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4.

본 글은 2023년 11월 20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정고요나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정고요나(Jung, Goyona)

LEE : 이문정 Jung : 정고요나

LEE : 요즘과 달리, 작가의 아버지 세대에서는 사진 찍기가 대중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진을 취미로 찍으셨다면 어려서부터 관련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다.

Jung :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카메라에 늘 노출되어 있었고, 어렸을 때의 사진도 참 많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늘 관심사와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하시고, 기와나 골동품도 모으셨다.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떠올려보니 중학교 때부터 소풍을 가거나 하면 내가 카메라를 들고 가서 사진 찍고 인화해서 친구들 나눠주곤 했다. 나도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LEE : 사진을 전공할 수도 있었는데 회화를 전공했다.

Jung : 나는 내가 미술을 전공할 줄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미술을 전공하셔서 내가 미술을 했으면 하셨는데 정작 나는 미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봐와서인지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굳이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공부 외에 하나를 더 배우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워낙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도 잘 듣는 큰 딸이었다. 심지어 전공을 이과 계열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영화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1988)을 보고 빠져들었다. 이후 계속 고민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미술을 전공하라고 하실 때도 싫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의 잔상이 떠나질 않는 거다. 결국 어머니께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재수를 생각하고 시작하자고 응원해주셨다. 물론 미술은 쉽지 않았고 결국 재수를 해서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재수할 때 새벽에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아침부터 낮엔 입시 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밤 12시까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워낙 늦게 시작하다 보니 시험 당일까지 그림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br> 홍대에 들어간 뒤에도 그림 그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장수생도 많았고 대부분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었다. 동기들이 내가 작가가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대학 시절 4년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학 졸업하고 바로 작가의 길에 들어서진 않았다. 1997년도에 졸업하고 2009년 첫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 예술고등학교 입시 강사를 오래 했다. 나의 경험을 살려서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있었고, 합격률이 높았다. 그래서 30대가 되면 자연히 학원 원장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30대가 되니 여러 일들이 있었고 입시 미술을 계속한다는 것, 주입식에 가까운 미술 교육을 한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나의 동기들이 전시하고 미술 잡지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뭘 그려야 할지도, 내 스타일도 알 수 없었지만, 대학생 때 많이 그리던 추상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추상보다는 구상이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게 있었다. 처음 그림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창문, 책상, 유리컵 등을 하나씩 그리다가 작가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작업실을 구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처음으로 열었던 전시가 [핑크 프로이트(Pink-Freud)](2009)이다. <br> 돌아보면, 작업을 늦게 시작해서 조바심이 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작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정말 올인했다.

<Pink Freud-color tape Ⅱ> oil on canvas, (91.0x116.8cm)x2, 2009,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핑크-프로이트 Pink-Freud](2009)에서 ‘핑크 프로이트’의 의미 설명을 부탁한다. 전시 제목인 ‘핑크-프로이트’가 연작의 제목인지, 전시 제목인지도 궁금하다.

Jung : ‘핑크-프로이트’는 전시 제목이다. 그땐 의식적으로 개념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는데 주변에서 작가에겐 작업 주제가 있어야 하고 작업 노트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랐다. 솔직히 미술계에서 작가로 활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때다.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서류를 냈는데 운이 좋게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받게 되어 전시할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했고 나를 엄습했던 불안감이라든가, 분홍색의 의미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림 속의 압정이나 색 테이프가 불안정하게 쌓여있는 모습도 다 연결된다. ‘핑크’는 당시 분홍색을 좋아하기도 했고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나만의 무언가를 생각해서 선택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책도 찾아 읽었다. 철학적, 역사적으로 분홍색이 가진 의미도 흥미로웠다. 원래 분홍은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었다거나, 불안함의 의미가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전시가 바탕이 되어 다른 공모에도 선정되었고, <Everything We Expect>(2010) 시리즈까지 같은 맥락의 주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작업이 나의 정체성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또 짧은 기간에 그림을 너무 많이 그려서 번 아웃이 왔다. 당시에 그림 그리는 게 숙달되지 않아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고 숨 쉴 틈도 없었다. 몸과 정신이 모두 힘들었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내가 밀도 높은 완성에 집중하는 게 입시 미술에 젖어있어서는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고, 힘을 빼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전시 [상실된 시간](2013)에 출품한 작품들은 붓 터치도 한결 자유롭고 밀도도 낮아졌다. 물감이 흘러내리는 것도 그냥 두고 깔끔하게 마감하려 하지도 않았다.

<Everything We Expect Ⅱ> oil on canvas, 162.2x130.3cm, 2010, 도판 제공=정고요나
<개> oil on canvas, 145.5x97.0cm 2013, 상실된 시간 전시 작품,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상실된 시간]에 <Real Live Painting>(2013)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라이브 캠 페인팅(Live Cam Painting)>(2016~)처럼 감시카메라, 웹캠 등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영상을 이용하는 페인팅 퍼포먼스이자 회화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캔버스에 투사해 그림을 그린다. 그들의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다고 했는데, 토탈미술관에서의 작업 이미지를 보면, 실시간으로 그린다고 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리는 회화처럼 보인다. 작업 과정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실시간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는 어떻게 그리는가?

Jung : 2013년도의 작업에 애정이 깊다. 지금 돌아보면 아픈 손가락 같다. 당시 그렇게 많은 작업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10년대 초반엔 젊은 작가들이 공모를 통해 데뷔하고 공모전이 다음 공모로 이어져서 활동했다. 그런데 내 기대만큼 전시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안팎으로 고민이 많았고, 작업도 시행착오가 계속되었다. 당시 캔파운데이션에서 운영하는 단기 레지던시인 명륜동 스튜디오에 입주하게 되었다. 첫 레지던시라 너무 좋았다. 그곳에서 정말 열심히 작업했는데 이후 활동 기회가 이어지지 않았다. 예정되었던 전시들도 취소되어 의기소침해지고 2015년엔 작업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상실된 시간]을 봐주셨던 아터테인 대표님이 개인전을 하자고 제안을 해주셨고 2016년 아터테인에서 전시 [기억의 목적]을 열었다. 전시를 위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지금의 스타일이 나타난다. 동시대성을 회화로 설명해주는 뭔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SNS를 작업의 소재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CCTV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거나 개인이 노출되는 상황, 또 그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영상)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해외에서 자기 집 곳곳에 CCTV를 설치하고 삶의 모습을 그대로 공유하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그래서 작업실 불을 끄고 프로젝터로 벽에 그 화면을 쏘고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며 그리다가 불을 켜고 결과물을 보니 꽤 괜찮았다. 그래서 아터테인 오프닝 날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를 벽에 걸고 유화로 그들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따라 그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첫날 그 커플이 외출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많이 그리지 못하기도 했고,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전시 기간 내내 매일 가서 그렸다. 관객들 뿐 아니라 작가들도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데 집중해서 그리는 것을 흥미로워했다. 이후 이 퍼포먼스를 본 토탈미술관 신보슬 책임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작업 과정을 공개하는 워크숍의 한 코너로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에 사람들이 나를 퍼포먼스 작가로 인지해 정체성 고민을 한 적도 있다.

<Live Cam Painting> 진행 장면, 2017,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결과물을 보면 대부분 드로잉에 가까운 회화지만, 홈페이지 업로드된 작업 과정 도판을 보면 꽤 밀도 높게 그린 것도 있다.

Jung : 첫 시도 때 의도치 않게 전시 기간 내내 가서 그리다 보니 그 정도 완성된 거다. 시행착오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사실 인물들 뿐 아니라 고정된 배경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LEE : <리얼 라이브 페인팅>과 같은 작업에서 정해놓은 완성의 기준이 있을까?

Jung: 전시가 끝나면 작업도 끝이고 완성이다. 내 다른 회화처럼 결과물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과정과 행위를 중점에 두었기 때문에 완성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LEE : 작업실에서 실시간으로 그려도 되기 때문에 오직 실시간 현장을 그리기 위한 것만이 목표는 아닌 것 같다. 회화의 전시 방식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특히 회화는 작가 홀로 작업실에서 완성하는 경우가 많으니 인터랙티브적인 무언가를 원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Jung : 처음부터 그런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SNS를 작업에 이용해 동시대성을 갖고 가고 싶었다. 당시에는 SNS 자체, 해외에 있는 모르는 사람과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 실시간으로 대화한다는 게 신기했다. 동시간성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라이브 페인팅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을 관객들과 전시장에서 공유하다 보니, 관객들과 현장 소통이 일어났다.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며 관객들이 질문을 하고 나는 답변을 하면서 소통이 이뤄졌다. 회화 작업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 중에는 다른 사람이 보는데 어떻게 편하게 그리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과거 입시 학원에서 계속 시범을 보였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사실 부끄럼 많고 낯도 가리는데 작업은 가능했다.

LEE : 작가가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개인화된 시대에 사람들은 SNS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또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비롯해 콘텐츠를 제작해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대형 방송국의 콘텐츠보다 소규모 기획사의 콘텐츠가 더 높은 관심을 받으며 때로는 그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그중에는 경제적 이익과 관심을 위해 상식을 넘어서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한다. 오프라인 세계보다 더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이미지들이 업로드된다. 한편에서는 몰래카메라를 비롯해 의도하지 않은 노출이 일어난다. 곳곳에 설치된 CCTV, 휴대전화는 끝없이 무언가/누군가를 촬영한다. 그리고 정고요나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욕망, 의도하지 않은 노출이 공존하는 모순된 현상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한다. SNS의 이미지를 이용한 회화 작업은 언제 처음 시작했는가?

Jung : 2013년이다. 전시 [상실된 시간]을 준비하면서 SNS에서 이미지를 가져왔다. 그때는 모두 나와 관련된 이미지였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이미지들로 전시했다.

LEE :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사람의 인스타그램으로 확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Jung : 그건 꽤 최근이다. 나는 내 인스타그램을 일상을 기록하는 용도로 이용했고,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선택했다.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나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도 보고 나도 다른 이의 인스타그램 이미지를 보니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마음먹고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허락받고 그리기 시작했다.

<바람> oil on canvas, 100x80.3cm, 2022,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작업 초기부터 자전성이 드러난다. 본인에게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나?

Jung : 그런 것도 있지만, 남들의 일상을 그릴 용기가 없기도 했다.

LEE : 이미지 선택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나름의 규칙이 있는가?

Jung : 평상시에 느낌이 좋거나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캡처해서 저장해 놓고, 전시가 확정되면 전시의 개념에 맞게 선택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씨알콜렉티브(CR Collective)에서의 전시 [Filtering](2021)에서는 SNS의 페르소나적인 면이나 관음증 등을 공격적으로 보여주자는 의도가 있었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골랐다.

LEE : 전시와 상관없이 꾸준히 작업을 할 텐데 그때는 어떻게 고르는가?

Jung : 나의 사적인 영역을 보여주는 이미지 중에 선택한다. 침대나 개인 공간의 일부, 나만이 할 수 있는 어떤 행동 같은 것들을 담은 사진이다. 시대여관에서 진행된 [욕욕욕 YOKYOKYOK](2019)에선 내가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The moment I remember>(2019)이 메인 작품이었다. [아주 사적인 절차(In my algorithm)](2022)에는 두 점이 걸렸다. 그렇다고 나를 그리길 즐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모델이 없고 이미지를 선택하지 못했을 때 나를 그린다. 성격이 아주 외향적인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작업할 때는 나를 그리게 될 정도로 용감해진다.

<The moment I remember> oil on canvas, 116.8x80.3cm, 2019,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평상시에 SNS를 얼마나 하는가? 검색은 많이 하는가?

Jung : 내 개인 계정이 있고 작업 계정이 있다. 개인 계정은 개인 앨범, 일기장처럼 업로드한다. 내 사진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예쁜 사진 보는 게 좋아서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카페에 가서 커피 사진 올리고, 사람들 팔로우했다. 최근에는 작업과 관련해 고민하고 있다. SNS에 대한 초창기의 호기심이나 신선함도 감소했고, 상업적으로 변질된 부분도 많다. 또 SNS를 이용하는 작가들도 늘었다. 나는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SNS는 필요한 도구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이 SNS만은 아니니 방향을 점검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인 것은 맞다.

LEE :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보면 정말 별것을 다 찍어서 올린다.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것까지 SNS에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거다.

Jung : 씨알콜렉티브에서 전시를 준비할 때 오세원 디렉터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왜 셀카를 찍고 자신의 내밀한 부분까지 공개하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Summer Reminiscence> oil on canvas, 162.2x130.3cm, 2021,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디지털 초상화>(2021)와 <대화>(2018)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Jung : [filtering]을 준비하며 필터 어플을 이용한 셀카를 그렸는데, 이것을 미디어 작업으로 확장하고 싶어서 미디어 작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게 <디지털 초상화>이다. 내 얼굴 색이 계속 바뀌는 작업인데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되어 있다.
대화는 <라이브캠 페인팅>(2016)에서 발전한 작업이다. <라이브캠 페인팅>은 말 그대로 라이브 페인팅이라 사람들의 실루엣을 제대로 그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굴에 집중해서 그리고 싶었는데 그 역시 힘들었다. 얼굴만 라이브 페인팅을 하고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2018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했을 때 프로젝트 겸 개인전처럼 진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임경민 큐레이터가 정해준 전시 제목 ‘대화’는 한자어로 ‘對畵’이다. 나와 내가 마주한 사람이 1대1로 대화하며 얼굴을 라이브로 드로잉하는 작업이란 뜻이다. 참여해 줄 사람은 SNS로 모집했고, 전시 기간에 필요한 인원은 바로 채워졌다. 하루에 한 명씩 모니터 앞에서 나와 대화하는데, 각자의 앞에 놓인 모니터에 얼굴이 녹화된다. 그리고 녹화되는 영상은 전시장 벽에도 영사되었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녹화하고, 대화 후에 전시장 벽에 필름지를 놓고 영사되는 얼굴을 그렸다. 전시 마지막 주에는 얼굴이 그려진 투명한 필름지를 이용한 설치물을 제작해 전시장에 놓았다. 대화의 주제는 10가지 정도로 정했는데 ‘각종 SNS와 온라인 등을 통해 개인이 노출되는 현상’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대-화(對-畵, Dialogue with painting)> 진행 장면, 스페이스원, 2018, 도판 제공=정고요나
<대-화(對-畵, Dialogue with painting)>, installation, 혼합 매체, (120x143.5x150cm)x2, 2018,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화풍의 일관성도 보이지만, 2016년과 최근의 작업을 비교해보면 물감이 조금 더 촘촘하게 발리는 것 같다. 일부 작품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정교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또 얼핏 보면 극사실적인 회화로 보이지만 극사실은 아니다. 오늘날 일상을 기록하는 역할은 카메라가 하고 있다. 사진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그 역할을 모두 회화가 담당했다. 그런 점에서 사진으로 남긴 일상의 기록을 회화로 재현하는 것은 기록과 재현, 회화의 역할 등에 대한 이슈를 생각하게 한다. 초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 방식에 변한 점이 있다면?

Jung : 지금 내 작업에서 나타나는 표현 기법은 대학교 때 배운 것과 거리가 있다. 앞서 말했듯 입시 미술 교육을 오래 하다 보니 완성도, 구도와 특히 밀도를 중요시하는 습관이 남아있었다. 자연히 내가 만족할 만큼의 결과물을 내려면 그림 한 점에 몇 달씩 붙들고 있어야 했고, 나중에 마무리할 땐 너무 지쳐 재미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체력도 따라주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평생 작가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러다 그림이 지겨워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내가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훈련했다. 덕분에 밀도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빨리 그릴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 지금 작품들은 그 결과이다. 작가는 다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분명히 그 안에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게 된다.

LEE : 색 톤도 변했다.

Jung : 취향도 있고, 배경을 생략하면서 한 톤으로 그라데이션을 주다 보니 그렇게 변했다. 특히 인물화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사진 속 배경까지 그대로 그리는 건 매력이 없어서 배경을 없애게 되었다. 현실인지 아닌지, 같은 공간인지 다른 공간인지 상상의 여지를 주려고 하다 보니 그런 색채가 나오게 됐다.

[Filtering] 전시 전경, CR Collective, 2021,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얼마 전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작업 중에 찍은 사진이 업로드되었는데 보고 깜짝 놀랐다. 전체적으로 칠해가며 완성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완성하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유화라고 하지만 그렇게 완성하면 수정하는 게 쉽지 않고 위험 부담이 커질 것 같다.

Jung : 중요한 부분을 먼저 그리면서 완성해나간다. 물론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에 주변에 추천하진 않는다(웃음). 나는 내 작업 속도에 맞춰 하루 동안 그릴 부분을 다 계획해서 그린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그려야 속도도 붙고 재미있다.

LEE : [filtering]의 작품들을 보면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은, 회상, 기억’ 같은 제목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사진, 기록, 회화를 연상시킨다.

Jung : 작품 하나하나 제목 정하는 게 쉽지 않다. 작가마다 다를 텐데 나는 작품을 다 그린 뒤에 계속 보면서 당시의 기분이나 생각, 느낌을 떠올리며 정한다. 읽었던 책의 구절을 써보기도 한다.

LEE : 무제는 없는 것 같다.

Jung : 무제는 없다. 그림마다 다 이야기가 있는데. 무제일 수는 없을 것 같다.

LEE : 개인적인 의견으로 지극히 시각 중심적이고 보는 행위에 집중한 작업이다. 단순히 회화여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다. GOP FACTORY에 전시된 작품들도 시각적이다. 피부로 느껴지는 빛이라기보다 눈으로 보는 빛에 가까워 보인다. 빛은 보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Jung : 작업에 대한 인상과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Breath> oil on canvas, 72.7x53.0cm, 2022,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사실 SNS에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그저 개인의 욕망이나 허세 등과 관련된 게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연결되고 소비문화, 그리고 스펙터클과 연결된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이미 잡지에서 보여주는 것과 닮아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 세뇌당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올리는 주체나 그것을 보는 주체 모두 그와 같은 삶을 향한 욕망을 더 추구하게 된다. 선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정고요나의 그림들은 이런 이슈들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을 떠올리게 한다. 허망함의 정취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핑크-프로이트]에서부터 이어지는 정조를 생각해보면 ‘부드러운 바니타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인터넷에 올라온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만질 수 없으니 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지점도 연결해 볼 수도 있겠다.

Jung : 나의 취향이나 내가 SNS를 선택한 이유와도 긴밀한 것 같다. 예전에는 공인이나 연예인만 자신을 노출했다면 요즘은 개인들이 자신을 기록하고 보여준다. 그중 일부는 셀럽이 되고 부와 명예를 얻는다. 그런 게 너무 신기한데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자신의 일상을 편집해서 공개한다. 그리고 편집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게 전부인 줄 안다. 그게 전부처럼 보이는 걸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가린다.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게 [filtering]이다.

LEE : 유화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회화의 가장 일반적인 재료이기도 하지만, 유화를 주 매체로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또 사각의 프레임, 유화, 재현 등을 보면 회화의 기본이라 생각되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Jung : 유화만 쓴다. 건조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유화는 기다려주는 재료이다. 내가 생각하면서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그게 내 성향과도 맞다. 또 건조하면서 층을 쌓아가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하다. 느리게 마르니 붓질할 때 편하기도 하고. 또 유화는 색이나 톤의 분위기를 눌러준다. 그런 색조를 좋아한다.

LEE : 전시할 때 회화는 주로 벽에 작품을 걸게 된다. 전시장 가운데 비어있는 공간 혹은 관객들이 머무는 공간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는가? [filtering]에서의 설치는 이 중앙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Jung : 나의 경우 전시장 벽에 걸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공간의 특성,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내 이력을 보면 하얀 벽을 가진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한 경험이 많지 않다. 그만큼 다양한 설치를 시도했다. [filtering]를 진행한 씨알콜렉티브에서는 같은 사이즈의 작품 두 점을 뒷면을 맞대어 공중에 걸기도 했고, 캔버스를 바닥에 붙여 관람객들이 그림 사이를 걸어다니며 관람할 수 있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긴 공간이었기 때문에 내 그림을 마치 파티션처럼 설치했다. 벽마다 색을 다루게 한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욕욕욕 YOKYOKYOK]의 경우 시대여관이 오래된 공간이고 벽도 뚫려 있어서 내가 의자를 챙겨와 그 위에 그림을 올려놓았다. 을지로 OF에서 진행한 [Red Shirt](2020)도 벽에 요철이 있어서 와이어를 이용해 그림을 띄워 걸었다. 나는 전시장의 성격에 맞게 유동적으로 설치하는 편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화가들이 나무 구조물을 만들어서 쓰는데 유행처럼 되어서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

[Filtering] 전시 전경, CR Collective, 2021, 도판 제공=정고요나

LEE : 캔버스 크기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Jung : 고민을 많이 한다. 말로 완벽히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는 어떤 이미지를 보면 어떤 크기로 그릴지 바로 연상된다. 이건 순수하게 내 감이다. 작은 크기의 그림도 그리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의 크기가 클수록 화가의 역량과 특징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LEE : 정고요나의 회화는 대부분 재현에 바탕을 둔다. 재현은 미술의 시작에서부터 존재했기에 미술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다뤄지는 주제이다. 작가와 이론가들은 재현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화가의 창작이 더해진 독창적 영역임을 증명해왔다. 꽤 오랫동안 재현적 회화를 고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본인의 재현이 갖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고 있지만 회화가 작업의 중심에 놓이는 것도 사실이다. 왜 회화인가?

Jung :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는 것 같다.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내 취향이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유행을 따르거나 하면 절대 안 된다. 화가(작가)는 많고 내 작업이 한눈에 튀는 작업이 아니라 고민할 때도 있지만 역시 결론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가는 게 맞다.

LEE : 앞서 작업에 변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금 더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Jung : 이제 나의 양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겼다. 결과에서 드러나는 드라마틱한 변화 보다는 생각이나 주제에서 내 작업을 더 단단하게 해줄 것을 찾고 있다. 지금 그리고 싶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계속 생각해보려고 한다. 또 협업을 하고 싶어서 작가분을 섭외했다. 프로그램 기술도 필요한 작업이라 한 1년 정도 준비해서 도전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