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에틱

artist 박민준

2023. 5. 8.

본 글은 2023년 1월 12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박민준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박민준(Park, Minjoon)

LEE : 이문정, Park : 박민준

LEE : 미술을 처음 접했던 때는 언제인지, 미술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은 언제인가?

Park : 어머니 말씀으로는 3~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낙서부터 시작했을 거다. 이후로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주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미술 전공해야겠다, 미술대학을 진학하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사실 나는 대학교 3학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왜 미술을 하게 되었나를 고민할 정도로 다른 영역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너는 미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고, 당연히 미술을 전공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

LEE : 대학생 때부터 구상적인 작업을 선호했는가?

Park : 그렇다. 추상은 납득하기 어려워 계속 구상 작업을 했다. 내 아래 학번에는 구상 작업을 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내 동기 중에는 몇 명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LEE : 왜 구상이 좋았는가?Park :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재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대상을 제대로 재현하려는 욕심에서 시작해 한국적인 구상 미술 사조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연구도 많이 하고 친구들도 모아 운동도 하고 싶었지만, 1990년대는 이전과 달리 그룹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구상 미술을 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생겼다. 종국에는 재현 그 자체에서 확장되어 개성이 두드러지는 그림으로 전환되었다.

LEE : [PARK MINJOON 박민준: X](2022~2023)에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데 작품 표면에 빛이 느껴진다. 윤이 나는 것 같다.

Park : 유화라는 재료의 특성은 빛이다. 광선이 중요하다. 아크릴과 달리 유화는 광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레이어(layer), 즉 투명층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빛이 투과, 굴절되는 기술적이고 재료적인 특성이 있다. 유럽의 미술관에 가서 전통적인 회화 작품들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료적인 측면에 연연하진 않지만, 유화가 갖는 광택이나 빛 반사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작품 중에는 이처럼 빛의 효과에 집중한 작품도 있고, 물감의 물질성 자체에 중점을 둔 작품도 있다. 관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는 사람은 차별성을 두면서 그림을 그린다.

LEE : 기존 인터뷰를 보면 첫 번째 소설인 『라포르 서커스』(2018)는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썼고 『두 개의 깃발』(2020)은 동시에 썼다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Park : 엄밀히 말해 구상은 글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걸리니 낮에는 작업을 하고 저녁에 글을 쓰는 식으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차이가 있었던 이유는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달라서이다. 『라포르 서커스』는 작품을 완성한 뒤 작품 설명에 관한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글이 장황해지다가 소설이 된 경우이다. 두 번째 소설인 『두 개의 깃발』은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먼저 했고, 거기에 맞춰 그림을 그렸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편이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어떤 대상을 그릴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결정한 뒤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중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작업을 하는 중에 머릿속에 여유가 생긴다. 물론 계획대로 진행해도 변수는 생기기 때문에 그림 그릴 때는 무엇보다 작업에 집중한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애매한데 그러는 사이사이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라푸-세상 중심에 서기 Rapu-At the Center of the World> 2018, Oil on canvas, 35.5x28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엘카드몬>(2016~2017)은 <비토리아 콜로나를 위한 피에타(Pietà for Vittoria Colonna)>(1538~1544)의 구성을 차용했고, 의미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종교)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비토리아 콜로나를 위한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그렸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그의 작품으로 추측하거나 제작에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 있다.

Park : ‘엘카드몬’은 순수한 인간의 원형을 나타내는 아담 카드몬(Adam Kadmon)에서 시작되었다. 아담 카드몬은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에 등장하는 가장 순수한 원형의 인간을 뜻한다. 『라포르 서커스』의 등장인물인 인형술사 아트만이 가장 순수한 예술 작품(최고의 인형)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뒤 창조한 게 엘카드몬이다. 아트만은 마치 나처럼 진정한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작가의 형상을 가졌고, 엘카드몬은 그 결과이다. 즉 엘카드몬을 내가 생각하는 예술에서의 순수한 결정체라고 보면,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유사할 것 같았다.

LEE : 『두 개의 깃발』을 보면, ‘현실화’가 일어나고 소년의 모습을 한 아인(Ain, 無, O)이 태어나는데, 결국 그 아이도 종교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특정 종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신격화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Park :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가 담기니 종교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행위, 어떤 가치 있는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아무래도 종교적인 색채가 들어간다. 인간이 삶과 죽음을 상상하고 해석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과학과 종교이다. 또 예술은 과학적인 부분과도 연결되지만, 무엇보다 종교적인 부분이나 추상적인 개념과 연결해 사람들에게 와닿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 부분에 신경 썼다. 내가 유럽의 회화 중 종교화, 성당 건축 등에 감동을 많이 받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신념의 탑 Tower of creed> 2021, Gold leaf, oil on canvas, 220x14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박민준 <영원의 탑 Tower of eternity> 2021, Gold leaf, oil on canvas, 220x14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작가가 말한 대로 가장 인간다운 영역 중 하나가 종교이다. 그런데 <신념의 탑>(2021)의 가장 높은 곳에 고릴라가 있고, 그 뒤에 금색 광배가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풍자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념만큼 불안정하고 한순간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없다.

Park : 사실 해당 작품의 영어 제목을 정할 때 ‘faith’와 ‘creed’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하다 조금 더 종교적 의미가 강한 ‘creed’를 선택해 ‘Tower of creed’가 되었다. 내 그림에서는 신념이라는 것 자체에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 이전 작품인 <라포르 서커스>(2018)에서는 퍼레이드 장면이 그려졌는데, 여기에서도 고릴라가 마차를 타고 있다. 성공이나 주인공이 되는 상황이 그만큼 허무하고 허상에 가깝다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신념의 탑> 꼭대기에 어떤 종교적 영광을 가진 것처럼 고릴라를 그린 이유는 인간의 신념 자체가 그만큼 어리석고, 신념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생각을 담고 싶어서였다.

박민준 도판 <라포를 위한 행진 Parade for Rapo> 2016-2017, Oil on canvas, 210x294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개인적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종교와 대척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진화론도 떠올랐다.

Park : 인간은 바닷속 생물체에서부터 시작했고 유인원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객체여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원숭이를 많이 그리는데, 인간의 사고 자체가 인간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동물에게도 사고 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인간과 동물을 동등하게 생각한다. 또 내 그림에서 고릴라는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건데 -어리석은-인간 존재로 볼 수도 있다.

LEE : 최근 SNS상에서 박민준의 작업에 등장한 동물 중 고양이가 많이 주목받는 것 같다.

Park : 고양이는 참 매력적인 동물이다. 내가 신화를 좋아하는데 고양이가 자주 등장한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라는 속담도 그렇고, 그 자체로 신비로운 느낌을 전한다. 그 분위기가 좋았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X-XX> 2022, Oil on linen, 112.5x162.2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죽음은 인간 실존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자신의 유한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전시된 <X> 시리즈의 풍경 중 독일 낭만주의의 정취가 느껴지는 작품도 있었다. Park : 내 그림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죽음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일 수도 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이 갖는 가장 큰 공포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 공포는 삶의 원인, 왜 사는 것인가에 관한 답을 구하게 한다. 그러나 그 답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사는 동안 의미 있는 일을 무엇인가?’처럼 내 역할을 생각해 보면, 결국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왔던 그림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항상 승리하는 죽음을 이길 방법은 동시대를 그림으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이 내 주변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건 그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죽음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나는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누군가가 자식을 낳아 자신의 흔적을 남기듯 나는 그림으로 나의 인생에 관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런 동기로 그림은 계속 그린다. 그래서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현상에 관한 것보다는 본질적인 부분을 주제로 삼고 작업하는 것 같다.

LEE :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Park :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한다. 죽음 뒤를 떠올리면 암흑이다. 그런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내가 죽기 전에 매트릭스나 죽음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란 상상도 하고,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 때 내가 죽기 전 무언가가 보이지 않을까’란 환상을 갖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의 공포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그럴수록 더 진지하게 그림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LEE : 박민준의 소설을 보면 현실화되어 그림에서 세상으로 나온 ‘아인’은 계속 자는데 죽음 후의 부활을 생각하게도 한다. 사실 잠은 죽음과 자주 연결된다. 개인적으로 기억을 추출해 새로운 몸에 넣으며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SF 드라마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영생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은 영생보다 유한한 인생을 원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과연 모든 인간이 그것을 원할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죽음은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주제이다.

Park : 이번 전시 소책자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 Arte)』(2022)에 영생은 고통일 뿐이고 인간은 결국 죽음을 원한다는 것은 전부 헛소리며 그건 인간이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려고 만들어낸 위선일 뿐 인간은 영생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니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죽음을 절대 경험할 수 없으니 영원히 산다는 내용도 있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이면공을 든 광대 A clown holding a double sided ball> 2022, Oil on canvas, 72.7x60.6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엘카드몬>에서 어머니도 광대 분장을 하고 있고 실제 작품에서도 광대가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서커스가 배경이어서는 아닌 것 같다. 광대는 자신을 희화화하면서 인간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도 처벌받지 않는 존재였다. 또 광대 분장은 슬픔과 기쁨을 다 보여준다.

Park :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첫째, 광대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의 삶 자체가 분장한 광대 같아서였다. 타인에게 100% 솔직한 사람은 없다. 슬퍼도 웃어야 할 때가 있고 기뻐도 슬픈 척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한다. 이건 모두 광대가 하는 일이다. 이 모두 나의 삶과 비슷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 편했다. 두 번째는 갤러리현대 지하에 만들어진 콤메디아 델라르테가 광대의 원형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광대의 조상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피에로, 할리퀸으로 이어진다. 알레치노(Arlecchino)가 할리퀸의 원류이다.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광대극들은 우리나라의 가면극, 봉산 탈춤과도 비슷하다. 우스꽝스러운 것도 있고 권력자를 괴롭히는 캐릭터도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캐릭터가 부여되어 있긴 하지만 광대들이 즉흥적으로 대사하고 연기하는 즉흥극이다. 이때의 광대는 배우에 더 가깝고, 하나의 캐릭터에 즐거움과 슬픔이 담겨 있는 형태로 희로애락을 다 담고 있다. 여기에 재미를 느껴서 작업하게 되었다.
LEE : 인터뷰할 때마다 작품을 자유롭게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박민준의 작품은 내러티브가 강하게 전달되어 작가의 의도나 작품 속 이야기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작품 속 도상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혹시 오로지 시각적인 영역만 생각한 작품은 없는가?

Park : <X> 시리즈는 충동적으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소설이랑 연결되지 않는다. 구속받고 싶지 않았다. 2021년부터 <X>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처음은 단순히 풍경화를 한번 그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나름의 기획이 있었는데, 구속의 한계를 또 만든다는 생각에 X 자체가 모호하고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니 나도 풍경화든 정물화든, 다른 무엇이든 자유롭게 그리는 시리즈로 가기로 정했다. 실험적인 작업들이다. 그래서 <X> 시리즈는 다음 작업을 위한 토대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품들은 정확한 계획 하에 각각의 상징을 정확한 위치에 놓았다. 기획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와 달리 <X> 시리즈는 갑자기 어떤 것(상징)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는 거다. 내가 만든 조각인 소년상도 그려보고 싶어 그렸다. 내가 그린 것을 조각으로 만들고 그 조각을 다시 회화로 옮기는 실험을 한 거다. 생각의 이동이라든지 아니면 변화의 과정을 보고 싶어 번호를 붙였다. 모여서 하나의 팀 같은 작품이 되길 원했고, 또 내가 작업할 때 모티브가 되어줄 수 있는 작업을 해보자는 생각이 담겼다. 한 마디로 구속되지 않은 작업을 통해 다음 작업의 기초를 세우거나 깊이감을 주려고 시도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LEE : 작품 앞에 번호를 적은 건 오직 작가를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혹시 관객들에게도 그 흐름의 순서를 알려주고 싶었던 건가? 또 서명을 앞면에 한 이유는 무엇인가?

Park : 나는 사인을 뒷면에 하지 않는다. 뒷면에 하면 그림에 손상이 온다. 옛날 유럽 회화를 보면 앞에 서명한다. 번호는 어떤 일기 같은 기록의 느낌도 있어서 작품의 일환이라는 생각으로 적는다. 기억하기에도 좋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라푸-곰탈을 쓴 라푸 Rapu-Rapu with Bear Head> 2018, Oil on canvas, 86.5x66.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를 비롯해 수많은 학자가 말했듯 재현은 단순한 기록은 아니다. 또 회화의 프레임이 누군가에게는 한계로 다가올 수 있지만 프레임이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유럽 화가들이 이미 만들어진 내용인 신화, 종교 교리, 역사로 환영의 세계를 만드는 것과 달리 박민준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에 완벽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Park : 내 작품에 내가 쓴 소설 같은 이야기의 요소가 들어가게 된 시작은 유럽의 전통 회화와 다른 나만의 차별화를 고민하면서부터다. 서구의 전통적인 회화는 기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재현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해 그렸다. 작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록화의 느낌도 강했다. 나는 내 생각이 우선적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신화들을 끌어다 썼다. 순서가 다르다. 그래서 내 초기작들을 보면 내 생각을 그리스, 로마나 북유럽의 신화, 동양의 철학 등을 가져와 표현했다. 크게 보면 전통적인 유럽 회화의 양식을 고수한 것이다. 작업을 더 하다 보니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 나만의 신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스 신화도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인간형에 가까운 신들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이야기에 상상력이 더해져 신격화된 존재들인 거다. 그렇다면 신적인 능력과 재주가 없어도 어떤 캐릭터만으로 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만든 이야기의 존재들을 신격화시켰고, 그 신 같은 존재의 이야기, 즉 신화를 만들었다. 내가 만든 신화를 재현하는 쪽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LEE : 예술가가 신처럼 창조하는 존재라 생각하는가?

Park :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갤러리현대 2층에 있는 대작들은 내가 쓴 소설 속 인물인 사피에르가 그린 그림을 내가 재현한 거다. 나는 낮은 자세로 임하고 내가 만든 캐릭터가 높아졌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반대의 상황인 거다. 사피에르가 내가 만든 캐릭터에서 끝나지 않고 자생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내 첫 개인전이 [작아짐의 편안함](2003)이었다. 처음 유럽에 가서 성당 건축을 봤을 때 그 감동이 엄청났다. ‘과연 이것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형상인가? 이건 종교적인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작아짐을 느꼈다. 광활한 하늘을 쳐다보며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 말이다.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상태에 놓인다. 그게 바로 ‘작아짐의 편안함’이다.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 어찌 됐건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니 낮은 자세로 내 일을 묵묵하게 하다 보면 큰 존재를 만날 것이라는 어떤 기대감으로 작업했다. 내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행사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 아래에 있는 빈약한 사람이니 그에 순종하고 따르는 구도자의 길을 가자는 생각이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소년(아인)상(1) Statue of Ain(1)> 2022, Resin, 116.7(h)x24x32cm, (Sculpture only)(53.7(h)x24x30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박민준 <소년(아인)상(2) Statue of Ain(2)> 2022, Resin, 116.7(h)x24x32cm, (Sculpture only)53.7(h)x24x30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그런데 소설에는 ‘아인’을 묘사하며 영체는 신이 되고 싶었던 한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고, 그(사피에르)는 신을 꿈꿨고 이루었다고 적혀 있다.

Park : 그건 내가 생각하는 이상이라기보다 환상 같은 거다. 인간이고 작가인 사람이 꿈꾸는 환상일 뿐이다. 사실 예술가뿐 아니라 인간은 모두 자신의 직업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이 되길 꿈꾼다. 신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하니까. 작아짐을 통해 평안함을 가지는 생활이 대부분인데 마지막 1% 정도는 신이 되고픈 마음이 있는 거고, 소설은 그것을 꺼내 극대화한 것과 같다.

LEE : ‘아인’이 왜 소년의 형상이었는지도 궁금하다.

Park : 무엇보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나와 유사한 원형을 찾길 원하니까. 사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성이든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다. 그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고 조형적으로 소년의 형상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스케치 때 소년의 형태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참고로 나는 여성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초기작들을 보면 여성이 많다. 매번 특정한 조형미가 어울리겠다고 판단하면 선택한다. 그 외 특별한 의미는 없다.

LEE : 박민준은 물질로서의 회화를 뛰어넘으려는 것 같다. 또 어찌 보면 고전적인 요소로 모더니즘 회화를 해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Park : 미술 사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 있는데 사실 우리가 말하는 미술 사조를 다 합쳐도 몇백 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짧은 시기이다. 예를 들어 워크맨을 들고 다니는 것과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모두 기계 작동 시대, 가상현실이 나오기 전까지의 물질적인 시대에 속하는 거다. 아주 오랜 시간이 더 흐르면 이 둘을 같은 시대라고 느낄 거다. 돌 바퀴에서 나무 바퀴로 옮겨갔을 때는 엄청난 혁신이라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똑같이 마차 시대이다.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는 동시대로 일컬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고 유한하기 때문에 몇백 년이 아주 긴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짧은 시대를 세부적으로 나눈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나는 어떤 사조나 시기에 저항하거나 해체하는 작가 아니라 바로크 시대에 그렸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은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화로 그린 회화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아트나 설치, 공간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

LEE : 그렇다면 NFT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Park : NFT는 약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NFT가 디지털의 맹점을 장점화한 것이라 본다. 디지털 복제가 워낙 자유롭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해 어떤 투자로서의 NFT가 나온 것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내 작업이 공유되길 원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그림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렇게 공유하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NFT처럼 독점하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LEE : 『두 개의 깃발』을 읽으며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미지의 걸작(Le chef d`oeuvre inconnu)』(1831)이 계속 떠올랐다. 이 소설에는 ‘절대 회화’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림 속에 얼마나 생생하게 영혼을 담아낼 것인가를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박민준의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화’와 반대 방향을 향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목표는 비슷하다. 한편 박민준의 소설에 ‘2, 3, 4’의 의미가 나온다. ‘신념의 탑은 인간(2), 영원의 탑(3)은 신, 이 두 개의 작품이 대칭을 이루고 하나(죽음)가 충족되면 현실화(4)가 이뤄진다. 특별한 하나는 생명을 내놓는 죽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그리고 4는 신을 상징한다.’ 그중에 ‘4’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다.

Park : 9번째 개인전 [TWO FLAGS 두 개의 깃발](2020)에서 힌트를 줬는데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4는 사각형-캔버스-이다. 그림으로 환원될 수 있는 거다. 2, 3, 4는 각각 원, 세모, 네모로 이어진다. 그래서 전시할 때 이 도형들을 타이들 옆에 붙여놨었다. <오징어 게임>(2021)이 나오기 전이다.

LEE : 현실화되어 나온 존재가 왜 무(無)인가?Park : 처음 시작이 무인 것은 과학의 빅뱅이나 종교도 마찬가지다. 소년의 이름인 ‘아인’이라는 단어도 유대교에서 제로(zero)의 형태를 뜻한다. 그림에서 ‘현실화’되어 인간의 생명이 처음 시작되는 거다. 그 시작점 역시 제로라고 생각했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라푸-꿈 Rapu-Dream> 2018, Oil on canvas, 100.5x72.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비물질적인 영역을 추구하는 작품 같지만 그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노동, 손(육체)의 숙련이 필요하다. 보통 작업에 어느 정도 시간을 쓰는지 궁금하다.

Park : 첫 번째로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젊었을 때 억울했다는 점이다. 이건 작업과 삶의 생명을 맞바꾸는 거다. 왜냐면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을 그림에 쏟고 있다. 그 외에 나의 삶은 없다. 그러니 내가 가진 나의 삶(시간)과 작품을 교환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교환하면 할수록 가치는 더 커진다. 그래서 나는 삶과 같은 작업에 관한 환상 같은 걸 갖고 있다. 작가가 작업을 계속하고, 자기의 손으로 직접 그렸을 경우 작가의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본다. 『라포르 서커스』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는데 아트만은 자기의 생명력이 인형에 계속 스며들어 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하늘에 욕을 하며 죽는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내가 가진 유한한 삶 중에 유한한 한 묶음 자체, 20여 년을 그림과 교환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보상이 생기긴 했지만 억울했다.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작품 한 점을 남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큰 의미가 없다. 이제는 길고 긴 시간을 투자하고 작업하는 것 자체가 숙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계속 작업실에 있다. 사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회사원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좀 자유롭지 않나 싶다. 지금은 분명 화해하고 타협한 쪽이다. 두 번째로 할 이야기는 이제 노동과 시간을 집중하는 것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다는 거다. 그동안 내가 보여주고 싶은 그림들은 많이 그렸으니 다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물론 새로운 방식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면 다시 되돌아가겠지만. 여하튼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한 것은 맞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라푸-추락 Rapu-Fall> 2018, Oil on canvas, 100.5x72.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일부를 과감히 생략한 작품도 보인다.

Park : 많이 부족하다. 아직 연습 중이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으로 잘 그리는 것이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다만 붓질 한 번으로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책임감을 쌓아 올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과정으로 가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들을 조금씩 제거해가면서 수련하는 중이다.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잘 그리는 정도는 비슷하다. 개성이 조금씩 다른 거다. 그리고 그 정도의 수준에 올라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얼마큼 시간을 투자했느냐에 따라서 완성도가 달라진다.

LEE : 최종적으로는 덜어내는 방향으로 가고 싶은 건가?

Park :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흐름이 보인다. 나도 그렇게 가고 싶다는 느낌이다. 미술 사조를 보면, 필요충분조건이 완성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생각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어느 정도의 반열까지 오를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것들에 충실하면서 변화를 위한 훈련도 하고 있다.

LEE : 작가들과 이야기하면,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완벽한 구분이 힘들다고 말한다. 또 앞서 작가 본인도 밝혔듯 화가는 특히 혼자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Park : 작가는 퇴근이 없다. 늘 출근 상태에 가깝다. 휴가를 가서도 작업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더 심했다. 쉬는 시간에는 ‘지금도 그림을 더 그려야 완성도가 높아질 텐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작업 과정이 어느 정도 체계화되기도 했고, 억압감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작가가 직접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 내가 그린다. 과거의 화가들이 어시스턴트를 쓰고, 수제자들이 대신 그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전제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당시엔 화가가 제일 잘 그렸다. 화가가 정말 잘 그리고 자기가 그 기술을 가르쳐 자기만큼 그릴 수 있는 수제자가 되면 작업에 참여시켰다. 아니면 자기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을 구해다 그렸다. 그래야 예술가 자신이 서명을 남길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은 작가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고용해 작업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또한 단순히 아이디어만 내고 작가가 손도 대지 않는 작업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LEE : “작업 초기에는 뭔가 나만의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보자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러던 중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작품을 보게 됐고, 그 화면이 주는 느낌에 충격을 받았죠. (중략) 저는 회화에서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림으로 스토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스토리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 저는 그것이 회화의 핵심이라고 보는 거죠. 카라바조의 작업이 제게 그 코어의 힘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다가왔어요.”라고 인터뷰했다. 부연을 부탁한다.

Park : 여기에서 ‘스토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오는 그림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를 그림으로 그대로 옮기는 건 재현이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담아내는 것은 표현하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10)을 보면, 골리앗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대체하는 식으로 자기의 사고를 넣었다. 그러면서 작품의 가치가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작업은 내가 스토리까지 만들기 때문에 표현과 재현 둘 다 하는 것이다.

박민준 도판 박민준 <라푸-파랑새를 잃어버린 광대 Rapu-Missing Bluebird> 2018, Oil on canvas, 45x35.5cm, 도판 제공=갤러리현대

LEE : 작가가 작품에 관해 글로 설명할 경우, 이미지로만 제시될 때보다 의미가 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의도나 내용을 명확히 전하는 만큼 해석의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

Park : 내 의도는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내 그림을 잘 보면 소설의 내용이 그림에 옮겨지지 않는다. 소설의 삽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내용을 그린 <라푸의 그림>(2018)을 제외한 작품들은 독립성을 갖는다. 글은 글대로 존재하고, 작품은 작품대로 이야기를 갖는다. 나는 소설을 그림을 보충하는 역할로 생각하고 썼다. 『두 개의 깃발』을 보면 소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별도의 삽화가 책에 수록되어 있다. 전시 [두 개의 깃발](2020)에 전시했던 작품들도 소설과 연결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연결해서 보고 싶어 하는데 사실 연결 코드가 거의 없다. 그러니 소설을 읽었다고 나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소설에 나온 인물들이 그림에도 나오니 친근감이 생기긴 할 거다. 사실 작업에 관한 인터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은 그림으로 보도록 작가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이야기를 그림으로 다 했는데 작가가 자꾸 앞장서서 이야기하면 작품 감상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봐 조심스럽다.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봐주면 좋겠다.

LEE : 소설만 읽고 끝내는 경우도 재미있을 것 같다.

Park : 실제로 나를 소설가로 알고 있다 전시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능력상 소설가라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분리해서 봐주면 좋긴 하다.

LEE : 전시 [두 개의 깃발]을 소개하는 기사들에서 작품에 힘이 덜 들어갔다는 내용, 드로잉을 전시했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드로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회화 작품이라 부를 정도의 밀도가 보인다.

Park : <X>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작업은 상상력에 기반해 작업한다. 대상 없이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그려야 되는 상황이다 보니 그 초안이 중요하다. 초안을 치밀하게 그려야 나중에 유화로 옮길 때 고생하지 않는다. 드로잉을 세밀하게 할수록 유화 작업이 편해진다. 처음에는 캐리커처나 만화 혹은 광고 시안처럼 초안을 간결하게 그린 뒤 다듬어가며 전시할 수 있을 정도의 드로잉을 그린다. 그다음 드로잉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유화로 그린다. 개인전마다 간격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중간에 드로잉 전시를 한 번씩 한다.

LEE : 전시 [X]의 반응이 좋은 것을 느끼는가?

Park : 기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양날의 검 같다. 사람의 마음이 묘한 게 말 한마디에 기뻤다 슬펐다, 의지가 상승했다 사기가 떨어지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부분은 힘들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덤덤해지려고 하고 SNS도 잘 하지 않는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순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