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2 08.

본 글은 2022년 1월 21일(금)에 진행된 이문정과 진 인이 나래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진 인이 나래(Narae Jin Inni)

LEE : 이문정, JIN : 진 인이 나래

LEE : <Cut-and-paste writing>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오려 붙여 글쓰기’의 방식으로 이미 있는 텍스트, 이미지, 이야기 등으로 새로운 것을 창작한다. 자연히 진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게 된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뉴스, 역사, 자신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 등의 창작물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며 지식, 객관, 사실, 존재, 창작은 기존 재료를 편집하는 편집술이라고 이야기했다.

JIN : 작업 방식을 표현하는 ‘Cut-and-paste writing’의 기저에 깔린 태도는 나의 작업 전반으로 이어져 있다. 대학생 때부터 이와 같은 식으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작업하다 한계를 느껴 사회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갔을 때 구술사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다. 완벽한 진실이 없고,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에 의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변질되고 조작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구술사가 필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구술 증언의 진실성은 늘 공격받을 수 있고 진실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한계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기록하고 추적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하고, 재현하고, 지속해야 기억되고 존재가 증명될 수 있다. 어떻게 기록된 역사이든 사실과 100%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Cut-and-Paste Writing>의 경우는 연구라기보다는 작가들의 작업, 즉 허구라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이다.

진 인이 나래 <작가P의 (재)구성> 관객참여 컷-앤-페이스트 글쓰기, 전시 [제로그라운드] 설치 장면, 아트스페이스풀, 2014 ⓒ진인이나래(촬영:안성석)

LEE : 허구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더 넣으려 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예술이란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가?

JIN : 예술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 단언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측면에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개방적인 질문이나 작업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이 가진 하나의 특성인지도 모른다. 인터뷰나 기존의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진실과 허구를 흐리고 어떤 것이든 완전히 진실로 믿을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데에 더 방점을 둔다.

LEE : 작가의 의도는 이해했다. 절대적인 진실에 대한 의구심은 당연히 가질 수 있다. 또한 진실이나 정답이 아닌 것이 진실, 정답으로서 권력을 가지게 되는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오늘날 활동하는 많은 작가가 진 인이 나래 작가와 유사한 태도를 보이며 고정된 기준과 정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작가의 주장 또한 하나의 정답이 되어 왜곡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 있는가?

JIN : 나는 세상에 진실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만 우리가 조합해내는 진실이다. 스스로의 시각에만 갇히지 말자, 스스로를 너무 믿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진 인이 나래 <작가P의 (재)구성> 관객참여 컷-앤-페이스트 글쓰기, 개인전 [작가P의 (재)구성] 설치 장면, 인천아트플랫폼, 2016 ⓒ진인이나래

LEE : 작가 6인의 협업 프로젝트인 <Back to the Future: ○□★△×>(2012)에서는 인천의 거리에서 수집한 오브제 및 리서치를 바탕으로 도시의 흥망성쇠를 다룬 가상의 스토리를 구성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는 무엇을 뜻하는가?

JIN : 스페이스빔에서 진행한 국제 썸머레지던시에서 나와 Joris Lindhout, 유광식, B전보경, 이샘, 정상섭이 함께 한 프로젝트이다. ExPodium이란 네덜란드 작가 그룹의 도시 리서치 방식 중 하나인 <나이트 워커스 Night walkers>라는 프로그램에서 시작했다.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같이 산책하면서 낮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밤에 잘 보이게 되는 이미지나 오브제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상상해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한 이후 우리는 밤낮으로 인천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이미지와 오브제를 수집하고 공동의 이야기를 상상하고자 하였다. 당시 인천의 청라지구가 재개발로 철거되고 있을 때였는데, 빈 집의 문들에 스프레이로 ○, □, ★, △, 또는 × 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이 각각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의 의미를 담은 표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퇴거 완료’, 또는 ‘거주 중’과 같은 뜻을 전하는 표시였을 것 같다.

LEE : 관련해 제작된 영상의 스크립트를 보면 앞뒤 맥락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거나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문장이 나온다. 이유는?

JIN : 이 작품의 경우 팀원들이 스크립트도 같이 썼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나눠서 썼다.

일시합의기업 ETC <If You Dream It: ○□★△×> 투어 홍보물, 2012 ⓒETC

LEE : 수집한 이미지와 오브제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가?

JIN : 명확하게 정해진 기준은 없었다. 그냥 길을 걸으며 느낌적으로 소재들을 찾고 스토리를 만드는 거였다. 6명이 같이 걸어 다니면서 각자가 재미있게 느끼는 것들을 자유롭게 사진도 찍고 수집했다. 처음에는 이것으로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지 남감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어 보였지만 도시의 흥망성쇠로 묶어 재개발, 퇴거,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기로 정하자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동인천 쪽에는 백 년 전 건물이 많고 송도에는 미래적인 건물이 많다. 또 청라는 재개발을 위한 퇴거촌이었다. 이 모두가 인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동시적인 상황이었다.

LEE : 2097년는 어떤 의미인가? 정확한 연도가 나오니까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 같다.

JIN : 당시 우리가 왜 2097년이라 정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지금의 인천을 발굴했다는 설정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Back to the Future’로 지었다. 약 100년 정도 뒤의 미래에서 현재의 것이 유적으로 발굴된다고 생각하며 정했던 이름인 것 같다.

LEE : <K의 계보 Genealogy of K>(2016)는 작가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실, 실존 인물의 인터뷰, 작가의 상상력 등이 결합되어 있다. 인터뷰이의 선정 기준, 인터뷰 과정, 어느 정도의 편집과 상상이 들어가는지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JIN : 프로젝트 블로그에 담긴 인터뷰는 최대한 그대로 실으려고 했지만, 내가 주목하는 지점들을 가져왔다. 내가 담고 싶지 않은 내용은 삭제되었으나 실제 인터뷰이기 때문에 허구는 아니다. 에세이 책에는 인터뷰와 허구, 실제 나의 상황 등을 혼재하여 담았다. 작업에 대한 설명에 담겨 있듯이 나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실종되셨다. 납북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30살 정도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가족들이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외할아버지를 지워야 했던 것인지, 충격이 꽤 컸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동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외삼촌이나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사회나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나의 개인적 경험이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K의 계보>는 한때 분단 상태였던 독일에서 진행한 작업이다. 외할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허구가 들어간다. 사진 한 장 없으니 어차피 진실은 알 수 없다.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시는 어땠을까를 유추해나갔다.

진 인이 나래 <K의 계보> 중 '냉전 관광객으로 분장한 진나래', 수행적 에세이 프로젝트, 2016 ⓒ진인이나래(촬영:김청진)

LEE : 증언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에세이와 실제 세계의 기록을 반복적으로 교차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Cut-and-paste writing’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관점에 따라 역사(기억) 역시 일정 부분에서 창작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고, 같은 기록물을 보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본인의 작업을 통해 어떤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JIN : 확신과 신념은 추진력을 가져오지만 과도한 확신 때문에 편협한 시각을 갖고 세상을 보게 되거나, 아예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상시에도 내가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LEE : 전시 [랜덤 증언 Random Testimonies](2018)에 소개되었던 <들은 이야기 Earwitness>(2018)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구술사를 바탕으로 만든 VR 에세이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고 심각한데 명랑하고, 도발적이다. 게임뿐 아니라 장난감, 어린이들의 놀이에 전쟁의 요소들이 포함될 때가 있다. 전쟁의 트라우마뿐 아니라 전쟁을 게임처럼 소비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작가가 이 작업을 설명할 때 언급한 냉전의 문화란 무엇인가?

JIN : 이 작업은 더 발전시키고 싶었는데 진행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나 일상에서나 이분법적으로 편 가르기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역사에 관한 태도도 그렇다. 진영 논리로 누군가를 지목하고 추방하려는 문화를 생각하며 그런 표현을 썼다. 역사를 대할 때 솔직하지 못한 부분들, 또는 함구하는 문화 역시 포함하는 표현이다.

LEE : 작품에 등장하는 돼지와 깃발의 의미는?

JIN : 깃발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인터랙션이 있는 작품이라 화면에 보이는 깃발을 선택해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처음에는 다양한 색의 깃발이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빨간색과 파란색의 깃발로 변한다. 다양한 색의 깃발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들이 존중되지 못하고 이분법적으로만 나누는 문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돼지는 내가 경기 북부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과도 연결된다. 경기 북부는 피난민 정착촌이 있어서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가게 되었는데 축사가 많다. 그런데 전염병이 생기면 정말 많은 돼지가 파묻힌다. 전쟁 때 전사한 군인들이 땅속에 엄청나게 묻혔을 상황도 염두에 두었다. 생각을 확장해 신도시를 지으려 이전의 것을 다 허물고 묻어 버리는 상황, 건설적으로 살겠다는 기치 아래 계속 지워온 과거, 희생의 상징으로서 돼지를 넣었다.

진 인이 나래 <들은 이야기> VR에세이(alpha ver.), 2018 ⓒ진인이나래

LEE : 전시 [랜덤 증언]에 전시된 글들은 인터뷰에 근거한 것인가? 그런데 전시 제목에 왜 ‘랜덤’이란 단어를 선택했는가?

JIN : <K의 계보> 웹페이지에도 공개된 인터뷰 내용을 적은 것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이기도 한 ‘랜덤’이란 단어는 플레이어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무작위, 또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말하고 싶어서 선택했다. 보통 이념, 사상,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선택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납북, 이후 가족들의 삶에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LEE : 도시와 일상에 비일상적인 개입을 하는 다원예술 콜렉티브인 <ETC 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2012~)는 리서치, 전시, 설치, 이벤트 퍼포먼스, 워크숍, 강연 등의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사각지대에 있는 예술가의 시각에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다른 시점의 ‘예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의 일시적 합의 기업”이라고 설명했는데, “사각지대에 있는 예술가”가 뜻하는 바가 궁금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하다.

JIN : 요즘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긴 하지만, 예를 들어 사회복지 제도도 대부분이 직장인 중심이다. <ETC>를 진행할 때는 더욱 그랬다. 대한민국 전체가 정규직 직장인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프리랜서이자 작가인 나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사회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는 같이 한 이샘, 전보경 작가도 공감했던 부분이다.

LEE : <ETC>의 비전과 사명 등을 보면 일반적이고 개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추상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특화된 설명을 듣고 싶다. 또 ETC는 사람 중심이다. 현재 진 인이 나래 작가는 비인간적 존재들을 중심에 놓고 작업하고 있다. 주목하는 지점이 바뀐 것인가? <범-생명 권리 헌장 만들기>(2021)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상정하고, 좋은 의도에서 만든 인간을 위한 선언에서조차 소외된 존재가 생기는, 한계가 역력히 보이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JIN : <ETC>는 명확히 존재하는 합의된 기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ETC’에는 기타 등등이란 뜻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작가인 우리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역할/위치에 있는데 이 작업을 통해 우리처럼 사회적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존재들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형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CEO가 되어 가상의 회사를 만들고 사칙도 만들었다. 관련 내용은 모두 공기관에서 가져다 패러디했다. 내가 비인간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2017년 후반 정도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과정이 <ETC>와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재개발이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이트 큐브(White Cube) 안에 들어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막상 피해를 보는 사람은 그곳에 사는 분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 관찰하고 전시하고 하는 상황에 괴리감을 느꼈다. 그들의 상황을 소재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던 거다. 또 내가 이전에 없던 가상의 인물이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를 토대로 <Cut-and-Paste Writing> 작업을 하는 것과 관련해 어려움을 느꼈다. 재현의 윤리라고 해야 할까? 그런 지점에서 고민이 많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게 무언인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ETC>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낙원 가족 서비스 Nakwon Family Service>(2013)에서 엄마를 원하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해줄 연기자를 데려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촬영해 전시로 보여주는 것이 재현의 윤리와 상충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의 얼굴을 싣지 않고 연기자의 얼굴만 싣는 것으로 바꿨다. 유사한 고민들이 깊어지면서 작업을 중단하고 사회학과를 가게 되었고 인류학 수업 등을 들으면서 조금 더 입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회 속에서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사고를 확장하다 보니 비인간까지 맥락이 닿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타자적 맥락이 존재한다. 당사자성에만 주목하고 실제 그 상황에 처한 사람만 그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위험할 수 있다. 결국은 같이 보고, 듣고, 의논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일시합의기업 ETC <낙원가족서비스> 홍보 플라이어, 가족서비스 프로젝트, 2013 ⓒETC

LEE : <낙원 가족 서비스 Nakwon Family Service>(2013)는 공식적으로 밝힌 ETC의 지향을 직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참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작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줄 모르고 신청한 사람은 없었는가? 또 작품이 되려면 공유되어야 하는데 서비스를 받고 싶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은 없었는가?

JIN : 신청을 받아서 진행했다. 전단지를 만들어서 동네에 배포하는 방식으로 홍보했는데 창동레지던시에 입주해 진행한 작업이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도와주었다. 미술관에서 진행해서인지 대부분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일정 부분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신청했다. 앞서 말했듯 서비스를 받은 사람들을 공개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컸다. 서비스는 배우, 지인 등이 제공했고 작가인 우리가 직접 간 경우도 있었다.

LEE : <만 개의 파도, 시화: 시가 되다>(2013)가 어떻게 ETC의 목표, 사명과 연결되는가?

JIN : 당시 함께 작업했던 작가들도 함께 고민했던 부분이다. 우리가 행동주의자를 지향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팀원과 나누었던 이야기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바라보는 눈의 역할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들듯이 다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가져다 보여줌으로써 발화가 시작되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대부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대부도의 재개발 문제뿐 아니라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를 썼는데 깊은 감정이입을 하면서 선녀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당시 대부도와 관련된 뉴스 등도 참고했다.

LEE : <Ordinary Family>(2013)의 경우 출연진들의 연기가 조금 불안해 보인다. 연기라는 게 드러난다. 의도한 것인가?

JIN : 의도하진 않았다. 또 우리가 알고 보기 때문에 어색하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다. 실제 갤러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짜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꽤 많았다. 또 배우들만 계속 주목하는 상황도 아니다. 그들은 계속 돌아다니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단면들만을 보기 때문에 무심히 보게 된다.

일시합의기업 ETC <도시신사 A씨의 일일#4: 다방의 오후 2시: 미네랄워터 팝업 바> 산발적 장소특정 퍼포먼스, 갤러리바 Satellite, 서울, 기록영상(1분52초) 스틸컷 ⓒETC(촬영: 김준성)

LEE : <도시신사 A씨의 일일 A Day of Gentleman A>(2014)의 경우 주된 역할을 하는 배우를 제외한 출연진들이 그것이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지하철에서 벌어진 에피소드의 경우 작업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공공장소에서의 민폐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신고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JIN : <도시신사 A씨의 일일>은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지하철에서 벌어진 일이다. 연기자도 몇 사람 있었고, 일부 시민들은 연기인 줄 모르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진행할 당시에도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만 촬영을 모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은 이상한 일이 생기면 다들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런 상황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진행하는 모든 퍼포먼스는 끝날 때 사실이 아니라 연기 혹은 작업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마무리한다. <Ordinary Family>도 그랬다.

LEE : <Back to the Future>의 영상, <들은 이야기>, <ETC>에서 제작한 영상 <강남수 Kangnam Water>(2014)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JIN : <Back to the Future>, <강남수 Kangnam Water>의 경우엔 팀 작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취향이 나에게 없는 것은 아닌데, 혼자라면 부끄러워 못 했을지도 모른다. <ETC> 때 <1225 대한민국 MV>(2014)에선 플레시몹(flash mob)을 하기도 했다.

일시합의기업 ETC <도시신사 A씨의 일일#5: 신사화와 숙녀화: 사회군무 워크숍> 영상스틸컷, 산발적 장소특정 퍼포먼스, 서울역 광장 인근, 서울, 기록영상(3분20초) 스틸컷 ⓒETC(촬영: 김준성)

LEE : <나투라 나투란스 Natura Naturans>(2017)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비인간 존재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설명을 부탁한다.

JIN : 그동안 재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가에 따라 세상이 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단 하나의 진실은 없고 각자의 진실만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우리가 타자화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시작이 <나투라 나투란스>이다. <나투라 나투란스>란 이름 아래 여러 작업을 진행했다. 고민을 나누는 라운드 테이블, 워크숍, 인공정원 제작 등이었다. 당시 ‘자연과 인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개척해 살아가는 것에 대해 환경 파괴 이야기를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연 활동이 아닐까?’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내가 하는 예술은 무엇일까?’ 같은 고민들이 합쳐졌다.

LEE : 비인간 존재에 관한 이야기인데 식물에서 시작한 남다른 이유가 있는가?

JIN : 식물에서 시작했기보다 내가 관계 맺는 자연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나는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전시장에 자연물을 들여오고 싶어졌다. 그래서 생태계를 만드는 설치 작업을 계획했다. 인공과 자연 사이의 유희와 예술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백남준의 <TV 물고기 TV Fish(Video Fish)>(1975~1997) 같은 작품을 봤을 때의 느낌 등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명이라 불리는 동물이나 식물을 미술관에 그대로 가져왔을 때의 윤리적 문제들에 관심이 갔고 고민이 되었다.

LEE : 소재이자 재료로 가져온 식물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JIN : 전시가 끝난 뒤 모두 죽었다. 내가 전시장에 상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리를 부탁드렸는데 잘 되지 못했다. 이후에 그와 같은 작업을 다시 하지 않았다. 굳이 생명이 있는 것을 전시장에 가져와 전시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다. 내가 관심을 더 갖는 지점은 오히려 이와 같은 주제에서 발생하는 여러 질문들이다. 그것은 윤리의 차원뿐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진 인이 나래 <흙은 물 속으로, 물은 불 속으로> 혼합매체 가변설치,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촉각적 원근법]전 설치장면, 2017 ⓒ진인이나래(촬영:신제현)

LEE : <이상한 과일 #1: 태양은 빛나고 우린 모두 꿈을 꾸네 Strange Fruit #1: The Sun Shines and We All Dream>(2019)는 비인간을 법적 주체로 상상하여 정당을 만들고 법안을 제안했다. <이상한 과일 연합정당 온라인 창당대회>를 보면 조금은 거칠어 보일 수도 있는 구성과 연기였다. 정당과 대표/대변인들이 발의한 내용 등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작가의 개입은 어느 정도였는가?

JIN : 워크숍이나 모의 창당은 모두 자유롭게 참여 가능했다. 발의 내용은 전적으로 참여한 분들이 자유롭게 만들었다.

LEE : 일부 내용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도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한다.

JIN : 그와 같은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공존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이상적인 미래를 생각하지만 서로가 자신의 권리 주장을 하다 보면 점점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LEE : 자신의 이익을 중심에 놓다 보면 궤변이 나올 수도 있뎄다. 개인적으로 장난감을 반려 보배라고 표현한 것이나 ‘장난아니당’의 분위기가 좋았다.

JIN : ‘장난아니당’의 영상도 참가자가 직접 만든 거다. 나는 이런 연합정당 창당대회라는 판만 깔아주었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게 내가 할 일의 끝이었던 것 같다. 다른 당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대변할 당의 존재, 퍼포먼스의 방식과 내용 모두 참여자들이 선택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워크숍 등으로 진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라기 때문이다.

진 인이 나래 <이종-선언체>('이상한과일 연합정당' 홍보 구조물), 혼합매체 가변설치, 개인전 [땅의 정치 Terrapolis] 설치 장면, 옵스큐라, 2020 ⓒ오진령

LEE :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경우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고민이 있을 것이다.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할 때도 조금은 다른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들 말한다.

JIN :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항상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을 걱정해서 작업의 방식을 바꾸게 되지는 않았다. 함께 하는 작업의 경우 나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참여자들을 항상 밝힌다.

LEE : <Cooking Studio>(2020)의 <How to Make a (Anti-)Virus Juice>(2020), <세상의 모든 꽃들 Every Flower in the World>(2020), <하바툴 바라카 حبه البركة Habbatul Baraka>(2020)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음식은 그 안에 권력, 경제, 발전, 믿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유전자 조작, 빈부격차 등 끝없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영역이다. 진 인이 나래 작가의 관심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JIN : 그 작업들은 유튜브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유튜브를 보면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영상이 정말 많다. 나도 그와 같은 형식의 영상을 제작했다. 다만 나의 영상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질문과 이야기를 담는다. <세상의 모든 꽃들>은 다양한 성, <하바툴 바라카>는 이주민을 다룬다. <How to Make a (Anti-)Virus Juice>는 친환경을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바이러스도 감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사실 모두가 행복한 공생은 불가능하다. 다른 존재를 먹고 소화해 자기 몸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게 생명이다. 그래서 먹는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다.

LEE : 작업마다 홈페이지를 따로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 작업을 하기 때문인가?

JIN :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작업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을 연결성을 잘 모르겠다. 드라마를 예로 들면, 한 명의 작가가 쓴 모든 드라마를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분리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작업을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싫기도 하다.

LEE : 모든 작품을 하나의 주제나 흐름으로 한정 짓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 인이 나래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작가들에게 그렇게 친절한 방법이 아닐 수 있다.

JIN : 프로젝트 단위로 작업을 하다 보니 그런 것도 같고 나의 공식 웹사이트를 나중에 만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라든가 그런 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취향도 영향을 주었다. 홈페이지를 만들 때 디자이너에게 일목요연하게 한눈에 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라 무엇을 클릭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보다 보면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은 구성을 요청했다.

LEE : 여럿이 모였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왜곡이나 소통의 왜곡을 보여주기 위해서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인가?

JIN : 처음에 공동 작업을 시작할 때는 그런 마음이 컸다. <Cut-and-Paste Writing>가 그런 마음에서 진행한 작업이다. 나는 점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러 링크(link)의 합으로서의 노드(node)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LEE : 앞으로도 공동 작업을 선호할 것 같은가?

JIN :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반드시 공동 작업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진행하다 보면 결국 그와 같은 방식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같이하는 방식이 많이 등장할 것 같다. 그러나 혼자 하는 작업도 재미있다. 이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런저런 고민,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데 그것을 단정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장을 소규모로 만드는 작업은 앞으로도 진행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