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2.

본 글은 2018년 10월 7일(일)에 이뤄졌던 이문정과 이배경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이배경 (Lee, Beikyoung)

생각에 잠긴 공간(Thoughtful Space) 2018
무중력 공간(Zero Gravity Space) 2017
갈아입다(Change) 2017
메트로폴리스 메타포(Metropolis Metaphor) 2012
반복되는 자유(Repeated Freedom) 2009

LEE : 이문정, LeeBK : 이배경

LEE : <생각에 잠긴 공간 Thoughtful Space>(2018)은 처음부터 갤러리 퍼플의 전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작품이다. 장소 특정적 영상 설치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다른 장소에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LeeBK : 2017년의 개인전 <공간&시간, 상념 Space&Time, Thought>에서 선보였던 <무중력 공간 Zero Gravity Space>(2017)은 기둥이 있는 공간에 맞춰 증강 현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선 다시 전시할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은 창문 너머의 풍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로, 세로 비율이나 창문의 개수 등을 조절하면 다른 공간에서의 전시도 가능하다.

<생각에 잠긴 공간>, 빔프로젝터 5대, 영상분배기, 컴퓨터, 스피커, 3D 애니메이션, 매핑(mapping), 사운드, 2018 ⓒ이배경

<무중력 공간>, 빔프로젝터 5대, 영상분배기, 컴퓨터, 스피커 4대, 3D 애니메이션 필름, 매핑, 사운드, 2017 ⓒ이배경

LEE : 갤러리 벽이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창문 너머의 공간이 진짜처럼 느껴진다.

LeeBK : <생각에 잠긴 공간>에서는 창문이라는 프레임(frame)이 매우 중요하다. 프레임이 없으면 이미지를 빈 벽에 영사(projection)한 것에 불과하다. 공간이 확장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프레임은 또 하나의 공간을 열어 준다. 증강현실용 안경을 쓰지 않고 일상에서 편안하게 증강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LEE : 실재감을 높이기 위해 모델로 삼은 바다 영상이 있는가?

LeeBK : 현실 속 바다를 모델로 하지 않았다. 실제 촬영한 파도의 영상으로는 시뮬레이션(simulation)할 수 없다. 일정한 웨이브(wave), 다시 말해 사인(sin) 곡선의 규칙적인 주기에 그것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변수를 넣음으로써 실재하는 파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쉽게 설명하면, 아주 큰 판을 하나 만들고 그것을 창문의 크기에 맞게 분할한 뒤 가로와 세로 선이 만나는 지점에 웨이브를 준 것이다. 그것이 단조로운(기계적인) 웨이브가 되지 않도록 각 방향에서 높낮이의 변수를 다양하게 추가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파도처럼 시뮬레이션 된 것이다. 파도의 방향은 전시장의 중앙(작가가 관객의 자리라고 지정한 장소)이 되도록 설정했다.

LEE : 파도라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최소한으로 재현된 이미지 때문에 작품 안에서 의미를 찾기 어렵다. 컴퓨터로 만든 바다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막연하다. 흰색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무중력 공간>에서도 주조색이 흰색이었다. 작가가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생성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왜 파도가 일렁이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LeeBK : 관객이 내가 작업에 어떤 의미를 담아낸 것인지 몰라도 괜찮다. 엄밀히 말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특정한 메시지나 메타포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작품이 완성되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설치된 작품을 통해 나만의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도 않는다. 내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자유롭게 본인들이 하고 싶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작가가 왜 이런 작업을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하길 바란다. 그게 <생각에 잠긴 공간>의 목표다. 나는 단어 그대로 자신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나는 현대(동시대) 미술이 지나치게 개념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작품을 보며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무언가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자신이 모르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미술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관객들이 작가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편하게 앉아 오래 즐길 수 있는 작품(장소)을 선사하고 싶었다.
나에게 흰색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중성적인 색이다. 만약 특정한 색이 영상의 일부를 차지한다면 관객들의 시선이 모두 그 쪽을 향할 것이고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 흰색이 아닌 색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면 눈앞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못할 것이다. 어느 한 부분도 튀지 않아 집중하지 않고 바라봐도 부담 없는 편안함을 주려면 흰색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색도 색이지만 형태적인 면에서도 중심점이 없는 풍경이다. 집중할 요소가 없어서 오히려 오랜 시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LEE :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내러티브가 전혀 안 읽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 난해하고 어렵게 느낄 수 있다. 개념을 뺐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계속 이야기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무미건조해서 오히려 심리적으로 불편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생각이 담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LeeBK : 모든 관객의 반응이 다를 것이다. 최소한 <생각에 잠긴 공간>은 아무 설명을 듣지 않고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파도치는 바다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분석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나도 작업하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건 작가인 내가 하는 생각이다. 최소한 나의 작품을 처음 만나는 단계에서는 그냥 편하게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편안하게 생각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는 작품 앞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생각에 빠졌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현실 공간에서는 일상적인 걱정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의 작품 앞에서 일상에서는 불가능했던 생각의 확장이 일어나길 바란다. 첨언하자면 관객이 스스로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원 없이 작업 앞에 머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에 잠긴 공간>, 2018 ⓒ이배경

LEE :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작업하는가?

LeeBK : 공간이나 사유에 대해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그 모두를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하는 생각 중 하나는 ‘공간 개념의 변화’이다. 미디어 아트(media art)가 생긴 이후 미술에서 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디어 아트에서 가상공간은 현실의 공간과 대등한 의미를 갖는다. <생각에 잠긴 공간>을 보면 벽 뒤가 분명 바다로 보인다. 다차원적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나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과연 진짜인지, 꿈에서 본 것이 진짜인지와 같은 이슈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한편,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발명된 미디어가 과연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생각 중이다. 반드시 숙고해야 하는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육체적 노동 시간이 줄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시간적으로, 아니 모든 면에서 여유롭지 못한 것일까? 과거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거나 누군가가 편지를 직접 전달해줘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과학의 발전으로 지금은 전 세계가 소통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소통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시각적인 매개를 통해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이미지는 다양한 생각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 글자로 ‘지구’라고 적으면 대부분 지구본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것을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생각을 확장시킬 경우에는 다양성의 한계가 없다.

LEE : 내러티브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설명했지만 기술적인 면에만 집중한 작업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오해라고 해도 누군가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미디어 아트가 첨단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예술로서의 본질이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LeeBK : 나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관객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위한 방편을 구축하는 데에 몰두한다면 나만의 특별함이 사라질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작품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에 실제로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다.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려면 그만큼 새로운 프로그램, 기술, 장비 등을 학습하고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상상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내러티브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도 있겠다. 나는 무엇보다 작가의 진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배워서 다양하게 활용하자는 식의 태도에는 반대한다. 내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어떤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하고, 선택해서 배워가며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LEE : 큐브의 파도이다 보니 <메트로폴리스 메타포 Metropolis Metaphor> 시리즈(2012-2014)도 떠오르고 부유하는 현대인, 불안정한 도시 풍경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디지털 큐브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것이 바다(자연)이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다뤄왔다. 자연을 잃은 현대인의 현실을 다루는 것인가? 아니면 상반된 것들 사이의 관계 혹은 공존에 관심이 있는가?

LeeBK : <생각에 잠긴 공간>을 도시 풍경으로 봐도 좋다. 만약 실제 파도치는 바다와 똑같은 풍경을 만들어 보여주면 관객 입장에서는 바닷가에 가지 굳이 전시장에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닷물이 큐브의 연속으로 대체되면서 ‘바다 같기는 하지만 바다가 아닌 무엇’이 만들어졌다. 상상의 폭이 넓어진 거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자연이라는 단어에서 산과 강, 바다 등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서 안락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길 꿈꾼다. 심지어 도시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도 자연에서의 휴식을 바란다. 그러나 자연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연은 아파트 단지 안의 공원이다. 도시인들에게 산골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과연 몇 사람이나 살 수 있을까? 한여름 에어컨 바람을 쏘이는 것과 자연 바람을 쏘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안락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을까? 동경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는 도시 공간을 자연으로 받아들이고, 이 자연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떠나버릴 공간에서는 오늘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일상의 삶을 탈피의 대상으로 봐선 안 된다. 도시에서의 삶을 견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지속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인위적인 것은 해롭고 자연적인 것은 좋다는 식의 이분법적 구별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LEE : 그런 맥락에서 보면 <생각에 잠긴 공간>은 문명 속 자연, 혹은 오늘날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의 본모습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겠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자연 공간을 만들어 선사한 것이다. 관객들이 편안하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한다고 했는데, 전시장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편인가? 그동안 인터랙티브(interactive)적인 작업도 다수 진행해왔다.

LeeBK : 당연히 관객의 반응에 관심이 많다. 관객들이 나의 작품 앞에서 얼마 동안, 어떤 상태로 머무르는지 관찰한다. 그 관찰의 결과물이 <생각에 잠긴 공간>이다. 전시장에서 관객들이 하나의 작품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인터랙티브 아트든, 비디오 영상 작업이든 그리 길지 않다. 이건 나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을 직접 관찰한 결과다.

<메트로폴리스 메타포(cube)>, 키네틱 아트, 설치, 2012 ⓒ이배경

LEE : <메트로폴리스 메타포> 시리즈를 처음 보고 매우 놀랐었다.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람만으로 커다란 큐브(cube)가 공간에 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균형을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 같은데 전시 중 큐브가 바닥에 떨어진 적은 없었는가? 전시 공간에 맞게 매번 모든 조건들을 다시 계산해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LeeBK : 처음에는 컴퓨터 안에서 모든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런데 컴퓨터 안의 세상은 어떤 방해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공간이라 실제와 다르다. 현실 공간에서 처음 실험했을 때에는 잘 뜨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실험을 반복하며 완성했다. 설치 후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는데 실제로 작품이 바닥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관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기류가 바뀌어 균형이 깨질 수 있다. 파손을 대비해 큐브는 여러 개 제작해 두었다. 전시 때마다 조건을 다르게 만들어줘야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의 데이터가 구축되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설치할 수 있다. 단, 천장의 높이가 6m 이상이 되어야 전시가 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 메타포>의 경우 물리적 계산을 하는 데에만 6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미디어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엔지니어를 비롯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의뢰를 하거나 협업을 시도했다. 그런데 원하는 만큼 충분한 소통이 안 됐다. 같은 단어를 사용함에도 서로 떠올리는 결과물이 달랐다. 또한 작가인 나는 머릿속에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엔지니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오로지 나의 설명만 듣고 실현시켜야 했기 때문에 합일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계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직접 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기 부여가 되니 가능했다.

LEE : 컴퓨터로 가상공간을 만들어내는 작가는 절대적 창조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존에 있는 무언가를 이용하거나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에 의해 창조된 공간이다.

LeeBK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방법론의 차이가 있다. 하나는 마치 극장에서 개봉하는 3D 애니메이션처럼 특정한 내러티브(메시지)를 갖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게 만들어내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이미지(사물)를 만들고 공간을 만들지만 기본 조건만 만들어줄 뿐 그 이후의 상황은 작가가 계획할 수도, 관리할 수 없는 경우다. 둘은 분명 다르다. 나는 후자다. 내가 만든 공간 속 큐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나조차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랜덤(random)하게 두었다.

LEE : 큐브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라 해도 작가가 어느 정도 한정지은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 아닌가?

LeeBK : 전시장에서 보여줘야 하니 시간적 한계는 있다. 그러나 내가 범위를 한정지었다고 하기에는 큐브의 움직임이 매우 광범위하다. 산 정상에 올라가 작은 공을 굴릴 수는 있지만 공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굴러갈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 보면 된다. 공이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 모든 상황을 완벽히 계산하고 파악한 뒤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조건을 만든 것이지 통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분명 차이가 있다. 공간의 조건을 완성하고 나면 나 역시 관객의 입장과 같다.

LEE : 전반적으로 작품이 보편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거시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반론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LeeBK : 실제로 나의 태도가 그렇다. 또한 나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지도 않다. 만약 나의 작품을 보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작가에게 질문을 할 것이고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의 다른 작업들을 찾아보면서 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작업을 아우르는 주제는 ‘시간, 공간, 몸’이다. 이 세 개념의 접점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확한 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LEE : 누군가는 같은 주제를 다뤄도 조금 더 구체적이다. 그런데 이배경의 작업은 매우 거시적이다. 단어 그대로 개념적인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 물론 그 차이로 우열을 가리거나 할 수는 없다.

LeeBK :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것 모두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 구사의 태도가 다르다고 보면 된다. 나는 명확한 하나의 지점을 향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니까 질문을 던지는 정도다. 질문을 잘 만들어서 공유하는 정도가 내 작업의 깊이이자 넓이이다. 그러다보니 모호하게 느낄 수 있다. 나의 작업은 ‘산을 한 번 보실래요?’라고 제안하는 정도다. 산 속에 무엇이 있고, 어떤 길로 올라가야 하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구체적인 방향을 향하며 수많은 내러티브를 생성하다가 결론에 도달했을 때 흐릿해지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가리키는 분명한 지점이 있었고 그에 맞게 수많은 이야기를 전개했음에도 열린 결말로 끝내버리는 작업은 무책임한 것 같다. 나는 고집하는 것 자체가 없다.

LEE : 아날로그적인 매체에는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의 효과는 결국 작가의 의도와 계획을 일정 부분 벗어난 것이다. 혹시 디지털 작업을 하는 것이 철저히 계획한대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인가?

LeeBK : 나도 아날로그적인 작업을 했던 적이 있으니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나는 파도(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100% 통제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계획대로 시행착오 없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좋은 거다. 그런데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 열등하다의 문제는 아니다. 반드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의 의도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LEE : 완벽히 아날로그적인 작업을 할 수도 있는가?

LeeBK : 가능하다. 지금은 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지만 한 장르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무엇이든 나의 의도에 맞는 매체를 선택할 수 있다. 장르와 매체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는 것 같다.

LEE : 마지막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 아트를 대중적이라고 한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고도 한다.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의 대부분은 작가 혹은 전공자가 아니면 작업 과정을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작 과정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디지털 아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기술적 원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할까?

LeeBK : 개인적 의견이지만 기술적 부분을 전혀 몰라도 작품을 감상하고 즐기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식이나 프로그램, 장비와 같은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아야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앞선 대화와 연결되는 지점인데,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 일부는 새로운 매체에 시선이 팔려 작품을 온전히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TV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면서 리모컨 자체에 주목하고 그 원리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리모컨의 작동 원리를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인터페이스(interface)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관객들이 미디어 아트를 그렇게 감상하길 원한다. -물론 일정 부분에서는 작품의 제작 원리가 궁금할 수 있겠으나-그것의 기술적인 면 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 혹은 사유의 가능성을 함께 하길 원한다. 작품이 기술적으로 너무 신기해 보이면 관객들은 작품 자체를 보지 않게 된다. 작품의 본질이 소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요소를 최소화시키고 단순하게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