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인터뷰 [민족적 정체성]
키워드 인터뷰는 동시대 예술의 이슈와 관련된 질문에 대한 미술인들의 답변을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답변은 인터뷰를 진행한 순서대로 업데이트 됩니다.

질문
우리는 국제성과 지역성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계 해체와 다문화, 유목과 이산, 혼종성 등은 오늘날의 사회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과학기술과 정보, 자본과 상품, 문화와 예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인 이동과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해주길 바란다.

작가 백현진 (Bek, Hyunjin) 2019. 04.23. (인터뷰-2019. 04. 11.)
개인적으로 19세기까지 동양과 서양의 그림이 왜 그렇게 다른지 정말 궁금했었다. 과거의 동양과 서양은 아예 세상과 물질을 다르게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단기간에 이렇게 섞였다. 그래서 흥미롭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고받는 영향의 불균형이 문제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만약 내가 다른 민족의 사람처럼 그리려고 한다면 그건 주석 달기에 불과하다. 한국, 서울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나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역사도 알아야 하고, 문명의 흐름도 봐야 한다.
한 언어권에 속하는 지역에서 최소 단위로 약 백 년 정도 지속되었던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정체성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게 꼭 한복이나 단청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해도 한 백 년 정도 지속성을 보였다면 한국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의미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한복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한국을 상징한다고 해서 그릴 수는 없다. 한복을 그린다고 정체성이 바로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태도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과거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오늘날에는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렇게 뒤섞이고 변화한 것인지에 등에 대해 숙고하다 보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의 작업에도 반영되는 것 같다.

작가 권오상 (Gwon, Osang) 2019. 05.13. (인터뷰-2019. 05. 09.)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내가 해외에 오랫동안 거주해본 경험이 없어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평소에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이지만 주로 한국인들만 모여 살고 있다. 나는 민족성이란 같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 보여질 때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예술에 발현된 민족성이란 일정 부분에서 제3세계적인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앵글로색슨(Anglo-Saxon)의 정체성을,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노르딕(Nordic), 그러니까 바이킹(Viking)의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흑인 작가들의 작업에는 민족적 정체성이 강하게 담긴다. 다른 민족이 주류인 집단에 있다 보니 민족성을 드러낼 상황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민족적 정체성을 느끼며 작업하지 않는다. 초기 작업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민족적 정체성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나의 작업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서의 무언가가 담긴다고 생각한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에 가서 실재하는 작품을 보는 것보다 미술관 아트숍에서 구입한 도록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도록(사진)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원본을 직접적으로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평상시에 미술관에 자주 가는 사람도 많진 않지만, 일상에서 로댕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로댕 작품 표면의 터치(touch)는 도판을 보고 상상한 것이다. 한국에서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각이라 말하는 영역은 서양 미술의 전통을 근간으로 한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그래서 서양 미술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로댕의 진품을 마주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로댕의 작업과 같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자체가 제3세계의 정체성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임에도 자신이 영향받은 지나간 시대의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상황이 나의 작업에 투영되지 않았나 한다. 다시 말해, 내가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의 조각을 본뜬 형태를 만들 때 (진품이 아닌 도판을 접하는 것처럼)검색한 이미지를 통해 형태를 얻고, 검색을 통해 얻은 사진을 붙어나가는 방식에 제3세계적인 정체성이 담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고들 한다.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학생 때부터 사진을 붙여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거다.
한편 매스패턴스(Masspatterns, 2013-present)에는 아시아(Asia) 오브제들이 등장하고 한국적인 것들도 등장한다. 싱가포르(Singapore)에서 레지던스(residence)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나는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는 아시아라는 연대감이 강한 것 같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서양 미술의 역사뿐 아니라 아시아 미술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했었나?’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에 경도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을 찍고 그것을 작품에 담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작업 자체가 서울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적합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작업 방식이나 영감을 받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와 재료적인 요소까지 모두 포함해 한국 사람이기에 할 수 있을 만한 작업이다.

작가 이정윤 (Lee, Jung Yoon) 2019. 05.13. (인터뷰-2019. 05. 09.)
한국적 정체성을 작업에 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작업해본 적은 없다.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민족성이 담기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 일상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인이어서라기보다 이정윤이어서 가능한 작업을 하고 있다. 회화 작업에 한지를 사용하는 게 한국적 정체성을 담아내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한국의 종이어서 한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코끼리(생명체)의 살갗, 인간의 껍데기 같은 느낌이어서 한지를 선택했다. 종이가 갖고 있는 물질적 특성에 매력을 느낀 거다. 물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이 담길 수 있으며, 내 작업을 본 관객이 그것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입체적이라 생각한다. 모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생각은 시대마다, 연령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이미지, 재료, 색, 철학적 개념 하나 혹은 몇 개를 지목해 표현하며 한국적인 것을 담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민족성을 주된 주제로 생각하며 작업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적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고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국가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작업에 담기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 생각한다.
나의 윗세대 작가분들의 경우, 장기간 유학 생활 등을 하시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민족적 뿌리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분들은 전통에 대한 바탕을 우리보다 많이 갖고 계셨다. 그러나 1980년대에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서구화된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 대부분이 서구적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서양의 가옥구조에 살고 서양 문물이 기반이 된 교육 시스템 안에서 성장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메일로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유학을 준비할 때도 인터넷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또한 매스미디어(mass media)를 통해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이 아닌 나라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대학생 때 서양 미술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 시절에도 내가 제3세계에서 온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유학 시절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시 서구인들은 내가 하이힐에 주목하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한국적이라 생각했다. 이런 주제는 서양에서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적 배경이 다른 아시아에서 온 작가이기 때문이라 이해했던 것이다.
요즘 국악가, 한국무용가와 협업하여 공연을 진행하고 있어 가까이에서 한국의 전통 예술을 경험하고 있다. 매우 매력적이다. 그 매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져 한국무용사와 국악사, 나아가 한국 예술의 역사, 한국의 정서와 음양오행 등을 (과거에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던 것처럼)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작업에 그와 같은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의한 거다. 내가 만약 한국적인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담아낸다면 그것은 내 삶에 어떤 전환점이 생겨서일 것이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타 장르와 접점이 생기거나, 아니면 어떤 역사적 순간을 맞닥뜨리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 이동욱 (Lee, dongwook) 2019. 05.21. (인터뷰-2019. 05. 13.)
그동안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고 국제적인 이동과 교류의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에 나의 의견을 명확히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이에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일부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입장만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면)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적 차이를 느낄 때가 있기에 당연히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민족적 뿌리나 거주하는 지역에 의해 생성되는 정체성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민족적 정체성 못지않게 개개인이 머무르는 지역에 따른 정체성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정보, 자본, 문화의 국가적 소유권 등을 생각할 때 민족적 정체성과 같은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는 비교 대상이 있을 때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한 지역에 한 민족의 것만 존재한다면 굳이 민족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오래전부터 나이키(Nike)의 제품을 사용해왔다. 과거에는 나이키를 미국의 브랜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같은 인식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30여 년 넘게 나이키를 소비해 왔고 그 이미지에 익숙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현재의 나(의 인식과 일상)에게 다른 우리나라 스포츠 브랜드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비교 대상이 생겨 그 소유권의 경계가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계는 항상 존재하지만 그것을 인지하는 개개인의 차이에 의해 다르게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작가 이완 (Lee, Wan) 2019. 10.23. (인터뷰-2019. 06. 07.)
어려운 질문이다.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민족이라는 것은 국가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메이드 인> 시리즈를 작업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이라기보다는 국가마다 갖는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전통 같은 것들을 많이 경험해봤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한 국가 안에 다른 언어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지금도 민족적 갈등이나 차별 등은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한국은 전통적인 것은 있어도 전통은 끊어지고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전통적인 것들은 이미 자본화되어서 이제는 소비되는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최근 몇 년 동안 방문했던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곳 역시 수백,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온 문화적 정체성이 굉장히 빠르게 이미지화되고 신자유주의를 통해 소비되는 대상물로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했던 국가 중 한 불교국가를 예로 들자면 그 나라에서 금은 애초에 어떤 재화나 자본의 상징물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금이 정신적인 상징물이었고 부처(Buddha)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금을 사서 불상에 붙이고 공양을 했었다. 지금은 금이 재화가 되어 불상에 있는 금을 오히려 훔쳐 가는 사람이 생겼고 사원은 빠르게 관광지화되고 있다.
예전에 사람들과 전통의 복원과 관련된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현재 전통이라 생각하는 것의 많은 부분이 조선 시대 봉건제도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것이 복원되면 계급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나온 문화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조선 시대의 전통도 복원되어야 하는 것일까? 답변은 지금 상황에 맞게 복원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전통을 대상화한 소재주의라고 답했다. 또한 오늘날 무속, 김치, 동양화, 국악이라고 불리는 것을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공동으로 동의하는 것들이 하나의 형식이 되어 자리 잡으면 문화가 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의 교집합이 그것에 대한 관념과 이미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전에 했던 작업 중에 민족과 연결되는 작업으로 <우리란 무엇인가>(2013)를 들 수 있다. 작업을 위해 사람들에게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었다. 때때로 나는 우리라는 개념 자체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고 실존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우리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강하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한국인이나 혹은 국적이 한국인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도 한민족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내가 소속된 집단을 우리라 부른다. 내가 포함되지 않으면 저들이 된다. 우리 안에서는 서로 간에 길게 말하지 않아도 합의되는 지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안에선 다른 의견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팔로우할 때도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사람으로서 팔로우하는 심리 현상이 있다. 같은 종교나 정파를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차별한다면 당대의 문명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만약 출생률이 계속 낮아져 인구가 계속 줄어들게 되면, 국가는 사회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종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민족적 정체성이 얼마나 남아 있게 될까? 특정한 국가에서 많은 이민자가 온다면 그들의 풍속과 문화가 소비될 것이고 곧 그렇게 믹스(mix)된 문화가 한국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사실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현상일 뿐이다. 민족은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쪼개지기도 한다. 항상 그 중심엔 ‘우리냐 저들이냐’의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