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07. / 2021. 09 .29.

본 글은 2021년 5월 25일(화), 2021년 9월 10일(금)에 진행된 이문정과 최하늘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최하늘 Choi, Haneyl

LEE : 이문정, Choi : 최하늘


LEE : 그동안 글을 꽤 많이 쓰고 발표했다. 『로버스트 제어/벤타블랙』 (2019)도 흥미롭게 읽었다. 글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글을 완성하는지 궁금하다.

Choi :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시절 안규철 선생님이 지도교수셨는데 그때 안규철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것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실제로 나에게 글쓰기 연습도 많이 시키셨다. 당시에 현시원 큐레이터의 수업도 들었는데 역시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글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 첫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쓰는 편이다. 그다음 마감기한까지 시간을 두고 여러 번에 걸쳐 다시 읽으며 수정한다. 물론 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다. 아무래도 작업에 관한 스테이트먼트는 신경 써서 수정을 많이 하게 되고, 에세이는 수정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로버스트 제어/벤타블랙』 의 경우엔 처음 썼던 글을 거의 손보지 않고 출간했다.

LEE : 「로버스트 제어」 에는 화자가 최하늘이라는 작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소설의 뒷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인가? 또 “전시들마다 어떤 교집합은 분명히 존재하긴 해. 그건 명백한 증거로 남아 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교집합이 점점 정교해진다기보다는 전체의 맵이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¹⁾라는 표현에 공감했다. 최하늘의 작업은 손에 잡힐 듯한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이다.

Choi : 『로버스트 제어/벤타블랙』 은 한 해에 진행되는 전시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를 보는 큰 그림, 마스터플랜이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쓴 것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있다는 단서를 주는 글이었다. 그래서 작가의 입장이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마치 관객인 것처럼 연기하며 적었다.

LEE :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발표했으면 좋겠다.

Choi : 그동안 여러 지면에 발표했었는데 다른 필자들과 학식 차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앞으로 공부를 더 해야겠지만 글쓰기를 중단하진 않을 것 같다.

<최하늘, 형식을 창조하는 자 Choi haneyl, The creator of form_standard>
110x55x183cm, 다양한 재료와 47 캡, various material, 47 cap by ssstpn 2020 ⓒ최하늘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 Choi haneyl, The destroyer of form_bulky>
110x55x183cm, 무거운 다양한 재료, various material, 2020 ⓒ최하늘

LEE : <최하늘, 형식을 창조하는 자>(2020),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2020)의 ‘형식’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형식일 수도 있고 작가가 만든 형식일 수도 있다. 예술가에게 ‘형식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자’라는 표현은 최고의 찬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Choi : <최하늘, 형식을 창조하는 자>,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뮤지엄헤드(MuseumHead)의 전시 [나메 셀프메이드 Name: self-made](2020)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형식을 새로 만들거나 과거의 형식을 파괴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작가라 생각한다. 나 역시 내용보다는 형식 위주의 탐구를 진행하고 있어서 그런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그와 같은 제목을 짓게 되었다.

LEE : 현재의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지향하는 바를 밝힌 것이라 해도 앞으로 그렇게 갈 것이라고 강하게 선언하려면 믿음과 자신감이 필요하다.

Choi : 그것이 쉽게 가능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작업할 때 핵심적인 목표로 놓는 것이 형식에 대한 부분이고, 당장 이룰 수는 없으나 과제를 설정해두고 앞으로 탐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었다.

LEE :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에 사용된 ‘무거운 다양한 재료’는 무엇인가?

Choi : 나처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작가의 경우 조각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모든 재료를 캡션에 적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작가가 ‘혼합매체, 혼합재료’, 이런 방식을 선택한다. 그런데 캡션도 나에게 주어진 일정한 공간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혼합재료라고 적는 게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2018년부터 재료마저 마치 제목처럼 관객들에게 힌트가 될만한 혹은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방식으로 쓰고 있다. 물론 국공립미술관의 경우에는 관객들의 이해를 위해 재료를 그대로 써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표기가 가능한 경우에는 그와 같은 방식을 유지한다. [나메 셀프메이드]에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재료를 표기할 수 있었다. 사실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에서 사용했던 재료는 비교적 가벼웠다. 완성된 작품을 내가 혼자서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관객들이 현장에서 조각을 만져볼 수 없고 캡션만 보고 유추하는데 그것으로 한 번 장난을 쳐봐야겠다는 생각에 반대로 적었다.

LEE : 캡션도 하나의 형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Choi : 그렇다. 내가 작업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는데 나는 단일한 재료의 탐구가 목표인 조각가가 아니다. 작품마다 정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LEE : 본인을 “천부적인 감각을 탑재한 작가”²⁾라 생각하는가? 작가의 작품을 보고 글을 읽으며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Choi : 그 반대라 생각한다. 왜냐면 나는 내 감각을 믿지 못해서 작업 과정이 늘 복잡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로잉을 많이 하고, 그것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나의 작업 방식이었다. 감각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나에게 불안함을 준다. 평면 작업은 자신이 구현한 드로잉과 실제 작업이 거의 같게 나올 수 있지만, 입체 작업은 드로잉으로 전체 면을 다 그릴 수 없다. 그게 입체 작업의 특징이기 때문에 치밀하게 여러 각도를 드로잉하고 조각을 제작했었다. 기획자나 평론가들이 드로잉과 완성된 작품이 너무 똑같아 놀랠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작업 방식을 조금 바꿔 타고난 미감이나 감각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천부적인 감각을 탑재한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작가가 얼마나 조사하고 연구하는가에 따라 계속 갱신되는 것 같다. 평상시에 다른 작가들의 전시를 많이 보는 편인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전시의 완성도이다. 이를테면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전시를 어떻게 구성하고 공간을 어떻게 구획했느냐를 중점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런 부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시의 맛을 낼 줄 아는 사람과 맛을 낼 줄 모르는 사람. 나는 그것이 타고난 감각이라기보다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공부하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 많이 노력하고 있다.

LEE : 실패 없이 드로잉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Choi : 언제나 100%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드로잉(평면)이 입체가 될 때 생기는 낙차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느냐의 문제인데, 나는 타협이 싫어 준비 과정에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다 보니 마치 내가 조각가가 아니라 엔지니어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그래서 작업 방식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LEE : 최하늘의 작품은 날 것처럼 보이는 작품조차도 치밀하게 완성된 것 같다. 최근 비계획적인 작업을 진행한다고 했는데, 즉흥적인 조각을 위해 이제는 스케치를 전혀 안 하는가? “재료를 준비해서 미리 즉흥적으로 자르고, 그것들을 즉각적으로 직조해나가면서 기대하지 않은 우연적인 효과를 노리는 전략”³⁾이라지만, 작가에게 축적된 그동안의 교육과 경험이 뒤섞인 무언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계획되고 조절될 수 있지 않을까?

Choi : 작업 과정에서 즉흥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완벽하게 개입되지 않는 작품이란 사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여야겠다고 늘 고민했고, 진짜 즉흥적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작품도 계산하고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서 완성해 왔다. 작업 방식을 바꾼 뒤 참여한 원앤제이갤러리(One and J gallery)의 [웃,음-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Lau,gh-; Nothing Needs to be a Tragedy](2021)와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lab)의 [내가 그대로 전하자면 Shadowland](2021)에 출품한 작품들은 대부분 스케치 없이 어떤 감각이나 신체성, 물성 등에 조금 더 집중한 것이다. 그 방법론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연성만 있는 작업 방식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완성된 두 점의 조각을 마구잡이로 자르고 즉흥적으로 붙여서 또 다른 조각을 완성하거나 산업 규격 단위의 스티로폼을 하나 구입해 즉흥적으로 조각하고 그때 발생하는 부산물들을 다시 조합해서 조각으로 세우는 식이다.

가변크기, 2021, [내가 그대로 전하자면 Shadowland], 2021,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lab) 설치 전경 ⓒ최하늘

LEE : 완벽한 즉흥의 방식이 정말 가능한가?

Choi : 그것은 사실 내가 과거에 두려워했던 방식, ‘내 감각에만 의존해서 작업하다 망치면 어떻게 하지?’란 생각이 드는 방식인데 그 안에서 나오는 어떤 재미가 있어서 즐겁게 진행하고 있다. 물론 계획된 전시에 출품하는 모든 작품에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올해 예정된 두산갤러리에서의 전시 주제가 ‘결여’이다. 참여 작가들이 결여 조건을 설정하고, 그것이 결여되었을 때 어떤 작업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스케치를 결여한 방식을 선택했고, ‘맨 처음부터 아무 구상 없이 조각을 만들면 나는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LEE : 바자(BAZAAR)와의 인터뷰에서 조각은 어디에 놓여도 상관없는 것이고 맥락, 장소의 특정성이 중요하면 설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을 조각가라 칭했다. 한정된 내용을 작업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지만, 자신의 작품이 독립된 조각이라 생각하는가? 때로는 특정한 전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제작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디에 놓여도 상관없는”⁴⁾이 뜻하는 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관련해 최하늘이 생각하는 조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부연 설명도 부탁한다.

Choi : 모든 작가가 그렇겠지만, 입체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경우 작품이 놓이는 특정한 전시 공간과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예민하게 본다. 설치도 오래 걸리고. 나는 특정한 하나의 장소와 작품 사이의 조화보다 작업(군)의 종합적인 완성도에 조금 더 집중하는 편이다. 즉 작품이 해당 공간에서 내가 세운 계획대로 놓이고, 시뮬레이션과 잘 맞아떨어진다면 작품의 각도나 방향의 미묘한 디테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조각 대부분이 그와 같은 맥락에 놓이며, 이것이 설치와 차별화되는 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설치미술이 처음 태동했을 때 작가들은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에서 설치를 발전시켰다.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 안에서는 설치가 추구하는 장소 특정성이 발생할 수 없으므로 화이트 큐브 안에서의 설치는 큰 의미가 없다. 또 현재는 설치를 문자 그대로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 정도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명료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조각, 조각가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작품이 공중에 매달린다고 해서 설치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도 설치의 방법론으로 작업을 진행해본 적이 없다. 어떤 공간에 작품을 설치했다는 의미에서 설치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나의 작품은 단일한 완성도를 가진 단일한 조각이다.

LEE : 특정한 장소의 물리적인 혹은 의미적인 맥락에 긴밀하게 관계 맺지 않는 작품을 설치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재료나 표현법을 벗어났다고 해서 설치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는가?

Choi : 그렇다.

[Cafe_Kontakthof] 2018, 산수문화 설치 전경, 사진: 홍철기(스튜디오 수직수평) ⓒ최하늘

LEE : 최하늘의 작업은 군집처럼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군집 속 개별 작품들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갖는가? 하나하나 개별로 전시되어도 상관없는가?

Choi :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하나의 전시를 위해 작업을 진행할 때 구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것이 꼭 필요한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가장 최소화된 조각으로만 전시하는데 그게 여러 점이 될 때가 있다. 그것들은 한 세트로 한 공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 작품이 따로따로 전시되는 것은 작품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한데 단일한 하나의 조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군상을 이뤄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LEE : 실제로 최하늘의 작품은 한 점이 단독으로 놓일 때보다 여러 점이 함께 할 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개별 작품들 사이의 관계,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 어울림이 남다르다. 조각이라고 하면 입체, 부피, 물성, 그리고 공간 등을 떠올리게 된다. 조각은 실재하는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작업할 때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Choi : 전시 디스플레이 역시 작업처럼 계속 발전하는 또 하나의 매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조각의 전시법보다는 새로운 전시 방식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특히 나는 처음 전시장에 들어와서 바라보는 조각들의 위치, 그리고 걸어 다니며 보게 되는 조각의 모습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소화하려는 것 같다. 조각은 회화와 다른 입체이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어 관객들의 동선을 유발할 수 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해도 현장에서 실제로 작품을 놓고 봤을 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이 되어 놓여 있는 조각을 따라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도 한다. 특히 신장 차이에 따른 시선의 차이 등도 고려해 설치를 완료한다. 관련해 특별한 매뉴얼은 없고 전시장에 조각을 놓고 내가 전반적으로 만족하는가가 중요한데 결국 내 감각이나 취향이 담길 수밖에 없다.

[샴 Siamese] 2020, P21 설치 전경, 사진: 안천호 ⓒ최하늘

LEE : 연극적인 공간을 꾸미는 것 같다.

Choi : 내 전시 디스플레이와 관련된 주된 관심사는 그 지점에 있다. 공연예술이 보여주는 시점들, 관련된 학자들의 연구가 참 흥미로워 작품에도 응용하고 있다. 내가 유독 전시장을 마치 연극적으로 하나의 풍경처럼 인식했을 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시장의 조각들이 한 눈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한편으로 조각을 하는 사람이 이런 입장을 가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의심도 하고 있다. 이건 내 눈에 들어온 이미지를 입체가 아니라 평면적으로 인식한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고민하고 있다.

LEE : 조각가이지만 작업 과정에서 그런 인식의 과정이 있는 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Choi :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긴 하다. 머릿속에 조각을 떠올리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생각해보면 3D보다 2D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맞다. 따라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할 때 어떤 정지된 이미지를 구상하고 거기에 맞춰서 입체화하게 된다. 다만 내 목표 중 하나가 조각가적 사고를 탑재하는 것이다. ‘3D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상용화되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머릿속에서 입체로 인식하는 게 원활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서 나 역시 그런 시뮬레이션 훈련을 계속하려고 노력 중이다.

LEE : 조각에서의 연극성을 생각하면 자연히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를 떠올리게 된다.

Choi : 나는 모더니즘 조각이 여전히 모더니즘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2021년 서울에서 작업하는 내가 모더니즘 조각을 리부트할 때 어떤 방식을 사용할 수 있을지가 나의 연구 대상인데, 그 과정에서 계속 다양한 연습을 하는 것 같다. 마이클 프리드의 연극성이라든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d Krauss)의 과거의 조각에 관한 연구를 숙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지상과제로 주어지진 않는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참고가 되고 전유할 대상이 되는 것뿐이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 촉의 난초 2 캔버스에 바둑알로 그린 난초/ 좌대 위 레고로 만든 난초/ 족자에 프린트된 픽셀 난초> 캔버스 크기 90x90㎝/ 좌대 크기 20x20x160㎝/ 족자 크기 85x95㎝, 가변설치, 2016 ⓒ최하늘

LEE : ‘난초, 일필휘지’ 등에서 동양화, 조선 시대, 문인화, 문인, 유교 등이 떠오른다. 전통적인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인가?

Choi : 그렇다. 나는 새로운 형식을 찾는 미술가의 작업에 전통,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것들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 그것을 어떻게 현대화시킬 것인지, 과거의 전통들을 어떻게 재맥락화할 것인지가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관심사는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LEE : 이와 같은 요소를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신과 내면을 강조한 시대, 우아한 영역, 가부장적 사회를 비틀기와 같은 의도가 있는가? 또 ‘일필휘지’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일필휘지에서 즉흥성, 우연성이 강조되는 것 같지만 그 순간까지도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숙련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알고 있다.

Choi : 나는 난초의 형상 자체보다는 그와 같은 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조금 더 흥미가 있었다. 과거 사대부들은 난초가 자신들의 내면을 담아낸다고 여겼다. 한 획을 칠 때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여러 훈련을 거쳐 난을 쳤고, 그것은 문인화 정신의 표상이었다. 나는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난초가 갖는 위상에 딴지를 좀 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초는 그냥 규칙화된 그림이야. 사실 별것 없어’라는 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내 관심사를 지속하면서 난초에 대한 관심도 게이로서 갖는 반골 기질에서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난초가 갖는 전통적인 맥락이나 위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편 일필휘지는 난초보다 더 상급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나는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필휘지 조각>(2015) 등에서 일필휘지로 재료를 잘라 배치하고 ‘이건 우연히 나온 모습이야’라고 이야기했지만, 자세히 보면 내가 연필로 테두리를 그리고 그대로 자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일필휘지라는 것을 허구라고 느꼈으면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난초와 같은 맥락이었다.

<일필휘지조각_4(8)폭 병풍<희설7gt;> 각목 MDF 합판으로 만든 병풍에 스티로폼 등, 190x60x164㎝, 2016 ⓒ최하늘

LEE : <세 촉의 난초 1>(2015), <세 촉의 난초 2>(2016), <세 촉의 난초 3>(2016), (2019) 등에서 난초의 형상을 만들 때 참고한 작품이 있는가?

Choi : 난초와 관련해 특별히 참고한 작품은 없다. 어렸을 때,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동양화를 배웠다.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군자도 입시 미술처럼 공식이 있다. 난초의 경우 봉황의 눈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 깨뜨리는 파봉(破鳳)의 선을 긋는 식이다. 그런 도식화된 규칙을 주제로 삼아 작업했다. 나는 난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총 7획을 기본 형상으로 하는 난초를 가져왔다.

LEE : 병풍은 전통 회화 작품을 안전하게 보관, 전시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동시에 공간을 점유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평면이면서 입체라고 볼 수 있다. 매력적인 형식이다. 병풍의 형식을 이용한 작품이 다수인데 어떤 의도가 담긴 것인가? 참고로 <휘호조각군 공중에 휘갈긴 먹물>(2017) 등도 회화와 조각의 중간 어딘가를 상상하게 한다.

Choi : 병풍의 내용적인 측변보다는 형식적인 측면, 즉 매체로서의 병풍에 관심이 많았다. 그 지점이 내가 주로 탐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회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조각도 아닌 경계의 상태에 있는 매체들이 나에겐 늘 흥미롭다. 그 역시 이성애자냐, 게이냐, 그 입장에 있는 나의 정체성과 맞물려서 조금 더 흥미가 증폭되는 부분이 있다. <휘호조각군 공중에 휘갈긴 먹물> 역시 어떻게 하면 평면인 동시에 조각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나온 결과물이었다.
병풍에 대한 작업이 <입체병풍 No.5>(2018)로 일단락되면서 한동안 병풍에 대해 크게 탐구를 하지 않고 있다. <입체병풍 No.5> 이후엔 요즘 나오는 모니터 중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구부러져 있는 제품을 보면서 병풍을 저렇게 꺾으면 입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커브드 병풍 No.1 Curved Folding Screen>(2018)을 만들었다.

<커브드 병풍(No.1) Curved Folding Screen 아파트지옥4폭(1-4폭) 휘어진 병풍과 불타는 아파트(각자 분리되어 버티는 중)> 정해진 크기 없음, 2018 ⓒ최하늘​

LEE : <입체병풍> 시리즈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Choi : <일필휘지 조각 신풍경>(2015)으로 <입체병풍 No.1>을 대신했고, 처음으로 시도했던 입체병풍이 시청각에서의 전시 [2X2](2017)에서 발표한 <입체병풍 No.2>이고, 합정지구에서의 개인전 [NO SHADOW SABER](2017)에서 보여준 것이 <입체병풍 No.3>(2017)이다. 버전이 올라갈수록 매체적 완성도를 보충하려고 했다. <입체병풍 No.3>의 경우 누가 봐도 입체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산수문화에서 했던 개인전 [Cafe_Kontakthof](2018)의 <입체병풍 No.4>(2018)는 ‘도대체 이것을 병풍으로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 해체되었다.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의 전시 [BEYOND THINKING: 생각을 넘어](2018)에서 보여준 마지막 버전인 <입체병풍(no.5)(Final Form)_일출경 설산 사이로 떠오르는 해>(2018)에선 평면과 입체, 영상까지 담고 있는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려 했다.

LEE : 작가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한국적인 것(한국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최하늘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Choi: 계속 갱신되는 개념이라 생각한다. 한국적인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내 정체성과 관련해 하나(의 민족)를 중요시하며 다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강력하게 작동하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한국성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데, 이를테면 케이팝(K-pop)이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팝을 하나로 섞어서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에 주목하며 한국성을 탐구하고 있다. 나는 고전적인 건축이 한국적인 이미지라 거론되는 것보다 BTS(방탄소년단)라고 하는 그룹이 어떻게 한국을 이미지화하는지에 조금 더 관심이 많다.

LEE : BTS의 <2018 멜론 뮤직 어워드 Melon Music Awards, 2018 MMA> 공연을 보고 놀라 BTS에 관한 책을 읽고 조사했던 적이 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Choi : 팝을 놓고 볼 때 변방의 나라에 있던 그룹이 주류로 여겨지던 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었는데, 그들이 주류의 벽을 깨기 위해 주로 사용한 방식이 한국성이었다. 이제 한국성의 맥락은 조선에서 시작된 깔끔한 미감뿐 아니라 과거의 것(전통)을 자기들 마음대로 버무려서 합칠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한다.

<위태롭지만 안정적인 정물화 이미지 사과 등 각종 정물> (원본의 크기)85x85(cm), 2017 ⓒ최하늘​

LEE : <위태롭지만 안정적인 정물화 이미지>(2017)는 세잔(Paul Cezanne)을 염두에 둔 것인가? 관련해 작가가 탐구하는 원근법은 고정된 낡은 시각 체계를 조각으로 해체하고, 주체(보는 자)와 타자(보이는 대상)가 명확히 분리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Choi : 맞다. 세잔의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Basket of Apples>(1895)을 3D 전문가에게 의뢰해 입체로 제작했다. 이 작품은 여러 시점에서 정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앞에서 봤을 때 세잔의 그림과 똑같은 입체물을 만들면 옆에서 봤을 때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내가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전시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부터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대표적 방식으로 원근법이 소환되었다. 원근법에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보기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 전의 원근법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상징적 차원에서 직선적이고, 진보를 향해서 앞으로 나가면서 원근법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소거하는,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라고 할만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해체하면서 새로운 보는 방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민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스스로 만들어서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LEE : <무협극 ‘생량(生凉)’ 오프닝>(2015), <표본 채집을 위한 고문대>(2017) 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Choi : <무협극 ‘생량(生凉)’ 오프닝>은 서울대학교 졸업전시 때의 작업인데 무협극에서 클리셰적으로 등장하는 시각효과들을 모아놓은 4분짜리 영상이다. 영상이 나오는 모니터 뒤에 놓인 또 다른 작은 모니터에는 전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를 찍는 CCTV 영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생량(生凉)’촬영소 폐쇄회로 영상>-, 영상의 시청각 효과를 내기 위해서 제작했던 기능 조각들도 전시장에 모아 놓았다. 당시 조각과 기능의 관계에 관심이 있어 조각에 기능을 부여했던 작업이다.
<표본 채집을 위한 고문대>는 전시 [NO SHADOW SABER]의 핵심 주제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각은 대상을 표면, 2D로만 인식하지 않으니 마치 MRI처럼 내부 단면을 인식해서 형태를 프로그래밍,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조각을 만든 뒤 그것을 잘라 표면을 채집하기 위해 판에 붙여놓은 것으로 조각가의 훈련법을 보여주는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LEE : 제목과 작품 정보 뒤에 또 하나의 제목처럼 등장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제목을 적을 때 그 부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가? 중간에 재료를 비롯한 다른 정보가 있어서 쓰기가 참 애매하다.

Choi : 제목도 재료도 아닌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제목, 크기, 재료, 연도처럼 기존의 캡션을 벗어난 나만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고 싶었다. 표기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이긴 하다. 나는 제목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제목이 꼭 고정될 필요는 없고 상황에 따라 바뀌어도 된다는 주의이다. 그건 보는 사람이 결정하면 되는 문제인 것 같다. 나 역시 상황에 따라 작품 제목을 묘하게 바꿔서 적는다. 나의 조각이 불변하는 고정된 이미지를 갖기 때문에 제목이 조금씩 바뀌는 것은 상관없다. 오히려 제목이 고정되어 있어 발생하는 재미없는 지점들이 신경 쓰인다. 그래서 제목을 2~3개씩 붙일 때도 있다. 왜냐하면 작업에 단일한 목표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층이 있고 그에 따라 목표가 매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 위주로 전시를 보는 사람이 있고 형식 위주로 전시를 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 모두에 연관되려 노력하고 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목에도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력을 다해)담는 중 Recording, Reminding, Reacting, 50x50x255cm, 헨리무어스러운, 2019 ⓒ최하늘​

LEE : 제목에서부터 재료, 크기, 연도, “제목도 재료도 아닌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까지를 그냥 하나라 생각하고 적어야 할 것 같다.

Choi : 가능한 경우에는 다 적었다. 다만 국공립미술관 같은 경우는 미술을 처음 경험하거나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표기법이 불친절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적고 있다.

LEE : 제목에 등장하는 마침표 유무의 차이는 무엇인가?

Choi : 이 부분은 나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감에 따라서 움직였던 것 같다.

LEE : 최근작으로 올수록 인간상(처럼 보이는 조각)이 점점 더 많아진다. <민규>(2021), <백석>(2021)처럼 구체적인 인물이 지목되기도 한다. 각각의 작품에 어느 정도로 실제 혹은 가상의 이야기가 담기는가?

Choi : 예전에는 어떤 유형적인 인물을 다뤘다. 예를 들어 게이들 안에 여러 유형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게 재미있었다. 최근에는 실존하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인물들을 조각으로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아트 바젤 인 홍콩 Art Basel in Hong Kong, 2021]에 출품했던 네 점의 작품들은 실존하는 친구들을 만든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만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며 나의 판타지를 뒤섞어서 표현한다.

LEE : 인물상 같은 조각들은 실제 인간 크기에 가까워서 더욱 인간처럼 느껴질 수 있다. 동시에 내 옆에 부피를 가진 무언가가 놓여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작품의 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Choi : 조각의 부피나 크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의 지상목표는 모더니스트 조각가들이 했던 것과 동일하다. 조각이 어떻게 살아 있는 독립된 생명체로 느껴질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이 내 작업의 가장 낮은 차원에서 늘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부피가 비슷한 것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조각가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 크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신장인 183cm 정도를 크기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곧 오픈하는 경남도립미술관의 전시 [황혜홀혜 惚兮恍兮]를 위해 <일필취지 조각_큰 풍경>(2015)을 세로 4m, 가로 9m로 거대하게 제작하고 있다.

LEE : 조각 작품이 상품화되는 것에 부정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떤 의미인가?

Choi : 조각은 조각으로서 탐구할 수 있는 매체적인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소품으로 전락하면 같은 꿈을 꿀 수는 없을 것 같다.

LEE : 소품이라 판단하는 데에 물리적인 크기도 영향을 주는가?

Choi : 그 지점에서 물리적인 크기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조각의 크기에서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우선 한국의 주거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전형적인 모양이 있고 거기에 놓을 수 있는지가 작품 구입을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나는 판매를 위해 억지로 크기를 작게 만드는 것을 피하고 싶은 거다. 물론 단순히 크기만으로 조각과 소품을 나눌 수는 없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작은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소품이라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제 5막 <궁전의 큰 앞뜰>> 다양한 재료, 600x600x600cm(전시장의 크기), 2017, 사진: 동경련 ⓒ최하늘​

LEE : 작품에서 유머러스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심각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유쾌함이다.

Choi : 내 작업에서 유머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볼 때도 유머가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독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 역시도 그렇게 작업하는 것 같다. 갑자기 뜬금없어 보이는 공산품을 사용한다거나 생뚱맞은 제목을 짓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웃기려고 노력한다.

LEE : 형상에서도 웃음이 전달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제 5막 <궁전의 큰 앞뜰>>(2017)은 각각의 조각들이 심각하게 서 있는 것 같은데-매우 인물처럼 느껴져서 그들의 표정까지 보이는 것 같다.- 왠지 귀엽기도 하고 허술해 보이기도 했다. <총 4개의 제목 1)조작조각_진보의 재조정: 리듬체조 대서사시 2)You will see her, but Do not say ‘Her’ in front of her. 3)타자가 주류를 뛰어넘은 획기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비기념비 4)35부작 발레_발레가 뭐야? 시간을 저당 잡힌 춤추는 사람.>(2019)을 보고도 웃음이 났다. 최근으로 올수록 유머러스함이 강해진 것 같은데 본인의 작품이 전달하는 유머는 어떤 의미인가? 고착된 규범과 권위를 깨뜨릴 수 있는 저항의 도구로 웃음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Choi : 내용이 완전히 소거된 모더니즘 조각이 갖는 어떤 지루함이 재미없게 느껴지고 순수하게 조형만 탐구하기에는 아직 내가 조형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을 때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었다. <제 5막 <궁전의 큰 앞뜰>>의 경우 형상들이 다른 작품과 비교해 유독 허술하다. 구체적인 형태를 재현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느낌과 재료의 감각만으로 그런 것들을 전달하길 좋아하는 나의 성향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전시 당시에도 사람들이 재미있어했다. 드랙(drag)적이라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다. 최근 들어서 조선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데 고유섭의 ‘구수한 큰 맛’에 나의 작업이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LEE : 작품을 칭할 때 의인화가 아니라 조각종(種)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Choi : 의인화라는 말이 나의 조각에 완벽히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다른 형상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다른 용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의인화는 키네틱(kinetic) 조각을 하는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인데 나는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눈 깜짝할 새 In a Flash] 2020, 일우스페이스 전시 전경 사진, 사진: 일우스페이스 ⓒ최하늘​

LEE : [눈 깜짝할 새](2020)에 전시된 작품들은 2019년 제작되었던 것인데 복면, 티셔츠, 모자 등이 사라지고 제목도 바뀌었다. 이전과는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Choi : [눈 깜짝할 새]는 나에게 특별한 전시였다. 2019년 말과 2020년 초 두 가지 전시가 약속되어 있었고, 나는 처음부터 하나의 조각 군집을 두 가지 버전으로 나눠서 각각 전시하겠다고 계획했다. 조각이 정치적인 문구가 프린트된 티셔츠나 모자 등을 장착한 상태를 이라 칭했고,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이라고 칭해서 각각 전시했다. 뮤직비디오에서 더티 버전 혹은 보컬 클린 버전 등으로 나누는 방식을 조각 차원에 적용했다. 의복이나 소품을 입고 있을 때는 관객들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내용에 집중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형식(조각과 매체 자체)에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다.

2019 ⓒ최하늘​

LEE : <내라! Do not turn away from the Truth 한열이 혹은 피에타>(2019)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론다니니의 피에타>(1556-1564)를 염두에 둔 것인가? 미술사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홈비디오 #43_미디어시티 나들이(2056년 9월)>(2018)에도 익숙한 작품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보인다. 남다른 의도가 있는가?

Choi : <론다니니 피에타>와 민중미술인 <한열이를 살려내라>(1987), 두 작품을 참조했다. 나는 과거의 작품을 가져와 내가 바꾸는 오염의 전략이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나에게 공부가 많이 된다. 이런 방법론으로 특정한 목적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없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박찬경 작가의 <작은 미술사>(2014/2017)를 흥미롭게 보았다. 한국 근대사에서 탈락한 무속신앙으로 작은 미술사를 만든 작업이었다. 이후 내가 기르는 조각 종(種)이 2056년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Seoul Mediacity Biennale]를 보러 갔을 때, 전시장에 내가 구성한 조형작품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좋은 삶 (Eu Zên)]에 서구 조각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들과 내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작품들을 더해 작은 조각사를 만들었다. 만약 당시 내가 한국 조각사에 관심 있고 공부를 한 상태였다며 한국 조각사로 그 전시장을 꾸몄을 텐데 당시에는 한국 조각을 잘 몰랐다. 최근 들어 해방 이후, 해방 직전의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과거의 조각가들이 불상에 관심을 가졌고 한국의 전통 양식에서 조각적인 것들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지 등을 연구했다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던 시간만큼 꼭 조각이 아니더라도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LEE : <세쌍둥이의 첫돌>(2018)에 등장하는 세쌍둥이 조각은 추상 조각의 역사에서 선정된 작가 세 명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 세 작가는 누구이며, 어떤 작품들을 바탕으로 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Choi : 장 아르프(Hans Arp/ Jean Arp), 나움 가보(Naum Gabo), 솔 르윗(Sol LeWitte)이었다. 특정 작품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고 작풍을 따라 만들었다. 셋 모두 굉장히 모더니즘적인 고민을 했던 작가여서 선정했다.

LEE : 모더니즘 이전 조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Choi : 현재는 크게 관심 가지 않는다. 고대나 중세의 조각들이 나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고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이 될 때가 있는 건 맞지만 아무래도 나는 조각이란 매체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모더니즘 조각을 향하게 된다.

LEE : ‘창조자가 아닌 양육자로서의 조각가’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예술가 역할의 전통을 비켜 가고, ‘양육’이라는 단어는 고정된 성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양육자로서의 조각가는 어떤 조각가인가?

Choi : 나는 창조자와 양육자 둘 다 역할 체험극이라고 생각했다. 모더니즘은 창조자, 포스트모더니즘은 양육자, ‘creative’와 ‘caring’의 개념으로 구분하고,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아우르는 작업을 해보겠다 선언했던 작업이다. 당시 육아라는 개념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또 내가 게이이고 결혼이나 출산과 거리가 먼 상태에서 조각으로 판타지를 구현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웃,음-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Lau,gh-; Nothing Needs to be a Tragedy] 2021, 원앤제이갤러리(One and J gallery) 설치 전경, 사진: 원앤제이갤러리 ⓒ최하늘​

LEE : 2018년부터 형식과 내용(내러티브) 모두에서 Q컬쳐, 퀴어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블로그에 적은 글 “내용과 형식으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는 토양에 양발을 걸치고 이종을 만들어내는 퀴어 조각가. 이제는 그 균형, 그러니까 조각을 만드는 것과 퀴어의 내용을 담아내는 그 예민하게 계산된 선을 계획하고 재단하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이다.”⁵⁾ “전시장에 놓인 조각은 세상과 조각의 관계, 조각 매체에 집중해 새로운 인식법을 개발하고 결과적으로 시각의 지평을 넓혔던 모더니즘 조각을 상징하며, 또한 이것은 게이 남성을 대표하는 신체로 기능하고 그들에게 Drag 방식의 분장을 덧씌움으로써 모더니즘 조각이 충분히 내용을 획득할 수 있는, 즉 비판 미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조금 더 메타적인 차원에서 버무리고자 한다.”⁶⁾를 토대로 그 목표와 내용을 이해하면 될까? 작가가 생각하는 퀴어 형식주의(Queer formalism)가 무엇인지, ‘방법론 자체에 퀴어를 적용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듣고 싶다.

Choi :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조각을 만드는 방법론 안에서 어떤 퀴어적인 측면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올해부터 그런 방식을 열심히 찾아내고 있다. 현재의 나는 제작 방법론 자체에 어떻게 하면 퀴어를 입힐 수 있을지 그 기회를 늘 고민하는 사람이다. [웃,음-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에 출품했던 작품을 예로 들면, 제일 먼저 조각 두 점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해체해서 새로운 조각을 만들었다. 새 조각의 재료가 되었던 기존 조각은 사진으로 전시장에 놓였고 그것들을 잘라 재조합한 것은 조각으로 전시장에 놓였다. 사진의 경우에는 제목이 ‘아빠’였고 조각들의 제목은 ‘자식-아들, 딸, 간성’이었다. 조각을 잘라 새로 만든다는 방식에 퀴어의 의미를 덧씌우는 거다. 두 명의 아빠가 만나서 출산했다는 판타지를 도입하면서 기존에 있었던 조각의 방법론을 퀴어로 오염시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존의 방식에 어떻게 하면 퀴어를 덧씌울 수 있을지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내용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P21에서의 개인전 [샴 Siamese](2020)에서의 실천으로 경험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형식, 제작 방법론에 오염을 연습하는 방식을 쓰게 되었다. 또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2020)에서처럼 조각을 하나 제작해서 거기에 온갖 부속물을 덧씌운 다음에 더 화려해진 조각을 사진으로 남겨서 그것을 드랙 버전(Drag version)이라고 칭하고 부속물이 하나도 없는 것을 클린 버전이라고 칭해서 전시장에 병치해놓는 것 역시 나는 상당히 퀴어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퀴어 형식주의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주류 미술사에서 퀴어 형식주의를 인정함과 동시에 퀴어 형식주의가 그토록 경계했던 물신이 되면서 그 방법론이 폐기되었는데 나는 그것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미술에서 퀴어 형식주의는 여전히 미제의 영역이기도 하고. 그 방식의 한계로 현재는 폐기되었다는 과거의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틀어서 새로운 목표를 창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연구 중이다. 특히 나는 미술사에 편입되어 주류가 되기를 허락받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떻게 새로운, 독립된 주체가 될 수 있을지 거대한 목표를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올해 10월 뮤지엄 헤드(Museumhead)에서 퀴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그 전시의 목표가 지금 내가 말했던 맥락과 유사하다.

210x160cm, C-print, 2020, 사진: 최승혁 ⓒ최하늘​

LEE : 그처럼 덧씌우는 오염의 방식은 작가 최하늘이 처음 시도한 것인가?

Choi : 내가 식견이 짧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여태까지 그렇게 작업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이전의 퀴어 작가들은 가시화가 최종 목표였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방식은 미술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도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라 여태까지는 이와 같은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더 이상 가시화가 목표인 세상도 아니고 나 역시 그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는 것 같다.

LEE : 작가 본인이 말했듯 관련 지식이 없거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최하늘의 작품이 퀴어 형식주의를 시도한 것이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Choi : 그건 늘 모든 작가의 딜레마이다. 나는 내 작업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독해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 나름의 노력을 하기 위해 제목도 여러 개 짓고 단서를 주기도 한다. 작업마다, 전시마다 어느 정도 노출할 것인지는 작가가 고민해야 할 일이다.

LEE : 개인적 감상인데, 최하늘의 작업에서 육체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이미지를 발견해도 퀴어로 한정해서 보게 되진 않았다.

Choi : 이미지 차원에서 퀴어가 호명되고 쓰이는 것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나의 목표에도 그와 같은 방식의 작업이 맞다. 만약 내가 투쟁하는 사람이었다면 미술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활동가가 되었을 거다. 미술에 오직 정치적인 목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미술이 사회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술임을 잊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내 작업이 퀴어와 온전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이 내 실천이자 목표이다.

LEE : 금천예술공장에서의 전시 [번외편 A side B](2019)에도 게이에 관한 다양한 장치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설명을 부탁한다.

Choi : 매우 사적인 작업이라 관련해 공식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아마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선 노란 조각은 남근의 형상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노랑과 갈색이 주는 인종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거기에 같이 놓인 게이들이 사용하는 젤이나 트루바다(Truvada)라든지, 아는 사람들은 보일 거고, 그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작가가 또 새로운 조각을 만들었구나’ 정도로 접근할 것이다.

LEE : 예상하지 못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와 형태를 결합한 작품들이 많다. 형상과 형상, 재료와 재료의 만남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Choi : 서로 안 어울리는 재료를 많이 쓰는 작가란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렇지는 않다. 그것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함께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부연하자면 새로운 재료에 대한 열망은 조각가로서 남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 갖고 있고, 신소재가 개발되거나 상용화되었을 때 그것을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재료에는 언제든지 열린 입장이다. 나는 한 가지 재료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작가는 아니고 여러 가지 매뉴얼을 가진 작가이다.

LEE : 답변을 듣다 생각한 건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편견에 근거한 판단이다. 낯설다는 표현이 낫겠다. 작품 보관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관, 관리하는가?

Choi : 예전에는 다 폐기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조각이 물질적으로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조각 역시 이미지일 뿐이고 이미지로 남겨져 있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조각에서 물리적인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요즘에는 판매되는 작품도 있고 그 외에는 어떻게든 따로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고 있다. 부피가 큰 조각을 만들고 있어서 보관의 문제는 나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LEE : 최하늘은 모더니즘의 권력을 깨뜨리는 혼종성을 추구하는 작가로 보인다. 그러나 본인을 조각가라 칭하고 조각에 집중하는 것은 모더니즘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모더니즘 조각에 대한 작가의 태도,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Choi : 그 두 가지가 늘 충돌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나는 과거에 완성된 모더니즘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모더니즘을 재정립할 수 있을지, 리모더니즘(remodernism)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까지 포함된 모더니즘이 있는 것이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완벽하게 구분해서 보는 관점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을 열심히 찾아 고민하는 것 같다.

[샴 Siamese] 2020, P21 설치 전경, 사진: 안천호 ⓒ최하늘

LEE : 몇 년 동안의 활동만 봐도 작업량이 어마어마하다. 보통 작업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

Choi : 많이 할 땐 10시간, 적게 할 땐 2~3시간 정도인 날도 있다. 규칙적으로 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듯이 하는 것은 아니다. 불규칙성 속의 규칙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동안 과로한 것도 같고 주변(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다만 나는 정확히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만 맡아서 하고, 할 수 없는 범위의 일은 거절한다. 따라서 내가 하겠다고 결정 내린 일은 작가로서 당연히 책임감 있게 해야 하는 거고. 올해는 작업 방식이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드로잉을 토대로 제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까지 완성되면 손을 뗄 수 있었다. 완성된 조각에 정을 빨리 떼려고 하는 것도 있었고.
작가마다 작업 스타일이 다를 텐데,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고 마감기한에 쫓기며 작업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전시 시작 한 달 전에 신작을 다 완성해놓는 경향이 있다. 또 나는 고민을 그렇게 많이 하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만들어보자고 부딪히는 작가이다. 이런 습성이 다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LEE : 최근 주목받는 작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작가 스스로는 자기 작업의 강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Choi :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조각가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회화나 다른 뉴미디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 그 안에서 매체에 집중하는 조각가는 더 적기 때문에 많이 불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마다 성향이 너무 다른데, 나는 내 삶이 즐거운가 보다. 그래서 조각 매체에 더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스스로 경계심 어린 생각도 하고 있다. 또 어떻게 하면 ‘최하늘’이라는 작가가 퀴어 작가뿐 아니라 조각가로 호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2021. 09. 29. (2021. 09. 10. 인터뷰)

LEE : 지난 대화 이후 주변 미술인들과 최하늘의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퀴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나의 질문이나 의견이 의도와 다르게 오해를 받으면 어떻게 하는가? 작가의 의도를 잘못 전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와 같은 고민을 공유했었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그와 같은 고민이 최하늘이 퀴어가 비주류라고 말한 것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Choi : 나는 퀴어를 잘 모르는 이성애자들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실수하는 부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런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게이이지만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인권에 대해 잘 모르며 살았고 의도치 않게 실수를 범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간혹 퀴어 문화를 전혀 모르는 관객이 작품에 대해 질문하며 인격 모독적인 단어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겁박의 순간을 기억하는 육면체(He can't forget those memories)>, 2021, chrome plated FRP,120(h)x30(w)x30(d)㎝ ⓒ2021 Haneyl Choi

LEE : <겁박의 순간을 기억하는 육면체 He can’t forget those memories>(2021)를 보면 확고한 조각의 역사를 오염/해체하여 최하늘의 조각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게이들이 지배-복종적 성관계를 즐긴다는 사회적 인식을 조각가와 조각의 관계로 연결시켰다”고 했다.

Choi : 퀴어가 가시화되긴 했지만 퀴어들이 이렇다, 저렇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관련된 논의나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긴 어렵다. 조각을 만들 때 게이와 게이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또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형성되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사이의 관계를 느꼈고, 그것을 <겁박의 순간을 기억하는 육면체(He can’t forget those memories)>에 담았다. 내가 조각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고, 조각은 괴롭힘을 받는 것을 즐기는 상태가 되는 게 재미있었다.

LEE : <다각(多刻)>(2020), (2020), (2021) 등에는 남근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남성이란 표시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가?

Choi : 하나의 기호이다. 네모난 직육면체 조각을 만든 다음 남근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달아놓으면 매우 쉽게 남성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와 같은 방식이 실용적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임을 사람들에게 억지로 주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내가 여성상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내 작품이 게이 조각임을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다.

, 2021, UV print on paper, 202(h)x78(w)cm ⓒ2021 Haneyl Choi

LEE : (2021)는 영국의 SNS인 온리팬스(OnlyFans)와 연동된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Choi : 에서는 온리팬스라는 사이트 자체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 온리팬스는 원래 전문기술이나 특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유료로 자신의 능력을 공유하는 창작자 플랫폼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성(性)이 유통되는 플랫폼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용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외국에서는 매우 다양한 성 소수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게이들이 사용하고 있어 자연스레 퀴어 문화와 연결된다. 그래서 이 사이트를 가시화시키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작품에 가져오게 되었다.

LEE : 온리팬스를 가시화하고 싶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Choi : 온리팬스를 통해 이런 게이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어쩌면 21세기에 걸맞은 개인주의적 게이의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온리팬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 같다. 게이들 사이의 성 유통과 관련된 내용은 매우 복잡한 지점에 놓이며 쉽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또한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논의가 적용되어야 한다.

<훈련 또 훈련, 정진 또 정진(Rigorous self-discipline)>, 2021,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1min 49sec(loop) ⓒ2021 Haneyl Choi

LEE : 최하늘은 이전부터 난초를 이용해 문인화와 그것이 상징하는 권위와 위상, 의미의 맥락을 최하늘식으로 오염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훈련, 또 훈련, 정진 또 정진 Rigorous self-discipline>(2021)은 매우 직설적이다. 메시지가 꽤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이전의 대화에서 “방법론 안에서 어떤 퀴어적인 측면을 찾아내는 방식”을 추구한다고 말했었다.
Choi : 처음 기획했던 것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게이 포르노그래피의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준비했는데 미술관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상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대체 영상을 제작했다. 난초를 한 획씩 치는 장면과 포르노그래피적인 장면이 교차하는 상황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고결함의 상징인 문인화를 2021년의 시점에서 설득력 있게 오염시켜 관객들이 황당함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난초는 일부러 획이 많게 했다. 사군자 난초의 기본형은 7획인데 영상 속 난초는 15획이다. 동양화가 박그림이 그려주었다.
사실 <훈련, 또 훈련, 정진 또 정진>은 개인전 [벌키 Bulky](2021)의 출발과 같은 작업이다. 그러나 개인전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전부터 계속 의식하고 있던 부분이다. 나는 한국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토착문화와 전통, 예술을 어떻게 하면 현대의 게이 문법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해왔었다. 전시를 기획하며 가장 먼저 한국 토착 문화를 게이 문화로 오염시키고, 그다음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느끼는 퀴어를 병치시켜 작업과 전시로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전시장의 분리된 작은 공간에 <훈련, 또 훈련, 정진 또 정진>과 한국의 설화 중 내가 퀴어하다고 느끼는 이차돈의 두상과 박혁거세의 알을 놓았고-<이차돈과 혁거세 Two eggs(not balls)>(2021)-, 전시장의 메인 공간에는 요즘의 현상, 내가 보고 느낀 것들로 채웠다.
그동안 내가 영상 작업을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상 작업이 갖고 있는 상징이나 문법을 지키지 않아 더 직설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전의 나였다면 그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 30살이 되면서 삶의 태도에 바뀐 부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선비처럼 살았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작업에 반영되었다. 한편으로 퀴어 형식주의가 갖는 한계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아방가르드나 전위를 앞세운 퀴어가 형식주의에 묶이면서 진보성을 상실하는 한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형식주의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