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1.
본 글은 2019년 11월 6일(수)에 진행된 이문정과 김윤철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KYC : 김윤철
LEE : 작가로서 일관되게 탐구하는 영역,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근원적인 물질성을 경험시키는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KYC : 솔직히 말하면 없다. 나는 특정한 목표를 갖지 않는다. 다만 나는 예술이 전적으로 언어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진정한 미적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바다나 노을을 봤을 때 ‘깊다’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작품을 보고 어떤 분석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평론가의 몫이다. 따라서 작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관객에게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징후적으로 다가가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깊이나 다른 차원의 감성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은 기호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스투디움(studium)이 아니라 푼크툼(punctum)의 영역에 가깝다. 이성적이기보다는 몸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콥틱라이트 Coptic Light>(2019)는 하이드로젤(물질)을 투명한 삼각형 틀에 넣고 무거운 힘으로 눌러 그것이 프리즘처럼 변한 구조물이다. 관객들은 물질의 현상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과 패턴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일반적인 빛과는 다른 광학적인 속성을 그저 징후로 느끼면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차학경의 시를 참 좋아한다. 그분의 시는 혀 위에 올라온 단어 이전의 시를 지향한다. 나에게도 해석되거나 말로 발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드러내길 원하는 욕망이 있다. 나에게는 단 10초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 중요하다.
<콥틱라이트> 200x200cm, 아크릴, 하이드로겔, LED, 2019,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LEE :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일상성을 벗어나 독립적인 예술의 세계에 집중하길 원했던 모더니즘의 형식론적인 태도가 떠오른다.
KYC : 일정 부분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은 실험실과도 비슷해 보일 것이다. 실험실은 외적인 것들이 차단되고 밀봉된다. 그러나 나는 밀봉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이미 점유된 세계의 흔적들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실험실과도, 형식론과도 다르다. 물(water)을 예로 들면, 『동의보감 東醫寶鑑』(1610)에는 33가지의 물이 나온다. 인간과 조우하는 물의 속성이 다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의 물은 특정 상표로 대체된다. 나는 텍스트(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물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거다.
LEE : 작업의 개념이나 작가의 지향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작가가 시각적인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작품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미술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매우 작은 부분까지 예민하게 마감한 것이 느껴진다. 시각적인 표현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KYC :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미지)이 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의 작업의 부분 중 어딘가에 상표나 ‘메이드 인’과 같은 단어가 보이면 몰입이 깨진다. 관객들이 작품을 징후로 경험할 수 없게 된다. 텍스트나 십자 나사처럼 구체적인 일상성이 읽히는 것들이 없어야 한다. 특정한 용도에 종속된 사물이 드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을 직접 만들게 되고, 고유한 마감을 지향하게 된다.
LEE : 작업을 설명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다. 미에 대한 작가 본인의 정의를 듣고 싶다.
KYC :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예쁘다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그것이 미술이든, 음악이든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깊이를 가질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미적 경험은 어떤 대상이 시간과 거리의 깊이를 만들어낼 때 일어난다. 나는 감각이 과학과 예술을 분리시킨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수치화된 온도가 아니라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에게 예술이란 시청각이든 촉각이든 어떤 감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LEE : 인간이 아닌 물질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발현되는 세계,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서는 물질성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것을 체험하고 깨닫는 것은 인간이다. 김윤철의 작업에서 인간이 사라진 것 같지만 인간 존재는 작업 이면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인간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과학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술도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을 상징하는 영역이라 볼 수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다.
KYC : 나는 인터뷰 등에서 인간이 중심이 아닌 세상, 비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것은 반인간주의가 아니라 비인간도 설 자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의 중심에 놓인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한계를 갖는다. 나는 모든 것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간 중심적 세계에서는 인간을 위해 자연을 개척하고, 동물을 사육하고 잡아먹으면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평한 세계에서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나는 세상을 인간을 위한 재료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중력이 똑같이 작용하는 민주주의를 인정한다. 전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전시는 작가가 만든 완결된 작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큐레이터, 관객, 사물이 모두 수평적인 상태에서 징후적으로 만나고 비인간적 요소들이 계속 관계 맺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고스 Argos>(2018)는 우주에서 방출되는 뮤온(muon) 입자가 공기 중에서 검출될 때마다 그 신호를 <임펄스 Impulse>(2018)에 보낸다. 여기에는 인간이 없다. 물질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입자들이 <아르고스>를 건들고 그것이 <임펄스>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임펄스> 내부를 흐르는 액체의 공기 방울과 파동을 눈으로 감지할 뿐이다. 사물들의 세계에서 인간은 감상자로 존재한다. 그것은 중심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놓이는 것이다.
<아르고스> 48x40cm, 가이거 뮐러 튜브,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2018,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임펄스> 230x200cm, 키네틱 설치, 2018,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LEE : 그래서 더 유체에 관심을 갖는 것인가? 유체는 고체와 달리 흐른다. 그런데 인간 존재 역시 고정되지 않고 정체성도 확정되지 않으며 끝없이 변화한다.
KYC : 지금은 유체에 주목하고 있다. 경계가 없고 평평할 뿐만 아니라 시간성을 함유한다는 점이 큰 이유다. 음악을 전공한 나의 강점은 시간을 다뤘다는 것이다. 음악은 시간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기에 미술의 영역에서 시간을 다루는 것에 적극적일 수 있었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물이 대지의 눈이며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유체는 시간에 근거한 사건을 경험케 하는 물질이다. 그렇다고 유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불에도 관심이 많다. 나는 끝없이 변화하는, 시간성을 느끼게 해주는 물질에 관심이 많다.
LEE : 과학적 과정을 포함하는 작업인데 고대의 신화가 생각난다. 실제 SF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고대적인 요소가 발견되기도 하고 근원적인 윤리나 철학적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인간 문명을 비관적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듣고 싶다. 작가의 시선이 비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KYC : 작업의 영감을 과학이나 기계적인 영역에서만 받는 것은 아니다. <임펄스>의 경우 시베리아 샤먼이 천지인(天地人)인 나무가 되기 위해 코스튬을 한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다. 지금 볼 때는 원시적이지만 과거에는 이런 샤먼의 행위가 하이 테크놀로지였다. 또한 샤먼은 종합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다.
일상에서의 성격은 낙천적이다. 다만 작가로서 인간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낙관이냐 비관이냐의 차원이 아닌 모두로부터 초연한 초월적 상태를 유지한다. 낙관이나 비관 모두 인간 중심적인 태도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파우스트 Faust』(1831)에서 악마를 만들었다고 하여 그가 세계를 비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낙관했다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때로 내 작품을 기괴하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다. 순수하게 기계적인 장치처럼 보이는 작품이 있어서인 것 같다. 처음에는 낯설어서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만 친숙해지면 그 속에서 세계의 미동들을 발견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