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7. 26. / 2019. 02. 12. 수정
본 글은 이문정과 정소라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대화일시: 2018년 7월 18일)
일우스페이스 큐레이터 (2017년 2월-2018년 6월)
갤러리 플래닛 이사 (2016년 1월-현재)
카이스트 리서치&아트 갤러리 KAIST Research & Art Gallery 큐레이터 (2012년 2월-현재)
LEE : 이문정, JSola : 정소라
LEE :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계기를 듣고 싶다.
JSola : 대학 시절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을 들어갔을 때에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적성에 잘 맞지 않았다. 작품을 제작하는 것보다는 전시장을 방문하거나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전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궁금해졌다. 당시에는 큐레이터가 지금처럼 대중적인 직업이 아니었기에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갤러리에 취직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병행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준용 개인전 ‘Memorial Roundabout’, KAIST 경영대학, 2018, 이미지 제공=조준용
LEE :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동시에 전시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이전에는 독립 큐레이터로도 활동했다. 기관에 소속된 큐레이터와 독립 큐레이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JSola : 기관에서 일할 때에는 해당 기관의 목표에 자신의 능력과 의견을 맞추고 조율해야 한다. 독립 큐레이터는 특정한 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자유롭고,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 더 낼 수 있다. 대신 어떤 보호 장치도 없다.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한다는 점에서 더 자유롭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들다.
LEE :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해야 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은 매우 많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전시의 성격에 맞는 작가 혹은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다.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정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 전시를 기획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JSola :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품을 보면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지, 그 동안 자신이 이야기했던 바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왔는지, 지금은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전시를 기획할 때에는 이 전시가 어떤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새로운 담론이라 해서 매우 획기적인 최초의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되돌아보게 한다거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를 생각하게 이끄는 것이라 부연 설명하고 싶다. 조금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전시를 만들려 노력하다. 실무적인 면을 이야기하자면 작가와 전시 주최 측, 관람자의 입장이 각각 서로 다르므로 그것을 원만하게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시는 일정 기간 열리는 하나의 행사다. 시작부터 종료까지 사건사고 없이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LEE : 현재까지 기획했던 전시 중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던 전시가 있었다면 무엇인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과 가장 허무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JSola :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던 전시는 많다. 전시가 난해해서 반응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중적으로 성공했던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관람자, 작가의 만족도가 높으면 보람을 느낀다. 한편 전시를 위해 작가와 의논해서 준비했던 것들이 현실적인 한계나 여타 이유로 실현되지 못할 때 허무함을 느낀다.
LEE :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메를로-퐁티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과의 연결이 흥미로웠다. 메를로-퐁티는 오늘날 미술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메를로-퐁티에게 매료된 이유를 듣고 싶다.
JSola :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가 익숙한 시대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우리는 정신과 신체, 나와 타인을 엄격히 구분한다. 작품을 감상할 때도 예술 작품을 보는 주체와 작품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잠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나와 작품이 완벽히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또한 관람자가 작품에 개입하는 순간 작품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나는 의미가 생성되는 그 순간에 형성되는 관람자와 작품의 관계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궁금증을 풀어줄 철학자로 메를로-퐁티를 발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이분법적 사고를 제대로 부정한 첫 번째 철학자가 메를로-퐁티라고 생각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기 위해 지각에 주목한다. 그는 지각에 대한 이전 주장들의 한계를 밝혀내고 지각을 어떻게 규명해야 하는지 평생 동안 연구한 사람이다. 끊임없는 지각, 그 지각이 일어나는 신체를 바탕으로 우리가 이 세상, 타인, 사물과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관점은 나란 주체를 겸손하게 만든다. 어떤 것도 영원한 주체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주체와 대상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그의 주장들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지각의 현상학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이 지각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의 유고를 정리해 출간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Le visible et l’invisible, 1964] 은 지각의 반성적 차원까지를 통찰해낸다. 메를로-퐁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후기 철학이 더 깊이 있게 전개되지 못해 아쉽다.
2004년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날씨 프로젝트 Weather Project>를 보았던 경험이 메를로-퐁티와 올라퍼 엘리아슨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아슨 본인도 일정 부분에서 메를로-퐁티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엘리아슨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거울의 사용은 그것을 통해 작품을 지각하고 있는 관람자 스스로를 인식시키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의 철학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LEE :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공부한 것이 본인의 전시 기획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 전시 <감각의 정원>(2012)이나 <움직이는 개입-김진희>(2015)는 그 영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JSola : 일부러 연결되는 주제나 작품을 선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시 기획뿐 아니라 일상에서 내가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또한 인식하지 않더라도 메를로-퐁티의 철학과 맥이 닿는 주제나 작품에 끌리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 주제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은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전시 ‘메모리 트릴로지’, 갤러리플래닛, 2017, 이미지 제공=갤러리플래닛
LEE : 2017년 기획했던 전시 <메모리 트릴로지>를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 중 하나다. 최근 몇 년간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기억이라는 주제가 매우 많이 다뤄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또한 최근 미술계에서 두드러지게 부상하는 주제나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는 그 중 하나가 사회정치적 이슈라 생각한다.
JSola : 2018년 기획했던 <보이지 않는 것을 공기 중에 배열하는 기술>도 기억에 관한 전시다. 기억은 흥미로운 주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두 축이다. 기억은 이 두 축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완벽히 밝혀지지 않은 신비로운 영역이라 더 주목하게 되는 것 같다. 생리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이 규명하고 있는 기억에 대한 정의가 모두 다르다. 기억은 과거의 것을 현재로 불러들이고 대면하게 하는 무언가다. 작가들이 꾸준히 관심 갖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나 역시 최근 사회정치적 이슈들이 부상했고 지배적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왜곡되고 조작될 수 있는 기억, 역사 등이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는데, 나 역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전시 ‘보이지 않는 것을 공기 중에 배열하는 기술’, 일우스페이스, 2018, 이미지 제공=정소라
LEE : 최근 본인이 주목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JSola : 계속해서 기억이란 주제에 집중할 예정이다. 형식적인 면으로는 공동체로 모여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방식에 관심이 간다. 최근 들어 여러 큐레이터들이 콜렉티브(collective) 형태로 전시를 기획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관람자들까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작가와 함께 무언가를 생성하려 시도하고 있다. 완성된 작품만 모아 놓는 그룹전이 아니라 작가들이 일정 기간 동안 한 장소에 모여 스터디하고 교감하며 전시를 완성하는 형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요즘 시대에 융합은 식상할 정도로 흔한 단어가 되었지만 서로 다른 영역이 만나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나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발전적이다. 한편, 연구자로서는 지각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테크놀로지와 몸’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하고 있다.
LEE : 가끔 전시 서문이나 전시장에 레터링(lettering)된 작품 설명을 읽다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어들이 과도하게 사용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론들 때문에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JSola : 공감한다. 자주 느낀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현대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면 대부분이 어렵다고 답한다. 특히 전시 서문이 너무 어렵고 난해하다고 말한다. 왜 이론가들은 미술을 설명하는데 철학 이론을 언급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전시 서문을 쓸 때마다 자문한다. 전시를 기획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도 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미술은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났고,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게 되면서 점점 더 철학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철학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철학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대중들이 현대 미술에 접근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은 철학적 사변에 작품의 생생함이 묻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술이 철학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예술=철학’이란 말은 아니다. 조형적으로 표현된 예술 작품의 경우 관객이 직접 경험하고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철학적인 이론에 근거한 글이 관객의 영역까지 채워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제현 개인전 ‘디오티라마 프로젝트 2018’, KAIST 경영대학, 2018, 이미지 제공=신제현
LEE : 앞의 내용과 연결된 질문이다. 동시대 미술이 모더니즘적 추상 미술보다 더 어렵고 난해하다는 관객의 반응이 있다. ‘어렵다 혹은 재미있다’라는 양분된 반응이 더 뚜렷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본인이 기획했던 전시의 출품작들을 보면 일상의 사물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일상의 물건을 가져다 작품으로 전환(혹은 승화)시키는 일은 오늘날의 미술에서 특이한 것이 아니다. 미술인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도 많다. 과거에는 이것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 미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은 이것이 미술인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큐레이터로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 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나가는가?
JSola : 매번 느끼지만 어려운 문제다. 예술과 대중 사이의 간극은 분명 존재한다. 대중에게 무조건 따라오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예술도 하나의 전문적 영역이기에 예술과 대중이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리는 것은 쉽지 않다.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미술이 그랬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전시를 기획하면서 전시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것이 대중에게 어렵지 않을까라고 의식하여 난이도를 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위한 실질적인 배려는 홍보물이나 작가와의 대화, 도슨트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관객(대중)들을 믿는 편이다. 좋은 전시나 작품이라면 당장은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5년, 10년 후에라도 어떤 의미나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전시 주체(공간이나 기관)와 예상 관객층을 고려하여 주제나 작가를 선정하려 하며, 관객과 기관 등의 피드백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노력한다.
LEE : 업무 외의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는가?
JSola : 시간 여유가 생기면 주로 전시를 본다. 그러나 미술 이외의 영역에도 관심을 두려고 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현대무용이나 뮤지컬 등의 공연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도 꾸준히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영화가 매우 창조적인 능력을 자극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환경문제나 소외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데에 시간을 쓰고 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과 괜찮은 삶을 공유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중이다. 인간의 삶이 예술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LEE : 우리의 대화를 정리하는 질문이다. 큐레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 소양 혹은 능력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JSola :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와 인간을 바로 보려는 관심과 열정이 필요하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필수적이다. 특히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큐레이터라면 다양한 인문사회학적 지식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것은 창의성과 추진력이다. 큐레이터에게 전시는 하나의 작품이다. 따라서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상상만 할 수는 없기에 자신의 기획을 실행시키는 추진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