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3
본 글은 2023년 8월 24일에 진행된 이문정과 이소정 작가의 대화를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LEE : 이문정, LSJ : 이소정
LEE : 동양화를 전공한 것에 아버지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학부 때 작품들을 보니, 상당히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학부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으나 수묵에서부터 설치까지 넘나든다. 당시에 과슈와 파스텔 등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보내준 작품 이미지 파일에 전통 채색화는 없었다.
LSJ : 서예가이신 아버지 영향으로 3~4살 경부터 동양화 붓에 익숙했다. 나에겐 놀이였다. 어렸을 때 먹을 월등히 많이 사용한 건 아니었어도 크레파스나 물감보다 먹이 더 익숙했다. 먹과 한지가 익숙했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동양화를 덥석 선택하지 못했다. 내가 대학 학부제의 첫 학번이어서 이화여자대학교 입학 때는 미술학부로 들어갔다. 1학년 때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서양화 수업을 더 많이 들었다. 동양화, 서양화, 조소의 기본기를 모두 배운 뒤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동양화를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동양화에만 한정될 거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동양화와 서양화 수업을 동시에 수강하면서, 한쪽 과제의 부산물을 재조합한 작업물이 다른 쪽의 과제가 되었었다. 내 작업 세계의 주요한 부분인 매체나 형식 간 연속성에 대한 실험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유학을 가지 않는 대신 새로운 환경에서 더 배워보고 싶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은 조금 더 보수적이었고 동양화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나 역시 동양화에 관한 질문과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특히 무엇을 질문하는가와 같은 질문의 내용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컸다.
LEE : 대학생 때부터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소정의 작업은 동양화라고 불릴만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 동양화 혹은 한국화라고 명명되는 작업에 대해 누구보다 생각을 많이 할 것 같다.
LSJ : 어찌 되었든 나는 동양화의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 성장했다. 특히나 동양화를 배웠고, 많든 적든 그와 관련성이 있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대해 섣부르게 답한다면 오만한 것이다. 다만 내가 언어로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해도 최소한 내 작업을 통해 통역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왔다. 동양화에 관한 크고 작은 질문 중에는 동양화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대하는 태도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훌륭한 발묵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화폭에 먹으로 된 선 하나 긋고 거창한 제목을 붙이는 작품에는 매력을 못 느꼈다. 또 머릿속에는 ‘먹색은 만색(萬色)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먹의 표현력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색이라고 할 정도인가? 정말 만색인지 증명은 해봤는가? 그것의 실질적인 본질에 대한 고민이나 실험해 보려 하지 않고 그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안일하게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 끝없이 생성된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거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파고들기보다 그저 옛날부터 이야기된 것이라는 핑계로, 전통에 기대어 동양화와 관련된 의미들을 무조건적으로 성역화하는 게 싫었다. 먹으로 대충 멋 부림을 하고 필요 이상의 거대한 의미를 붙여 권위를 부여받는 것 역시 피하고 싶었다. 이런 태도는 반론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규정한다. 한동안 발묵을 자제하고 세필만 썼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LEE :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언제인가?
LSJ : 어릴 적 집에 미술 잡지가 많았다. 들춰보면서 현대미술이 ‘잘 그리고 못 그리고’ 같은 수직적인 좌표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뭔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어렴풋이 생겨났다. 그러한 인식은 나도 좋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에게 작가는 무언가를 만들어 질문을 던지고 나를 비롯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작품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LEE : 대학원 작업에서부터 인체(여체)와 자동발생적으로 생성된 것 같은 엉켜있는 형상들이 등장한다. 학부의 작업과 차이도 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업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시기적 간격도 크지 않은데 이처럼 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LSJ : 엄밀히 말해 작업 간의 연속성, 이전 작업의 부산물을 변주하여 재조합하는 방식 등 지금까지도 유효한 방법론들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 것은 학부 시절부터이다. 자동발생적으로 반복되고 하나의 풍경이 반복되어 화면을 구성되는 등의 방식은 학부 시절의 작품인 <계단>(1999), <풍경>(2000), <사춘기>(2002) 등에서도 있었다. 신체의 변형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3학년 때 그린 <무제>(2000)는 변형된 신체에 대한 실험작이다. 자동 발생과 변형된 신체가 겹치는 작업은 대학원 초기의 <몇 마리의 개>(200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여체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것은 대학원 중기 이후부터이고, 세필을 중첩해서 사용하는 시기 역시 같다. 이유는 현실적이다. 대학원부터는 독립하여 작가로 살아나기 위한 연습과 이행의 시기라고 스스로 정했고, 어떤 조건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나를 위한 훈련기간이라고 생각했다. 세필만을 고집한 이유에는 이것도 포함된다. 먹과 종이만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는 충분한 가임기 성인이지만 불안정한 나에 대한 자조, 현실적으로 나는 충분히 성인(어른)인가에 대한 고민, 유예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고민에 대한 고백도 포함된다.
<몇 마리의 개> 2003, 한지에 먹, 162x130cm, 도판 제공=이소정
LEE : 초기 작업과 관련해 성적 욕망과 환상, 유기체, 괴물 등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작품 이미지에서 자동 증식하는 욕망을 시각화한 것이란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다만 주관적인 의견으로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망 정도의 강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한 증식하는 괴물이란 인상도 강하지 않았다. 욕망과 관련해 정상 수위라는 것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가? 또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작가 본인이 어느 정도로 밝혔는지 궁금하다.
LSJ : 초기 작업에서 여전히 금기시되는 여성의 기관이나 신체를 주요한 소재로 다루다 보니 도발적으로 보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욕을 갖고, 인간의 성욕은 다형 변태적이며, 그 모습은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눈밭의 비겁자>연작, 설치 전경, 2007, 갤러리2, 도판 제공=이소정
LEE : 초기의 자동발생적인 작업 그리고 모양 자와 드릴 매뉴얼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은 최근의 작업과 차이가 크다. 2006년도의 작업에는 보이지 않던 먹의 번짐이 2007년 금호미술관 전시작에서 등장한다. 이때는 선의 표현에서도 한지에 먹이라는 재료적 특성이 드러난다. 관련해 가위와 열쇠 등의 사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LSJ : 2006년과 2007년 작업 간의 차이는 이미지를 통제하는 방식에 있다. 2006년의 작업에는 세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내가 붓을 운용하는 기술 이상의 우연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발묵을 최대한 지양하기 위해 세필로만 그릴 것, 둘째는 자동발생적으로 그려 나간 이미지를 재단해 본 화면으로부터 분리한 뒤 새로운 화면으로 옮겨 독립시킬 것, 셋째는 그렇게 옮겨진 이미지가 3차원에서도 말이 되는 서사와 조형으로 서 있을 것이었다. 분명히 서사가 보이는 그림이지만 구상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이 무엇을 그린 것인가, 어떠한 내용인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의 의미와 서사는 있었으나 그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열여 놓았기에 어떻게 읽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곤란했던 경험은 흥미롭기도 했다. 그래서 <눈밭의 비겁자> 연작(2007)에서는 관객에게 작가의 설명이 아니라 그림으로부터 그 의미와 서사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도록 기호를 제시했다. 기호는 사회적 합의 하에 공통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재생 기호(▶)를 머리, 일시 정지 기호(❚❚ )를 몸통으로 해 Y축 위에 얹어져 있는 골조를 제시하고, 그 위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듯 자동발생적으로 그려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골조와 6개의 초상을 옆으로 회전해 이어 붙여 만든 풍경은 같은 골조 위에 그려진 각각의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기호로 구축된 골조에 이미지를 그려 나가는2) 방식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발묵을 자제하던 붓의 운용 방식을 자유롭게 허용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든 그 의미가 묶여 있으므로 붓의 운용을 열어두는 게 역으로 통제를 위한 방법론을 부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 등장하는 가위, 열쇠 등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통제하는 방식인 동시에 나의 사변적인 맥락을 함께하는 사물들이다. 전술했듯 분리, 독립 같은 이슈를 고민한 20대 후반의 시기는 사회적 성인이자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절박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던 시기였고, 그것을 담아내는 사물이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가위는 하나를 둘로 분리하지만 하나로부터 둘을 독립시키는 것의 상징이다. 나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단서로 양가적 의미를 제시했다.
LEE : 내장 기관을 비롯해 각종 생물, 사물 등이 뒤엉킨 것 같은 형상이 2006년 작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외부 이미지의 영향은 어느 정도이며, 계획성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LSJ : 밑그림이나 스케치는 하지 않지만 모두 의도한 것이다. 물, 붓과 함께 운용하는 먹은 내 실력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료이다. 하지만, 덮거나 바르는 게 아닌 스며드는 재료이기 때문에 한 번 그리면 고치거나 가릴 수 없다. 난 후자의 어려움에 집중하기로 선택했고, 그 수행의 과정을 즐겼다. 발묵을 제한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가 추구하는 작업의 본질 이상으로 멋을 부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세필을 고집하면서 먹이 내는 우연의 효과와 위엄을 배제했다. 한편 화면에 그려진 것은 특정한 이미지를 보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어디선가 봤던 것들이 나도 모르는 무의식에 있다가 분출되었을 수는 있다. 내가 그려내는 것은 나의 시각적 경험에 기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이미지들로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찬란한 시기> 2008, 한지에 먹, 130x162cm, 도판 제공=이소정
LEE : 2008년 이후의 작품을 보면 등장하는 이미지, 표현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가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지들이 자란다는 느낌을 받았고 화면의 전지자가 되고 싶어 기호 문자, 모양 자, 드릴의 매뉴얼 등으로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 1) 한 시기인 것 같다. 작가가 완벽히 계획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벽한 자동 발생은 불가능하다. 사실 2007년까지의 작업도 충분히 계획적으로 보인다. 정갈해 보일 정도이다. 이에 대해 ‘욕망의 통제나 억압’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시각적인 부분에서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미감이나 취향에 맞게 형상과 먹의 표현을 조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엄격성,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통제한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꽤 많다.
LSJ : 내 작업은 자동 발생에 대한 작업이지만 결과물이 자동발생적인 그림은 아니다. 이미지를 기술하듯 그려내는 과정은 밑그림이나 계획 없이 점 하나에서 시작하므로 자동발생적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완성을 염두에 두며 그리는 이상 자동 발생이라는 것은 과정에 붙이는 이름일 뿐 결과가 될 수 없다. <매뉴얼의 복수>연작(2010)을 예로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매뉴얼의 복수>는 <낯선 명절> 연작(2009)에서부터 시작한다. (1)나는 <눈밭의 비겁자> 연작에서 도입했던 재생과 일시 정지 기호에 보쉬(Bosch) 드릴 사용 설명서에서 채집한 회전, 주의 기호 등을 더해 기호로 구축된 풍경의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살을 붙이듯 자동발생적으로 이미지를 그려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2)이후 완성한 그림을 180도 회전시켜 위에 얇은 순지를 덮어씌우고 골조가 된 기호 외의 이미지를 전사했다. (3)전사한 이미지들에 다른 기호들을 삽입해 풍경을 만들었다. (4)이 과정을 반복해 9개의 풍경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 개씩 이미지, 배경, 기호로 구분해 채색하는 부분을 달리하는 연속하는 3세대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에 대해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풍경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자동발생적으로 그려지는 것과 관성적으로 그려지는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그래서 <낯선 명절> 연작에서 내가 그린 이미지들 중 유사한 패턴들을 채집하여 26개의 모형(template)을 만들었다. 나에게서 자동발생적 혹은 관성적으로 나오는 이미지들을 표본화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을 조합해 하나의 밑그림을 만들었고, 그것이 <매뉴얼의 복수> 연작의 모체 화면이 되었다. 나는 이 모체 화면을 0으로 삼고,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나누어 크롭(crop) 1, 2, 3, 4로 삼았다. 그리고 0(모체 화면)과 크롭 1, 0과 크롭 2, 0과 크롭 3, 0과 크롭 4로 조합한 화면을 모체 화면 하나와 그로부터 파생된 절반의 화면과 모조리 중첩해 하나의 화면을 만들었다.
내가 정한 원칙과 방법론에 따라 수행하면 완성이 되는 그림을 추구했지만, 사람의 손과 눈이 하는 일인지라 절단면이 중첩될 때의 어색한 연결 부분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결국 나의 조형적인 미감과 선택에 따라 조율하고 자연스럽게 조합하며 그리게 되었다. <매뉴얼의 복수> 연작에서 나는 완벽한 통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내가 상정한 규칙을 거스르는 모순과 오류에 관한 질문 자체가 작품이 되었다. 완성의 지점, ‘자동발생적’, ‘수행’ 모두 어떻게 난입하고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오류, 모순, 변칙과 조율, 균형, 타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내가 만들고, 내가 지키기로 한 매뉴얼을 스스로 깨면서 ‘자율’이라는 것에 관해 질문하게 되었다.
<가짜 관객 2> 2009, 한지에 먹, 130x162cm, 도판 제공=이소정
<해시계> 2019, 장지에 먹, 주묵, 과슈, 130x162cm, 도판 제공=이소정
LEE : ‘장지 위에 얇은 한지를 얹어 색과 먹을 칠한 뒤 거둬내 의도하지 않은 흔적이 남고, 스며들게 하고’ ‘원래 보이지는 않지만, 원래 있기로 되어 있었던 이미지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숨겨진 형상들을 찾아내듯이 탐정처럼 이미지를 그려 나가는’ 2) 최근작의 경우 초기의 작업보다도 우연성이 더 커진 것 같다. 결국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이미지의 의존도가 더 높아진 것 아닌가? 이제는 화폭을 온전히 통제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 같은 태도로 작업하고 있는가?
LSJ : 화면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는 우연히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이 증식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 불안을 유희하는 것, 그리고 완성의 지점을 내가 정해야 한다는 이미지와 나 사이의 주도권 등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처음부터 헛된 질문 혹은 헛된 논리인 것을 알았고, 심지어 그 오류 자체를 질문으로 삼기도 했다.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은 완전한 통제, 완벽한 완성이 아니라 화면과 나 사이에서 동등한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발묵을 제한했던 것 역시 내가 제시하지도 않은 멋진 어떤 것이 우연히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멋쩍어서였고, 멋대로 증식해버리는 이미지를 재단하거나 기호로 구축된 골조 위에 그려 나가는 방식도 나와 화면 간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우연히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이 자율적으로 화면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아니 그것들은 나의 설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어야 했다. 그게 최소한의 성의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다 개인전 [탐정들](2019)과 [경첩들](2021)에서부터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이미지의 자율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활용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출산이 아닌 육아의 경험이 큰 영향을 주었다. 엄밀히 말해 출산은 나의 경험이고, 육아는 나와 아이가 관계하는 과정들이다. 이 과정을 경험하기 전에는 육아는 통제이자 키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 보니 우연으로 생겨나 자율로 성장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자율성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는 작은 존재를 어른이 되도록 적절하게 돕는 것이 육아였다. 아이와 나의 관계 역시 그 자체로 필연인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존재를 돕고, 힘들어하고, 돌아오는 잠깐의 미소 같은 답례로 한없이 행복해지는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필연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아로 인한 작업 시간의 변화 역시 영향을 주었다. 자율적으로 시간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작업을 위해 정해진, 짧은 시간만 확보되었고 나는 거기에 무조건 맞춰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저런 실험 후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한지가 건조되어 흡사 근사한 조형물의 모습을 한 것을 발견하고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들이 만들어낸 현상과 자율성은 먹과 종이와 또 다른 종이가 서로 관계하며 만들어낸 풍경이고, 우연이 필연이 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 종이를 펼쳤고, 그곳에는 주름과 스며듦의 흔적이 만든 풍경이 있었다. 나는 그것에 거들어 원래 그곳에 있기로 했던 형상이 있다고 믿으며 채색해 덩어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완성했다. 아무것도 아닌 채 구겨져 있었을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내며 균형과 조화까지 갖춘 관계는 대상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최소한으로 돕는 관계라 생각했다. 그것이 이상적인 통제 그리고 조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경첩들] 전시 전경, 2021, P21, 도판 제공=이소정
LEE : <거울 단계>(2016)와 같은 작품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작업 내용이나 표현 방법에서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거울 단계는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신을 최초로 발견하는, 자신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첫 시도인 거울 단계는 자아가 형성되는 최초의 윤곽과 토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아직은 자아가 형성되기 전 단계이다. 따라서 유아는 이미지 세계에 머물고 실재적인 대상 인식을 할 수 없다. 이후 아버지의 언어와 질서를 배우며 어머니와의 합일이 깨지고, 사회적 자아를 갖게 된다. 자기 인식의 첫 단계가 거울 단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아는 아직 스스로 신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일관성 없고, 파편화되고, 분열된 것으로 경험된다.3) 개인적으로 자신을 “대상화하고, 불완전하게 인식하며, 파편화된 몸을 경험한다는 점”이 이소정의 작업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호와 도형, 매뉴얼 등을 분해하고 재구성, 조립하는 작업은 자연히 상징계에 분출하는 상상계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작가의 추가 설명과 의견을 듣고 싶다. 또한 작품의 제목만 봐도 정신분석학과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다수 보이는데 거울 단계 외에 정신분석학적으로 개념을 구축하거나 혹은 관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LSJ : 나의 작업에서 기호는 만인이 약속하여 합의된 의미를 갖는 단서로 기능한다. 서사와 의미를 전달해주는 나의 충실한 통역가이며, 적절한 완성의 지점을 끝점이 아닌 시작점에서부터 확보해주는 편리한 단서이다.
나의 작업은 나의 생태와 함께 가는 부분이 있어서 작업이 일기장이 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나에게만 절박한 질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어떤 고민과 질문이 생겨 최선을 다해 해결하려 노력했는데도 현실이 여전하다면 ‘이것이 나의 모자람을 탓하기만 할 문제일까’라고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주위에는 나와 같은 처지인 나의 세대가 있다. 내가 진정한 성인에 대해 고민할 때 신문에 모라토리엄(Moratorium)이라는 용어와 함께 독립을 유예한 세대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나는 참 특별할 것 없이 내 세대의 고민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 순간만큼은 그러한 평범함에 위안이 되고 힘도 났다.
LEE : 이미지만 봤을 때 최근작은 오히려 더 파편화된 심리와 육체를 보여주고, 더 자동발생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자연과 연결된다.
LSJ : 재료와 재료, 재료와 지지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들이 서로 관계하며 만들어내는 우연한 현상들이다. 우연이라 부르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순간의 습도, 온도, 그리고 한지의 제조 방식에서 오는 비균일성 때문이다. 한지는 한 장 안에서도 균일한 표면을 갖기 힘든 가변적인 지지체이다. 이것이 다른 수용성 혹은 비수용성 재료들과 관계하면서 만들어내는 현상의 속성은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나는 그것들을 구동시키고 예측하면서 그 우연의 파편들을 단서로 필연적인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나는 작업이 해, 비, 바람 같은 자연 현상들을 연구하고 예측하면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적절한 통풍을 관리하며 키워내는 농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 전시 [매미 날개](2023)에 소개된 20호 40여 점의 제목을 <파종>이라고 지었다. 삼합 장지를 한 겹씩 뜯어내고 채색하기를 반복하며 각 층이 만들어내는 색과 질감의 변주를 활용해 형상을 드러낸 작업이다. 의도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작업 테이블에 화폭을 눕혀놓고 허리를 숙인 채 손과 눈앞의 부분에만 집중하며 장지의 결, 안료와 먹으로 젖어 있는 농도 차에 따라 우연히 뜯기고 뜯기지 않는 부분들을 조율하며 작업했다. 더 이상 종이의 겹이 뜯어지지 않는 마지막 층에 이르면, 화판을 세워 형상과 서사가 생기는 부분을 찾아 잘라내 필연적인 지점을 만들었다.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고 조율한다는 점에서 의도의 배제와 개입을 분리해 적용한 것인데 나는 이것이 이미지의 분절과 연속을 만들고, 파편화된 심리와 신체의 뉘앙스를 그려낸다고 느꼈다.
[매미 날개] 전시 전경, 2023, 갤러리2, 도판 제공=이소정
LEE : 개인적으로 이소정의 작업은 한지에 먹이 주재료라 해도 동양화라기보다 회화로 다가온다. 굳이 구분하면 최근작으로 올수록 동양화적 물성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고, 실제로도 (동양화가 아니라)한국화를 강조하고 있다. 2021년의 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는 매체와 형식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작품도 훨씬 추상화에 가까워졌다. 이전 작품도 추상이라 할 수 있으나 무언가를 연상하게 하는 형상들이었다면 이제는 조형 요소 그 자체로서의 형상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무엇을 왜 그리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겠다가 화면의 주인공이 된 작업” 4) 이다. 관련해 작가의 설명을 듣고 싶다. 그리고, 동양화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LSJ : 이 부분은 내가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동양화 재료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앞서 말했듯 전통적인 동양화와의 관계 속에서만 내 작업이 읽히길 원하지 않는다. 한편 감상자는 내 작업에서 재료적 실험이 일어날 때 그 시작점을 동양화로 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동양화 재료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보니 일차적으로 동양화적 요소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부분이 내 작업의 주된 요소가 아님에도 설명을 듣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되고 자연히 동양화 장르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추상이 많아지는 이유는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 떠오르는 것만 말해보면 일단 현실적인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말했듯 육아를 하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만 작업을 할 수 있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도 붓을 놓고 작업실을 나서야 한다. 예전엔 그림을 그리다 망치면 새 작품 하나를 어느 정도 완성할 때까지 작업실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되면 망친 그림을 그냥 버려두고 나서야 한다. 전날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붓을 놓고 나갔는데 다음날 붓의 흔적들을 보니 예뻤다.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또 다른 하루는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놓은 그림들을 펼쳐봤는데 아름다운 하나의 조형물 같았다. 그것을 그리고 구겼던 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들어진 주름들을 간직한 채 스스로 하나의 작품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구체적인 기호가 담긴 템플릿을 만들고, 구체적으로 지시되고 안내되어 통역조차 필요 없는 상황에 매료되었다. 이제는 번지고 비계획적으로 구겨진 결과물이 우연의 순간을 물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템플릿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위에 탁본을 비롯해 그동안 내가 배우고 실험했던 기법들을 더했다. 내가 바탕과 원인을 제공했으나 우연히 생긴 결과물에 내가 노력하고 거들어 필연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삶과 닮았다. 아마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을 하지 않은 상태라면 여전히 매뉴얼을 만들고, 통제하고, 그 흔적들을 자르고 배치했을 텐데 이제는 펼쳐졌을 때 발견되는 주름과 형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되었다. 우연한 풍경 속에서 탐정처럼 발견되는 형태를 찾고, 외곽선을 채색하고, 그 위를 덮어 마치 발굴하듯이 형상을 드러내는 게 균형감 있게 화면과 관계하는 최선이란 생각이다. 이게 제일 큰 변화이고 작품의 외관 그리고 제목은 이런 변화에 기인한다.
[GALLERY2] Artist Interview_이소정 Sojung Lee, https://www.youtube.com/watch?v=xkzR-G8iKw0, 2023년 10월 15일 최종 검색.
[GALLERY2] Artist Interview_이소정 Sojung Lee, 앞의 사이트.
한경희, 「시적 자아의 형성과정으로서 ‘거울단계’ 분석-이상시 <詩第十五號>,<明鏡>,<거울>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제126권, 2000, pp. 423-424. ; 어도선, 「라깡의 “거울단계”이론: 포스트 모더니즘의 몸 철학과 문화비평」, 『비평과 이론』, 제2권, 1997, p. 69.