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2. 05.

본 글은 2024년 10월 18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양승원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양승원(Yang, Seungwon)

LEE : 이문정 Yang : 양승원

LEE : 언젠가부터 모든 작가에게 드리는 질문이 되었다. 미술에 대한 생애 첫 기억, 미술을 전공하게 된 계기, 그리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엇인가?

Yang : 미술에 대한 유의미한 첫 기억은 중학교 이후이다. 사진을 전공했지만, 중 ․ 고등교 때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예술학교를 나오진 않았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생 때 현대자동차에서 주최하고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열렸던 미술대회에 나갔다. 하루 종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제출하면 되는 건데 비가 정말 많이 오는 날이었다. 부활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공원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서 이젤을 펼쳐놓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그렸다. 노래는 슬펐고 너무 힘들어서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어디선가 분홍색 노끈을 가져다 우산을 이젤에 고정되게 묶어주셨다. 힘든 데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비는 계속 오고, 그래서 울면서 그림을 그렸다. 내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워낙 비 오는 풍경을 제일 좋아하는데 힘들었고, 슬펐고, 감사했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내게 의미가 있었고, 너무 복합적이었다. 짧다면 짧은 반나절 동안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느꼈다. 그래서 미술은 내게 다양한 감각과 감정의 종합이었다. 그날 이후 미술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바로 군대를 다녀왔고, 고등학교 졸업인 상태로 사진과 그림을 병행하다 어느 순간부터 사진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일이 잘 풀려서 꽤 좋은 프로젝트들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했고,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후 유독 내 작업에 더 보정을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이것이 학벌의 문턱인 것 같았고, 25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LEE : 회화를 하다가 사진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사진의 어떤 점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는가?

Yang : 지금은 그 반대 같은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대답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현실을 기록하는 데에 관심이 되게 많았다. 회화는 무에서 유가 나오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항상 재해석되거나 재가공되는데 사진은 실재하는 그 자체를 기록한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 시공간에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어느날 내가 하나의 풍경―현실―을 기록하면,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찍었던 풍경이 바뀌더라도 내가 기록한 사진에는 과거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다. 또 바뀐 그곳을 다시 기록한 뒤 처음의 사진과 비교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사진 두 장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사진 두 장의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어 있고 내가 그 축에 있다. 이 모두가 매력적이란 걸 깨달으면서부터 사진에 몰두하게 되었다. 당시에 사진은 3D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정말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매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매체를 공부해 보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대학원 그리고 현재까지는 사진을 주된 도구로 사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LEE : 사진에선 예술 사진과 상업 사진이 나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두 영역 모두를 오가는 작가분도 많다.

Yang : 딱히 상업 사진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르바이트로 전시 전경 사진 등을 찍는 것 이상의 본격적인 상업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는 내가 잘 못하는 것 같아서이다. 내게 의뢰하는 분들은 나의 사진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서일 텐데, 아직 내가 봤을 때는 내 능력 밖에 문제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봤을 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넘기고, 돈을 벌고, 그것이 상업적으로 활용되어 끝없이 복제되어 퍼진다는 건 미완성된 작품을 전시에서 선보이는 것과 같다. 한번은 내가 아이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베이비스튜디오가 인기였기 때문에 ‘한번 해볼까’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몇 번의 전시를 열게 되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현대미술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직접적인 사건들과 연결해 부연하면, 학생 때는 상업 사진 쪽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아시아프(Asyaaf)에 우연히 비 판매로 작품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반응이 너무 좋았다. 심지어 내 작품이 서울 시내버스 배너에 실렸고, 전시 대표 작가로 선정되어 신문 1면에 내 작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과 내 작업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미술의 힘을 느꼈고, 미술을 통해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Real and Real #4>, 2007, 젤라틴 실버 프린트, 25.4x20.3cm, 도판 제공=양승원

LEE : 앞서서 사진을 도구로 썼다고 말했는데 사진을 위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어떤 예술적인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주된 방법이 사진이라고 이해해도 되는가?

Yang : 그렇다. 또한 오늘날은 회화, 조각, 사진 장르 구분이 있으면서도 오가기도 한다. 따라서 특정한 장르나 방식에 끼워 맞춰 규정짓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LEE : 포트폴리오를 세 개의 버전으로 보내줬는데 그중에 키워드별로 정리된 버전에 눈길이 갔다. 사진을 통해 시도할 수 있는 실험을 모범답안처럼 진행하면서 확장한다는 인상이었다.

Yang : 그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내 작업을 생각할 때 사진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사회적인 현상들도 꾸준히 다루고 있다. 다만 그것들은 한발 물러서서 기억을 생성하고, 나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특히 사회적인 다양한 이슈에 관한 작가의 과거 경험과 현재-동시대에 생성되는 기억에 관한 것이 주요하다. 그런데 기억은 시간이 흐르며 왜곡되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일부만 사라지기도 하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토대로 이미지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태도를 확립하고 판단한다. 핵심은 경험, 기억, 판단이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인 현상들은 굉장히 빠르게 이미지가 생성, 소멸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흡수되고 소멸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로서 어떤 형태-방식의 공식들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게 가장 효율적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에게는 이게 방법론이다. 사진이 주 매체인 나는 기록, 연출, 가상을 오가며 사진의 다양한 방식을 쓰는 것일 뿐이다. 방법론을 그냥 단계적으로 하나씩 써봐야지가 아니라 작업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을 만한 것들을 판단해서 사용한다.예를 들어 <Real and Real>(2007)이나 <Real and Figure>(2010)의 경우 내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경험과 긴밀하다. 나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서 19살 때까지 살았다. 7살에 입학해 19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실질적인 성인이었다. 2022년 서울로 이주했는데, 그때 아파트를 보고 놀랐다. 아파트는 압도적이었고 멋있었다. 그런데 서울로 오고 난 뒤 내가 작아짐을 느꼈다. 이때 신도시들의 붐도 시작되었고 집이 주거 공간이라는 본질을 벗어나서 권력과 부의 상징, 재테크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집에 투자하고 집값이 오르고 내리는 데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게 굉장히 낯설었다. 그래서 2004년부터 아파트에 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외국에 놀러 간 관광객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아파트를 찍었다. 그 첫 결과물이 <Real and Real>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일방적으로 지금 세상의 실태를 보여주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입대를 했고, 군대에서 시지각적 판단을 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시지각을 대신하는 적외선 장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현대의 사람들이 ―아파트를 비롯해―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고 적외선을 이용하면 조금은 다르게 보는 시선을 상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보다 앞서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은 없는지 찾아봤는데, 1950년대에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라는 사람이 엑스레이처럼 흑백 필름으로 찍은 적외선 사진이 있었다. 나는 흑백이 아니라 컬러로 보여주고 싶어서 카메라에서 적외선을 막아주는 필터를 빼서 가시광선의 스펙트럼과 적외선의 스펙트럼을 같이 넣었다. 보통의 경우와 달리 해가 정말 쨍쨍할 때 최소 1~2시간 촬영해야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사이에 움직이는 피사체는 포착할 수 없다. 색채도 분홍빛이나 보랏빛으로 나온다. 그런데 나는 그게 내 의도와 맞았기 때문에 좋았다. 그 결과가 <Real and Figure>이다. 사람들이 촬영 후 포토샵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이것이 원본이다. 현실인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을 사용했고, 당시에 내가 그 장소에 있었지만 믿기지 않는 풍경, 내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런 정서도 담긴 것 같다.

<Real and Figure #8>,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0x150cm, 도판 제공=양승원

LEE : 사진 장비(카메라 등)는 작업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일 것 같다. 극단적인 질문을 하자면 정말 성능이 좋다고 하는 최고가의 사진기를 사용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를 어느 정도 느끼는지 궁금하다.

Yang : 장비는 결과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다. 다양한 방법으로 장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데 경차든 스포츠카든 도착할 수는 있다는 거다. 물론 정해진 트랙이 있는 레이싱에서는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스포츠카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작업은 그런 레이싱이 아니다. 반드시 특정한 장비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삼십 만원짜리 카메라나 삼천 만원짜리 카메라나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좋은 작가는 장비를 뛰어넘는 작가가 아니라 좋은 장비가 없어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작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장비는 조금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정도이다.

<테라 인코그니타 Terra Incognita>, 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80x240cm, 도판 제공=양승원

LEE : 개인적으로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2017)가 낯설고 불편했다. 이 작품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봤을 때부터 묘하게 기괴하게 느껴졌다.

Yang : <테라 인코그니타>의 전면에 나와 있는 고목들은 모두 조화, 조목이다. 뒤의 숲은 실제 숲을 촬영한 뒤 현수막에 출력한 건데 내가 현수막 뒤에 강한 조명을 터트려서 저렇게 빛이 번졌다. 자세히 보면 앞쪽 나무에 현수막 끈이 보인다. 실재지만 이미지로 존재하는 숲과 가짜이지만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나무를 공존하게 만든 뒤 촬영한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척 하지만 굉장히 이질적이고 어색한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아무리 고화질 사진이어도 현수막에 출력하면 저화질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빛까지 들어오니 실재했던 자연인데도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상대적으로 앞에 존재하는 모조 식물들은 두드러지는데 그 역시 자연스럽지 않으니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기도 할 거다. 당시에 내 작업 대부분이 실재와 가짜가 공존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좌) <전시용>, 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80x120cm, 도판 제공=양승원 / 우) <해시태그 Hashtag>, 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80x120cm, 도판 제공=양승원

LEE : <전시용>(2017)에 거울이 등장한다. 거울은 미술 안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양승원의 작품에서는 반사-반영이긴 하지만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또 다른 무한한 세계의 통로이기도 하다.

Yang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그건 완성된 작품을 본 해석자의 입장이다. 이 역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된다. 나는 작가치고는 인스타그램을 꽤 늦게 시작했다. 이후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게 빅데이터, 인증샷, 인생샷이었다. 그런데 2017년 해시태그의 빅데이터가 ‘오빠랑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 코스’였다. 그래서 이 키워드들을 검색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요소)인 조화, 격자무늬 타일, 거울, 금색 테 등을 사용했다. 이것들은 모두 카페에 반드시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페처럼 꾸미되 모조라는 사실을 완벽히 가리지 않는 정도의 세트를 만들면 2017년을 대표하는 공통의 요소들이 담길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사진을 왜 찍는가보다 모조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는 부분에 더 주목했다.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로 조화를 넣은 것은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가둬놓음을 투사하기 위해서였다. 금색 테두리 거울에 가둬진 것 같은 상황은 자신을 포장해서 보여주려고 하고, 관련된 이미지를 하나의 전유물처럼 여기는 상황을 보여주려 했던 것도 있다.

LEE : 실재하는 것들을 촬영하다가 모조,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한 이유는 무엇인가?

Yang : 사람들이 자꾸 모조를 쓰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접근했는데, 때로는 모조가 진짜를 대변하고, 실재와 대등한 메시지 전달력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다르게 보게 되었다. 긍정, 부정이라기보다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예상 이상으로 레플리카(replica)가 많다. 사람들이 모조를 보러 오고, 그것으로 교육도 하고 조형적인 경험도 하는 거다. 그러면 전시를 왜 하고 보는 거냐고 질문할 수 있는데, 진품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유물, 작품의 시각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잘 짜인 공간에서 인지하게 하는 것도 유효한 역할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나도 모조를 만들어 원본을 대변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하다가 실재인지 모조인지 알 수 없는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이 소위 우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품들로 이어졌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것, 사실 가짜여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인 우주와 비슷한 이미지를 제공해 보자는 거다. 우주를 똑같이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모조가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사용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여기에는 사진-미술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커버드 모멘트 Covered Moment>, 하이트컬렉션, 2019, 도판 제공=양승원

LEE : 자연스럽게 <Covered Moment>(2019)나 <Surface>(2021)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Yang : 하이트컬렉션(HITE Collection)에서 청양의 얼음 축제의 사진을 찍어서 설치의 방식으로 보여줬고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에서의 개인전 《글림스(Glimpse)》(2021)에서 우주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모아 발표했다. 참고로 우주와 관련된 작품은 보안여관의 《사이키델릭 네이쳐(Psychedelic Nature)》(2019)에서 단편적으로 처음 선보였다. 청양은 빙산이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살아있는 나무에 물을 뿌려서 거대한 얼음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연다. 거기에는 알프스마을도 있다. 어찌 보면 이 자체가 모조다. 눈으로 볼 때는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인생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잔혹하다. 다른 지역의 축제들도 유사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전국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지역의 특성과 무관하게 콘텐츠를 기획한 뒤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통해 홍보하고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아이러니하고 흥미롭다. 이것을 무조건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경제 활성화와 같은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생태주의를 비롯한 이슈가 내 작품의 주된, 최우선의 주제도 아니다. 앞서 말했든 나는 실재와 모조에 가장 관심이 있다. 이러한 축제에서 세워지는 거대한 설치물들을 행사 기간이 끝나면 건축법에 따라 무조건 철거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모조이다. 이 부분은 전시회와도 비슷하다.
여하튼 주객이 전도되는 이런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에서 시작해 내가 우주 공간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장독대 뚜껑에 시멘트 가루를 뿌려서 달 표면처럼 보여주기도 했고, 둥근 입욕제를 사진 찍어 선명도를 조절해 이미지를 깨뜨렸더니 태양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태양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어떤 이미지를 보며 태양을 떠올린다. 둥근 조명에 검은색 막 하나를 덧대고 찍은 사진은 개기일식 같기도 해 사람들이 우주와 관련된 걸 상상하게 한다. 이미지는 보도자료나 뉴스, 영화에 대한 내 기억 등을 참고 했다.

<글림스 Glimpse>,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 2021, 도판 제공=양승원

LEE : 100% 컴퓨터로도 만들 수 있는데 굳이 물리적으로 모조처럼 사진 찍힐 수 있는 피사체를 만들고 그것을 찍은 뒤 컴퓨터에서도 작업을 한다.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물론 머릿속에 있는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미지에 근거해, 비록 모조긴 하지만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실재하는 물질을 만든 뒤 그것을 다시 사진 찍어 이미지로 제공하는 작업은 실재와 모조, 원본과 복제본, 물질과 비물질, 사진의 정체성 등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이끈다.

Yang : 물론 작품에 따라서 컴퓨터로 무에서 유를 만들기도 한다. 이 전시에서 나는 작품 자체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눴었다. 과거에는 직접 촬영하여 별다른 보정을 하지 않은 사진, 현재는 사진을 가공하기, 미래는 완전히 만든 이미지이다. 현대 사회에서 맥락 없이 등장하는 것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맥락 안에 있던 것에 사람들이 서사를 붙여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 기억하기 때문에 나 역시 실재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말 잘 쓰인 소설은 역사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가짜를 만들기보다 어느 정도 존재하는 바탕에 보탠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덮어쓰기(Overwrite)>(2022~2023)에서는 컴퓨터로 만든 가짜 위에 <Surface>처럼 작업한 사진을 덧대서 제시했다. 이 경우 ‘표면은 실재야, 사진이야. 그런데 이 공간, 장소는 다 허구야, 그렇다면 이제 너는 어떻게 볼 거야?’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은 모조가 진짜 같을 때도 있지만 가짜라는 것을 숨기지 않을 때도 있다. 가짜 같으면서도 실재 같고, 실재 같지만, 가짜 같은 상황들이 혼재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굳이 구분한다기보다 혼재된 상황을 보여주고 그와 관련된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덮어쓰기#38 Overwrite #38>, 202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30x55cm, 도판 제공=양승원

LEE : 지금도 유효한 문제인 것은 확실하나 실재와 가상에 관련된 이슈는 정말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오늘날 사진으로 찍힌 것이 무조건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은 적을 듯한데, 이런 주제에 집중하는 이유는 사진을 전공했기 때문일까? 양승원만의 차별화되는 지점이 궁금하다.

Yang : 나는 유사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 유사 이미지는 실존하는 것을 대변하지만 실제로 그 앞에서 촬영한 게 아니라 그것과 유사한 무언가를 찍어서 대변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진짜 우주를 보여 주겠다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이미지와 그것이 실제로 제공된 이미지, 또 유사 이미지를 계속 섞어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또 다른 기억이 만들어지길 바랐다. 그런 사실을 인식한 작가조차도 혼란을 더 많이 조장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계속 제공한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LEE : 정말 우주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였는가?

YANG : 반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술 전문가들은 보는 순간 의심부터 했기 때문에 바로 내 의도를 발견했다. 조금 더 트릭을 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후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작업 과정이나 시각적 완성도에서 만족도가 높았는데 특정한 공간을 구성해야 하는 전시장에서 아쉬웠던 점도 있어서 많이 배웠던 전시였다.

LEE : <Surface>의 제목은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회화보다 더 진짜 같은 환영적 세계를 제공하는데 평면이다. 표면뿐인데 입체감과 공간감을 전달한다. 사실 이미지뿐 아니라 실제로 내 눈앞에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결국 표면만 본다. 과대 확장일 수도 있지만 언어도,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다.

Yang : 제목에 관한 질문은 처음인 것 같다. 제목은 늘 고민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진이라고 부르는 건 인화지에 굉장히 얇은 막을 입힌 것이다. 그 얇은 표면을 보고, 읽고, 해석한다. 종이라는 물질적 본질이 아니라 그 위의 이미지, 말 그대로 표면을 본다. 그런데 이 표면은 영구적이지 않다. 환경이나 외부 영향으로 쉽게 변하기도 하고 막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포함할 수 있는 제목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들도 머릿속에 단단히 꽂히는 게 아니라 계속 덮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새로 생성되어 공고히 자리 잡는 게 아니라 표면 위에 계속 덮기를 반복하는 거다. <덮어쓰기>도 이와 연결된다. 쌓인 먼지만 봐도 먼지 아래 앞서서 쌓인 먼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어떤 표면이 있다. 그런데 그 층은 불변하는 게 아니다. 떨어져 나가거나 뒤섞이기도 한다.

<덮어쓰기 Overwrite>, 엔에이(N/A), 2023, 도판 제공=양승원

LEE : 많이 받는 질문일 것 같은데 최근 작업은 입체로 확장되었다. 회화나 사진 작업을 주되게 하는 작가들이 설치를 비롯해 공간을 확장되는 작업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꽤 많이 한다. 그런데 평면의 프레임은 완전히 무한한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일 수도 있고. 오히려 확장했을 때 그 한계가 선명해질 위험도 있다. 입체 작업으로 나가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Yang : 처음엔 회화를 했고 그다음에 사진을 해서 이 부분에 대해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평면 작업을 하다 보면 입체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그것은 매체를 확장해야겠다고 인식해서 진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순수한 욕망 같다. 대학생 때 구상이든 추상이든,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그릴 수 있는 회화와 달리 사진은 정형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을 다루기 어렵다고 느꼈었다. 존재하는 것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게 나에겐 가장 장점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그리기만 하던 사람이 존재하는 것으로만 작업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 때부터 액자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되었다. 이후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작업을 진행했고, 최근에는 기억의 비중이 커졌다. 그런데 선행했던 방법론으로 기억을 다루려면 마치 회화처럼 추상적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기억은 굉장히 추상적인 건데 그 감각적인 것들을 사진 평면으로 보여주긴 어려웠다. 그래서 마치 조각하는 작가가 뭔가를 만들 때 흙, 돌, 금속 등을 선택하는 것처럼 나도 하나의 방식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결정하게 되었다.
물론 전시 구성에서 입체적인 설치 방식으로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었는데 그건 입체라기 보다는 사진을 이용한 공간 구성이어서 싫었다. 그래서 엔에이(N/A)에서의 전시 《덮어쓰기(Overwrite)》(2022) 이후 남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 《공중정원》(2023)에서 발표한 <지각편린 #1~5>(2023)에서는 얇은 아크릴에 UV 프린트를 하고, 그것을 나무로 만든 구조물에 끼워 넣었다. 하나의 구조물 형태를 만든 거다. 다만 이보다 더 얇고 쉽게 변형할 수 있는 형태면 좋을 것 같아 사진을 철판에 붙여서 휘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형태로 시도하다가 《지각편린》(2024)에서 발표한 작품들에 이르렀다.

<지각편린 #1~5 Percept #1~5>, 아크릴에 UV프린트, 염색된 아크릴, 나무, 가변 설치, 2023,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사실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때로는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내겐 확실한 과정이 확립되어 있다. 단순히 전시장 디스플레이의 변화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입체화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나는 사진적 형태를 변형한 것이지 장르를 확장하거나 넘어서려는 게 아니다. 내 작업을 조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매체적 확장을 위한 실험으로 읽힐 것을 경계한다. 다만 사진이라는 도구를 벗어나지 않겠지만 그 때문에 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 정확하다. 부연하면 사진을 전공하면 배우는 방법론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스틸 라이프, 메이킹 포토, 이론(레퍼런스) 고증 등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이것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히로시 스키모토(Hiroshi Sugimoto)나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를 비롯한 많은 사진가가 종이에만 인화하지 않았다. 실제로 필름지, 금속, 그리고 벽에도 UV 프린트를 할 수 있다. 그런 작업을 사진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최근작은 알루미늄에 UV 프린트하는데, 후처리를 안 했기 때문에 벗겨진다. 뜯기기도 하고 긁히기도 한다. 나는 이게 기억의 특성을 더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기억도 왜곡되고 부분부분 삭제된다.
다양한 방법론은 효과적인 이야기를 위한 것이다. 전술했듯 방법론이 변화하는 것은 내 작업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현상들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예측하지 못하게 계속 바뀌다 보니 그것을 보여주려면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내 작업이 항해와 같다고 말한다. 항해할 때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나의 항해에서 이상한 대륙을 발견해도 그로 인해 사진의 역사가 조금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