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8.

본 글은 2020년 10월 21일(수)에 진행된 이문정과 지희킴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지희킴(Jihee Kim)

LEE : 이문정, JHKim : 지희킴

LEE : [바디 프루프 Body Proofs](2019)에서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벽화를 제작했다. 벽화에서 실크스크린을 사용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어서 흥미로웠다. 또한 인쇄라는 부분에서 북 드로잉(book drawing)과의 연관성도 찾아볼 수 있었다. 실크스크린을 언제 처음 사용하게 되었는지,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듣고 싶다.

JHKim : 무엇보다 내가 워낙 실크스크린에 관심이 많았다. 실크스크린은 매우 계산적이고 구조적이다. 정확한 규칙이 있어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변형하면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법칙을 배워가며, 공정 하나하나를 지켜가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았다. 회화는 작가가 설정한 규칙이 있다고 해도 작가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라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작업은 아니다. 회화와는 다른 제작 과정이 매력적이었다. 두 번째는 안료를 스퀴즈(Squeeze)로 밀어내어 내가 계획한 이미지를 단 몇 초 만에 얻을 때의 쾌감이 좋았다. 굉장히 복잡하고 섬세한 이미지도 한 번에 만들어내는 실크스크린의 방식이 명쾌했다. 농담을 통해 깊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티커처럼 평평하고 납작한 면이나 선으로 펼쳐지는 이미지의 세계를 지향하는 나의 회화적 형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나의 대형 회화 작업들, 예를 들어 <겹의 기호들 Signs under skin>(2018)이나 <기묘한 살갗 Uncanny Skin>(2019)을 본 관객 중에 실크스크린 혹은 판화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다. 붓으로 그린 것인데 판화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신기했다. 나의 회화가 ‘누군가에게는 판화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의 전환도 영향을 주었다.

[Body Proofs] installation view at Performing Zone ⓒThisWeekendRoom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LEE : 언제부터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했나?

JHKim : 2015년부터다.

LEE : 벽화가 아닌 작업에서도 실크스크린을 사용하는가?

JHKim : 아직은 실크스크린을 그렇게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회화와 드로잉이 나의 메인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크스크린은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LEE : 벽에 대고 세로로 실크스크린을 찍으면 판을 고정하기도 어렵고 누르는 힘도 더 들어서 많이 힘들 것 같다.

JHKim : <바디 프루프>에서 실크스크린을 이용한 벽화 작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당연히 신체적으로 힘들다. 스퀴즈로 미는 것은 별 차이가 없고, 판을 고정시키는 것이 난제였다. 판을 수평면 위에 올려놓고 작업했을 때 성공 확률이 90%라고 한다면, 세워서 찍으면 60%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내가 정의하는 성공이란 이미지가 흔들리지 않는 건데 세워서 찍으면 이미지가 미세하게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고르게 찍히지 않는다. 그래서 큰 판 같은 경우에는 철제를 대고 보조기구를 사용해 실크판을 고정시켰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지가 고르게 찍히지 않았다 해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역시 회화성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도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LEE : 매체의 선택과 표현 방법은 모든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개념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적합한 매체를 찾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JHKim : 나에게도 매체 실험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 과거 작업과 비교해보면, 현재 매체 실험의 비중이 더 커졌다. 나는 아주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매체 실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체적 실험을 하나하나 완수해나갈 때 허들을 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가 나오고,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또 다른 작업의 영감을 얻게 되고, 마치 릴레이처럼 이어진다. 그런 경험들이 조금씩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같다. 실험하면서 계속 배워가는 거다. 나는 작업할 때 신나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작업이 너무 재미있다. 그래서 힘듦이 상쇄된다. 만약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똑같은 시간 동안 했으면 지루하고 피곤했을 거다. 일단 심적으로 즐겁고 행복하니까, 좋아하는 것을 하니까 매체에 대한 실험도 끝없이 하게 되고 결과도 만족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
<바디 프루프>의 경우 김나형 디렉터와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다. 나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 전시를 준비할 때 기획자와의 교류를 통해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내가 갖고 있는 아이덴티티를 미팅과 대화를 통해 발전시켜 나가는 편이다.

[Body Proofs] installation view at Performing Zone(detail) ⓒThisWeekendRoom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LEE : <바디 프루프>라는 제목만 보거나, 아니면 결과물만을 봤을 때는 더 격렬한 행위를 보여줬을 것이라 예상하게 된다. 그런데 [바디 프루프-지희 킴의 라이브 쇼케이스] (2019)의 영상을 보니 생각보다 평온했다. 관객들도 차분하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고요할 정도였다.

JHKim :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바디 프루프-지희 킴의 라이브 쇼케이스]는 ‘3일간, 매일 2시간씩 작가의 개인 작업실을 공개한다’는 콘셉트로 진행된 퍼포먼스x전시였다. 퍼포먼스를 시작한다고 공표한 뒤 관객과 인사하고 대화하면서 교류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작업실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평상시처럼 작업을 진행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작업을 시작하자 곧 몰입하게 되었다. 관객들도 도착하는 대로 자유롭게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사실 나도 조금 놀라긴 했다. 관객들이 핸드폰도 보고, 대화도 나누고, 소란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또 어떤 극적인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이미지들을 쌓아가는 과정만 있는 퍼포먼스이고, 시작과 끝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중간에 자리를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감사하게도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행위를 계속 봐주었다. 지금도 그 시간이 너무 생생하다. 정말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 내가 진심으로 그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공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LEE : 퍼포먼스에서 왜 흰 옷을 입었는가? 의도한 것 같다. 흔적을 더 남기기 위해 혹은 작품에 시각적으로 방해가 되지 말라고, 어느 쪽인가?

JHKim : 퍼포먼스를 위해 일부러 구매한 의상이다. 실험실 가운처럼 기장이 길어서 아랫부분에 물감이 많이 튀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퍼포먼스를 진행했던 디스위켄드룸(ThisWeekendRoom)은 사면이 모두 하얗다. 그래서 나도 작품의 일부가 된 것처럼 하얗게 입고 갔다. 시각적으로 영향이 없도록, 작업이 먼저 보이도록 흰색 옷을 입은 것도 맞다.

LEE : 지금도 보관하고 있을 것 같다.

JHKim : 그렇다. 언제 한 번 다시 입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기회가 없었다.

[Everybody needs art: The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30th Anniversary Exhibition] installation view at SongEun Art Cube, 2019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LEE : 회화 작업에 물감을 뿌리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JHKim : 첫 번째로는 체액과의 관련성을 들 수 있다. 나에게는 체액이 중요하다. 우리는 몸에 대해서 고체적이고, 딱딱하고, 경직된 사고를 갖고 있다. 여전히 젊음과 아름다움, 건강함에 고정되어 있다. 뚱뚱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몸은 실패자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죽음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노화된 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증오까지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장애가 있거나 건강하지 못해도 모두 하나의 몸이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고체적 인식에 대한 저항의 개념으로서 액체적 사고를 제안한다. 액체적이고 유동적이며 끈끈한 흔적을 남기는 것의 상징이 체액이다. 그것을 내 작업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끈적끈적한 물감을 벽이나 종이, 캔버스에 드리핑하게 되었는데, 비정형적으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시간이 흘러 건조되었을 때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정말 강하게 와닿았다. 흘러내린 물감들이 내가 그린 몸의 세계와 중첩되고 결합되자 시각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드리핑 기법을 통해 체액의 세계, 비정형의 세계가 정형의 세계에 맞서는 거다. 하나의 몸의 모델에 맞서는 다양한 몸의 세계를 상징화하는 기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LEE : 예상하지 못하는 형상이 나오는 것이 좋은가? 즉흥적인 부분이 강하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매우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지들도 공존한다. 계획과 비계획이 함께 균형을 맞추는 것 같다.

JHKim : 나는 스케치할 때 정말 정교하게 작업한다. 스케치를 하는 과정이 지난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드리핑을 할 때나 색을 고를 때는 의식의 고삐가 탁 풀린다. 나는 그 과정을 신뢰하고 좋아한다. 오랜 시간 스케치를 해서 그린 이미지보다 물감을 뿌렸을 때 나온 이미지가 더 마음에 들 때도 있다. 나는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아주 좋아한다. 신비롭다고 느낄 때도 있다.

LEE : 다양한 색채를 쓰지만 지희킴만의 분위기가 담긴 색이 있다. 색 선택을 즉흥적으로 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어떤 기준도 없는가?

JHKim : 완전히 즉흥적으로 선택한다. 색을 선정할 때만큼은 본능을 믿는 편이다. 스케치할 때의 나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색을 고르고 채색할 때에는 무의식의 세계에 빠진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본능을 따른다. 그래야 만족감이 높다. 나를 온전히, 솔직하게 내비치는 단계가 색을 칠하는 시간 같다.

LEE : 색을 고를 때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물감을 잡아서 쓰는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정하는가?

JHKim : 둘 다인 것 같다. 물감통을 툭툭 골라잡기도 하고 특정한 형태를 생각하며 색을 결정하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계산하기보다 철저히 감각에 의존한다. 색을 고르는 데 1초도 안 걸린다.

<A Night is Fleeing 2> gouache and ink on paper, 199x131cm, 2018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LEE : 물감을 구입할 때 어느 정도 작가의 취향이 들어가지 않을까? 작업실에 세상의 모든 색을 다 가져다 놓을 수는 없다.

JHKim : 나는 과슈를 쓰는데, 시리즈별로 다 구매한다. 해당 시리즈의 색은 다 사기 때문에 구입 과정에서 나의 선택은 들어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특정 회사의 물감을 사용했는데 브랜드마다 발색이나 색채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2~3종류의 브랜드를 섞어서 쓴다.

LEE : 그렇다면 지희킴만의 색조가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JHKim : 지희킴이라는 사람이 이유일 거다. 무의식을 따랐다고 해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의 무의식이 선호하는 색이 있나 보다. 많은 사람이 나만의 색조가 있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나는 이런 부분이 나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 작업의 내러티브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그로테스크에 가깝다. 슬프기도 하다. 누군가는 다가오기 힘든 이미지들을 그린 작품인데 색이 진입장벽을 낮춰준다. 만약 내가 어둡고 암울한 색을 썼다면 관객들이 다가오기 어려웠을 거다. 색은 관객들이 다가오게 만들고, 자연스레 그 이면의 세계를 보게 만들게끔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LEE : 과슈를 써서 밀도가 촘촘하게 칠해지는 것 같다. 불투명하니까 더 평평하게 덮이기도 하고 꽉 찬 느낌이다.

JHKim :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쫀쫀하고 매트하고. 그렇기 때문에 시트지를 붙여놓은 것처럼 빈틈없는 색채를 볼 수 있다. 실제로 북 드로잉 시리즈에서 스티커나 시트지를 이용했다. 내가 본능적으로 꽉 찬 밀도에 끌리니까 그런 재료들을 찾게 된 것 같다.

<Uncanny Skin 5>, wall drawing, acrylic, gouache, ink on wall, 310x1,231cm, 2019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SoSo ⓒGallery SoSo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LEE : 벽 위에 종이를 붙인 채 벽화 작업을 했다. 벽 위의 종이(프레임)에 그려진 부분과 벽에 그려진 부분이 공존한다. 이후에 종이 위의 그림만 독립적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그때는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벽에만 그리지 않고 종이와 벽에 같이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JHKim : 나의 대형 회화(벽화)가 종이(프레임)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의 회화는 프레임에서 흘러나오고 확장된 거다. 물론 벽에만 그린 그림도 있다. 갤러리 소소(Gallery SoSo)에서의 개인전 때 공개된 <기묘한 살갗 5 Uncanny Skin 5>(2019)는 종이를 덧대지 않고 시도한 첫 벽화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확장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프레임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이다. 여기에는 북 드로잉이나 종이라는 물리적인 프레임뿐 아니라 정신적인 프레임도 포함된다. 내 지인들에게 나만의 단단한 관념의 프레임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뜨거운 것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차갑게 가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타인이 봤을 때 그런 느낌을 받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끝없이 프레임을 넘나드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왔다. 프레임 넘기를 이미지가 범람하고 흘러나와 정형의 벽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풀어냈다고 보면 된다. 한편 나에게는 2019년 갤러리소소에서 진행했던 전시 [기묘한 살갗 Uncanny Skin]이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큰 벽화를 그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의 허들을 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도 나는 그런 정형의 벽, 물리적인 벽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일 수도 있는 벽을 넘나들고 허무는 작업을 하고 싶다.

LEE : 벽에 붙였던 종이 위에 그려진 결과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전 벽화에서 제작된 회화를 다시 전시할 때도 있다. 그냥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동하는 벽화처럼 또 다른 벽에 붙인 채 그 위에 새로운 벽화 작업을 진행한 적은 없는가?

JHKim : 종이 위에 그린 결과물을 정형의 페인팅처럼 전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 위에 이미지를 그리거나 드리핑을 하는 식의 또 다른 작업을 한 일은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경험을 시도한다면 그 역시 재미있을 것 같다. 계속 변주되니까.

LEE : 벽화의 경우 작품이 사라질 때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가?

JHKim : 처음에는 좀 아쉽다, 다른 곳에서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라짐은 벽화 작업의 특징이자 부분이다. 사라지는 것도 작품의 일부이다. 그래서인지 벽화를 지울 때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없어져야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 년, 만 년 남아있는 작품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 이번에 OCI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깍지]에서 선보인, 190여 개의 나무 타일로 만든 <Sharing Painting>(2020)도 전시가 끝난 뒤 사라진다. 이번엔 그냥 철거되지 않고 미술관을 방문한 관객들에게 선물로 나눠준다. ‘깍지’라는 개념의 이번 전시는 두 명의 작가가 한 팀이 되어 총 열 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팀별로 협업해 공간을 채웠다. 나는 박경종 작가와 한 팀이었는데, 코로나 시대에 의미 있는 작업이자 미술관의 10주년을 기념할만한 작업을 하고 싶었다. 박경종 작가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조각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가가 세웠던 벽이 무너질 때 그 조각을 관객들이 하나씩 갖는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단단하지만 결국 해체되고 무너지는 벽화이다.

<야행성 동물> 기부받은 책 페이지에 천 조각, 30.2x25.7cm, 2013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LEE : 캔버스를 벗어난, 프레임을 오고 가는 작업을 원한다고 했는데 일부 작품은 프레임 (액자) 안에 들어간다. 프레임 안에 넣고 아니고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JHKim : 액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대부분은 작업 보호를 위한 것이다. 북 드로잉의 경우 액자를 하지 않고 그대로 전시하면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만진다. 책이라는 게 만지고 싶고, 넘기고 싶은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크기가 아주 작은 드로잉은 액자를 해야 주목도가 높아진다. 대형 작품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액자를
안 한다. 질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종이나 드리핑의 결과물은 질감이 매우 멋진데 그것을 액자에 넣으면 박제한 것처럼 될 것이다. 마치 나비를 핀으로 꽂아 액자에 넣은 것을 바라볼 때와 비슷할 것 같다. 현장성이 있는 살아있는 작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액자는 정형을 넘고 프레임을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의도와 충돌한다. 시각적으로도 감동이 휘발될 수밖에 없다.

LEE : 본인이 사용하는 종이를 가죽 같다고 표현했다. 피부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가?

JHKim : 그렇다. 작업을 하다 정말 내 살갗 같아 놀랄 때도 있다. 작업할 때 나의 피부가 종이에 닿고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내 피부가 종이 위에서 문질러진다. 그때 닿는 표면의 느낌이 가죽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역시 내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액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전시를 위해 설치를 할 때 종이에 구멍을 뚫어 고정하는데 마치 살갗에 구멍을 내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LEE : 액자를 하지 않으면 보관이 어렵겠다. 물감이 두껍게 올라갈 경우 박락의 위험이 크지 않나?

JHKim : 나도 걱정을 했는데 물감이 정말 쫙 붙어서 여태까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작품은 크게 말아서 보관하고 이동한다.

LEE : 작가의 표현대로 손상되거나 변형된 신체의 이미지가 드로잉에 담겨 있다. 잔혹해 보일 수 있는 이미지인데 우울하거나 어둡지 않다. 그보다는 약동하는 에너지가 전달된다. 리듬감도 있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색채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개별적인 이미지가 하나하나 보이기 전에 전체가 군체처럼 다가와서 파편화된 신체가 먼저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JHKim :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무섭다고 말한다. 사과나 꽃을 그리면 안 되겠냐고 물어본 관객도 있었다. ‘내 작업을 그렇게 무섭게 느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던 적도 있었다.

[Signs under Skin] installation view at out_sight, 2018 ⓒout_sight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LEE : 지희킴의 작업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특징으로 파편화된 신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회화 작업에서 자동기술법을 떠올릴만한 이미지도 등장한다. 작가도 관련된 개념으로 본인의 작업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색채 선택과 관련해 무의식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모두 초현실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의 욕망이나 무의식의 영역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거나 작업의 개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확장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JHKim : 그러고 싶다. 물론 나의 작업은 예술적 표현이기 때문에 조금 다르겠지만 정신분석의에게 내 작업을 보여주고 분석받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만약 그런 협업의 기회가 생긴다면 해보고 싶다. 2018년에 아웃사이트에서 진행된 전시 [겹의 기호들 Signs under skin]의 작업을 보고 ‘작가가 어떤 정신세계를 가졌길래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가’란 감상평을 읽고 놀란 적이 있다. 그래서 내 정신세계가 학술적으로는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 시대에 어쩌면 그렇게 멋진 작업을 시도했는지 놀랍다. 지금 봐도 동시대적이다. 다만 나의 작업이 전적으로 오토마티즘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결과물이 일정 부분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으나 스케치 단계에서 오토마티즘적인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나에게 스케치는 철저히 이성의 세계이다.

LEE : 본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중에 문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물론 비정형적이고 끈적거리는 유동적인 대상이라는 점 등이 작가의 개념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진 생명체는 더 있다. 한편으로 문어는 유동적인 다른 생명체에 비해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JHKim : 내가 이미 언급했던 이유를 제외하고 문어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체의 자율성인 것 같다. 문어는 못 가는 데가 없다. 넓게도 뻗었다가 아주 작아지기도 한다. 굉장히 유연하고 못 쓰는 신체의 마디마디가 없는 동물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특히 다리를 정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힘, 에너지가 좋았다. 또 문어는 무언가를 잠식하고, 빨아들이고, 흡입하는 강한 힘을 가진 동물인 것 같다.

LEE : 문어 말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생명체가 무엇이 있는가?

JHKim : 요즘에는 새, 호랑이, 표범과 같은 동물인데 내가 왜 그런 동물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지도 않았고, 개별적인 내러티브를 소유한 상징도 아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육(肉)이다. 비정형의 신체들과 한 화면에서 대화하는 몸, 살덩어리로 존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완벽한 몸을 가진 온전한 동물이 없다. 예를 들어 호랑이는 눈이 하나 없고, 새는 심하게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 입었거나 결핍이 일어난 동물이다. 때때로 내가 창조한 이 불완전한 동물들이 나에게 위로를 주기도 한다.

LEE : 작품을 세상에 발표할 때 그에 대한 반응을 얼마나 걱정하는가?

JHKim :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몸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시작하기까지 망설였다.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작업을 어떻게 볼까?’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를 어떻게 볼까?’란 걱정을 했다. 그런데 한 작품, 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받은 피드백들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작가가 굉장히 힘든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을 때 공감 작용이 더 일어난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할 법한 이야기를 용기 내어 꺼내놓았을 때 알아봐 주는 것 같다. 용기를 낸 만큼 진심이 통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떤 글쓰기> colored pencil, hologram sticker on donated book pages, 23.4x33cm, 2016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LEE : 북 드로잉이 개인적 유희로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오히려 사회적인 의미를 담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증받은 책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는 점도 그렇고, 작가 본인이 언어의 틀(세계)에서 배제되었던 경험을 담아낸 점도 그렇다.

JHKim : 사회적인 의미를 찾아주는 분들도 있어 좋은 에너지를 얻고 작업을 이어왔지만, 북 드로잉 자체가 개인적인 유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장벽을 느낀 내가 혼자 발명한 게임에서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회성을 반영하고 시류를 읽는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재 북 드로잉은 살짝 멈춘 상태이다. 지금 하고 있는 회화 작업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 완전한 중단이나 종료는 아니다. 언젠가는 규모를 키워서 북 드로잉으로만 구성된 나만의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 긴 호흡의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LEE : 혹시 북 드로잉을 처음 시작했을 때 버려진 책,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책과 낯선 곳에서 소외된 스스로를 동일시하거나 감정이입을 했는가?

JHKim : 동일시와 심리적 교감 때문에 책에 몰입했던 것 같다. 버려진 책들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내가 재학했던 영국의 대학 도서관 문밖에 버려진 책들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버려지는 것임에도 찢기고 파손되지 않은 깨끗한 책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오브제였다. 그 책들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 책도, 나도 외롭고, 쓸쓸하고,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유학 시절 나는 뭔가 교묘하게 소외되는 기분이었다. 외국인인 나는 제한된 시간 안에 정해진 책을 못 읽기 때문에 그곳의 사람들이 주최하는 읽기 행사에 갈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갈 수 없구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악의적으로 나를 배제하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다. 또 영어를 완벽히 터득하지 못한 나의 탓도 있다. 지식의 모임에서 배제되는 심리적인 박탈감이 버려지는 책과의 유대성을 돈독하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드로잉 워크숍의 결과물 ⓒJihee Kim all rights reserved.

LEE : 본인을 소외되는 데에 일조한 언어의 집합체인 책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드로잉 워크숍의 결과물로 책을 제작함으로써 그와 같은 소외를 정공법으로 극복했다. 이는 분명 언어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저항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언어와 언어가 구축한 시스템에 완전히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지는 언어가 하지 못하는 영역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언어화되어 의미를 부여받는다.

JHKim : 현실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면,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 작업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프레젠테이션도 잘해야 하고 글도 잘 써야 한다. 좋은 작업은 기본이고 언어 능력도 필요하다. 내가 언어를 이미지로 덮는 작업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텍스트/언어가 필요하다. 특히 현대 미술에서는 더욱 그렇다.

LEE : 육체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 대표적인 이유로 이성(언어 등)에 저항적인 몸, 몸의 이상형에 대한 저항 등을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주제는 페미니즘에서도 주요하게 다루는 내용이다. 여성의 파편화된 혹은 유동적인 몸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지희킴의 작업을 보면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여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고 하여 모두 페미니즘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희킴의 작업은 개념적인 부분에서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다른 개념들이 먼저 떠오른다.

JHKim : 그렇게 봐주면 감사하다. 해석의 여지가 넓다는 거니까. 작가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도 유연해지고 성숙해지는 것 같다. 나는 작품 해석의 여지를 오픈하고 싶다. 한 방향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해석은 나의 영역은 아니다. 내가 간섭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펼쳐놓는 편이다. 전시장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관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는데, 정말 재미있는 해석이 나올 때가 있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부분은 환기시켜 준다든지, 새로운 부분을 코멘트해 준다는지. 가끔은 당황스럽거나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다. 심지어 관객들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다음 작업에 반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