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0.

본 글은 2024년 5월 9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동혁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artist 이동혁(Lee, Donghyuk)

LEE : 이문정, LDH : 이동혁

LEE : 미술을 처음 접했던 순간은 언제이며, 미술(회화)을 전공하고 작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 이유는 무엇인가?

LDH : 어렸을 때 미술에 대한 경험을 많이 하진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정식 대회도 출전하는 농구부 활동을 했다. 친한 친구들도 거의 체육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미술도 좋아했고 내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을 정도는 되었지만 아주 잘 그리거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이진 않은 것 같다.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그냥 뛰어노는 게 재미있어서 좋아했다. 공부를 못하진 않아서 대학교 진학도 내 성적에 맞춰서 가면 된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늦게 시작한 대신 내가 미술학원 문을 아침에 열고 밤에 닫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승부욕이 강해서 제일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이후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 잘 그리는 학생이 되었고, 재수할 땐 제일 잘 그리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홍익대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예술 중고등학교 출신인 동기들은 유화도 익숙하게 그렸는데 나는 물감을 섞는 법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미술이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영역 같았고 대학교 1, 2학년 때는 그림 그리는 걸 포기했었다. 마침 강의를 나온 젊은 강사분들이 영상이나 다양한 매체로의 확장을 자주 말씀하셔서 그쪽 작업을 했고, 대학교 3학년 때 4년 정도 휴학했을 땐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영화를 좋아해서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내가 그림을 많이 좋아하고 내 동기들이 나보다 앞서 그림에 투자했던 긴 시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부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그림 그릴 시간을 충분히 주기로 마음먹고 다시 시작했는데, 이제 한 10년 된 것 같다. 아직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으니 내 기준에는 부족한 상태이다. 그래서 물감이나 붓 같은 재료(도구)를 이리저리 바꿔보기도 하고 과정에 변화를 주면서 실험을 계속한다. 아마 앞으로 10년~20년은 지나야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LEE : 그러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다가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 것인가?

LDH : 그렇다. 나는 인생 계획을 전투적, 체계적으로 짜지 않는 사람이다. 느슨하게 흘러가는 대로 따랐다. 다만 대학교를 졸업한 후, 작업을 진지하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다 작업에 온전히 집중한 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이다.

LEE : 이미지와 제목 모두에서 느끼는 특징으로 마치 성서나 문학, 신화가 그런 것처럼 매우 서술적이고 그 안에 내러티브가 존재함을 분명히 알겠는데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작품 속에 본인이 어느 정도의 이야기를 구축하는가? 또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적인 무언가와 연결된다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물어볼 수밖에 없다. 기독교 혹은 종교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물론 작가가 그 부분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일례로 <자녀된 이에게>(2017)의 경우 종교적일 수도 있으나 인간 보편적인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LDH : 일단 나는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신자이다. 아버지도 목회자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나의 내면에는 기독교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 동화책 보듯이 성경을 봤다. 어린이가 볼 수 있는 만화 성경도 많다. 나는 신을 향한 믿음을 갖고 있지만 종교 집단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회의적인 입장이다. 또한 인간 세상에서 종교가 구현되거나 믿음이 증명되는 과정을 향한 질문이 있다. 성서 내용에서 영감을 받았다기 보다는 이런 질문들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나를 포함한 일반 성도들은 듣는 위치에 놓인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서 있는 강당은 건축적으로도 더 높은 위치에 존재한다. 어떤 질문도 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런 곳에서 듣던 이야기 중에 물음표가 생기는 것들이 있었다.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궁금할 때도 있다. 어떻게 해석했기에 저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동의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생긴 질문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초기 작업의 경우 뭔지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그려진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실제로 잘 모르지만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형상을 그린 것이다. 엄청난 영감이 떠올라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미미한 작은 부분에서 파생되는 많은 질문이 출발점이다.

이동혁 <배꼽을 메운 30> 2022, oil on canvas, 33.4x21.2cm(9pc),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성서를 읽다가 생긴 질문도 작품에 담기는가? 아니면 성서에 대한 인간의 해석에 물음이 생기는 건가? 성서는 그저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 안에 많은 상징이 있다고 알고 있다.

LDH : 최근의 작업과 맥락은 같지만, 초기에는 객관화된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했고, 나라는 개인과 거리를 두려 했다. 내가 다루는 주제 자체가 너무 무거울 수도 있고, 개인화되어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 같은 작품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미지의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객관화되면서 마음을 움직일만한 무엇도 안 실렸다. 그래서 <폐교회> 시리즈를 시작했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성서를 기반으로 한 나의 개인적인 질문을 그렸다. 최근작은 후자, 즉 성서에 대한 인간의 해석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쪽으로 옮겨온 상태이다.

LEE : 성서 혹은 그 해석에 작가가 의문이 드는 부분을 그려내면서 작가의 내러티브가 추가되는가? 작가의 상상이나 문학적인 서술은 어느 정도 더해지는지 궁금하다.

LDH : 초기작엔 좀 많이 담겼다. 성서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에 관한 나의 의문점이나 파생된 형상들을 그렸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 서사가 더 많이 개입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그 정도까지 나의 질문을 넣기보다 휘발시키려 한다. 작품 속 상징을 오히려 더 가벼운 것,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만들려고 했다. 물론 작가인 내가 개입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특히 조형(시각)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풍경이 한 공간에서 비집고 들어가 작동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작가는 조형적인 부분에 개입하고, 그려진 것들이 어떤 상징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는 작가의 힘이 빠지길 바랐다.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9> 2023, Oil on canvas, 33.4x21.1cm(4pc),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전시 [귀 있는 자](2024)는 어떤 장면들인지 궁금하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부분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에서 6장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조금 더 범위를 좁혀주면 좋겠다. 텍스트로 존재하는 성서를 읽다가 혹은 생각하다가 작가의 머릿속에서 시각화되는 것을 그리는가? 아니면 다른 이미지 자료들을 참고하는가? 외부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차단하거나 받아들이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LDH : 의식적으로 막으려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외부적 레퍼런스를 많이 가져오지 않는다. 특정한 이미지를 참고하면 그것에 갇히는 것 같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찾아보긴 했다. 그런데 삽화에 가까운 것들이 많고, 그밖에 요한계시록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주목한 것 중 하나는 성경이 여러 언어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상황,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자신을 온전히 지우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것을 읽는 사람이 그 앞에서 본인을 완벽히 지우고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LEE : 누구도 자신을 지우지 못한다. 또한 해석의 과정에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영역도 있을 것이고 왜곡도 늘 존재한다. 그것은 성경만의 문제도 아니다.

LDH : 맞다. 내가 어느 정도 개입된 그림 안에서도 축소되고 은폐되는 것들이 생기기 때문에 나 역시 화면을 이미지로 채우면서 번역자가 된 느낌이었다. 구조적으로도 한 문장에서 특정 단어가 앞에 놓이는가 뒤에 놓이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 회화도 이미지의 미세한 차이로 뉘앙스가 바뀔 수 있었다.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더욱더 성서 외의 자료를 참고하지 않으려 했다. 그보다는 화면 안에서 이미지를 어떻게 나열할지에 집중했다.

LEE : 번역을 생각하는 건 의미를 열어놓기에 가까운데 일반적으로 성경을 생각하는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게 성경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기독교의 내용을 다룬다고 하면 포교나 교화를 생각할 것이다.

LDH : 나는 그런 태도를 늘 경계한다. 내가 믿음을 갖고 있어서 더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성경에 관해 발화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기작의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성경 구절인지 알아볼 정도로 명확한 지점들이 있었는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점점 모호함과 가능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LEE : 의미의 가능성이나 번역의 문제를 다루다 보니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잘려 나가게 그린 것인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간은 완벽하게 신의 뜻을 파악할 수도 없고 전달할 수도 없다는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

LDH : 원래는 화면의 중앙에 배치해서 어떤 형상을 그리려고 했는지 온전히 보여주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A-라운지에서의 개인전 [침묵이 바위를 깰 때](2020) 이후로는 잘린 형상들에서 연상되는 덩어리들, 화면 밖의 공간들이 중요해졌다. 사건이나 서사를 화면 안에 넣으려 했던 것이 화면 밖으로 숨기려 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힌트가 될만한 부분들을 살짝씩 보여주는 방식이 중요해졌다.

이동혁 <0를 위하여 4> 2020, oil on canvas, 200x200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화면이 꽉 찬 듯한데 형상의 부분만 등장하기 때문에 무언가 꽉 차서 넘친 상태 같다. 혹은 그것이 이미지든, 의미든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한편으로 갑갑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촘촘한 붓질도 영향을 주었다. 완벽히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일부의 종교 해석자들, 경직된 종교적 태도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 본래의 목적과 달리 권력 집단이 된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LDH : 그러한 뉘앙스의 감정선을 전달하는 것도 염두에 두는 부분이긴 하다. 내가 “목적을 잃은 채 행위만 유지하는 존재들”이라고 묘사하는 억눌려 있는 상태의 존재들을 많이 그리기도 했다. 나에게 강압적으로 다가오는 부분들을 고민하는 매개가 종교인 것은 내 삶에서 큰 영향을 차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종교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포괄적인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이렇게 살아야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한국에서 남성 혹은 아들의 역할, 여성 혹은 딸의 역할을 계속 주입한다거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의무를 했으나 엄밀히 말해 사회구성원으로서 훌륭하다고 믿어지는 역할에 부합하는 삶을 살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표준에 관한 질문이 늘 생긴다.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조금 추가하면, 처음부터 그림이 어둡게 채워지는 건 아니다. 흰 화면에 물감을 얇게 발라 시작할 때는 빛을 내뿜는 것처럼 밝게 보인다. 그 위에 꾹꾹 누르며 어둡게 만들어 간다. 오늘날 미술에서 개념이나 의미가 중요하지만 나는 회화 작가이고 여전히 시각적인 부분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도 굉장히 중요하다. 고민하는 내용 자체의 무게감 때문인지 밝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 밝게 그리면 수치스럽다고 해야 하나, 벌거벗겨진 것 같다.

LEE : 작업 과정에 대해 가능한 선에서 설명해 줄 수 있는가?

LDH : 나는 에스키스가 없다. 그린다 해도 거의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의 낙서에 가깝다. 온전한 형상은 내 머릿속에만 있다. 또한 작은 종이에 에스키스를 완벽하게 해도 그것을 확대해 옮기면 계획과 달라지고 균형이 안 맞는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캔버스에 묽은 물감으로 밑그림을 그리는데, 휴지로 닦아가면서 구상한다. 그다음 전체적으로 몇 개의 톤으로라도 다 그려본다. 공간 관계, 형상 간의 관계 설정을 다 해본다. 확인을 어느 정도 마치면 색을 쌓아 올려 가면서 작업하는데, 물감이 마르는 시간도 있고 그림 안에서 수정들을 계속하기 때문에 작은 그림이든 큰 그림이든 무조건 한 달 이상 걸린다. 큰 작품의 경우 1년 동안 그리기도 했다. 물론 1년 내내 그린 것은 아니고, 완성이라고 결정할 때까지 계속 보고 또 보면서 요소들을 더하고 빼기를 반복하며 진행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을 시작할 때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이미지나 색이 추가되는 정도의 큰 변동은 없다. 과거에는 확실히 ‘오버 페인팅’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있어서 더 그려야 했다. 나올 수 있는 만큼 다 나와야 완성이란 생각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년에 12점 정도가 가능했다. 지금은 작업실에서 봤을 때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끝낸다.

LEE : “작가들은 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문제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작가에게 요구하는 역할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가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을까?

LDH : 아직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너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는 이야기는 많이 듣는다. 하지만 나는 사회를 그렇게 예민하고 냉철하게 보는 작가는 아니다. 지극히 내면에 집중한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고치고 싶다는 데에 집중했다면 예술가가 아니라 사회운동가가 되었을 거다. 종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목회자이신 아버지와 편하게 대화한다. 궁금한 게 생기면 아버지께 질문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삐딱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납득되지 않는 부분을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다른 가능성을 찾는 정도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예전에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붕 떠 있는 존재들을 그렸었는데, 누군가가 종교(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다가 ‘저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걸까?’란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다. 아무리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얼마나 납득하기 힘든지를 그림에 넣는 거다.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1> 2024, Oil on canvas, 227.3x162.1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오늘날 많은 작가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을 예술적으로 녹여낸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자신은 질문을 던지고, 자기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질문하고 문제를 인식하고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까지가 예술의 역할이란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혁의 작업도 충분히 사회적인 이슈들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작가의 개인적인 특수성인 종교에 대한 부분이 담기면서 차별화되고, -종교도 매우 큰 주제이지만-막연하게 표준이나 해석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달리 구체성이 생긴다.

LDH : 거리 감각을 잘 조율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다. 종교화라는 것이 한국이나 서구에서 통용되던 흐름이란 게 있는데 현재 나의 작업은 그것으로부터 살짝 비켜난 위치를 점유하려 노력 중이다. 아직 그 부분까지 소화하기에는 나의 역량이 부족해서이기도 하다. 더 나이가 들면 흐름의 중심을 다루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쨌든 내 개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확대해 가는 과정 중에 놓인 게 전시 [귀 있는 자]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서 종교(적 미술)를 다루는 다양성이 찾아지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을 생각하는 중이다.

LEE : 촌스러운 질문일 수 있지만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는가?

LDH :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계속 보고 싶다, 내가 계속 소장하고 싶다는 작품들은 있다. 2018년 겨울에서 2019년 여름까지 그렸던 작품들이다. 그 이전까진 아주 어두운 “빛을 잃어가는 것인지 모를 존재들”을 그리다가 반대로 강한 빛에 노출되고 있는 존재들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나의 웹사이트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2019)를 비롯한 <Untitled>(2019), <하늘에서도>(2019) 등인데, 당시까진 하나를 그려도 내가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형상들을 납득할 수 있는 구성으로 그려야 했기 때문에 정말 시간이 많이 들었던 작품이다. 표현적으로는 질감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초창기 작업인데 정말 오랜 시간 그렸다.

LEE : <깊은 눈>(2016), <무제>(2020) 등에서 눈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눈은 종교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많은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이다. 개인적으로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이 떠올랐다. 굳이 말하자면 작품 속 분위기가 -이동혁의 작품과 관련해 언급되는 초현실주의보다-상징주의와 닮은 것 같다.

LDH : 본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질문이 있긴 하다. 똑같은 것을 동시에 봐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되는 지점이 있으니 말이다. 회화는 음 소거된 상태의 이미지인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풍요로운 시끄러움이 좋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 자체가 너무 강하다. 그 안에 무엇이 비쳐 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작가든 관람자든 어디를 볼지 모르기 때문에 확장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전시 [귀 있는 자] 같은 경우에는 전체 공간(의 구성)을 만들려고 한 것도 있다. 그림 속 눈이 가리키는 방향(시선)대로 공간감을 연출했다.

LEE : 전시 공간을 생각했다면 개별 작품들이 놓인 전시장이 하나의 덩어리로, 또 하나의 작품처럼 연결되어 그려졌다는 건가?

LDH : 여태까지의 모든 개인전이 그랬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부터 개인전을 하게 될 공간을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 시뮬레이션하고, 개별 작품을 그릴 때도 연상하면서 그린다.

이동혁 <배꼽을 메운 28, 32> 2022, oil on canvas, 53x33.4cm(4pc), 110x110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조금 논점을 비켜 간 것일 수도 있는데, 종교를 말할 때 죽음(이후)을 빼놓을 수 없다.

LDH : 기독교 교리에서는 현세보다 천국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현세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 사실 나의 경우 이런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편이다.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만 천국에 가고 나머지는 다 지옥에 간다는 것, 특히 지옥에 가는 부분에 대해 의심이 생겼었다. 너무 인간의 기준에 짜 맞춘 것 같았다. 종교사를 보면 인간이 신에게 진정으로 가까워지기 위한 게 아니라 통치를 위해 종교적으로 움직인 상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신이라면 내가 믿는 신은 아니라는 입장으로 변했다. 30대에 주변인들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 나의 상황을 말하면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보다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남아 있는 동안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LEE : 개인적으로 “비린 지저귐”이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작품을 보면, 특히 <비린 지저귐 4>(2018)는 실제로 비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LDH : 2018년도의 <폐교회> 시리즈 중 하나이다. 하나의 공간을 토대로 2~3년간 작업했고,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경험한 뒤 진행했다. 당시에 갔던 곳은 독립된 건물이었던 부평의 폐 교회였는데 비가 오는 날이라 역한 냄새가 났다. 동물시체도 있었고 노숙자의 흔적도 보였다. <폐교회> 시리즈는 보이진 않지만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까지 물성으로 가져오는 작업이었고 시리즈마다 해당 공간의 공기(대기)가 느껴지도록 조금씩 변화를 주어 표현했는데 ‘비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공간은 비어 있으나 그 안에서의 울림이 연상되어 제목을 “비린 지저귐”으로 지었다. 당시 먼지가 가라앉은 듯한 마티에르를 표현하려 했다.

LEE :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과정으로 제목이 정해지는지 궁금하다.

LDH : 다양한데, 시를 읽다 특정한 문구에서 연상하는 경우도 있다.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변형하기도 한다. 100% 그냥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도 있다.

이동혁, <게으른 술래 2> 2018, oil on canvas, 145.5x112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일부의 작품에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기독교적 이미지들이 꽤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게으른 술래>(2018)의 뱀, <기록된 바>(20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무제>에서의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귀 있는 자>(2018)처럼 제목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이동혁의 개인적 배경을 생각할 때 기독교에 질문하는 작업도 용기가 필요했겠으나, 반대로 이처럼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도상을 담는 작업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종교화로 받아들여 작품의 의미를 한정 지으려는 시도가 자주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LDH : 2016년 이전에는 그러한 주제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가진 질문을 담았다.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사물이나 인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했다. 주로 단순한 배경에 변형된 사물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내 기준에선 이쁘기만 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걸 숨기려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특수성이 담기지 않는, 평범한 내용들만 담겼다. 자연히 당시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힘이 없었다. 이미지에 힘이 담겨야 자연스럽게 풀어진 작품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4~5년 동안 꾸준히 작업했고 그것이 쌓여 오늘의 작업이 나왔다. 당시 공모 지원도 하지 않았고 그냥 작업만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해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속했다.

이동혁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2019, oil on canvas, 227.3x162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게으른 술래> 등을 비롯한 2019년도 작품에 특히 인체의 부분들이 보인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담는 것 같다. 좁게는 절대적 신앙의 대상을 가진 체계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헌신 대상과 믿음을 말할 수도 있다. 관련해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다. 작가의 공식 웹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작품이니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LDH : 2019년의 작품들은 정말 신체를 그린 거다. 앞서 말한 빛에 노출된 존재들을 그린 작품과 연결되는데, 최고의 선이고 아름다움인 신에게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오히려 폭력적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에는 배가 등장하는데 뒷배경은 소금 바다이다. 바다가 다 말라버린 곳에서 배를 이고 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배는 상징적인 의미로 교회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풍랑을 만나도 성도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배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풍랑을 만났을 때 쉽게 가라앉을 수 있는 약한 종이배로 그렸다. 성도(인간)들이 풍랑 속에서 의지할 교회(배)는 인간들이 의지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졌고, 빛(신)에 가까워질수록 강해지는 빛 때문에 배로 시야를 가리고 갈 수밖에 없는 상태를 그렸다. 한편 개인전 제목인 “침묵이 바위를 깰 때”에 등장하는 바위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를 뜻한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도하는 손을 바위처럼 그렸는데, 교회 권사님들의 손을 찍은 사진을 참고했다. 강한 빛 아래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에 보이는 주름들이 바위가 갈라진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그렸다. 이중적이고, 정말 다양한 방향에서 읽힐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LEE : 빛(신)에 가까이 갔을 때 더 폭력적인 상황이 생길 수 있는가?

LDH : 신 자체라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신념이나 이념을 뜻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이상적인 것, 올바르다고 믿어지는 것들이 주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에 등장하는 존재의 자세 등에서 감상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들어간다. 통념상 혹은 믿음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내 삶에 들어오는 규제나 규범 등이 타협할 수 있는 정도의 폭력성을 넘어서는 것처럼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부분을 그리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장종완 작가의 작품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장종완 작가는 모든 게 천국인 것처럼 이상적인 상황(처럼 꾸며진)을 그린다면, 나는 실패한 영역에 이상향만 던져놓은 듯한 그림을 그린다. 또 나는 의미가 없지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상황에도 관심이 있다.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무게감 같은 것을 계속 넣으려 한다. 그래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을 그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실제로도 그런 그림들을 좋아한다. 종교화의 구성도 좋아하고. 종교화는 구조나 도상의 위치에서 내가 선호하는 분위기를 내재하고 있다.

LEE : 지금도 성서를 읽는가?

LDH : 때때로 읽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은퇴하시기 전 계셨던 교회에 출석해 설교를 들을 때 떠오르는 것들, 주로 질문들을 적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파생된 형상들이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동혁 <오늘도 우리에게 1> 2020, oil on canvas, 110x110cm, 도판 제공=이동혁

LEE : 작가가 말하는 분위기에 색도 한 역할을 할 거다. 그런데 푸른색이 계속 지속되는 것 같다. 특히 어떤 색이 어떻게 칠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래에 촘촘하게 칠해진 물감이 느껴진다. 흔적을 따라가며 유추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붉은 갈색 계열도 보인다.

LDH : <폐교회> 시리즈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정 기간 하나의 질감에 집중해서 작업을 이어가곤 한다. 배경이 되어준 공간에서 느꼈던 감각을 화면 속 질감으로 표현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태도이다. 같은 기간에 진행한 작품들이 작업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나란히 걸렸을 때, 그 속에서 관람하는 이들도 내가 방문했던 공간에서 느꼈던 감각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래서 시기별로 조금씩 색감이나 질감이 다르다. 붉은 계열의 색을 두껍게 칠하면 텁텁하게만 올라가는 것 같아서, 또 내가 붉은색을 정식으로 쓴 것은 2022년부터라 거의 연구에 가깝게 작업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붉은색은 이전에 썼던 색에 비해 균열도 잘 가는 편이라 그에 대한 해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또 어떤 밑 색을 발라야 내가 원하는 붉은색이 더 뿜어져 나올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택해서 가장 위에 얹어질 색에 맞는 톤의 밑 색(브라운에서 카키 계열)을 깔고 계속 중간 톤을 만들어가다 마지막에 하이라이트에 가까운 색을 발랐다. 푸른색의 경우 과거에는 울트라마린 같은 색을 얇게 올렸다면 이젠 중간채도 정도의 푸른색을 사용한다. 내가 사용하는 다른 색들이 워낙 채도가 낮다 보니 중간채도인데도 고채도로 보인다. 참고로 나는 시판되는 물감 자체의 색은 거의 안 쓰고 팔레트에서 완전히 섞어서 쓰는 편이다. 처음에는 신경 써야 하지만 매일 작업을 하다 보면 매뉴얼처럼 외워진다. 또 중간톤의 색들이다 보니 미미한 차이가 있어도 완성되었을 때 같은 톤으로 보인다. 나는 오히려 방향에 따라, 빛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상황이나, 단어로는 보라색이고 보라 톤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다양한 색이 있는 상태가 재미있다.

LEE : 어떻게 보면 언어는 무언가를 한정시킨다. 관점에 따라 미술(이미지)은 언어가 다 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런 부분을 담아내는 색인 것 같다.

LDH : 그래서 작가 노트를 써야 할 때 힘들다. 너무 다양한 생각들이, 궁금증이 작품으로 나오는 건데 언어로 적는 순간 단정적으로 끝나버린다. 작품을 만드는 나조차도 늘 열려 있다. 내가 특정한 생각을 하면서 A라는 작품을 완성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의미가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A를 봤을 때 ‘지금 보니 다른 생각이 있었구나’라고 떠올릴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결국 색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나 성서에 관한 이야기 모두 다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