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2. 05.

본 글은 2024년 9월 24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추미림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추미림(Chu, Mirim)

LEE : 이문정Chu : 추미림

LEE : 사실 첫 질문으로 생각한 것은 SBS에서 방영되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패션왕 코리아>(2013~2014)와 관련된 것이다. 방영 당시에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며 관련 동영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꽤 특이한 이력이다.

Cho :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대학 졸업 직후의 활동들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편집 디자인이 강세였는데 현재 미술계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동기들도 많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디자인계에서는 북 아트(book art)가 유행이었고 나도 관심이 많았다. 보통 졸업 후 취업을 하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당시 제안받은 회사는 들어가자마자 바로 디자인할 수 있다고 해서 면접을 보고 입사를 했는데 대안공간 루프였다. 물론 당시 내가 만들었던 것들은 예술에 관한 책인 도록, 리플릿, 포스터 등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자연히 미술계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전까진 디자인밖에 몰랐는데 미술 현장이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기도 하고, 프리랜서로도 일하다가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패션왕 코리아>에 출연하게 되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당시 브랜드들과 예술가 사이에 협업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특히 의류 브랜드들이 젊은 감각의 작가들을 찾고 함께 시즌별로 소규모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방식이 정말 많았다. 나 역시 관련 프로젝트들에 함께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방송국은 아니었고 한국패션협회에서 지원 권유 연락이 왔다. 프로그램은 패션 디자이너, 연예인, 작가 등이 한 팀을 이뤄서 1주일에 한 벌씩 옷을 만들었다. 나는 아이돌 의상 만드는 분과 매칭이 되었는데 3회차에 빠르게 탈락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SNS가 활발하던 때가 아니라 가벼운 마음이었다.

LEE :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든 작가에게 드리는 질문이다. 미술에 관한 첫 기억은 무엇인지,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나 이유 등을 말해주면 좋겠다. 또한 디자이너로 활동했는데, 지금은 전혀 하지 않는지도 궁금하다. 오늘날에는 디자이너 활동을 같이하는 작가도 있고 교집합이 있지만, 그 둘은 목적이 분명 다르다.

Chu :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계시던 삽화 책이 있었다. 작은 도안들이 그려져 있어 그것을 보고 따라 그릴 수 있게 만든 건데 그걸 보면서 노는 것을 참 좋아했다. 미대를 준비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나는 공부를 잘한 편이고 재미있어했다. 분당 이매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워낙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놓은 곳이라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1등을 하다―갑자기 반에서 10등 안팎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미술을 하겠다고 결정한 뒤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반대하지 않으셨다. 학교 특성상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은 전교에 5명 이내였다. 그렇게 대학을 입학하고,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했는데 디자이너는 고객의 요구조건을 맞추는 게 최우선이다. 그런데 나는 대안공간 루프에서 일을 시작해서인지 작가와 디자이너 사이의 차이를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예술가는 너무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였고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참고로 나는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 구조나 문법에서 약간씩 다른 계열, 다른 언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한다.
지금은 디자인 일은 하지 않는다. 나의 전시 도록이나 포스터도 다른 디자이너에게 의뢰한다. 또한 디자인 업무를 잘 이해하다 보니 디자이너가 준 첫 시간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편이다.

LEE : 추미림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터넷 혹은 컴퓨터 세계에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온라인 세계는 가장 최신의, 첨단의 무언가로 여겨진다.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컴퓨터가 대중화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Chu : 초등학교 1학년 때 8비트 게임인 <젤다의 전설>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빌려오신 거였다. 7~8살 어린 나이인데도 화면 속 가상의 공간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 겪는 모험에 집중했다. 상하좌우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데도 상상을 엄청나게 하면서 재미있어했다. 물론 마지막 단계까지 공략하진 못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해봤는데 어렸을 때는 기술이 턱없이 모자랐다. 여하튼 이것이 컴퓨터 화면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애니메이션 동아리를 들었는데, 그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매체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다.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를 얻으려면 다음(daum) 카페로 오라고 해서 처음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Pixel Space 002> Acrylic, Paper Collage, Pen on Paper Mounted on Wood Panel, 50x50cm, 2008, 도판 제공=추미림

LEE : <픽셀 스페이스(Pixel Space)>(2008~2013)에 관한 작가의 설명 중 “픽셀 스페이스는 정보들을 나만의 관점으로 수집하고 해독해, 확장된 세계를 작은 부분부터 정리한 일종의 신문”, “확장된 세계를 작은 부분부터 정리한 일종의 신문”이라는 부분에 시선이 갔다. 그중에 “나만의 관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면 좋겠다.

Chu : 내가 나만의 관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인터넷 즐겨찾기이다. 지금의 SNS들은 타임라인 개념이 강하다면, 당시에는 조금 더 아날로그적인 느낌, 뭐랄까 업데이트가 나에 의해 링크를 타고 흘러가는 구조였다. 지금은 나의 취향을 파악해 나는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배달되는 느낌인데 당시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기사나 이런 것들이 링크로 연결되기를 반복해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도 한 번 앉으면 오래 있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탐험하는 것처럼 2~3시간씩 몰두했다. 자연히 내가 의식하든 안 하든 나의 관점이 더 강하게 담길 수밖에 없다.

LEE : <픽셀 스페이스>는 픽셀로 구성된 이 가상의 세계에서 잘 알 수 없는 일이나 미스터리한 일들을 수집해 작가만의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부연하면 오프라인 세계에도 우리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이 있듯이 온라인 세계 속 픽셀 하나하나가 개인의 은유가 되고, 온라인상에서도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커뮤니티-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그 속에는 “미스터리하고 모호한 것들”이 있고 관련된 소식이 널리 퍼진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전에도 이런 것들은 있었지만 그 확산의 속도와 규모는 비교가 안 된다. 또한 온라인의 세계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트리는 게 더 쉬워졌다. 오늘날에는 딥페이크나 가짜 뉴스, 조각 등이 익숙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그렇게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시대의 흐름보다 앞서서 주목하게 된 것 같은데 남다른 이유가 있을까? 한편으로 더 미스터리하게 다가오고 정말 이렇게 미지의 밀림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접근했을 것도 같다. 가상의 세계 안에서 또 하나의 사실(이야기)이 만들어지고, 관계가 만들어진다.

Chu : 나는 거짓말 같은 내용 그 자체에 더 반응했던 것 같다. 확실하지 않은데 확실한 것처럼 기사로 적은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온라인을 검색하다 보면 그 진실성(사실성)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혹은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찾아졌다. <픽셀 스페이스(Pixel Space 004)>(2007)에 잘 나타나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다 사각형이다. 나는 그게 익명성을 은유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온라인에서 기사를 접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납작해지면서 부유하듯 정보를 요즘 식의 단어로는 채굴(digging)하러 다니는 것 같았다. 엉망이 된 보물선에 탑승한 것처럼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모험을 해보는 거다. 물론 지금과 비교해 당시는 쏟아지는 뉴스(정보)의 양도 적고 해상도도 떨어진다. 지금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미국에서 UFO 같은 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면서 아주 작은 저화질의 흑백 사진이 같이 올라오면 댓글로 갑론을박이 일어난다. 일루미나티(Illuminati), 지구 멸망에 관한 것은 그때부터 화제의 중심이었다. 당시에는 웹사이트가 그렇게 전문적이지 않아 조악하기도 했는데 그것들을 들어가서 보곤 했다. 지금은 출처 확인이나 사실 여부 검증이 꽤 체계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만큼 상상력이 더 많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Pixel Space 004> Acrylic, Paper Collage, Pen on Paper, 50x50cm, 2007, 도판 제공=추미림

LEE : 미확인된 내용들의 전파는 컴퓨터 세상이 열리기 전에도 있었다. 미스터리나 괴담, 전설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것들은 그 출처를 확인하기 어렵거나, 현장에 직접 가지 않으면 확인 불가능했고, 인쇄물로 나온다고 해도 그것을 갖지 않으면 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신비롭게 다가오고 더 영향력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력도 더 발휘되지 않았을까 싶다.

Chu : 그랬을 거다. 또 마법사 같은 존재들도 있었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집 안에서 하는 거다. 또 익명성이 강화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에 살을 더 붙이고 심지어 거짓말도 더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여하튼 재미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지금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나는 그 당시에 정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보고 또 보고. 오프라인보다 정보가 많아서, 이것저것 더 찾아볼 수 있어서 미스터리적 속성이 증가하는 면도 있다. 그 정보들이 진짜라고 강력하게 믿었다기보다 유희적인 무언가를 많이 느꼈다. 어찌 보면 나의 현재 상황이나 내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것들인데 사람들이 모여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노는 거다.

LEE : 요즘에도 그런 걸 계속 검색하는가?

Chu : 이전만큼은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러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팩트 체크(fact check)도 빨리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기억들이 디지털 노스탤지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세상에도 역사가 있어서 과거의 것들을 보면 향수에 빠지게 된다. 요즘에는 이런 것들이 또 하나의 문화로 부상하기도 한다. 이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신기하면서도 복고적인 무언가이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향수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미지나 사운드, 음악―로 소비되는 거다. 나는 기억하고 추측하며 형상화하고 싶은 디지털 시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내 작업의 또 다른 축인 (신)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과거의 디지털 세상이나 도시가 고향과 같은 익숙한 것이다. 도시에서도 현재와 과거의 간극을 분명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파트만 봐도 사람들의 주거 형태가 엄청나게 변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발코니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발코니 없는 아파트가 분양된다.
사실 내가 주거 공간이나 신도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내 개인사와도 관련된다. 나의 아버지께서 부동산을 하셔서 어렸을 때 안 살아본 신도시가 없었다. 이사도 많이 다녔다. 흥미로운 점은 신도시도 노후되고 늙어서 재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분당이 1기 신도시고, 지금은 4기 신도시까지 나왔다. 갤러리룩스에서의 개인전 《위성들: Satellites》(2020)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어찌 보면 이제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기억이나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고화질로, 동시다발적으로 뇌로 들어와 과부하가 일어난다. 마치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에 도착하는 것과 비슷하다.

<Night SN.001, SN.002, SN.003> Acrylic, Paper Collage, Pen on Paper Mounted on Wood Panel, 3 Pieces, Each 70x70cm, 2019, 도판 제공=추미림

LEE : 당시의 기억에 근거한 작업은 오직 기억에만 의존하는지, 아니면 작가 본인이 직접 촬영한 사진 등이 있는지 궁금하다.

Chu : 거의 기억이 기반한다. 지금은 많이 화려해지고 변했지만, 도로의 구조나 이런 건 변하지 않고 당시의 느낌이 있다. 광역버스를 타고 가다가 밖의 풍경을 보지 않아도 버스가 움직이는 곡선 같은 것만으로도 집에 다 왔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LEE :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도시와 온라인 세계가 개념적으로 완벽하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노스탤지어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Chu : 나는 스크린을 하나의 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미술을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나는 그 문을 넘나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을 물질과 비물질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화면 안을 떠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밖으로 나와 현실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면 어떨까?’였다. 나는 나의 작업이 일종의 백업과 같다고도 생각한다. 온라인상에서 사라지면 절대 붙잡을 수 없다. 어느날 갑자기 사이트가 사라지거나 기사가 사라지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게 사라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컴퓨터나 필터들은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한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컴퓨터적으로, 즉 더 효율적으로 사고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어긋나는 지점들도 흥미롭다. 최근에는 그 둘이 교류하고 겹치는 지점이 커진다. 그게 AI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Castle> series, Pigment Pen, Marker Pen on the Paper, Acrylic Plate, installation view, 2020, 도판 제공=추미림

LEE : 작업 속 이미지들이 컴퓨터 속 이미지뿐 아니라 부품 같기도 하다. 어느쪽이든 기계적인 분위기이다. 그런데 컴퓨터 속 이미지는 더 진짜 같아졌고,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를 지향하는데 추미림의 작업은 과학기술과 긴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같다. 모순적인 것도 같고, 역행하는 분위기다. 올망졸망한 느낌도 좀 있다.

Chu : 어떤 궁금증인지 이해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이모지(emoji)를 디자인했다. 일종의 틀 제작자였는데, 당시 기술에 맞춰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시선에선 조악해 보일 만한 것들이다. 나는 내 작업을 통해 지금은 엄청나게 그 완성도나 섬세함이 발전한 것 같지만 껍데기를 하나 벗기면 구조는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작업 속 이미지는 과거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한 겹 벗겨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많은 사람이 모니터 안의 세계라기 보다 컴퓨터의 뒷면 혹은 내부 장비들 이미지, 머더보드(motherboard)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시가 그렇게 새겼다. 신기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컴퓨터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지도도 된다. 실제로 내 작업에 위성 지도에 근거한 것들이 있다.

<16th Arrondissement of Paris>, Acrylic, Paper Collage, Pen on Paper Mounted on Wood Panel, 50x50cm, 도판 제공=추미림
<16th Arrondissement of Paris>, detail

LEE : 관련해 “작가만의 지도로 재해석했다”고 설명하는데 어떻게 작가만의 지도인가? 물론, 당연히 작가만의 지도이긴 한데 이러한 외형으로 만든 이유, 색채 선택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지금도 병치혼합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가? 하나의 지도를 최대한 반영하는지 지역과 지역이 섞이거나 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분당>(2014) 같은 작품을 보면 분명 위성 사진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해당 위성 사진과 오버랩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옮겨져 있다. 작가적 편집은 어느 정도 이뤄지는가? 앞서서도 관점에 대한,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 같다.

Chu : 나와 관계 맺는 도시가 있다면 그곳이 주제가 된다. 현재 입주 중인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로도 작업하고 있다. 내가 주로 하는 건 우리집에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오는 경로와 그 과정에서 나와 관련되어 발견하는 어떤 것들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서로 섞기이다. 지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에 가깝다. 내 작업이 지도나 특정한 장소와 관련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어디냐고들 묻는데 사실 그게 나에게 중요하진 않다. 나는 내가 가는 경로에서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읽어내고 싶어 하고, 이를 위해 작업 과정에서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에서 찾아질 수도 있고, 얼룩으로 발견될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사는 도시에 컴퓨터 아이콘들을 꺼내오면 어떻게 될까? 꺼낸다면 어떤 크기가 좋을까? 1픽셀이면 벽돌 하나면 될까?’ 같은 생각-상상을 했다. 내가 일종의 필터나 확장자가 되어 내 눈이랑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무언가가 형식으로 발현되길 바란 거다. 결과물은 모니터 화면일 수도 있고 캔버스일 때도 있다. 드로잉이든 영상이든 다 가능하다.
위성 사진을 이용한 작업도 나는 일반적인 경우와 접근법이 다르다. <파리(Paris)>(2014)나 <베르사유(Versailles)>(2014) 시리즈의 경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구글어스가 처음 나왔는데 슬로건이 “자리에 앉아서 어디든 갈 수 있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작가들도 생겼다. 나는 예전에 파리에서 살았던 아파트의 길들을 찾아봤는데 눈물이 났다. 최신의 과학기술이 감정적인 부분으로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Day>, Adhesive Film, 3.9x15.3m, 2019, 《공간 탐색》 전시 전경, 경남도립미술관, 도판 제공=추미림

LEE : 다양한 재료를 쓰고 있고 벽화 작업도 눈에 띄었다.

Chu : 사실 내가 했던 디자인 작업은 컴퓨터 위주고 미술은 수작업 중심―영상이거나 물감, 종이를 이용한 스텐실, 콜라주―이어서 나에게 잘 맞는 재료를 찾기 어려웠다. 다만 설치의 경우 나는 작품을 전시하게 될 전시장을 하나의 완결된 공간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마치 컴퓨터 새 창이 열리면 그곳을 디자인하는 것과 같다. 전시장도 모니터 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인 거다.

LEE : 작품의 크기도 다양한데, 그중에서 50x50cm 크기가 자주 등장한다.

Chu : 50x50cm랑 100x100cm 크기의 작품이 많다. 글쎄 특별히 이유를 생각하진 않았는데 나는 캔버스가 하나의 픽셀이라고 생각했다.

LEE : 지금 갑자기 떠오른 질문인데, 그러면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작품들을 다 붙이면 또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런 큰 그림으로 작업을 구성하려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세워져야 할 것 같다.

Chu : 사실 나와 관련된, 내가 살았던 모든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한 번에 다 보여주고 싶다는 야망이 있긴 하다. 몇 개의 픽셀(캔버스)이 될지는 모르지만 ‘뭔가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의 전체가 나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야심 차게 한 적이 있다.

LEE : 지엽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도판에서는 작품의 특징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Chu : 도판만 보고 컴퓨터 그래픽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래픽 작업은 매끈하고 부스러짐이 없다. 나는 부스러짐을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날렵함이 떨어지더라도 사람의 손이 느껴지는 게 실제 세계에서는 더 생명력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내 작품이 지도를 기반으로 한 것은 맞지만, 당연히 지도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 단순화해 한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사람들이 내 작업을 픽셀 아트라고 부른 적도 있는데 그 역시 아니다.

Solo Exhibition 《New Modules Born from a Rippling Grid》, 2016, Installation View, Trunk Gallery, 도판 제공=추미림

LEE : 재미있는 게 추미림의 작업을 보면서는 집이나 도시 개발과 관련된 사회정치적인 이슈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Chu : 평상시 집에 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는 편이다. 말 그대로 집값, 주택 문제와 관련해 일어나는 갈등과 차별, 집 없는 사람들, 미래 전망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좋아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특수성도 영향을 주었을 거다. 그런데 누구도 집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노스탤지어가 긍정적인 감정인지 잘 모르겠고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하는 생각은 부정보다는 미세하게 긍정적인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인 부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감성적인 부분에 더 끌리는 것도 있다. 나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사회정치적인 구조에서 오랫동안 경쟁하며 긴장한 채로 살아왔다. 나는 그게 약간 안쓰럽기도 하고 이중적인 감정이다. 그 도시에서의 기억도 있고.

LEE : 그런데 과거에 대한 향수나 기억이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동화적이고 아련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평화롭기만 하지 않을 수 있다.

Chu : 나는 도시적인 감수성을 느낀다. 다만 내 안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작업으로 이어가려면 거리를 가져야 한다. 도시 안에 머무르면 복잡하고, 더럽고, 사건, 사고가 많다. 욕망도 뒤엉켜 있어 힘들다. 그래서 위성 사진을 통해 기계의 시선으로 거리를 뒀을 때 작업에 몰두할 수 있다. 정보가 나를 뒤덮지 않으려면 내가 그것들을 멀리서 볼 필요가 있다.

<New Grid 002> Acrylic on Linen, 162.2x112.1cm, 2016, 도판 제공=추미림
Solo Exhibition 《New Modules Born from a Rippling Grid》, 2016, Installation View, Trunk Gallery, 도판 제공=추미림

LEE :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2016)에서 판화를 선보였다. 원본 하나만 있는 판화인데, 굳이 스텐실 기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판화는 미미한 차이가 있다고 해도 여러 점의 에디션을 만들 수 있는 장르이다. 픽셀의 감수성도 전하면서 노동 집약성도 드러내고, 복제가 가능하지만, 예술이기 때문에 작가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또한 스텐실의 경우 다른 판화기법에 비해 더 에디션 간의 차이가 더 잘 보일 것 같다.

Chu : 그렇다. 사실 복제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냥 바로 인쇄를 해버리면 된다.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크릴이나 금속 등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사용하는 건 종이 판이기 때문에 하나의 판으로 두 번 이상 찍으면 형태가 무너진다. 나는 사실 판화 작업의 주인공은 이 스탠실 판이라 생각한다. 사실 사람들은 이것까지 혹은 이 자체가 작품이라고 생각 안 한다. 그런데 나는 인터페이스(interface)라는 틀의 초기 제작자이기 때문에 이 틀의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다. 인터페이스는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면 안 된다. 그냥 숨어서 많은 사람이 그 화면에 오래 머물게 해야 한다. 그러나 개발자들은 그 틀을 보면서 작업하고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콘텐츠가 생긴다. 그런데 내가 스탠실을 찍다 보면 원본에서 조금씩 비켜 간다든지 하는 변수가 생긴다.

LEE : 손으로 직접 하는 드로잉은 어느 정도 하는가?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혹시 매우 많이 표현적이고 비정형적인 드로잉이나 회화 작업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까?

Chu : 많은 작품에서 손 드로잉 과정을 거친다.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작품을 기획할 때 1차로 디지털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출력해서 그 위에 손으로 연필로 드로잉을 한다. 그리고 회화에 관련된 것을 말하면, 가끔 현미경으로 보듯이 굉장히 확대한다면 내가 굉장히 매끄럽다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픽셀이 정사각형일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게다가 이제는 노후되어 재개발 이야기까지 나오는 신도시의 노후화된 벽 같은 것을 봤을 때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새것이었던 신도시에서 균열이 생기고 그 안의 뼈대 같은 것이 드러날 정도로 시간이 흐르면 내가 어떻게 그릴까?’란 상상을 하기도 한다. 스페이스 소(space so)의 기획전 《EDITION: Who Sets the NUMBER?》(2024)에서 발표한 작품에 이런 변화가 일부 담겨 있다.

<횃불과 경사로 Lamp and Ramp>, 2023,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Installation View, 도판 제공=추미림

LEE : 국립현대미술관(과천)의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에서 발표한 <횃불과 경사로(Lamp and ramp)>(2023)의 경우 작은 생태계를 구축한 것 같았다. 기계적인 느낌이 나는데, 동시에 자연적인 어떤 것이 같이 전달된다. 이와 연결된 것이 아닐까 싶다. ‘미래의 자연이 이럴까?’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의 자연은 이런 것일까?’란 상상을 하게 한다.

Chu : 생태계라는 표현이 좋은 것 같다. 자연스럽다는 단어에 대해 꽤 오랫동안 생각했다. 사람마다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다 다를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자연이란 단어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바다나 산은 약간 두려운 대상이다. 자연스럽지만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다. 재난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자연은 무시무시한 게 조금만 소홀하면 정글같이 변해버린다. 나에게 자연은 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 도시 안의 공원이나 가로수처럼 인간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사람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봄에는 벚꽃이 피니 벚꽃 축제를 가고, 플라타너스가 씨를 내뿜어서 다 같이 비염에 걸리고, 가을에는 은행이 떨어져 그 냄새가 나고, 이런 것은 과거의 관점에선 그다지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보고 즐기는 경우도 많다. 자연 곁에 있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거다. 태초의 자연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 그것들이 자연이 된 거다. 엄격한 의미의 자연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빠져나와야 간신히 경험할 수 있을 거다.

LEE : 과거에는 최신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적인 것이 되는 상황은 과거의 SF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제공한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지금 도시 속 자연들이 미래적이었을 거다.

Chu :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영화 중에 <알파빌(Alphaville)>(1965)을 보면, 주인공 형사가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감정을 찾는다는 이야기인데 감정을 잃은 채 살아가는 도시가 있고 그 중심부에 머더보드가 있다. 미래 도시를 설정하고 만든 영화인데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레트로(retro)적이다. 심지어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그 시기의 느낌을 소비하며 과거를 상상하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작품에 삽입되는 사운드를 가라지밴드(GarageBand)로 직접 만들거나 저작권이 자유로운 모래 소리나 우주 소리 등을 활용한다. 특히 모래 소리를 좋아하는데, 실리콘이나 반도체도 모래에서 시작한다. 결국 가장 근원적인 것을 상징하는 게 모래다. 나는 인류 문명이 모래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외부의 뇌라고 할 수 있는 장비들이 모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하면, 디지털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적인 것에서 미래가 있고 미래가 과거가 되는 것들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