표적이다. 딜리버리 댄서의 세계는 일견 내가 속한 미술계와 매우 닮아있다. 댄서들처럼 나 역시 무한 경주 속에 있다고 시시각각 느낀다. 이곳으로부터 탈주하거나 탈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지만 늘 무력화되고 만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Delivery Dancer’s Sphere>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최상위 라이더의 명칭이 ‘고스트 댄서’인 이유는? ‘일반 댄서, 파워 댄서, 마스터 댄서, 신의 댄서’ 위에 ‘고스트 댄서’가 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는 신이 제일 위라고 생각할 것 같다.

Kim : 유령은 모두에게 안 보이는 존재이다. 나에겐 ‘가장 뛰어나지만 안 보이는 존재’라는 대비가 제일 중요했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할 때 모든 레벨을 다 깼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슈퍼빌런(supervillain) 괴물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단계를 넘어선 존재, 인식 밖의 존재를 생각했다. 이 계급 구분은 중국에서 인공지능이 조율하는 배달 플랫폼 메이투안(Meituan)에 실재하는 계급에서 영감을 받았다.

LEE :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는 육체적 감각성이 더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인간이 되어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라이더의 움직임과 이동 속에서 단어 그대로 물질세계의 감각이 조금 더 전달되는 느낌이다. VR 작품인 <수리솔: POVCR>(2021)을 거치면서 나타나게 된 미묘한 변화일까? 이 부분을 작업 중에 어느 정도 의식했는지 궁금하다.

Kim : 그런 느낌을 받았다니 긍정적이다. 아마 CG가 좀 더 지배적이었던 이전 몇몇 작품에 비해 실사 촬영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일 수 있다. 배우의 신체가 이토록 전면화된 작업은 거의 없었다. 배우들 사이의 신체가 부딪히는 액션 연기도 있어서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 팬데믹을 거치며 당면한 지상의 문제, 즉 우리 몸뚱이에 침투한 전염병의 문제에 대해 모두가 그렇게 오랫동안 속수무책, 무방비상태라는 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이렇게 비루한 현실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땅에서 발을 뗄 수 있을까, 멀리 간 사변, 포스트휴먼에 대해 정말 이야기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많은 생각을 한동안 했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육체성, 물질성이 더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LEE : 사랑해서 심리적,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독립된 둘이 하나처럼 결합한다. 상대에 의해 내 감정과 행동 등이 바뀐다. 매우 독특한 영향 관계이다. 한편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팬데믹, 자본과 노동, 사회 계급, 젠더, 시공간 개념, 인간의 자아(정체성)를 아우른다. 개인적으로 현실 세계 속 인간을 압도하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 해체와 재구축을 반복하는 과정 중의 주체가 떠올랐다. 또한 김아영의 작업에는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의 첨예한 이슈들이 담긴다. 모두 고착되었다고 할 정도로 단단하게 고정된 사회 구조와 시스템에 틈(균열, 구멍)을 내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이중성과 양가성을 갖는 주제들이며, 명백한 해결책이나 정답을 찾기 힘든 미궁과 같은 사건들이다. 그런데 그에 앞서 개인의 정체성 형성, 해체, 재구축도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관련해 정신분석학적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관련한 논의를 진행한 적이 있는가?

Kim : 정신분석학과 관련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다만 이중성은 나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출몰하는 관심사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도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복제와 합체가 등장한다. 당시에도 어떤 성적 결합을 생각했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은 서로를 너무 원하지만 두 존재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존재 조건이 위협받는다. 둘이 조우하면 시간이 느려지므로, 누구보다 빨라야 하는 라이더의 제1의 조건이 무너지기 때문에 둘의 만남은 긍정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Z세대, 나아가 동시대의 우리 모두 겪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과도 대입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경합으로 이뤄지는 시대, 출구 없는 곳에서 살고 있으며 잘 안될 거라는 자조감에 빠진 이들을 자주 접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Delivery Dancer’s Sphere>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에른스트 모, 너는 영원히 B에 도착할 수 없어, 에른스트 모,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죽었어. (중략) 다음 세상에서 나를 만나면 픽업지 A와 목적지 B의 중간지점인 C를 지나쳐. 그리고 A와 C의 중간 전달지인 D를 거치고, 그렇게 무수한 중간지점을 거친 다음에 나를 죽여. 끝없이 지연되는 그 미로에서 말이야.”는 무슨 의미인가?

Kim :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제논의 역설’을 담고 있다. 그중 ‘화살의 역설’인데 화살이 A에서 B로 이동할 때 중간지점을 반드시 통과하는데 화살이 B를 향해 절반을 가고, 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을 가는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항상 남은 거리의 반을 가게 되기 때문에 화살은 B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한계가 명확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이어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고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도 인용되었다. 에른스트 모는 종착지/목적지에 가야 하는데 계속 도착하지 못하고, 무수한 중간지점을 지나며 자꾸만 늦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직선상의 미로에 있는 것이다. “나를 죽여”라는 말은 결국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죽었어”는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수많은 가능 세계에 얽혀 있는 존재들이어서 어떤 세계에서는 이들이 죽었을 수 있고, 또 다른 세계에서는 살아 있을 수도, 굉장히 사랑하는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무수한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LEE : 이후 에른스트 모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GL(Girl’s love)을 접목한 이유를 듣고 싶다. 전시 소개와 관련된 기사와 글들에서 “사변적, 전복적 시각 서사”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부탁한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GL에 대해 검색해봤는데 자료가 많지 않았다.

Kim : 마지막 장면 이후의 이야기는 열어두었다. 사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로맨스이다. 개인적으로 GL 문화 자체를 좋아한다. 팬데믹 시간 동안 GL 웹소설과 웹툰을 많이 봤다. BL(Boy’s Love)과 달리 GL 문화는 여전히 비주류이다. 그런 만큼 커뮤니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 BL의 경우 동성애 문화와 무관하게, 이성애 여성, 퀴어 여성과 남성들이 두루 소비한다. 팬덤을 공고하게 갖는 대중문화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 퀴어에도 계급이 있다고 느낀다. 현대미술계에서 남성 퀴어 코드, 문화는 주류에서 공개적으로 다뤄진 지 오래다. 나는 이 작업에서 의도적으로 GL 코드를 중심에 놓고 싶었다. [문법과 마법]을 준비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선택이었다. 여성 퀴어성을 (갤러리현대라는 주류 공간의) 내부로 끌어오고 싶었다. 여성 퀴어가 여전히 비교적 이물감을 주거나 비가시화된 존재라는 현실과 아직까지 한국에서 GL 코드가 놓인 현실은 닮아 있다.

<수리솔: POVCR Surisol: POVCR>, 2021, VR 경험, 약 17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작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기 때문에 시대적 이슈들에 주목하며,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는 사회적 경험을 작품에 담을 수밖에 없다. 김아영은 특히 시의적이면서 민감한,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담아낸다. 타자와 소외된 영역을 다룬다. 동시에 매우 감각적이며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큰 매력 중 하나라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해당 이슈들을 주류 미술계에서 예술을 위한 소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적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하고 싶은가? 물론 예술은 실천적 운동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만 역사적 사건/비극을 다룬 작품의 심미성이 높을 경우, 저항적 혹은 자성적 메시지가 희석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저항적 사유에 근간한 이슈를 다루는 미술에서 때때로 논의되는 것이다. 관련해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Kim : 예술이란 무엇인가 대한 질문의 방향이 다른 것 같다. 내 작업이 미술관으로 상징되는 주류의 공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술의 실천성과 실험성이 탈각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주의자의 행위가 곧바로 미술이 될 수는 없다. 날 것 그대로의 행동주의(activism)가 비주류 예술이고 아주 주관적인 미학성을 갖게 되면 주류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미학성을 갖지 않은 날 것의 행동주의는 비주류 예술로서 더 실험적인 것이 되고 더 예술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나, ‘해당 이슈들을 주류 미술계에서 예술을 위한 소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관점은 이 세상 모든 미술에 해당할 수 있기에 대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재 없이 예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다수의 창작자가 공적 지원금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미술 시스템 안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서 주류 미술과 비주류 미술에 대한 고민은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 현실 속에서 제도권 밖 미술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지에 대한 역질문도 할 수 있겠다.

LEE : 본인의 작업을 통해 작가가 최종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Kim : 이 질문만큼은 대답이 어렵다. 크게 기대하는 바는 없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지 않을까? 한편 나는 작가라는 직업에 굉장히 만족한다. 과거 여러 회사/직장들(출근 장소로서)을 경험하기도 했고, 디자이너, 사진작가로도 활동했었다. 작가의 삶은 내가 끝까지 갈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 궁금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마음껏 천착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늘 충만하다. 내 작품 속 이미지와 텍스트의 밀도가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자기의 세계 속에서 작품을 이해하니, 내 작품의 파편만 인식해도 상관없다.

LEE : 현장성이 강한 퍼포먼스와 영상의 차이는 극명하다. 작가 본인이 느끼는 각각의 차이와 강점은 무엇인가? <사기 지질학(Fraud Tectonics)>(2016)은 퍼포먼스로 진행되었으나 현재 공개된 영상은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퍼포먼스를 촬영한 영상의 후속 작업에 관한 판단은 어떻게 내리는가?

Kim : 기록 영상과 작업으로서의 영상은 확실히 구분한다. 현재 공개된 <사기 지질학> 영상은 기록 영상이지만 촬영할 때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를 쓰기도 했고, 평범한 기록 영상으로만 남는 것이 아쉬워 편집하면서 이것저것 시도했다.

<PH 익스프레스 PH Express> 2011, 2채널 비디오, 약 31분, 도판 제공=김아영.

LEE : 초기작을 잠시 이야기해보겠다. 2채널 영상 <PH 익스프레스(PH Express)>(2011)를 “기록된 역사적 자료의 훼손 없는 이송이되, 작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편집”이라고 설명했다. 객관적 역사를 바탕으로 해도 그것이 작품이 되면 작가의 적극적 개입이 들어간다. 사실을 기록한 영상의 편집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Kim : 바로 그 의미였다. 당시에 사명감도 있었고, 깊이 몰입해서 영국 신문부터 외교 문서에 이르기까지 거문도 사건과 관련된 사료들을 찾았다.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에서 온라인으로 모든 해당 자료를 다 찾았다. 영상 속 인물들의 대사는 99%가 역사 기록을 인용한 거다. 이 정도로 훼손 없이 자료를 이송했지만, 각색과 편집만으로 이미 적극적 훼손의 의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PH 익스프레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설명적이고, 재현적이라고도 하는데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난도질한 역사 편집물이라고 할 수 있다.

LEE : <PH 익스프레스>에서 역사적 사건을 전달해주는 남성이 등장할 때의 배경은 현재의 도시 풍경이다. 인물과 배경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사령관의 이야기 등을 볼 때, 이 작품은 풍자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Kim : 서로 다른 환경에서 촬영된 촬영본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면 시간을 교란시킨 것처럼 보인다. 구축된 사극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종적인 시간이 나타나는 충돌을 봉합 없이 보여주려 한 것도 있다. 또 우스꽝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워낙 냉소적인 코미디나 풍자를 좋아한다. 나의 작품에 종종 삽입되는, 예를 들어 ‘오셔닉 매직 솔루션(Oceanic Magic Solution)’, ‘CPRP 클라우드 패시지 통합 프로그램(CRIP: Cloud Passage Integrity Program)’에 관한 광고의 시퀀스들을 냉소를 통한 풍자 그 자체이다.

LEE : 스크립트 작성에서부터 촬영, 편집, 완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간단히라도 설명해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 현실적으로,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협업이 이뤄지는지 알고 싶다.

Kim : 작품마다 책을 읽고, 인터뷰를 포함한 조사 연구도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몇 달 정도 필요하다. 그다음 스크립트를 쓰기 시작한다. 보통은 그 두 가지가 뒤섞인다. 시각적 현실화를 생각하며 쓰기 때문에 이 시기에 예산부터 스태프까지 다 결정하는 편이고, CG(computer graphics) 작업도 이 단계에서 시작한다. 영상 촬영을 마치고 CG를 시작하면 너무 늦는다. 모든 스태프뿐 아니라 촬영팀, CG 팀, 게임 엔진 개발자와 항상 소통을 면밀히 한다. 스크립트는 보통 1~2달 안에 끝낸다. 대체로 길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기에 촬영은 대개 5일 이내에 마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경우에는 오토바이 주행 등 실사 영상을 충분히 넣고 싶었기 때문에 CG와 실사 모두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예산이 꽤 많이 들었다. 몇 년 동안 사변 서사에 천착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고 다녔는데 그 바탕에는 사변적 픽션이 우리를 상상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도약시키고 견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팬데믹 시기 동안에는 이에 대한 전적인 믿음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처해 있는 현실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 사변이라는 방법이 당장의 현실에서 무력한 것은 아닌지 문제의식이 생겼다. 인간이 겪는 이 현실 속 비루함, 몸뚱이의 무거움 등을 너무 멀리 가지 않은 상태로 언급하는 방법으로 실사 촬영을 선택했다. 촬영이 끝나면 푸티지를 받아 VFX(visual effects)와 모션 그래픽(motion graphic) 작업을 하는 편집자와 함께 완성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Porosity Valley 2: Tricksters’ Plot>, 2019, 2채널 비디오, 23분 4초, 도판 제공=김아영.

LEE : 본인이 작성한 스크립트를 실행할 때 우발적인 상황들이 발생할 텐데, 그런 상황을 즐기는 편인가? 아니면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사실 완성된 작품들을 보면 우발적 개입을 상상하기 어렵다.

Kim : 우발적 상황을 당연히 즐긴다. 내가 쓴 스크립트들은 절대로 그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예산의 한계, 현실적 문제들이 있다. 나는 이런 문제에 빨리 타협하는 편이다. 하고자 했던 계획이 10이라면 그 안에서 6까지밖에 표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가능한 것을 붙잡고 늘어져 작품을 위해 모인 참여자들을 괴롭힐 수는 없다.

LEE :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2019)과 2022년 [문법과 마법]을 보러 갔을 때 전시장에 관객이 정말 많았다.

Kim : 1001일 동안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담은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The Arabian Nights)』가 지닌 본질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라는 데 있다고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야기꾼이다. 내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 이야기가 내게도, 관객 각자의 주관성 속에서도 재미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건 내가 원하고 계획한다고 해도 완벽히 조절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