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14.

본 글은 2021년 5월 6일(목)에 진행된 이문정과 조영주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 조영주 Cho, Youngjoo

LEE : 이문정, Cho : 조영주

LEE : 육체가 지속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조영주의 작업이 흥미로웠다. 페미니즘적으로만 읽히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작업이다.

Cho : 그동안 나의 활동을 되돌아보면 몸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마당극이나 탈춤을 하는 민예반, 대학생 때는 극회(연극반) 활동을 했다. 대학 입학 후 입시 미술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아카데믹한 미술을 배웠기 때문에 미술보다 극회 활동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무용을 배우는 워크숍에 3년 정도 참여했다. 그때 현대무용에 눈을 뜨고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나의 작업이 나오게 되었다.
나의 작업에 여성주의적인 해석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여성주의 혹은 여성을 생각하며 진행하진 않았다. 작업에 여성인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직접적으로 많이 넣는 편이다 보니 그처럼 끌고 오게 된 것 같다.

LEE :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2006-2007)부터 시작하겠다. 우연히 만난 남성의 옷을 빌려 그것을 입은 채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의 모습을 기록하는 행위는 내밀하며 야릇하다. 마치 신체적인 접촉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다.

Cho : 결혼해서 유학을 갔는데 프랑스에선 유부녀에게 마담(madame)이란 호칭이 붙는다. 난 그게 너무 싫었다. 한국보다 자유로운 곳에 도착했는데 결혼한 동양 여성이라는 사실이 나를 한정된 영역 안에만 놓이게 하는 것 같았다.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데다가 젊었던 당시의 나는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마담이라 불리며 나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약받는 상황이었던 거다. 아직 언어가 유창하지 못한 동양 여성인데 마담이라고 규정되니 정말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그 소외감 같은 것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다 남편이 나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나는 파리에 혼자 머물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유부녀이지만 일정 부분에서 자유가 주어졌고, 그때 했던 첫 작업이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였다. 동양 여성이 서양 남성들에게 받았던 관심과 시선 혹은 희롱 등을 뒤집는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갖는 정서나 규범 등을 고민하며 줄타기를 하는 작업이었다. 결혼한 사람의 윤리적인 경계선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후 진행한 작업에서도 이와 같은 고민이 이어졌다.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 50x35cm(가변크기), 디지털 프린트, 2006-2007 ⓒ조영주

LEE : 티셔츠 벗어주기를 거절한 남성은 없었는가?

Cho : 내가 시도한 모든 남성이 다 벗어줬고, 내가 준비했던 새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작업을 진행했던 몇 달 동안 나는 가방에 항상 새 티셔츠를 넣고 다녔다. 작품으로 보여준 것은 내가 그들이 벗어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뿐이지만 그 과정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사실 티셔츠를 벗어주기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진다. 젊은 동양 여성인 내가 상대에게 말을 걸고, 호감을 표시하면서 이것이 나의 예술 프로젝트라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티셔츠를 하룻밤 빌려줄 수 있냐고 말을 하고. 나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줄 만큼 해당 남성과 대화나 소통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거절했을 법도 한데 거절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

LEE : 티셔츠를 벗어달라고 요청할 남성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Cho : 어떤 기준에 맞췄던 것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플러팅(Flirting)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호감이 좀 가거나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 왜냐면 상대도 나에게 관심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야 대화를 이어가고 티셔츠를 벗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LEE : 옷을 받아서 그대로 가져다가 입고 하룻밤을 잔 뒤 세탁을 해서 돌려준다. 굳이 세탁해서 돌려주는 이유가 있는가? 제목에서의 분위기도 그렇고 은밀한 교감이 있었던 것 같은 상황인데 세탁해버리니 모든 것이 사라지고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Cho :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는 교환이 아니라 내가 전 과정을 조절하여 취하기만 하는 작업이었다. 하룻밤 빌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내가 계획한 대로 조절하며 수행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끝내는 것, 그뿐이었다. 세탁하지 않고 돌려준다는 것은 내 체취를 나눠주는 것이고 그것은 다음으로 이어짐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애초에 포함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결혼한 여성인 나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점이었다.

LEE : “흔히 서양 사회에서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선입견을 뒤집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부연 설명을 부탁한다. 수동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역전시킨 것 같다.

Cho: 그렇게 봐도 될 것 같긴 하다. 나는 그와 같은 관계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 컨트롤러(controller)가 되었다. 꽤 오래전의 일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통쾌함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LEE : 다음날 티셔츠를 돌려주고 끝을 내니 화를 낸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Cho : 한 명이 굉장히 화를 냈다. 이후의 관계가 발전하길 기대한 것 같았다. 이 작업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데, 참여자 중 한 명이 내게 옷을 벗어준 뒤 곧 다른 나라로 떠나버려 돌려줄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다. 몇 년 뒤 내가 독일에 머무를 때 그 남성을 우연히 베를린 거리에서 만났고, 그날 저녁 우리집에서 열렸던 파티에서 마치 행사를 진행하듯 기념사진을 찍으며 돌려주었다.

<Exchanging T-shirts> 관객참여 퍼포먼스, 혼합재료, 쌈지스페이스 2007, Kunstraum Kreuzberg/Bethanien 2008 ⓒ조영주

LEE : <Exchanging T-shirts>(2008)에서도 티셔츠를 교환하는 행위가 나온다. 옷을 바꿔입는 행위는 나의 정체성을 잠시 벗어나 다른 이의 정체성에 스며듦을 상징하는 것 같다.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는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옷을 바꿔 입는 방식을 처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Cho : 티셔츠를 이용한 작업은 남편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뒤 나 혼자 프랑스에 머물 때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옷장에서 남편의 티셔츠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험이지만 마치 흔적, 제3의 피부, 허물 같은 누군가가 입었던 옷이 무언가 강력한 것을 전달할 수 있겠다 싶었다.
<Exchanging T-shirts>(2007, 2008)는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 직후의 작품이다. 2007년 쌈지에서 시작한 뒤 여러 번 진행했다. 당시 나는 글로벌 에일리언(Global Alien)이라는 그룹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Exchanging T-shirts>는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찾아 그룹 전체의 프로젝트 안에서 실행한 것이다. 이 작업은 내가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을 때에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다문화가 문제시되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이주민들과의 문화적 융합이라든지, 융합 안에서의 서열, 언어적 권력 등이 큰 이슈였다. 글로벌 에일리언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라는 타이틀로 그와 같은 주제들을 계속 다루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입어본 나의 경험을 관객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Exchanging T-shirts>는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와 다르게 교환이었다. 또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직접 교환이 아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남겨놓고 간 티셔츠 중에 자신이 입을 것을 고르는 거였다. 다른 이가 입던 옷을 빨지 않고 다시 입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열린 태도와 용감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파리와 베를린에 거주했던 나 역시 소수자였고 인종 문제와 긴밀했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진행한 작업이다.

LEE : 세탁도 안 된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의 참여도는 어느 정도였는가?

Cho :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옷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옷을 자신을 보호하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옷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또 당시 한국에서는 벼룩시장 같은 데에서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사 입는 것이 선호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옷에 대한 인식이 달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진행할 때는 전시 초대장에 그날 입고 온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다는 안내문을 적었다. 베를린이나 덴마크에서는 사전에 안내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즉석에서 갈아입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옷만 갈아입는 게 아니라 참여한 관객이 선택한 문구를 티셔츠에 새겨주었는데 그런 과정 자체를 재미있어했다. 또 당시 유럽에서는 지식인이고 문화인이라면 열린 마음,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참여가 더 잘 이뤄졌던 것 같다.

LEE : 중년의 여성들과 함께 한 댄스 필름 프로젝트는 중년 여성의 전형적 모습을 역이용해 그것을 벗어난다. 그런데 중년의 범위는 꽤 넓다. 또한 40대, 50대, 60대, 70대의 차이는 꽤 클 것이다. 작업 설명을 보면 주로 50~60대 여성들과 함께했다. 작업을 위해 만났던 중년 여성의 연령대는 어느 정도인지, 작가가 생각하는 중년 여성은 어떤 여성인지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중년은 40세~59세 사이를 말한다.

Cho : 50대 후반에서 60대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아줌마라는 단어에 속하는 분들이었는데 나는 이분들을 아줌마라는 단어로 범주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단어를 빼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적당한 단어가 중년이었다. 나의 엄마와 같은 분이라고 말하면 가장 단순하고 정확한 설명일 것 같다.
2012년 한국에 급작스럽게 들어와 가족들과 가까이 살게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외할머니, 여동생, 그 밖의 가족들의 삶을 보며 두려움이 생겼다. 유럽에서는 일정 부분 한국의 규범이나 사고에서 벗어나 작가로 자유롭게 활동하며 앞으로도 훌륭히 내 일을 해낼 거라는 꿈을 가졌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자 많은 부분이 좌절되었고 나의 미래도 내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나의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인 60대 중반의 여성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냥 내가 일상에서 늘 봐왔던 어머니 같은 분들이 작업에 참여했다. 그 외의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LEE : 노년이 아니라 중년 여성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Cho : 나에게 노년은 사회활동이나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분을 의미한다. 나의 작업에 참여한 분들은 모두 생업에 종사하여 가계를 꾸리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LEE : 작업마다 참여자를 모집하는 방법이 다를 것 같다. 섭외 과정, 그리고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가?

<꽃가라 로맨스> 단채널 영상, 6분 51초, 부산 무지개 공단, 2014 ⓒ조영주

Cho : 총 5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부산 홍티아트센터에 있을 때 시작되었는데-<꽃가라 로맨스>(2014)-입주하기 전부터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홍티 아트센터는 공장지대 사이에 위치하는데 그 옆에는 작은 마을이 있다. 자연히 동네 아주머니들을 보게 되었고, 그분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당시 홍티아트센터는 일주일에 1~2회씩 지역민을 위한 문화수업으로 노래 교실과 에어로빅 강습을 진행했다. 이미 그룹이 형성되어 있으니 그 시간에 함께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겠다 싶었다. 무료로 수업을 제공하는 시간에 함께 하는 것이라 참여도도 높았다.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이미 만들어진 그룹에 속한 분들과 작업했다. 예를 들어 <워터리 마담>(2015)은 양평 옥천면의 부녀회원, <DMG: 비무장 여신들>(2015)은 철원 DMZ 안보관광 해설사분들이었다. 오산에서 진행한 <디바들의 외출>(2015)은 참여자 모집을 했지만 사실 이 경우도 저렴하게 수업을 진행하는 지역복지관에서 모집한 거라 완전히 다른 방식은 아니었다. 그때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12개월 동안 다섯 작업을 모두 완성했다. 2~3개월에 하나씩 진행했다. 한 팀당 길게는 몇 개월, 짧게는 며칠씩 워크숍을 갖고 진행했다. 신뢰감을 쌓으며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몸으로 부딪히며 함께 하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 나와 참여자분들 모두 즐겁게 했고, 인기가 좋아 나중에는 여기저기에서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주민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 작품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물도 나오고, 지역 홍보도 가능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정말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가 나를 성장시켰다. 또 스스로 나의 작업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도 했다.

LEE : 프로젝트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은 전문 무용수나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안무를 습득하고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Cho : 참여하신 분들이 정말 열심히 하셨고 최대한 간단한 동작으로 구성했음에도 쉽지 않았다. 다만 라이브 방송이 아닌 촬영이라 끊어가며 진행했다. 그리고 안무가가 카메라 뒤에 서서 동작을 보여주면 그것을 보고 따라 했다.

LEE : 일부 작품에서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Cho : 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들이 허구라고 의심한 적은 없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참여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깨알같이 다 듣는데 작품에 최종 결과물인 이미지만 담기는 게 아쉬워 <드레스를 입은 대화>(2015), <미스리와 김여사>(2015)에서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미지가 아닌 이야기에 집중해보자는 의도였다. 이런 경우는 있었다. 참여자 중에 외도해 온 남편과 평생 살면서 자식들을 열심히 키운 분이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대화> 촬영 당일 남편분이 촬영장에 오셨는데 남편 앞에서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보였다. 또 자신은 이혼도 하지 않고 아이들도 잘 키웠으니 정말 잘 산 거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미스리와 김여사: 이순애와 김복희 이야기> 라이브 퍼포먼스, 35분, SeMA 창고, 2017 ⓒ조영주

LEE : <꽃가라 로맨스>에서 발레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발레는 그 어떤 무용보다 전통과 규범이 확고하다.

Cho : 나와 안무가는 무용을 바탕으로 한 무언가 정도로만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첫 워크숍 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안무가가 발레를 바탕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분들의 열망과 욕망이 발레 같은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발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인 가녀리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노래 교실에서 그분들은 샹송을 부르셨다. 우아하게 보이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발레를 선택했고 딱 들어맞았다.

LEE : 중년 여성들과 함께 한 작업 설명에서 “나의 프로젝트를 통해 아주 잠시나마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아이처럼 기뻐하거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꽃가라 로맨스>, <그랜드큐티>(2015), <디바들의 외출>(2015) 같은 작품은 중년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 혹은 현실과 이상의 불협화음을 드러냄으로써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Cho : 서로 반대되는 두 요소가 함께 하며 충돌하거나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웃음과 울컥함을 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의 시각에서 보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과정 자체에서 중요시했던 것은 아주 원초적인 욕구나 욕망을 표출할 기회조차 박탈된 여성들의 인생이었다. 마치 인형 놀이하듯, 소꿉놀이하듯 간단할 수도 있는 행위지만, 현실에서 시도할 수 없는 옷과 화장으로 꾸며서 평소의 자신과는 불협화음이 일어날 정도로 너무 다른 모습의 자신을 경험하게 하고 욕망을 표출하게 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어찌 보면 판타지의 실현인 것이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시던 분들이 촬영 당일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예상하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부분이 바로 울컥한 지점이다. 실제로 마지막 날 펑펑 우는 분도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돌아볼 기회 없이 평생 가정을 돌보고 일해온 자신을 생각하자 감정이 복받친 것 같았다.

<DMG: 비무장 여신들> 단채널 영상, 8분 51초, 한국 DMZ:비무장지대, 2015 ⓒ조영주

LEE : <DMG: 비무장 여신들>에서 하얀 드레스와 그녀들의 동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Cho : 동작은 한국무용의 기본자세에서 나온 것인데 하나하나의 동작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DMZ는 도발해서는 안 되는 고요한 곳이다. 그 긴장감과 고요함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유지되는 느낌을 담았다. <DMG: 비무장 여신들> 외의 춤 프로젝트에서도 최대한 기본적인 동작으로 진행했는데 동작 자체보다는 참여자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는 수풀이 우거진 여름의 DMZ 풍경과 대비되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선택했다. 시각적으로 우거진 숲속에서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춤추는 장면을 담고 싶었다.

LEE :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끌어내는 작업은 과정 중의 주체를 떠오르게 한다. 댄스 필름 프로젝트 외의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삶의 과정에서, 혹은 자신이 위치한 맥락에 따라 계속 변한다. 완결된 정체성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Cho : 정체성은 계속 변하는 거다. 계속 변하지만 계속 정의하라는 요구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변한다고 정의를 아예 안 하면 너무 헤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곧 변하더라도 어떤 정의가 필요하다. 어떤 카테고리 안에 나를 넣든지, A와 B 사이의 접점에 넣든지, 어딘가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은 삶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의 사회는 비교와 경쟁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분위기이다. 나 역시 그랬다. 특히 사회적 서열이나 위치의 차이 같은 것들을 많이 느끼며 자랐다. 외국에 나가 인종에 따른 맥락을 경험하기 전부터 그와 같은 위계 관계를 경험시키는 것들이 있었다.
정체성이란 예술 이전에 삶 자체를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 작가 노트에 적었던 것 같은데, 정체성은 나란 존재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한 지점을 표시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표시하기를 반복하는 것, 시간에 따라 혹은 속한 그룹에 따라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끝없이 표시하는 것과 같다.

LEE : <미스리와 김여사: 이영숙과 김숙자 이야기>(2017)에는 현실 속 여성들과 함께 작업을 만들어가는 조영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특히 아마추어 여성합창단이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은 울림이 남달랐다. 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릴 기회가 많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작가와 참여자 사이에 충분한 교감이 있어야 가능할 텐데, 그저 부딪히며 시간을 오래 보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노력했던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Cho : 일단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작업의 바탕에는 그분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래서인지 연민이 갔고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약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그동안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누구의 딸이자 며느리, 아내라는 맥락에 놓였다.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한 분(여성)들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시점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기본적으로 솔직한 편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일까?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미스리와 김여사: 이영숙과 김숙자 이야기> 라이브 퍼포먼스, 50분, 인천아트플랫폼, 2017 ⓒ조영주

LEE : <아름다운 인연>(2013)에서는 결혼의 환상(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사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환상인 동시에 여성 혹은 남성에게 부과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이기도 하다. 결혼 정보회사에서 회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결혼뿐만 아니라 오늘날 개인의 능력을 판단할 때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시대에 인간을 지배하는 가치, 현실 속의 인간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작업 같았다.

Cho : 2012년 귀국하면서 한국 사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프랑스나 독일도 그들만의 규범과 잣대가 있었겠으나 이방인인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오니 갑자기 매서운 잣대들이 무방비 상태인 나에게 들이닥쳤다. 내가 갖고 있던 이전 삶의 방식이 무시되거나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저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규율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살 수도 없었다. <아름다운 인연>은 이런 상황, 즉 가족과 친인척, 주변 사람들, 나아가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것과 나의 욕망의 충돌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유부녀였던 나는 재혼을 상담했는데 초혼과 재혼은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 재혼의 경우 아이가 없을 때 높은 점수를 받는다. 재혼의 세계에서는 ‘무출산’이란 단어를 쓰더라. 유머와 스릴을 경험했던 작품이다. 사실 더 진행하고 싶었는데 기혼자인 내가 결혼 정보회사에 회원으로 등록하는 게 불법이라 전화 상담만 했다.

LEE : 작가가 놓인 현실의 상황과 매우 긴밀한 상황에서 작가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진짜인 것 같은데 꾸며낸 것이고, 꾸며낸 것 같지만 실제 작가의 이야기라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진실된 이야기 2>(2012), <아름다운 인연>,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2014) 등에서 작가의 실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Cho : 작품을 감상할 때 전혀 몰라도 되는 부분이긴 한데 궁금할 것 같긴 하다. 사실 그 경계의 모호함이 나의 의도이다. 오래전이긴 한데 학생 때 소피 칼(Sophie Calle)의 작업을 좋아했었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작업이 멋져 보였다. 나의 아주 초기 작업에도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나는 내 작업에 나의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넣는다. 실제 이야기의 비중이 크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재하는 현실과는 다른 나의 욕망도 포함된다.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 다채널 영상 각 5분 & 퍼포먼스, 오뉴월 갤러리, 2014 ⓒ조영주

LEE :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에서 한국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남성이 앉아 있는 상황은 작가가 유학 시절 경험한, 한 장소에 있으나 대화에 주도적으로 끼지 못하는 상황이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또 여성뿐 아니라 소외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Cho : 이전부터 권력 관계와 우열 등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부분을 당연히 염두에 두었다. 다만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의 남성들은 백인 남성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불편함이나 답답함은 있겠지만 주눅 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에 머물다 독일로 이사한 뒤 독일어를 다시 배웠다. 이후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독일어를 습득했음에도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제외하면-동등하고 싶은 친구 관계에서는 영어만 썼다. 언어가 주는 힘은 상당하다. 특정 언어가 사용되는 지역에서 언어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권력 관계는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언어가 만들어내는 관계들,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문화와 관련된 작업을 많이 했다.
나는 심지어 한국에 들어와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을 접하곤 했다.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의 문화도 이해했기 때문에 한국에 들와서도 외국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양인과 함께 전시 오프닝에 갈 때와 혼자 갈 때의 상황은 너무 달랐다. 혼자 가면 무명의 신진 작가인 나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서양인과 함께 가면 사람들이 깍듯하게 대해주고 전시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해주었다.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에서는 내가 외국에서 경험한 것과 한국에서 만났던 상황 모두를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동시에 여성 작가로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도 함께 담긴 작업이다.

LEE : <Happy Holiday>(2007)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성탄절 휴가 동안 타지에 홀로 남겨진 작가와 식물의 상황이 겹쳐진다. 혹시 맡아주는 기간 동안 식물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걱정을 한 적은 없는가?

Cho : 다행히 죽은 식물은 없었다. 마치 그것이 내 직업인 것처럼 식물을 관리했다. 아주 중요한 식물은 내게 주지 않았던 것도 같다. <Happy Holiday>나 <파리 루르멜가 77번지의 크리스마스>(2006-2007)는 이방인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양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 여성으로서 나의 위치는?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둘 다 이방인의 신분이 여실히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휴가 때 했던 작업이다.

LEE : <파리 루르멜가 77번지의 크리스마스>에서 작가는 성탄절 장식품을 훔친 뒤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로비에서 트리가 치워지던 날 밤 그것을 다시 돌려주었다. 예술적 행위라 해도 훔치는 행위는 위험을 동반한다. 당시 걱정되지는 않았는가? 더군다나 이방인이다.

Cho : 홈페이지에 전부 공개되진 않았지만, 범법행위와 관련된 작업이 몇 개 있다. 내가 한 범법행위가 경찰서까지 갈 정도의 일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마음을 졸이는 상황이긴 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의 로비에 4개의 대형 트리가 한 달 이상 놓여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살짝살짝 훔쳤다. 공원에서 흙을 정말 소량씩 훔치는 작업도 했었다. 야외의 흙에는 풀이나 씨앗들이 있어 물을 주면 식물이 자란다. 훔쳐온 흙에 물을 주고 식물을 키운 적도 있었고 소분한 뒤 라벨을 붙여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게 만든 적도 있었다. 사진 한 장으로 남는 작품이지만 그 과정은 길고 이야기도 많다. 지금 자신 앞에 놓인 작품을 보는 관객이 이전의 과정을 상상하게 하는 지점이 재미있었다. 이런 작업은 내가 좋아했던 작가인 톰 프리드만(Tom Friedman)의 <Hot balls>(1992)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의 설명에는 ‘작가가 훔친 200여 개의 공’이라고 적혀 있다.

LEE : 둘을 명확히 분리할 수는 없겠으나, 오로지 작품을 위해 진행된 범법행위인가? 아니면 작가의 심리가 반영된 것인가?

Cho : <파리 루르멜가 77번지의 크리스마스>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훔치는 행위를 하는 나의 심리를 궁금해하면서 작업으로 이어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트리와 장식이 공공의 것인지 사적인 소유물인지에 대한 질문이 오가는 상황들을 즐기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되돌려주었기 때문에 작업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파리 루르멜가 77번지의 크리스마스(1)> 106x150cm, 디지털 프린트, 스티커 레터링 ENSA Paris-Cergy, 2006-2007 (레터링 부분: 2007,1,21, 새벽 2시 17분, 파리 루르멜가 77번지, 내가 훔친 모든 것을 다시 가져다 놓았다.) ⓒ조영주

LEE : 개인전 [조영주-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2013)에 발표된 작품에는 빨간색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름다운 인연>, <나의 왕께 바칩니다>(2013)도 마찬가지이다. 남다른 이유가 있는가?

Cho : 큰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이유는 없다. [조영주-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의 드로잉들은 2012년에 한 것인데, 내가 우울증을 겪었을 때이다. 작업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며 그린 것이다. 빨강을 사용한 남다른 이유나 의도는 없었다. 다만 전시를 보고 누군가가 빨간색이 치유적인 색이라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미술 치료에서 빨간색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생각난다고 말해주었다. 한편 <아름다운 인연>이나 <나의 왕께 바칩니다>에서는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둘 다 여성적인 영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름다운 인연>에서는 빨간 치마에 가까이 가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의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 치마와 치마에 귀를 대고 듣는다는 행위를 강하게 부각하려 했던 것 같다. <나의 왕께 바칩니다>는 여성의 분비물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강은 여성의 순결, 생리혈 등과 연관될 수 있는 색이기도 하다. [조영주-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에는 노란색의 벽 드로잉도 등장하는데 그것 역시 지워지지 않는 여성의 흔적들을 켜켜이 쌓은 것이라 생각했다. 오래전 상하이 여행 때 봤던 누군가 길가에 널어놓은, 오랫동안 사용해 지워지지 않은 분비물의 흔적이 남은 것 같은 속옷을 떠올리며 만든 작업이다.

<세 개의 숨> 단채널 영상, 8채널 사운드 설치(12분 37초), 함석 배기관, 라이브 퍼포먼스, 12분 37초, 2020, 작곡: 이은지, 퍼포머: 김욱(베이스 클라리넷), 서수복(타악기), 이동화(튜바), 정인현(알토 색소폰), 촬영 & 편집: 이선영, 카메라: 이정훈, 최준하, 음향: 허가람, 음향 보조: 박신원 ⓒ조영주

LEE : 안무가, 작곡가와 협업을 진행하는 과정이 궁금하다. 특히 작곡의 경우 의견 조율을 어떻게 하는가?

Cho : 너무 어렵다. <세 개의 숨>(2020)을 위해 작곡가와 2주에 한 번씩 거의 10개월 동안 만나 작업했다. 나의 것을 이해시키는 데에, 또 내가 작곡가의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다. 내가 미술만큼 음악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작곡가의 도움을 받았다. 악기의 특징, 연주법 등을 공부하고 그중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안무가의 경우는 연출이라는 지점에서 같이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작곡가와의 협업보다는 시간이 적게 들었다. 완성된 곡을 보며 악기를 바꾸거나 현장에서 수정하기도 했지만, 음악은 작곡한 이후의 수정이 힘들어 작곡 이전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LEE :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성을 통해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점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Cho : 내가 만약 한국의 남성이었다면 혹은 백인 남성이나 백인 여성이었다면 어떤 작업을 했을까 상상해보면, 지금과는 다른 작업을 했을 거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근사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필연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했다. 만약 내가 백인이었다면 환경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숨 쉬는 것, 먹는 것이 당장 우리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들이니까 말이다.

LEE : 오늘날 여성의 경험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전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마주한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난제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관련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Cho : 내가 한국에 돌아왔던 2012년에 이미 많이 한 이야기라는 식의 반응이나 이야기가 더 많았다. 당시에도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을 비롯해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어서인지 지금은 오히려 그때처럼 직접적인 반응을 접하지 못한다. 여성 문제와 인종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다뤄져야 하는 이야기이다. 남성과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지점이 너무 다르다. 남성은 남성이어서 처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장으로서 받는 중압감이 엄청난 것 같다.

<입술 위의 깃털> 단채널 영상, 칼라, 사운드, 10분 30초, 2020, 안무 & 연출: 이민경, 퍼포머: 곽혜은, 명지혜, 임은정, 장슬기, 촬영 & 편집: 이선영, 음향: 허가람, 음향 보조: 박신원 ⓒ조영주

LEE : <입술 위의 깃털>(2020), <세 개의 숨>은 각각 여성 퍼포머와 남성 연주자로 이뤄져 있다. 물론 다른 인터뷰에서 성을 나누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답했다.

Cho : <입술 위의 깃털>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명확히 의도했지만 <세 개의 숨>의 남성 연주자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분이 그렇게 봐줬다. 나 역시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작업 대부분은 전략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다.

LEE : 일부 작업을 보며 페미니즘 미술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주제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성을 다루는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통된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시대,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차이가 있겠으나 본인의 작업이 여성을 다루고 표현하는 방식에서 차별화되는 지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한편으로 본인의 작업이 페미니즘적으로 한정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을 것도 같다.

Cho : 나의 작업이 이전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작업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나 역시 궁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란 질문이 먼저 든다. 여전히 빛과 색을 연구하는 화가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연구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나도 내게 주어진 상황과 매체 등을 통해 작업할 뿐이다.
내 작업을 여성주의적인 지점, 여성, 육아에만 한정시키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긴 하다. 그래서 개인전 [젤리비 부인의 돋보기](2019, 플레이스막레이져)에서 처음으로 육아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였을 때 걱정이 많았다. 내가 거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상황, 목에 칼이 들어온 것 같은 절박한 경계선에 놓였던 시점에 만든 작업인데 너무 한정되어 버리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안 좋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동안 자신을 비주류 또는 변방에 머무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육아와 같은 소재의 작업을 대안적인 공간에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작품의 의미가 더욱 단순하게 여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한 작품은 내 손을 떠나 흘러간 것과 같으므로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또한 나는 내 작업을 통해 육아의 경험이 없거나 여성의 신체가 아닌 다른 신체를 가진 사람들과도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최근 작업인 <입술 위의 깃털>만 봐도 그렇다.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육아, 아이와의 신체적 접촉이 소재가 되어 시작한 작품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그런 소재로부터 자극받은 다양한 지점이 있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 다양한 관계성이 추상적인 신체 움직임으로 드러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 반짝 뒤로 물러나 보면 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