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6 07.

본 글은 2022년 3월 18일(금)에 진행된 이문정과 최고은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최고은 (Choi, Goen)

LEE : 이문정, Choi : 최고은

LEE : 버려진 가전제품을 재료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 있다. 그중 하나가 생산(자)과 소비(자)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 생존이나 정신적 삶을 위한 필수적 요소들 외의 소유물이 늘어나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 수동적인 소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문제이다. 최근 들어 흰색이나 무채색 계열을 벗어난 가전제품이 늘었다. 색을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는 획일화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선택지가 조금 늘어난 것뿐이며 규격화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오히려 눈속임이 더 정교해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능성에 중심을 두고 생산, 소비되었던 가전제품까지도 생산 → 구입 → 폐기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소비 욕구를 자극하며,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누구도 소비시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가 행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현상을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이야기하는데 미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선으로만 다루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또한 현대 소비사회와 인간을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수동성이나 무력함이 필요 이상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다.

Choi : 내 작업은 시스템화된 도시 체계에서 겪는, 스스로 이해하고 소화하기 힘들었던 피상적인 감정들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작업 초기에는 실내의 정적인 물건들을 다루었는데 나 자신을 그 물건들과 같은 수동적인 객체의 편에 두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작업을 전개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온전한 객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든 체계의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보다 개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둘러싼 경직된 관계들을 유연하게 다룰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작업자이자 창작자지만 스스로를 시판된 물건을 소비하는 구매자(shopper)쯤으로 여길 때가 많다.

<머터리얼 풀 Material Pool> 에어컨, 냉장고, 샤시, 거울, 지우개, 가변 크기, [사물들: 조각적 시도], 두산갤러리 서울, 2017 ⓒ최고은

LEE : 시스템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게임을 하듯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Choi : 그 안에서도 스스로 자율적일 수 있는 순간을 자주 만들어 나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기성품이라는 일종의 완결된 체계를 부수고 자르고 분해해 다른 규칙이나 분류로 재조합하고 변형하는데 이를 통해 하고 싶은 건 가능성이나 여지를 두는 것이다. 이때 나는 물건을 자르면서도 잘리는 대상의 상황에 투사하게 되는데 그 둘을 오가는 낙차나 충격이 감각을 풍부하게 증폭시켜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끔 롤플레잉(role-playing)에 빗대 이런 재료를 다루는 경험을 설명하기도 한다.

LEE : 스스로를 자르는 주체이면서도 잘리는 대상이라고 칭했는데 잘리는 존재란 어떤 의미인가?

Choi : 초기 작업에서는 주로 실내에 정주하는 속성의 가전이나 가구를 선택해 그것을 가져와 내 방식으로 자르고 재조합했다. 그것들은 익명적이고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나와 내가 속한 사회 시스템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투사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양가적 표현이 가능한 것 같다.

LEE : 가전제품, 예를 들어 냉장고를 어떻게 고르고 자르는지 궁금하다. 직접 자르는가?

Choi : 모델을 선택하기 전 수많은 물건의 이미지를 필터링하는 과정을 거친다. 특정 물건을 고를 때 특히 흥미롭게 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집 사진이다. 중고나라를 비롯한 온라인 직거래 장터에서 조사하기를 선호하는 건 사람들이 자기 집을 배경으로 촬영한 물건 사진을 직접 업로드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미지로 내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일반성과 개별성이 포개어질 때의 이상함이다. 우리 집에 있는 익숙한 냉장고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 누군가의 아주 사적인 살림살이 공간에 있는 장면을 볼 때 묘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이미지 필터링을 거쳐 선택하게 되는 모델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같은 모종의 일반성으로 수렴되는 결과도 흥미롭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선택한 물건을 작업실로 가져온다. 나는 자르는 감각을 즐기는 편이지만 내가 직접 자르는 것이 작업의 쟁점은 아니다. 어떻게 변형할지 결정하기 위해선 재료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 작업에 앞서 다양한 모델을 다양한 방식으로 잘라본다. 하나의 냉장고에는 여러 소재와 구조가 섞여 있어서 내부 구조와 재료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해당 부위마다 적합한 날을 갈아가며 잘라야 하는데 나는 이 일을 곧잘 식재료 손질에 비유한다. 문, 경첩, 모터 같은 필요 없는 군더더기를 먼저 제거하는데 어떤 물리적, 구조적 한계가 있는지 보면서 방식을 찾는다. <머터리얼 풀 Material Pool>(2016)의 경우 냉장고가 가진 육중하고 수직적인 느낌을 수평적인 자세로 고치고 싶었다. 그래서 몸체를 정면에서 반으로 자른 후 절단면을 바닥을 향해 놓았고, 평상처럼 엎어놓은 낮은 사각의 입체물로 전환했다.

<화이트 시리즈 White Series> 스탠딩 에어컨, 자석, 27.5x172x2.5(cm), 27.5x172x2.5(cm), 18x174x2.5(cm),
18x174x2.5(cm), 22x171x5(cm), 22x171x5(cm), 28x170x2(cm), 28x170x2(cm), [두 번째], 원앤제이 플러스원(ONE AND J.+1), 2018 ⓒ최고은

LEE : 잘못 잘라서 버린 가전제품은 없었는가?

Choi : 많다. 물건을 조각의 질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물건으로 사용될 때와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그 부분이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사용할 때 까다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물건의 모든 면은 대개 기능을 향해 있다. 내가 그것을 조각의 몸체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을 때부터 그것이 기존에 가졌던 형식이나 구조를 미묘하게 등지게 되기 때문에 혹은 등지려 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품을 들여 물건의 상태를 다각적으로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령 냉장고를 조각의 몸으로 상상할 때 평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가전제품의 옆면이나 뒷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는데, 사실 뒷면이나 옆면은 상품성에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거나 선별적으로 구하는 데에 품이 많이 든다. 그 과정에서 아주 많은 물건을 시범적으로 뜯고 이리저리 잘라본다. 동일한 모델을 사도 생산 연도에 따라 세부 조건들이 미세하게 달라질 때도 있다. 이런 작업 과정에서 일반성이나 특수성에 대한 미묘한 감각이 키워진 것 같다.

LEE : 가전제품의 형태가 한정적인 것을 사회 구조와 시장의 원리에 의한 획일화, 규격화로 볼 수도 있으나 제품이 놓이는 공간과 기능성을 최대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 역시 한정된 자원과 재원 등을 생각할 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규격화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가전제품을 다른 모양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다른 상품과 비교해 유독 규격화된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획일성을 벗어나는 상품은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책정될 확률이 높다.

Choi : 그것을 기능주의적 합리성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한국은 획일화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다. 2019년 뉴욕 소재의 갤러리에서 가전의 껍데기를 소재로 다룬 <화이트 시리즈>(2018)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들이 내가 다룬 재료를 마치 바다 건너온 특정 나라의 빈티지처럼 바라보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미국에서 가전이란 물건이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시한 갤러리 공간도 오래된 라디에이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거기는 가전을 오래 쓰며 디자인이 획일적이지도 않다. 이런 점은 내 재료가 갖는 구체성이나 특정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한국은 가전의 회전율이 빠르고 그만큼 많이 버려지기 때문에 내가 쉽고 싸게 재료를 구할 수 있다. 또한 효율성 위주의 재편이 강한 한국적 맥락이 자연스레 작업에 들어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생산된 물건들을 만지면서 느끼는 건데, 애초에 물건을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실제로 생산 연도가 오래된 물건이 내구성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 그렇게 볼 때 지금 시대 물건의 수명은 물리적 소모보다 이미지의 소모에 있는 것 같다.

<식은 조각 Sikeun Sculpture> 스탠딩 에어컨, 가변 크기, 2021, [비비드 컷츠], P21 Gallery, 2021 ⓒ최고은

LEE : 앞으로 최고은의 작품에 지금보다 다양한 색조가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가? 다른 이유를 다 제한다고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색상이 다양한 가전제품들이 중고 시장에 나올 것이다.

Choi : 백색 가전의 시대가 지나고 색상이 다양한 가전제품이 유행하고 있는 상황과는 별개로 내 작업에서 색은 물건의 물성을 대하는 일과 연관된다. 재료에 가하는 행위의 적극성이란 측면에서 색은 물건이 가진 본래의 물성을 살리거나 덮는 일이 된다. 이러한 시도들은 <샹들리에: 유령 난초 Chandelier: Ghost Orchid>(2020)에서 유리 샹들리에를 사카린이나 공업용 다이아몬드 파우더로 코팅한 이후 꾸준히 실험해온 부분이다.

LEE : 실제 판매되고, 사용되고, 폐기 혹은 다시 판매되는 소비의 과정에 있는 상품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누군가는 예술 작품과 같은 상품, 상품화된 예술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상품과 예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Choi : 물건을 다루는 작업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이라 본다. 애초에 친숙한 물질을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에 원석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물질의 상태인 보급화된 기성품이나 규격화된 판재를 선택했다.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기보다는 확장된 의미의 물질의 개념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고 역으로 상품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화이트 홈 월 White Home Wall> 스탠딩 에어컨, 1000x180x80(cm), 2018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아트선재센터, 2018 ⓒ최고은

LEE : 최고은의 작품과 관련해 스펙터클(spectacle)이 언급될 수 있다. 여기에는 말 그대로 장관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도 연결될 것이다. 관련해 ‘현대인의 삶에 대한 자본주의의 영향력과 상품을 매개로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 그로 인한 소비사회에서의 소외, 자본주의와 결합한 이미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분리’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최고은의 작업이 ‘직접 경험/체험하기를 통해 소외 혹은 분리 이전의 삶과 만남’을 시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추상적이고 신비화되기 쉬운 시각(이미지)을 벗어나 작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스펙터클에 저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작가 본인도 스펙터클을 언급하고 있는데 어떤 맥락인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Choi : 물건을 본래의 기능으로 사용하는 일과 조각의 소재로 사용하는 건 분명 다른 차원의 경험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나는 거울 뒷면의 색이나 백색가전의 부피, 표면, 또 대리석의 정면 표면이 아닌 옆면의 두께 면처럼 사물에서 내가 발견한 사물의 이면을 주로 사용한다. 대상에 대해 피상적으로 관계 맺던 것과 달리 실제적, 즉물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펙터클에 대한 저항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LEE : 작가가 직접 스펙터클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도 있다.

Choi : 나는 스펙터클이라는 말을 주로 거대한 산업적 다이내믹을 목격했을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석재 수입상의 창고에 가서 블록 단위로 놓인 대리석 판재들을 한눈에 본 적이 있다. 바다 건너 어딘가 이국의 산이었을 돌 블록들을 2센티 간격으로 슬라이스한 절단선의 흔적들이 물건 뒤의 스펙터클한 시공을 가늠케 했다. 분명 자연물이지만 생산 단계에서부터 이미 상품의 잠재적인 가능태로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물건(물질)이 이런 시스템을 경유하는데 순수한 물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대리석이라는 물질은 오히려 그것을 실제로 보고 만지는 것이라기보다 상상하고 그리는 추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테이블을 사기 위해 한샘 매장에 가서 수많은 대리석 샘플을 보다가 은은한 펄감이 도는 베네치아 화이트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탈리아 어디에 있을 이국적인 풍경을 상상하고 베네치아 화이트라는 단서를 통해서 대리석이란 물질을 느낀다. 보급화된 수입 대리석 판재를 사용한 작업 <도미넌트 스트라이프 Dominant Stripes>(2020)와 <오페쿨러 Operculé>(2020)는 물질이 이 시대에 생산되고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돌을 다룬다.

<도미넌트 스트라이프 Dominant Stripes> 대리석 판재, 83x25x16(cm), 2020 [화이트 랩소디], 우란문화재단, 2020 ⓒ최고은

LEE : 최고은이 선택한 재료는 조각에 관한 탐구에도 효과적이다. 이미지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품을 이미지가 아닌 물질 자체로 제시한다. 가장 동시대적인 사물을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쉽게 구할 수 있다. 또한 가전제품은 꽤 정교하고, 내구성도 좋다. 매우 견고하고 영구적이다. 결과적으로 최고은이 사용하는 재료들은 현대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와 일부 특성을 공유한다. 재료가 갖는 이런 속성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순수하게 조각의 재료로 접근했다고 볼 수도 있다.

Choi : 물질이 다루어지는 상황이나 상태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같은 물질이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기성품이나 규격화된 자재의 형식을 사용했다. 기성품이면서도 그와 상충하는 속성을 함께 볼 수 있는 재료를 찾고자 했고 실내, 집이라는 공간에서 특히 물건에 대한 일상적이고 촉각적인 경험이 강화되는 부분에 주목해 가전, 가구와 같은 실내 공간의 기성품을 선택했다. 이때 본래의 기능과 상관없이 조각의 질료로 보고 접근하더라도 물건의 몸체에는 애초에 기획되고 재단된 많은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작업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맥락을 담보한다.

LEE : 첫인상은 규격화된 상품, 매력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재료로 기하학적 형상을 만든 작품인데, 자세히 보면 손길이 많이 갔고 매우 정제되어 있다. 과거 인터뷰 내용 중 “내가 보는 것들을 아름답게 가시화할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게 목표이다.”란 작가의 인터뷰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썸 The Sum>(2018), <화이트 White> 시리즈와 같은 작품만 봐도 레디메이드나 미니멀리즘을 떠올리기 이전에 조각이란 생각이 든다. 특색 없는 사물을 가져다가 심미적인 예술 작품으로 보이게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일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사물에 애정이 담아 자신을 뽐낼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겠다.

Choi : 나는 특별하지 않은, (존재감이)왜소한 물건에 끌린다. 아마도 개체로서의 특성과 군집으로서의 특성이 ‘미미하게’ 변주되는 상황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급한 인터뷰에서 ‘아름답게’ 가시화하겠다는 표현을 썼던 건 오히려 지금의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본의 아닌 오명을 쓰는 것 같기도 해서 역설적인 뉘앙스로 한 말이다. 미에 대한 그 비판 또한 지루해진 지금의 상황에서 아름다움은 무슨 죄인가 싶어서 말이다.

<썸 The Sum>, 한샘 루나 화이트, 나무, 유리, 거울, 스테인리스 스틸, 35×32×189cm *4, 2018 [We don’t really die],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 2019 ⓒ최고은

LEE : 조각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만의 고민도 있을 것 같다. 조각이라는 형식에 집중해 본인의 작업을 설명한다면? 일례로 인조대리석으로 좌대를 만든 것만으로도 조각 그 자체를 탐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Choi : 특별한 것은 없다. 요즘 설치와 조각에 대한 작가의 매체적 입장을 밝혀달라는 질문을 많이들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설치 매체의 온건함에 대응하는 상황에서 조각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한국의 미술 현장에서 설치를 광범위하게 인식하는 듯한 부분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주 작은 조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고 <케미칼 Chemical>(2021) 시리즈를 비롯해 좌대에 올라가는 조각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LEE : 조각을 다루는 게 오히려 전위적이고 저항적으로 보인다.

Choi : 분명 입체를 하는 작가들이 조각에 날을 세우며 자신의 작업을 설치라 표명하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조각이라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나의 경우도 좌대라는 것을 일종의 추상적으로 접근하고 사용한다. 그 위에 올린 작품과 마찬가지 뉘앙스로 좌대 같은 뭔가를 함께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좌대는 조각에 관한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조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트는 것처럼 좌대도 마찬가지 하나의 장치가 된다.

LEE : 각각 의미가 조금 다르겠지만 조각 그리고 설치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

Choi : 나의 작업을 놓고 설치인지 조각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내 작업은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전시나 작업에 따라 설치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는 작업을 만들 때도 있다. 물건을 소재로 다루는 점에서 나의 작업은 놓이는 공간이나 상황의 맥락에 더욱 영향을 받는다. 나는 그런 취약함을 내 작업이 갖는 일종의 특성으로 보며 다룬다.

<화이트 홈 야드 White Home Yard>, 냉장고, 스탠딩 에어컨, 수지, 철, 에폭시, 가변 크기, 2019 [불안한 사물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019 ⓒ최고은

LEE : <화이트 홈 야드 White Home Yard>(2019)는 야외에 전시되었는데 작품의 일부가 훼손되지는 않았는가?

Choi : <화이트 홈 야드>는 전시 [불안한 사물들](2019)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오랜 기간 야외에서 전시하며 장마와 태풍을 겪고 관객들이 만지기도 했지만 크게 훼손된 건 없었다. 평소 고물상이나 교외를 돌아다니며 가전제품이 야외에 적재된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야외에 설치한 첫 작품임에도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화이트 홈 야드>를 만들면서 미술의 이야기보다는 평소 내가 작업에 임하는 정서적인 동기를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의 야외 공간을 처음 봤을 때 오래된 무덤가의 풍경을 떠올렸다. 서울이라는 빠른 도시에서 예술가가 한발 물러서 바라본 이곳의 모습, 해가 중천인 한낮에, 누군가는 회사에서 일할 그 시간에, 고물상을 돌아다니며 실외에 던져진 사물의 몸체들을 보면서 든 생각과 감정들, 그런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작업에 등장시키고자 했다. 이 작품은 덕수궁에서 진행한 [AP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2020)에서 한 번 더 전시되었다.

(좌)<샹들리에: 유령 난초 Chandelier: Ghost Orchid>, 바라캇 제니스 샹들리에 리플레카, 사카린 2kg, 110x70x70(cm), 2020
(우)<샹들리에: 말룸보 Chandelier: Malumbo>, 무라노 스튜디오 보헤미안 크리스탈 샹들리에 리플레카, 합성 다이아몬드 1만 캐럿, 80x70x70(cm), 2020 [Hotel Express 284], 문화역서울284, 2020 ⓒ최고은

LEE : <샹들리에 Chandelier>(2020), <케미칼 Chemical>(2021), <테스타 Testa>(2021), 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작업 과정을 잘 정리해보고 싶다.

Choi : <샹들리에 Chandelier> 시리즈는 문화역서울 284에서 진행된 [호텔사회 Hotel Express 284](2020)에 출품했다. 호텔을 주제로 한 전시였고, 나는 호텔의 정원을 주제로 하는 섹션에 참여했다. 기획자는 호텔 정원을 일종의 여러 예술품 조각상이나 전리품을 진열하는 공간으로 해석했다. 나는 호텔의 특징적 물건 중의 하나인 샹들리에를 만들기로 했다. 샹들리에는 장식물이자 조명으로 양식화된 사치품이다. 나는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Murano) 스튜디오와 바카라(Baccarat) 공방의 유명한 샹들리에 모델을 원형으로 한 레플리카(replica) 샹들리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공업용 다이아몬드(노란색), 하나는 사카린(흰색)으로 코팅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보석용이 아닌 유리 연마를 위해 사용하는 불순물 많은 공업용 자재이다. 사카린은 인공 감미료로 값싼 설탕의 대체제이다. 두 물질은 산업적이고 제3세계적 속성을 공유한다. 원본이 아닌 샹들리에에 원본을 대체하기 위해 산업적으로 만든 물질을 덮어 전리품처럼 천장에 사슬을 이용해 매달아 진열했다.

<케미칼 시리즈 Chemical Series> [Cold Pitch], 설치 전경, BB&M Gallery, 2022 ⓒ최고은

<케미칼 Chemical>은 작은 조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도했다. 서양의 관습화된 사치품인 담배 케이스처럼 작고 공예적인 물건을 조각적으로 전유했다. 서양이 아닌 나의 유산에서 어떤 원형이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선택했다. 그간의 작업에서 일상의 사적 공간에서 사용하는 개인화된 전자기기를 다뤄왔다는 맥락도 있고, 1인당 한 대를 소유하는 개인화된 전자기기 문화의 시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대부분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는 기능에 맞게 그 규격이 비슷하고, 끝없이 복제되고 클론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산업적인 속성과도 친숙했다. 나는 소니(Sony), 아이와(Aiwa) 등 유명한 카세트테이프 모델 몇 가지를 선택해 그 규격이나 기능을 암시하는 최소한의 추상적인 형태만 남긴 작은 조각들을 만들었고, 그것을 인조대리석으로 만든 좌대에 정렬해 세워 미미한 변주를 선보였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동시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에폭시 글라스, 대리석 판재, 인공 오닉스, 공업용수지 등 고전적이면서도 산업적인 속성이 혼재된 소재를 다양하게 선택해 사용했다. <케미칼 89 A>는 얼핏 보면 전통적인 공예의 소재인 옥과 닮아 보이지만 건축 단열재 소재라는 양가성이 혼재된 에폭시 글라스를 사용했다. <케미칼 85 Chemical 85>(2020)에서는 유리와 투명 아크릴을 같이 써서 순수한 전통적인 재료와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나온 재료를 접합했다.
한편 [비비드 컷츠]에서 발표했던 <테스타 Testa>(2021)는 가전의 상단을 절단한 형상을 따온 두상 조각 시리즈다. 대리석 소재와 두상이라는 고전 조각의 뉘앙스를 취하면서도 삼성(Samsung), 쿠쿠(Cuckoo) 같은 브랜드의 로고를 하나의 장치로 사용해 지금 시대의 물건이 갖는 익명성이나 흐릿함, 시장에서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환기한다.

<테스타 S2 Testa S2>, SAMSUNG AF16R5773WZN, 대리석, 23x23x26cm, 2021 [비비드 컷츠], P21 Gallery, 2021 ⓒ최고은

LEE : 아트스페이스 오(ART SPACE O)에서의 개인전 [물物 놀이](2016)에서 놀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이들의 놀이에서 창작의 모습을 찾았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매뉴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만의 규칙으로 사물을 재배열하고 만족감을 얻는다.

Choi : 놀이의 가벼움, 자유로움, 유연함과 같은 태도를 작업에서도 이어가고자 했다. 물건에 들러붙는 사회적인 수사들에 무심하고 담백하게 다시 대상을 다뤄보자는 마음이었다. 예를 들면 상을 비춘다는 은유로만 주로 사용되는 거울을 마치 물감처럼 사용해 벽에 색면 드로잉을 했다. [물物 놀이] 프로젝트에서 전시장의 물건들을 잠재적인 재료로, 작품으로, 다시 제 기능으로 호환시키며 계속 만져지고 전형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여주려 했다.

LEE : 조금 맥락을 벗어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조각은 실재하는 물질로서의 작품을 제시한다. 조각 작업을 하는 작가이기에 NFT를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을 다를 것 같다.

Choi : 뭐든 잘하면 좋은 작업이 된다고 생각한다. NFT는 시대적 산물로서 의미 있다고 보는데, 내가 실재하는 물질과 공간이 중요한 매체를 다루는 입장이다 보니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NFT를 눈여겨보게 된다.

(좌)<트로피 Trophy>, 동 파이프, 인조 대리석, 28x12x55cm, 91x70x30cm, 2021, (우)<컷 Cut> 동 파이프, 340x300x20(cm), 2021, [비비드 컷츠], P21 Gallery, 2021 ⓒ최고은

LEE : <컷 Cut>(2021)과 <트로피 Trophy>(2021)에서는 흐름과 움직임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변화를 보인다. 이전의 작품과 비교해 생성에 더 가까워진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

Choi : 초기에는 보다 정적인 사물을 선택했다. 자르고 변형하는 과정을 거침에도 사물이 갖는 조건 안에서 내적인 전환을 찾으며 절단면을 노출하지 않은 닫힌 형태로 마감된 작업이 많았다. 수도 설비용 파이프를 사용한 <컷>과 <트로피>는 파이프라는 물건이 주는 움직임의 감각, 대상에 가한 자르고 벌리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작업적 변곡점이라 느끼고 있다. 그것을 생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곡률이나 선적인 요소를 사용해서 보다 표현적이고 적극적으로 조형하고, 이동 나아가 변화의 감각을 환기하는 방향성을 갖고자 의도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