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9. 29.

본 글은 2020년 9월 3일(목)에 진행된 이문정과 김원진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김원진 (Kim, Wonjin)

LEE : 이문정, Kim : 김원진

LEE : 신진 작가이다 보니 작업에 관한 기본 정보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에서는 개별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는 데에 집중하고자 한다. <w의 이야기>(2020)부터 상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Kim : <w의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오류지대 The Land of Glitches>(2019)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오류지대>는 폐기된 책들을 1년 동안 수집해 쌓은 뒤, 시추한다는 생각으로 도무송을 이용해 쌓인 기록물들을 몇 가지 크기의 원형으로 오려낸 뒤 설치한 작품이다. 그런데 작업 과정에서 우연히 책 사이에 누군가가 끼워 넣은, 발신인과 수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잘린 조각으로 떨어져 나온 이 둥근 페이지만으로는 누가 받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이가 아예 보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조각에서부터 궁금증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나는 기록을 은폐하는 과정을 공간에 드러내는 것이 기억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기록된 텍스트들을 다 분쇄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일부만 남은 편지의 단편을 보니 그 앞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남아있는 단서를 바탕으로 앞뒤의 이야기가 자라나는 그 자체가 기억과 맞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리를 이루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란 의문이 생겼다. 나의 작업에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들을 사용한 지는 2011년부터 10년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책이 세계명작문학이었다. 세계명작소설은 자의든, 타의든 유년 시절에 가장 많이 읽게 되는 책이다. 제일 많이 소비되지만 그만큼 많이 폐기되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억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전하기 때문에 ‘유년 시절에 가장 많이 읽었던 세계명작문학의 기승전결이나 인과응보 같은 서사구조가 우리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서 진행한 작업이 <Melting strata project>(2020)이고, <Melting strata project>의 재료가 된 것이 <w의 이야기>였다.

<w의 이야기> 캔버스 위에 복합매체, 27.3x19cmx61pages, 2020, detail cut ⓒ김원진

<Melting strata project>를 기획하면서 이전에 <오류지대>를 구상하며 살펴봤던 고전 소설들을 다시 읽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승전결 중에 절정의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절정의 장면만 타이핑해서 모았는데, 수집한 이 절정의 문장들이 나에게는 어떤 이별의 이야기처럼 읽혔다. 이는 연인 사이의 이별 혹은 사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어제의 감정과 오늘의 감정 사이의 이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담긴 페이지들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60권의 책에서 발췌한 절정의 장면을 각각 한 화면에 넣어 60개의 실크스크린을 만들고 나의 일기에서 발췌한 이별의 기록들도 포함했다. 그런 다음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이 이별의 페이지를 찍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려 유화로 찍힌 글자가 눈물처럼 일순간 터지듯 흘러내리며 녹아 번지게 했다. 그렇게 이별의 장면을 찍고 녹이기를 반복해 레이어(layer)를 겹쳤다. 그 결과물이 <w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w의 이야기>가 <Melting strata project>의 재료가 되었다. <Melting strata project>는 <w의 이야기>에서 얻은 문장들을 잉크를 섞은 밀랍으로 떠낸 뒤 전시장에서 매일 새로운 문단을 일정한 시간 동안 녹이는 작업이었다. 내가 매일 앉아 기록하는 책상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열전구를 넣은 철판 구조물을 만들어 전시장에 설치하고, 그 위에 매일 한 문단씩 녹이기를 반복해 시간을 쌓아 기록의 흔적을 남겼다. 책에서 발췌된 이야기들이 예측 가능한 이야기라면 그것들이 녹고 얼룩화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Melting strata project>는 이런 상황을 특정한 공간 속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전시장에는 <w의 이야기>와 <Melting strata project>를 함께 설치했다.

<Melting strata project-day 1> 밀랍, 파라핀, 열판 설치, 75x150x73cm, 2020 ⓒ김원진

LEE : <w의 이야기>가 세계명작문학의 절정 부분과 작가 본인의 이별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했는데, 소설의 절정 부분 전부가 한 페이지에 다 담기지는 않을 것 같다. 일부를 선택해야 할 텐데 그 기준이 궁금하다.

Kim : 단락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내 선택이 들어갔다. 앞서 말했듯 절정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다양한 형태의 이별 이야기라 느껴졌고, 그런 단락들을 하나의 페이지로 정리했다. 나에게 읽는 과정은 늘 다시 기록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과 같아서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발췌된 단락들을 바탕으로 내 일기에서도 이별의 내용만 수집했다.

LEE : 하나의 캔버스에 세계명작문학 한 권의 절정 부분만 들어갔는가?

Kim : 실크스크린 한 판에는 하나의 책 속에서 꺼내 올린 페이지가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캔버스에 옮길 때에는 하나의 판으로만 찍거나 여러 개의 판,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저자의 다른 기록들을 여러 번 겹쳐서 찍기도 하면서 화면을 쌓았다.

LEE : 철판 위에서 밀랍 글씨가 녹는 시간은 예측 가능한가? 관객마다 다른 상태의 밀랍을 봤겠다.

Kim : 전시를 3주 정도 진행했는데, 매일 비정기적인 시간에 가서 조각으로 올려졌던 글자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될 때까지 녹였다. 첫날에는 밀랍 활자들이 빠르게 녹아 흘렀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점차 녹는 시간이 길어졌다. 전날 녹은 밀랍을 그대로 놓은 채 새로운 밀랍 단락을 올렸기 때문이다. 하나의 덩어리로 굳은 밀랍이 말랑말랑해지고 녹아야 비로소 새로 올린 글자가 녹아 흡수되기 시작한다. 첫날에는 밀랍 활자들이 녹는 데에 20분 정도 걸렸으나 나중에는 50분 정도까지 늘게 되었다.
전시장에 방문하는 관람객들은 언제 오는가에 따라 전날 녹다 남은, 굳은 밀랍판만 볼 수도 있고, 녹는 과정만 볼 수도 있었다. 내가 글자를 올리는 과정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 관객도 있었다. 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 노동집약적인 결과물, 흔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Melting strata project>에 담겨 있었다.

<Melting strata project-day 1> 밀랍, 파라핀, 열판 설치, 75x150x73cm, 2020 ⓒ김원진

LEE :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결과물은 현재 보관하고 있는가?

Kim : 밀랍을 올려놨던 철판째로 가져와 보관 중이다. 처음에는 잉크가 균일하게 섞여 한 가지 색의 깔끔한 밀랍판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밀랍의 밀도나 밀랍에 섞은 잉크의 농도가 모두 달라 글자가 밀랍판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남는 부분도 생겼다. 20일이 지난 후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란 문장만 녹지 않고 철판의 제일 모서리 부분으로 밀려 내려와 남았다. 그런 우연성이 흥미로웠다.

LEE : 매일 일기를 쓰는가?

Kim : 그렇다. 나는 계속 무언가를 써서 기록한다.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책상에서 하는 것 같다. 기록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작업할 때에는 기록한 것들을 그대로 남겨두기보다 번역할 수 없는 언어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치 기록을 응축시켜 하나의 흔적으로 남겨두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 같다.

<Bathos> 일기 태운 재, 밀랍, 석고, Size Variable, 2018~2019 ⓒ김원진

LEE : <Bathos>(2018~2019)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오류지대>에 대한 추가 설명도 듣고 싶다.

Kim : 사용하던 노트북이 고장나 데이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저장된 이미지의 일부가 날아가 원색으로 바뀐, 일명 글리치(Glitch) 현상이 일어난 사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진들이 나의 작업 <순간의 연대기 A Chronicle of the Moment>(2016~2018)나 <지층적 풍경>(2017)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리치는 일시적인 오동작이나 충돌 때문에 미세한 노이즈(오류)가 생겨 예기치 못한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오류지대> 이전까지는 거칠게 외벽이 드러난 전시 공간을 선호하기도 했고, <Bathos> 중 한 시리즈는 버려진 책장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류지대>를 위한 전시장은 정말 하얗고 네모난 화이트 큐브였다. 물론 그전에도 비슷한 조건의 공간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화이트 큐브가 마치 죽고 난 후의 공간, 말하자면 시간이 많이 흘러 진공 같은 상태로 변모해버린 공간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로 일어나는 것이며, 역사나 현시대의 풍경도 사소한 오류로 이뤄진 단면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잡지를 재단해 쌓아 올린 유연한 기둥들을 벽의 안과 밖으로 들어가고 나감을 반복하듯이 설치했다. 이것은 내면의 공간에 침투하고 벗어나는 상황, 하나의 풍경이자 그 순간의 장면 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평면 작업의 경우에는 기록으로 가득 채운 종이를 다시 한번 오일 크레용과 색연필로 덮었다. 그리고 이 화면을 1mm 두께의 얇고 긴 조각들로 자르고 미세하게 붙여나가는 과정을 반복해서 완성했다. 완성된 설치와 평면 드로잉 모두 인쇄된 글자나 내가 썼던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마치 분절된 점처럼 보인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자신의 공간에 남기는 개인적 기록인 일기와 달리 잡지나 신문, 책처럼 출판된 기록은 사회를 인식한 채 완성되는 집단의 기억과 같다. <오류지대>를 통해 화이트 큐브인 전시장을 시간이 굉장히 지난 누군가의 그리고 나의 내면의 방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08122019> Variable Installation, 2019, Installation View ⓒ김원진

한편 <Bathos>는 개인적 기록인 일기로만 구성된 작업이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더 많이 담았다. 일기를 태워 밀랍과 석고에 섞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어떤 재료에 섞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색이 다르다. 밀랍에는 재를 조금만 섞어도 색이 짙게 나타나고, 석고에는 아무리 섞어도 색이 연하게 나타난다. 이런 차이가 현재의 내가 지나간 순간을 받아들이는 차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사각의 틀을 만든 뒤 계획이나 측량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재와 밀랍, 석고를 섞어서 굳혔다. 이 우연의 결과에 따라 견고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한 돌조각 같은 형태가 만들어졌다. 약한 부분은 형태가 흐트러지며 부서지는 상태로 만들어졌다. ‘Bathos’는 그리스어로 깊이, 소설의 수사법에서는 비의도적 점강법을 의미한다. 이는 단편소설에서 절정을 향해 긴장이 고조되다가, 갑자기 허무하게 끝나는, 그래서 어떤 충격 효과를 주는 방법이다. 나는 매일의 일기가 단편소설 같다고 느낀다. 눈물이나 분노처럼 강한 감정을 쓰더라도 나중에 읽어보면 그때만큼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안개 뒤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감정 자체가 답답한 상태로 가두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하게 내려앉기도 한다. 그런 상황을 응축시켜 표현하고 싶었다.

LEE : 종이에 기록을 한 뒤 크레파스와 색연필로 덮었다고 했는데 무엇을 적었나?

Kim : 글과 그림 등이다. 나의 상념들, 사소하고 작은 생각들이다. <오류지대>의 작업 계획을 마친 뒤 일 년 동안 그리고 적었다. 이전에는 작은 수첩에 적던 것을 종이에 써 내려간 것이다.

LEE : 결국 모든 기록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작업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Kim : 어렸을 때의 일기처럼 오래전 적었던 글을 나중에 다시 보면 이질적이라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의 기록을 지우고, 이 기록이 드러난 물질을 축소시키려 하는 성향이 생겼다. 이런 습관적인 행위가 자연스레 작업에도 담기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기록을 없애려 해도 절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태우면 재가 남고, 자르면 종이 조각이 남고, 어떤 식으로든 남겨다는 점이 역사나 기억과 유사한 것 같다.

<The depth of distance 깊이의 바다> 기록 태운 재, 밀랍, 석고, each 22.5x15.2xXcm(책판형 크기), Variable Installation, 2017~2019 ⓒ김원진

LEE : 거의 역순으로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 같다. <깊이의 바다 The depth of distance>(2017~2019)는 어떤 작업인가?

Kim : 3년 동안 신문 같은 기록물을 모아서 만든 작업이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거동이 불편하셨다. 그 좁은 활동 반경 안에서 매일매일, 하루 종이 신문을 꼼꼼히 읽으셨다. 어떻게 보면 신문은 할아버지가 세상과 맞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매체였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읽으셨던 신문이 항상 머무시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순간 연약함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전달되도록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매일의 사회적 기록을 담은 신문을 모으고 태워 재로 남겼고, 이를 아주 얇은 판형으로 떠냈다. 그것을 전시장 바닥에 깔아 놓은 것이 <깊이의 바다>이다. 설치하며 일부러 깨뜨리기도 하고, 관객이 밟아서 깨질 수 있게 두었다. ‘of distance’는 상대적 거리를 의미한다. 객관적이라 여겨지는 물리적 거리인 1mm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인식의 거리감이 발현되도록 표현했다.

LEE : 녹이든, 부서지든 완벽히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남고 작가는 그것을 수거해온다. 남은 부산물들을 모아 작업에 활용할 계획이 있는가?

Kim : 각각의 작업을 다시 전시할 때에는 새로 제작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나의 작업을, 특히 이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기회가 생기거나 보다 긴 시간을 다루는 전시를 열게 된다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Stratal Landscape #020 지층적 풍경> 장지 위에 색연필, 꼴라쥬, 100x72.7cm, 2017 ⓒ김원진

LEE : <지층적 풍경 Stratal Landscape>(2017)은 시각적으로 <오류지대>, <순간의 연대기>(2019)와 닮았다.

Kim : <지층적 풍경>은 책의 옆면에서부터 시작된 작업이다. 나는 책의 옆면이 지층의 단면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책은 두루마리 형태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길었던 하나의 화면이 잘리고 페이지로 쌓이는 것이 순간의 지층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화면을 드로잉하고 그것을 시추한다는 생각으로 세로로 얇게 잘랐다. 시추된 기록의 얇은 가닥들을 재배치해 붙여간 작업이다. 간격은 1mm였는데 그것은 내가 잘라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시간의 운동성을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LEE : <오류지대>는 단색화처럼 균일하게 보이게 붙여져 있는 반면 <지층적 풍경>은 지층처럼 제목 그대로 지층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Kim : <오류지대>는 잘라낸 조각들을 모두 뒤섞어 순서가 어그러지도록 붙였기 때문에 이미지가 완전히 해체되어 사라졌다. <지층적 풍경>은 손을 대면 만질 수 있을 정도의 근거리 풍경들, 예를 들어 돌의 표면, 지면의 파편, 식물의 껍질들을 그린 뒤 잘라 재조합했는데 이때에는 섞지 않고 조금씩 어긋나게 붙였다. 어떤 형상을 예상하지 않고 진행했다.

LEE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상주의 회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Kim : 어떤 작품은 물에 비친 풍경 같기도 하다. 물에 비치는 이미지는 흐르는 느낌이다. 직선으로 얇고 날카롭게 자른 종이를 빈틈없이 붙였는데 이렇게 흘러가는 인상을 준다는 게 나에게도 신기하긴 하다. 울산에 머물며 작업했을 때 나의 주변에 있는 자연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 주변을 자주 방문했다. 그때 보니 지층의 단면이 단순히 순차적으로 쌓이는 게 아니었다. 융기와 변동이 일어나 응축되기도 했다. 그런 지점들에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풍경을 그리고 잘라 어긋나게 붙여가며 화면을 만들었다. 나에게 풍경을 그리고 기록한 드로잉을 자르고 다시 붙여가는 과정은 내가 그려낸 재료로 다시 한 번 새롭게 드로잉 하는 것과 같다.

LEE : 평면 작업의 경우 장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Kim : 섬유가 길어 한지가 더 질기고 튼튼하다. 또 견고하면서도 두루마리 양피지처럼 말아 다니기도 편하고, 말았다 펼쳐도 그 자국이 종이에 남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입체이기도 하고 평면이기도 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나의 작업 자체를 드로잉이라 생각하고 있다. 특히 평면 드로잉에서 바탕이 되는 종이는 나에게 새로운 형태의 공책과 같다.

<The Chronicles of Today 오늘의 연대기> 책의 사라진 부분 떠내기, 석고, Size Variable, 2016~2018 ⓒ김원진

LEE : <오늘의 연대기 The Chronicles of Today>(2016~2018)는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을 재료로 한다. 왜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을 선택했는가?

Kim : 처음에는 내 책을 갖고 작업했다. 내가 읽어온 모든 기록물이 작업이 되었다. 점차 기록된 기억의 속성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도서관에서 폐기되는 책이 재료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 맨 뒷장의 표지 안쪽에 누가 빌렸었는지 대출기록이 적혀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읽은 책을 보면 옆면에 손때가 타 있었다. 이런 것들이 누군가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고 떠난 흔적 같았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을 구하게 되었다. 책은 국립, 사립 도서관에 메일을 보낸 뒤 연락을 주는 도서관을 방문해 기증받았다. 책도 물질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삭는다. 그래서 일정 기간이 되면 버려져야 하는 주기가 있다. 기억, 기록을 담은 물질인 책이 삭아가는 과정, 그래서 도서관이라는 공간, 집단을 떠나야 하는 과정에 공감이 간다.

LEE : <오늘의 연대기>에서 책의 부분을 뜯어낸 뒤 빈 공간을 석고로 떠낸 이유는 무엇인가?

Kim : 이 작품의 경우 석고로 떠낸 것이 아니라 책을 뜯어서 쌓은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마치 책벌레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책의 내부에 칼집을 낸 다음 손으로 뜯어냈다. 한 권씩 구멍을 뚫은 다음 그 구멍들을 맞춰 여러 권의 책을 쌓았다. 외벽은 책인데 안에는 긴 구멍(통로)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 구멍에 석고를 부어 석고가 굳으면 책을 뜯어냈다. 그러면 내면의 빈 흔적을 드러내는 석고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거기에는 층층이 쌓인 책이 갖고 있던 페이지의 측면이 새겨지고, 표면에는 맞닿아 있던 책의 섬유나 작은 조각들이 붙는다. 우리가 도서관에서 읽는 책이 쓰인 시간은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았던 저자들의 기록이 동굴의 석순 혹은 석주처럼 하나로 엉겨 붙은 상황을 떠낸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떠낸 석고를 조립해 약 4m 높이로 제작했다. 현시대에 가시화할 수 있는 문화적 지층을 보여주고 싶었다.

<Square for you 너를 위한 광장> 책 태운 재, 밀랍, 석고, 5x5x120cm, 2018 ⓒ김원진

LEE : <너를 위한 광장 Square for you>(2018)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이 작품뿐 아니라 얇고 길게 쌓아 올리는 형상의 작업이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Kim : 얇고 길게 쌓아 올린 형상은 지층 단층을 시추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보통 지질학적 조사를 위한 시추를 그렇게 한다. 얇은 실린더 같은 형태로 지층의 단면을 수직 혹은 수평의 축으로 뽑아낸다. 지층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작업이어서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너를 위한 광장>은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을 태워 나온 재들로 이뤄진 작업이다. 기억의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진행했다. <너를 위한 광장>을 떠올릴 때, 도서관이라는 규정된 공간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기록의 공간이나 표현의 공간에 대한 고민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1960)을 떠올리기도 했다. 자연이 가까운 지역에 머물며 작업을 할 때였는데, 주변에 벌레가 많아 생활 공간으로 침입하는 벌레를 막기 위해 내가 머무르던 집 주변에 하얀 기피제와 같은 가루를 뿌려놨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분필로 구획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스스로 한정된 공간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마치 사각의 캔버스가 유한한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무한한 세계가 펼쳐지듯 말이다. 한계로 여겨지는 공간 안에 무한한 층위가 쌓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작업의 각 층은 한 권의 책에서 나온 재를 밀랍, 석고와 섞어 만든 것이다. 하나의 층에 하나의 책에서 나온 재가 담겨 있다. 옆에서 보면 사각으로, 위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기둥이어서 모서리가 날카롭고 얇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깨진다. 너와 나의 광장은 무한하지만 어쩌면 이미 구획지어져 있는 공간으로 존재할지 모른다. 견고해보이는 작품의 모서리가 미세하게 깨져가는 것을 통해 우리의 광장을 은유하려고 하였다.

<A Chronicle of the Moment-Letter(書信)> 장지 위에 색연필, 콜라쥬, 대만 원주민과의 인터뷰 기반, Variable Installation, 2018 ⓒ김원진

LEE : <A Chronicle of the Moment Letter(書信)>(2018)는 언어 사운드의 주파수, 문화와 역사 속에 남아있는 색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Kim : <A Chronicle of the Moment Letter(書信)>는 PIER2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대만의 가오슝(Gaoxiong)에서 석 달 동안 머물며 진행했던 작업이다. 대만의 산간지방에는 약 20부족이 넘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 그들이 지칭하는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나 색의 의미가 조금씩 달랐다. 그들은 기록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점점 그들의 언어가 잊혀지고 있었고, 후손들은 거의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에 문화도 멸종되어가고 있었다. 대만의 일부 대학에서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어가려는 방법 등을 연구하고 있지만 기록하지 못해 사라지는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나는 ‘원주민들의 언어를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시각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만에서 작업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후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발성과 표현 방식에 영감을 받아 그들의 언어를 주파수로 변환하고 이를 나의 방식으로 시각화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LEE : 문자화된 기억을 다룬다. 머릿속의 기억도 완벽히 정확한, 객관적인 기록이 될 수 없다. 문자로 기록될 때에는 여러 번의 창조 혹은 변형(가공)의 과정이 추가된다.

Kim : 나는 문자라는 것이 언제든 다시 녹게 될, 글자의 형태로 만든 양초 조각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정시키려 해도 미끄러지는 것이 기록된 기억인 것 같다.

LEE : 작품의 내용이 모호하고 중의적이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기억의 속성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Kim : 나는 주로 축적하는 노동집약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기록과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빠질 수 없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집적하고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꽤 단순한 행위가 반복되다 보니 점점 더 명확히 전달되는 것 같다. 한 번의 행위는 모호하지만 그 행위가 집적될수록 직접적인 상태로 변해간다.

LEE : 작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서정적이다. 사실 기억도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Kim : 나는 문학 장르 중에서 시를 가장 좋아한다. 시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작업도 시를 쓴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인류의 기록은 결국 개인의 경험이 쌓이고 이 순간들이 눈덩이처럼 뭉쳐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이 눈 뭉치들은 증발하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 단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작업에서 서정적인 인상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작업할 때 나는 수집한 재료의 분쇄를 통해 번역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와 내용이 흩뿌려지고 그런 순간에 서정성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단 작업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사라지고 다시 쌓이는 순간에 서정성이 있는 것 같다.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11082019> 종이 위에 색연필, 연필, 펜, 콜라쥬, 220x130cm, 2019 ⓒ김원진

LEE :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기억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차별화되는 김원진만의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Kim : 작업이란 작가의 고민을 물질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을 들여 집적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불안정함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란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놓인 것 같다. 나는 마치 시어를 공간에 배치해 하나의 운율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전에는 하나의 책, 하나의 페이지를 다룬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억의 기록이 모인 집합체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집단적 기억의 기록을 분쇄하다 보니 최근에는 그 안에 있는 페이지들, 문장 하나, 어구 하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LEE : 기억은 그 자체로 시간과 긴밀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물리적인 시간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보니 완성된 결과물만 보아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시간성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은 없는가?

Kim : 최근의 작업은 이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태까지는 축적된 결과물을 전시장에 흔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전시라는 시공간, 사람들과 작업이 마주하게 되는 접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군가가 나의 작업을 만나는 순간, 그 전시 공간 속에서 시간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하고 싶다.

LEE : 작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Kim : 나는 ‘과연 영혼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란 고민을 많이 한다. ‘기억하고, 떠올리고, 다시 되뇌는 과정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란 고민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피부로 만져지는 것들로 세계를 인식한다. 내가 촉각으로, 시각으로 인지한 물리적 세상을 재구성하고, 이를 물질로 공간에 드러내는 것이 나의 일 같다. 그리고 이 지점이 매력적이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위안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