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5.

본 글은 2021년 3월 15일(월)에 진행된 이문정과 김도균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김도균(kdk)

LEE : 이문정, kdk : 김도균

LEE : 일반적으로 회화나 조각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스케치, 에스키스를 한다. 사진의 경우 에스키스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작업 과정은 즉흥과 계획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kdk : 나의 작업은 선택으로 시작해서 선택으로 끝나는 것 같다. 작가로 작업을 시작한 초기라고 할 수 있는 학생 때에는 마치 사냥하듯이 이미지를 채집했기 때문에 에스키스에 해당하는 기획, 준비의 과정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점점 사전 조사와 같은 준비 과정을 거쳐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정리한 뒤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다만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것은 아니고 관찰이 에스키스나 스케치의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상황에 마주쳤을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대상을 선택하면 그것을 관찰하고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테스트 촬영을 거친 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기획한 뒤 본 촬영에 들어간다. 물론 아무리 계획적인 단계를 밟아가며 작업한다 해도 A부터 Z까지 완벽히 계획대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마다, 시리즈마다 조금씩 다르다. 유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때도 있다.

LEE : 테스트 촬영은 얼마나 하는가?

kdk : 나의 경우 아주 많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요즘엔 핸드폰이 테스트 촬영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가볍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이미지에 대한 스케치, 관련 메모, 기록 등을 위해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다.

<Az-N> 40x50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2002 ⓒkdk

LEE : 사진에서 프레임은 중요하다. 프레임 밖을 상상할 것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 프레임 안의 이미지이다. 프레임의 안과 밖의 경계선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kdk : 옛날에는 계획된 이미지가 오차 없이 그대로 프레임 안에 들어가게 촬영했다. 요즘은 조금 여유 있게 찍는다. 앞서 말했듯 작업 과정에서 유동적인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잘라낼 수도 있고 확대 혹은 축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나거나 촬영된 이미지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잘라 그것이 전체를 이루는 작품을 완성하는 식은 아니다.
프레임 안의 이미지가 확정되어도 그것을 유리 액자에 넣을지 디아섹으로 할지 등 여러 선택지가 있다. 나는 시리즈에 따라 크기도 다양하게 하고 여백과 같은 장치들을 활용하는 편이다. 초기작인 <ios>(2002~)의 경우만 해도 속도감이 담긴 이미지였기 때문에 위아래로 여백을 넣고, 좌우로는 여백을 넣지 않아 마치 옆으로 쓱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려 했다. 전시장에 걸 때에도 액자 없이 사진끼리 붙여서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것 역시 프레임 안과 밖의 상황에 대한 실험이 담긴 것이다. 프레임 안의 이미지와 밖의 상황이 연결되는 지점을 갖도록 의도하고 자르거나 여백 처리를 한다. 프레임 밖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도록 여지를 두는 편이다.

LEE : 하나의 작품이 전시되는 상황에 따라 크기, 여백이나 액자의 종류 같은 물리적인 조건이 바뀔 때도 있는가?

kdk : 그렇게는 안 한다. 처음 결정된 형식은 엄격하게 지킨다. 사진의 장점이자 아킬레스건 같은 게 무한 복제이다. 나는 한 작품의 에디션은 모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의도 하에 완성된 작품이 상황에 따라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전시장의 환경이나 조건 등에 따라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을 때가 아니라면 정해진 것을 지키려 한다.

LEE : 사각형의 프레임을 벗어난 사진을 선보일 생각은 없는가?

kdk : 카메라 렌즈는 원래 원형이기 때문에 결국 렌즈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동그랗다. 카메라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미지 서클(image circle)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서 사각형으로 잘라낸 것을 우리가 사진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미지 서클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흐려지기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는 영역만 크롭(crop)하는 거다. 제프 월(Jeff Wall)은 동그란 형태의 사진을 선보이기도 했고, 사각을 벗어난 작업도 많다. 나 역시 사각의 프레임이라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사각 프레임으로 돌아오게 된다. 가장 익숙한 것이라 편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사진의 테크닉이나 메커니즘이 사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사각형 안에서도 정사각형, 직사각형, 직사각형도 가로로 길게 할지, 세로로 길게 할지 등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사각형 안에서 놀며 거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선택을 즐기고 있다. 프레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이미지나 색이 선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위해 기술도 발전해왔다. 결국 사람의 눈과 가장 비슷하게 나아가는 것 같다. 나의 경우 관용을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화질이 안 좋아 보이는 이미지를 선택하기도 한다.

<f.A-1> 120x150, C-print Mounted on Plexiglas, 2003 ⓒkdk

LEE : 전체적으로 흑백(명도)이 강조되는 작품들이 많아 보인다. 그와 같은 색조를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남다른 이유가 있는가?

kdk : 발표된 작품만 놓고 보면 초기에는 컬러풀한 대상들을 찍다가 점점 모노톤으로 간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내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서구 모더니즘 시대의 건물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나 바우하우스(Bauhaus) 시절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등의 건물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 컬러풀한 것이 많았다. 그러다 건물을 찍은 사진은 나의 사진이라기보다 그들의 작품을 찍은 사진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건물의 부분이나 구석, 모서리 등으로 공간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선보이며 자연스레 색이 빠지게 되었다. 이유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취향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내 홈페이지에 공개된 작품들은 대부분 채도가 빠진 흑백이다. 그렇다고 모노톤만 추구하진 않는다. 또 색채가 풍부한 것을 좋아하기도 해서 시리즈마다 다르다. 홈페이지의 ‘etc’에 들어가면 컬러풀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나는 메인 작업과 서브(sub) 작업을 분류한다. 메인에는 톤 다운되거나 흑백톤의 작품을, 서브에는 발랄하고 색이 부각되는 작품이 많다.

[p] installation view, 2015, perigee gallery, seoul ⓒkdk

LEE : 김도균의 사진은 정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핵심만 남기다 보니 색도 점점 빠지게 된 것은 아닌가?

kdk : 조금 복합적이다. 시각적으로 몬드리안(Piet Mondrian)이나 이우환의 작업처럼 미니멀한 것들을 좋아한다.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들로 이뤄진 작업을 좋아하고, 그와 같은 작업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작업 초기부터이다. 처음에는 그 개념이나 내용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w>(2007~)나 <p>(2015~)는 해당 작업을 발표하기 훨씬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시리즈이다. 2001년경부터 이와 같은 작업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냥 말로 그와 같은 이미지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작품으로 선보이는 것은 다르다. 신진 작가가 처음부터 그처럼 간결하고 정제된, 구성 요소가 없는 작품을 발표하면 그 개념이나 깊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의 작업의 형식과 성격 등이 어느 정도 구축된 이후 발표했다. 스스로도 조금 더 훈련하고 내실을 다진 다음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sf.Sel-11> 180x220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Wood frame, 2008 ⓒkdk

LEE : 사진의 크기 선택은 언제, 어떻게 하는가? 똑같은 이미지라 할지라도 크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kdk : ‘이런 조건에서는 이 크기로 하겠다’처럼 공식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말로 설명하긴 애매한데 그동안 축적된 훈련이나 학습에 근거해 결정한다. 크기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항상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크기와 스케일의 반전이다.
작품의 크기에 따라 사용하는 카메라의 종류가 결정된다. 화질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필름의 크기도 달라진다. <sf>(2004~) 시리즈 중 하나인 <sf.Sel-11>(2008)은 가로가 220cm이다. <sf.Sel-11>은 8x10inch의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이 필름이 들어가는 카메라는 엄청나게 크다. 그마저도 한 번에 찍을 수 없어 가로, 세로로 나누어 찍은 뒤 두 장의 필름을 스캔해서 합쳤다. <ios>나 <g>(2015~)처럼 크지 않은 사진은 굳이 8x10인치 필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경우에 따라 4x5inch나 35mm 카메라 등을 선택한다.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할 때도 있다. 그런데 크기를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크기를 확대하는 것은 어려워 원하는 작품보다 조금 더 큰 사진을 인화하더라도 무리 없는 카메라를 선택하는 편이다.
사진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정해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A4, A3가 아니라 4x5inch, 8x10inch로 주로 사진에서만 쓰는 비율이 있다. 나는 필름의 원 비율을 고수하는 편이다.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을 살려보자는 생각이 있다.

LEE : 크기를 원하는 대로 무한정으로 확대할 수 있는가?

kdk :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디아섹이라는 액자 방식이 나오면서 10m짜리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인화지의 폭이 최대 180cm이기 때문에 인화할 경우 길이는 무한대이고 폭은 한계가 있다. 용지를 이어 붙이거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법들이 있지만 나는 180cm 폭 안에서 작업하는 편이다.

<sf.Str-2> 160x200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Wood frame, 2009 ⓒkdk

LEE :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모두 사용한다고 했는데, 본인이 느끼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무엇인가?

kdk :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의 가장 큰 차이는 그레인(grain)과 픽셀(pixel)이다. 그레인은 점이고 픽셀은 사각형이다. 보여주는 결과물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내 눈에는 사각 픽셀이 모인 이미지와 점이 모인 이미지의 느낌이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정말 주관적인 것일 수 있고 나의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인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픽셀로 이뤄진 이미지는 그레인으로 이뤄진 이미지보다 경계면이 날카롭다. 나는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작해 디지털 사진으로 넘어오는 과도기를 겪은 사람이라 둘을 다 알 수 있는 낀 세대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날로그 사진 작업을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 같다.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굳이 아날로그 사진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날로그 작업을 계속 하는 이유는 내 감성이 일정 부분 그레인에 맞춰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하이브리드적인 작업이다. 최첨단의 디지털 테크닉을 이용해 아날로그와 같은 이미지를 뽑아내는 사진, 디지털로 아나로그를 향하는 사진을 보여주고 싶다. <g>가 그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LEE : 현재 즐겨 사용하는 카메라가 있는가?

kdk : 지금까지는 있다. 1996년부터 25년간 사용한 카메라가 있다. 린호프 테크니카(Linhof Technika)로 4x5inch 필름이 들어가는 카메라이다. 사진작가이니 당연히 나에게 카메라는 소중하고 잘 관리하고 있지만 애지중지하진 않는다. 25년 동안 쓰는데 큰 상처 없이 쓰고 있다.

LEE : 장비의 영향은 어느 정도 받는가?

kdk : 좋은 카메라를 사용하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비례하진 않는다. 사진에서 장비가 중요하고 도움이 되긴 하지만 좋은 장비를 갖고 있다고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계에 지배받아서는 안 되고 기계를 지배해야 한다. 나의 오른손을 쓰듯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작업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다.’

LEE : 누구나 일상에서 사진을 찍는 시대이다. 일상과 일이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kdk : 앞서 말한 서브 작업이 나의 일상에서 자연스레 사진으로 생활하고 기록한 결과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사진을 이렇게 즐긴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LEE : 작품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촬영 뒤 이미지 보정이나 편집 등은 어느 정도 이뤄지는지, 관련해 본인만의 기준이나 규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kdk : 사진을 처음 찍은 그대로 인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엄격하게 정해놓은 규칙이 없다. 해당 작업의 개념에 맞게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건 있다. 처음부터 계획이 잘 짜였다면 사진을 찍은 뒤 손볼 부분이 거의 없다. 애초에 모든 상황을 계획하고 정리한 뒤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중에 뭔가를 심하게 만지고 편집하는 과정, 보정이나 합성 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201608301320_f32 s1_30_37°20'4_N 126°50'9_E 11°N> 60x40cm, Gelatin silver print Wood frame ⓒkdk

LEE : <g> 시리즈의 제작 과정, 그리고 이 작업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사진에서 중간회색(middle gray)이 왜 중요한 기준이자 시작점인지 궁금하다.

kdk : 카메라 노출은 중간회색에 맞춰져 있다. 중간회색은 0점, 기준점으로 반사율이 18%, 농도는 50%인 회색이다. 카메라로 단일 톤(tone)만을 찍으면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검은색 판을 찍으면 검은색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초점도 잘 안 잡히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검은색이 아니라 적당한 검은색으로 나온다. 그런데 중간회색은 그것만 찍어도 보이는 그대로 잘 나온다. 그래서 노출을 맞출 수 있는 그레이카드(gray card)가 제품으로 나온다. 다양한 색이 있는 대상을 찍을 때 대상에 노출을 맞추면 다양한 색의 평균치에 카메라의 노출이 맞춰진다. 그런데 중간회색에 노출을 맞춘 뒤 대상을 찍으면 각각의 색이 모두 정확히 나온다. 역으로 단일한 톤의 피사체를 카메라가 노출계가 지시하는 적정 노출 그대로 촬영하면, 흑백(명도)으로 바꿨을 때 모두 중간회색이 된다. 검은색도 흰색도 카메라가 지시하는 노출대로 찍으면 중간회색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한, 현대 미술에서 중간회색을 작업화한 선례가 없다. 그동안 진행했던 내 작업의 키워드를 함께 생각했을 때 중간회색과 연결점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모노톤의 하늘을 피사체로 작업하게 되었고 그것이 <g> 시리즈의 시작이다. 날짜와 위도, 경도 GPS 좌표, 노출값 등을 결합해 <g> 시리즈의 개별 작품 제목을 지었다. 2015년 8월 15일부터 이 시작했는데, 4x5inch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뒤 핸드폰으로 한 번 더 찍고, 나침반을 캡쳐하고 노출계를 찍어놓는 식으로 정리했다. 사진 찍을 때마다 작업 노트의 좌측에는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우측에는 관련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은 인화한다.
사진 매체 그 자체에 집중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사진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동시대 미술로서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 작업을 사진이라는 장르에 한정하지 않고 카메라와 사진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미술로 바라봐주길 원한다. 사진을 전공한 작가이기 때문에 사진의 매체성을 활용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p.15.4-inch MacBook Pro Z0MK00027 MBP 15.4 2.3 16GB 256Flash KOR> 50x60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iron frame, 2015 ⓒkdk

LEE : <p> 시리즈를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kdk : <p> 시리즈뿐 아니라 내 작업을 아우르는 키워드 중 하나가 공간이다. 김도균이 생각하는 공간은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고 보여주는 작업 중 하나가 <p>이다. 상품 포장재(package)의 일부를 찍은 건데 모서리를 찍은 <w>와 비교해볼 수 있다. <w>는 집, 학교, 전시장처럼 나와 관련된 실제 공간의 모서리를 찍어 일루전(illusion)을 생각하게 한다. 실재하는 3차원 공간을 사진으로 찍어 2차원적인 평면 이미지로 바꾸었을 때 모서리가 들어간 것인지 튀어나온 것인지, 큰지 작은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다. <p> 시리즈에서는 내가 샀던 물건의 포장 중 흰 것만 모아 클로즈업해 촬영했다. 그랬더니 실제 공간의 모서리와 똑같은 차원과 원근감, 스케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공간의 모서리가 아니라 물건이 포장되어 있던 포장재의 모서리인데도 말이다. 사실 각종 포장재들은 그 자체로 예쁘다. ‘내가 만약 개미 만한 크기라면 이 포장 박스가 얼마나 멋진 구조물로 보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작업했다.

LEE : 시각적으로 <p> 시리즈와는 대비되어 보이는 <b> 시리즈의 첫인상은 밤하늘을 찍은 것 같았는데, 평범한 일상적 오브제를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것이라는 설명을 읽고 놀랐다.

kdk : 내 작업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p>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b>(2011~) 시리즈도 함께 계획했다. 2012년 갤러리2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발표된 <b> 시리즈는 검은색 사물을 찍은 사진 중에 별처럼 보이는 이미지들과 진짜 별을 찍은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에 갔을 때 무조건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많은 별을 본 날이 있었다. 새벽 3시에 앞서 말했던 4x5inch 카메라로 별을 찍었다. 이후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뉴칼레도니아에 2주 정도 머문 적이 있다. 당시 별을 볼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했지만 날이 흐려 별이 하나도 안 보였다. 하루는 낮잠을 자려고 암막 커튼을 쳤는데 커튼의 구멍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너무나 별 같았다. 그래서 그 상황을 찍어놓은 것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모아 <b> 시리즈를 만들었다. 당시 갤러리2 공간은 정말 밝은 화이트 큐브였는데 전체를 검은색으로 칠하고 사진도 가능한 최대의 크기로 인화했다. 별처럼 보이는 가짜 상황을 벽에 걸고, 진짜 별을 찍은 사진을 마치 물에 비친 것처럼 보이게 바닥에 놓았다. 실제 별은 3시간 동안 장노출로 찍어서 그 자체로 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또 벽에 걸린 사진은 무광, 바닥에 놓인 사진은 유광으로 처리해 실제로 물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하늘의 별은 바닥에 놓이고 사물이 벽에 걸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상황이 반대인 상황을 제시하는 것은 이전부터 내가 지속해온 반전과도 연결된다.

[b] installation view, 2012, Gallery 2, seoul ⓒkdk

LEE : 당시 영상 작업도 발표했다.

kdk : 갤러리에 들어서면 들릴 듯 말 듯 들리는 음악이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 허밍 어반 스테레오(Humming Urban Stereo)로 활동하는 이지린에게 <b>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니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초대장을 CD로 제작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영상과 음악을 감상한 뒤 궁금해서 전시를 보러 오게 하는 콘셉트였다. 영상은 CF감독인 김인태에게 맡겼다.

LEE : 제목을 알파벳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미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최대한 정제시키기 위한 것인가? 무제보다도 정보가 없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제목을 통한 연상 작용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시각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어 보인다.

LEE : 나는 작업이 한눈에 읽히거나 제목만으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게 싫다. 어찌 보면 친절하지 않은 작업 방식일 수도 있겠으나 제목이나 단편적인 정보들을 배제하고 작가의 의도 등을 상상하게 만들면 좋겠다. 그런 취지에서 마치 이니셜 같은 제목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 작업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작품만 본 사람들과 나에게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 사이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 같다.
이런 제목은 작업을 정리하거나 분류할 때 굉장히 실용적이다. 개별 작품의 제목은 마치 유럽 자동차의 번호판과 유사한 형식이다. 피사체, 장소, 날짜 등이 모두 이니셜과 숫자로 정리되어 있다.

LEE : 현실 속의 대상들을 촬영하는데 매우 단순하면서 추상적이다. 손길이 아주 많이 간 단순함이다. 요소들이 줄어들수록 작가의 표현이 축적되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사진의 가장 주요한 특성으로 생각하는 기록성을 최소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같은 의도가 담겨 있는가? 한편으로 시각적인 형식, 창작자로서의 예술가가 강조되었던 모더니즘 미술이 떠오르기도 한다.

kdk : 점점 더 정제되고 있는 것은 맞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나는 내가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이 모두 모더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나는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그것을 작업에 투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업적으로는 하이브리드를 원한다. 손편지의 가치나 느낌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메일이나 SNS로 글을 써서 보내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굳이 손편지만을 고수할 생각은 없다. 내용은 모더니즘을 추구하지만 방법적으로는 현재(요즈음)를 추구해서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이슈나 사건들보다는 자연히 조형성이나 매체에 집중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사진의 기록성을 인식하지만, 그것을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면서 작업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진을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어 양파 껍질 벗기듯이 하나하나 파고들고 있다. 현대 미술의 매체로서 사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작업의 주된 목표이다. 사진은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로 찍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찍을 수 없다. 그래서 객관성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매체이다. 나는 거기에 작가인 내가 더 개입하여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가 공부한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는 유형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진이 주류를 이뤘던 곳인데, 막상 가서 배워보니 객관적인 매체로 작가의 주관을 얼마나 잘 섞어서 보여주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고 이미 있는 대상들을 나만의 작품으로 보여주는 게 재미있다. 이건 마지막 질문인 ‘왜 사진인가?’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LEE : 전반적으로 현대 문명의 결과물들이 피사체인 것 같다. 사진 역시 과학기술, 문명과 긴밀한 장르이다. 작품에 현대 문명을 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kdk : 의도한 것은 아닌데 질문을 받고 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도는 없었다. 아직 전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g> 시리즈는 하늘을 찍었다.

<f.D-1> 150x120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2002 ⓒkdk

LEE : 건축물과 관련된 사진을 보다 생각났다. 건축물은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가 사진이다. 그런데 사진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실재하는 공간이나 덩어리를 갖지 않는다. 이미지인 사진 안에 거대한 공간과 덩어리를 가진 건축이 담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떤 물질성이나 공간성을 함유하지 않는 사진 자체의 특성을 부각시킨다. 실제로 일부의 사진 속 건축물은 매우 평평해 보인다.

kdk : 사진은 3D를 2D로 만드는 매체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질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도로 건축물을 찍은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든 모더니즘 시대의 건물을 좋아해서 그것들을 찍었다. 공간이란 키워드가 나온 것은 그 이후이다. 구체적인 대상을 찍기 시작해서 점점 공간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지금은 차원(dimension)이 내 작업의 키워드이다. 처음에는 진짜 단순하게 내가 몬드리안 그림을 좋아하는데 몬드리안의 그림 같은 건물을 찾아 몬드리안 그림처럼 보이게 사진을 찍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3D인 건물을 2D로 보여줄 때 생기는 상황이 두드러지는 <fD-1>(2002)과 같은 사진이 나왔다. <fD-1>을 보면 중앙의 건물은 마치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2D로 보이지만 그 좌우의 건물은 3D로 투시가 보인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접근이었다.
나의 작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공간, 차원으로 변화했다고 해서 지금 이와 같은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002년부터의 생각을 이어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내 작업 대부분은 종결되지 않고 계속 쌓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w.stdl.njp-02> 90x70cm, Gelatin silver print Wood frame, 2016 ⓒkdk

LEE : <w>의 경우 모서리 공간들을 촬영하다 보니 공간의 구체적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관념적인 공간이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구체적인 물체가 아닌 빈 공간이 촬영의 대상이 된 것이기도 하다. 피사체 혹은 찍는다는 행위에 관한 근원적인 탐구처럼 보인다.

kdk : 사진이 있는 것을 찍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없는 것을 찍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분명 있는 것을 찍었는데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공간은 비어있지만 모서리가 찍힌 거다. 모서리는 들어가 있는데 이미지만으로 접하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프레임도 작용한다. 프레임 밖을 상상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프레임 안이 전부라면 전부일 수도 있고, 확장하면 끝없이 확장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흰색 좌대의 모서리를 찍는다면 그 이미지는 공간의 모서리를 찍은 사진과 같을 것이다. 좌대의 튀어나온 모서리를 찍든 공간의 들어간 모서리를 찍든 2D로는 똑같다. 작업하며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었다.

LEE : 왜 사진인가?

kdk : 결과론적인 이야기인 것 같다. 처음에는 왜 사진인지 몰랐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회화를, 입체를 잘 만드는 사람이 조소를 전공하듯 무언가를 재현하는 데에 있어 기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사진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선택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정말 재미있고 신기한 영역이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데 3D를 2D로 바꾸려고 압축을 하다 보니 나오게 된 버그(bug) 같은 게 일루전 아닐까 싶다. 차원이 바뀌면서 뒤틀려 일루전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것을 시각적으로 증명해나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사진이란 매체가 이런 탐구에 잘 어울리는 특화된 매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