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30.

본 글은 2021년 12월 17일(금)에 진행된 이문정과 장종완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장종완(Jang, Jongwan)

LEE : 이문정, Jang : 장종완

LEE : 작가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작가의 SNS 활용과 관련된 인터뷰였다. 오늘도 인스타그램에서부터 시작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북방계 실장, 만선 Video Production 대표, 코리아 숙취 연구소 정회원’이라고 적혀있다. 이와 같은 정보를 제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sangjonja, north_face_type’인데 그 뜻이 궁금하다.

Jang : ‘sangjonja’는 생존자이다. 상종자라고 읽으며 아주 높은 존재라는 뜻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다. 예전에 친구들끼리 메일 계정을 만들며 도주자, 방관자와 같은 아이디를 정했는데 나는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에 생존자를 선택했다. 실제로 당시 나의 목표가 미술계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north_face_type’은 북방계를 콩글리쉬로 만든 단어이다. 북방계는 내가 임의로 북방계 같은 얼굴을 가진 작가들만 모아 만든 가상의 단체인 동시에 나무 조각을 하는 형과 함께 활동하는 팀 이름이기도 하다. 영상 제작 회사인 ‘만선 Video Production’ 역시 가상의 단체이지만 영상 작업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에 이름이 오르는 실재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애매한데 알고 보니 진짜로 있는 어떤 단체란 설명이 정확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 생활이 증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나의 삶, 그리고 작업과 연결하며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상의 단체를 더 활용하게 된다. 한편 ‘코리아 숙취 연구소’는 말 그대로 내가 술 먹는 것을 좋아해서 만든 가상의 연구소이다. 실제로 숙취 없이 술을 즐기기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고 있기도 하다.

LEE : 혹시 메타버스(Metaverse)를 작업과 연결할 계획은 없는가?

Jang : 메타버스는 아직 도전해보지 않았다. 새로 나온 것은 빨리빨리 해보려 노력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제안해 NFT(Non-Fungible Token) 작업을 한 번 시도해봤는데 아직 완벽히 적응하진 못했다. SNS까지는 즐기고 있는데 그보다 더 너머의 온라인 세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NFT 속 미술 시장(미술 세계)의 취향은 어디에서 생성되는 것인지 관찰 중이다.

<A Breezy Day> oil on linen, 112x145cm, 2015 ⓒ장종완

LEE : 그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보면 작업을 <에덴> 시리즈, <가죽 회화> 시리즈 등으로 분류하고 있고, 여러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인터뷰마다 조금씩 시리즈의 제목이나 분류가 달랐다.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을 정리해 설명해주면 좋겠다.

Jang : 명확하게 분류하려 한 적도 없지만 할 수도 없다. 왜냐면 시리즈끼리 섞이거나 교차하고 레이어가 겹쳐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시리즈 간의 경계가 느슨한 부분들이 많아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초반의 회화는 <낙원(에덴) 회화>라 불리는데 원경 위주의 하늘과 산, 땅 등을 배경으로 사람이나 동물이 머무르는 전형적인 낙원 풍경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근경, 숲속의 우화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들을 그리거나 식물이나 동물들을 의인화해 그린 작업으로 넘어갔다. 이후에는 버섯이나 브로콜리, 밀크 씨슬(Milk Thistle)처럼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식품들을 그렸다. 주제적인 면으로 분류하면, 초반에는 사람의 손이 많이 간 정원이나 분재, 이종교배 동물들이 조합된 풍경을 통해 불편함이 느껴지는 극도의 이상적 풍경을 담았다. 건강식의 의인화에서는 맹목적인 믿음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우화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재료(장르)적인 측면에서는 캔버스 회화, 색연필 회화 등이 있고 가죽이나 나무 조각, 지구본 등의 오브제들에 그린 실험적 작업, 그리고 영상 등이 있다.

LEE :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 꽤 다양하다.

Jang : 작업 초창기에는 새하얗고 네모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게 정면승부 같아 두려운 적도 있었다. 장인의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데 그런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 특이한 것을 찾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다. 그 둘이 합쳐져 재료를 확장한 것 같다.

LEE : 장종완의 작업을 설명할 때 종교 선전물, 선전 포스터, 달력 그림 등에서 추출한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조악한 종교 전단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스럽고 고차원적인 영역을 다룸에도 키치적 분위기가 풍기는 전단지는 교리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고, 종교적 행위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세속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나아가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이 숨기고 있는 인위성과 허술함, 그것을 꿈꾸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특정한 공동체나 이념 등의 유지를 위해 작동되는 사회적 장치와 이미지들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New Normal> oil on canvas, 45x27cm, 2010 ⓒ장종완

Jang : 나이가 들면 들수록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매년 바뀐다. 경험이 쌓이면서 이전의 생각이 뒤집히기도 하고.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다. 작업할 때의 나는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적인 자세를 갖는다. 진지한 세상을 블랙 코미디적으로 전환시켜 웃고, 휘발시켜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종교 전단지의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의 시작점은 의심이었다. 과잉된 행복과 낙원이 그려진 전단지를 볼 때 불편했다. 마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직원이 과도한 미소를 보이며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을 때 불편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좋은 것이 한자리에 모여있는데 즐길 수 없었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는데 나는 왜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인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나는 전시장에서 볼 때는 재미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작업을 하고 싶다. 분명히 재미있었는데 뭔가 찝찝한 느낌이 툭 떠오르는. 작업을 통해 어떤 특정한 이야기나 의견을 전하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의심 가는 지점들을 작품으로 드러냈을 때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궁금해하는 것 같다. 실제로 타인과 작품을 통해 공감의 지점이 생길 때 많은 쾌감을 느낀다.

LEE : 작업에 영향을 줬다는 달력 그림을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Jang : 일반적인 풍경 달력이다. 우리나라 사계를 담았거나 유명 관광지, 명소를 다룬 달력을 생각하면 된다. 나는 휴양지 풍경을 좋아하는데 막상 그곳에 가면 달력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어서 흥미롭다.

LEE : 작업에 상당히 많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넣을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포함해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Jang : 2~3가지 방식이 있는데 일관성이 있는 건 아니다. 풍경이나 이미지들에서 마음에 드는 연극 무대를 발견하면, 그 배경에 어떤 상황을 넣으면 재미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자료를 찾고 드로잉해 발전시킨다. 반대로 재미있다고 느끼는 상황을 찾았을 때는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배경과 이야기를 붙여나간다. 또 <팬데믹 별자리>(2020~현재)처럼 특정한 주제나 흐름을 정한 뒤 발전시켜 나가기도 한다. 일종의 등급놀이 같은 작업도 있다. B급을 A급으로 승격시키고 A급을 B급으로 추락시키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Gloriousness, under The Red Power>(2015)에는 모양이 예쁘지 않은 B급 당근이 신처럼 서 있고 그 앞에 말들이 있다. 실제로 인삼처럼 꼬인 형태의 당근은 모두 주스용으로 분류된다. 인간의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는 것이 웃겨서 역으로 신격화시켰다. 반대로 인간이 권위를 부여한 대상을 낮은 위치에 놓기도 한다.

<Gloriousness, Under The Red Power> oil painting on cow skin, 230x230cm, 2015 ⓒ장종완

LEE : 현실에서 관점에 따라 가치가 바뀌거나 공감할 수 없는 평가/분류 기준을 적용하는 상황을 볼 때가 있다.

Jang : 내가 알비노(albino)를 그린 것도 그와 연결된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한 규범들을 그림 속에서 전복시키며 혼자 즐거워할 때가 있다.

LEE : 표현 방법과 관련해서도 설명을 부탁한다. 아크릴릭 과슈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Jang :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다가 유화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8년부터 아크릴릭 과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크릴릭 과슈는 마른 뒤 보존력이 좋은 아크릴의 장점을 가진 과슈이다. 물이 용매이기 때문에 냄새도 안 나고 빨리 마른다. 단시간에 레이어를 많이 쌓을 수 있어서 성격이 급한 내게 잘 맞는다. 현재는 아크릴릭 과슈의 사용 비중이 큰데 유화 특유의 느낌이 그리워지거나 그라데이션 효과가 필요할 경우엔 유화를 사용한다. 아크릴릭 과슈를 사용하면서부터 캔버스에 장지를 배접해 그 위에 그리고 있다. 학부 때 박서보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1년 반 정도 일했는데 그때 장지가 매력적인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조금씩 실험을 지속해왔다. 장지에 아크릴릭 과슈처럼 전통적인 동양화 물감이 아닌 물감을 사용해도 차분한 레이어가 생긴다.

LEE :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이 B급으로 평가받는다고 이야기했는데, 전단지나 이발소 그림 외에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Jang : 놀이공원에 있는 성과 건물의 외관과 인테리어, 유럽의 성 같이 만든 모텔이나 건물을 좋아한다. 나는 이런 건축물이 가장 한국적인 것 같다. 다른 문화권의 것이 들어와 조금은 괴상한 방식으로 변화해 토착화된 상황이 재미있다.

LEE : 흥미로워서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좋아하는 것인가?

Jang : 둘 다다. 좋기도 하고 흥미롭고 종말적이기도 하다.

<The Man Who Knows> color pencil / oil on paper, 78x54cm, 2012 ⓒ장종완

LEE : 앞서 작가가 언급했듯이 장종완의 작업을 보면 블랙 코미디가 떠오른다. 그런데 가끔 섬뜩함이 느껴진다. 잔혹한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 공포물을 보는 기분이다. 뭔가 잔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또 SF적인 분위기도 전달되는데 비현실적인 상황이나 존재들을 그리기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역시 의도한 것인가?

Jang : 의식적으로 의도하진 않았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니 기쁘다. 앞선 답변과 연결될 수 있는데 내가 작업을 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에 관한 탐구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과정이 그림으로 나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분위기가 전달되는 것 같다. 살아갈수록 잔인한 현실을 많이 느끼고, 그것을 어떻게 나의 방식으로 사유해 작업에 녹여낼까를 많이 고민한다. 잔인한 것을 그대로 잔인하게 그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의 필터를 씌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LEE : 우화는 인간에게 삶에 대한 교훈이나 지혜를 전하거나 강한 풍자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동물이나 식물은 그 자체로 상징성이 강하고, 인간을 주인공으로 인간 세상을 말할 때보다 표현의 가능성이나 허용의 범위가 넓어진다. 작가의 작업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이번에 질문지를 준비하면서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Maus: A Survivor’s Tale』(1980)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보았던 만화인데,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쥐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강한 몰입감을 줄 수 있었을까 싶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간 세상을 이야기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Jang : 나는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소위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작품 중 인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영화들을 끝까지 보는 게 힘들다. 너무 화가 나 불편하고 답답하다. 그런데 블랙 코미디나 우화는 잔혹한 상황을 끝까지 보게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와 같은 방식을 많이 쓰려고 한다. 때로는 로커(rocker)처럼 지르고 싶을 때가 있지만 성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마음속에 품고 있다.

<The Holy Stone> acrylic gouache on Korean paper, 194x120cm, 2019 ⓒ장종완

LEE :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들을 보면 의인화된 동물이 꽤 자주 등장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인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있는가?

Jang : 그렇다. 어렸을 때 일요일 아침에는 <디즈니 만화동산>, 평일에는 <동물의 왕국>이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봤다. 예전에는 방송 프로그램이 요즘처럼 다양하지 않았고, 가구당 텔레비전이 하나였기 때문에 보는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었다. 동물들을 계속 보고 의인화된 동물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을 봤으니 그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중 칩 앤 데일(Chip and Dale), 제리(Jerry) 같은 작은 동물이 악랄하고 잔인할 때 묘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 작업에 설치류가 많이 등장한다. 요즘엔 유튜브에서 동물 관련된 영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동물 피드 등을 본다. 권투선수 마이클 타이슨(Mike Tyson)이 호랑이를 기르는 것을 보고 인상 깊어서 <White Tiger with Boxer>(2016)에서 골프장에서 호랑이를 끌고 가는 과시적인 남성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LEE : 우리가 인식하지 않고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애니메이션에는 잔인한 장면이나 상황이 꽤 많이 나온다. 이번에는 종교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종교 전단지뿐 아니라 전통적인 종교화의 영향도 받았을 것 같다. 일례로 <Sugar Candy Mountain>(2010)는 세 폭 제단화(triptych)의 형식을 띠고 있다.

Jang : 종교화는 다 좋아한다. 어떤 존재의 아우라를 만들고 신화를 구축하는 방식이나 종교화만의 기본적인 구조가 흥미로워 응용하기도 한다. 다만 나의 회화에서는 다람쥐와 같은 작은 존재가 성스럽게 등장한다. 또 학부 때 불화를 좋아해서 탱화를 그리기도 했다. 탱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그려낼지 고민한 적도 있다. 티베트 미술도 많이 보러 다녔고 <가죽 회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도 티베트 불화 박물관에서 야크 가죽에 그려진 탱화를 본 것이다.

<Pieta> acrylic gouache on Korean paper, 40x27cm, 2019 ⓒ장종완

LEE : 장종완의 작업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유토피아(utopia)이다. 유토피아란 단어에는 정반대되는 의미가 공존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답고 행복한 이상향은 현실의 비극을 더 극대화한다. 이상향을 생각하며 누군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역시 본질은 비극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의 인위성과 모순을 숨기지 않는 장종완의 작업은 허무함을 전한다. 작가가 인간 세상과 삶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갖는지 궁금하다.

Jang : 재미있는 것은 내가 유토피아를 그린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히려 반대되는 감정으로 작업한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모순이나 불안에 집중하며 그것을 어떤 필터를 거쳐 그려낼지를 고민한다. 분명 끔찍한 세상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작품 속 풍경의 겉모습이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를 생각하게 하나 보다. 물론 이면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분들도 많다. 현재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관찰하는 중이다.

LEE :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이야기하게 된다.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인 유토피아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의 장소이자 이의 제기의 장소이다. 헤테로토피아가 사회적인 의미를 함유한다는 점에서 장종완의 작업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Jang : 나 역시 흥미를 갖고 『헤테로토피아 Les Hétérotopies』(2014)를 읽었었다. 내가 관심 있는 장소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LEE : 장종완의 작업은 개별 작품마다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상징이나 이야기가 담기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면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관객이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다 알 수도 없고,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관객은 작가가 말하지 않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생각을 최대한 많이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작가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을 들어야 하는지 질문이 생길 때가 있다.

Jang : 나 역시 작업에 대해 어느 선까지 알려줘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편이다. 관객마다 원하는 정도가 달라 어떤 사람은 구조만 알길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세세한 것까지 상세하게 알길 원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나 상황이 특별한 의미를 갖거나 의도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즉흥적으로 갑자기 포착해 그리거나 변형하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의도나 계획대로만 작업하면 재미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앞서 작업마다 여러 방식으로 다르게 진행한다고 말했는데, 지나치게 구조를 짜놓으면 잘 안 풀리고 힘들다.

‘앨런 버넷(Alan Burnett), 고영범(역), 『예술하는 습관』, 알마, 2021’에 수록된 그림 ⓒ장종완

LEE : 『예술하는 습관 The Habit of Art』(2021)에 실린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작가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에도 정말 빨리 잘 그리는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감각적으로 잘 그려낸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을 것 같다.

Jang : 입시 미술의 결과이다. 학생 때를 기억해보면 사실적으로 잘 그리긴 했는데 나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대상도 있다. 작가로 10여 년 넘게 작업하다 보니 내가 잘 그리는 것을 극대화하고 잘 못 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숨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요즘 잘 그려보려, 혹은 수행하듯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꽃과 인물이다.

LEE :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장종완의 작업은 <가죽 회화>이다. 동물의 죽음 위에 그려진 행복한 풍경이나 동물의 이미지는 인간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이 원하는 유토피아를 위해 일어난 희생이나 모든 생명에 따라오는 죽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모순되는 것이 공존하는 상황이 강하게 드러난다. 양, 염소, 토끼 가죽 그리고 인조 가죽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가죽의 종류와 그 위에 그려지는 이미지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가?

Jang : <가죽 회화> 초기에는 ‘이 가죽의 원래 주인인 동물이 죽기 전에는 좋은 데서 뛰어놀지 않았을까? 사후에는 좋은 곳에 갔을까?’처럼 해당하는 동물이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았을지, 죽은 후에 어디로 갔을지를 상상하면서 그렸으니 연관을 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나름대로는 죽은 동물을 애도하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한 방식이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또한 이야기를 너무 한정적으로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서 나중에는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상관없이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Walk With God> oil painting on lamb skin, 72x53cm, 2016 ⓒ장종완

LEE : 아버지의 수집하신 가죽에 그림을 그린 것이니 작가의 삶과도 연결된다. 아버지의 소장품은 모두 사용했는가? 동물의 가죽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는지도 궁금하다.

Jang : 아버지의 수짐품은 다 썼다. 우리나라의 집 구조가 동물의 가죽을 진열하기에 어울리지 않아 내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창고에 넣어두신 상태였다. 사실 <가죽 회화>를 시작할 때 ‘사람들이 잔인하게 느끼면, 그로 인해 오해를 사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걱정을 했었다. 그래서 개인전에 앞서 그룹전에 출품하며 반응을 보기도 했다. 2012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그룹전 [시니컬 레지스탕스 Cynical Resistance]에 이 작품을 처음 발표했었는데 그곳에서는 자연스러운 문화의 부분이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에도 특별히 부정적인 반응이 없어서 조금씩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한 게 2011년인데 국내에 정식으로 발표한 것이 2017년의 개인전 [오가닉 팜 Organic Farm]이다. 가죽을 구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계속 고민하느라 늦어진 것도 있다. 2017년 당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내가 걱정한 만큼은 아니었다. 관련해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 어떤 관객이 다가와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데 가죽 가방을 메고 있었다. 똑같은 가죽인데 형태의 차이로 다르게 대하는 상황이 흥미로웠다. 이 작업의 진짜 이야기는 이렇게 생성될 수도 있겠다 싶었던 순간이다. 똑같이 동물의 가죽인데 그것이 옷이나 가방, 신발의 형태를 할 때는 잔혹함을 못 느끼다가 동물의 형태가 보이고 털이 보이니 무섭고 잔인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죽 회화> 작업을 하면서 인간이 엄청난 희생을 누르고 그 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도덕적인 딜레마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하고 있다.

LEE : 아버지의 수집품을 다 사용한 뒤에는 인조 가죽만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인조 가죽을 사용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후에도 동물의 가죽을 사용했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Jang : 인조 가죽에는 실제 가죽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서늘한 그림자가 없다. 인조 가죽은 레이어 하나를 덧씌우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LEE : 가죽의 원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가? 아니면 작품을 위해 일부 가공하는가?

Jang : 원래 형태를 거의 지키지만, 가죽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가죽을 구매해 동물 모양으로 가공한 것도 있다.

LEE : 곰이 신경 쓰이는 동물이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¹⁾ 그 이유는 무엇인가?

Jang : 곰은 나의 어릴 때 별명이다. 조용히 참는 성격이라 식구들이 곰 같다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이야기도 만들게 되었다. 또 최상급 미식 재료로 쓰이는 곰 발바닥이나 정력제로 소문난 웅담을 탐하는 인간들에게 희생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워 많이 그렸다. <Please Wait Until I Have Finished>(2017)도 여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시원하게 분출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붓질로는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곰 발톱으로 캔버스를 찢은 것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One More Jelly> acrylic gouache on Korean paper, fake fur, 2020 ⓒ장종완
<Please Wait Until I Have Finished> oil painting on torn linen with cow hide rug, wood, resin, Painting: 130.3x194cm, Cow hide rug: 172x151cm, 2017 ⓒ장종완

LEE : 곰뿐만 아니라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이 있는데 그와 같은 동물들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Jang : 시기마다 많이 그리는 대상이 있다. 한동안 황소개구리의 흥망성쇠 이야기에 꽂혀서 개구리를 많이 그렸다. 개인적으로 과거에 잘 나가다가 몰락한 것들에 관심이 많다. 또 앞서 말했듯 설치류도 많이 그렸고, 초기작에는 알비노 동물도 자주 등장했다. 사람들이 성스러운 길조라 여긴 동물이지만 사실 생태계에서는 도태된 것들이다. 난 이런 이중적인 것이 재미있다. 인위적으로 교배해 부자연스러운 잡종인 라이거(liger)도 있다.

LEE :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프롬프터 Prompter](2021)와 관련해 “국제 정치 담론 현장을 보면 치열하게 짜여 있는데 그게 연극적으로 느껴졌다. 표면적으로는 정의로워 보이지만 이해관계에서 치열하게 짜고 치는 것들이 그랬다.” ¹⁾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정치를 비롯해 인간 사회의 많은 것들이 각본대로 준비된다. 이를 “짜고 친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전 조율과 준비를 거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개인과 공동체는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자기의 이익이나 지향을 성취하길 원하기 때문에 사전 조율은 불가피하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이 전체를 위한 것처럼, 한 집단의 입장이 정답인 것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풍자적으로 담아내는 작가라면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대안을 갖고 있을 것 같다.

Jang : 인용한 인터뷰에서 초점은 ‘연극적’이란 단어이다. 워낙 국제 뉴스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가의 거주지, 회담장의 모습에 관심이 많아서이다. 그러한 장소에 놓인 그림과 조각, 그 외의 사물들을 보면 국가마다 양식이 다르다. 정치 회담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소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다. 그것을 전시장에 가져와서 풀어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프롬프터]의 시작이었다. 정치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는데 당시 정치 이슈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어떤 지점에 흥미가 있었는지 기대만큼 이야기되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풍자의 의미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순수하게 미술적인 영역에 집중했다. 해당 공간의 미장센들이 정치인이나 회담을 극적으로 만들어주고 아우라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종교화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Prompter]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전시 전경, 2020 ⓒ장종완

LEE : 배변 훈련용 유아 변기나 동물이 그려진 담요로 만든 국기 때문에 정치적인 풍자가 더 부각된 것 같다.

Jang : 유아용 변기는 ‘회담장에도 화장실은 있을 텐데 그곳의 화장실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고 상상하다 크기가 작아지면 묘하게 우스꽝스러워지는 느낌이 날 것 같아 가져다 놓았다. 정치적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아직 미성숙한 아이가 사용하는 변기가 놓이는 상황이 블랙 코미디적 정서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있다. 이런 방식의 작업이 앞서 말했던 등급놀이에 해당한다. 권위 있는 것을 부드럽게 추락시키는 동시에 훈련용 배변 변기를 승급시킨 것이다.

LEE : 작업에 구체적인 대상이 등장하기 때문에 직설과 은유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물론 나에게 장종완의 작업은 충분히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다.

Jang : 은유적이고 추상적인 미니멀한 회화 작업을 하는 나를 상상하곤 하는데, 늘 반대되는 느낌의 작업이 나온다. 나는 구상 속에서 추상을 찾아야 할 것 같다.

LEE : 색연필 회화들을 보면 2015년도 이후 유독 밝고 가벼운, 빛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색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이유는 무엇인가?

Jang : 의도한 것은 아니다. 연도마다 색감 팔레트가 바뀐다. 초기에는 형광빛이 많이 도는 레몬옐로우나 에메랄드그린 같은 색을 많이 썼는데 2015년에 들어서며 흐려졌다. 당시에는 못 느꼈고 1~2년 지난 뒤에 알았다. 반대로 2018년과 2019년 초까지의 작업은 심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전시가 많지 않아서였는지 색감이 어두워졌다.

LEE : <Heartwarming Stories>(2014)에서는 「심청전」이나 「토끼의 간」이 떠오른다.

Jang : 맞다. 토끼가 간을 꺼내주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나는 전해오는 이야기나 신화를 좋아한다. 기업 신화도 좋아한다. <Heartwarming Stories>의 경우 조악한 조형물을 내 스타일로 바꾼 것이다.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연꽃 위의 심청, 인삼, 사과와 같은 특산물, 각종 동물의 조형물을 많이 보게 된다. 내가 조악한 놀이공원에 흥미를 느끼는 것과 같다.

<Scene 2: The Ending Was Pretty Obvious> acrylic gouache on Korean paper, 145.5x112cm, 2021 ⓒ장종완
<His Jacket Was Stuffed With Dandepuff> 194x130.5cm, 2021 ⓒ장종완

LEE : 그러고 보니 인삼이 자주 등장한다. 버섯, 브로콜리 등도 그렇다.

Jang : 슈퍼푸드로 선정되서 사람들이 열광하며 먹던 음식이다. 나는 슈퍼푸드가 실제 효능보다 과대 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삼의 경우 인간의 형상을 닮아 더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다. 슈퍼푸드는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이다. 그래서 유행하던 음식을 계속 찾아 그리고 있다. 최근에는 밀크 시슬(엉겅퀴)을 그리고 있다.

LEE : 어떤 음식이 슈퍼푸드로 지정되는 것에는 의학적인 지식 외에 경제적인 논리도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슈퍼푸드로 지정된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Jang : 아보카도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이후 멕시코에서는 마피아들이 아보카도 농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이 두리안을 좋아하자 태국의 모든 농장이 두리안을 키워 부작용이 생겼다. 단순히 몸에 좋다, 나쁘다의 의미를 넘어 다양한 이권이 걸려 있다. 나는 무언가가 유행했다가 사그라드는 현상에 관심이 많은데 이런 현상은 음식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웰빙(well-being) 이후 소소하게 행복한 삶을 뜻하는 휘게(hygge)가 유행했다. 라이프 스타일조차 강요당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북한의 바위산에 새겨진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란 글자를 ‘휘게’로 바꾼 <Hygge>(2019)를 그렸다.

LEE : <팬데믹 별자리>(2020) 시리즈에 그려진 별자리는 실제 별자리의 형상에 근거한 것인가?

Jang : 아니다. 내가 만든 별자리이다. 나는 원래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바로바로 반응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워낙 세다 보니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코로나19의 숙주로 지목되었는데 사실은 사람들이 식용으로 많이 먹어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 팬데믹 때문에 동물원이 폐장되어 쓸쓸히 죽어간 동물 등을 그리게 되었다. 처참한 사건들을 우아하게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LEE : 평상시에 즐겨 찾아보거나 영향을 받은(미술, 문학, 영화 등) 예술가가 있는가?

Jang : 작업 초반에는 악동 같이 장난치는 것 같은 작업이 좋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을 좋아했다. <Love>(2004)를 비롯한 김홍석 작가의 작품도. 또 『변신 Die Verwandlung』(1916)이나 『소송 Der Prozeß』(1925) 같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영화는 조금 다른데 주성치의 영화처럼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코믹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다.

LEE : 머리를 식힌다고 말하지만 주성치 영화는 장종완의 작품과 정서가 비슷하다. 주성치의 영화 중 <도학위룡 逃學威龍>(1991), <소림축구 少林足球>(2001), <서유기 西遊記> 시리즈 등을 봤는데 기상천외하게 사람을 웃긴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2005)를 추천한다. 원작 소설도 워낙 유명하지만 영화의 도입부가 정말 인상적이다. 이번에 장종완의 작업을 다시 보며 개인적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의 『사이버리아드 Cyberiard』(1965)를 떠올렸다. 장종완의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와 비슷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Jang : 주성치의 영화에는 너무 재미있는 발상이 많다. 진짜 예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번뜩임이 있다. 예전에 작업할 때 영향받았다.

<F20180004> acrylic gouache on match box, 8x5x2cm, 2018 ⓒ장종완

LEE : <성냥갑 회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F’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냥갑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불을 켠 뒤 금방 꺼진다는 것(소멸)과 연결되는가?

Jang :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듣고 보니 금방 꺼지는 불, 휘발되고 사라지는 불이라는 게 나의 작업 내용과 잘 맞는 것 같다. 성냥갑을 선택한 것은 과거에 많이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쓰지 않는 것들을 향한 관심 때문이다. 지금은 잊힌 것들을 가져와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캔버스가 될만한 재미있는 것들을 늘 찾고 있기도 하고. 가죽 작업도 그렇고 나는 복고풍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성냥갑은 따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표면을 갈아서 그림 그릴 수 있게 만들었다. 기성품을 해킹하듯 사용하는 게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다. ‘F’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Fire’의 약자이다.

LEE : 애니메이션 작업에서 로토스코프(rotoscope), 스톱 모션(stop motion) 기법 등을 사용했는데 그 외에 시도할만한 애니메이션 기법이 있다면?

Jang : 앞으로도 두 기법을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다. 다만 조금 더 회화적으로, 더 거칠어 보이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LEE :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Take A Walk>(2013)는 그 전개나 음악 등에서 <판타스틱 플래닛(The Savage Planet)>(1973)을 생각나게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혹은 주목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있다면?

Jang : <판타스틱 플래닛>은 나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얀 슈반크마이크마이에르(Jan Svankmajer)를 많이 좋아했었다.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의 대가이다.

LEE : 애니메이션에 사용하는 음악 선정은 어떻게 하는가?

Jang : 저작권의 문제도 있고 다양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마음이 맞는 음악가가 있으면 부탁하기도 하고 개러지밴드(GarageBand)를 이용해 내가 만들기도 한다. <Take A Walk>의 배경 음악도 내가 만들었다. 예전에 음악이 마음에 들어 작곡가에게 사용 허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다.

<Under The Red Roof> stop motion, 3분 37초, 2020 ⓒ장종완

LEE : <Under The Red Roof>(2020)는 어떤 내용인지 설명을 듣고 싶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꽤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Jang : <Under The Red Roof>는 내 딸이 갖고 놀던 장난감을 이용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막 작업을 시작했던 사회 초년생 시기 전시 오프닝이나 결혼식 같은 행사를 가면 모든 게 낯설고 생소했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빛과 약간 과장된 듯한 미소가 쉴새 없이 교차되고 삼삼오오 모여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삭이는 장면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당시 느꼈던 무서움 등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장난감 가게를 가면 아직도 백인, 공주와 왕자 인형이 많다. 인형 회사들이 과거보다 획일화된 체형을 벗어난 인형, 동양인이나 흑인 인형을 많이 만들고 있다고 하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어 보인다. 또 아이들도 백인의 전형적인 미의 기준이라 여겨지는 것을 따른 인형을 선호한다. 이런 상황을 비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형의 얼굴을 일부러 괴상하게 꾸몄다.

LEE : <Yesterday>(2017)의 한숨 소리는 작가가 낸 것인가?

Jang : 내 목소리이다. 작업의 실패나 좌절의 경험을 희극적으로 승화시키고자 만든 작업이다. 당시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 날 일어나 전날의 행동을 후회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나의 경험을 환기시키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업을 보고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많아 기분 좋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LEE :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는데 앞으로 영상, 애니메이션 작업의 비중이 커질 가능성은 없는가?

Jang : 그동안 전시가 없는 시기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왔다. 아무래도 물리적 노동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위 비수기의 마음 산란함과 힘듦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음 비수기가 오면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고, 생각해놓은 아이디어도 있다. 나는 작가에게 비수기가 필요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작업이라도 계속 노출되면 피로도가 높아질 것이다. 또 수면 아래로 들어가 작업을 연구할 시간도 필요하다. 작년과 올해 너무 바쁘게 보내서 조용히 작업만 하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LEE : 최근 흥미로웠던 이슈나 이미지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가?

Jang : 팬데믹이나 기후변화로 기존의 패권 국가들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질서가 생기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 재미있다. 어떻게 재편되고 흘러갈지 이후의 일이 궁금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아마도 내가 흥망성쇠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이런 상황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